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2021. 12. 31. 05:24

밤의 비

 

밤의 비,

신의 축복인가

밤의 눈물인가

 

어둠을 틈탄다는 것

잠든 사람들의 숨소리와 호흡을 맞춘다는 것

밤에 눈 뜨고 있는 것들의 심장을 때린다는 것

 

빗소리,

땅의 신음인가

공기의 울림인가

 

적막을 부순다는 것

잠든 사람들의 숨소리와 춤춘다는 것

밤에 눈 뜨고 있는 것들의 영혼을 깨운다는 것

 

비와 밤과 소리

엉겨붙은

그러나 결코 섞이지 않는

너와 나와 신처럼

아주 고집 센

짙은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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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詩論)2021. 12. 31. 05:21

[시론] 박경리의 시 ‘문필가’ – 그래야 그게 설교다

 

붓끝에 / 악을 녹이는 독이 있어야 / 그게 참여다

붓끝에 / 청풍을 부르는 소리 있어야 / 그게 참여다

사랑이 있어야 / 눈물이 있어야 / 생명 / 다독거리는 손길 있어야 / 그래야 그게 참여다

 

ㅡ 박경리의 시 ‘문필가’ 전문, 시집 <우리들의 시간>에 수록

 

문학평론가 조연정은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에 대한 평론에서 ‘작가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일상적 소통을 위해서든 심오한 진리의 전달을 위해서든 모든 인간이 점차 기능적으로 완벽한 말만을 추구할 때, 말의 효용성에 무심한 채 그 효용성을 제외한 다른 모든 가능성을 탐색하는데 집중하고 있는 자가 바로 작가이다”(138쪽).

 

일상의 기능어에 익숙해져 있는 현대인들에게 '시 읽기'는 쉽지 않은 과제이다. 기능어를 사용하여 시를 쓰는 사람들의 시는 그나마 읽기 어렵지 않으나, 시는 원래 기능의 언어가 아닌 존재의 언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밥을 먹는다'는 기능어로 읽힐 수 있다. 밥을 먹는 기능적인 상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둠을 먹는다'라는 표현은 존재어이다. 현실에서 어둠을 먹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경험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둠을 먹는다'는 말은 '밥을 먹는다'는 말보다 인간 존재를 더 깊이 드러내 주고 보여준다.

 

'시 읽기'의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시인들은 기능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존재어를 사용한다. 시의 언어는 존재의 언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해하는 게 쉽지 않다. 존재의 언어로 씌어진 시를 이해하기 힘든 이유는 그것이 존재의 언어로 씌어졌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너무도 기능어에만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우리가 일상에서 우리의 '존재'에 대하여 얼마나 무관심하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박경리의 시 ‘문필가’는 작가의 언어는 어떠한 존재를 담아내야 하는지 명료하게 보여준다. ‘악을 녹이는 독’, ‘청풍을 부르는 소리’, ‘사랑과 눈물’, 그리고 ‘생명을 다독거리는 손길’이 붓끝에 묻어나야, 비로소 그것이 작가의 글이고, 작가가 세상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라 말한다. 이러한 작가의 글은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기능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존재의 언어이다.

 

존재의 언어를 사용하는 시를 읽는다는 것은 존재의 낯선 세계로 들어가 존재를 끌어안는 행위와 같다. 낯설기만 한 존재의 언어, 시를 읽고 또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존재의 언어를 통해 자신에게 다가오는 존재를 경험하게 된다. 물론 존재의 언어인 시를 아무리 많이 읽어도 존재의 언어에 익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존재의 언어는 영원히 낯설 수밖에 없다. 이것이 기능어와 존재어의 결정적인 차이다. 기능어는 어느 정도 익히고 나면 낯설지 않지만, 존재어는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세상에서 기능어로 담아내기 가장 어려운 존재는 무엇일까? 당연히, 하나님일 것이다. 하나님은 존재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절대 기능어로 담아낼 수 없다. 존재 그 자체이신 하나님은 존재어로만 겨우 담아낼 수 있을 뿐이다. 존재어로만 겨우 담아낼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설교란 불가능한 일을 하는 것”이라 말한다. 문득 박경리의 시가 이렇게 바뀌어 보인다.

 

말끝에 / 악을 녹이는 독이 있어야 / 그게 설교다

말끝에 / 청풍을 부르는 소리 있어야 / 그게 설교다

사랑이 있어야 / 눈물이 있어야 / 생명 / 다독거리는 손길 있어야 / 그래야 그게 설교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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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21. 12. 30. 07:40

틱틱틱

 

무언가를 중얼거리지 않으면 살 수 없는 한 사내

틱틱틱

이해할 수 없어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혐오와 공포의 눈빛을 그의 등 뒤에 쏟아 놓는다

틱틱틱

휴머니즘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우주에서 가장 마음 아픈 속삭임

엄마 뱃속에서 처음 나왔을 때

이 세상 무엇보다 해맑았을 그의 표정을

무엇이 이토록 망가뜨렸을까

틱틱틱

아무리 중얼거려도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그의 간절한 호소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듣고 계실까

틱틱틱

무수히 쏟아지는 공허한 중얼거림에

사람들은 애써 귀를 닫고

애써 눈을 피하며

그에게 친절을 베푸는 듯 길을 열어주지만

틱틱틱

하나님 보시기에

누가 어여쁜 자인지,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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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1. 12. 30. 07:39

사랑 받기를 간구하는 기도

(눅 2:41-52)

 

주님, 우리에겐 지혜도 중요하고

좋은 친구가 있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이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순종의 도를 또한 배우고 실천하기 원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아셨고

그리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려 순종의 삶을 살았던 예수님처럼

우리의 삶도 그 아름다운 삶의 경지에 오르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었던

궁극적인 이유는

그가 단순히 메시아이기 때문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깊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말게 하시고,

우리도 사랑을 많이 받는 인생을 살게 하시고

사랑을 많이 주는 인생을 살게 하셔서

우리 모두가 사랑 받은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하나님의 창조/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사랑 그 자체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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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2. 30. 07:37

사랑 받은 사람이 십자가도 진다

(누가복음 2:41-52)

 

1. 부모들이 아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가장 선호하는 인물은 ‘솔로몬’이다.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솔로몬’같은 지혜를 얻어 공부를 잘 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사실 솔로몬이 하나님께 간구한 지혜는 공부 잘 하게 해달라는 지혜가 아니라 나라를 잘 통치할 수 있는 지혜였다. 하지만 부모들은 아이들이 ‘지혜’를 얻어 공부를 잘 하게 되고, 그리고 이 험한 세상에서 자기 앞가림 잘 하며 살아가기를 간구한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마음은 이렇게 늘 애잔하다.

