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과 방패의 사회]

 

누가 창이고 누가 방패인지는 불확실하지만, 현재 우리가 맞닥뜨린 사회는 '보수와 진보'의 극한 대립 가운데 있는 '창과 방패'의 사회이다. 미국 차기 대선 주자 중 한 명인 플로리다주의 주지사 디샌티스는 플로리다주 교육위원회를 보수 성향의 위원들로 채우겠다고 공언했다.

 

미국은 '낙태, 동성애, 총기 규제, 불법 이민' 등의 사회적 이슈로 인하여 보수와 진보가 극명하게 나뉘어 거의 전쟁에 가까울 정도로 사회적 갈등이 심각하다. 보수층은 낙태를 반대하고, 동성애를 반대하고, 총기규제를 반대하고, 불법 이민을 반대한다. 진보층은 낙태를 찬성하고, 동성애를 찬성하고, 총기규제를 찬성하고, 불법 이민자들에 대하여 관대하다. 모두 '인권(human right)'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지만, 양쪽의 주장은 '창과 방패'의 수준이다.

 

미국의 연합감리교회(UMC) 교단도 오랜 세월 '동성애 이슈'로 인해 내홍을 겪다 이제 더 이상 그 문제로 교단을 '하나(one church)'로 유지하는 게 어렵게 되어 결국 '보수와 진보' 진영으로 나뉘어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보수진영의 교회와 교인들이 UMC를 탈퇴하여 GMC(Global Methodist Church) 교단을 새로 만들어 나가고 있다.

 

극명하게 대립되는 사회적 이슈를 중심으로 두 개의 진영이 마치 창과 방패처럼 버티고 있는 우리 사회는 점점 숨막히는 사회가 되어가는 듯하다. 한쪽에서는 ‘이 창은 어떤 방패든 뚫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 방패는 어떤 창이든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은 두 가지 심리적 결과를 가져오는 듯하다. 승리를 거머쥐려고 독해지거나, 너무 긴장감이 심하니까 아예 무감각 또는 무기력해지거나. 어느 쪽이든 건강하지 못한 병리적 현상들이다.

 

교회가 창과 방패 사이에 서서 중재를 서고 평화를 일구면 좋겠으나, 교회도 창과 방패의 사회에 편승하여 갈라지고 깨지고 있다. 보수 진영의 교회에서 주장하는 교회의 본질과 진보 진영에서 주장하는 교회의 본질 또한 창과 방패처럼 한치의 양보도 없다. 그래서 결국 서로를 정죄하고, 갈라설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꼴저꼴 다 보기 싫은 교회는 유체이탈 화법을 통한 설교와 목회를 통해, 마치 교회는 우리 사회의 창과 방패의 싸움에 끼면 안 되는 것처럼 무관심한 공동체를 세운다. 오늘날 신앙이 영지주의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더 이상 보편적 가치를 상실한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각자 개별적 가치를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며 보편적 신앙을 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에 도달했다. 각 교회에서 부흥을 이루겠다고 내세우는 각종 구호들이나 프로그램은 시대착오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그저 몇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을 뿐, 우리 사회에서는 이제 더 이상 교회의 가치가 보편적 가치로 작동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창과 방패의 사회, 모든 것이 일촉즉발인 사회, 진퇴양난인 사회, 그래서 숨막히는 사회. 이 사회에서 우리 인간이 가진 어떤 지식이나 실천이 이 긴장감과 양극화와 불화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인간은 그저 전쟁을 할 수 있을 뿐, 평화적으로 창과 방패를 손에서 내려놓고 두 손을 모을 것 같지 않다. 이러한 답답함 때문에 발터 벤야민 같은 정치 철학자는 ‘메시아적 종말론’을 바탕에 깔고 철학하기를 했던 것 같다. 우리 스스로 성취하는 구원은 불가능하므로, 바깥에서 오는 구원을 갈망할 수밖에 없는 절망(또는 희망)에 휩싸여서 말이다.

 

창과 방패의 사회. 아무튼, 이 용어가 바로 우리 사회를 읽어낸 나의 통찰이다. 바라기는, 창을 쥔 자나 방패를 쥔 자나, 조금만 더 휴머니스트가 되면 좋겠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보호하지 않으면 누가 사랑하고 보호하겠는가. 전쟁보다 평화가 더 좋은 것이다. 비난보다 칭찬이 좋은 것이다. 미움보다 사랑이 더 좋은 것이다. 평화를 선택하고 칭찬을 선택하고 사랑을 선택하는 휴머니스트가 더 많아지면 좋겠다. 물론 창과 방패를 굳건하게 쥐고 있는 자들은 이런 말을 하는 내가 순진해보이겠지만.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2. 12. 20. 10:05

사랑으로 미래를 열어가기를 간구하는 기도

(롬 5:1-11)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주님,

우리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사랑으로 품고 계시기에

우리는 그 어떤 환난을 만나더라도 넘어지거나 무너지지 않고

소망을 이루어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희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사랑을 많이 받기 때문입니다.

주님, 우리가 받은 사랑을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주님처럼 우리의 사랑을 아낌없이 나누어주며 살겠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며, 열심히 돈을 버는 이유는

단순히 잘먹고 잘살기 위함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듯, 우리도 우리의 사랑을 아낌없이 나누어주기 위해서임을 고백합니다.

