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케아-콘스탄티노플 아이러니]

 

동방의 거대도시들(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등)에 대한 로마의 승리로 끝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러니 하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정통'으로 채택한 신학은 "인간이 되신 하나님" 신학이다. 이는 철저하게 인간을 부정하는 신학이다. 성악설이다. 이와는 반대로 니케아-콘스탄티노플에서 정죄된 '아리우스주의' '하나님이 되신 인간' 신학이다. 이는 인간을 매우 긍정하는 신학이다. 성선설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로마교회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승리를 거둠으로 인해 기독교의 정통신학은 '인간이 되신 하나님' , 성악설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전개되는 로마 가톨릭의 행보는 자신들이 채택한 정통신학과는 반대방향으로 간다. 로마 가톨릭의 지배체제는 '보다 나은 인간'인 성직자들에 의한 '보다 못한 인간'인 평신도들을 향한 지배체제이다.

 

내 눈에 이것은 매우 모순적으로 보인다. 인간을 부정적으로 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인간의 성직을 인간에 대한 긍정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부정한 인간이 어떻게 성직을 가질 수 있으며,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과 인간의 중간에 서서 그 둘을 잇는 '대리자'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물론 아우구스티누스와 도나티스트의 논쟁을 통해서 보듯이, 성직이 유지되는 것은 인간의 도덕성 때문이 아니라 성직이 가진 거룩함 자체라는 것을 주장하는 논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인간이 원천적으로 철저히 바깥에서 오는 구원을 필요로 하는 부족한(또는 타락한) 인간이라면, 아무리 성직 자체에 거룩함이 있다 하더라도 인간이 성직을 감당하는 일은 모순적으로 보인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기획했던 것은 '보다 나은 인간과 보다 나은 체제'에 의한 세상의 지배였다. 그렇다면, 로마 가톨릭 교회는 처음부터 인간을 매우 긍정한 '아리우스주의'를 정통 신학으로 채택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인간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 신학을 정통으로 채택해 놓고, 실제 삶에서는 인간을 긍정하는 지배체제를 채택하는 것은 자기 모순처럼 보인다. 이 모순은 설명이 필요하고, 해명이 필요한 신학적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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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과 인간, 그리고 기독론]

 

"사제집단의 방만한 생활방식과 그들의 교양 없음에 대한 인본주의적 비판과 오컴주의에 영향을 받은 개인주의의 결함은 점차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당시의 교회가 내세우던 세계관과 종교관을 버리고 초대 교회의 근본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을 촉발시켰다"

(양대종 논문, <니체 철학에 나타난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에서)

 

알리스터 맥그레스의 <종교개혁사>에서도 그렇고, 종교개혁의 사회적 분위기를 전하는 책이나 논문들은 한결같이 그 당시 종교개혁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혼란을 전하며, 특별히 성직자와 교회의 비뚤어진 세계관과 생활방식를 언급한다.

 

예나 지금이나 성직자들의 '교양 없음'은 인문주의의 폭로로 드러난다. 인문학 공부가 턱없이 부족한 성직자들에게서 '교양 없음'이 드러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신들의 교양 없음을 자신들만 모르는 듯, 인문학 공부를 게을리 하는 성직자가 역사의식도 없고 인간에 대한 예의도 없는 것은 예수님도 못말리는 현상이다.

 

개혁이란 무엇일까? 개혁의 근본에는 '인간'이 놓여 있다. 시스템을 개혁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결국 그 시스템을 만들고 그 시스템을 움직이고 그 시스템에 의해 살아가는 것도 결국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나 지금이나 '종교개혁'은 단순히 종교 시스템의 개혁이라기 보다도 '인간개혁'이라고 말해야 맞는 것 같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위의 인용문에서 중세의 종교개혁 당시 그들이 이루고자 했던 개혁은 '초대 교회의 근본으로 돌아가려는' 운동이었다. 이는 개혁이 과거로의 회귀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말 종교개혁자들은 과거로의 회귀를 희망했던 것일까?

