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無爲)의 존재

 

독일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철학자 한병철의 『피로사회』라는 책은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가 어떻게 사람들의 삶을 힘들고 어렵게 만드는지를 간결한 필치와 깊은 사유를 통해 펼쳐 보여줍니다. 우리는 피곤합니다. 사람들은 ‘피곤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왜 이렇게 우리는 피곤할까요? 한병철은 우리가 경험하는 피곤의 뒷면에는 ‘긍정의 과잉’이 있다고 진단합니다.

 

긍정의 과잉.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부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의문을 던져봅니다. 정말 모두가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나요? 긍정 과잉의 사회, 즉 피로사회에서는 ‘할 수 없다’는 부정어가 금기시됩니다. 긍정성 이면에는 성과주의(meritocracy)가 존재합니다. 성과를 많이 내는 사람에게는 보상을 해주고, 성과를 못 내는 사람에게는 ‘루저’(실패자)라는 낙인을 찍습니다. 사람들은 루저의 낙인을 받지 않기 위해 긍정의 힘으로 성과를 내기 위해 영혼까지 갈아 넣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삶은 피곤합니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아주 교묘한 통치술입니다. 군부독재, 또는 권위주의 체제 시절에는 ‘규율사회’로서 ‘해서는 안된다’는 부정의 방식으로 국민을 통제했습니다. 그 시절을 회상해 보면, 하면 안 되는 것이 참 많았습니다. 두발도 규정이 있었고, 귀가 시간도 정해져 있었고(통금시간), 해외 여행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체제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체제는 더 이상 사람들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습니다. 아주 자유롭습니다. 마음먹은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체제는 ‘성과사회’로 ‘할 수 있다’는 자기 착취를 유발합니다. 외부의 세력이 성과를 내도록 착취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자기 자신을 착취합니다. 성과를 못 내는 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자기 자신의 책임이 됩니다. 그 결과 요즘 사람들은 피로가 극에 달하고, 우울증 등 신경성 질환 환자가 많고,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교묘합니다.

 

이런 21세기의 비극적 풍경 속에서 사실상 신앙의 역할은 더 중요해졌습니다. 신앙은 성과를 내느라 지친 영혼을 위로해 주고, 교묘한 방식으로 우리를 착취하는 ‘체제’를 간파할 수 있게 해주며, 더 이상 피곤하게 살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해주고, 실제로 그런 세상을 만들어 가는데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또다른 비극을 경험합니다. 신앙이 가장 중요한 시대에 신앙이 가장 배척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대가 요구하는 성과를 내기 위한 조건은 오직 몸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몸을 만들기 위해 헬스장(Fitness)에는 열심히 가도, 영혼을 위한 신앙은 등한시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는 몸을 위한 스프는 먹어도, 영혼을 위한 스프는 잘 먹지 않는 시대에 삽니다.

 

피로사회를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는 성과를 내느라 몸과 영혼을 모두 망가뜨리는 자기 착취를 멈추고 평안에 이를 수 있을까요? 한병철은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깊은 심심함’이나 장자의 ‘무용지용’의 철학을 제시합니다. 뭔가를 해야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하지 않을 힘’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쓸모없는 것의 가치를 인정하고 교묘한 자기 착취의 메커니즘에 저항할 것을 주문합니다. 즉, 한병철은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갈망합니다. 무위의 존재. 없이 존재하는 존재. 나의 바깥 것을 해치지 않고 오히려 나의 바깥 것을 풍성하게 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 존재. 이런 존재를 갈망합니다. 한병철은 철학자라 철학적으로 새로운 주체를 제시했지만, 신학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존재와 다르지 않습니다. 즉, 신앙을 갖는다는 것, 그것은 무위의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자기를 착취하지 않고, 남도 해치지 않는, 그러면서 서로의 생명을 풍성하게 해주는 존재. 신앙만이 이런 존재를 빚어내리라, 저는 믿습니다. 신앙을, 지키세요.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9. 17. 10:37

숨 쉴 공간을 간구하는 기도

(요 8:1-11)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

그래서 우리에게 숨 쉴 공간을 열어주시는 주님.

주님의 그 은혜 덕분에 우리가 숨 쉬며 삽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덧 그 은혜를 잃어버리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숨 쉴 공간을 열어주지 못하고

숨 막히게 하며 삽니다.

