나무를 사랑한다면

 

아마존과 인도네시아 숲의 나무들이 불타고 있다. 지구의 허파들이 불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지만, 발화의 원인이 자연에 있지 않고 인간에게 있다니, 속상한 마음이 더하다. 고대인들에 비해 상상력이 부족한 현대인들에게 숲에서 불타고 있는 나무들은 그저 나무겠지만, 상상력을 조금만 발휘하면 나무는 그저 나무가 아니다. 고대인들은 나무에 대하여 어떠한 상상력을 가졌을까?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는 아폴로와 다프네의 사랑 이야기가 나온다. 쿠피도(큐피드, 에로스)에게는 여러 종류의 화살이 있다. 쿠피도의 화살은 사랑에 목마르게 만들기도 하지만, 사랑을 지긋지긋하게 만들기도 한다. 쿠피도의 '사랑을 목마르게 하는' 화살에 맞은 아폴로는 쿠피도의 '사랑을 지긋지긋하게 여기게 만드는' 화살에 맞은 다프네를 사랑하게 된다. 서로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쿠피도의 화살을 맞은 아폴로와 다프네의 사랑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아폴로는 다프네에게 사랑을 갈구하며 그녀를 좇지만 다프네는 아폴로의 사랑을 멀리하며 도망친다.

다프네를 향한 아폴로의 사랑은 뜨겁다. 다프네를 바라보는 아폴로의 시선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아폴로의 가슴은, 타작 마당에서 검불을 태우는 불길, 혹은 밤길 가던 나그네가 새벽이 되자 내버린 횃불이 잘 마른 울타리를 태우듯이 그렇게 타올랐다."


둘은 사랑의 경주를 시작한다. ‘사랑을 목마르게 하는화살에 맞은 아폴로는 다프네를 따라잡겠다는 욕심에 가득 찼고, ‘사랑을 지긋지긋하게 여기게 만드는화살을 맞은 다프네는 잡히면 끝장이라는 공포에 전심전력을 다해 도망쳤다. 둘의 어긋난 사랑은 아폴로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다. 큐피도의 날개가 함께 했던 아폴로의 추격이 더 빨랐기 때문이다. 결국, 아폴로는 다프네를 따라잡아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바로 그때, 다프네는 자신의 아버지 페네이오스에게 이렇게 기도한다. "아버지, 저를 도우소서. 강물에 정말 신력이 있으면 기적을 베푸시어 전신의 은혜를 내리소서. 저를 괴롭히는 이 아름다움을 거두어 주소서."


이 기도를 마치자 마자, 다프네의 몸은 나무로 변하기 시작한다. 다프네가 나무로 변신했지만 그 아름다움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무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폴로는 다프네를 여전히 사랑했다. 그는 나무로 변한 다프네에게 키스했다. 아폴로에게 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니라 그토록 갈구하던 사랑, 다프네였다. 나무에는 다프네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그 아름다움은 아폴로로 하여금 나무에게 키스하게 만들었다.


우리에게 이런 상상력이 있다면, 우리는 함부로 나무에 불을 지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왜 나무를 괴롭히는가. 나무에게서 무엇을 빼앗고 싶은 것일까. 나무의 아름다움인가? 그렇다면 나무는 도대체 무엇으로 변신해야 그를 괴롭히는 아름다움을 벗어던질 수 있을까? 나무가 다시 다프네로 변신한다면 그때서야 불지르는 일을 멈출 것인가.


나무를 사랑한다면, 나무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면, 나무 안에 우리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다프네의 숨결이 드리워져 있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결코 나무를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이러한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것 같다.


"아버지, 우리를 도우소서. 숲속에 정말 신력이 있다면 기적을 베푸시어 전심(轉心, 마음을 바꾸는 것)의 은혜를 내리소서. 우리를 괴롭히는 이 추악함을 거두어 주소서. 우리 마음에서 아름다움을 알아보지 못하는 추악함을 걷어내고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순결함을 주소서."