주님,

오직, 사랑으로 나의 미래를 열어가고, 사랑으로 이웃의 미래를 열어주는

복된 인생,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사랑으로 우리의 미래를 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2. 20. 10:02

사랑이 열어주는 미래

(로마서 5:1-11)

 

1. 로마서를 전체적으로 보면, 바울은 과거, 현재, 미래 시점에서 인간은 어떠한 존재인가를 말한다.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같은 세계적 명작을 쓴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형에게 이런 편지를 쓴 적이 있다. “형, 인간과 인생의 의미를 연구하는데 꽤 진척을 보이고 있어. 인간은 신비 그 자체야. 우리는 이 신비를 풀어야 해. 그러기 위해 평생을 보낸다 하더라도 결코 시간을 허비했다고 할 수 없을 거야. 인간이고 싶기 때문에 나는 이 수수께끼에 골몰하고 싶어.”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과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 밝히고 있는, 복음에 근거한 인간론은 매우 중요하다.

 

2. 로마서에서 복음(새로운 소식 / 기쁜 소식)은 3장 21절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듯이,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는데, 그 하나님의 의는 자연이나 율법 같은 것이 아니라, 한 인격(person) 안에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 한 인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사실, 이것 때문에 우리 인간은 ‘인간과 인생’에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만약, 바울이 하나님의 의가 율법에 드러난 것을 다시 확인한다고 했다거나, 하나님의 한 의가 ‘자연’에 나타났다고 말했다면, 우리는 율법과 자연에 더 깊은 관심을 가졌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바울의 복음 선포는 그렇지 않았다. 바울은 한 인격/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한 의가 드러났다고 선포하고 있다.

 

3. 이 복음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한 의가 드러난 그 인격,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가 ‘인격’에 드러났다는 것이다. 인격에 하나님의 의가 드러났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의에 다가서는 방법은 관찰이나 연구, 또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사랑을 통한 교제’ 밖에 없다. 여기서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4. 기독교가 전하는 복음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다른 종교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어마어마한 소식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계속해서 제시하고 있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에 근거해서 이것을 설명하면,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율법에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열심히 지키려 노력했다. 그런데, 율법은 그 자체로 ‘인격’이 아니고 그냥 문자이기 때문에 정현종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사람이 오는 어마어마한 일 같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어마어마한 것을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의가 한 인격에 나타났다고 한다는 것, 즉 하나님 자신이 우리 인간에게 왔다는 것이다. 

 

5. 편지가 왔을 때, 우리는 그 편지를 읽고 그 편지에 말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따르거나 아니면 못 본 척 무시할 수 있다. 그러나 편지가 온 게 아니라, 그냥 그 편지를 쓴 사람이 직접 우리에게 대면하여 왔다고 생각하면, 편지와 왔을 때와는 다른 상황이 연출될 수밖에 없다. 한 인격이 우리에게 오면, 그 중압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존재의 일부가 우리에게 오는 것과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 오는 것은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복음은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 왔다는 선포이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인격과 인격이 대면했을 때의 용어, 즉 관계의 용어가 계속해서 등장한다.

 

6. 본문의 1절 말씀은 전형적인 관계의 용어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5:1). 이전 시간(지난 주)에 말했듯이, ‘믿음’도 관계적인 용어이다. 인격적인 용어이다. 사귐이 있어야 한다. 그냥 그것을 하는 게 아니라, 애정, 사랑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애정 관계, 사랑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주님, 저는 주님을 믿습니다. 저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주님,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이 말뿐인 고백이 아니라 진실한 고백, 진짜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7. 이처럼, 1절에 등장하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할 때의 ‘화평’도 관계적인 용어이다. ‘화평’이란 ‘상대방과 잘 지내는 것’이다. 인격적인 상대와 잘 지내지 못하는 것만큼 인간을 힘들게 하는 것도 없다. 사람과 사람이 잘 지내지 못하는 사회일수록 대체 인격이 늘어난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선진국’들은 풍요를 이루긴 했지만, 인간 관계 측면에서는 삭막해지기 일쑤다. 개인주의가 강해지고, ‘돈’이 모든 것의 매개가 되기 때문에 진실한 우정의 관계를 맺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현재 우리가 사는 사회의 체제에서, 부자가 될수록, 부자 나라가 될수록, 사람들은 외로움이 늘어간다.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대체 인격이 필요한데, 그래서 부자 나라, 사람들이 외로울수록 반려동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이다.

 

8. 그러므로, 하나님의 한 의가 ‘인격’에 나타났다는 것을 복음으로 듣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화평’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구원은 한 마디로, 하나님과 잘 지내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이렇게 구원을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의 교제’를 통해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이들과의 관계가 별로 좋지 못하다고 하는 것은 모순일수밖에 없다. 이는 마치 자신이 ‘반려견을 정말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배고플 때마다 ‘개고기’를 사 먹는 것과 같은, 모순적인 일이다.

 

9. 복음을 믿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구원 받았는가. 그런데 혹시 화평하지 못하고 잘 지내지 못하고 있는 가까운 사람, 이웃이 있는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지금 당장 하나님께 회개하며 자비를 간구하라. ‘인격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한 ‘인격’과 잘 지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구원을 우습게 여기는 행동이다. 하나님과의 화평이 구원인데, 그 화평이 가족들과, 친구들과,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지 않는다면, 하나님과의 화평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즉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며 우리를 위해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헛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 이 시간, 잠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평이 있는 것처럼, 우리와 이웃들(그것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혹시 화평치 못한 사람이 있다면) 사이에도 화평이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자.)

 

10. 로마서 5장에서 가장 이해하기 쉽지 않은 구절은 3~4절의 말씀이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을 인내를, 인내는 연단은,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한 해를 돌아볼 때, 자신에게 닥친 환난이 무엇이었는가. 환난의 경험이 없었다면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환난이 닥쳤을 때, 우리는 즐거워할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은 말한다. 우리는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한다고! 환난이 닥쳤는데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사람은 ‘바보/미친 사람/치매 걸린 사람’ 밖에 없다. (요즘엔 동네에 바보가 돌아다니도록 내버려두지 않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해도 동네에는 바보가 한 명씩은 있었다. 바보가 동네를 돌아다녀도 전혀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 그 사람을 서로 돌봐주고 아껴주었다. 예전에 비하면, 세상이 발전한 것 같으나, 이런 관계적 측면에서 보면, 세상은 오히려 후퇴했다.)