 

2. 부모들이 아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두 번째로 선호하는 인물은 ‘다니엘’이 아닌가 싶다. 다니엘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재상의 자리에 올랐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재상에 올랐기 때문에 그처럼 아이들이 재상의 자리에 오르기를 바래서 아이들이 다니엘처럼 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갖는 것은 아니다. 다니엘이 선호되는 이유는 아무래도 친구들 때문일 것이다. 다니엘에게는 세 명의 신실한 친구들이 있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부모들이 아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다니엘을 떠올리는 이유는 아이들에게 다니엘처럼 좋은 친구가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3. 그렇다. 아이들에게 ‘지혜’와 ‘좋은 친구들’이 있다면, 부모의 입장에서 흐뭇할 것이다. 우리의 자녀들이 솔로몬과 같은 지혜를 얻게 되고, 다니엘과 같이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놓치고 있는 이야기가 있는 듯싶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 솔로몬의 이야기도 좋고, 다니엘의 이야기도 손색이 없지만, 예수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정말로 많은 영감을 준다. 솔로몬의 지혜와 다니엘의 친구들을 간구하는 것은 신앙인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예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여다보며 거기에서 영감을 얻는 일은 신앙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4. 예수님이 탄생할 때의 이야기 빼놓고,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오는 곳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누가복음 2장 외에는 없다. 열 두 절로 되어 있는 이 짧은 이야기는 아주 깊은 신학적, 인문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아기 예수의 탄생에서 예수의 역할은 매우 수동적이다. 그러나 이 어린 시절 이야기에서 예수의 역할을 매우 능동적이다. 분위기가 완전히 전환된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은 예수이다. 그는 부모님을 따라 순례의 행위로서, 그리고 신앙의 행위로서 예루살렘을 방문하지만, 그곳에서 행한 일은 매우 독특하다.

 

5. 유대인들은 일 년에 세 번,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율법을 진지하게 지켰던 요셉과 마리아는 마을 사람들과 무리를 이루어 4, 5일 걸렸을 순례의 여정을 떠난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잘 도착했고, 예배도 잘 드렸고, 무리들과 함께 집으로 귀환 중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무리 속에 예수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를 찾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성전 이곳 저곳을 찾아다니다 마침내 예수를 발견한다.

 

6. 그런데, 어머니 마리아와 아들 예수 간의 대화가 참 흥미롭다. ‘선생들(the teachers)’ 사이에 있던 예수를 발견한 어머니 마리아는 이렇게 말한다. “얘야, 왜 우리에게 이렇게 했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걱정하며 찾았는지 모른다”(48절). 당연한 어머니의 반응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한다.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마땅히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 모르셨습니까?”(49절). 열 두 살 먹은 아이가 어머니에게 하는 대답 치고는 매우 당돌하다. 예수는 부모님이 자신을 찾아 다녔다는 것 자체를 의아해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평소 행동을 생각해 보았을 때, 부모님은 자신을 찾으러 돌아다닐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7. 예수는 나사렛에 있을 때도 언제나 회당에 가서 ‘선생들’과 시간을 보낸 듯싶다. 그래서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 제가 어디를 가나 회당에서 선생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이곳에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뭣 하러 저를 찾아 다니셨어요. 그냥 여기로 오셨으면 바로 저를 찾으실 수 있었을 텐데요.” 그렇다. 예수님의 표현대로, 부모들은 괜한 걱정을 한 것이고 엉뚱한 곳을 찾아 헤맨 것이다. 예수의 평소 습관을 생각했더라면, 요셉과 마리아는 다른 데 갈 필요 없이, 걱정할 필요 없이, 선생들이 있는 곳에 갔으면 될 일이었다.

 

8. 우리는 수많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말씀이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첫 말씀이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49절). 영어로는 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한다. “Why were you searching for me? Did you not know that I must be in my Father’s house?(NRSV)”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통찰을 얻게 된다. 예수님은 이미 열 두 살 때 자기 자신에 대한 자의식(self-consciousness)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았고, 또한 자기의 삶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할 줄 알았다.

 

9. 열 두 살 밖에 안 된 어린 예수가 보여주는 이러한 자의식과 신앙은 솔로몬에게 있었던 지혜, 그리고 다니엘에게 있었던 친구들과 더불어 신앙인이라면 반드시 간구해야 하는 삶의 자세이다. 지혜를 간구하고, 좋은 친구들을 간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예수님이 보여주고 있는 자의식을 갖는 것과 신앙의 간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이러한 삶의 경지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부모들이 아이를 신앙인으로 키운다는 것은 단순히 아이들에게 솔로몬과 같은 지혜가 있기를, 그리고 다니엘이 받은 축복처럼 좋은 친구들이 있기를 간구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자의식(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자기 인식)이 생기고, 그 자의식(self-consciousness)을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God’s purpose for one’s life)과 연결시키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다른 말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삶을 생각할 수 있게 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10. 지혜를 얻는 것도 중요하고,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열 두 살 먹는 어린 예수에게서 보듯이 자신의 삶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하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 즉 순종을 배우는 것은 신앙인의 최고 경지이고 삶의 꽃이다. 우리의 인생이, 또한 우리 자녀들의 인생이 지혜를 얻어서 공부를 잘 하게 되고 그래서 유능한 인재가 되고, 또한 좋은 친구들을 만나서 화려한 인맥을 쌓아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서만 멈추고 만다면, 그것이 우리가 신앙을 갖는 것의 목적이라면, 이 얼마나 사사롭고 기복적인 신앙이고 인생인가. 믿는 사람의 인생과 안 믿는 사람의 인생이 무엇이 다른 게 있겠는가.

