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3. 6. 14. 05:59

쉐마신앙

ㅡ 눈의 문화에서 귀의 문화로!

(창세기 11:27-12:9)

 

1. 창세기는 큰 이야기들로부터 시작한다. 천지창조의 이야기.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이야기. 노아의 방주 이야기(홍수 이야기), 그리고 바벨탑 이야기. 이러한 이야기들은 그냥 흥미거리로 써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의 실존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기록된 것들이다.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이라는 시에 이러한 구절이 나온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2.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간다”는 말처럼, 공부를 해보면, 우리가 창세기의 첫 열 한 장에서 무엇을 읽고 가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색깔이 달라지는 것 같다. 그만큼 창세기 첫 열 한 장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고, 그것을 해석해 내는 일이 쉽지 않으며, 그것을 들여다볼 때 아주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분명한 것은, ‘내 눈에서 무엇을 읽어가든’ 그것이 너와 나 사이에 평화가 있는 해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창세기의 첫 열 한 장은 인간의 실존이 어떠한 것인지를 그림언어로 제시함으로써, 인간이 어떻게 하면 서로 죽이지 않고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그래서 레비나스 같은 철학자는 “You shall not kill me.”라는 윤리적 대전제를 만들어, 서로의 생명을 보존하고자 하는 ‘타자의 윤리학’을 전개시키기도 했다.

 

4. ‘이게 뭐지?’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큰 이야기들이 쭉 나온 이후에, 뜬금없이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브람이다. 아브람의 이름은 ‘강한 아버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브람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바로 전에,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의 이야기가 짧게 등장한다. 데라는 아브람의 아버지다. 아브람은 그의 아버지 데라와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아브람은 아버지 데라를 떠난다.

 

5. 인간은 어린 시절이 중요하다. 어린 시절 무엇을 경험했느냐에 따라서 한 사람의 인생이 달라진다. 성경은 아브람의 어린 시절에 대한 정보를 많이 제공하지 않고 있다. 창세기 11장 27~32절에 걸친, 아주 짧은 정보를 통해서 아브람의 어린 시절을 추측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아브람의 아버지는 데라이고, 데라는 아들 셋을 낳았는데, 첫째가 아브람이었고, 둘째가 나홀이었고, 셋째가 하란이었다. 그런데, 이 중에서 데라의 셋째 아들, 즉 막내 아들이 일찍 죽었다. 이러한 사건이 발생한 곳은 그들의 고향 갈대아의 우르였다.

 

6. 그들의 결혼 이야기도 나온다. 첫째 아들 아브람은 사래와 결혼을 했는데 자식이 없었고, 둘째 나홀은 밀가나와 결혼을 했는데, 밀가나는 하란의 딸이었다. 근친결혼이 이루어진 듯하다. 이것은 고대근동 지방에서 평범하게 발생하던 일이었다. 근친결혼, 계대결혼은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고대인들의 가족 문화 중 하나였다. 이야기는 사래에게 집중된다.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아들 아브람 가족과 손자 롯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고자 하는 계획이다. 아마도, 둘째 아들 나홀 가족은 그냥 갈대아 우르에 계속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7. 그런데, 원래 계획이 틀어지는 정황이 아주 짧게 나온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던 데라는 하란에 이르러 그 마음을 바꾸고 그냥 하란에 정착해서 산다. 그리고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하란 땅에서 죽는다. 아버지 데라가 왜 가나안 땅으로 가는 원래 계획을 포기하고 하란 땅에 정착하여 거기서 죽을 때까지 살았는 지에 대한 정보는 없다. 다만 여호수아 24장에서 여호수아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세겜에 모아놓고 마지막 설교를 할 때,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의 이름이 등장한다.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수 24:2).

 

8. 무슨 이유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하란에 주저 앉아 살았다. 그리고, 여호수아에 의하면,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가나안 땅으로 가지 못하고 하란에 주저 앉아 산 가장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는 우상숭배였다. 여기서 우상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다. 우상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다. 중간에 주저 앉히게 만드는 힘이고 유혹이다. 마음을 빼앗아 원래 집중해야 할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다. 우상은 어떤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어떤 실체에도 덧씌워져서 힘을 발휘하는 어떤 세력이다.

 

9. 창세기 12장 1절은 아브람이 아버지 데라의 계획을 물려 받는 장면이 분명하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그 땅은 다른 곳이 아니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원래 가고자 했던, 가나안 땅이었다. 아버지 데라는 그 목적을 실현하는데 실패했지만, 아들 아브람 덕분에 그 목적을 달성한다. 이 지점이 무척이나 중요하다. 아브람은 아버지 데라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이제 독자적인 행동을 하는 어른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야말로, 아버지에게 종속된 추종자에게서 벗어나, 이제 독자적으로 삶을 꾸려가는 지도자가 된 것이다.

 

10. 추종자와 지도자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은 무엇일까? 추종자는 눈의 문화를 가지고 있고, 지도자는 귀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상은 우리의 눈을 유혹한다. 우상은 눈의 문화를 발달시킨다. 눈에 보이는 것에 사로잡혀 그것을 추종하게 만든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에덴 동산에서 발생한 선악과 사건이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나타나 하와를 유혹한 것은 눈이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가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11. 추종자들을 만들어 내어 그에게서 이익을 취하려 하는 자들은 모두 눈을 유혹하는 스펙터클을 생산한다. 화려하고 큰 것, 그래서 사람들의 눈을 혹하게 만드는 것을 만든다. 우리 시대가 그렇다. 온갖 것들이 그렇다. 눈을 못 떼게 만든다. 우리의 눈을 붙잡아 두는 문화를 만든다. 눈이 즐거워야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에 홀린듯 눈을 즐겁게 해주는 것을 따라 간다. 우리는 추종자로 살아간다. 그냥 그 자리에 눌러 앉는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처럼.

 

12. 지도자는 그렇지 않다.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 그것의 추종자가 되지 않는다. 지도자는 귀의 문화를 따르는 사람이다. 아브람은 아버지 데라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하란 땅에 눌러 앉아 살지 않았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너는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현대인이 가장 잘하는 것은 눈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무엇이 예쁜지, 무엇이 고급스러운 것인지 잘 안다. 그리고 무엇이 수치스러운 것인지 잘 안다. 현대인은 남의 눈에 미치지 못할 때 수치심을 느낀다. 그래서 남의 눈에 좋게 보이려고, 온갖 외형적인 것을 갖추기에 바쁘고 그것을 위해서 모든 비용을 쓴다.

 

13. 아브람이 강한 아버지에서 아브라함(많은 민족들의 아버지)으로 거듭난 이유, 이름이 바뀐 이유는 그가 눈에 보이는 것에 따라서 추종자로 머물러 산 게 아니라, 고요한 가운데 들려오는 세밀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지도자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에덴동산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이 분명히 들렸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으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6-17). 그러나, 에덴동산에 있던 하와와 아담(사람들)은 들리는 것에 의해서 행동하지 않고 보이는 것에 의해서 행동했다. 그래서 그들은 망했다. 눈의 문화보다 귀의 문화가 중요하다. 에덴동산은 그것을 알려준다.

 

14. 아브람이 왜 아브라함이 되어, 우리의 믿음의 조상, 즉, 우리의 믿음의 아버지가 되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특별히 눈의 문화가 거침없이 발전한 이 세상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귀의 문화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눈의 문화와 귀의 문화는 대척점에 서 있다. 눈의 문화는 휘황찬란하다. 그러나 귀의 문화는 고요함을 추구한다. 휘황찬란 한 곳에서는 아무 것도 들을 수 없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성경 구절은 신명기 6장 4절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이것을 ‘쉐마’라고 한다. 구약성경은 쉐마신앙을 말하고 있다.

 

15. 하나님은 우리를 추종자가 아니라 지도자가 되라고 부르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을 최대한 멀리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여 우리를 그곳에 붙들어 놓으려고 한다. 데라가 하란을 떠나지 못한 이유는 그가 하란 땅에서 눈의 문화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하란은 우르로부터 북쪽으로 960km 떨어진 지역에 있는데,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에서 최고로 발달한 상업도시였다. 왜 데라가 하란을 떠나지 못하고 그곳에서 우상숭배에 빠졌는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16.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눈의 문화가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요즘 시대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너무도 눈의 문화가 발달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믿으려 하지 않고, 배척한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쉐마의 하나님’이시다. 귀를 기울여야 들리는 하나님이시다.

 

17. 실제로 현대인들이 가장 잘 못하는 게 귀를 기울이는 것 아닌가. I am listening. I am all ears. 이것은 내가 너에게 온전히 귀 기울이고 있다. 내가 마음을 온전히 너에게 두고 있다. 나는 너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라는 뜻이다. 우리 가운데 왜 그렇게 평화가 없는가? 서로가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자기의 눈에 보이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나도 잘 못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상대방에게 가장 서운할 때가 언제인가.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을 때이다. 그러므로, 눈의 문화가 극도로 발달된 이 시대에, 우리가 주의하며 다시 되찾아야 할 문화는 귀의 문화이다.

 

18. 눈의 문화에 압도당한 이들은 그저 추종자가 될 뿐이다. 그러나 눈의 문화에서 벗어나 귀의 문화로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할 줄 아는 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지도자가 될 것이다. 아브라함처럼, 많은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어서, 그들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존경받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신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삶을 살라고 부르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추종자가 되지 말고, 지도자가 되자. 보이는 것을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들려오는 말씀에 귀 기울이는 자가 되자. 그러기 위해서 오늘부터 당장, 핸드폰을 좀 내려놓고, 여러분이 사랑하고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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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6. 9. 05:54

[장어와 한국교회]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한 번에 한 책만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개 책을 읽을 때 여러 권을 동시에 읽는다. 물론 책들마다 장르가 다르다. 나 같은 경우도 문학책, 철학책, 역사책, 시집/소설, 신학책, 그리고 자기계발서류책 등을 동시에 읽어 나간다. 요즘 내가 읽는 책 중에 <나비처럼 읽고 벌처럼 쓴다>라는 비평수업 책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일본인이다. 일본인 저자의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학문적 역량이 꽤 높다.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지식의 저력이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어 저작이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축적된 지식의 저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것은 한글로 된 저작이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되지 못한 까닭도 크다.

 

세종대왕 시대부터 한글이 쓰이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는 중국의 영향으로 한문으로 된 책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근대에는 일제의 영향으로 일본어로 된 저작이 상당수 축적되었다. 그래서 한국의 근대문학을 전공할 때도 일본어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한국 근대 문학은 일제강점기에 꽃을 피우기 시작했는데, 그때 문인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은 거의 모두 한글뿐 아니라 일본어로 저작을 남겼다. 윤동주도, 이상도 그렇다. 그래서 한국 근대문학을 공부하는데 일본어는 필수다.

 

일본인이 쓴 책을 읽다 보면, 그들의 역사 경험과 한국인의 역사 경험은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지금 읽고 있는 비평수업 책인 <나비처럼 읽고 벌처럼 쏜다>에서도 그것이 드러난다. 일례로, 비평을 설명하면서 쓰기에 대한 수업을 진행할 때 예로 쓰이는 문학작품은 『금빛 여우』라는 작품이다. 여기에서 장어라는 주제로 글을 쓰는 것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데, 장어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살펴 어떻게 글쓰기에 반영하는 부분에서 일제강점기 시대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또한 1930년 전후의 신문 기사를 데이터베이스에서 검색하자 장어의 영양이나 조리법 등에 관한 다양한 기사가 나왔습니다. 이 항목의 첫머리에 인용한 것처럼 1930년에는 장어의 치어가 한국이나 중국에서 공중 운송되었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조선’이나 ‘지나’라는 단어가 사용된 점도 포함해서 식민지주의 시대를 연상시키는 제목입니다. 아무래도 장어는 당시 사람들에게 제국주의적 권력을 사용해서라도 손에 넣고 싶을 만큼 매우 관심 있는 식재료였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155-156쪽).

 

만약 한국인이 이와 같은 비평수업 책을 저술했다면 어땠을까? 동일하게 장어에 대한 주제로 비평수업을 진행할 때, 일제감정기에 저술된 문학작품에서 그 예를 가지고 왔다면, 지금 일본인이 서술한 것과 완전히 다른 역사 경험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장어 때문에 제국주의적 권력에 희생당한 조선인들의 애환이 담긴 작품이었을 것이다. 동일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한쪽에서 장어는 제국주의적 권력을 사용해서라도 손에 넣고 싶을 만큼 매우 관심 있는 식재료였고, 다른 한쪽에서 장어는 착취를 연상시키는, 치가 떨리는 식재료였을 것이다.

 

제국주의를 경험한 사람들의 역사인식과 식민지를 경험한 사람들의 역사인식이 같을 수 없다. 경험이 다르니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다른 역사경험을 가진 두 나라, 일본과 한국이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을 같이하며 동반자로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정말 쉽지 않아 보인다.

 

별생각 없이 맛있게 먹었던 장어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식탐을 채우기 위해 제국주의적 권력을 조선인들에게 휘둘렀다는 역사를 알게 되니까 장어를 더 이상 맛있게 먹을 수 없을 것 같은, 민족적 저항의식이 생겨나는 듯싶다. 하지만, 내가 별 시답지 않은 장어 이야기를 들으며 정말로 고민한 것은 ‘교회’이다. 물론 이것도 직업병이겠다.

 

한국교회는 왜 이렇게 뒤틀려 있을까? 장어 이야기를 통해서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것은 한국교회에는 한국인의 역사경험이 충분히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역사경험은 결코 제국주의자들과 같지 않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제국주의자들의 경험이 반영된 신학과 실천이 더 주류를 차지한 것 같다. 약자의 경험이 더 반영된 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강자의 경험이 더 반영된 교회 같다는 뜻이다.

 

최근 보도에 의하면, 한국에서는 ‘빌리 그래함 목사 한국 전도대회 50주년 기념 집회’가 열렸다. 그 행사에 약 7만명 정도가 ‘동원’됐다. 그 대회를 주관한 교회들이나 목사들, 그리고 거기에서 선포된 ‘메시지’를 보면, 여전히 전도방식이 ‘제국주의적’이다. 무엇보다 목적을 위해서 교인들이 ‘동원’되는 점이 그렇다. 또한 내가 그 기사를 보면서 가장 아쉬워했던 것은 그 많은 인원이 여러가지 이유로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곳에 ‘동원’됐다면 어땠을까 였다. 그랬다면 그것은 ‘동원’이 아니라 ‘참여’가 되었을 것이다.

 

지난 4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마침 세월호 9주년 기억예배가 있어서 안산생명안전공원에서 열린 예배에 참석했다. 약 500명 정도가 참석했다. 주최 측에서는 이것도 많은 인원이라며 기뻐했다. 더군다나 예배를 방해하는 세력이 없어서 좋았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왜 사람들은 이곳에 생명안전공원이 세워지는 것을 싫어햐나고. 그랬더니, 대답이 아주 난감했다. 땅값 떨어지는 것을 걱정한다는 것이다. 물론 요즘 같이 먹고 살기 힘든 시대에 그러한 걱정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그런 걱정을 덜어주는 정책을 펴면 될 것이다.

 

다만, 그곳에 한국교회가 합심하여 빌리 그래함 목사 한국 전도대회 50주년을 기념하는 대신에 아픔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는 바로 그곳에 7만명이 함께 모여 예배 드렸다면, 세월호 문제가 이렇게 정치적으로 비화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벌써 사건규명을 명확하게 하여 책임자 처벌과 향후 안전대책, 그리고 유가족 돌봄 문제를 해결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미국 백인 복음주의자, 빌리 그래함 목사가 뭐라고 그 사람의 전도대회를 기념하기 위해서 수억원을 써가며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한국사회와 교회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일본인이 쓴 비평수업 책 한 권 읽으면서 나의 생각은 왜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여기까지 도달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가 다시 사는 길은 우리 한국인들의 역사적 경험이 충분히 반영된 신학과 실천을 토대로 교회가 세워지고 미래를 펼쳐 나아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들의 역사경험을 무시한 채 교회가 세워지면, 교회는 여전히 유체이탈 교회로 ‘영혼구원’ 타령만 하게 될 것이다. 교회가 말하는 ‘영혼’이란 도대체 어떤 영혼인가. 그러나 저러나, 장어를 먹기 힘들게 됐으니, 기력을 어떻게 보충해야 할지, 갑자기 막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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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6. 6. 02:52

삼위일체와 우리의 미래

(마태복음 28:16-20, 고린도후서 13:11-13)

 

1. 이게 무슨 곡인지 맞춰 보라. 

강강술래.mp3
2.76MB

 

2. 강강술래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보면 강강술래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강강술래는 국가무형문화재 제 8호이며, 2009년 9월에는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국가무형문화재 1호는 종묘제례악이고, 5호에는 판소리가 지정되어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목록을 보면 현재 150개 정도 지정되어 있다. 강강술래가 가진 가치와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깊고 크다. 강강술래는 주로 전라도 도서지역인 해남·무안·진도·완도 등지에서 음력 8월 15일 밤(추석)에 예쁘게 차려입은 부녀자들이 공터에 모여 손에 손을 잡고 둥근 원을 만들어, '강강술래'라는 후렴이 붙은 노래를 부르며 빙글빙글 돌면서 뛰는 놀이이다.