 

11.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환난을 당하지 않을 수 없다. 환난을 일찍 겪은 사람은 철이 좀 일찍 들고, 환난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철이 좀 없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인 한, 우리는 살아가면서 환난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다. 환난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도둑처럼 우리에게 임한다. (화살을 맞은 사람 중에 가장 미련한 사람은 누구인가. 화살에 맞으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화살을 빨리 빼고 치료 받는 것이다. 그런데, 미련한 사람은 ‘누가 나한테 화살을 쐈어’라고 하면서 분노와 원한만 키우는 사람이다. 그것은 나중에, 치료받고 완쾌된 이후에 차근히 생각해 보아도 괜찮다.)

 

12. 바울이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복음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화평하기 때문에, 즉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이 받았고, 받고 있고, 받을 것을 알기 때문에 환난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렇다. 환난 중에서도 그 환난 때문에 인생이 무너지거나 실패하지 않고, 바울이 말하고 있듯이, 오히려 그 환난 속에서 인내를 키우고, 연단을 받고, 소망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랑을 충만이 받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충만이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이 환난을 이긴다. 죄 가운데 있던 비참한 인간의 미래를 열어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바울은 그래서 인간은 과거에 하나님 없이 사는 불의한 존재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 덕분에 우리의 미래가 아름답게 열렸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6,8).

 

13. 우리는 바울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지금 우리 인간을 정죄하고 있는 게 아니다. “너는 죄인이야. 너는 원래 죄인이야!” 바울이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이지, 인간이 얼마나 가망 없는 존재인지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확증되었다. 드러났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우리가 상대방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때는 좋을 때가 아니라 어렵고 힘들 때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알게 된 것은 바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즉 우리 인간의 처지가 별로 좋지 않았을 때에,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14. 그래서,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 있다. 즉 미친 사람처럼 환난을 당했는데도 싱글벙글한다는 뜻이 아니라, 환난을 당했어도 그것 때문에 무너지거나 넘어지거나, 그래서 인생을 망치고 허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환난을 이겨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언제 닥칠 지 모르는 인생의 환난을 대비하는 길은 단 하나이다. 충만이 사랑받고, 사랑하는 것이다. (공부 잘 하는 사람이 환난을 극복하는 게 아니라, 사랑 많이 받는 사람이,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환난을 극복한다.) 위에서 본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에서 보았듯이, 사람을 ‘환대’할 줄 알고, 사람에게 ‘환대’받는 사람이 환난을 이겨내고 소망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15. 우리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과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물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자신의 모든 소설에서 이 질문을 하고, 그 해답을 찾고 있다. 정현종 시인도 ‘방문객’이라는 시를 통해서 동일한 것을 묻고,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다. 소중한 로마서에서 바울은 말한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모두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 우리의 과거가 어떠했든, 우리의 현재가 어떠하든, 상관없다.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언제나 밝다. 하나님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 우리의 미래를 열어주신다. 그래서 그것을 믿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할 삶은 너무도 자명하다. 사랑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열어가라(많이 사랑받겠습니다!). 또한, 사랑으로 이웃의 미래를 열어주라(많이 사랑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이 환대가 넘치는 사랑의 삶이기를!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2. 20. 09:58

행위에서 믿음으로

(로마서 3:27-31)

 

1. 브라질이 우리에게 승리하며 골 세러머니를 얄밉게 한 것 때문에 구설수에 올랐는데, 크로아티아에게 패한 뒤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호날두가 선발 출장을 하지 못하고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도 애처로웠고, 모로코에게 패한 뒤 선수들과의 교류도 없이 눈물을 흘리며 라커룸으로 향하는 모습도 애처로웠다.축구에서 발생하는 것처럼 인생은 알 수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겸손이 최고의 덕목인 듯싶다.

 

2. 한국 축구 대표팀 감독인 밴투의 업적은 ‘빌드업’ 축구를 대표팀에 안착시켰다는 것이다. 빌드업 축구란 공격적인 축구(골을 넣기 위한 축구)를 위해서 수비수부터 짧은 패스를 통해 차근차근 기회를 만들어가는 축구를 말한다. 요즘 축구의 트랜드이다. 더 이상 ‘뻥 축구’하는 나라는 없다.

 

3. 지난 주, E. P. Sanders 이야기를 조금 했는데, 반응이 뜨거웠다. 그 중에서 지난 주 설교를 듣고 예배당을 나서며 000 형제는 나게에 “목사님, ‘빌드업 설교’ 잘 들었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냈다. 내 설교를 잘 표현해 준 것 같다. 건전하고 건강한 신앙, 그리고 더 깊은 신앙을 위해서 기초부터 다시 쌓고, 최신의 학문적 업적들을 반영한 신앙의 형성을 위해서 우리가 함께 공부하고 기도하고 격려해야 할 것들이 정말 많다. ‘뻥 축구’를 통해서 더 이상 세계 무대에서 축구를 할 수 없듯이, ‘뻥 신앙’을 통해서 더 이상 이 복잡한 세계에서 기독교 신앙을 지켜나갈 수 없다.

 

4. 언약적 율법주의 (Covenantal Nomism), 이것은 과학계로 따지면 아인슈타인 같은 위치를 지닌, E. P. 샌더스 교수가 밝혀낸 사실이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이 용어에 모두 들어 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킨 이유는 구원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가 오해하는 것처럼, 유대교도 행위구원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구원의 이니셔티브, 주도권은 언제나 하나님에게 있다. 얼마나 다행인가. 구원의 이니셔티브가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 중 그 누구도 구원 받을 사람이 없다.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죄 아래 있기 때문이다.

