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적 사유의 중요성

 

김승섭은 그의 저서 <우리 몸이 세계라면>에서 권력을 통해 어떤 지식이 생산되는지에 대하여 보건지식의 역사를 추적하며, 특별히 여성에 대한 보건지식이 보건역사에서 어떻게 왜곡되어 왔는지를 추적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문제는 매뉴얼과 교과서 역시 누군가의 관점에서 생산된 과거의 지식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지식의 생산 과정에는 과거의 편견과 권력 관계가 스며들어 있습니다"(30).

 

에모리에서 공부할 때, 'Comparative Theology' 수업 시간에 마지막 페이퍼를 쓰면서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신학 대결에서 아타나시우스가 결국 승리한 역사를 거론하며, 그때 생성된 '삼위일체 지식'에 대한 비판을 가한 적이 있다. 그 당시에 생성된 '삼위일체 교리'는 치열한 권력 싸움의 바탕 위에서 아리우스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한 것에 의문을 제기하며 써내려간 페이퍼는 교수님(David S. Pacini)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보건지식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지식도, 내가 몸담고 있는 기독교의 신학지식도 마찬가지다. 신학지식도 생산되는 과정에서 과거(그당시)의 편견(한계)과 권력 관계가 스며들어 있다.

 

그러므로, 신학지식이 생산되는 과정에 스며든 그 시대의 편견과 권력 관계를 파헤쳐 그 지식에 숨은 의도를 파악하고, 그것을 지금의 시대에 정의롭게 재생산(재해석)해 내야 하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신진 신학자들이 해야 할 작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중요한 과제일 뿐 아니라, 사명이다.

 

과거의 지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그대로 재생산해 내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생명)에게 고통을 가한다면, 그것만큼 게으르고 무모하고 악한 일이 없는 것이다.

 

생성된 지식에 대하여 비판적 사유를 하는 작업은 우리가 거기에 무고한 희생을 당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고된 작업이다. 비판적 사유와 해석은 늘 필요하다. 아니, 지식생산과 그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식생산을 해내는 일에 비판적 사유와 해석은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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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9. 9. 2. 02:51

그리스도께서 오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유다서 1:1-25)

 

주님,

주의 형제 유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이는 주께서 오고 계시다는 뜻일 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오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안다면,

유다서에 등장하는 거짓교사들과 같이

분열을 일으키며 성령이 없는 자 같이 살지 아니할 것이요

가인과 발람과 고라와 같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로

살지 아니할 것이요,

무엇보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양

방탕한 삶을 살지 아니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직시하고

믿음 위에 우리 자신을 세우고 성령으로 기도하며

주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게 하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9. 2. 02:49

그리스도께서 오고 계신다

(유다서 1:1-25)

 

유다서의 저자 유다는 예수님의 동생이다. 예수님의 동생 중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 중 한 명이었고, 또다른 동생 유다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초대교회를 지켜온 인물 중 한 명이다. 신약성경(특별히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배척 받으시는 장면을 기록하며 그의 동생들 이름이 거론될 뿐이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으냐”(13:55). 이런 정황을 볼 때, 유다는 예수님의 막내 동생이었던 것 같다. (아닐 수도 있다. 성경은 예수님의 가족에 대하여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1절에서는 두 가지 정황을 엿볼 수 있다. 첫째, 저자 유다가 특별히 야고보의 이름을 거론하는 이유이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일 수 없다. 예수님의 제자 중 가장 먼저 순교한 사람이 야고보이다(12:2). 대신,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서 초대교회의 기둥 중 한 명이었다. 유다가 야고보의 이름을 거론하는 이유는 야고보의 권위에 기대어 말씀을 전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야고보의 권위를 인정했기에 그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 이 서신 또한 그들에게 진중하게 읽혔을 것이다.

 

둘째, 인사를 전하며 이렇게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1b). 이것을 직역하면, “그리스도의 소유로 보존된(완료형 분사)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한 번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은 계속 주님에 의해 거룩함이 보증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과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러한 생각은 기독교 역사에서 계속하여 논쟁이 되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예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구원 받은 사람은 그 이후에 어떠한 죄를 지어도 그 구원을 보장 받느냐, 아니냐, 에 대한 논쟁이다.