 

3. 다음과 같은 재미난 유래도 있다. “정유재란의 명량해전 때 이순신 장군이 수병(수군)을 거느리고 해남의 우수영에서 왜군과 대치할 때의 일화가 있다. 조선 수병들이 매우 많은 것처럼 보여 왜군이 함부로 침입해 들어올 수 없게 하기 위하여 부녀자들로 하여금 남자 차림을 하고 떼지어 올라가 옥매산(玉埋山) 허리를 빙빙 돌게 했다. 그러자 바다 위의 왜군들은 이순신의 군사가 엄청나게 많은 줄로 알고 지레 겁을 먹고 달아나 버렸다 한다. 싸움이 끝난 뒤 부근의 마을 부녀자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강강술래'라는 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즐기던 것이 바로 오늘날의 강강술래라 한다. 따라서 한자어 '강강수월래(強羌水越來)'는 '강한 오랑캐가 물을 건너온다'고 해석된다는 것이다.” 강강술래를 이순신 장군의 업적과 연관지어 설명한 유대이다.

 

4. 그러나 백과사건의 설명에 따르면 강강술래가 이순신 장군의 의병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강강술래>는 원시시대의 부족이 달밤에 축제를 벌여 노래하고 춤추던 유습(풍습)에서 비롯된 민속놀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대로부터 우리 나라 사람들은 달의 운행원리에 맞추어 자연의 흐름을 파악하였고, 따라서 우리 나라 세시풍속에서 보름달이 차지하는 위치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즉, 달이 가장 밝은 추석날이나 정월대보름날이면 고대인들은 축제를 벌여 춤과 노래를 즐겼고, 이것이 정형화되어 <강강술래>로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전승된 <강강술래>를 이순신이 의병술(擬兵術)로 채택하여 승리를 거둠으로써 널리 보급되고 더욱 큰 의미를 부여받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5. 삼위일체 주일이다. 삼위일체 주일에 강강술래에 대해서 이렇게 길게 말한 이유는 삼위일체를 이해하기 위한 좋은 예가 우리나라 전통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다. 정말 다행이고 축복이다. 기독교의 신론은 유일신론도 아니고 다신론도 아니다.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두 개의 문화가 있다. 히브리 문화와 그리스 문화다. 히브리 문화는 유일신 문화다. 그리스도 문화는 다신론 문화다. 이후에 그리스 신론은 신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의해서 매우 철학적이고 사변적으로 변하여, 기독교에 영향을 미친다.

 

6.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의 신앙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점은 신론이다. 기독교 신론은 유일신도 아니고, 다신론도 아니다. 기독교의 신론은 삼위일체론이다. 기독교 신론을 까닥 잘못 해석하면, 유일신론에 빠지거나 삼신론(다신론)에 빠질 수 있다. 4세기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해서 삼위일체론이 확립되기 전까지, 300여년 동안 기독교는 유일신론도 아니고 삼신론도 아닌, 삼위일체론을 세우기 위해서 무한한 노력을 했다.

 

7. 많은 사람들이 삼위일체론을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는, 삼위일체론은 성경에 등장하지 않은 용어인데, 이후의 신학자들이 철학적/신학적 사유를 통해서 만들어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오해이다.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세워 나간 교부들이나 신학자들,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는 삼위일체론을 발명한 것이 전혀 아니다. 기독교 신앙 공동체가 삼위일체론을 말하는 이유는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 경험이 삼위일체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스스로 알 수 없다.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것만큼, 보여주시는 것만큼만 알 수 있다. 그것을 계시(revelation)이라 한다.

 

8.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경험했다. 그렇게 경험한 결정적인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 사건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삼위일체로 드러낸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유일신론도 아니고 다신론도 아닌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9. 삼위일체를 말할 때 기독교인들조차도 헷갈려하는 것은 이것이 수학놀이인줄 안다는 것이다. 1+1+1=1. 이렇게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주 쉽게, 삼위일체론은 비합리적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1+1+1이 1이 될 수 있냐고 말이다. 1+1+1=3이 되어야지. 이것은 삼위일체론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고, 삼위일체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는 방증일 뿐이다.

 

10. 삼위일체는 수학이 아니라 교제(fellowship/relationship)를 나타내는 말이다. 삼위일체는 신적 교제이다. 그리고 피조물과의 교제이다. 삼위일체가 품고 있는 근본적인 교제(fellowship)의 의미를 담고 있는 중요한 신학적인 용어는 ‘perichoresis (페리코레시스)’이다. 이것은 그리스어이다. 초대교회의 신실한 교부들이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을 포착하여 표현한 언어가 ‘페리코레시스’이다. 초대교회는 그리스어를 썼다. 7세기 이후 이슬람의 등장과 함께 동방교회 지역이 모두 이슬람화 되면서, 그 이후 교회의 언어는 라틴어로 바뀌었지만, 그 이전까지 교회의 주류 언어는 그리스어였다. 신약성경이 그리스어로 씌어진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바꾼 것을 셉투아진트(Septuagint, 70인역)라고 한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어 구약성경을 봤다. 사도 바울이 쓴 서신서에 인용한 구약성경의 구절들은 모두 그리스어 구약성경인 셉투아진트이다.

 

11. 교부들이 삼위일체가 무엇인지를 그림언어로 포착한 것이 ‘페리코레시스’이다. 내가 위에서 강강술래를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페리코레시스의 뜻은 ‘빙글빙글 돌면서 춤춘다는 뜻’이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강강술래’가 딱 페리코레시스이다. 공동체의 모든 사람이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려면, 한 사람이라도 슬픔과 고통에 짓눌려 주저 앉아 있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게 슬픔에 주저 앉아 있는 사람이 있다면 위로하고, 안아주고, 그가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나 기쁨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12. 페리코레시스는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으로 깊이 침투하는 사건을 말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으로 깊이 침투하여, 슬픔에는 슬픔으로 안아주고, 기쁨에는 기쁨으로 반응하여, 서로가 서로의 삶을 깊이 보듬어 주며, 그 무한한 기쁨과 사랑을 서로 공유하며 손에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강강술래 춤을 추는 것이, 페리코레시스이다.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어떻게 삼위이면서 하나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림언어로 포착한 것이 페리코레시스이다. 우리의 용어로는 강강술래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13. 오늘 우리는 삼위일체주일을 맞아, 주님의 말씀을 받아, ‘삼위일체와 우리의 미래’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살펴보고 있다. 우리가 오늘 받은 말씀은 그래도 명시적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드러내는 말씀들이다. 마태복음에서는 선교적 사명을 전달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사명을 전달하고 있고, 고린도후서에서 사도 바울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고린도교회 공동체를 위로하고 축복하고 있다.

 

14. 삼위일체는 사변(상상물)이 아니라, 실재이다. 우리의 현실을 떠받치고 있는 실재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래도 소망을 가지고, 힘을 내서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삼위일체로, 손에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아가며 춤을 추시며 우리에게 그 기쁨과 사랑을 쏟아부어 주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않고, 힘을 낼 수 있고 미래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것, 이 세상을 감싸 안고 있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이다. 무한한 사랑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현실을 보는 것이 믿음이다.

 

15.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페리코레시스의 모습으로 존재하시고, 우리에게 그러한 모습을 계시해 주신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도 그렇게 살라고 부르신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고 이유이다. 슬픈 일을 당했거든 그 슬픔 때문에 자기를 비하하거나 망치지 말았으면 좋겠다. 우리 인간의 존재가 가장 낮아지는 순간은 실패했을 때, 병들었을 때, 육신이 약해졌을 때, 그리고 죽음을 맞딱드렸을 때 등이다. (사랑과 생명이 적을때) 그런 슬픔 가운데 처할지라도 두려워하거나 죄책감에 휘말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좀 더 당당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페리코레시스의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무한한 사랑이 우리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16. 우리의 미래가 어디에 달려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공동체로서의 우리이기도 하고, 개인으로서의 우리이기도 하다. 우리 공동체의 미래, 내 삶의 미래가 어디에 달려 있는가. 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알고 사랑하고, 경험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페리코레시스이시구나. 강강술래이시구나. 저렇게 사랑과 기쁨이 넘치시구나. 저렇게 그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고 보듬어 안으시며 생명을 풍성하게 하시는구나. 이것을 알고 경험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공동체의 미래와 우리 개인의 삶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17. 그래서 기독교의 구원은 종말론적이다. 지금 여기에서 페리코레시스, 강강술래의 기쁨과 생명을 충만히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아픔과 고통에 처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온전히 위로 받기 전까지 우리의 구원은 유보될 수밖에 없다. 나에게 슬픔과 고통이 없다고, 나는 구원받았다고, 나만 기뻐할 수 없다. 구원은 관계적이다. 구원받지 못한 자가 있으면 나의 구원도 아직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향해 나가가고 있는 중 일뿐이다. 선교란 페리코레시스, 강강술래에서 소외되는 자가 없도록 돌보고 그들을 기쁨과 생명으로 초대하는 일이다. 구원은 나에게 달려 있는 게 아니라 이웃에게 달려 있다. 이웃의 구원이 곧 나의 구원이다. 구원은 이렇게 철저히 관계적이다.

 

18. 우리 교회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 강강술래가 드러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게 부흥 아닌가? 우리 사회(세상)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 강강술래가 드러나는 사회(세상)가 되길 소망한다. 그게 좋은 사회(세상), 사람 사는 사회(세상), 행복한 사회(세상) 아닌가? 우리의 개개인의 삶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 강강술래가 드러나는 삶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게 정말 의미 있는 삶, 거룩한 삶, 구원받은 삶, 행복한 삶이 아닌가? 삼위일체에 우리의 모든 미래가 달려 있다. 그러니, 우리 더 간절히, 더 진진하게, 더 유쾌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예배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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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5. 31. 10:51

성령의 숨

(사도행전 2:1-21)

 

1. 신약은 ‘구약의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말을 여러 번 한 기억이 있다. 구약을 잘 모르면, 신약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이 마음 속에 잘 와 닿지 않는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역사를 잘 모르면, 현재 우리에게서 발생하고 있는 일들의 의미를 잘 모를 수 있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잘 모르면, 현재 한국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의미를 잘 모를 수 있다. 기쁨과 안타까움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연속성 속에서 생긴다. 치열하게 싸워왔던 것이 발전되고 해소된 모습을 모이면 기쁜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안타까움과 슬픔, 때로는 분노가 차오르는 법이다. 현대인들의 마음에 기쁨과 슬픔의 감정이 밋밋해진 이유 중 하나는 역사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 힘들다 보니, 역사의 흐름에 마음 둘 겨를이 없다.

 

2. 성령강림 사건이 우리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려면, 적어도 세 가지의 구약 역사(이야기)를 알아야 한다. 일단, 오순절이 무슨 날인지를 알아야 한다. 오순절은 칠칠절, 맥추절이라고도 하며, 밀의 첫 수확을 하나님께 드리는 농경제이다. 이후 유대인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날을 기념하는 날로도 오순절을 지켰다. 오순절은 기쁨으로 가득 찬 날이다. 농사를 지어 그 첫 수확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도 기쁨이 넘치지만, 출애굽하여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는 것도 기쁨이었다. 오순절을 축제의 시간이다.

 

3. 우리가 세화하늘축제를 5월달에 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교회의 설립을 축하는 의미로서이고, 둘째는 성령강림절을 앞두고 그 기쁨에 동참하기 위함이다. 오순절의 역사적 의미를 깊이 알고 있다면, 우리는 성령강림 사건이 얼마나 기쁜 사건인지 인식하게 될 것이고, 그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축제의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 세상이 지고 있다. 성령강림절이 있는 때쯤 언제나 미국에서는 메모리얼 데이 연휴가 있어서, 성령강림의 기쁨을 모든 교우들이 교회에 함께 모여 누리는 것을 잘 못하고 있다.

 

4. 오순절 사건, 성령강림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자.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1절). 여기서 오순절 날이 ‘이르매’는 오순절 날이 ‘꽉 찼다’는 뜻이다. 부풀어 오르는 풍선을 생각해 보면 된다. 풍선에 바람이 꽉 차면, 사람들은 긴장한다. 이제 곧 풍선이 ‘펑’하고 터질 것을 기대하고 예상하기 때문이다. 오순절 날이 ‘꽉 찼다’는 말은 오순절 날에 뭔가 사건이 ‘펑’하고 터질 것을,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예수님의 제자들과 가족들이 기대하고 예상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말씀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너무 기대없이 살아가는 것 같다. 신앙생활에 있어, 반성이 필요한 부분이다. 

 

5. 오순절이 ‘꽉 차자’, 성령이 오셨다. 성령이 오신 사건은 그 자체적인 사건이 아니다. 성령의 오심 사건은 예수의 승천 사건과 한 짝을 이루고 있다. 오순절이 ‘꽉 찼을’ 때, 예루살렘에 모인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 가족들이 뭔가 사건이 발생할 것 같은 기대감에 휩싸여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오순절이 꽉 찼기 때문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일 때문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오순절이 꽉 찼을 때, 그들은 예수님이 보내시겠다고 약속한 성령이 올 것을 기대하고 기다렸다. 그리고 정말 사건이 ‘펑’하고 터졌다. 얼마나 기뻤을까.

 

6. 우리에게도 이러한 신앙의 기쁨이 있으면 좋겠다. 약속 받고 기대한 것이 실제로 우리의 삶에 ‘펑’하고 터져 올 때, 얼마나 기쁜가.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게 중요하다. 우리가 모두 어떠한 문제 때문에 괴로움 가운데 있는데, 또는 괴로움은 아니어도, 어떠한 일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 가운데 있을 때, 실제로 우리가 소망하던 것이 삶 속에서 ‘펑’하며 터져 나올 때의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한 기쁨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소망을 주님께 두는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의 가족들이 큰 기쁨을 누리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소망을 주님께 두었기 때문이다. 주님께 소망을 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될 것이다. 아멘!

 

7. 성령이 오신 사건은, 두 번째로, 구약의 노아의 방주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노아의 방주 사건이 발생하기 전 상황이 전개된다. 창세기 6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하면서 이 땅 위(지구)에는 참 어려운 일이 발생했다. 사람들이 서로 평화롭게 살면 좋은데, 그렇지 못하고, 이 땅 위에 온갖 죄악이 가득 차길 시작했다. 얼마나 죄악이 가득 차게 됐는지, 6장 5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한탄하신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 6:5-6).

 

8.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창 6:3). 노아의 방주 사건, 즉 땅 위에 있던 사람이 모두 멸망을 당하게 되는 사건은 하나님의 영이 사람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그냥 멸망당한 것,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과 함께 하지 않으니, 노아의 방주 사건에서 보듯이, 온 지면에 죽음이 난무했다. 이것은 굉장한 메타포다.

 

9. 그런데, 오순절에, 성령강림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은 노아의 방주 사건을 뒤집는 이야기이다. 사람을 떠났던 하나님의 영이 사람에게 돌아온 사건이다. 노아의 방주 사건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라.” 그런데, 성령강림 사건은 이것을 뒤집는 사건이다. 성령강림 사건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사건이다.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리라!” 이것을 우리가 잘 아는 용어로 바꾸면, “임마누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 할렐루야! 성령강림 사건은 단순히 성령이 오신 사건이 아니라, 이렇게 역사를 뒤집는 사건이다. 놀랍지 않은가?

 

10. 다른 것은 차치해 두고, 성령이 오셨을 때, 확연하게 발생한 일이 있다. 사도행전은 그것을 2장 4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니라.” 그리고, 성령을 받은 제자들과 그의 가족들이 다른 언어들로 말하는 것을 들은 군중들은 이렇게 반응한다.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행 2:6-8).

 

11. 이것은 분명히 구약 성경의 다음 사건을 떠오르게 한다.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 성령이 사람을 떠났을 때 사람들 사이에 발생한 일은 오해와 미움과 죽음이었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에게 없고 그냥 육신만 남으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 ‘죄’가 흘러 넘쳤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사람과 다시 함께 하니 육신을 넘어선 뭔가 새로운 존재가 됐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던 오해와 미움과 죽음이 물러가고, 그 사이에 이해와 사랑과 생명이 넘쳐났다. 그렇다. 성령강림 사건은 바벨탑 사건을 뒤집는 사건이다. 불통에서 소통으로 바뀐 사건이다.

 

12. 성령강림 사건은 단순히 성령이 오신 사건이 아니다. 역사를 뒤집어 엎는 사건이다. 땀 흘려 지은 농사의 수확물을 거두는 것과 같은, 출애굽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으면서 언약을 맺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은, 기쁨이 넘치는 사건이고, 노아의 방주 사건을 뒤집어 엎는 사건이고, 바벨탑 사건을 뒤집어 엎는 사건이다. 불통, 그로 인한 죄와 사망이 물러가고, 소통, 그로 인한 사랑과 생명이 넘치는 사건이다. 성령강림절은 기독교의 단순한 절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새로운 역사를 행하신 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날을 기뻐하고, 또 기뻐한다. 역사가 뒤집혔다. 천지가 개벽했다.