 

5. 로마서 3장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21절이다. “이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 – 이게 복음이다. 바울 신학의 중심 (바울이 증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바울은 지독한 예수 중심주의자이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이다.

 

6. 로마서에서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유대인은 율법에 집중했다. 거기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율법은 말이고 문자이다. 이방인은 율법을 잘 모르고, 별로 상관도 없다. (미국인들이 축구를 잘 모르고 별로 감흥도 없는 것과 똑같다. 이들은 미식축구나 농구, 야구를 잘 알고 거기에 열광하지 않나.)

 

7. 바울의 증언은 기독교의 독특성을 잘 보여준다. 하나님의 의가 한 인격에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 인격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삼위일체 신학은 여기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인격에 대한 연구다. 이것은 일종의 신앙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의가 율법이라는 문자에 나타나는 것을 넘어서 이제 예수라는 ‘한 인격’에 드러난 것이다. 실리콘 밸리적으로 설명하면, 예전에 컴퓨터가 처음 나왔을 때 ‘Dos’라는 것을 배워서, 컴퓨터를 작동하려면, 문자를 손으로 일일이 쳐서 넣었어야 했다. 그런데, 마이크로소트프사에서 혁신을 이루었다. 윈도우를 개발한 것이다. 손으로 문자를 일일이 쳐서 넣지 않아도 되고, 이제는 그냥 마우스로 클릭을 하면 모든 소프트웨어를 움직일 수 있다.

 

8. 하나님의 의가 율법을 넘어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적) 인격에 나타났다는 것은 28절의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의롭다는 ‘옳은 행동을 한다’의 의미가 아니다. 의롭다는 ‘하나님과 좋은 관계가 되었다’를 뜻한다.

 

9. 이것을 자녀와 부모의 관계로 설명하면 이런 것이다. 자녀와 좋은 관계를 지닌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녀가 시험 성적을 잘 받아오면 자녀와 좋은 관계인가? 최근에 우리 아들이 PSAT 시험을 쳤는데, 정말 ‘우스운 성적(Not 우수한)’을 받아왔다. 우스운 성적을 받아온 우리 아들은 의롭지 못한가? 죽일 놈인가? (의롭다: 성적을 잘 받아온다.) VS (의롭다: 아버지(엄마)를 사랑한다.) 아니다. 여전히 우리 아들은 사랑스럽다. 우스운 성적을 받아온 것과 상관없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아들이다. 아버지 집에 들어오면, 꼭 나와서 나랑 허그하고, 잠 자기 전에 꼭 나한테 와서 허그하고 가서 잔다. 얼마나 예쁜가? 이런 것을 의롭다고 말하는 것이다.

 

10. 율법이냐 복음이냐? 우리가 매일 논쟁적으로 대하는 용어들이다. 우리가 오해한 것은, 유대인들은 구원을 율법의 행위로 받는다는 것이고, 기독교인들은 복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도식을 형성한 것이다. 그러면서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구원은 행위냐, 믿음이냐의 논쟁이 심하다. 그런데, 이게 정말 헷갈리는 것이고, 우리가 접근을 완전 잘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11. 우리는 이 논쟁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서를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행위의 법은 협박으로 명령되고, 믿음의 법은 신뢰로 요청된다.” 행위의 법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가 명하는 것을 하라’고 말씀하시고, 믿음의 법에서는 인간이 하나님께 ‘당신이 명령하실 것을 제게 주십시오.’하고 말한다.

 

12.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문자’가 아니라 ‘인격’에 나타났다는 것의 의미를 깊이 돌아보아야 한다. 문자랑 사귀는 사람은 없다. 문자는 그냥 그 문자대로 시행하기만 하면 된다. 설교시간이니까, 이런 예를 들어보자. 문자로 이렇게 써 있다고 생각해 보라. “졸지 말고 딴 생각하지 말고 설교를 열심히 들으세요!” 이것을 문자로 이해하면, 그냥 졸지 않고, 딴 생각하지 않고, 자세를 바르게 하고 설교를 열심히 들으면 된다. 아니, 그냥 그런 척해도 된다. 그러면 그것은 문자를 잘 실행한 것이다.

 

13. 그러나, 인격을 향해서는 그렇게 문자적으로 실행할 수 없다. 인격은 ‘사귐’이 있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용어로 설명하자면, ‘Affection(애정)’이 있어야 한다. 행위와 믿음의 차이는 무엇인가? ‘애정’이다. 위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다. 행위의 법은 협박으로 명령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가 명하는 것을 하라!’인 반면에, 믿음의 법은 신뢰로 요청된다. 인간이 하나님께 ‘당신이 명령하실 것을 제게 주십시오.’라는 것이다.

 

14. 그러므로 우리는 행위라는 용어와 믿음이라는 용어의 차이를 잘 살펴야 한다. 행위라는 용어는 마치 컴퓨터 실행 용어 같다. 애정이 없다. 그냥 그것을 하면 된다.

믿음이라는 용어는 인격적인 용어이다. 사귐이 있어야 한다. 그냥 그것을 하는 게 아니라, 애정, 사랑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17. 행위에서 믿음으로!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애정(affection), 즉 사랑의 문제이다. 부모와 자식 간의 구원은 뭔가? 애가 공부를 잘 하고, 부모가 뒷바라지를 잘 할 수 있는 만큼 경제력이 있는 건가? 애가 공부 잘하고, 부모가 경제력이 있으면 뭐하나? 이건 행위다. 이건 구원이 아니다. 이들에게 구원은 애정이다. 부부 간에도 마찬가지, 친구 간에도 마찬가지, 우리 교회 식구들 간에도 마찬가지다. 무슨 일이든 마찬가지다. 애정이 없는 것, 사랑이 없는 일을 하는 것만큼 우리를 괴롭히는 게 어디 있나.