 

11.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은 우리의 인생을 사사롭고 기복적인 인생에 머무는데 그치게 하지 않고, 우리의 삶을 공적인 영역으로, 무엇보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구원 사역에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이다. 순종은 운명이나 정치적 강압처럼 우리의 인생을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순종은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사랑과 평안에 참여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영원한 생명)은 오직 순종을 통해서만 참여할 수 있다. 그래서 순종은 곧 믿음인 것이다.

 

12. “내가 마땅히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 모르셨습니까? Did you not know I must be in my Father’s house?” 이 말은 한 어린 예수는 그냥 예루살렘 성전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것도 굉장히 중요한 일인데, 보통 사람 같으면 아이를 예루살렘에 머무르게 하고 아이의 명민함을 알아본 선생들에게 맡겨 유학 시켰을 텐데, 어린 예수는 그곳에 머물지 않고, 부모님과 함께 나사렛 시골로 다시 내려온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부모님과 함께 머물며 부모님께 순종하며 지낸다. 순종은 일차적으로 선생들에게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에게서 배워야 하는 것이다.

 

13. 마지막 구절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그리고 예수는 지혜와 키가 점점 더 자라 가며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52절).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이 성장하면서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어로는 이것을 ‘in favor with God and men’이라고 표현한다. ‘favor’는 영어의 다른 단어로 ‘grace’라고 표현한다. 우리가 ‘은혜 또는 은총’을 입는다는 것은 누군가로부터 호의(favor)’를 받는다는 것을 말한다. 살면서 누군가로부터 따스한 마음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로 중요하다.

 

14. 그런데, 예수님은 단순히 사람들로부터만 따스한 마음, 은혜, 호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도 따스한 마음, 은혜, 호의, 사랑을 받았다. 우리 자신의 삶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의 삶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간구할 때, 우리는 지혜와 좋은 친구들에 대한 간구에 더해서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따스한 마음, 은혜, 호의, 사랑받기를 반드시 함께 간구해야 한다.

 

15. 예수님의 삶을 생각할 때 예수님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고 십자가 위에서 기꺼이 자기의 생명을 바쳐 죽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단순히 메시아이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는 어느 날 혜성처럼 나타나서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진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이 아니다. 그는 마리아의 태를 통해서 태어났고, 그는 어린 시절을 겪었으며, 그는 때가 이르러 하나님께 순종하여 십자가에 오르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기꺼이 달릴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바로 그가 살면서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 때문이다.

 

16. 예수님이 살면서 사랑 받지 못했다면,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따스한 마음, 은혜, 호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면, 십자가 위에서 죽어야 했던 그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수포도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한 하나님의 목적은 그 뜻을 이루었다. 바로 어려서부터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랑 받은 사람이 십자가도 진다. 사랑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결국 구원을 낳는다. 우리 더 사랑하고, 우리 더 십자가를 지자.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은 사람으로서 각자 삶에 주어진 십자가를 지자. 각자의 십자가를 잘 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서로 사랑하자.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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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1. 12. 21. 08:36

대림절 네 번째 주일에 드리는 기도
(미가 5:2-5a / 히브리서 10:5-10 / 누가복음 1:39-45 / 누가복음 1:46-55)

 

주님, 우리도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을 때

그것이 설사 우리의 인생을 통째로 바꾸어 놓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새창조의 사역에 동참하고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해 주소서.

또한 그 믿음을 공유한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새창조 사역을 기뻐하고 찬양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성실하게 감당하여

믿음의 경주를 아름답게 마칠 수 있도록 하옵소서.

하나님의 은혜에 순종한 여인

마리아를 통해서 이 땅에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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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재

    Merry Christmas!

    2021.12.26 01:18 [ ADDR : EDIT/ DEL : REPLY ]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2. 21. 08:35

마리아, 아베 마리아!

(미가 5:2-5a / 히브리서 10:5-10 / 누가복음 1:39-45 / 누가복음 1:46-55)


1. 기독교는 크게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있습니다. 원래는 하나였는데, 1054년 ‘필리오케(그리고 아들로부터) 논쟁’을 통해서 둘로 나뉩니다. 그러고 보면 ‘교리(doctrine)’라는 게 참 무섭습니다. 견해의 차이 때문에 사람들은 분열을 경험합니다. 지금도 우리는 ‘교리’라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분열을 경험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같은 주님을 믿으면서도 이렇게 서로 무슨 원수라도 된 것처럼 분열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마음도 아프고, 어찌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2. 가톨릭과 개신교는 대표적인 서방교회의 전통을 지닌 교파입니다. 개신교인들에게 동방교회는 매우 낯설지만 가톨릭은 그렇지 않습니다. 개신교는 가톨릭과 같은 신학적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실 아주 가까운 사이죠. 그런데,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 때문에 때로는 더 심하게 싸우기도 합니다. 한 부모를 둔 형제자매가 남들보다 더 심하게 다투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한 부모를 둔 형제자매가 원수처럼 지내는 것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 것처럼, 같은 신학적 뿌리를 둔 가톨릭과 개신교가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 것도 별로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

3. 개신교(프로테스탄트)는 16세기에 발생한 종교개혁을 통해서 가톨릭으로부터 분리됩니다. 이처럼 개신교는 동방교회로부터 분리된 게 아니라, 서방교회로부터 분리된 교파입니다. 종교개혁을 통해 분리되기 이전에는 한 식구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분리된 이후로 마치 원수처럼 싸웠습니다. 가톨릭 진영과 개신교 진영 간에 참 전쟁도 많이 했습니다. 대표적인 전쟁이 1618년에 발발하여 1648년에 끝난 30년 전쟁이죠. 이 전쟁으로 인해 자그마치 800만명이나 죽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두 진영 간에 좋게 지내는 게 쉽지 않습니다.