 

13.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수사적 표현이 아니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가 삶에서 고통받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불통 때문이다. 말이 안 통하는 거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니, 상대방에 대하여 사랑의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나라와 나라가 서로 이해를 못하니, 상대 나라에 대하여 사랑의 마음을 가질 수 없다. 소통하지 못하고, 불통만 늘어나니, 서로 미워하고, 서로 싸우고, 서로를 죽인다. 내가 나를 죽이고, 내가 상대방을 죽이고(사람이든 자연이든), 나라가 나라를 죽인다. 그리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죄가 넘치는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는. 그래서 사는 게 너무 힘들다.

 

14.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종교적 구호가 아니다. 바로 나의 생명을, 우리의 생명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다는 것이다. 구원이 실제로 임했다는 뜻이다. 삶의 역전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역사가 바뀌었다는 뜻이다. 성령을 받은 자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사도행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성령을 받은 베드로와 열한 사도는 두려움을 떨쳐내고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모인 만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큰 일’을 말했다. 하나님의 큰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이루신 일이다. 그것은 다른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바꾸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없는 육신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받은 새사람으로 거듭났다는 것이다. 불통 가운데 서로 미워하고 죽일 것이 아니라, 소통 가운데 서로 사랑하고 생명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옛사람으로 살지 말고 새사람으로 살라는 것이다.

 

15.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강림사건이 역사를 어떻게 뒤집어 놓은 것인지를 안다면, 특별히 죄와 죽음이 만연했던 노아의 방주 사건과 불통과 교만과 죄악이 만연했던 바벨탑 사건이 어떻게 뒤집어졌는지를 안다면, 우리는 성령을 받은 사람으로서 기쁨 가운데,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어떠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영(아버지의 영), 그리스도의 영(아들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 그러니,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사람답게 어디에 있던지,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떠한 존재와든지, 소통하고, 사랑하고, 생명이 넘치는 삶을 일구어 가라. 싸우지 말고, 정죄하지 말고, 파괴하지 말고, 폭력을 행사하지 말고, 사랑으로 보듬고, 무한히 용서하고, 깊이 이해하고, 생명을 풍성하게 나누라. 이것이 바로 더 이상 육신으로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숨을 쉬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성령의 숨을 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길!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5. 9. 08:12

스데반 사건: 죽음에 이르는 설교

(사도행전 7:55-60)

 

1. 우리는 성경의 이야기를 자꾸 낭만적이고 은혜롭게 읽으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성경의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의 상태는 ‘애통함’이어야 한다. ‘라멘트(Lament)’의 마음.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성경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면 안 되고, 내가 그 불 속에 들어가 있다는 상상력을 가지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더 간절하고 명확하게 들린다. 그래야 성경을 통해서 삶의 실질적인 유익을 누릴 수 있다.

 

2. 성경을 읽을 때, 낭만적이고 은혜롭게 읽는 대표적인 이야기 중 하나가 스데반 집사의 순교 이야기다. 아마도 스데반의 모습을 묘사한 이 문장 때문일 것이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 6:15). 그리고 죽을 때 “성령 충만하여” 의연한 태도로 죽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은 스데반 사건이 가진 의미를 좀 더 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문학적 장치들이지, 실제로 스데반의 죽음이 낭만적이거나 은혜롭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죽음은 힘들고 아프다.

 

3. 스데반 사건은 사도행전 6장에서부터 시작된다. 구제할 때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자, 구제를 좀 더 효율적으로 하고, 갈등의 요소를 좀 더 보듬고자 일곱 집사를 선출한다. 그 중에, 스데반이 있다. 그때 스데반에게는 이런 수식어가 붙는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a man full of faith and of Holy Spirit)”. 일곱 집사 중에서도 스데반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남다른 성품과 신앙을 가진 스데반의 이야기가 좀 더 구체적으로 나오게 될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4. 스데반의 이야기는 사도행전 6장 8절에서 이렇게 이어진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사도행전은 예수의 부활 이후에 부활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전하는 성경이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것, 그리고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한 것은 무슨 매직 같은 일을 행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으로 인해 드러난 하나님 나라를 전한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세상은 바뀌었다. 부활 사건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 이전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5. 스데반이 전하는 새로운 세상, 하나님 나라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성경은 그들을 이렇게 기록한다. “이른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갈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행 6:9). 이들을 규정해 주는 용어는 ‘헬라파 유대인’이다. 히브리파 유대인은 유대땅에 살고 있는 유대인을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말한다. (한국 사람인데, 우리처럼 외국에서 사는 사람들 같은 것이다.)

 

6. 스데반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복음)는 무엇일까? 이것은 신약성경을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인데, 사도 바울도 자기 서신에서 계속해서 전한 것이다. 믿음을 통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자녀(백성)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지금은 이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진술이지만, 사도행전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 말은 굉장히 혐오스러운 말이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특권이 강탈당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7. 1922년,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 날을 제정하며 이렇게 선언했다.

1) 어린 사람을 헛말로 속히지 말아 주십시오

2) 어린 사람을 늘 갓가히 하시고 자조 이야기하여 주십시오

3) 어린 사람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하여 주십시오

4) 어린 사람에게 수면과 운동을 충분히 하게 하여 주십시오

5) 리발이나 목욕 가튼 것을 때맛처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6) 낫분 구경을 식히지 마시고 동물원에 자조 보내주십시오

7) 장가와 시집 보낼 생각마시고 사람답게만 하여 주십시오

 

100년이 지난 지금은 너무도 당연한 상식이 된 어린이에 대한 인권이다. 그러나 100년 전만 해도, 어린이에게는 인권이라는 것이 없었다. 다른 말로, 어린이는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다.

 

8. 스데반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하고 새로운 세상(하나님 나라)이 열린 것을 선포했을 때, 유대인들, 특별히 스데반과 관련해서는 헬라파 유대인들은 스데반의 복음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스데반을 기소한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정당한 기소는 아니다. 매우 비열한 방식으로 스데반을 기소한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백성들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행 6:10-13).

 

9. 스데반의 기소가 정상적인 기소가 아니었다는 것을 성경은 드러내고 있다. 아무튼,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기소한 구체적인 내용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율법이고, 다른 하나는 성전이다. 스데반이 율법과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것은 신성모독 죄를 말하는 것이다. 스데반이 지은 죄는 신성모독 죄였다. 성경에서 신성모독 죄는 돌로 쳐 죽임을 당한다. 스데반이 죽을 때 돌로 쳐 죽임을 당했는데, 그 이유는 공회가 스데반을 모함해서 죽인 죄목이 신성모독 죄였기 때문이다. 스데반의 죽음은 이렇게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울분을 토하게 되는 죽음이다.)

 

10. 속임수와 강제로, 억울하게 공의회에 서게 된 스데반은 의연했다. 그는 그곳에서 변론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설교를 한다. 그의 긴 설교는 사도행전 7장 전체를 장식한다. 설교를 통해서 스데반이 하고 싶은 말은 한 마디로, 유대인들의 기만과 불신앙이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이방인을 받아들였는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불경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들이 하나님보다 더 크고 위대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게 우상숭배이고, 이게 신성모독 아니면 무엇인가!

 

11. 그런데, 왜 (헬라파) 유대인들은 회개(마음을 돌이켜 복음을 받아들여, 이방인들을 자기들의 형제로 받아들이는 일)하지 않고, 분노하여 스데반을 죽였을까? 유대인들은 스데반이 자신들의 특권의식을 무너뜨리고 빼앗아 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스데반을 죽였다. 율법과 성전은 유대인들의 특권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무너지니 자신들의 삶도 무너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난 유대인들은 스데반에게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신성모독죄를 씌워 돌로 쳐 죽였다. 이렇게 자기 정체성을 이루는 것을 빼앗긴 자는 포악해진다. 하나님을 믿은 게 아니라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믿은 것이다. 주시는 자도 하나님이요 거두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하고 믿지 않으면 우리는 포악한 괴물이 된다. 생명을 죽이고 헤쳐도 그것을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다.

 

12. 스데반의 죽음은 정말 안타까운 죽음이다. 희생된 거다. 칭송받을 죽음이 아니라 안타까운 희생의 죽음이다. 가해자에 의해서 피해를 당한 죽음이다. 복음 증거하다 죽어도 괜찮다는 말은 무책임한 말이다. 복음을 핑계로 사람의 생명을 사지로 몰면 안된다. 이 사건 이후로 그리스도인들이 흩어진다. 무서워서 살아남으려고 그렇게 한 것이다. 이건 마음 아픈 일이다. 복음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스데반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말은 아주 못된 말이다. 하나님은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생명을 희생시키는 분이 아니다. 가슴 아픈 죽음 앞에서 우리는 그저 숙연해질 뿐이다.

 

13. 스데반의 죽음이 가슴 깊이 숙연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가 전한 하나님 나라(복음) 덕분에 우리(이방인들/유대인이 아닌 자들)가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스데반처럼 행할 수 있을까? 의도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설교(복음 전하는 일/하나님 나라 전하는 일)는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유대인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였다고 전한 복음 때문에 스데반은 죽었다. 그리고 그 복음의 열매는 지금 우리가 따먹고 있다. 이렇게 누군가의 핏값으로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누군가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의 피를 흘릴 수 있을까?

 

14.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 운동 덕분에 요즘 세상은 어린이 천국이 되었다. 어린이 천국은 그냥 온 게 아니다. 누군가의 희생 덕분이다. 스데반의 설교(복음전파) 덕분에 우리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그냥 우연히 된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희생 덕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십자가의 복음을 전한 신실한 신앙의 선배들 덕분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도 누군가의 구원을 위해서 기꺼이 ‘죽음에 이르는 설교’를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15. 무겁고 무서운 부르심 같지만, 너무 힘들고 어려워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스데반의 모습을 보면 그 일이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스데반이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니, 그의 얼굴은 천사와 같았고, 그는 죽을 때 누구를 원망하거나 억울해하지 않고, 오히려 성령 충만하여 누구도 보지 못한 하나님과 그 우편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 이런 기쁨과 은혜가 충만하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가 넉넉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스데반 사건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더 성숙하게 하시길 기도한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4. 4. 00:25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마태복음 21:1-11)

 

1. 종려주일은 사순절 마지막 일주일의 시작이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가장 절정을 이루는 시간이다. 그러나 몰입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할 것이다. 드라마에서 가장 절정을 이루는 회차는 순간 시청률이 올라간다. 기독교인이 평소에 자기 신앙에 별로 몰입을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때만이라도 신앙에 몰입하면, 큰 유익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몰입합시다!” 히브리서는 이것을 이렇게 말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예수를 바라보자!” 적어도, 사순절 동안은, 그리고 그 중에서도 고난주간만큼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몰입하고 집중할 수 있는 신앙이 있어야 한다.

 

2. 종려주일에 읽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나귀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그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면서 먼저 도달한 장소는 감람산 기슭에 있던 벳바게라는 마을이다. 이것을 특별하게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저자의 의도가 있다. 성경은 굉장히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성경은 역사의 기록이면서 경전이다. 역사의 기록이 경전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 역사에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의 역사, 거기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가 거룩한 것이고, 경전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3. 우리는 어떠한 사람을 ‘성인(Saint)’라고 부른다. 그 사람을 거룩한 사람이라고 칭하는 이유는 그 사람 자체의 인격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성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성인을 통해서 우리는 그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본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을 성인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삶을 통해서, 나의 인격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드러나시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믿는 자를 일컬어서 ‘성도(거룩한 무리)’라고 칭하는 것이다. 우리의 인격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부족한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4. 성경의 대표적인 예가 다윗 왕이다. 다윗 왕은 여러가지 인격적인 결함이 많았던 사람이다. 적군과 당당히 맞서지 못하고 목숨을 부지하고자 미친놈 행세도 했고, 자기의 충직한 장수 우리야의 아내를 비열한 방식으로 취하기도 했고, 자식(압살롬)과의 불화로 왕궁에서 쫒겨나기도 했고, 동고동락 했던 부하 장수(요압)와 극심한 갈등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게 다윗 왕, 다윗 왕조가 그리움의 대상이요, 회복의 목표가 된 것은, 다윗 왕을 통해서, 그리고 다윗 왕조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충만히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 왕과 다윗 왕조는 이상적인 왕과 왕조가 된 것이다.

 

5.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면서 예수님의 일행이 감람산 벳바게로 먼저 간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예루살렘으로 곧장 가지 않고 감람산에 들렀다 가는 여정의 동선은 다윗 왕을 연상시킨다. 다윗 왕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사무엘하 15장 이하의 말씀에 보면,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감람산을 넘어 나귀를 타고 피신한다. 예수님이 감람산에서부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것은 무엇을 연상시키는가? 당연히 다윗의 왕의 귀환을 연상시킨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고 메시아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이다.

 

6. 벳바게 근처에 이르자, 예수님은 제자 두 명을 맞은 편 마을로 보내 매인 나귀와 나귀새끼를 풀어 데라고 오라고 하신다. 그리고 누가 ‘왜 나귀를 끌고 가오?’라는 둥의 말을 하면, ‘주가 쓰시겠다’라고 말하면서 끌고 오라고 한다.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냥 거의 도둑질이나, 아니면 무대뽀 행동 같다. 어디에 주차 되어 있는 차를 끌고 가면서 누군가 ‘왜 당신 차도 아닌데 그렇게 마음대로 끌고 가오’라고 할 때, ‘주가 쓰시겠다’라고 말하면, ‘별 미친놈 다보겠네’라면서 욕을 먹을 것이다.

 

7. 조선시대 때도 교통 수단을 말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부류가 있었다. 마패를 지닌 자였다. 우리는 대개 드라마 같은 곳에서 암행어사가 마패를 가지고 다니며, ‘암행어사 출두요’ 할 때 마패를 꺼내 드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 당시에 마패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그 당시에 이렇게 남의 나귀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은 왕족이나 랍비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나귀를 끌고 오면서 ‘주가 쓰시겠다’라고 했을 때, 이 용어를 통해서 드러내고 싶은 것은 분명하다. 예수는 다윗 왕의 자손(왕족)이고, 랍비라는 것이다. 특별이 ‘주’라는 호칭은 그리스도인에게 각별한데,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수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신앙의 고백이 담긴 것이다.

 

8. 나귀의 주인은 자신의 나귀를 기꺼이 ‘주께’ 내어드렸다. 이러한 행위는 현재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신앙의 지침이 된다. 우리가 우리의 소유를 주님께 기꺼이 내어 드리는 이유는 그것을 주님께서 쓰시기 때문이다. 나귀의 주인이 그 나귀를 아무리 잘 사용했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그 나귀를 사용하신 것만큼 중요하고 소중한 일을 위해서 사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주님께 내어드린 그 나귀가 얼마나 귀한 일을 했는가. 안 그랬으면 그냥 짐이나 옮겨 나르는 일꾼 역할을 했을 텐데, 주님께 내어드린 나귀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등에 태우고 예루살렘에 이르는 놀라운 일을 했다. 그 덕분에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소식이 전해진 것 아닌가.

 

9. “주가 쓰시겠다” 할 때 믿음으로 내어드린 우리의 소유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어떠한 위대한 일을 하게 될 지 우리는 잘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늘 이렇게 기도할 줄 알아야 한다. “주님, 주가 쓰시겠다 말씀하시면 순종하는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내어드리겠습니다. 내가 이것을 사용하는 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주님을 믿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저에게 말씀해 주옵소서. 나귀를 내어드린 그 사람처럼, 저도 내어드리겠습니다. 주님 영광 받으옵소서! 아멘.”

 

10. 이어지는 이야기를 보면,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이사야 62장의 말씀과 스가랴 9장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예언의 성취’라는 뜻이다. 우발적 사건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발생한 구원 사건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삶이 성경에 잇대어 있어야 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다. 우리가 매일 성경을 진중하게 들여다보며 거기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그 숨결로 숨을 쉬며 하루하루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우발적인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구원 사건인 것을 선포해야 하기 때문이다.

 

11. 되는 대로 사는 우발적인 삶과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삶은 질적으로 다르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삶은 매 순간이 구원 사건이다. 삶이 구원 사건이라는 뜻은 무엇인가?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넘친다는 뜻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담대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넘치는 자의 삶은 아무도 못 말린다. 담대한 마음, 즉, 용기 있는 자의 삶은 아무도 못 건드린다. 이렇게 놀라운 삶은 ‘예언의 성취’가 있는 삶, 즉 말씀에 잇대어 있는 삶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은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자기의 삶을 발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12.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구원 사건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5절 말씀이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마 21:5). 이사야서는 예수님 사건(메시아 사건)을 이해하는 데 가장 필수적인 구약 성경이다. 이사야 61장은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회당에서 읽은 대표적인 말씀이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사 61:1).

 

13. 이사야 60장~63장은 특별히, 여호와의 종(메시아)을 통해서 이루어질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선포에 대한 말씀이 실려 있다. 스가랴서도 마찬가지다. 시온의 딸, 즉 예루살렘의 주민, 즉, 이스라엘에게 선포된 말씀이다. 다윗 혈통의 왕이 등장함으로써 하나님이 다윗과 맺으셨던 언약대로 다윗 왕조가 회복될 것임을 선포하고 있다. 이렇게 이사야서와 스가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드러내 준다. 지금 예루살렘으로 입성한 예수가 바로, 여호와의 종으로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실, 다윗의 왕의 자손, 메시아라는 것이다.