 

18.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믿음은 ‘내가 하나님을 애정(사랑)합니다’는 말을 두 낱말로 줄인 것이다. 이것으로 설명이 부족하다. 믿음은 ‘내가 하나님을 애정(사랑)합니다’라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인격을 형성한, 실제의 삶을 말한다. 난 너무 하나님이 좋아! 그러면, 좋아하는 사람의 행동은 그냥 보기만 해도 다르지 않나? 좋아하는 사람에게 하는 행동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하는 행동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주님, 사랑합니다.

이게 저희 믿음의 전부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듯,

우리도 주님을 뜨겁게 사랑합니다.

행위에서 믿음으로!

문자에서 인격으로!

모든 것에 애정을!

주님, 우리의 삶이 사랑으로 가득하게 하옵소서.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후교회로 가는 길]

 

6. 기후변화와 예배의 변화

 

인간을 정의하는 용어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입니다. 합리적 근대 사상을 열었던 데카르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인간 종(species)을 생각할 때, 다른 생물 종에 비해 인간의 두드러진 특징 중 가장 먼저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이성(reason)’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성의 능력)’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 덕분에 인간은 다른 생물 종 위에 군림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생각의 능력(이성의 능력)’은 참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놀라운 능력이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면, 인간은 그 능력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이기 때문에 다른 생물 종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것을 누리고 살지만, 바로 그 능력이 자신의 생명뿐 아니라 다른 종들의 생명까지도 위협하고 있다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다시 정립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인간을 정의하는 용어 중 오늘날 회복되고 강조되어야 할 것은 ‘호모 리투르기쿠스’(Homo Liturgicus)입니다.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는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일차적으로 우리는 합리적 인간(homo rationale)이나 도구적 인간(homo faber), 경제적 인간(home economicus)이 아니다. 심지어 흔히 말하는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도 아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예배하는 인간(homo liturgicus)이다”(제임스 스미스, 57쪽). 제임스 스미스가 ‘예배하는 인간’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성의 독주로 인하여 망가진 세상을 회복하기 위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을 우리 시대에 복원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의 열망이 가득한 세상을 꿈꿨던 위대한 그리스도교의 교부입니다. 자신의 책 『고백록』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가감없이 고백합니다. “당신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을 찬양하고 즐기게 하십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ad te)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in te) 안식할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선한용, 45쪽). 이 구절을 쉬운 말로 옮기면 이런 뜻이다. ‘하나님, 우리는 당신을 마음껏 사랑하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인류를 ‘예배하는 인간(homo litrugicus)’로 명명하는 것이죠. 사랑은 상대방을 숭배하는 일, 곧 예배하는 일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겁니다. 사랑 빠지면 인간은 말과 행동이 바뀝니다. 사랑의 대상을 향한 숭배의 말과 행동이 넘칩니다. 상대방을 향한 나의 언어와 행동이 숭배로 넘친다면, 그것은 사랑에 빠졌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은 곧 예배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곧 예배하는 일과 동일합니다. 신앙인이 예배를 열심히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사랑의 행위, 그 이상의 것도, 그 이하의 것도 아닙니다.

 

『기후교회』에서 짐 안탈은 기후위기를 맞아 교회의 예배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도전을 주고 상상력을 제공합니다. 그의 도전 중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현재 우리의 예배가 너무 인간중심적이라는 비판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온통 ‘인간’의 구원에만 집중되어 왔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 중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존재는 마치 ‘인간’ 외에는 없는 양, 우리는 다른 모든 피조물이 제외된, 오직 인간만이 참여하는 예배를 드려왔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비판하기 위해서 짐 안탈은 윤리학자 윌리스 젠킨스(Willis Jenkins)를 인용합니다. “생물학적인 것들이 사라지는 가운데서, 다른 피조물들이 없는 예배드리기는 예배 회중들로 하여금 피조물들을 소멸시키는 힘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든다”(짐 안탈, 207쪽).

 

인간중심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한 예배는 오직 인간만이 예배에 참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모르지만, 이 세상 모든 만물이 인간과 똑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예배 드리기’는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후위기를 맞아 ‘예배하는 인간’에게는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선 상상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배 시간에 인간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키우는 반려동물이나 반려식물 등과 함께 예배 드리는 것을 한 번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를 인간에게만 분여할 것이 아니라, 반려동물에게도 분여하는 일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창조되었고,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도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만이 아닌 모든 피조물들이 참여하는 예배를 상상한다는 것은 인간이 기후변화에 끼치고 있는 해악들을 반성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기후위기를 초래한 인간의 행동을 변화시키려는 의지에 대한 반영입니다. 예배의 변화가 중요한 이유는 역사적으로도 증명된 일입니다. 일례로, 1960년대 초반, 미국에서 흑인 인권운동이 한창 일 때, 미국 남부에 있는 흑인교회들은 그들의 예배를 흑인 인권에 초점을 맞추어 구상했습니다. 그 결과 흑인 인권 운동은 성공을 거두었고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행위를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하는 데 이바지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힘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무슨 경험이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역사의 요청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예배를 구성하게 될 때, 현재 우리의 예배는 기후위기의 경험이 예배의 중심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죠.

 

기후위기를 맞아 『기후교회』에서 제시되고 있는 혁신적인 예배 중 우리가 어렵지 않게 실천해 볼만한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기후 부흥집회(Climate Revival)’입니다. 우리는 대개 ‘성령 부흥집회’나 ‘말씀 부흥집회’에 익숙하지만, 성령이나 말씀이 기후위기를 무시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기후위기를 겪는 우리 시대에 성령과 말씀은 기후위기에 대하여 우리에게 하실 이야기가 더 많으실 겁니다. 기후위기에 맞서는 것이 우리 시대에 긴급히 요청되는 사명인만큼, 교회들이 연합하여 ‘기후 부흥집회’를 열어 기후위기를 초래한 우리들의 죄악을 회개하고 생명의 지속적인 번영을 위하여 하나님의 은총과 지혜를 간구하는 일은 굉장히 고무적인 일인 듯합니다.