 

한국교회에서 개혁을 외치는 자들에게서도 심심치 않게 들리는 구호는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이다. 멋진 구호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너무 모호하다. 성경에 그려지는 초대 교회는 전혀 이상적인 교회가 아니다. 그 당시의 사회적 맥락은 기독교인들에게 너무 적대적이다. 초대 교회에서 신앙생활 했던 이들에게 그 당시로 다시 돌아가고 싶냐고 물으면, 그때가 그립다고 말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개혁은 과거로의 회귀가 될 수 없다. 개혁은 인간에게 집중되는 운동이되, 과거로의 회귀라기 보다 '진리로의 회귀'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진리로의 회귀라는 것은 과거 지향적이지 않고 미래 지향적이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개혁은 종말론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개혁을 이야기할 때 '예수'라는 인물에 다시 집중할 수밖에 없다. 예수는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종말론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니케아 회의는 예수를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라고 해석했지만, 아리우스는 그와는 달리 '하나님이 되신 인간'이라고 해석했다. 아리우스가 비록 니케아 지지자들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당하긴 했지만, 아리우스주의는 니체를 통해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숨쉬는 예수의 해석으로 남아 있는 것 아닌가 싶다.

 

포스트모던시대를 살고 있는 인간, 과학시대를 살고 있는 인간, 유발 하라리가 주장하듯이 'homo deus(하나님이 되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 속에 사는 인간들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그들에게도 예수는 여전히 '인간이 되신 하나님'인가? 아니면,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이 되신 인간'으로 해석하는 것을 더 선호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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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모든 게 뻥이야]

 

정치 철학자 레오 스트라우스는 참 재밌는 말을 한다. "정치철학의 목표와 의무는 '도시의 생존과 안녕을 위하여 '고상한 거짓말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는 그 임무를 소크라테스가 훌륭히 해냈다고 말하며, 소크라테스가 바로 정치철학을 처음 한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플라톤을 읽으면서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플라톤이 상상한 세계, 그가 말하는 이데아, 진리 같은 것들은 모두 형이상학으로서 그의 머리 속에서 나온 것들이다. 플라톤을 읽으면 읽을수록 느끼는 거지만, 정말 '상상력이 엄청 풍부한 노인네'라는 생각이 든다.

 

수사학이란 그런 것 아니겠는가. 자신이 말하는 바, 그 상상력의 산물을 '사실 또는 진리'인것처럼 믿게 만드는 능력, 그것이 수사학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플라톤은 수사학의 대가가 아닌가 싶다. 그는 자신의 상상력의 산물, 즉 형이상학적 진술(이야기)를 너무도 자신 있게 주장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생각이 어떠한 '현실성'을 갖고 있다고 믿게 만들기 때문이다.

 

철학이든, 신학이든, 형이상학 분야의 사상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모두 그럴싸하다. 믿고 싶어지고, 심지어 멋있다. 그들은 인간존재의 생존과 안녕을 위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와 사랑을 위해서 정말 그럴싸한 거짓말들을 능수능란하게 만들어 낸다.

 

인간에게는 실로 엄청난 능력이 있는 것이다. 거짓말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상상력)과 그 거짓말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이것도 상상력) 말이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 허무적으로 생각해보면, 모두가 뻥인 것이다. 뻥이면 어떠리, 우리의 인생이 기쁘고 즐거우면, 그리고 우리가 서로 평화롭게 지내고 사랑하며 살면,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허무하지 않았다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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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1. 1. 4. 14:48

애가와 물 댄 동산을 간구하는 기도

(예레미야 31:7-14)

 

주여, 곤궁한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예언서의 정신성을 배워 애가를 부르게 하옵소서.

우리도 우리의 삶 가운데 경험하는

여러가지 슬프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들에 대하여,

‘왜’를 묻고, 그 이유를 발견하게 하옵소서.

애가 없이 물 댄 동산의 복을 받으려는

불경한 마음을 내려 놓게 하시고,

처절한 애가의 끝에 오는 주님의 선물인

물 댄 동산의 복을 받게 하옵소서.

애가를 부르는 동안 지치지 않도록

서로가 서로를 돌보게 하옵소서.

물질을 나누고 정서를 나누고 영성을 나누며

서로를 보듬어

애가의 골짜기를 잘 통과하게 하시고,

우리 모두 그 애가의 골짜기를 지나

찬란히 빛나는 물 댄 동산에 들어가게 하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애가의 본을 보여주신,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 4. 14:46

우리 심령이 물 댄 동산 같으려면

(예레미야 31:7-14)

 

어려울 때일수록 잔잔한 기쁨들을 서로 전하는 게 좋다. 공동체란 그런 것 아니겠는가. 기쁨을 함께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함께 나누면 반이 되게 하는, 그런 신비한 일이 발생하게 하는 것이 공동체라고 믿는다. 요즘 시대는 사람들의 관계를 원자화시켜서 서로 나누는 삶을 살지 못하게 만든다. 콩 한쪽도 나눠 먹던 시절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 발생하고 있다. 콩 한쪽을 나눠 먹기보다, 나는 내 콩을 먹고, 너는 니 콩을 먹는 게 좋은 세상이라고 말한다.