아마존과 인도네시아 숲의 나무들을 태우고 있는 불이 하루 빨리 소멸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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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9. 9. 24. 00:35

사도들처럼 부활을 증언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사도행전 1:12-26

 

주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

사도들과 예수님의 가족들이 가진 용기와 희망을 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모였으며

그곳에서 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증인을 세우고자

맛디아를 선출하여 유다를 대신해 사도로 세웠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미 임했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요,

하나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한 것을 선포하기 위하여

함께 일할 사도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증언에 기댄 우리의 신앙도

그들과 같이 용기와 희망으로 가득 차게 하시고,

우리도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낙심하지 말고 끝날까지 부활의 주님을 전하게 하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9. 24. 00:32

부활과 사도

(사도행전 1:12-26)

 

어떤 사건을 경험하고 나면, 우리는 이런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지?” 그렇다고 동일한 사건 경험이 동일한 행동을 낳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일제 시대를 경험했으면서도 그에 대한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일제에 부역하거나, 무관심 하거나, 또는 일제에 저항하여 독립운동을 하거나.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였겠는가.) 사건의 경험은 그 사람의 본성/본질을 드러내 준다.

 

하나님이 다가오시는 절대적인 경험은 사뭇 다른 반응을 불러온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충격적인 절대 경험을 했다. 그들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경험했고, 무엇보다 부활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의 승천을 경험했다. 이러한 경험들은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경험들이다. 그야말로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그들에게 믿음을 넣어 주시지 않으면 경험을 하고도 경험하지 못한 신비로운 경험들이다.

 

아무튼, 그들은 하나님이 다가오시는 절대적인 경험을 예수의 사건을 통해 경험했고,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결단을 해야 할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믿음은 그들을 아주 특별한 삶으로 이끌었다. 그들이 그러한 삶을 주도적으로 선택했다라고 말하기 보다는, 성령에 이끌려 그러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해 보인다.

 

주체’, ‘자기 생각’, ‘너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는 상황일 수 있다. ‘내가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는 현대인들에게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는 개인권리에 대한 침해 정도로 느껴질 뿐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다가오시는 절대적인 경험은 나와 너사이의 구분을 없앤다. 그 순간이 바로 구원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나와 너의 사이를 구분 짓는 온갖 경계를 허무는 사건이다. 구원의 순간에는 나와 하나님사이의 구분도 허물어진다. 구원은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서 일치하는 순간이다.

 

우리는 살면서 그러한 구원의 순간을 잠깐 잠깐 경험하면서 산다. 바로 사랑의 순간이다. 사랑은 그래서 위대한 거다. 우리의 죄성이 그 사랑을 지속시키지 못해서 그렇지, 사랑을 통해 우리는 잠깐의 구원을 경험한다. 사랑하면 나와 너를 구분 짓는 경계가 허물어지고, 사랑은 나와 너를 하나 되게 한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냥 사랑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영원한 사랑의 하나님 안에 있으면 우리는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을 경험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으로돌아왔다. 본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들의 명단을 열거한다. 그 명단에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와 여자들(여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의 가족들(어머니와 형제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거기에 머물렀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그 자체가 예수의 부활에 대한 행동적 선포이다.

 