좀 모른 척하고, 좀 내버려 두면 좋은데

우리는 너무 아는 게 많고 너무 할 줄 아는 게 많아

이리 참견 저리 참견하면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상대방이 하지 못하면

화가 납니다.

하지만 말씀을 통해 다시 우리의 삶을 돌아봅니다.

모든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햇살과 색깔과 이야기를 모으며 살아갑니다.

존중과 기다림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우리의 삶을 모두 조화롭게 더 행복해질 것을 믿습니다.

주님,

우리가 주님께 받은 절대적인 은혜를 기억하게 하시고

그 은혜로 숨 쉬며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처럼

우리도 우리 주변의 소중한 이들에게

숨 쉴 공간을 열어주는

은혜롭고 따뜻한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가 영원한 숨을 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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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9. 15. 08:47

[바울과 아볼로: 사역의 상호보완적 역할]

 

바울과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에서의 사역을 통해 신약 교회 성장에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두 사람의 사역은 각각 개척과 양육의 역할을 맡으며 고린도 교회의 기초를 세우고 그 기초 위에서 교회를 강화시켰습니다. 서로 다른 방식과 배경을 가진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초대 교회에 있어 상징적인 사건으로, 이는 교회의 발전에 있어 다양한 은사와 역할이 필요함을 잘 보여줍니다.

 

1. 선교 여행의 교차점: 바울의 고린도 사역

바울의 고린도 사역은 그의 제2차 전도여행의 중심지 중 하나였습니다. 고린도는 로마 제국의 아가야 지방 수도로, 다양한 문화와 철학이 융합된 대도시였으며, 상업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1년 6개월 동안 사역하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 과정에서 하나님께 직접적인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18장 9-10절에서 하나님은 바울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이 구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라는 도시에서 바울이 직면한 상황을 반영합니다. 사도행전은 이 장면을 통해 바울이 심리적 압박과 신체적 위험을 동시에 겪었음을 암시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시고 사역을 완수하게 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의 사역을 통해 단순한 전도뿐 아니라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사역자로서의 역할을 다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은 행위(행 18:18)는 그가 나실인의 서원을 완수했음을 상징합니다. 민수기 6장에 따르면, 나실인의 서원은 일정 기간 동안 머리를 자르지 않는 것이며, 서원이 끝난 후 머리를 깎는 것은 서원이 성취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바울이 고린도 사역에 대한 특별한 서원을 가지고 있었고, 그 서원을 신실하게 지키며 그곳에서의 사명을 완수했음을 시사합니다.

 

2. 서원의 의미와 성경적 배경

바울의 서원은 구약 성경에서 나타나는 여러 인물들의 서원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예를 들어, 야곱은 벧엘에서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하며 하나님께 서원을 드리고(창 28:20-22), 한나는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서원을 통해 사무엘을 낳았습니다(삼상 1:11). 이러한 서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거나 중요한 사역을 수행할 때 드리는 헌신의 상징으로 작용했습니다.

 

서원이 단순한 약속을 넘어서는 깊은 신앙적 헌신의 표현임을 고려할 때, 바울의 서원 역시 고린도 사역에서 그가 느꼈던 깊은 책임감과 사명 의식을 반영하는 중요한 요소로 볼 수 있습니다. 서원의 신중함을 강조하는 다른 예로, 입다의 서원이 있습니다(삿 11:30-31). 입다는 암몬 자손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게 해달라는 서원을 드렸으나, 그 결과 딸을 제물로 바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서원이 얼마나 진지한 약속인지를 보여줍니다.

 

바울은 이러한 서원의 전통을 신실하게 따르며 고린도에서의 사역을 감당했고, 그로 인해 고린도 교회는 그의 헌신과 사역의 열매로 세워졌습니다.

 