 

가뜩이나 고립된 세상을 사는데, 바이러스가 그 고립을 더 심화시켰다. 그러한 고립에 저항해 보려고 사람들이 모임을 갖고 여행도 가는 것 같으나, 그러한 저항은 계속하여 실패로 끝나고 있다. 모이면 모일수록 바이러스가 더 빨리 그리고 더 널리 전파되어, 우리는 더 깊은 고립의 세계로 내몰리는 듯하다. 그나마 온라인을 통해서 고립을 조금이나마 극복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그러나 온라인마저 접속하기 힘든 노인분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요즘 시절이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올 듯싶다. 그러한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좋겠다.

 

나는 괜찮으니까 문제없다생각 말고, 삶을 나누라. 좋은 일 있으면 함께 기뻐할 수 있도록 나누고, 맛 있는 거 있으면 나눠 먹고, 어려운 일 있으면 함께 기도할 수 있도록 삶을 나누라. 사도들은 환란 가운데 있을 때 두 가지에 힘쓰라고 말한다. 하나는 인내이고 다른 하나는 기도이다. 고난 당할 때 우리는 인내하며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그 인내와 기도가 최대한 힘들지 않게 하는 것은 같은 고난 가운데 있는 공동체의 나눔이다.

 

나눔도 크게 세 가지의 나눔이 있다. 물질적인 나눔, 정서적인 나눔, 그리고 영적인 나눔이다. 교회 공동체가 좋은 것은 물질적 나눔과 정서적 나눔에서 더 나아가 영적인 나눔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질적 나눔과 정서적 나눔을 계속, 끊임없이 하면 좋다. 물질적 나눔은 돈도 나누고 음식도 나누고 하면 된다. 참 따뜻한 나눔이다. 정서적 나눔은 정서, 기쁨, 슬픔, 아픔, 생각 등을 나누는 것이다. 요즘엔 이 정서적 나눔이 참 많이 필요한 때다. 정서적 나눔이 있으면, 서로 간에 치유가 발생한다. 슬픔이나 아픔이 있는 사람도 치유되지만, 그것을 들어주는 사람도 치유된다. 서로 신뢰의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너무 자기 자신의 감정(정서 Emotion, 내 마음이 지금 어떠한 상태인지)을 감추지 말라. 우리 한국사람들이 가장 잘 못하는 것 중의 하나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대개 감정을 드러낼 때 그 감정을 속에서 키워 거의 핵폭탄처럼 터뜨리기 때문에 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참다참다 폭발시키니, 그 감정에 안 다칠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하지만, 그때그때,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면 서로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수위이기 때문에, 관계를 다치는 게 아니라, 관계를 더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이다.

 

목회하면서 가장 고마운 분들은 본인의 감정(정서, 본인 마음이 지금 어떠한 상태인지, 본인은 지금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을 그때그때 잘 표현해 주시는 분들이다. 좋으면 좋다, 은혜 되면 은혜 받았다, 또는 서운하면 서운하다, 이런 감정들을 잘 표현해 주시는 분들이 고맙다. 그런 게 인격인 것이다. 우리가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좀 더 인격적인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텐데, 인격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정서)를 정확하게 드러내어 서로 간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것이다.

 

때로는 옳지 못한 일을 했기 때문에 감정을 드러내야 할 때가 있지만, 사실 대부분의 것들은 생각하는 바가 다르고 이해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촌극에 불과하다. 누가 틀리기 때문이 아니라(right and wrong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간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we are different) 감정(정서)이 어긋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경우에는 감정(정서, 생각)을 나누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서로의 생각을 더 잘 알게 되고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법이다. 정서적인 나눔만 잘 되도 우리는 참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 수 있다. 정서적인 나눔만 잘 되도, 어려운 시절을 잘 인내하며 이겨낼 수 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물질적 나눔, 정서적 나눔에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더 나아가, 영적인 나눔을 한다. 그래야만 한다. 영적인 나눔이란 기독교인의 정신성(영성)을 나누는 것이다. ‘영성(spirituality/정신성)’이라는 말이 쉽게 마음에 다가오는 말은 아니다. 그렇다 보니, 영성은 뭔가 고차원적이고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번역의 잘못이다.