 

14. 하지만, 자기의 삶이 예수님처럼 성경에 잇대어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반응은 다르다. 자기의 삶이 성경에 잇대어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지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환호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 21:9). 그러나, 자기의 삶이 성경에 잇대어 있지 않는 사람들은 시큰둥하게, 그냥 이렇게 예수를 말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마 21:11).

 

15.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성경에 잇대어 있어 예언의 성취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그분을 향하여 ‘호산나’를 외치고 있는가? 아니면, 그냥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 서로가 서로의 삶을 알아보는 것의 관건은 ‘우리의 삶이 어디에 잇대어 있는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잇대어 있는 사람들은 서로를 깊이 이해하게 된다. 그의 삶은 그냥 우발적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삶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서로를 깊이 이해하게 된다.

 

16. 예수의 삶이 우발적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예언의 성취요 구원 사건이라는 것을 깊이 알았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깊이 사랑했다.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갔고, 죽은 후에도 그 무덤에 찾아갔다. 그러나, 예수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 자들, 즉,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잇대어 살지 못했던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고, 그의 죽음을 헛된 죽음으로 조작하려고 술수를 썼다. 예수는 정확하게 예수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고난을 당했다.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17. 이해할 수 없고, 불필요한 고통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고, 정확하게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삶의 이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그냥 우발적으로 서로 만나고 대하고 사귐을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무엇을 회복해야 할까?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잇대는 것이다. 나의 삶이 우발적인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잇대어 있는 삶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18. 우리 자신에게 솔직하게 물어보자. 나는 얼마나 성경을 가까이 하고 있는가. 성경을 읽으면서 그냥 읽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하나님의 말씀에 잇대어 있어야 한다는 개념(신앙)을 가지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려고 읽고 있는가. 나뿐만 아니라, 가족 구성원 누구에게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잇대어 살도록 권면하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의 삶, 그리고 가족의 삶, 또한 만나는 모든 이들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과 잇대어서 이해하도록 노력하고 있는가. 정확하게 사랑한다는 것, 정확하게 사랑받는다는 것은 말씀에 잇대어 그 사람의 삶을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지 못할 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고통을 안겨주게 된다.

 

19. 삶이 고통스러운 사람이 있는가. 관계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나 스스로에게. 부부 관계 속에서, 자녀와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그 누군든지와의 관계 속에서. 고통을 느끼는가. 그렇다면, 우선,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잇대어서 생각해 보라. 그러려면, 우선 성경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찾으려는 갈망이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예언의 성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성경에 잇대어 있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구원 그 자체가 된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우발적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잇대어 살라. 그럴 때 우리는 정확하게 사랑하게 된다.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반대로, 정확하게 사랑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2. 14. 04:11

우리의 사역이 믿음을 일으킨다

(고린도전서 3:1-9)

 

1. ‘지구적 집단 트라우마 상태.’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트라우마를 겪게 되면, 극도의 긴장상태가 유지된다. 우리 몸에서는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데, 공격성이 높아진다. 요즘, 미쳐 날 뛰는 것 같은 사건사고가 많은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극도의 긴장상태가 유지되니까,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 공격성이 높아지고, 조그마한 트리거가 생기면 공격성이 실제 실행으로 옮겨진다. 아주 위험한 상태인 것이다. 트라우마 상태에서는 마음이 겉잡을 수 없이 혼란해진다. 불안, 걱정, 원망, 화남, 슬픔 등 다양한 감정 반응이 나타나는데, 위에서 말한 것처럼 공격성이 높아진 상태이기 때문에 이러한 감정에 대한 컨트롤이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러한 시대에 인간은 말 그대로 ‘walking beast/walking bomb’가 되기 쉽다.

 

2. 좀비 드라마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The Walking Dead”를 보면, 실제로 그렇다. 그 드라마에서 무서운 것은 좀비가 아니다. 인간이다. 모든 인간이 좀비로 변해버린 세상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집단 트라우마에 걸려 극도의 긴장상태로 살아간다. 공격성이 높아지고, 자신에게 생긴 여러가지 감정의 변화를 어떻게 컨트롤 해야 할지 몰라 힘들어한다. 살아남은 인간들이 서로 힘을 합해서 평화롭게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하고,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상대방에게 위협을 가하고 착취한다. 좀비가 무서운 게 아니라 인간이 무섭다. 인간은 아주 무서운 짐승이 된다.

 

3. 트라우마 상태가 되면 무력감과 불안감 때문에 해야 할 일을 잘 실행하지 못하게 된다. 몸에서 그 현상이 나타나는데, 잠을 잘 못 이루게 되고, 두통이 생기고, 소화불량이 생기고, 식욕부진이 생긴다. 몸이 자기의 역할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삶에도 큰 영향이 온다. 하던 일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 공부하던 학생은 학교에 가는 게 싫어지고, 직장생활 하던 회사원은 일 하는 게 싫어지고, 자신이 의미 있게 하던 일들에 대해서 왠지 거부감이 들면서 손을 놓게 된다. 트라우마는 신앙생활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기도할 수 없게 되고, 무엇보다 늘 다니던 교회마저 발걸음을 끊게 된다. 트라우마 상태에서 드는 가장 보편적인 생각은 이런 것이다. “학교 가면 뭐해.” “돈 벌면 뭐해.” “교회 가면 뭐해.”

 

4. 각종 미디어와 SNS 플랫폼이 전세계를 초연결 사회로 만들어서 지구촌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가까워졌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는 트라우마를 겪는다. 각종 미디어와 SNS에 올라오는 뉴스들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전혀 기쁨을 주지 못한다. 매일 보는 뉴스에서 총기관련 사건사고를 보는데, 그 뉴스를 보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한테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감사하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한테 언제 저런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불안하다.’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감사 헌금을 내지 않는다. 그 돈으로 총을 산다.

 

5. 이러한 시대에 자기 자신을 잘 보살피는 일은 너무도 중요하다. 우리는 지금 ‘지구적 집단 트라우마 상태’에 있다. 이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구적 집단 트라우마 상태에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발생하고 있는 ‘무력감과 불안함’의 자기장이 잘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나에게 피부로 와닿지 않는다고 해서 나에게 무력감과 불안함의 자기장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방사선 같은 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잘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방사선에 조금만 노출되면 우리는 머지 않아 아주 심각한 병에 걸리게 될 위험이 높다. 마찬가지다. 지구적 집단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요즘, 무력감과 불안함 때문에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될지, 너무도 위태위태하다.

 

6. 상황은 좀 다르지만, 고린도교회는 아주 큰 혼란 가운데 있었다. “내 형제들아 클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고전 1:11).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복음을 전해서 교회를 세웠는데, 그곳에서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왔을 때, 사도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파겠는가.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본인들의 상태가 어떤지를 적나라하게 말해주어야 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1).

 

7.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은 스스로를 착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앙이 ‘신령하다’고 생각했다. 즉, 그들은 스스로 ‘나는 믿음이 좋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며, 이렇게 뽐냈다. “나는 바울에게 속한 사람이야.” “나는 아볼로에게서 신앙을 배웠어!” “나는 게바의 제자야!” “무슨 소리들 하고 있어 정말. 나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구!” 이렇게 스스로 자신의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는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에게 바울은 직격탄을 날린다. “너희는 육신에 속한 자야! 너희들의 신앙은 그냥 어린 아이들의 신앙 수준 밖에 안 돼!”

 

8.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우리도 우리의 신앙 상태를 엄청 착각하면서 살고, 우리도 우리의 정신 상태를 엄청 착각하면서 산다. “착각하지 맙시다!” (소확행, 어쩔TV, 돼지런하다)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근자감’이라는 말이 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는 뜻이다. ‘나는 괜찮아. 나는 괜찮을거야.’ 우리는 이렇게 근자감을 가지고 산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가끔 근자감을 지닌 소들이 나온다. 사자가 다가오는데, 도망가지 않고 뿔을 들이대면서 사자에게 덤벼드는 소들이 있다. 대개 사자에 의해서 한 방에 제어된다. 사자가 오면 도망치는 게 상책인데, 사자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근자감’을 지닌 소는 대개 사자의 밥이 된다.)

 

9. 우리는 지금 굉장히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괜찮지 않다. 우리의 신앙도, 우리의 정신도 괜찮지 않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직격탄을 날린 것처럼, 나도 직격탄을 날려보자면, 요즘 많은 신앙인들이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한다. 유튜브를 통해서 여러 설교자들의 설교를 듣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교류가 있고, 나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것은 어느 정도 도움이 되지만, 나와 전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것은 그리 도움이 되지 못한다. 위로 받았다, 나는 신앙이 괜찮다는 착각만 불러 일으킬 뿐이다.

 

10. 우리는 괜찮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근자감’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이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주 낮은 자세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아주 기초로 돌아가는 것이다.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일 중에 하나는 아주 기초적인 일부터 안 된다는 것이다. 밥을 먹어야 하는데, 밥 먹기를 싫어 한다. 사람들과 교제를 해야 하는데, 사람 만나기를 싫어한다. 몸을 좀 써야 하는데, 몸 쓰는 것을 귀찮아 한다. 이런 기초적인 일부터 되지 않으니까, 더 중요하고 큰 일들을 하는 것은 꿈도 못 꾼다.

 

11. 고린도교회가 그랬다.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되지 않았다. 그러니 더 큰 일을 행하게 되는 것은 꿈도 못 꾸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 3:2). 그러면서 바울이 아주 중요한 말을 한다. 3장 3절이하의 말씀을 풀이해서 말하면 이런 것이다. ‘누구는 바울에게 속했다고 말하고, 누구는 아볼로에게 속했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의 믿음에는 문제가 없다고 뽐을 내지만, 서로 그렇게 시기와 분쟁을 하고 있으니, 아볼로에게 속했네, 바울에게 속했네,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바울에게 속했네, 아볼로에게 속했네,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와 아볼로가 행한 것을 그대로 배우라. 우리는 그저 각각 받은 은사에 따라서 봉사의 일을 한 것이고, 우리의 봉사를 통해 너희들의 믿음이 자라난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을 자라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12. 여기서 우리들에게 실제적으로 중요한 말씀은 고린도전서 3장 5절이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아볼로와 바울은 사역자였다. 사역자(minister)는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몸을 쓰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믿음을 갖게 된 것은 아볼로와 바울이 사역을 했기 때문이다. 봉사를 했기 때문이다. 몸을 썼기 때문이다. 사역은, 봉사는, 몸을 쓰는 일은 믿음을 일으킨다. 믿음은 사역으로, 봉사로, 몸으로 일으키는 것이다.

 

13. ‘일으킨다’라는 말을 좀 더 풀이하면 세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1) 믿음이 생기게 한다 (없던 것이 있게 됨)

2) 믿음이 자라게 한다 (있는 것이 더 풍성)

3) 믿음이 다시 서게 한다 (죽었던 것이 다시 살아난다)

 

14. 몸(사역, 봉사)을 써야, 믿음이 생긴다. 몸을 써야 믿음이 자란다. 몸을 써야 시들했던 믿음이 다시 선다. 신앙이 괜찮지 않은 이 시대에 우리는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몸을 써야 한다. 몸을 써서 예배당에 오는 것을 해야 한다. 몸을 써서 기도하는 것을 해야 한다. 몸을 써서 성경을 읽는 일을 해야 한다. 몸을 써서 어떤 봉사라도 한 가지 해야 한다. 일례로, 유튜브로 여러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일은 아주 손 쉽다. 그냥 틀어 놓고 듣기만 하면 되니까. 그러나, 성경을 펴고 읽는 일은 쉽지 않다. 좀 더 적극적으로 몸을 써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몸을 쓰지 않으면, 믿음이 생기거나, 자라거나, 다시 서지 않는다. 몸을 쓰지 않고 하는 일은 그저 착각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몸을 쓰지 않고 운동을 해보라. 그러면 나는 착각할 것이다. 나는 건강해. 그런데 정말 그런가?

 

15. 교회 일은 아주 작은 것도 크고 거룩한 일이다. 하다못해, 주보를 접는 일, 주보를 나누어 주는 일도 크고 거룩한 일이다. 출애굽기 성막 이야기를 보면, 아무나 주의 일을 할 수 없었다. 택하심을 받은 사람만 할 수 있었다. 나는 주일 준비를 하면서 방송 장비를 셋업하고, 헌금함을 옮겨 놓으면서 출애굽기의 성막 이야기를 늘 떠올린다. 그러면, 카메라 삼각대를 설치하는 일, 강대상을 옮기는 일, 마이크를 설치하는 일이 정말 다르게 다가온다.

 

16. 사랑하는 사람의 말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유언처럼 들리는 법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것은 아무리 작은 물건이라도 유품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 받았다고, 나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고, 그렇게 정체성을 가진다면, 교회에서 하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그것이 유언처럼, 유품처럼 들리고 느껴질 것이다. 그게 믿음 아닌가?

 

17. 괜찮지 않은 시대에, 우리는 거창한 일을 할 수 없다. 괜찮지 않은 시대에, 우리가 우리의 신앙, 그리고 우리의 삶을 잃지 않고 건강하게 지키려면, 아주 작은 것부터 몸으로 하는 게 중요하다. 사역, 봉사, 이런 거창한 말 말고, 그냥 몸으로 하는 일이 중요하다. 와서 주보라도 접으라. 와서 주보라도 나누어 주라. 와서 교회 마당에 흩어져 있는 쓰레기라도 주우라. 와서 미디어팀 장비 설치하는 것이라도 거둘라. 와서 부엌 냉장고 정리라도 하라. 와서 친교실에 식탁 의자라도 설치하라. 일찍 와서 오는 사람들에게 반갑게 인사라도 하라. 우리의 사역이 믿음을 일으킨다. 몸을 움직이는 것. 몸으로 뭔가라도, 아주 조그마한 것이라도 하는 것. 그것이 이 괜찮지 않은 시대에 나를 살리고, 이웃을 살린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1. 31. 07:10

죄에 팔린 인간

(로마서 7:14-25)

 

1. 로스앤젤레스(LA)의 할리우드 거리에 가면 유명 영화인들의 손바닥을 조형 떠서 바닥에 장식해 놓은 거리가 있다. 2000년 1월, 내가 미국에 처음 여행 와서 그곳에 갔을 때 바닥에 새겨진 유명인들의 손바닥 중 가장 먼저 찾아본 것은 ‘로빈 윌리엄스(Robin Williams)’의 손바닥이었다. 1998년에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한 <패치 애덤스>를 감명 깊게 보았고, 그보다 훨씬 전인 1989년에 그가 주연한 <죽은 시인의 사회> 또한 마음에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 같은 경우는 각색을 해서 연극으로 만들어 문학의 밤에서 친구들과 공연을 하기도 했다.

 

2. <패치 애덤스>는 참 좋은 영화다. ‘패치(patch)’라는 말이 참 따뜻하다. ‘상처를 치유하다’라는 뜻을 가진 ‘patch’는 뭔가 해지고 어긋난 것을 다시 정상적으로 돌려놓는 것을 말한다. 영화 <패치 애덤스>, 주인공 애덤스는 상처받은 영혼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는 일을 한 덕에 ‘패치’라는 별명을 얻었다. 애덤스, 본인의 삶도 평탄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패치’라는 별명을 얻고 정신적인 상처까지 치료하는 좋은 의사가 되겠다고 다짐하고 의사가 되기 위해 의과대학에 입학한다. 의과대학에 입학하자 마자 그는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친구들과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해나간다. 그러다 어느 날, 정신 이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혼자 갔던 여자친구가 환자에게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한다.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던 일이 엉망이 된 순간이었다.

 

3. 우리 인간의 삶이라는 게 그런 것 같다. 아무리 좋은 마음을 가지고 선한 일을 행해도 그것이 그렇게 생각만큼 선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 같다. 요즘에는 선한 일 하는 것도 쉽지 않다. 선의를 가지고 누군가를 도와주었다가 오히려 해를 당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누군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면서도 그를 도와주기 위해 선뜻 나서지 않는다. 우리는 마음이 너무도 많이 움츠려 든 사회에 살고 있는 듯하다.

 

4. 나희덕 시인의 ‘호모 루아’라는 시를 읽었다. 고개가 끄덕여 지기도 했고, 마음이 씁쓸해 지기도 했다.

 

호모 파베르이기 전에

호모 루아, 입김을 가진 인간

 

라스코 동굴이 폐쇄된 것은

사람들이 내뿜은 입김 때문이었다고 해요

부드러운 입김 속에

얼마나 많은 미생물과 세균과 독소가 들어 있는지

거대한 석벽도 버텨낼 수 없었지요

 

오래전 모산 동굴에서 밤을 지낸 적이 있어요

우리는 하얀 입김을 피워 올리며

밤새 노래를 불렀지요

노래의 투명성을 믿던 시절이었어요

노래의 온기가 곰팡이를 피우리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몸이 투명한 동굴옆새우들이

우리가 흘린 쌀뜨물에 죽었을지 모르겠어요

 

입김을 가진 자로서 입김으로 할 수 있는 일들

허공에 대한 예의 같은 것

 

얼어붙은 손을 녹일 수도

유리창의 성에를 흘러내리게 할 수도

후욱, 촛불을 끌 수도 있지만

목숨 하나 끄는 것도 입김으로 가능해요

참을 수 없는 악취

몇 마디 말로

영혼을 만신창이로 만들 수 있지요

 

분노가 고인 침으로

쥐 80마리를 죽일 수 있다니,

신의 입김으로 지어진 존재답게 힘이 세군요

그러니 날숨을 조심하세요

입김이 닿는 순간 부패는 시작되니까요

 

* homo Ruah, ‘Ruah’는 히브리말로 ‘숨결, ‘입김’을 뜻함.