3. 아볼로의 등장: 학자이자 겸손한 사역자

아볼로는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이 끝난 직후 에베소에서 등장합니다. 사도행전 18장 24절은 아볼로를 “말에 능하고 성경에 능통한 자”로 묘사하며,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으로 헬레니즘 문화와 학문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 철학과 유대 신앙이 결합된 도시로, 아볼로는 그곳에서 학문적 깊이를 쌓았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고린도 교회에서 매우 설득력 있는 설교자이자 교사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고대 세계에서 학문과 철학의 중심지로, 헬레니즘과 유대교가 융합된 독특한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옮긴 ‘70인역 성경’이 바로 이곳에서 탄생합니다. 아볼로는 이러한 배경을 통해 헬라 문화와 유대 신앙을 모두 깊이 이해한 학자였고, 성경에 대한 깊은 지식을 바탕으로 복음을 가르칠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볼로는 처음에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지도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얻게 되었습니다(행 18:26). 아볼로가 학문적으로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모르던 것을 겸손히 배우고 받아들인 점은 그의 성품을 잘 보여줍니다. 아볼로는 그 지식을 바탕으로 고린도 교회로 파송되어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고, 고린도 교회에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4. 아볼로의 고린도 사역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에서 중요한 사역을 감당했으며, 그가 그곳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쳤는지는 나중에 고린도 교회에 '아볼로파'가 생긴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교회 내 분파 문제를 다루며 자신과 아볼로 사이의 연합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6절에서 자신을 ‘심는 자’로, 아볼로를 ‘물 주는 자’로 묘사하며, 이 둘의 역할이 상호보완적임을 설명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잘하게 하셨나니.”

 

사도행전은 바울의 이 비유를 통해, 초기 교회의 사역이 한 사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협력과 헌신으로 가능하다는 중요한 교훈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개척자로서의 역할을 했고, 아볼로는 그 교회를 양육하고 성장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바울이 씨를 뿌렸다면, 아볼로는 그 씨가 자라도록 물을 준 것입니다. 이러한 협력은 교회의 성장이 단순히 개인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께서 모든 사역을 완성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5. 바울과 아볼로의 상호보완적 사역

바울과 아볼로의 사역은 고린도 교회의 성장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처음으로 교회의 기초를 놓는 사명을 감당했고, 아볼로는 그 교회를 양육하고 더욱 견고하게 세우는 역할을 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성격과 기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사역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협력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바울은 불같은 열정과 결단력을 가지고 새로운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는 개척자였고, 아볼로는 따뜻한 인내심으로 그 교회를 돌보고 양육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사도행전은 이러한 바울과 아볼로의 관계를 통해, 교회의 성장에는 다양한 은사와 역할이 필요하며, 그 모든 역할이 조화를 이룰 때 하나님 나라가 확장된다고 강조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과 아볼로의 헌신 덕분에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상호보완적 역할은 오늘날 교회에서 여러 교우들이 각기 다른 은사와 사명을 가지고 협력하는 방식에 대한 중요한 모델을 제공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잘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

 

이 말씀은 바울과 아볼로가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며, 그들의 사역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것임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바울과 아볼로의 사역은 고린도 교회를 세우고 양육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상호보완적 협력의 상징입니다. 바울은 교회의 기초를 놓는 사명을 감당했고, 아볼로는 그 교회를 양육하고 성장시키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들의 사역은 오늘날 교회에 있어 다양한 은사와 역할이 필요함을 일깨워 주며,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각각의 은사가 연합할 때 교회가 온전해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울과 아볼로의 사역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그들의 각기 다른 역할을 통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다양한 사람들의 헌신과 협력을 통해 이 땅에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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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민주주의/자본주의 시대의 신앙]

 

‘개인’이라는 개념은 근대에 생겨난 개념입니다. ‘마음’이라는 것도요. 중세 시대까지만 해도 ‘개인’이라든지 ‘마음’이라든지, 이런 개념이 사람들에게 별로 없었어요. ‘나’라고 하는 존재는 나보다 큰 존재에 묶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령, 자식은 부모에게 묶여 있고, 가족은 집안에 묶여 있었죠. 집안은 더 큰 공동체에 묶여 있었고, 결국 가장 높은 곳으로 가면, ‘임금’이 있었어요. 그래서 ‘나’라는 존재는 없고, 언제나 존재는 나보다 더 큰 존재에 묶여 있는, 그래서 개인이라는 개념과 마음이라는 개념을 갖지 못했죠.

 

개인주의 사회와 ‘내 마음’이 중요한 시대에 사는 우리는 위에서 설명한 이야기가 선뜻 이해되지 않을 겁니다. 시대가 바뀐 탓이죠. 시대가 바뀌면 그 이전 시대는 전혀 인식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시대가 전부인 것이죠. 개인과 마음이 발명되기 전, 인간은 세상이 그냥 그런 줄 알고 살았습니다. 임금님, 또는 집안의 뜻이 곧 내 뜻이었고, 임금님, 또는 집안의 마음이 곧 내 마음이었죠. 다른 뜻과 마음을 품는 것 자체에 대한 개념이 없었어요. 그래서, ‘군사부일체’(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하나다)라는 말이 사회의 규율로 엄격하게 작동했습니다.