4. 그런데, 저는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400년 전에 발생한 전쟁이고, 그것도 유럽에서 발생한 전쟁인데, 우리 한국인들이 그 전쟁 때문에 가톨릭인과 개신교인 사이에 좋지 못하게 지낼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임진왜란은 한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이었기에, 그리고 우리의 조상들이 고통 당했던 전쟁이었기에, 그 전쟁을 통해 일본에 대한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질 수 있으나, 우리가 유럽에서 발생한 400년 전의 전쟁 때문에 서로를 미워할 필요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를 보면, 누구에게서 그 미움이 전가됐는지 모르게, 한국의 가톨릭과 개신교는 별로 사이가 좋지 못합니다. 특별히 개신교인들은 가톨릭을 일컬어 ‘적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을 서슴지 않고 합니다. 참 기이한 현상이죠. 이런 현상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사랑은 잘 전달이 안 되는데, 미움은 참 잘 전달되는구나.’

5. 개신교인으로서 가톨릭을 생각할 때 가톨릭의 어떠한 교리가 마음에 걸리십니까? 아마도 이 질문에 십중팔구는 ‘마리아에 대한 교리’라고 대답하실 겁니다. 개신교인들은 대개 가톨릭이 마리아를 숭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존재를 숭배하는 가톨릭을 이단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가톨릭은 정말로 마리아를 숭배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톨릭이 마리아를 숭배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개신교인들의 오해입니다. 가톨릭은 마리아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숭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개신교에 없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마리아 신학(Mariology)’입니다. 개신교인들이 마리아에 관해 오해하는 이유는 가톨릭의 ‘마리아 신학’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6. 마리아 신학은 결코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마리아 신학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마리아 신학은 기독론(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에 대한 깊이에서 나온 신학입니다. 종교개혁 전까지 개신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서방교회, 즉 가톨릭 교회만 존재했는데, 그때까지 마리아 신학은 사도신경에서 지금도 우리가 고백하고 있듯이, 마리아의 동정녀 신학과 마리아를 일컬어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떼오토코스)’라고 부르는 신학이 존재했습니다. 우리가 마리아를 ‘동정녀’라고 부르고,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를 통해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한 신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마리아를 통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백하기 위해서는 ‘동정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 그리고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죠.

7. 이러한 신학에 근거를 제시하는 본문이 바로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찾아와서 건네는 인사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눅 1:28). 이 구절을 라틴어의 두 자로 줄여서 표현한 것이 바로 ‘아베 마리아(Ave Maria)’입니다. 한국말로 옮기자면, “안녕하세요, 마리아님!”, 또는 “마리아님, 만세!”입니다. 영어로는 “Hail, Maria.”로 옮깁니다. 그러니까 ‘아베 마리아’는 그냥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이미 거기에는 신학적 고백이 들어간 인사인 것이죠. 위에서 말했듯이, 마리아는 그냥 한 여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잉태한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고백입니다.

8.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은 개신교인들도 동일하게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로 고백하는 것도 개신교인들의 신앙(교리)에 포함됩니다. 종교개혁자들도 대개 마리아에 대한 이러한 신앙고백은 좋은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닙니다. 기독론과 관련해서 마리아에 대한 신학을 전개할 뿐, 그 이상 나아가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개신교는 마리아에 대한 예배적 쓰임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마리아를 통해서 중보기도를 하지 않고, 마리아에 대한 찬가를 예배 시간에 부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 가톨릭과 개신교를 구분하는 가장 뚜렷한 차이 중 하나입니다.

9. <아베 마리아>는 굉장히 널리 알려진 음악이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가 있고, 구노의 아베 마리아가 있습니다.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는 제목만 그렇지 실제로는 ‘마리아 찬가’가 아닙니다. 곡의 앞 뒤에 ‘아베 마리아’라는 구절만 나올 뿐 나머지 가사는 모두 월터 스콧(Walter Scott)의 서사시 <호수의 여인>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대중적인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죠. 제목은 <아베 마리아>이지만 실제로는 마리아에 대한 찬가가 아니라 그냥 대중적인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구노의 <아베 마리아>는 구노가 창작한 것이 아니라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에 멜로디를 붙인 것입니다. 그러나, 구노의 아베 마리아는 슈베르트의 것과는 달리 마리아 찬가입니다. 곡에 마리아 찬가 가사가 붙어 있습니다.

10. 우리는 마리아를 이렇게 교리적으로 접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오히려 마리아에게 주목하지 못합니다. 가톨릭은 너무도 발달된 마리아 신학 때문에 ‘여인 마리아’에게 주목하지 못하고, 개신교는 마리아 신학이 너무 없고 오히려 가톨릭의 발달된 마리아 신학에 대하여 반발하느라 ‘여인 마리아’에게 주목하지 못합니다. 안타까운 상황이죠. 그러나 우리가 교리적인 접근을 내려놓고,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이 세상에 존재했던 여인 중에 마리아만큼 드라마틱한 인생을 산 여인도 없을 겁니다.

11. 우리는 마리아에게 교리를 덧 씌워, 평생 동정(The Perpetual Viginity), 하나님의 어머니(The Divine Maternity), 그리고 19세기와 20세기에 덧 붙여진 마리아에 대한 교리 무염시태(The Immaculate Conception / 마리아에게는 원죄가 없다), 그리고 성모승천(The Assumption)을 말하지만, 인간 마리아의 고뇌와 결단에 대해서 쉽게 간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스무 살도 안 되었던 한 소녀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을 때, 그녀가 감당해야만 했던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이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원하는 소망이 이루어지는, 그런 욕망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은 마리아의 경우에서 보듯이 인생 전체가 바뀌는, 새창조의 역사입니다.

12. 요즘으로 말하면 청소년 시기를 보내고 있던 마리아가 하나님의 은혜, 즉 자기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바꾸어 놓는 하나님의 새창조 사역에 동참하고 순종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깜짝 놀랐을 뿐만 아니라, 혼란스러웠고, 불안했고, 초초했고, 근심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모든 것을 감당했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이것은 그녀의 인생이 통째로 바뀌는 순간이고, 인류의 역사가 새롭게 창조되는 순간입니다.