 

『기후교회』에서 제시되고 있는 혁신적인 예배의 다른 하나는 ‘길 위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우리는 교회 공간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에 익숙합니다. 다른 말로 ‘시민불복종예배’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예배는 예배 의식을 현장으로 끌고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의식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길 위에서 드리는 예배’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를 초래하는 건설현장이나, 사회정의를 해치는 일이 진행되는 곳, 또는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고 있는 곳으로 직접 발걸음을 옮겨, 바로 그곳에서 현장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주일에는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만, 토요일이나 공휴일에 자연이나 인간에 대하여 불의가 행해지는 현장에 가서 예배 드리는 일을 교회가 적극적으로 실행한다면, 지금처럼 교회가 사람들에게 외면당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풍경이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탄생하셨을 때에 선포된 이 말씀이 실현되는 것이겠죠.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우리는 예배하는 인간(homo liturgicus)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배하는 인간으로 불립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사랑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의 예배는 너무 인간중심적인 예배에만 머물렀습니다. 마치 하나님은 인간만 창조하시고 나머지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닌 듯,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는 데만 몰두하고 나머지 피조물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며 착취하고 파괴해 왔습니다. 그 결과, 인간이 경험하는 현실은 ‘기후위기’입니다. 이는 사랑의 실패요 예배의 실패입니다. 예배하는 인간으로서 우리 다시,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게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모든 피조물들이 참여하는 예배를 상상하며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사랑’에 있는 듯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2. 12. 6. 06:55

마음을 열어 소통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롬 3:9-31)

 

주님,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소서.

우리의 뇌가 우리를 붙잡아 두어 뒤처지지 않도록

우리의 뇌를 열어 주소서.

새롭게 발견되고 있는 신앙의 신비들에 마음을 열게 하소서.

세상적인 것, 물질적인 것에서는 최신을 추구하면서

신앙적인 것에서는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려는

저희들의 게으름과 무지를 꾸짖어 주시고 용서하옵소서.

생명은 소통인 것을 기억하게 하시고,

자신의 신념, 자신의 뇌에 갇혀

메마르게 죽어가지 말게 하시고,

오직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소통하는 일에 열심을 내게 하옵소서.

우리와 소통하시기 위하여,

그래서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가 달리진 주님,

우리가 가진 신앙이 우리와 이웃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데

쓰이게 하옵소서.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인 십자가 위에 죽으셔서

모든 통념을 뒤집어 엎으며 우리들에게 참된 생명을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2. 6. 06:52

당신의 뇌가 가장 큰 적()이다

(로마서 3:9-31)

 

1. 국민일보에 신앙상담 코너가 있다. 상담자는 은퇴한 원로 목사인데, 이름만 대면 알 정도로 유명한 분이다. 어느 날 실린 상담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교회 시무장로입니다. 아들과 결혼하게 될 며느릿감이 천주교인입니다. 며느릿감이 천주교인인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2022년 11월 27일) 45명이 반응 이모티콘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 35명이 화난 표정의 반응 이모티콘을 남겼다. 어떻게 상담했을 것 같은가?

 

2. 신문 지면 상의 제약이 있기 때문에 상담 내용이 길지는 않다. 그 중에서 핵심적인 상담 내용을 보면 이렇다. “물론 천주교인 가운데 개인적으로 구원의 확신이나 성령의 은사를 체험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원리를 떠나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따르는 한 구원에 이르는 것은 어렵습니다.” 한 마디로, 천주교는 행위 구원을 말하기 때문에 행위 구원을 말하는 천주교인과 결혼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주장이자, 천주교는 행위 구원을 말하고 있다는, 전형적인 한국 (보수) 개신교의 생각이 담긴 상담이다.

 

3. 1970, 80년대, 한국에서 분유가 불티나게 팔리던 때가 있었다. 남양유업은 그때 성장한 기업이다. 1970년대, 80년대 생 치고 남양 분유를 안 먹고 자란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때 우량아 선발대회를 통해서 우량아로 선정된 아기들도 많다. 물론 그 우량아들은 모두 분유를 먹고 그렇게 되었다는 광고 전략 중 하나였다. 그때에 과학적 상식은 분유를 먹여 키우면 엄마 젖을 먹여 키우는 것보다 아이가 건강하고 우람하게 자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아이의 부모들은 젖 대신 분유를 먹였다.

 

4.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과학 상식이 바뀌었다. 업데이트 되었다. 분유를 먹여 키우는 것보다, 엄마 젖을 먹이는 것이 아이의 건강이나 정서에 더 좋다는 것이 상식이다. 게다가 요즘에는 소를 키울 때 항생제를 엄청 맞히기 때문에 부모들이 분유 먹이는 것을 꺼려한다. 엄마에게서 젖이 안 나오는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분유를 먹여야겠지만, 엄마 젖이 나오는 이상 엄마 젖을 1년 동안 먹이다, 그 이후에는 이유식을 먹이는 방식을 택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이들의 건강과 정서에 더 좋다는 과학적 지식의 업데이트가 있기 때문이다.

 

5. 과학상식만 바뀌는 게 아니다. 신학상식, 또는 신앙상식도 바뀐다. 문제는 과학상식은 계속해서 업데이트 되는데, 교회에서 통용되는 신앙상식은 업데이트가 매우 더디다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의 뇌는 어떠한 지식(정보)을 한 번 받아들이고 나면 좀처럼 바꾸는 게 쉽지 않다. 기후변화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기후변화를 부인하는 이유도 ‘뇌의 저항’ 때문이라는 말을 한다. 우리의 뇌는 언제나 안정을 추구한다. 뭔가 안정이 정착되고 나면 그 상태를 바꾸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변화를 일으켜야 할 때 가장 저항이 심한 신체부위는 뇌이다.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의 가장 큰 적(enemy)은 우리의 뇌이다.