탈무드에 따르면, 유대인들의 경우, 어느 도시에서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가 십자가에 처형되었을 때, 그 아내나 남편, 부모는 그 도시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들은 다른 장소로 이주해야 했다. 그들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에게 임한 저주가 그 도시에 머무르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명의 삶 플러스, 20186월호, 30). 신명기 2123절에 이런 말이 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예수님 당시, 십자가 처형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이랬다. 십자가 처형은 일종의 낙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동생들은 다른 도시로 이주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은 너무도 명백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알고 있었던 주변 사람의 시선이 얼마나 따가웠겠는가. 게다가 예수를 십자가 위에서 처형시킨 당국의 당사자들은 얼마나 그들이 불편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과 가족들은 예루살렘을 떠날 수 없었다. 아니, 떠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그들이 유하고 있던 다락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도했다. 이들이 한 곳에 모인 이유, 그리고 그곳에 모여서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한 이유는 부활때문이었다. 부활의 경험은 이렇게 일치된 마음과 행동을 낳는다. 이들 모두 한 성령에 이끌려,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일치)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이루어 한 곳에 모여 기도하며 예배하고, 봉사하는 한 가지 절대적인 이유는 예수의 부활 경험이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이들이 모여서 한 마음으로 기도한 뒤, 행한 행동 또한 매우 특이하다. 이것 또한 예수의 부활에 대한 행동적 선포이다. 그 행동을 촉발한 이는 사도 베드로다. 베드로가 촉발한 행동은 가룟 유다가 배반함으로서 공석이 된 열두 번째 사도의 자리를 채우는 일이었다. 베드로는 그것이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밝힌다. 그는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69:25),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109:8). 이 말씀은 유다의 자리를 대신할 다른 사도가 선출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지 못했으면, 사도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부활이 없었다면, 이들은 그냥 모두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다. 부활 경험이 없는데, 이들에게 십자가에 달려 죽은 한 사내가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뿔뿔이 흩어질 수 없었다. 부활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에겐 부활을 증언할 사도가 필요했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대신할, 열 두 명의 사도 말이다.

 

베드로는 열 두 번째 사도를 선출할 필요성을 말한 뒤, 사도의 조건과 직무를 말한다.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21-22a)여야 한다. 사도는 다른 열 한 명의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해야한다(22b).

 

사도의 직무는 분명하다.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는 자이다. 다른 말로 해서, 사도는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자이다. 그러나, 한 명의 사도를 뽑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 당시에 적어도 500명은 되었기 때문이다(고전 15:6). 그러면 그들 중에 누가 사도의 직무를 수행할 조건을 갖춘 사도가 될 것인가? 그것은 예수님이 열 두 사도(제자)를 부르실 때, 사도 바울을 부르실 때와 똑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26). 수많은 후보 중에 최종 후보로 올라간 이는 두 명이었다. 바사바(Barsabbas)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Justus)라고도 하는 요셉(Joseph)과 맛디아(Matthias). 이들은 제비 뽑는 방식을 통해서 이 둘 중에 맛디아를 열 두번째 사도로 선출한다. 이들이 제비를 뽑았다는 것은 주사위 놀이하듯, 운명, 행운에 사도 선출을 맡겼다는 뜻이 아니라, 사도의 선택이 그리스도/하나님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도의 선택 원리는 자격(qualification)아니라 선택(calling/부르심)이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자격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 선택 때문이다.

 

부활 경험은 하나님이 다가오시는 절대 경험이다. 그러한 절대 경험은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는다. 우리는 그 경험에 압도되어 다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은 예루살렘을 떠날 수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어 무덤에 묻혀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부활을 했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이 세상을 다스리는 주님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흩어질 필요가 없었고, 오히려 부활을 증언하기 위하여 모였으며, 다른 열 한 사도와 더불어 함께 부활을 증언할 열 두 번째 사도가 필요했다. 그들은 주님께 기도했고, 주님의 선택에 맡겼다. 열 두 번째 사도로 뽑힌 맛디아는 주님이 선택한 사도가 되어, 주님의 부활을 증언했다.

 

우리는 지금, 사도의 증언을 듣고, 그 증언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사도의 증언을 듣는다는 것은 그냥 어떤 사람의 증언을 듣는 게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는 것과 같다. 그게 바로 사도에게 주어진 권위이다. 교회는 사도의 증언을 들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사도의 증언을 담고 있는 성경은 그래서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는 것이다.


예수는 부활하셨다. 사도들은 예수의 부활을 증언한다. 우리는 사도의 증언을 듣고,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다. 사도의 증언을 통하여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한다. 그 일치가 구원이다. 예수의 부활과 사도의 증언, 그리고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사도의 증언을 통하여 예수의 부활을 믿는 우리들, 우리들은 하나님께 선택 받은 자들이다. 얼마나 감사한가. 이 부활의 은혜를 땅끝까지, 세상 끝날까지, 사도들과 더불어 증언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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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