13.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에게 ‘수태고지’를 듣고 엘리사벳에게 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연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마리아가 받은 수태고지를 이해하지 못했을 겁니다. 아마 마리아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에게 발생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에 대해서 털어놓았다면, 아마도 부정한 짓을 저질러 놓고 하나님 핑계 댄다며 곧바로 돌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달랐습니다. 엘리사벳 부부는 이미 앞서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을 맛보았던 이들이라 마리아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둘은 한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합니다.

14. 우리는 이 장면을 보면서, 순종의 의미와 공동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 주셨으면 하는 은혜는 사실 우리의 욕망을 채워주는 은혜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은혜에 대한 우리의 욕심과 편견과 왜곡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욕망을 채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째로 바꾸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새창조 사역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한다는 것은 우리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의 새창조 사역이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도록 우리를 주님께 내어드리는 순종의 행위입니다.

15. 물론 이러한 순종은 세상 사람들이 알아 줄리가 없습니다. 마리아처럼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입어,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는 순종을 한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친놈’ 소리를 듣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러한 순종을 귀하게 여기고 함께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공동체가 필요한 겁니다. 만약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이 없었다면, 마리아는 끝까지 순종하지 못했을 지 모릅니다. 처음에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고 오히려 자신의 순종을 비하하는 말만 듣고, 또 사람들로 하여금 가혹한 핍박만 받고 말았다면, 마리아는 어느 날 언덕에 올라 하나님을 저주하며 자신에게 임한 ‘수태고지’를 파기(요즘 말로 ‘낙태’)했을 지 모릅니다.

16. 그러나, 마리아는 끝까지 순종했습니다. 그녀는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를 낳았고, 그를 길렀으며, 그가 죽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그녀가 그러한 일을 끝까지 해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의 곁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순종의 도를 귀하게 여기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그 길을 걸어간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당신 덕분입니다!” 우리는 서로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17. 마리아, 아베 마리아! 우리는  개신교인들이라 예배 시간에 마리아 찬가를 비록 부르지는 않지만, 그 누구보다도, 마리아의 순종을 기억해야 하고 마리아가 끝까지 순종할 수 있도록 그녀를 보듬어준 공동체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거든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하며, 주님의 새창조 사역에 동참하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하고, 우리의 그러한 순종과 결단을 소중하게 여기며 함께 그 길을 걸어가는 신앙 공동체가 있음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메리 크리스마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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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1. 12. 18. 06:37

대림절 세 번째 주일에 드리는 기도

(이사야 12:2-6, 스바냐 3:14-20, 빌립보서 4:4-7, 누가복음 3:7-17)

 

주님, 우리는 구원을 갈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 자체이심을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우리와 함께 계시며,

이제 곧 오실 것입니다.

구원은 왔고, 와 있으며, 올 것입니다.

구원은 옵니다. 반드시 옵니다

그리니 주여,

우리 모두 기뻐하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기뻐하고 기도하며 구원을 기대하고 선포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이심을

온 세상이 알도록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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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2. 18. 06:35

구원은 온다

(이사야 12:2-6, 스바냐 3:14-20, 빌립보서 4:4-7, 누가복음 3:7-17)

 

1. 빌립보서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바울은 기뻐할 것과 기도할 것에 대하여 말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6절). 우리는 바울의 권면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기뻐해야 할 일이 있어야 기뻐하지. 기뻐할 일이 없는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맞는 생각이기도 하고, 틀린 생각이기도 하다.

 

2. 제임스 스미스가 쓴 <습관이 영성이다>라는 책을 보면, “당신이 사랑하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라는 말을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어떤 사람이 무엇을 욕망하는 지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기뻐하는 이유, 또는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두 욕망의 문제와 관련 있다. 본인이 욕망하던 바로 그것을 손에 넣거나 성취하면 우리는 기뻐하게 되고, 본인이 욕망하던 것에 대하여 좌절을 경험하면 우리는 기뻐하지 않는다.

 

3. 그러니까, 바울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라고 한 것은 우리의 욕망이 하나님을 향해 있다면 우리는 이미 주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에 기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우리의 욕망이 하나님을 향해 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욕망을 두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예배한다면, 그것은 예배가 아니다. 우리는 욕망을 이루기 위해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욕망을 이루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욕망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한다.

 

4.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뻐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표지(sign)이다. 야고보서에 보면 참 좋은 말씀이 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으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약 5:13-15).

 

5. 기뻐하는 것, 그리고 기도하는 것, 이러한 것들은 분명 믿음의 표지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훈련이 필요하다. 기뻐하는 훈련, 그리고 기도하는 훈련. 실 없이 기뻐하는 게 아니다. 소망 없이 기도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기뻐할 수 있고,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임마누엘이라 부른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 아닌가.

 

6. 임마누엘 신앙은 어려운 현실을 맞닥뜨리며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현실을 뛰어넘어 희망을 꿈꿀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우리가 살펴본 이사야의 말씀과 스바냐의 말씀 안에는 ‘구원’이라는 말이 또렷이 새겨져 있다. 그들은 구원을 갈망했고, 구원을 경험했고, 구원을 증언했다. 그들에게 구원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들에게 하나님의 임재는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임마누엘’이라고 불렀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팍팍한 현실이 아니라 그 팍팍한 현실 가운데서 그들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7.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습 3:17, 19). 이러한 문장들은 그냥 상상 속에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깊이 경험한 이들이 온 힘을 다해서 증언하고 있는, 살아 있는 말씀 그 자체다.

 

8. 구약성경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양과 기대는 모두 출애굽 경험에서 비롯된다. 그 거대한 구원의 경험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삶의 작고 큰 일 가운데서 언제나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했다. 여기서 그들이 구원을 ‘기대’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구원은 굉장히 묘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구원은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그 임재하심 자체가 주는 결과가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9. 구원이란 가량 이런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나를 찾을 때는 뭔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 본인들 힘으로 해결이 불가능할 때이다. 그 중에서 나를 가장 열렬히 찾는 때는 본인들이 하는 게임에서 어떤 아이템을 구매하고 싶을 때이다. 그때 우리 아이들은 나를 아주 열렬히 찾는다. 아이들은 내가 자신들 앞에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본인들 앞에 나타나면 좋아한다. 왜냐하면, 내가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곧 문제의 해결이기 때문이다. 나의 임재와 나의 임재를 통한 문제의 해결은 그들에게 ‘구원’이 된다.