 

6. 잘못된 지식이 뇌에 한 번 들어가면, 그 잘못된 지식을 뇌에서 빼내는 일은 매우 어렵다. 몸에 밴 잘못된 습관을 고치는 것이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인간은 아는 만큼 행동하게 되어 있다. 인간의 삶에 있어 지식의 업데이트는 매우 중요하다. 인간은 아는 것에 근거해서 행동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지식을 업데이트 하지 않으면 행동이 고루해진다. 인간에게 열린 마음이란 언제나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적극적인 행동이다. 소통은 열린 마음에서 시작한다. 자신이 현재 알고 있는 지식이 전부이고 진리라는 생각은 소통을 어렵게 한다.

 

7. 로마서는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핵심을 담고 있지만, 로마서는 또한 기독교를 분열시키는 데 잘못 쓰이기도 한다. 종교개혁 당시 로마서를 바탕으로 마르틴 루터가 만든 구호가 ‘오직 믿음’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서 탄생한 개신교는 ‘오직 믿음’의 구호 아래서 구원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는 교리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이 하도 강력하다 보니, 개신교 이외의 모든 교파는 ‘오직 믿음’에서 벗어난 구원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위의 상담 내용에서 보듯이, 가톨릭은 행위 구원을 말하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와는 결혼 조차 하면 안된다는 배타적인 신앙을 가진다.

 

8. E. P. 샌더스(E. P. Sanders)라는 성서학자가 있다. 꼭 기억해 두어야 할 학자이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바울 서신을 들여보는 데 있어 1977년 이후에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바울 서신을 들여다볼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바로 E. P. 샌더스(E. P. Sanders) 때문이다. 그는 1977년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 Paul and Palestinian Judaism>이라는 책을 통해서 그동안 기독교 성서학이 가지고 있었던 바울 신학에 대한 이해를 뒤집는다. 샌더스의 주장에 따르면, 종교개혁 이후에 그동안 너무 많은 학자들이 사도 바울과 유대교를 오해했다(로마서 설교, 비아토르, 48쪽). 그러한 오해는 당연히 로마서를 해석하는데도 영향을 미쳤다. 마치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는 율법과 복음의 대립을 상정하고, 율법과 복음 중 어떤 것으로 구원받을 수 있느냐의 문제로 바울 서신과 신학을 축소시켰다는 것이다.

 

9. 쉽게 말해, 우리는 흔히 이런 질문을 한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행위를 통해서인가 믿음을 통해서인가? 행위는 율법을 말하고, 믿음은 복음을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연히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굉장히 은혜로운 말 같으나, 이렇게 행위와 믿음을 대립적인 관계로 설정할 때 생겨나는 문제점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이후의 삶이 실종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에게 더 이상의 행위(행동)는 필요 없고, 그저 천국 가는 날만 기다리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신앙을 구원의 문제로만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복음은 믿음을 통해서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당에 가는 구원론으로 축소될 수 없다.

 

10. 이렇게 되면, 우리는 유대교에 대한 오해를 가질 수밖에 없다. 유대교는 율법을 통한 행위의 종교이고, 기독교는 믿음을 통한 은혜의 종교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이 생기게 된다. 샌더스가 제동을 건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발생한 시점을 기준으로 200년 전과 200년 후, 즉 400년 정도에 걸쳐 형성된 팔레스타인 유대교 문서를 모두 검토한 결과, 유대교를 행위의 종교(works-righteousness religion, 행위로 의롭게 되는 종교, 행위와 의의 종교)가 아니라 유대교도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은혜에 기초한 종교라는 것을 밝혀냈고, 그는 이것을 일컬어서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라고 불렀다. “율법에 순종했던 것은 언약에 들어가기 위해서(구원을 획득하는 순종)가 아니라, 은혜와 하나님의 언약적 은총을 토대로 자신의 언약적 처지(covenant standing)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로마서 설교, 비아토르, 48쪽).

 

11. E. P. 샌더스라는 성서학자 덕분에 우리는 바울서신, 특별히 로마서의 메시지를 좀 더 좀 더 완전하게, 왜곡되지 않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얼핏 읽으면 바울이 횡설수설하는 것 같은 율법에 대한 이야기, 이스라엘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이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를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성서해석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를 읽으면서 바울이 율법과 복음이 마치 대립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고, 율법과 유대교의 가치를 형편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더 나아가 유대인에게 저질러진 폭력의 역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일은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기독교 신앙의 오류들이다.

 

12.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는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 이유는 쓴 시기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는 고린도전후서를 쓴 직후, 그리고 로마서를 쓰기 직전에 쓰였고, 로마서는 갈라디아서가 쓰여진 지 채 1년이 지나지 않아서 쓰였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는 ‘율법과 믿음의 상관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그런데, 정황이 좀 다르다. 갈라디아 교회는 이방인 교회였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 자체가 별 의미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율법의 행위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마음에 와 닿았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는 믿음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진다. 율법의 행위에 대한 이야기는 이방인들에게 별로 감흥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13. 그러나 로마서는 정황이 달랐다. 유대교 배경의 그리스도인들이 로마교회의 구성원이었다. 율법과 믿음의 상관관계는 이들에게 매우 중요했다. 다짜고짜 율법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로마교회를 향해 바울에게 주어진 과제는 율법을 넘어선 복음의 보편성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복음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얼마나 평등한지에 대한 논증 없이 이들에게 복음을 토대로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도록 종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복음 아래에서 얼마나 평등한 존재인지를 논증한다.