 

근대(modernity)에는 정말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그야말로 개벽을 한 것이죠. 무엇보다, 개인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고, 마음이라는 개념이 생겨났습니다. ‘내’가 중요한 시대가 된 것이죠. 나는 더 이상 임금님의 뜻을 따를 필요도 없고, 집안의 마음이 곧 내마음이 아니어도 된 것이에요. 나라는 존재, 나의 마음이 자율적으로, 그리고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되었어요. 이러한 상황을 통틀어서, 자율성(autonomy)라고 합니다. 근대에 비로소 자율적인 개인의 개념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 이후, 사회의 모든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정치 개념이 발전되고, 자본주의라는 경제 개념이 발전되었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개인’ 그리고 ‘마음’이라는 것이 발명되지 않았다면 발전할 수 없는 개념들입니다. 민주주의는 개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치 체제입니다. 예전에는 왕정 체제와 귀족 체제가 사회의 근간이었죠. 그때는 개인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개인과 마음의 발명과 더불어 민주주의가 발전하게 됐죠. 민주주의는 개인과 마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모든 정치를 거기에 맞춥니다. 그래서 한 개인이 투표권을 갖게 됩니다. 그 투표권으로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투표를 하죠. 이제 정치는 한 개개인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에요.

 

자본주의는 개인과 마음의 개념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경제 체제입니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욕망(마음)에 철저하게 기댄 경제 체제에요. 자본(돈)은 개인의 욕망을 채워주는 매직이죠. 개인은 자본을 가진 만큼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의 욕망은 밑도 끝도 없죠. 그래서 인간은 그 밑도 끝도 없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자본(돈)을 갈망합니다. 누구나 욕망의 크기는 똑같습니다. 무한대이죠. 그러나 사람마다 욕망을 채울 수 있는 한계는 다릅니다. 자본이 많은 사람은 욕망을 더 많이 채울 수 있고, 자본이 없는 사람은 욕망을 조금 밖에 채우지 못하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은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욕망의 크기가 아니라 욕망을 채울 수 있는 능력이 곧 계급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람들은 자본(돈)을 욕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높은 계급이 되기 위해서 그런 것이죠. 그래야 인간다운 삶,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이죠. 자본주의는 이렇게 철저한 인간학입니다.

 

인간이 자율성을 가지게 된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율성이 인간을 정말로 자유롭게 만드는데 쓰이지 않고, 오히려 인간을 비참한 현실로 몰아가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에요. 이 부분에서 인간의 죄성(罪性)이 드러나는 듯합니다. 좋은 것을 좋게 쓰지 못하고, 좋은 것을 악하게 쓰게 되는 현실 말이죠. 민주주의는 좋은 것인데, 개인의 마음에 들어야 하기에 정치가 포퓰리즘으로 갈 위험성이 너무 크고(실제로 그렇게 됐고요), 자본주의는 자아실현을 위해서 귀하게 쓰일 수 있는 요소가 있는데, 결국 인간의 과도한 욕망을 부추겨 인간 자신을 망칠 뿐만 아니라 결국 지구를 망쳐놓게 됐으니까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나쁜 게 아니라, 결국 인간이 문제인 것이죠. 좋은 것을 좋게 쓰지 못하는 인간의 그 말할 수 없는 부족함.

 

신앙이 왜 중요한지 모르겠다는 분들에게 바로 이 지점에서 신앙의 중요성을 말씀드리고 싶네요. 신앙은 액셀러레이터(가속기)가 아니라 브레이크입니다. 신앙을 가속기로 사용하려는 사람, 또는 그렇게 사용하라고 부추기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 또한 악한 사람입니다. 특히나 근대의 개인과 마음의 개념 안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신앙은 브레이크입니다. 신앙은 인간의 자율성을 컨트롤 해줍니다. 신앙은 인간의 욕망을 한발짝 떨어져서 바라보게 해주고, 욕망이라는 전차를 멈추어 세우는 브레이크 역할을 해줍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신앙이라는 브레이크가 있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입니다. 나도 모르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인간성을 붙잡아주고, 나도 모르게 무지막지한 파괴행위에 동참하는 일을 멈추어 주기 때문입니다.