(나희덕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에서)

 

5. 왜 그럴까?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의지를 가지고 좋은 일을 해도 그 결과가 선하게 나오는 일이 드물고, 더군다나, 위의 시가 서술하고 있듯이, 우리의 입김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입김이 여러가지 악한 일을 한다. ‘영혼을 만신창이로 만들 수’도 있다고 한다. 시에서 표현하고 있는대로, 신의 입김(ruah)으로 지어진 존재인데, 우리의 입김은 왜 신처럼 선하지 못하고, 이렇게 악할까?

 

6. 로마서 7장의 마지막 부분은 매우 시적이다. 아주 강력한 용어들이 등장을 하고,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표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한 용어는 이것이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14절). 상품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팔렸도다’를 들으면, 그냥 상품을 사고 파는 정도의 이미지만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교회에 써 보낸 이 편지에서 그가 사용하고 있는 ‘팔렸도다’의 용어는 ‘노예를 사고 파는 것’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죄에게 노예로 팔렸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7. 현대인들은 대체적으로 노예에 대한 경험이 없다보니, 노예가 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별 감흥이 없다. 노예는 단순히 다른 존재에게 속해서 그가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노예는 주권과 자유를 박탈당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노예가 된다는 것은 고된 노동을 하게 된다는 뜻 이전에,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주권과 자유를 박탈당한다는 뜻이다. 이게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우리는 잘 느끼지 못한다.

 

8. 요즘 사람들이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들다고 아우성 치는가?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어서 별로 불편할 게 없어 보이는 세상이지만, 사람들은 못살겠다고 아우성 친다. 아우성 치다 스스로 목숨을 놓아버리는 사람도 부지기 수로 많다. 통계를 보면, 2000년 이전과 2000년 이후의 자살률을 비교하면, 2000년 이후에 자살한 사람이 훨씬 많다. 삶은 더 풍요로워진 것 같은데, 왜 사람들은 못살겠다고 아우성 치는가.

 

9. 예전에 한국에서 대학을 구분할 때는 서울,연,고대, 그리고 기타대로 구분했다. 그러다, 수도권 대학과 지방대로 구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식으로 대학을 구분하지 않는다. 한국의 대학은 의대와 기타대로 구분된다. 올 대학입시 통계를 보면 서울,연고대에 합격한 학생 중 2200여명이 등록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어느 대학이든, 의대에 합격한 학생들이 등록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지금 모두 ‘의사’가 되고 싶은 사회다. 왜 그럴까? 이유는 단순하다. 돈 때문이다. 현재 의사가 가장 안정된 직업이라는 생각이 편만하기 때문이다.

 

10. 그런데 실제로 의사를 하면서 행복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제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잘 하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일을 하면서 산다. 노동이 아름다우려면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잘 하는 일을 해야 하는 건데, 노동이 힘든 이유는 우리가 돈에 팔려서 우리가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 내가 별로 잘 하지 못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겉으로 보기에는 아닌 것 같으나, 우리가 얼마나 노예처럼 사는지 모른다. 우리의 주권과 자유는 별로 없고, 우리는 누군가에게 팔린 사람처럼, 그렇게 노예로 산다. 그래서 요즘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즐비하다.

 

11. 요즘 한국에서는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라는 방송이 인기를 얻었다. ‘어른’이라는 용어를 붙인 이유는 요즘 우리 시대에 ‘어른’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어른’은 무슨 의미일까? 말씀과 연관해서 설명하면, ‘노예처럼 살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 죄에 팔리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 주권과 자유를 빼앗기지 않은 사람이 아닐까? 그래서 노예처럼 사는 사람을 도와주고, 죄에 팔리려고 하는 사람을 도와주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주권과 자유를 존중해 주는 사람이 아닐까? 김장하 선생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돈을 벌었다면 결국 아프고 괴로운 사람들을 상대로 해서 번 건데, 그 소중한 돈을 함부로 쓸 수 없었다. 똥은 쌓아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뿌려 버리면 거름이 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방송 마지막에 김장하 선생은 이런 말을 한다. “아무도 칭찬하지도 말고 나무라지도 말고 그대로 봐주기만 하라고 말하고 싶다.”

 

12. 바울은 자기 자신이 죄에 팔렸다고 말한다. 그래서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일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좋은 일을 하고 싶은데, 선한 의도를 가지고 착한 일을 하고 싶은데, 이상하게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한 일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우리 모든 인간이 고백하는 바다. 우리 인간의 실존이 그렇다. 그래서 바울처럼 우리도 이런 고백을 하게 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

 

13. 이것만큼 비참하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고백이 있을까? 이것만큼 가련하지만 동시에 솔직한 고백이 있을까?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곤고하다. 뭔가 잘 살고 있는 것 같고, 뭔가 잘 하고 있는 것 같고, 뭔가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늘 부족하고 죄스럽고 행복하지 못하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에도 수도 없이 절망에 빠지고 낙심한다. “What a wretched I am. Who will rescue me from this body of death?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1. 16. 18:04

나는 예수와 결혼했다

(롬 7:1-6)

 

1. 작년 말(2022년 11월)에 출간되어 세간의 관심을 끌고 우수출판콘텐츠에 선정되기도 했던 『태극기와 한국교회』를 읽었다. 민주주의가 발달되면 시민들의 시위도 늘어나는 법이다. 한국의 시위 풍경을 보면 언제부터인가 민주화 진영은 촛불을 들고 시위를 하고, 보수 진영은 태극기를 들고 시위를 한다. 보수 진영, 특히 보수 기독교 진영에서 태극기를 들고 시위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국가 상징인 태극기와 기독교 보수 진영은 무슨 연관을 지니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래서 저자는 국가상징인 태극기와 기독교의 관계사를 연구해서 그 결과를 저작물로 내어놓았다.

 

2. 역사를 돌아보는 일은 오늘의 문제가 왜 발생했고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 꼭 필요하다. 역사는 과거를 공부하는 일이지만 과거에 머무는 게 아니라 미래를 열어젖히는 일이다.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은 점점 답답해져 가고 있다. 현실이 감옥이나 지옥처럼 느껴지면 인간은 병리적 현상을 나타낸다. 사는 것을 못 견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나 자신에게 자해하는 일을 넘어 상대방에게도 해를 끼치는 일이 급격히 늘어난다. 즉 혐오와 폭력이 늘어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에 따스함이 줄어든다. 급격히 모든 게 서늘해진다.

 

3. 서늘한 사회는 누구에게나 고통이다. 인간은 36.5도의 체온을 유지해야 하는 것처럼 마음의 온도도 일정 온도를 유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매우 사나워진다. 그래서 인간은 신체적으로도 36.5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거의 모든 신체 에너지를 쓰는 것처럼, 마음의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모든 정신적 에너지를 쓰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인간다움이란 서로의 몸과 마음이 적정 온도를 유지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인간다움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몸과 마음의 적정 온도를 잃어버리는 것이고, 다른 이의 몸과 마음의 온도를 빼앗아버리는 것이다. 이런 사회는 슬픈 사회이다.

 

4. 한국의 근대사는 차갑다. 몸과 마음의 따스함이 없어 모든 사람들이 괴로웠다. 힘센 자들(나라와 민족)의 폭력이 난무했고, 약한 자들(나라와 민족)은 굴욕을 겪어야만 했다. 『태극기와 한국교회』에는 그러한 폭력과 굴욕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사람들에게 따스함을 안겨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태극기와 기독교였다. 국가상징으로서 태극기는 스러져가는 국가의 운명을 보듬으며 안간힘을 써서 지켜내려는 힘을 주었고, 기독교는 따스함을 잃어가는 한국인들의 마음에 스며들어 그들의 온도를 지켜주었다. 한마디로, 태극기와 기독교는 따스했다.

 

5. 이 책은 태극기와 한국교회의 관계를 다루면서 태극기와 기독교가 지녔던 따스함이 어떻게 서서히 수그러들었는지를 추적한다. 따뜻했던 태극기가 왜 따뜻함을 잃게 되었는지, 따뜻했던 기독교가 왜 따뜻함을 잃게 되었는지, 그 슬픈 역사의 기록이다. 따스함을 잃은 것은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기 마련이다. 오늘날, 따스함을 잃은 태극기와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이러한 시대착오적 행태와 구호의 현장을 지배하는 주도세력이 다름 아닌 일부 개신교 목회자들과 신자들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태극기에 대한 혐오’는 자연스럽게 ‘한국개신교에 대한 혐오’와 연동되었다… 과거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수많은 전근대와 식민지 조선인들의 가슴을 설레고 뜨겁게 했던 저 ‘십자가’와 태극기’라는 상징이, 이제는 현대의 시민사회로부터 구시대의 유물 취급을 받으며 외면당하고 있다”(379-380쪽).

 

6. 책에는 가슴 뭉클한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그 뭉클함 이면에 담긴 슬픔은 책 읽은 속도를 늦추고 잠시 멈추어 마음을 진정시키게 만든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잠시 책을 내려 놓을 수밖에 없었던 장면이 하나 있었다. 나라의 운명이 간당간당하던 1905년에 발생한 일이다. 그때 미국의 대통령 루즈벨트의 딸, 앨리스 루즈벨트가 방한한 일이 있었다. “고종황제는 일제의 국권침탈 야욕에 맞서 고군분투 중이었기에 미국 대통령 딸의 방한 소식에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앨리스 루즈벨트를 국빈급으로 환대했다”(310쪽).

 

7. 고종황제와 한국관료들은 앨리스 루즈벨트를 국빈대접했지만, 그녀의 행동은 매우 무례했다. “앨리스는 방한 기간 내내 오만하고 무례하며 방종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고종을 만나는 시간, 말 위에서 승마복과 장화를 신고 시가를 피우며 나타났다. 대한제국의 황실 격식과 의전에도 장난스럽게 대응했다. 마침내 명성황후가 모셔진 홍릉을 방문했을 때에도 도착 후 정중히 예를 갖추기 보다는 능 앞에 설치된 석상에 올라타 기념 촬영하기에 급급했다… 그는 대한제국 정부와의 어떠한 외교적 대화에도 진지하게 임하지 않았으며 수행원들과 파티와 유람만 즐기고 일본으로 떠났다”(313-314쪽).

 

8. 얼굴이 화끈거려서 책을 더 읽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잠시 책을 내려놓고 마음을 추슬렀다. 하지만, 앨리스 루즈벨트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한국의 운명을 이미 알고 있었다. 방한하기 두 달 전 미국과 일본은 ‘가츠라-테프트 밀약’을 맺었고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서로 인정한 후였다. 그리고 방한 2주 전, 미국과 영국, 그리고 러시아가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서 일본의 한반도 지배권을 승인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한 나라의 운명을 미리 알고 있었던 앨리스 루즈벨트에게 한국은 우스운 존재였던 것이다.

 

9. 따스함을 잃으면 따스한 시선도 거두어지게 되는 법이다. 따스함을 잃어버린 한국을 향해 따스한 시선을 가질 수 없었던 앨리스 루즈벨트의 행동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따스함을 유지해야 한다. 따스함을 유지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내가 따스해야 다른 이들에게 따스한 시선을 보낼 수 있는 것이고, 따스함을 유지하고 있어야 다른 이들도 나에게 따스한 시선을 보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다움이란 이렇게 따스함을 지키는 것이다. 나의 따스함과 당신의 따스함이 공존하는 것이다.

 

10. 바울이 로마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낸 근본적인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강한 자들(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약한 자들(유대인 그리스도인) 사이의 갈등 때문에 교회가 따스함을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회적 지위를 통해서 강한 자들은 사회적 지위가 시원치 않았던 약한 자들을 업신여겼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언약적 위치, 율법을 통해서 약한 자들은 강한 자들을 판단하고 비난했다. 서로 간에 평화 없는 것만큼 따스함을 잃는 것은 없다. 그래서 바울은 이 둘 사이에 잃어가는 따스함을 회복하기 위해서 강력한 언어들을 동원하여 편지를 쓴 것이다.

 

11. 바울이 율법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는 이유는 율법의 조문에 묶여 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진보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율법 조문에 묶여 있는 것은 마치 배가 바다를 향해 힘차게 항해를 해야 하는데 항구에 밧줄로 묶여 있어 나아가지 못하는 형국과 같은 것이었다. 게다가, 구원하시는 능력인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가 한 인격(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났는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 인격에 집중하지 못하고 여전히 율법(문자)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집중하고자 했다. 율법에 매어 있어서 예수에게로 가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이러한 답답한 상황을 바울은 결혼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한다.

 

12. 7장에서 바울은 율법과 복음의 문제를 결혼에 비유해서 설명한다. 여기서 남편은 율법이고, 여인은 율법에 매인 이스라엘(유대인 그리스도인)이다. 이스라엘은 율법과 결혼한 상태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여인 이스라엘이 남편 율법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남편이 죽는 것이다. 바울 당시 때만 해도 이혼이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한 번 결혼하고 나면 정말 특별한 일이 없으면, 배우자가 죽는 경우를 제외하고서 여인이 다른 사람과 결혼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남편을 막 죽이는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13.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죽지 않는 율법에게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내가 죽는 것이다.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4절). 사실 이것은 굉장한 사건이다. 율법은 죽지 않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율법의 요구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었다. 인간이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율법에 매인 인간은 영원히 죄인으로 살 수밖에 없다. 죄인으로 사는 것만큼 인간의 마음을 차갑게 하는 일은 없다.

 

14. 이런 측면에서 예수에게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선포는 복음이 될 수밖에 없다. 바울의 표현대로, 율법에 매인 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5-6절).

 

15. 율법과 복음에 대한 바울의 비유를 다시 풀어서 설명하면 이런 것이다. 율법과 결혼했을 때 여인(인간)은 행복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 결혼생활을 끝낼 수 없었다. 율법은 결코 죽지 않을 존재였기 때문이다. 율법을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인생이 답답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주 의로운 방법으로 율법과의 결혼생활을 끝낼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그게 복음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죽지 않는 율법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서, 그리스도와 결혼하는 것이다.

 

16. 율법은 자기에게 매인 존재에게 죄의 정욕이 역사하게 하여 죄를 알게 하고 죄를 짓게 하고 그래서 결국 사망에 이르게 했다. 즉, 율법은 행복한 인생을 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결혼은 완전히 달랐다. 문자인 율법과 인격인 예수는 같을 수 없다.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지만, 인격인 예수는 사람을 사랑한다. 정죄 받는 인생과 사랑 받는 인생은 다르다. 정죄 받는 인생은 차갑지만, 사랑 받는 인생은 따스하다.

 

17. 로마서에서 바울이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든 비유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은 예수와 결혼한 사람들이다. “나는 예수와 결혼했다.” 예수와 결혼한다는 것, 결혼할 정도로 예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마음이 온통 예수의 사랑으로 뒤덮이는 것이다. 사랑으로 뒤덮인 마음은 인간냄새가 가득하고, 시선과 손길이 따스해진다. 문자인 율법이 아니라, 이제 한 인격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선포는 이런 것이다. 세상이 더 따스해졌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깊이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18. 인간은 인격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법으로 살아가거나 다스릴 수 없다. 인간은 인격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오직 사랑으로 보듬어야 하고 사랑으로 품어야 한다. 법치주의만큼 인간성을 훼손하는 것도 없다. 법이 인간 위에 있으면 인간은 불행해진다. 법은 인간 아래에서 봉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사랑이 무너지고 신뢰가 무너지면, 법만 남는 법이다. 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큼 우리 인간의 마음을 차갑게 만드는 게 어디에 있는가. 사람 사이에 법이 들어서는 순간, 그 관계는 차가워질 뿐이다.

 

19. 세상이 어려워질수록, 인간은 마음의 따스함을 잃어간다. 『태극기와 한국교회』가 보여주고 있듯이, 세상이 어려워지니까 태극기와 십자가가 온기(따스함)를 잃어갔다. 따스함을 잃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사는 게 어렵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따스함을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예수와 결혼했다”는 것을 굳게 붙드는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예수를 사랑하고 있는지, 그 사랑의 온기를 잃지 않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진 사랑의 따스함은 절대적인 것이다. 절대적인 따스함을 지닌 사람은 세상이 어떠하든지 그 따스함을 유지할 수 있다. 나는 이 어려운 시절에 마음의 따스함을 잃지 않기 위하여 다시 한 번 이 사실에 집중한다. “나는 예수와 결혼했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1. 11. 05:25

세례의 의미
(로마서 6:1-14)

 

1. 수세주일. 주님께서 세례 받으신 것을 기념하며,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것에 대하여 돌아보는 날이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이야기는 네 복음서 모두가 전하고 있다. 그 중에서 마태복음이 가장 상세하게 그때의 상황을 전하고 있고,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간략하게 전한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사건을 전하기 보다, 그 사건이 가지고 있은 의미가 무엇인지를 전한다. 그러니까,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은 사건을 전하는데 반해, 요한복음은 그 사건에 대한 해석을 전한다.