 

10. 이것은 이해를 돕기 위한 약간의 비유이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그 차원이 훨씬 깊다. 우리는 흔히 문제의 해결이 구원이라고 생각하지만, 기독교 신앙에서의 구원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임재 자체이다. 문제가 해결이 안 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곳에 계신다면, 그것 자체가 구원이다. 물론, 하나님의 임재는 문제의 해결을 수반한다. 수많은 무리들이 줄지어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기 위해 따른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서 였다.

 

11.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상태로 구원이 임하는 경우도 있다. 바울이 대표적이다. 바울은 어떤 병을 앓고 있었다. 그 병을 고쳐 달라고 바울은 주님께 세 번 기도했다. 아주 간절히, 아주 깊고 높은 경지의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네 은혜가 족하다”였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 자체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강함은 곧 약함에서 나온다는 고백을 한다. 바울은 비록 병 고침을 받지 못했지만, 그 누구보다도 구원의 삶을 살았다. 그의 삶 전체에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12. 구약성경에 면면히 흐리는 구원에 대한 ‘기대’는 세례 요한에게도 이어졌다. 그는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주면서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며 이렇게 예언한다.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눅 3:6). 먹고 살기 정말 힘들었던 시대, 로마의 압제 아래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팍팍한 삶의 현실 속에서 구원을 기대하며 세례 요한에게 나아왔다. 구원을 간구하는 그들이 세례 요한에게 물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이 질문에 대한 세례 요한의 대답이 인상적이다.

 

13.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세례 받으러 나아온 세리들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군인들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그들은 왜 주변에 헐벗은 자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옷을 나누지 않고 두 벌이나 가지고 있었을까? 그들은 왜 굶주리는 자가 있는 것을 보면서도 먹을 것을 나누지 않았을까? 세리들은 왜 부과된 것 외에 더 많은 세금을 부과했을까? 구인들은 왜 사람들에게서 강탈하고 거짓으로 고발하고 받는 급료에 만족하지 못했을까? 이게 참 아이러니컬한 것이지만, 그들은 ‘구원’을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구원은 옷 두 벌 가지고 있는 것, 남들보다 음식을 많이 쟁여 놓는 것이었고, 세금을 더 많이 거두어 부당 이득을 취하는 것이었고, 사람들에게서 강탈하고 거짓으로 고발하여 뒷돈을 챙기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의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14. 하지만, 세례 요한은 그들이 행했던 일들은 ‘구원의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무엇이 구원인지를 올바로 가르쳐 준다. 올바른 구원을 알고 나면 그들은 더 이상 거짓 구원을 행하느라 삶을 낭비하거나 죄를 짓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눅 3:16-17).

 

15. 옷 두 벌을 가지고 있고, 먹을 것을 쟁여 놓고, 부과된 것 외에 더 거두고, 강탈하고 거짓으로 고발하고, 받는 급료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남의 일이 아니다. 이것은 단순히 어떠한 행위를 가리킨다기보다, 우리가 무엇을 구원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그림언어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자기 자신이 표지판이 되어 구원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것을 안다면, 당연히, 너무도 당연히, 우리에게는 두 벌의 옷이 필요 없고, 음식을 쟁여 놓을 필요 없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되고, 부과된 것 외에 더 거둘 필요도 없고, 강탈하거나 거짓으로 고발할 필요도 없고, 가진 것이 부족하다고 불평할 필요도 없어진다. 한마디로, 강퍅하게, 악하게 사는 이유는 구원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16. 우리는 왜 기뻐하고 기도하는가? 우리는 왜 기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데도 기뻐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데도 기도할 수 있는가? 우리의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기뻐하라. 기도하라. 구원은 온다. 반드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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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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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위기와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현대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세기는 19세기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종교에 이르기까지 19세기는 '전환의 시대'였다. 왜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지, 현대 사회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19세기를 연구해야 한다.

 

음악계도 마찬가지다. 음악은 19세기에 드라마틱한 발전을 이룬다. 그리고 그 중심에 베토벤이라는 인물이 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베토벤은 19세기의 모든 음악가들에게 '위기'를 안겨주었다. 베토벤을 모방하거나 넘어서지 않으면 음악 자체를 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베토벤을 넘어서야 하는 과제 때문에 브람스는 마흔 살이 넘도록 교향곡을 쓰지 못할 정도였다. 베토벤 위기는 어김없이 슈베르트에게도 닥쳤다.

 

베토벤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을 당시 슈베르트는 노트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베토벤은 우리의 독일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이고 그의 음악은 비극성과 희극성, 유쾌한 것과 불쾌한 것, 장렬함과 비통함, 신성함과 익살이 결합된 기괴한 것이다."(프란츠 슈베르트, 68쪽)

 

19세기의 쟁쟁한 음악가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베토벤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알아가는 것도 클래식 음악을 이해하는데 큰 즐거움을 준다. 대개는 베토벤을 모방하거나, 또는 베토벤을 능가하는 무엇인가를 '발명'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쓴다. 그런데, 슈베르트의 해결 방식은 꽤나 매력적이다. 그는 베토벤을 근본적으로 탐구한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듯이, 슈베르트는 베토벤을 근본적으로 탐구한다. 그렇게 근본적인 탐구 후에 탄생한 교향곡이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다.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을 들으면 브람스가 베토벤을 극복하려고 얼마나 안간힘을 썼는지 알 수 있다. 다른 말로해서, 브람스 교향곡 1번은 베토벤 교향곡의 철저한 영향 아래에 있다. (그냥 내 느낌이 그렇다. 클래식 평론가들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베토벤 교향곡을 듣다가 브람스 교향곡 1번을 들으면 마치 베토벤이 지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냥 내 느낌이다.) 그러나 브람스 교향곡 2번부터는 브람스의 숨결만 느껴진다. 더이상 그곳에 베토벤의 숨결은 없다.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에는 전혀 베토벤의 숨결이 없다. 매우 독창적이다. 낭만주의 음악 답게 선율도 너무 곱고 아름답다. 호른과 바이올린의 음향이 일품이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곡 자체의 아쉬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악장 밖에 완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만약, 네 개의 악장을 모두 완성했다면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은 베토벤의 교향곡처럼 천상과 지상을 이어주는 메시아적 음악이 되었을 것이다.