 

근대는 고속도로를 쌩쌩 달리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인간은 그 안에 타서 자동차를 멋지게 운전합니다. 그런데, 만약 쌩쌩 달리는 자동차에 브레이크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달릴 때는 기분 좋고 멋지지만, 정작 멈추어야 할 긴급 상황이 오면, 그리고 설정한 목적지에 도착했는데도 불구하고 브레이크가 없어 멈출 수 없다면, 자동차를 탄 인간은 비명을 지르며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작품 ‘절규’가 떠오르네요. 뭉크의 절규가 바로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를 탄 우리들의 절규인 것이죠. 그 절규를 멈추어 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신앙을 잘 사용해 보세요. 개인과 마음을 잘 다스리는데 사용해 보세요. 인간의 마음은 사실 그 어떤 것으로도 다스리기 쉽지 않습니다. 아주 압도적인 거대한 힘이 필요하죠. 그런데, 그 거대한 힘이 강압적이거나 강제적이면 안 됩니다. 바람으로 나그네의 옷을 벗길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옷을 벗게 할 따스함이 필요합니다. 그 거대한 힘, 그러나 따스하고 부드러운 힘, 없는듯 있는 힘, 없이 존재하는 힘, 그래서 개인을 뭉개지 않고,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힘, 자율을 진정한 자율로 작동하게 만들어 주는 힘, 그게 바로 하나님이시겠죠. 그런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내어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일 것입니다.

 

신앙이 그 어느때 보다 중요한 시대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이만큼 신앙이 중요한 시대가 있었나 싶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신앙이 가장 중요한 시대에 신앙이 가장 무시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 보니, 아우성과 탄식 소리만 들립니다. 사람들이 많이 아픕니다. 자기의 마음을 허탄한 것에 맡깁니다. 악순환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신앙을 귀하게 생각하고, 신앙의 중요성을 설득력 있게 전파하는 사람은 정금보다 귀합니다. 이 글을 읽고,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이 귀한 신앙을 어떻게서든 한 명에게라도 더 전달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당신은 정말 보배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9. 3. 09:27

세화의 기도

(행 18:9b-10)

 

주님, 어려운 시절이지만

이러한 때 주님의 은혜는 더욱 강력하게 우리를 붙잡으십니다.

우리에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시고

그 길로 힘차게 걸어가도록 이끌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중산층의 복원처럼

특색 있고 건강한 중형교회를 세워

망가진 교회의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행하고

마땅히 전해야 할 말씀을 전하며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가 이 땅 위에 또렷이 드러나도록

교회의 사명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게 하시고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그리고

주님의 역사하심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세화교회,

고린도 교회처럼 열정과 동역 의식과 지도력이 준비된 교회이니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되는 교회입니다.

주님,

우리 교회를 통하여 주의 뜻을 이루소서.

우리 교회의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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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온라인 기도 사역을 시작하며

 

온라인 기도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기도 컨텐츠를 유튜브에 올리는 사역입니다. 사역(미니스트리/ministry)은 ‘구원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일은, 그래서 사역, 즉 구원하는 일이라 부릅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사역’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온라인은 모든 사람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입니다. 온라인에 있는 컨텐츠를 소비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요즘 우리들의 풍경입니다. 그런데, 온라인 컨텐츠는 대부분 자극적입니다. 자극적이지 않으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어렵기 때문에, 온라인 컨텐츠는 썸네일부터 영상과 내용까지 모두 자극적입니다. 그런 자극에 노출되어 오랜 시간 보내다 보니 요즘 우리들은 왠만한 것에는 자극조차 되지 않습니다.

 

물론 온라인 컨텐츠 중에는 유용한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온라인이라는 환경 자체가 워낙 자극적인 것이 많다 보니, 유용한 컨텐츠 자체도 자극성에 묻혀 그 의미가 잘 드러나지 않기도 합니다. 그래서 온라인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정신도 혼미해지고, 체력도 바닥나고, 무엇보다 집중력이 현저하게 떨어져 정작 현실에서 집중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아주 큰 부작용을 안고 살게 됩니다.

 

온라인 기도 사역을 통해 하고 이루고 싶은 것은 온라인 환경을 조금이라도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자극적인 컨텐츠에 맞서, 마음에 평안을 주고 삶을 돌아보게 하며, 무엇보다 삶에 힘이 되는 컨텐츠를 올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듣는 이들, 기도를 함께 하는 이들의 지친 어깨를 두드려주고 상한 마음을 어루만지고 두 손과 다리에 다시 힘을 주는 사역이 되길 바랍니다.