 

2. 세례의 행위는 같지만, 예수님의 세례와 우리의 세례 간에는 차이가 있다. 예수님의 세례는 영어로 ‘inauguration’과 ‘revelation’의 의미가 짙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성령의 임재를 말하고 있고, 더불어 하늘에서 들린 소리를 전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러니까,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것은 그가 그리스도로 등극한 것 또는 드러난 것을 의미한다. 일종의 우주적 취임식인 것이다.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로서 공식적으로 선포된 것이다. 그래서 세례 이후의 예수님의 생애를 공생애(public life)라고 부른다.

 

3. 우리는 여기서 공생애, 즉 공적인 삶에 대해서 잠시 묵상해 볼 필요가 있다. 세례 이후의 예수님의 삶이 공적인 삶인 이유는 그가 ‘보냄을 받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적인 삶(private life)에 익숙한 시대에 살다보니, 공적인 삶에 대해서 무심하거나 잘 모른다.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들은 삶 자체가 ‘공적인 삶’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4.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들이 받은 세례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받은 세례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잘 알려주고 있다. 우리가 받은 세례는 순전히 그리스도와 관련된 것이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의 의미는 우리의 운명(생명)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어준다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가 죽으면 우리도 죽는 것이고, 예수가 살면 우리도 사는 것이다.

 

5.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공적인 삶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에게 사적인 삶이란 없다. 우리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겨졌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보냄을 받은 분이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과 같이 세상으로 보내졌다. ‘보냄 받은 자’로서 우리는 공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아픔과 책임감을 느낀다. 남의 일이라고 신경을 끄고 손 놓고 있지 않는다.

 

6. 그런데 이러한 세례의 중요성에 비해 우리가 실제 신앙생활 속에서 그 의미를 되새기는 일에는 매우 소홀하다. 신앙이 좋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세례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세례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기억과 실천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례 받은 날도 기억하지 못할 때가 다반사다. 생일은 기억하는데, 세례 받은 날은 기억하지 못한다. 교회에서도 이런 문화가 잘 정착되지 못했다. 생일은 축하해 주는데, 세례 받은 날은 기억도 못할 뿐더러, 기억을 못하니까 축하도 못해준다. 교회가 회복해야 할, 그리고 새롭게 창조해야 할 문화는 세례 받은 날을 기억해서 서로가 생일을 축하해 주듯이 축하하는 문화이다.

 

7. 이러한 문화를 조성해 나가는 것이 왜 중요한지 우리는 로마서를 통해서 좀 더 들여다보려 한다. 로마서 6장은 ‘세례’에 대한 깊은 신학적 의미를 전달해고 있다. 그런데, 세례의 신학적 의미를 설명하면서 바울이 쓰는 용어들은 약간 복잡하고 어렵다. 복잡하고 어려운 것에서 더 나아가, 좀 무겁다. 세례를 ‘죽음’이라는 용어와 연관짓고, ‘죄’라는 용어와 연관짓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말과, ‘죄’라는 말을 들으면 일단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렇다 보니,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의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지친다.

 

8.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이 세례에 대하여 ‘죽음’과 ‘죄’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복잡하고 무겁게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전하려고 하는 세례의 의미는 한마디로 ‘인간다움’이다. 인간다움을 헤치는 가장 강력한 것은 ‘죽음’과 ‘죄’이다. 인간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순간은 ‘죽음’과 ‘죄’를 경험하는 순간이다. 세례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다시 살아서 ‘참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 우리 인간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죽음’과 ‘죄’와 함께 죽는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날 때(부활할 때)는 ‘죽음’과 ‘죄’가 우리와 함께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 죽음과 죄가 없는, 오롯이 풍성한 하나님의 생명만이 우리와 함께 살아난다.

 

9. 인간다움의 완성과 아름다움은 더 이상 죽음과 죄가 없는 상태이다. 그러한 인간다움의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통하여 일어났다고 하는 것이 복음이다. 세례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세례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다운 인간으로 거듭난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12-13절). 이게 무슨 말인가? 더 이상 인간답지 못한 인생, 짐승 같은 인생을 살지 말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기 때문이다.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 우리의 인간다움을 망가뜨리는 죽음과 죄가 모두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생명을 입고 인간다움의 완성을 이룬 사람이다.

 

10. 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13-15절). 이게 무슨 말인가? 이제 인간답게 살라는 뜻이다. 우리의 인격이 이제 그리스도처럼 귀한 인격이 되었고, 그리스도처럼 사랑의 능력을 지니게 되었으니, 인간답게, 인생을 아름답게 살라는 뜻이다. 우리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어버리는 순간은 죽음과 죄를 맞닥뜨리는 순간이지만, 반면에 우리 인간이 인간다움을 가장 깊이 경험하는 순간은 사랑의 순간이다. 사랑할 때, 우리는 그야말로 ‘살아있음’을 느낀다. 바울은 이것을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하고 있다. 이 문장을 한 단어로 집약해서 표현하면, ‘사랑’이다. 사랑할 때 우리의 몸은 의의 무기가 된다. 모든 것을 옳게 만든다.

 

11. 수세주일.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날을 기념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세례를 돌아본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세례를 돌아보며, 우리의 인생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지금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 인간답게 살고 있다면 정말로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혹시, 나의 삶을 돌아볼 때 별로 인간답지 못한 것 같다면, 왜 나의 인생은 이렇게 인간답지 못한지에 대해서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이렇게 인간답게 살고 있지 못한 이유가 나 자신에게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잘 파악해서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훈련을 해야 할 것이다. 또한, 내가 이렇게 인간답게 살고 있지 못한 이유가 세상에 있다면, 세상을 좀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으로 바꿀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사람들과 연대하고 나 자신을 내어놓아야 할 것이다.

 

12. 세례 받은 우리들이 ‘인간다움’에 대하여 묵상하는 일은 요즘 같이 어려운 시대에 정말 중요한 영성이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자연재해가 심해져서 정치가 보수화되고 사람들의 마음이 날로 강퍅해져 가는 시대에, 우리는 아주 쉽게 인간다움을 잃어버리고 ‘야만’의 시대로 들어설 수 있다. 실제로 우리에게 들려오는 세계의 소식은 그리 인간답지 못하다. 혐오 범죄가 늘어나고 정치와 경제의 양극화 심화로 인하여 사회의 곳곳에서 갈등이 폭발하고 있다. 세상이 추해지고 악해지고 있다. 인간다움에 대한 묵상이 충분하지 않으면 야만의 시대로 휩쓸려 들어갈 수 있는 위험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13. 세례 받았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낭만적인 일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눈을 뜨는 일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인간다움을 입고 세상을 바라보니, 이 세상이 얼마나 인간다움을 잃고 사는지, 그동안 내가 얼마나 인간다움을 잃고 살았는지를 보게 되는 일이다. 인간다움을 잃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죽을 몸을 죄가 지배하도록 내어주었고, 몸의 사욕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 그것을 몰랐던 것이지, 우리 몸의 진실이 그랬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세례를 받고 인간다움을 회복한 후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 내어주지 않고, 우리의 지체를 하나님께 드리며 의의 무기로 내어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14. 야만의 시대는 멀지 않다. 야만에 휩쓸리는 일은 매우 쉽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삶이 추해지고 악해지기 십상이다. 모두가 인간다움을 잃고 야만의 시대로 휩쓸려 가려는 이 때에, 세례를 통하여 인간다움의 옷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은 끝까지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이 세상에 희망이 있는 것이다.  세례 받은 우리들, 짐승처럼 살지 말고, 인간답게 살자. 더 나 자신을 내어주고, 더 사랑하면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을 증언하면서 살자. 인간다움은 구원의 지표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1. 5. 08:04

적극신앙 프로젝트

(딤후 4:1-5)

 

성경의 중요성
1. 성경이 중요한가, 중요하지 않는가? 성경은 중요하다. 거기에 하나님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계시). 그래서 지난 2천년 동안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들여다보는 일에 매달렸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문헌은 성경과 관련된 문헌이다. 성경은 여전히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다. 다시 말하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진중하게 들여다보면,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윤동주, <참회록> 부분)

 

2. 윤동주의 시에서 말하는 것처럼, 밤이면 밤바다 ‘나의 거울(성경)’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라. 그러면, 거기에서 사람의 모양을 한 하나님이 걸어나온다. 그때부터 하나님이 나에게 말을 걸어 오신다. 성경의 문자들이 그냥 문자로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온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나의 사랑하는 책> 3절에서 이런 구절이 있다. “어머니가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어머니가 왜 눈물을 흘리셨겠나. 성경의 문자들이 살아서 어머니에게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3. 우리에게 이런 경험이 있는가? 성경을 읽는데 눈물이 막 나서 눈물을 훔치고 있는데, 아들(딸)이 와서, ‘엄마, 아빠, 왜 울어?’라고 물을 때, 아이에게 ‘응, 하나님이 엄마/아빠한테 말을 걸어오셔서.’ 아이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부모님이 성경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결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치면 엄마/아빠가 했던 대로 성경을 읽으면서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말씀을 전파하라

4. 바울은 아들 같은 디모데에게 성경의 중요성에 근거해서, 이렇게 명령한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이것은 준엄한 명령이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의 옵션 사항이 아니라, 명령이다. 이러한 명령을 내리기 전에 바울은 성경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이렇게 말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세상이 이렇게 좋은 것, 이렇게 중요한 것이 또 있는가. 성경만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만드는 것은 없다.

 

마지막 때

5. 성경의 중요성과 그것에 근거한 말씀 전파의 명령을 전하면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아주 어려운 이야기를 전한다. 어떤 때가 이를 거라고 하는데, 그때에 발생하는 일이 뭐냐면,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는” 일이다. 여기서 ‘바른 교훈’은 ‘건전한, 건강한 교훈’이라는 뜻이다.

 

6. 대개 이단들이나 자기 주장이 강한 사설을 전하는 집단이나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 자기들은 ‘바른 교훈’을 전한다고 주장한다. 절대로 ‘건전한, 건강한 교훈’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정크 푸드를 팔면서, 절대로 ‘건전한, 건강한 음식’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정크 푸드를 파는 사람들은 언제나 ‘맛있는’이라는 수식어를 쓴다.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크 푸드는 맛있다. 그러나, 건전하거나 건강한 음식은 아니다.

 

7. 요즘 사람들은 몸 건강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정크 푸드가 아무리 맛있어도 그것이 정크 푸드인줄 다 알고, 정크 푸드 먹는 것을 삼가고, 왠만하면 몸을 건강하게 해주는 헬시 푸드를 먹으려 노력한다. 몸이 건강한 것은 참 좋은 것이다. 그러나 몸의 건강은 좀 더 높은 것을 지향할 때만 더 의미가 있다. 바로 정신(spirit)의 건강이다. 몸 건강한 사람이 정신/영도 건강하면 참 좋겠는데, 몸 건강한 사람이 허탄한 이야기에 빠져 악한 일을 도모하는데 열심을 내기도 쉽다. 몸이 건강하니까 그런거다. 몸져 누워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해악을 끼칠 일을 하지 못한다. 두 발로 건강히 걸어다니니까 해악을 끼치는 일도 하는 것이다.

 

8. 우리는 건전하고, 건강한 신앙을 가꾸고 전파하는 것을 목표로 교회를 세워 나간다. 세상이 음식이 정말 많지만, 모든 음식이 건전하고 건강한 음식은 아니다. 그러나, 정크 푸드도 음식이다. 정크 푸드를 먹어도 맛있고 살아가는데 별 지장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정크 푸드를 계속 먹다 보면 살이 찌고 성인병이 생기고, 그러다 결국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게 되어 생명을 잃는다는 것을 말이다. 인생도 여러 종류의 인생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인생’을 산다. 그러나 어떤 인생은 좋은 인생이고, 어떤 인생은 비극적인 인생이다. 마찬가지로, 신앙도 그렇다. 모든 게 신앙이다. 그러나, 건전하고, 건강한 신앙이 있다. 결국 좋은 인생은 건전하고 건강한 신앙과 직결된다. 그래서 우리는 건전하고, 건강한 신앙을 지향한다.

 

적극신앙 프로젝트

9. 사람들이 건전하고 건강한 교훈을 듣기 싫어하는 때에 순결한 주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려운 때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 가르침을 준다. 이것은 어려운 때를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정말 귀중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10. 1)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라. 영어로 보면, be sober in all things, 또는 keep your eye on what you are doing. ‘sober’라는 단어는 ‘술 취하지 않는, 말짱한 정신’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말을 풀어서 설명하면, 정신 차리고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살피면서 무엇이든 하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것을 잘 하지 못한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고 있지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집중하지 못할 때가 너무 많다. 아주 사소하게는, 자동차 키를 어딘가에 놓으면서 그것을 어디에 놓는지 ‘keep your eye on what you’re doing’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나중에 자동차 키가 필요할 때, 그것을 어디에 둔 지 몰라서 온 집안을 뒤지게 된다.

 

11. 2) 고난을 받으라. 영어로는 ‘endure hardship’이다. ‘고난을 견디라는 말로도 번역할 수 있지만, 고난을 받으라로 번역하는 게 더 좋다. 고난을 견딘다는 것은 왠지 수동적이고 억지로, 마지못해, 고난을 견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고난을 받으라’는 굉장히 적극적인 표현이다. 나에게 닥친 고난을 마지못해 억지로 견뎌내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고난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줄 아는 사람은 고난 때문에 넘어지거나 그것 때문에 인생을 망가뜨리지 않는다. 고난을 타고 넘어 더 좋은 삶으로 나아간다.

 

12. 3) 전도자의 일을 하라. 전도자는 영어로 ‘evangelist’이다. 이것은 헬라어 ‘유앙겔리온’에서 온 말이다. 유앙겔리온은 ‘복음’이라는 뜻이다. Good New! Gospel! 이다. 이것은 doing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attitude의 문제이기도 하다. 좋은 소식, 기쁜 소식, 복음을 전하는 자의 마음 가짐(attitude)는 무엇이겠는가? ‘기쁨(Joy)’이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세상 다 무너진 것 같은 표정과 마음을 가지고 그것을 전한다면, 그 기쁜 소식을 받아들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누가 상품을 파는데, 누추하고 험상궂고 기운이 다 빠진 모습으로 상품을 팔면, 누가 그 상품을 사겠는가? 하물며, 복음을 전하는데, 어떠해야겠는가?

 

13. 4) 네 직무를 다하라. 영어로는 ‘fulfill your ministry’ 이다. 또는 ‘do a thorough job as God’s servant’ 이다. 여기서는 ‘직무’라는 말이 중요한데, 직무는 헬라어로 ‘디아코니아’이다. 집사나 권사 또는 장로, 물론 목사도 마찬가지로, 모두 ‘디아코니아’의 직분을 가졌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교회로 모인 사람들에게는 ‘디아코니아’, 즉 ‘섬김’의 직무가 주어졌다. 네 직무를 다하라는 것은 ‘섬김을 성취하라’는 말이다. 이것은 정말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종처럼 섬기는 것이다. 이럴 때 생명이 살아난다.

 

14. 신앙의 실체는 이런 것이다. 1) 모든 일에 신중하는 것.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정신차리고 하는 것. 2) 고난을 받는 것. 닥친 고난을 마지못해 견디는 게 아니라 고난을 적극 수용하여 고난을 통하여 더 성숙하고 아름다운 인생으로 나아가는 것. 3) 전도자의 일을 하는 것. 태도의 문제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마음에 기쁨이 충만한 상태로 복음을 전하는 것. 4) 직무를 다하는 것. 섬김을 성취하는 것. 종처럼 섬기는 것. 그래서 생명을 살리는 것.

 

15. 적극신앙은 이렇게 신앙이 구체적이 되는 것이다. 거리를 두거나, 모호하게 교회를 섬기지 말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구체적으로 섬기라. 교회라는 실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내가 곧 교회이다. 내 신앙의 퀄러티가 곧 우리 교회의 퀄러티이다. 적극신앙, 구체적인 신앙을 가질 때, 주님의 몸된 교회는 생명이 풍성할 것이다. 그것이 곧 우리의 삶이다. 그리스도의 삶 따로, 나의 삶 따로 분리된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일치하는 삶이기 되기를 소망한다. 적극신앙의 해를 선포하며, 교회가, 우리의 삶이 더 풍성해지기를 기대하며 기도한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2. 20. 10:02

사랑이 열어주는 미래

(로마서 5:1-11)

 

1. 로마서를 전체적으로 보면, 바울은 과거, 현재, 미래 시점에서 인간은 어떠한 존재인가를 말한다.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같은 세계적 명작을 쓴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형에게 이런 편지를 쓴 적이 있다. “형, 인간과 인생의 의미를 연구하는데 꽤 진척을 보이고 있어. 인간은 신비 그 자체야. 우리는 이 신비를 풀어야 해. 그러기 위해 평생을 보낸다 하더라도 결코 시간을 허비했다고 할 수 없을 거야. 인간이고 싶기 때문에 나는 이 수수께끼에 골몰하고 싶어.”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과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 밝히고 있는, 복음에 근거한 인간론은 매우 중요하다.