 

14. 그들의 평등을 논증하는데 쓰인 개념이 바로 ‘죄’이다. 바울은 9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우리가 여기서 조심해야 읽어야 할 것이 있다.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는 죄는 인간 개인의 개별적인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말하는 죄는 모든 인간을 억압하는 힘을 말한다. 이것은 한 개인이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죄는 작은 이야기가 아니라 아주 큰 이야기이다. 우리 눈에는 명확하게 보이지 않지만, 어떠한 힘으로 우리 인간에게 영향력을 미친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고통이나 비극을 피할 수 없다. 죄의 힘은 거대하다.

 

15. 로마서 3장 10절에서 18절은 죄의 메타 내러티브 안에 있는 인간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져 있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 지어낸 상황이 아니라 구약의 전도서와 시편 등에 이미 진술하고 있는 인간의 상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인생을 오래 산 사람일수록 인간이 이러한 비참한 상황에 처해져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살지만, 우리에게는 늘 고통과 아픔이 있다. 고통과 아픔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그러한 것을 경험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통과 아픔을 피할 수 없다.

 

16. 죄에 대한 이러한 메타 내러티브는 우리 인간에 대한 이해를 깊게 도와준다. 사실, 이러한 메타 내러티브는 인간의 삶에 큰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메타 내러티브가 죄의 힘에 사로잡힌 이들에 의해서 이용을 당하면 사람을 정죄하는 데 쓰이고 만다. 대개 건강하지 못한 신앙을 추구하는 이단들이 그러한 행동을 한다. 인간을 희망으로 이끌지 않고 절망으로 몰아간다. 절망의 끝에 몰려 불안해 하는 인간에게 다가가 자신이 구원을 줄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 같지만, 실은 절망 속에 있는 사람을 컨트롤하고, 착취하려는 속셈이 담겨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러한 술수에 희생을 당했는가.

 

17. 바울이 로마서에서 인간의 곤경에 대해서 말하는 이유는 인간을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다. 지금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당신들이 얼마나 형편없는 존재인지 아시오!’라고 하면서 그들을 정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바울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오해해서, 바울이 말하는 인간의 곤경을 이용하여 전도하는데 사용해 왔다. “당신은 죄인입니다! 당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인정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지 스스로를 좀 돌아보시고, 어서 빨리 죄를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을 불쌍히 여겨 구원해 주실 겁니다.”

 

18. 그렇게 다그쳐서, 상대방이 죄를 고백하면, 그때 복음이 제시된다. “예수 그리스를 믿기만 하면, 당신은 구원을 받습니다. 믿으십니까?” 상대방이 믿는다고 말하면, 전도자는 이렇게 선포한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 구원이 정말로 값싸지는 순간이다. 구원받는 게 정말 쉽다. 이렇게 쉬운 구원을 사람들은 왜 받지 않으려고 할까. 그러면서 우리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한다.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는데, 믿음을 갖지 못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안타까워한다. 오직 믿음이 이렇게 쓰인다. 이것은 모두 로마서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오류들이다.

 

19. 우리가 가진 통념, 업데이트 되지 않은 지식과는 달리, 유대교나 가톨릭이나, 행위 구원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뇌는 여전히 유대교나 가톨릭이 행위 구원을 말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오직 믿음만을 말하는 개신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개신교인은 아주 쉽게 개신교 신앙을 갖지 못한 이들을 정죄한다. 그리고 그들을 모두 전도대상자로 삼고 그들을 향한 포교활동에 나선다. 이미 구원받은 확신에 가득 찬 개신교인들은 존재론적 우위에 있다. 구원받은 자는 구원받지 못한 자에 비해서 우월하다. 우월한 사람은 자신보다 우월하지 못한 이들에게 구원을 선물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복음은 존재론적 폭력으로 탈바꿈된다.

 

20.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인 막힌 담을 허물어 복음 안에서 화해를 이루고 한 몸을 이루게 끔 하기 위해 이방인의 사도로 사명감을 가지고 산 바울이 아무렴 우리가 통념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의 우위성을 말하며 사람들을 정죄하기 위해 로마서를 쓴 것일까? 그렇지 않다. 로마서뿐만 아니라 바울 서신 어디에서 바울은 막힌 담을 허물기 위해서 복음을 말하는 것이지, 사람들을 정죄하고 담을 쌓으려고 복음을 말하는 게 아니다.

 

21. “당신의 뇌가 가장 큰 적이다.” 우리 뇌를 지배하고 있는 잘못된 통념들을 뇌에서 몰아내지 못하면, 인생은 자꾸 누추해진다. 하나님은 우리의 누추한 뇌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다. 좋은 사람과 불편한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는 단 하나이다. 대화(소통)하려는 의지가 있는가 없는가이다. 좋은 신앙과 불편한 신앙의 차이는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는 단 하나이다. 대화(소통)하려는 의지가 있는가 없는가이다. 이단이 왜 이단인가? 잘못된 것을 가르치고 실행해서? 아니다. 대화(소통)이 없기 때문이다. 대화(소통)이 없으니까, 발전이 없고,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죽고 만다. 그래서 이단은 그냥 가만히 나눠도 소멸할 수밖에 없다.

 

22. 대화(소통)가 잘 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듯, 대화(소통)이 잘 되는 신앙인이 좋은 신앙인이다. 생명은 결국 대화(소통)이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성장하고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여러분의 뇌가 여러분을 한 곳에 머물러 있도록 붙잡아 두지 못하게 하시라. 부지런히 배우고, 부지런히 소통해서 성장하도록 하시라. 새롭게 발견하고 발전된 신학/신앙의 내용들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성장하고 성숙해 가시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할 때까지,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그렇게 역동적으로 사시라.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