 

슈베르트는 음악가 최초로 '작곡으로만 먹고 사는 시대'를 연 사람이다. 그는 공공연히 이런 말을 하고 다녔다. "국가에서 나를 먹여 살려야 한다." 슈베르트는 괴테의 시에 곡을 붙여 독일어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알린 '가곡'의 대명사이다. 가곡 분야에서는 독보적이었지만 기악곡에서는 베토벤이라는 거성을 넘어서야 하는 과제를 안았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과제를 풀기 위해 이 '전업 작곡가'가 시행한 일은 많은 영감을 준다. 위기를 주고 있는 바로 그것을 탐구하는 일, 그것이 위기를 극복하게 하는 열쇠라는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위기 속에 던져지게 되었을까. 이 위기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 위기는 어떻게 해야 극복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우리 시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열쇠는 19세기에 있다고 믿는다. 우리에게는 19세기에 대한 깊은 탐구가 많이 필요하다. 그 탐구의 첫걸음으로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듣는 일을 하는 것을 어떨지. 슈베르트 교향곡의 아름다운 선율이 우리를 위로해 줄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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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1. 12. 7. 09:30

대림절 두 번째 주일에 드리는 기도

ㅡ 메타노이아를 간구하는 기도

(말라기 3:1-4 / 빌립보서 1:3-11 / 누가복음 1:68-79 / 누가복음 3:1-6

 

우리의 간절함을 보듬어 주시는 주님,

요한의 이름에 배어 있는 간절함과 그 간절함에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을 보면서,

우리도 주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하나님,

동시에,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대림절 두 번째 주일을 맞아

우리에게 들려주신 요한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간절함을 배우고

동시에 메타노이아를 배웁니다.

간절함과 메타노이아를 통하여

우리도 요한처럼 겸손한 삶에 대하여 묵상해 봅니다.

우리의 삶이 요한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삶이 된다면

그보다 복되고 영광스러운 삶이 없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주님,

실로 우리의 삶에 방향전환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주님을 향하여 두 손 들고 나아가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를 구원하옵소서.

간절한 우리의 소망에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온 세상이 눈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볼 수 있도록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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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2. 7. 09:26

대림절과 메타노이아

(말라기 3:1-4 / 빌립보서 1:3-11 / 누가복음 1:68-79 / 누가복음 3:1-6)

 

1. 대림절 두 번째 주일에 읽게 되어 있는 성서정과(Lectionary)는 세례 요한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네 개의 복음서는 모두 세례 요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것은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와 관련해서 세례 요한의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네 개의 복음서 중 마태와 누가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비해 세례 요한의 탄생 이야기를 들려주는 곳은 누가복음 뿐이다. 우리는 누가복음이 전해주고 있는 세례 요한의 탄생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

 

2. 아기를 갖고 싶어하는 부부에게 ‘불임’은 예나 지금이나 큰 고통이다. 세례 요한의 부모도 불임으로 고생한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이들은 제사장 가문이었고, 아주 신실한 사람들이었다.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율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눅 1:6). 이들은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고, 그냥 그렇게 늙어갔다. 이들의 이러한 상황은 분명 구약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을 떠올리게 한다.

 

3.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난 이삭이다. 또한 사사기에 등장하는 불세출의 영웅, 마노아의 아들 삼손이 떠오른다. 또 있다. 엘가나와 한나, 그리고 그들의 아들 사무엘이 떠오른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분명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불임 이야기를 통해서 구약의 이삭과 삼손과 사무엘을 호출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이삭과 삼손과 사무엘의 특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해서, 세례 요한은 새 이삭, 새 삼손, 새 사무엘이라는 뜻이다. 세례 요한은 도대체 누구이길래, 누가복음은 이 사람을 이렇게 그리고 있는 것일까?

 

4. 요한은 히브리어 ‘요하난’에서 왔다. 그 뜻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다’이다. 그의 이름은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는데, 요하난에 포함된 ‘하난’은 히브리어 ‘테힌나’와 관련이 있고, 그것은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뜻한다. 경건한 사람 사가랴와 엘리사벳, 특별히 제사장직을 감당하기 위하여 성전 출입을 정기적으로 했던 사가랴는 자식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아마도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자식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아마도,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것처럼, 마노아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것처럼, 엘가나와 한나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것처럼, 자신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아주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5. 이러한 ‘테힌나’,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는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찡하게 만든다.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에 우리의 마음이 찡해지는 이유는 그러한 기도를 드렸던 신앙의 선배들의 삶의 이야기들이 감동적이어서라기 보다는, 여전히 우리의 삶에는 그러한 ‘테힌나’,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가 절실히 요청되기 때문이다.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일은 참 좋은 일이다. ‘간절함’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에게 생명이 있다는 뜻이고, 우리가 생명력 있게 살고 싶어한다는 증거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릴 수 없을 만큼 삶이 버려지고 포기된 상황이다.

 

6. 히브리어 ‘테힌나’는 ‘간구’라는 뜻이다. 이것을 그림언어로 표현하면, ‘항복을 하기 위해 손을 드는 것’이다. 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찬송은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이다. 우리의 인생을 슬프게 하는 것도 이 ‘간절함’이고, 우리의 인생을 기쁘게 하는 것도 이 ‘간절함’이다. 간절함은 우리를 울리기도 하고 웃게도 만든다. 그게 인생 아닌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울지도 않고, 웃지도 않는다면, 그것을 인생이라고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간절함이 우리를 살아가게 만든다.

 

7. 요한’이라고 하는 이름에서 우리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간절함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간절함이 그를 성실하고 신실한 제사장으로 살아가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간절함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 너무 다행이고, 너무 감사하다.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테힌나)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눅 1:13). ‘요한’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간절함이 배어 있는 이름이고, 하나님께서 사가랴의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이름이다. 참 좋은 이름이다.