 

2. 로마서에서 복음(새로운 소식 / 기쁜 소식)은 3장 21절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듯이,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는데, 그 하나님의 의는 자연이나 율법 같은 것이 아니라, 한 인격(person) 안에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 한 인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사실, 이것 때문에 우리 인간은 ‘인간과 인생’에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만약, 바울이 하나님의 의가 율법에 드러난 것을 다시 확인한다고 했다거나, 하나님의 한 의가 ‘자연’에 나타났다고 말했다면, 우리는 율법과 자연에 더 깊은 관심을 가졌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바울의 복음 선포는 그렇지 않았다. 바울은 한 인격/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한 의가 드러났다고 선포하고 있다.

 

3. 이 복음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한 의가 드러난 그 인격,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가 ‘인격’에 드러났다는 것이다. 인격에 하나님의 의가 드러났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의에 다가서는 방법은 관찰이나 연구, 또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사랑을 통한 교제’ 밖에 없다. 여기서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4. 기독교가 전하는 복음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다른 종교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어마어마한 소식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계속해서 제시하고 있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에 근거해서 이것을 설명하면,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율법에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열심히 지키려 노력했다. 그런데, 율법은 그 자체로 ‘인격’이 아니고 그냥 문자이기 때문에 정현종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사람이 오는 어마어마한 일 같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어마어마한 것을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의가 한 인격에 나타났다고 한다는 것, 즉 하나님 자신이 우리 인간에게 왔다는 것이다. 

 

5. 편지가 왔을 때, 우리는 그 편지를 읽고 그 편지에 말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따르거나 아니면 못 본 척 무시할 수 있다. 그러나 편지가 온 게 아니라, 그냥 그 편지를 쓴 사람이 직접 우리에게 대면하여 왔다고 생각하면, 편지와 왔을 때와는 다른 상황이 연출될 수밖에 없다. 한 인격이 우리에게 오면, 그 중압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존재의 일부가 우리에게 오는 것과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 오는 것은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복음은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 왔다는 선포이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인격과 인격이 대면했을 때의 용어, 즉 관계의 용어가 계속해서 등장한다.

 

6. 본문의 1절 말씀은 전형적인 관계의 용어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5:1). 이전 시간(지난 주)에 말했듯이, ‘믿음’도 관계적인 용어이다. 인격적인 용어이다. 사귐이 있어야 한다. 그냥 그것을 하는 게 아니라, 애정, 사랑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애정 관계, 사랑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주님, 저는 주님을 믿습니다. 저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주님,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이 말뿐인 고백이 아니라 진실한 고백, 진짜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7. 이처럼, 1절에 등장하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할 때의 ‘화평’도 관계적인 용어이다. ‘화평’이란 ‘상대방과 잘 지내는 것’이다. 인격적인 상대와 잘 지내지 못하는 것만큼 인간을 힘들게 하는 것도 없다. 사람과 사람이 잘 지내지 못하는 사회일수록 대체 인격이 늘어난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선진국’들은 풍요를 이루긴 했지만, 인간 관계 측면에서는 삭막해지기 일쑤다. 개인주의가 강해지고, ‘돈’이 모든 것의 매개가 되기 때문에 진실한 우정의 관계를 맺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현재 우리가 사는 사회의 체제에서, 부자가 될수록, 부자 나라가 될수록, 사람들은 외로움이 늘어간다.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대체 인격이 필요한데, 그래서 부자 나라, 사람들이 외로울수록 반려동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이다.

 

8. 그러므로, 하나님의 한 의가 ‘인격’에 나타났다는 것을 복음으로 듣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화평’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구원은 한 마디로, 하나님과 잘 지내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이렇게 구원을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의 교제’를 통해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이들과의 관계가 별로 좋지 못하다고 하는 것은 모순일수밖에 없다. 이는 마치 자신이 ‘반려견을 정말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배고플 때마다 ‘개고기’를 사 먹는 것과 같은, 모순적인 일이다.

 

9. 복음을 믿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구원 받았는가. 그런데 혹시 화평하지 못하고 잘 지내지 못하고 있는 가까운 사람, 이웃이 있는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지금 당장 하나님께 회개하며 자비를 간구하라. ‘인격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한 ‘인격’과 잘 지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구원을 우습게 여기는 행동이다. 하나님과의 화평이 구원인데, 그 화평이 가족들과, 친구들과,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지 않는다면, 하나님과의 화평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즉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며 우리를 위해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헛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 이 시간, 잠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평이 있는 것처럼, 우리와 이웃들(그것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혹시 화평치 못한 사람이 있다면) 사이에도 화평이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자.)

 

10. 로마서 5장에서 가장 이해하기 쉽지 않은 구절은 3~4절의 말씀이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을 인내를, 인내는 연단은,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한 해를 돌아볼 때, 자신에게 닥친 환난이 무엇이었는가. 환난의 경험이 없었다면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환난이 닥쳤을 때, 우리는 즐거워할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은 말한다. 우리는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한다고! 환난이 닥쳤는데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사람은 ‘바보/미친 사람/치매 걸린 사람’ 밖에 없다. (요즘엔 동네에 바보가 돌아다니도록 내버려두지 않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해도 동네에는 바보가 한 명씩은 있었다. 바보가 동네를 돌아다녀도 전혀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 그 사람을 서로 돌봐주고 아껴주었다. 예전에 비하면, 세상이 발전한 것 같으나, 이런 관계적 측면에서 보면, 세상은 오히려 후퇴했다.)

 

11.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환난을 당하지 않을 수 없다. 환난을 일찍 겪은 사람은 철이 좀 일찍 들고, 환난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철이 좀 없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인 한, 우리는 살아가면서 환난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다. 환난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도둑처럼 우리에게 임한다. (화살을 맞은 사람 중에 가장 미련한 사람은 누구인가. 화살에 맞으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화살을 빨리 빼고 치료 받는 것이다. 그런데, 미련한 사람은 ‘누가 나한테 화살을 쐈어’라고 하면서 분노와 원한만 키우는 사람이다. 그것은 나중에, 치료받고 완쾌된 이후에 차근히 생각해 보아도 괜찮다.)

 

12. 바울이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복음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화평하기 때문에, 즉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이 받았고, 받고 있고, 받을 것을 알기 때문에 환난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렇다. 환난 중에서도 그 환난 때문에 인생이 무너지거나 실패하지 않고, 바울이 말하고 있듯이, 오히려 그 환난 속에서 인내를 키우고, 연단을 받고, 소망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랑을 충만이 받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충만이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이 환난을 이긴다. 죄 가운데 있던 비참한 인간의 미래를 열어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바울은 그래서 인간은 과거에 하나님 없이 사는 불의한 존재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 덕분에 우리의 미래가 아름답게 열렸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6,8).

 

13. 우리는 바울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지금 우리 인간을 정죄하고 있는 게 아니다. “너는 죄인이야. 너는 원래 죄인이야!” 바울이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이지, 인간이 얼마나 가망 없는 존재인지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확증되었다. 드러났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우리가 상대방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때는 좋을 때가 아니라 어렵고 힘들 때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알게 된 것은 바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즉 우리 인간의 처지가 별로 좋지 않았을 때에,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14. 그래서,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 있다. 즉 미친 사람처럼 환난을 당했는데도 싱글벙글한다는 뜻이 아니라, 환난을 당했어도 그것 때문에 무너지거나 넘어지거나, 그래서 인생을 망치고 허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환난을 이겨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언제 닥칠 지 모르는 인생의 환난을 대비하는 길은 단 하나이다. 충만이 사랑받고, 사랑하는 것이다. (공부 잘 하는 사람이 환난을 극복하는 게 아니라, 사랑 많이 받는 사람이,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환난을 극복한다.) 위에서 본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에서 보았듯이, 사람을 ‘환대’할 줄 알고, 사람에게 ‘환대’받는 사람이 환난을 이겨내고 소망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15. 우리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과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물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자신의 모든 소설에서 이 질문을 하고, 그 해답을 찾고 있다. 정현종 시인도 ‘방문객’이라는 시를 통해서 동일한 것을 묻고,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다. 소중한 로마서에서 바울은 말한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모두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 우리의 과거가 어떠했든, 우리의 현재가 어떠하든, 상관없다.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언제나 밝다. 하나님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 우리의 미래를 열어주신다. 그래서 그것을 믿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할 삶은 너무도 자명하다. 사랑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열어가라(많이 사랑받겠습니다!). 또한, 사랑으로 이웃의 미래를 열어주라(많이 사랑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이 환대가 넘치는 사랑의 삶이기를!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2. 20. 09:58

행위에서 믿음으로

(로마서 3:27-31)

 

1. 브라질이 우리에게 승리하며 골 세러머니를 얄밉게 한 것 때문에 구설수에 올랐는데, 크로아티아에게 패한 뒤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호날두가 선발 출장을 하지 못하고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도 애처로웠고, 모로코에게 패한 뒤 선수들과의 교류도 없이 눈물을 흘리며 라커룸으로 향하는 모습도 애처로웠다.축구에서 발생하는 것처럼 인생은 알 수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겸손이 최고의 덕목인 듯싶다.

 

2. 한국 축구 대표팀 감독인 밴투의 업적은 ‘빌드업’ 축구를 대표팀에 안착시켰다는 것이다. 빌드업 축구란 공격적인 축구(골을 넣기 위한 축구)를 위해서 수비수부터 짧은 패스를 통해 차근차근 기회를 만들어가는 축구를 말한다. 요즘 축구의 트랜드이다. 더 이상 ‘뻥 축구’하는 나라는 없다.

 

3. 지난 주, E. P. Sanders 이야기를 조금 했는데, 반응이 뜨거웠다. 그 중에서 지난 주 설교를 듣고 예배당을 나서며 000 형제는 나게에 “목사님, ‘빌드업 설교’ 잘 들었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냈다. 내 설교를 잘 표현해 준 것 같다. 건전하고 건강한 신앙, 그리고 더 깊은 신앙을 위해서 기초부터 다시 쌓고, 최신의 학문적 업적들을 반영한 신앙의 형성을 위해서 우리가 함께 공부하고 기도하고 격려해야 할 것들이 정말 많다. ‘뻥 축구’를 통해서 더 이상 세계 무대에서 축구를 할 수 없듯이, ‘뻥 신앙’을 통해서 더 이상 이 복잡한 세계에서 기독교 신앙을 지켜나갈 수 없다.

 

4. 언약적 율법주의 (Covenantal Nomism), 이것은 과학계로 따지면 아인슈타인 같은 위치를 지닌, E. P. 샌더스 교수가 밝혀낸 사실이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이 용어에 모두 들어 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킨 이유는 구원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가 오해하는 것처럼, 유대교도 행위구원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구원의 이니셔티브, 주도권은 언제나 하나님에게 있다. 얼마나 다행인가. 구원의 이니셔티브가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 중 그 누구도 구원 받을 사람이 없다.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죄 아래 있기 때문이다.

 

5. 로마서 3장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21절이다. “이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 – 이게 복음이다. 바울 신학의 중심 (바울이 증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바울은 지독한 예수 중심주의자이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이다.

 

6. 로마서에서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유대인은 율법에 집중했다. 거기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율법은 말이고 문자이다. 이방인은 율법을 잘 모르고, 별로 상관도 없다. (미국인들이 축구를 잘 모르고 별로 감흥도 없는 것과 똑같다. 이들은 미식축구나 농구, 야구를 잘 알고 거기에 열광하지 않나.)

 

7. 바울의 증언은 기독교의 독특성을 잘 보여준다. 하나님의 의가 한 인격에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 인격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삼위일체 신학은 여기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인격에 대한 연구다. 이것은 일종의 신앙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의가 율법이라는 문자에 나타나는 것을 넘어서 이제 예수라는 ‘한 인격’에 드러난 것이다. 실리콘 밸리적으로 설명하면, 예전에 컴퓨터가 처음 나왔을 때 ‘Dos’라는 것을 배워서, 컴퓨터를 작동하려면, 문자를 손으로 일일이 쳐서 넣었어야 했다. 그런데, 마이크로소트프사에서 혁신을 이루었다. 윈도우를 개발한 것이다. 손으로 문자를 일일이 쳐서 넣지 않아도 되고, 이제는 그냥 마우스로 클릭을 하면 모든 소프트웨어를 움직일 수 있다.

 

8. 하나님의 의가 율법을 넘어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적) 인격에 나타났다는 것은 28절의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의롭다는 ‘옳은 행동을 한다’의 의미가 아니다. 의롭다는 ‘하나님과 좋은 관계가 되었다’를 뜻한다.

 

9. 이것을 자녀와 부모의 관계로 설명하면 이런 것이다. 자녀와 좋은 관계를 지닌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녀가 시험 성적을 잘 받아오면 자녀와 좋은 관계인가? 최근에 우리 아들이 PSAT 시험을 쳤는데, 정말 ‘우스운 성적(Not 우수한)’을 받아왔다. 우스운 성적을 받아온 우리 아들은 의롭지 못한가? 죽일 놈인가? (의롭다: 성적을 잘 받아온다.) VS (의롭다: 아버지(엄마)를 사랑한다.) 아니다. 여전히 우리 아들은 사랑스럽다. 우스운 성적을 받아온 것과 상관없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아들이다. 아버지 집에 들어오면, 꼭 나와서 나랑 허그하고, 잠 자기 전에 꼭 나한테 와서 허그하고 가서 잔다. 얼마나 예쁜가? 이런 것을 의롭다고 말하는 것이다.

 

10. 율법이냐 복음이냐? 우리가 매일 논쟁적으로 대하는 용어들이다. 우리가 오해한 것은, 유대인들은 구원을 율법의 행위로 받는다는 것이고, 기독교인들은 복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도식을 형성한 것이다. 그러면서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구원은 행위냐, 믿음이냐의 논쟁이 심하다. 그런데, 이게 정말 헷갈리는 것이고, 우리가 접근을 완전 잘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11. 우리는 이 논쟁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서를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행위의 법은 협박으로 명령되고, 믿음의 법은 신뢰로 요청된다.” 행위의 법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가 명하는 것을 하라’고 말씀하시고, 믿음의 법에서는 인간이 하나님께 ‘당신이 명령하실 것을 제게 주십시오.’하고 말한다.

 

12.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문자’가 아니라 ‘인격’에 나타났다는 것의 의미를 깊이 돌아보아야 한다. 문자랑 사귀는 사람은 없다. 문자는 그냥 그 문자대로 시행하기만 하면 된다. 설교시간이니까, 이런 예를 들어보자. 문자로 이렇게 써 있다고 생각해 보라. “졸지 말고 딴 생각하지 말고 설교를 열심히 들으세요!” 이것을 문자로 이해하면, 그냥 졸지 않고, 딴 생각하지 않고, 자세를 바르게 하고 설교를 열심히 들으면 된다. 아니, 그냥 그런 척해도 된다. 그러면 그것은 문자를 잘 실행한 것이다.

 

13. 그러나, 인격을 향해서는 그렇게 문자적으로 실행할 수 없다. 인격은 ‘사귐’이 있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용어로 설명하자면, ‘Affection(애정)’이 있어야 한다. 행위와 믿음의 차이는 무엇인가? ‘애정’이다. 위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다. 행위의 법은 협박으로 명령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가 명하는 것을 하라!’인 반면에, 믿음의 법은 신뢰로 요청된다. 인간이 하나님께 ‘당신이 명령하실 것을 제게 주십시오.’라는 것이다.

 

14. 그러므로 우리는 행위라는 용어와 믿음이라는 용어의 차이를 잘 살펴야 한다. 행위라는 용어는 마치 컴퓨터 실행 용어 같다. 애정이 없다. 그냥 그것을 하면 된다.

믿음이라는 용어는 인격적인 용어이다. 사귐이 있어야 한다. 그냥 그것을 하는 게 아니라, 애정, 사랑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17. 행위에서 믿음으로!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애정(affection), 즉 사랑의 문제이다. 부모와 자식 간의 구원은 뭔가? 애가 공부를 잘 하고, 부모가 뒷바라지를 잘 할 수 있는 만큼 경제력이 있는 건가? 애가 공부 잘하고, 부모가 경제력이 있으면 뭐하나? 이건 행위다. 이건 구원이 아니다. 이들에게 구원은 애정이다. 부부 간에도 마찬가지, 친구 간에도 마찬가지, 우리 교회 식구들 간에도 마찬가지다. 무슨 일이든 마찬가지다. 애정이 없는 것, 사랑이 없는 일을 하는 것만큼 우리를 괴롭히는 게 어디 있나.

 

18.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믿음은 ‘내가 하나님을 애정(사랑)합니다’는 말을 두 낱말로 줄인 것이다. 이것으로 설명이 부족하다. 믿음은 ‘내가 하나님을 애정(사랑)합니다’라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인격을 형성한, 실제의 삶을 말한다. 난 너무 하나님이 좋아! 그러면, 좋아하는 사람의 행동은 그냥 보기만 해도 다르지 않나? 좋아하는 사람에게 하는 행동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하는 행동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주님, 사랑합니다.