 

유다가 이렇게 야고보의 권위에 기대어 교회를 위하여 편지를 쓰는 이유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권면을 주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권면하는 근본적인 이유, 즉 초대교회가 직면한 문제는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때문이었다. 표현이 참 재밌다. 이 사람들은 왜 가만히들어왔을까? 이렇게 표현하는 이유는 그들이 교회에 들어와 조금씩 성도들에게 다가가 인식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애찬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그 말은 이제 그 가만히 들어온 이들이 신뢰를 얻어 그들의 말과 행동에 영향력이 생겼다는 뜻이다. 영향력이 생긴 그들이 어느 순간 잘못된 가르침을 교회 공동체에 퍼뜨렸던 것이다.

 

가만히 들어온 이들의 잘못된 생각은 교회 공동체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위에서 이야기한 구원의 보장과 관련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도 쉽게 빠질 수 있는 오류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그 믿음으로 인하여 단번에 구원을 받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물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있는 것을 확신하면서, 신독(누가 있든 없든 성실하게 그 일을 행하는 것)에 힘쓸 것이다. , 믿음에 합당한 삶(윤리적인 삶)을 살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온 이들은 어느 순간부터 교회 공동체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는데, 그들의 논리는 매우 신앙적인 것 같으면서도 매우 방탕한 것이었다. , 그들은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구호를 외치듯, ‘한 번 구원 받은 사람은 영원히 구원 받은 것이라고 하면서 방탕한 삶을 살아도 괜찮은 양 교회 공동체를 흔들었다. 이렇게 믿음의 도를 엉뚱하게 해석하고 그 믿음의 도를 가지고 교회 공동체를 어지럽히는 무리들을 일컬어 유다는 꿈꾸는 사람들이라고 비판하고(8), 특별히, 그들을 일컬어 본능에 충실한 이성 없는 짐승이라고 말한다.

 

유다는 그들을 구약에 등장하는 몇 명의 인물에 빗대어 폭로한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11). 유대교 전통에서 가인은 불경의 선조, 궤변을 사용하는 악행의 대명사로 묘사된다(필로, 요세푸스의 기록). 발람은 뇌물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려 했다(23:4-5, 13:2). 또한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행음하게 만들었다(2:14). 고라는 다단, 아비람과 함께 당을 짓고 모세와 아론을 대적한 인물이다(16:1-35, 26:9-19, 106:16-18). 유다가 구약에 등장하는 최고의 악당들을 동원해서 가만히 들어온 이들을 폭로하는 이유는 그들이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교회의 권위있는 가르침에 도전하여 교회 공동체를 멸망의 길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유다는 가만히 들어온 자들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16). 다른 말로, 이들은 믿음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나, 사실 이들에게는 믿음의 도가 전혀 없는 이들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것은 초대교회가 직면한 최대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초대교회가 직면한 최대의 문제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재림 지연이었다. 이것은 마치, 성춘향이 직면했던 문제와 같다. 성춘향과 이몽룡이 사랑을 키워가던 중, 남원 부사였던 몽룡의 아버지가 동부승지로 임명되면서 몽룡도 한양으로 떠나게 된다. 이몽룡을 돌아와서 자기와 혼인해 주기만을 기다리던 성춘향은 큰 문제에 봉착한다. 기다리던 이몽룡이 생각처럼 빨리 돌아오지도 않았을 뿐더러, 어느날 이몽룡이 돌아왔는데, 거지꼴을 하고 돌아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춘향은 정절을 지키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새로 부임한 남원부사 변학도의 횡포가 심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의 상황이 마치 성춘향과 같았다. 돌아온다던 그리스도께서는 돌아오지 않으시고, 주변의 핍박은 늘어가는 상황에서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이러한 상황은 기독교의 역사가 2천년이 된 지금 더 심각하다. 우리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으실 것처럼 생각하여, ‘먹고사니즘귀차니즘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마치, 정절을 지키기 포기한 방탕한 성춘향이 된 것은 아닌가.

 

믿음의 도를 굳게 붙들며 살았던 신실한 그리스도의 종 유다는 이렇게 권면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17, 18). 우리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신뢰하는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다음의 말씀을 우리 각자의 마음에, 그리고 우리 교회 공동체의 심장에 새겨야 할 것이다.

 

(함께, 거룩하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읽어보자.) “사랑하는 자들아 /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 성령으로 기도하며 /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20-23).

 

성춘향은 정인 이몽룡이 돌아올 것을 믿었기에 정절을 지킬 수 있었다. 만약, 변학도가 성춘향의 그 거룩한 마음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었다면, 성춘향한테 몹쓸 짓을 저지르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변학도가 암행어사가 언젠가는 와서 자기의 죄를 드러내어 심판할 거라는 것을 마음에 품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감히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변학도는 성춘향의 거룩한 마음도 헤아리지 않았고, 암행어사가 출두하게 될 거라는 엄연한 사실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본능에 충실한 이성 없는 짐승'처럼 행동하며 남원의 선량한 백성 공동체를 괴롭히고 무너뜨렸다.