 

이 일에 동참해 주세요. 구독해 주시고 ‘좋아요’도 눌러 주시고, 댓글도 달아주세요. 그래야 알고리즘이 기도 유튜브를 사람들에게 많이 노출시켜줍니다. 지금은 AI 목소리로 기도를 드리고 있지만, 여러분들이 직접 기도문 낭독에 참여도 해주세요. 나중에 이 기도문을 모아 ‘우리들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책도 출간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온라인 기도 사역을 통해 우리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더 밝고 행복해지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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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9. 3. 06:17

고린도 교회의 탄생

 

사도행전 18장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어떻게 사역했는지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린도는 당시 복음이 전해지는 데 중요한 거점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예루살렘, 안디옥, 고린도, 에베소, 로마와 같은 도시들은 초대 교회가 복음의 중심지로 삼았던 곳들로, 각 지역의 선교와 교회 설립에 중대한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도시도 이들처럼 복음의 거점 도시가 되길 소망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는 사명감을 가지고 교회를 세워나가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라는 유대인 부부를 만났습니다. 이들은 원래 로마에 살고 있었으나,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으로 인해 고린도로 쫓겨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천막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는데, 고린도는 여행자들과 군인들이 많아 천막 수요가 높은 곳이었습니다. 바울 역시 천막 기술자였기 때문에, 같은 일을 하는 동종 업자이자 동족을 만나 반가웠을 것입니다. 이 만남은 단순한 사업적 연결을 넘어서, 신앙적 교제를 나누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로마 교회의 일원이었기에, 바울은 이들을 통해 로마 교회의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고린도 사역은 매우 열정적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5절에는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복음을 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회당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핵심 메시지를 전하며,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를 극심하게 대적하며 거부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저항에도 굴하지 않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으로 방향을 전환했습니다. 이와 같은 그의 사역 패턴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거부당한 후에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마음은 말씀에 사로잡혀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말씀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의 복음은 마치 수돗물이 터진 것처럼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왔습니다. 우리도 이처럼 복음에 불타오르는 마음을 가지길 소망합니다.

 

고린도에서 바울은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름으로 보아 그는 로마 시민으로 추정되며, 회당 옆에 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디도 유스도는 바울에게 자신의 집을 내어주며 복음 전파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또한, 회당장 그리스보도 온 집안 사람과 함께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바울과 지역의 리더십이 힘을 합쳐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사도행전 18장 8절은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고 기록하며, 고린도 교회의 설립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사역할 때, 주님께서 그에게 특별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사도행전 18:9-10) 이 말씀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얼마나 강력한 사역을 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고린도에서의 사역을 지지하시고 보호하신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탄생 이야기는 그 교회의 미래를 기대하게 만듭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와의 만남, 고린도 지역의 리더십들과의 만남, 무엇보다 말씀에 불들린 바울의 마음, 그리고 주님께서 주신 말씀은 고린도 교회를 바울에게 가장 애정이 가는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여러 서신에서 언급된 중요한 교회입니다. 특히 고린도 전서와 고린도 후서에서 고린도 교회의 문제와 그 해결책을 논의하며, 그들의 신앙과 생활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에서는 고린도 교회 내에서 발생한 분열과 혼란, 도덕적 문제들에 대해 바울이 강하게 권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고린도 전서 1장 10절에서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말하며, 교회의 일치를 촉구합니다. 이는 고린도 교회가 바울이 떠난 후에도 다양한 도전에 직면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도전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주님의 은혜 안에서 성장하고, 성도들이 성결하게 살아가기를 바랐습니다.

 

고린도 후서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한 애정과 그들에 대한 자신의 고통을 표현합니다. 그는 고린도 후서 11장 2절에서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라고 말하며, 고린도 교회를 그리스도께 드리는 순결한 신부로 비유합니다. 또한, 고린도 후서 12장 9절에서 바울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을 전하며, 그가 겪은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의 은혜가 충분했음을 고백합니다.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는 단순한 사역의 장소가 아니라, 그가 깊은 사랑과 애정을 가진 공동체였습니다. 그는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돌보고,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올바르게 서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도 이와 같은 열정과 사랑으로 세워지고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고린도 교회처럼 역동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교회로 성장하기를 소망하며, 우리 또한 주님의 일에 쓰임받는 자녀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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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