 

'Spirituality'를 영성이라고 번역하는 것보다, 차라리 '정신성'이라고 번역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하지 않나. ', 저 친구 정신(spirit)이 살아 있네!' 그런 것처럼, spirituality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정신성을 말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게 좋다. 기독교의 'spirituality', 그래서, 기독교 고유의 정신성을 말하는 것이고, 그 정신성을 내면화시키는 훈련이 '기독교 영성'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정신성은 그 사람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그 사람은 어떠한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며, 어떤 삶을 의미 있는 삶이라 여기는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보는지, 그 사람의 생명성(그 사람의 삶의 가치와 의미)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떠한 사람의 행동이나 말, 또는 그 사람의 작품 등은 모두 그 사람의 '정신성'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물론, 아무 생각없이 행동을 하거나 말을 하고, 또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기교만 살아 있는 작품(행동, )을 내놓는 사람들도 태반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면서 그 일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개 정신성이 깃들지 않는 말이나 행동, 그리고 작품은 가치가 떨어지거나 아예 없다.

 

예레미야서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예언서이다. 이 예언이 바로 영적인 나눔이다. 내가 보기에, 구약성경의 예언서는 모두 애가(Jeremiad)’. 예레미야 애가가 대표적이지만, 사실 구약성경의 예언서는 모두 애가이다. 애가는 영어로 ‘jeremiad’라고 한다. 예레미야 애가에서 비롯된 용어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애가를 생각할 때 슬픈 노래정도로만 생각하고 만다. 예레미야 애가를 보면서 우리는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이 망한 것을 보면서 슬픔에 못 이겨 눈물을 흘리면서 애가를 지어 불렀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애가를 오해하는 것이다.

 

애가(Jeremiad)’는 단순히 슬픈 노래가 아니다. 애가는 히브리어의 어떻게/어찌하여라고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도 일상에서 이런 일을 겪는다. 누군가가 전혀 뜻하지 않게 죽음에 처했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는 그 죽은 사람의 영전 앞에 서서 슬피 울며 이런 질문을 한다. “어떻게 이렇게 허망하게 죽었는가? 어찌하여 이런 일이 발생했는가?” 애가란 바로 이런 것이다. 왜 이러한 일이 발생했는지를 철저하게 물어, 그 이유를 밝히는 것이 애가(Jeremiad)’이다.

 

대한민국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처절한 애가(Jeremiad)가 바로 세월호 사건이다. 세월호 희생자의 부모님들은 지금 애가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본인들의 자식에게 닥친 죽음 앞에서 마냥 슬퍼하고 만 있는 게 아니라, 왜 그러한 일이 벌어졌는지, 그 이유를 물어 철저하게 밝히려고 하는 것, 바로 그 행위가 성경에서 말하는 애가이다. 그래서 나는 그 세월호 유가족이 지금 우리 시대에 그 어느 사람들보다도 신학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시대를 바라보며 애가를 부르는 사람은 모두 신학자이다. 정의와 불의는 그 앞에 놓여 있다. 그들의 애가를 신원하여 주는 지도자(정부)는 정의로운 지도자(정부)일 것이고, 그들의 애가를 외면하는 지도자(정부)는 불의한 지도자(정부)일 것이다. 종국에, 주님께서 그들의 애가를 신원하여 주실 것을 믿는다.

 

우리는 성경의 예언서를 자꾸 오해한다. 미래에 일어날 어떤 일을 미리 말하는 것으로 말이다. 아니다. 예언서는 그런 게 아니다. 모두 애가이다. 지금 현재 이스라라엘 나라에 어떠한 슬픈 일, 고통스러운 일이 발생을 했고, 그러한 일이 왜 발생했는지를 철저하게 물어서 그 이유를 밝히고 있는 것이 예언서이다. 예언서의 내용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언서의 정신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의 삶 가운데 경험하는 여러가지 슬프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들에 대하여, ‘를 묻고, 그 이유를 발견해야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는 희망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나누는 것이 바로 영적인 나눔이다. 이런 게 영성이다.