 

8. 대림절은 이렇게 ‘간절함(테힌나)’의 절기이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지만, 이 절기에 우리는 우리의 삶에 기쁨을 증진시키는 어떠한 일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하는 절기이기도 하다. 대개 그 간절함은 감춰져 있는 경우가 많다. 감춰져 있는 그 간절함을 허물없이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친구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함께 기도하는 사람이 친구인 것이다. (이런 친구가 있기를!) 테힌나,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멈추지 말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믿으라. 대림절기에 ‘요한’의 이야기를 읽는 이유는 이것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간절히 드리는,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기 바란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9. 요한의 출생 소식과 함께 요한에게 쏠렸던 기대감은 실로 대단했을 것이다. 요한은 그야말로 기대주였다. 얼마나 훌륭한 인물이 되려나, 모두의 관심을 독차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전개되는 이야기를 보면, 요한의 삶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진행된다. 제사장의 아들이니, 사람들은 그가 커서 대제사장이 되어 큰 권력의 자리에 오르게 될 것을 기대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오히려 요한은 그 기대와는 반대의 삶을 살게 된다. 그는 광야로 나가 기존 종교와 정치 체제에 비판을 가하며,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한다.

 

10. 요한이 성전 밖에서 ‘죄사함의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 자체가 매우 충격적인 일이다. 기존의 종교 체제에서 죄사함은 성전에서 제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사람들을 요단강으로 불러 모았고, 그곳에서 동물의 피를 쏟고 삶을 태우는 제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요단강의 깨끗한 물로 그들을 씻는 의식을 통해서 그들의 죄를 없애 주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말 대로, “내 뒤에 오시는 이”를 위해서 였다.

 

11. 우리는 요한의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나 자신이 또는 우리의 자녀들이 세례 요한처럼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빛나기 좋아하고, 주목 받기 좋아하고, 세상이 나 중심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 시대에 세례 요한처럼 빛 자체가 아니라 빛을 가리키는 사람으로, 명소가 아니라 명소를 가리키는 표지판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의 이름이 담고 있는 ‘간절함’, ‘테힌나’의 기도,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수긍하면서도, 우리의 기도 자체가 요한처럼 되게 해달라는 기도 드리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12. 우리는 ‘작은 예수’가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릴 줄 알면서, 또는 ‘작은 예수’라는 용어를 좋아하면서도, ‘작은 세례 요한’이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는 드릴 줄 모를 뿐더러, ‘작은 세례 요한’이라는 용어 자체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작은 예수’가 되고 싶은 메시아 병에 걸려 있는지 모르겠다. 예수님처럼 작은 메시아가 되어서 이 세상 어딘가에서 작은 메시아의 역할이라도 감당하며 세상을 구원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우리는 ‘세례 요한’의 이름을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 지워버린다. 우리는 ‘작은 예수’는 될 수는 있어도 ‘작은 세례 요한’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13. 그러나 대림절기는 오히려 우리를 ‘세례 요한의 자리’에 머물게 한다. 다른 말로 해서, 자기 중심적으로 사는 것을 권장하는 세상에서, 삶의 중심을 자기 자신에게서 ‘메타노이아’ 해서 그 중심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어드리는 삶으로 돌아서게 한다. 세례 요한은 자기 자신이 메시아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자기 자신이 ‘작은 메시아’라는 의식 자체가 없다. 세례 요한은 철저하게 “내 뒤에 오시는 이”, 즉 메시아를 가리키는 사람이다. 성경을 통틀어 온 인생을 다 해서 예수 그리스도(메시아)를 가리킨 사람이 요한보다 더 했던 사람이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눅 7:28).

 

14. 대림절기는 무엇보다 요한의 ‘메타노이아’를 묵상하는 절기이다. 우리말로 ‘회개’로 불리는 헬라어 ‘메타노이아’는 히브리어의 ‘니함’ 또는 ‘슈브’를 옮긴 말인데, 그 뜻은 “반대방향으로 돌아선다”는 뜻이다(헬라의 군대가 행진하다 ‘메타노이아!’하면 ‘뒤로 돌아가!’가 된다.). ‘회개’가 ‘죄를 뉘우침’이라는 좁은 의미로 쓰이는 것과는 달리, 메타노이아의 뜻은 방향전환이다. 오시는 주님(메시아)을 만나려면 방향의 재조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삶의 중심이 자기 자신이 되면 거기에는 구원이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대림절은 삶의 중심을 자기 자신에서 메타노이아(돌아서서)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을 본다.

 

15. 우리가 사가랴(와 엘리사벳)처럼 ‘테힌나’의 기도,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며,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테힌나’의 뜻이 ‘항복하기 위해 손을 드는 것’인 것처럼, 우리의 간절한 소망을 주님께서 이루어주시길, 은혜를 베풀어 주시길 바라면서 주님께 항복하기 위하여 손을 드는 것 자체가 ‘메타노이아’이다. 항복하기 위해 손을 드는 행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느 방향을 향해 손을 들었냐이다. 항복해야 할 대상이 내 뒤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바라보지 않고, 그 반대 방향으로 두 손을 들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16. 이 대림절기 동안, 오시는 주님을 오롯이 가리켰던 세례 요한을 묵상해 보기를 바란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것이기에 세례 요한은 자기 자신이 ‘메시아’가 되기를 전혀 바라지 않았고, 사람들이 실로 구원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방향을 전환하게 만들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드렸던 사람이다. 세례 요한은 아주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받을 수 없는 최고의 명예롭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

 

17. 방향을 돌이켜(메타노이아), ‘작은 예수’가 되려 하기 보다, ‘작은 세례 요한’이 되는 삶을 한 번 묵상해 보면 좋겠다. 겸손(케노시스)을 찾아보기 힘든 이 시대에, 진실로 겸손했던 사람과 마주하면 좋겠다. 우리의 삶이 세례 요한처럼 오롯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삶이 되면 좋겠다. 세례 요한과 가까운 삶을 살면 살수록 역설적으로 우리도 그가 들었던 명예로운 축복의 말씀을 동일하게 듣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은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아주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이 세례 요한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삶이었다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우리보다 큰 자가 없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죽은 아무개를 위해 잠시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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