 

그리스도께서 오고 계신다. 아니, 그리스도는 이미 우리 안에 와 계시다. 이것을 얼마나 현실적으로 깨닫고 그 진리에 붙들려 살아가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우리의 믿음의 도의 질이 달라진다. 우리의 믿음의 도의 질은 우리의 삶의 질을 결정한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받은 구원을 영원히 지키신다. 그러나 이것을 오해하는 사람은 그 구원에 머물지 못하고 그 구원을 오히려 타락시킨다. 그러한 불경한 마음이 들거든, 유다서의 말씀을 굳게 붙들라. 생명의 말씀으로 여러분을 축복한다.

 

여러분을 지켜 넘어지지 않게 하시고 기쁨 가운데 그분의 영광 앞에 흠 없이 서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우리 구주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능력과 권세가 만세 전부터 그리고 지금과 영원토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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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풍경과 이야기2019. 9. 2. 01:17

중학교 추억 소환

ㅡ 아들의 중학교 생활을 응원하며

 

아이들이 개학을 했다. 큰 아이는 7학년, 작은 아이는 5학년이 되었다. 우리가 사는 프리몬트(Fremont, CA) 지역은 7학년부터 중학교(Junior High)이다. 그래서 한국의 학교 제도와 얼추 같다. (하지만 2021, 작은 아이가 중학생이 될 때부터 제도가 바뀌어 6학년부터 중학생이 된다. 이미 다른 지역은 이렇게 하고 있지만, 우리가 사는 지역만 제도가 늦게 바뀌는 거다.)

 

나는 중학생 시절, 서초동에 있는 '영동중학교'를 다녔다. (지금은 학교가 이사하여 우면동에 있다. 그것도 우리 형 교회(벌떼교회)와 담벼락 하나 두고 붙어 있다. 학교가 교회 바로 옆에 있어 여러 편리한 점이 많은 것 같다.) 내가 다닐 때만 해도 영동중학교는 인근 중학교 중 가장 규모가 큰 학교였다. 한 학년에 1천명이 넘었다. 한 학년에 60여명씩 17, 18반이 있었다.

 

인근 지역에서 아이들이 엄청 많이 몰린 탓에 영동중학교에는 전국 1등부터 전국 꼴찌까지 다 있었다. 매우 좋은 학교였지만, 그 당시 우리는 영동중학교를 '똥통 중학교'라고 불렀다. 학교가 나빠서 그런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불렀다. 중학생 때는 ''자를 붙이면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각 중학교 학생들은 자기 학교 외에는 모두 똥통학교라고 부르며 내심 경쟁을 했다. 그랬던 시절을 생각하면, 웃음만 나온다. 아들을 생각하면, 그때가 얼마나 어린 시절이었는지 상상되기 때문이다.

 

큰 아이가 오늘부터 다니는 학교의 이름은 'Thornton Junior High School'이다. 영어 발음은 '똔톤 중학교'이다. 그런데, 이 발음이 영 까다운게 아니다. 발음 연습을 잘 하지 않으면 영락없이 'Thornton' '똥통'으로 발음하게 된다. 나는 큰 아이의 학교 이름을 발음하다가 이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혼자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물론 집사람한테 이야기했다가 썰렁하다고 핀잔만 들었지만 말이다.

 

한국에서 중학교 시절을 보낸 아버지와 미국에서 중학교 시절을 보내고 있는 아들의 공통점은 별로 없다. 그런데, 부모 마음이 그런 것 같다. 어떻게서라도 공동점을 찾아 유대관계를 돈독히 하고자 하는 것이 내리사랑인 것 같다. 마치, 김동인의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의 주인공 M이 보이는 태도와 같다. 어떻게라도 공통점을 찾아보려는 그 절박함 말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중학교 환경은 한국과 미국 사이에 태평양이 있는 것처럼 멀지만, 그래도 아들 학교의 이름 덕분에 그 거리가 개울 하나 사이로 가까워진 기분이다. 나도 영동중학교, '똥통' 중학교를 다녔는데, 아들도 'Thornton', '똥통' 중학교를 다니게 된 것이다. 이 사실 때문에, 본의 아니게 아들 학교에 정이 간다.

 

아들의 중학교 생활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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