 

예레미야 31장은 예레미야서의 백미라고 불린다. 그러나, 우리가 예레미야 31장만 뚝 떼어서 잘못 해석하면, 아주 곤혹스러운 일이 발생한다. 예레미야 31장의 언어는 매우 행복한 언어이기 때문에, 이러한 희망을 품기 전에 거쳐야만 하는 신학적 작업을 소홀하게 만들 수 있다. 본문에서 제시되는 세상은 우리 모두가 꿈꾸는 세상이다. 이 구절을 읽는 것만으로도 희망이 샘솟는 듯하다. 특별히 우리가 좋아하는 이 구절,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를 보면, ‘물 댄 동산이라는 구절만 따로 떼서 액자에 걸어 놓고 싶은 심정이 생기는 복된 구절이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은 애가를 처절하게 부른 자들에게만 오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기억해야 한다. 예언서를 보면 하나의 공통된 애가가 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고통에 처해지게 된 이유, 그것을 모든 예언자들은 헤세드에서 찾는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헤세드(언약적 사랑)를 버렸기 때문에 그들에게 그러한 슬픈 일이 닥쳤다고 말한다. 예레미야도 같은 예언(고통을 당하는 이유를 따져 묻기)을 한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헤세드를 떠났기 때문이다.

 

예레미야가 선포하는, ‘물 댄 동산같은, 에덴동산 같은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하나님과의 헤세드(언약적 사랑)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러한 돌이킴 없이 우리의 삶이 물 댄 동산같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도둑이요, 불의요, 욕심일 뿐이다. 우리가 지금 그러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바이러스 백신이 나왔다고, 곧 바이러스가 물러갈 거라고, 바이러스가 물러가고 나면, 우리는 예전의 삶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경제가 다시 살아날 거라고 희망에 부풀어 있지만, 이 얼마나 불경한 희망인가.

 

팬데믹의 고통 가운데 있는 지금 우리가 행해야 할 것은 백신에 대한 희망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리스도인이라면, 적어도,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애가를 불러야 한다. 지금 이렇게 바이러스 때문에 고립된 삶을 살고, 육신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정말 총체적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이 때에, 우리는 애가를 부르고 있는가? ‘를 묻고 있는가? ‘어떻게를 묻고 있는가? ‘어찌하여를 묻고 있는가? 이렇게 고통에 처해지게 된 그 이유를 철저하게 물어서, 그 해답을 찾고자 우리는 애통해 하고 있는가? 그 애통함 없이 그저 위기를 모면하려고 헛된 희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한 애가(Jeremiad) 없이, 바이러스가 물러가고, 경제가 다시 회복된 들,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을 것인가? 경제가 돌아가면, 여전히 우리는 과잉소비를 하게 될 것이고, 그 과잉소비 때문에 지구는 더 병들어 갈 것이고, 우리의 삶의 터전은 점점 더 피폐해져만 갈 텐데, 그리고 또다른 전염병이 올 텐데 말이다.

 

우리의 심령이 물 댄 동산 같으려면, 우리의 삶이 물 댄 동산 같으려면,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애가이다. , 이러한 어려움을 맞닥뜨리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묻고, 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 없다면, 우리에게 과연 물 댄 동산이 올지는 미지수이다. 주님께서는 애가를 통하여 그 이유를 찾고, 그 마음을 돌이킨 자들에게만 물 댄 동산의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때문이다.

 

새해가 밝았지만, 그래서 우리는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팬데믹의 고통 가운데 있다. 그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 그 현실 속에서 우리는 그저 고통스러워만 하고 있으면 안 된다. 우리는 애가를 불러야 한다. ‘어떻게, 어찌하여, 이러한 일이 발생했는지를 철저하게 묻고, 우리가 하나님의 헤세드를 떠난 것은 아닌지, 면밀하게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애가를 부르는 동안, 지치지 않게, 힘들지 않게,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며, 물질적 나눔, 정서적 나눔, 영적인 나눔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맛 있는 거 있으면 나누어 먹으라. 자신의 마음(정서 /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 상태인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을 솔직히 표현하라. 그리고, 어려운 시절에 예레미야가, 또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영적인 나눔을 가지라. 애가를 부르며 왜 이렇게 어려움에 처해지게 됐는지, 그 이유를 조금이라도 알겠거든 서로 나누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방법을 알겠거든 서로 나누라. 그렇게 우리가 물질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정신성(영성)을 나눈다면, 우리는 이 어려움을 잘 이겨낼 것이고, 이 어려움의 끝에 주님이 주시는 물 댄 동산같은 삶을 선물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힘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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