이게 저희 믿음의 전부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듯,

우리도 주님을 뜨겁게 사랑합니다.

행위에서 믿음으로!

문자에서 인격으로!

모든 것에 애정을!

주님, 우리의 삶이 사랑으로 가득하게 하옵소서.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2. 6. 06:52

당신의 뇌가 가장 큰 적()이다

(로마서 3:9-31)

 

1. 국민일보에 신앙상담 코너가 있다. 상담자는 은퇴한 원로 목사인데, 이름만 대면 알 정도로 유명한 분이다. 어느 날 실린 상담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교회 시무장로입니다. 아들과 결혼하게 될 며느릿감이 천주교인입니다. 며느릿감이 천주교인인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2022년 11월 27일) 45명이 반응 이모티콘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 35명이 화난 표정의 반응 이모티콘을 남겼다. 어떻게 상담했을 것 같은가?

 

2. 신문 지면 상의 제약이 있기 때문에 상담 내용이 길지는 않다. 그 중에서 핵심적인 상담 내용을 보면 이렇다. “물론 천주교인 가운데 개인적으로 구원의 확신이나 성령의 은사를 체험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원리를 떠나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따르는 한 구원에 이르는 것은 어렵습니다.” 한 마디로, 천주교는 행위 구원을 말하기 때문에 행위 구원을 말하는 천주교인과 결혼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주장이자, 천주교는 행위 구원을 말하고 있다는, 전형적인 한국 (보수) 개신교의 생각이 담긴 상담이다.

 

3. 1970, 80년대, 한국에서 분유가 불티나게 팔리던 때가 있었다. 남양유업은 그때 성장한 기업이다. 1970년대, 80년대 생 치고 남양 분유를 안 먹고 자란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때 우량아 선발대회를 통해서 우량아로 선정된 아기들도 많다. 물론 그 우량아들은 모두 분유를 먹고 그렇게 되었다는 광고 전략 중 하나였다. 그때에 과학적 상식은 분유를 먹여 키우면 엄마 젖을 먹여 키우는 것보다 아이가 건강하고 우람하게 자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아이의 부모들은 젖 대신 분유를 먹였다.

 

4.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과학 상식이 바뀌었다. 업데이트 되었다. 분유를 먹여 키우는 것보다, 엄마 젖을 먹이는 것이 아이의 건강이나 정서에 더 좋다는 것이 상식이다. 게다가 요즘에는 소를 키울 때 항생제를 엄청 맞히기 때문에 부모들이 분유 먹이는 것을 꺼려한다. 엄마에게서 젖이 안 나오는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분유를 먹여야겠지만, 엄마 젖이 나오는 이상 엄마 젖을 1년 동안 먹이다, 그 이후에는 이유식을 먹이는 방식을 택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이들의 건강과 정서에 더 좋다는 과학적 지식의 업데이트가 있기 때문이다.

 

5. 과학상식만 바뀌는 게 아니다. 신학상식, 또는 신앙상식도 바뀐다. 문제는 과학상식은 계속해서 업데이트 되는데, 교회에서 통용되는 신앙상식은 업데이트가 매우 더디다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의 뇌는 어떠한 지식(정보)을 한 번 받아들이고 나면 좀처럼 바꾸는 게 쉽지 않다. 기후변화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기후변화를 부인하는 이유도 ‘뇌의 저항’ 때문이라는 말을 한다. 우리의 뇌는 언제나 안정을 추구한다. 뭔가 안정이 정착되고 나면 그 상태를 바꾸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변화를 일으켜야 할 때 가장 저항이 심한 신체부위는 뇌이다.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의 가장 큰 적(enemy)은 우리의 뇌이다.

 

6. 잘못된 지식이 뇌에 한 번 들어가면, 그 잘못된 지식을 뇌에서 빼내는 일은 매우 어렵다. 몸에 밴 잘못된 습관을 고치는 것이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인간은 아는 만큼 행동하게 되어 있다. 인간의 삶에 있어 지식의 업데이트는 매우 중요하다. 인간은 아는 것에 근거해서 행동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지식을 업데이트 하지 않으면 행동이 고루해진다. 인간에게 열린 마음이란 언제나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적극적인 행동이다. 소통은 열린 마음에서 시작한다. 자신이 현재 알고 있는 지식이 전부이고 진리라는 생각은 소통을 어렵게 한다.

 

7. 로마서는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핵심을 담고 있지만, 로마서는 또한 기독교를 분열시키는 데 잘못 쓰이기도 한다. 종교개혁 당시 로마서를 바탕으로 마르틴 루터가 만든 구호가 ‘오직 믿음’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서 탄생한 개신교는 ‘오직 믿음’의 구호 아래서 구원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는 교리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이 하도 강력하다 보니, 개신교 이외의 모든 교파는 ‘오직 믿음’에서 벗어난 구원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위의 상담 내용에서 보듯이, 가톨릭은 행위 구원을 말하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와는 결혼 조차 하면 안된다는 배타적인 신앙을 가진다.

 

8. E. P. 샌더스(E. P. Sanders)라는 성서학자가 있다. 꼭 기억해 두어야 할 학자이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바울 서신을 들여보는 데 있어 1977년 이후에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바울 서신을 들여다볼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바로 E. P. 샌더스(E. P. Sanders) 때문이다. 그는 1977년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 Paul and Palestinian Judaism>이라는 책을 통해서 그동안 기독교 성서학이 가지고 있었던 바울 신학에 대한 이해를 뒤집는다. 샌더스의 주장에 따르면, 종교개혁 이후에 그동안 너무 많은 학자들이 사도 바울과 유대교를 오해했다(로마서 설교, 비아토르, 48쪽). 그러한 오해는 당연히 로마서를 해석하는데도 영향을 미쳤다. 마치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는 율법과 복음의 대립을 상정하고, 율법과 복음 중 어떤 것으로 구원받을 수 있느냐의 문제로 바울 서신과 신학을 축소시켰다는 것이다.

 

9. 쉽게 말해, 우리는 흔히 이런 질문을 한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행위를 통해서인가 믿음을 통해서인가? 행위는 율법을 말하고, 믿음은 복음을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연히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굉장히 은혜로운 말 같으나, 이렇게 행위와 믿음을 대립적인 관계로 설정할 때 생겨나는 문제점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이후의 삶이 실종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에게 더 이상의 행위(행동)는 필요 없고, 그저 천국 가는 날만 기다리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신앙을 구원의 문제로만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복음은 믿음을 통해서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당에 가는 구원론으로 축소될 수 없다.

 

10. 이렇게 되면, 우리는 유대교에 대한 오해를 가질 수밖에 없다. 유대교는 율법을 통한 행위의 종교이고, 기독교는 믿음을 통한 은혜의 종교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이 생기게 된다. 샌더스가 제동을 건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발생한 시점을 기준으로 200년 전과 200년 후, 즉 400년 정도에 걸쳐 형성된 팔레스타인 유대교 문서를 모두 검토한 결과, 유대교를 행위의 종교(works-righteousness religion, 행위로 의롭게 되는 종교, 행위와 의의 종교)가 아니라 유대교도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은혜에 기초한 종교라는 것을 밝혀냈고, 그는 이것을 일컬어서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라고 불렀다. “율법에 순종했던 것은 언약에 들어가기 위해서(구원을 획득하는 순종)가 아니라, 은혜와 하나님의 언약적 은총을 토대로 자신의 언약적 처지(covenant standing)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로마서 설교, 비아토르, 48쪽).

 

11. E. P. 샌더스라는 성서학자 덕분에 우리는 바울서신, 특별히 로마서의 메시지를 좀 더 좀 더 완전하게, 왜곡되지 않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얼핏 읽으면 바울이 횡설수설하는 것 같은 율법에 대한 이야기, 이스라엘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이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를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성서해석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를 읽으면서 바울이 율법과 복음이 마치 대립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고, 율법과 유대교의 가치를 형편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더 나아가 유대인에게 저질러진 폭력의 역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일은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기독교 신앙의 오류들이다.

 

12.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는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 이유는 쓴 시기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는 고린도전후서를 쓴 직후, 그리고 로마서를 쓰기 직전에 쓰였고, 로마서는 갈라디아서가 쓰여진 지 채 1년이 지나지 않아서 쓰였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는 ‘율법과 믿음의 상관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그런데, 정황이 좀 다르다. 갈라디아 교회는 이방인 교회였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 자체가 별 의미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율법의 행위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마음에 와 닿았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는 믿음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진다. 율법의 행위에 대한 이야기는 이방인들에게 별로 감흥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13. 그러나 로마서는 정황이 달랐다. 유대교 배경의 그리스도인들이 로마교회의 구성원이었다. 율법과 믿음의 상관관계는 이들에게 매우 중요했다. 다짜고짜 율법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로마교회를 향해 바울에게 주어진 과제는 율법을 넘어선 복음의 보편성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복음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얼마나 평등한지에 대한 논증 없이 이들에게 복음을 토대로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도록 종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복음 아래에서 얼마나 평등한 존재인지를 논증한다.

 

14. 그들의 평등을 논증하는데 쓰인 개념이 바로 ‘죄’이다. 바울은 9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우리가 여기서 조심해야 읽어야 할 것이 있다.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는 죄는 인간 개인의 개별적인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말하는 죄는 모든 인간을 억압하는 힘을 말한다. 이것은 한 개인이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죄는 작은 이야기가 아니라 아주 큰 이야기이다. 우리 눈에는 명확하게 보이지 않지만, 어떠한 힘으로 우리 인간에게 영향력을 미친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고통이나 비극을 피할 수 없다. 죄의 힘은 거대하다.

 

15. 로마서 3장 10절에서 18절은 죄의 메타 내러티브 안에 있는 인간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져 있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 지어낸 상황이 아니라 구약의 전도서와 시편 등에 이미 진술하고 있는 인간의 상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인생을 오래 산 사람일수록 인간이 이러한 비참한 상황에 처해져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살지만, 우리에게는 늘 고통과 아픔이 있다. 고통과 아픔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그러한 것을 경험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통과 아픔을 피할 수 없다.

 

16. 죄에 대한 이러한 메타 내러티브는 우리 인간에 대한 이해를 깊게 도와준다. 사실, 이러한 메타 내러티브는 인간의 삶에 큰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메타 내러티브가 죄의 힘에 사로잡힌 이들에 의해서 이용을 당하면 사람을 정죄하는 데 쓰이고 만다. 대개 건강하지 못한 신앙을 추구하는 이단들이 그러한 행동을 한다. 인간을 희망으로 이끌지 않고 절망으로 몰아간다. 절망의 끝에 몰려 불안해 하는 인간에게 다가가 자신이 구원을 줄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 같지만, 실은 절망 속에 있는 사람을 컨트롤하고, 착취하려는 속셈이 담겨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러한 술수에 희생을 당했는가.

 

17. 바울이 로마서에서 인간의 곤경에 대해서 말하는 이유는 인간을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다. 지금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당신들이 얼마나 형편없는 존재인지 아시오!’라고 하면서 그들을 정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바울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오해해서, 바울이 말하는 인간의 곤경을 이용하여 전도하는데 사용해 왔다. “당신은 죄인입니다! 당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인정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지 스스로를 좀 돌아보시고, 어서 빨리 죄를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을 불쌍히 여겨 구원해 주실 겁니다.”

 

18. 그렇게 다그쳐서, 상대방이 죄를 고백하면, 그때 복음이 제시된다. “예수 그리스를 믿기만 하면, 당신은 구원을 받습니다. 믿으십니까?” 상대방이 믿는다고 말하면, 전도자는 이렇게 선포한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 구원이 정말로 값싸지는 순간이다. 구원받는 게 정말 쉽다. 이렇게 쉬운 구원을 사람들은 왜 받지 않으려고 할까. 그러면서 우리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한다.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는데, 믿음을 갖지 못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안타까워한다. 오직 믿음이 이렇게 쓰인다. 이것은 모두 로마서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오류들이다.

 

19. 우리가 가진 통념, 업데이트 되지 않은 지식과는 달리, 유대교나 가톨릭이나, 행위 구원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뇌는 여전히 유대교나 가톨릭이 행위 구원을 말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오직 믿음만을 말하는 개신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개신교인은 아주 쉽게 개신교 신앙을 갖지 못한 이들을 정죄한다. 그리고 그들을 모두 전도대상자로 삼고 그들을 향한 포교활동에 나선다. 이미 구원받은 확신에 가득 찬 개신교인들은 존재론적 우위에 있다. 구원받은 자는 구원받지 못한 자에 비해서 우월하다. 우월한 사람은 자신보다 우월하지 못한 이들에게 구원을 선물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복음은 존재론적 폭력으로 탈바꿈된다.

 

20.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인 막힌 담을 허물어 복음 안에서 화해를 이루고 한 몸을 이루게 끔 하기 위해 이방인의 사도로 사명감을 가지고 산 바울이 아무렴 우리가 통념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의 우위성을 말하며 사람들을 정죄하기 위해 로마서를 쓴 것일까? 그렇지 않다. 로마서뿐만 아니라 바울 서신 어디에서 바울은 막힌 담을 허물기 위해서 복음을 말하는 것이지, 사람들을 정죄하고 담을 쌓으려고 복음을 말하는 게 아니다.

 

21. “당신의 뇌가 가장 큰 적이다.” 우리 뇌를 지배하고 있는 잘못된 통념들을 뇌에서 몰아내지 못하면, 인생은 자꾸 누추해진다. 하나님은 우리의 누추한 뇌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다. 좋은 사람과 불편한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는 단 하나이다. 대화(소통)하려는 의지가 있는가 없는가이다. 좋은 신앙과 불편한 신앙의 차이는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는 단 하나이다. 대화(소통)하려는 의지가 있는가 없는가이다. 이단이 왜 이단인가? 잘못된 것을 가르치고 실행해서? 아니다. 대화(소통)이 없기 때문이다. 대화(소통)이 없으니까, 발전이 없고,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죽고 만다. 그래서 이단은 그냥 가만히 나눠도 소멸할 수밖에 없다.

 

22. 대화(소통)가 잘 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듯, 대화(소통)이 잘 되는 신앙인이 좋은 신앙인이다. 생명은 결국 대화(소통)이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성장하고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여러분의 뇌가 여러분을 한 곳에 머물러 있도록 붙잡아 두지 못하게 하시라. 부지런히 배우고, 부지런히 소통해서 성장하도록 하시라. 새롭게 발견하고 발전된 신학/신앙의 내용들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성장하고 성숙해 가시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할 때까지,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그렇게 역동적으로 사시라.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1. 29. 07:09

그리스도인의 가치

(로마서 3:1-8)

 

1. 우리가 읽고 싶은 대로 읽는 게 아니라, 바울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따라서 로마서를 읽어 내려가면, 바울이 약간 우왕좌왕 하는 듯이 느껴진다. 그리고 바울이 하는 주장은 매우 급진적이다(래디컬하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주장하고 있는 요점 중 하나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주장은 유대인이 들었을 때 매우 기분 나쁠 수 있다. 반대로, 이방인이 들었을 때 기분 좋을 수 있다.

 

2. 로마서 2장에서 바울이 진술한 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율법을 받았으나, 그것이 그들에게 우월감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생활 속에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율법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우월감을 가지며 살았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도구로 쓰였을 뿐이다. 그렇게 우월감 속에서 남을 정죄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바울은 말한다. 중요한 것은 실천하는 것이지, 율법의 소유가 아니다.

 

3. 그렇다면, 여기에서 당연히 제기되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3장 1절이 바로 그 문제제기이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 그러면 유대인의 나은 점은 무엇이며 할례의 이로운 점이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 비해서 나은 점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는데, 여러가지 중에서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기신 것을 첫번째로 꼽고 있다.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2절).

 

4. 다시 말하자면, 바울은 유대인의 가치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주장에 따르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복음 앞에서 가치의 차이가 없다. 그러면 도대체 유대인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며, 무슨 유익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통해서 보듯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며, 그들에게 지도자를 주시고, 땅을 주시고, 무엇보다 ‘복’을 내려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특별한 민족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런데, 바울은 이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이가 없다고 말하니, 유대인의 입장에서 바울의 주장은 얼토당토 하지 않은(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에게 크나큰 핍박을 받았다.

 

5. 우리가 로마서를 읽으면서 경험하는 것은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동일한 가치를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다고 유대인이 가진 고유의 가치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보니, 9장부터 11장에 걸쳐 바울은 유대인의 고유 가치와 미래에 대하여 고뇌하며 진술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결론을 주는 것은 아니다. 바울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유대인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동족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겸손하게 받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뿐이다.

 

6. 로마서의 이 본문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가치 있는 이유는 동일한 질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져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가치는 무엇인가?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인간은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면 흥미를 잃고, 열심을 내지 못한다. 사람은 누구나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에 자신의 삶을 드리고 싶어한다.

 

7. 그러나, 우리가 본문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가치가 생성되는 원리’이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내린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구약성경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유대인이 얼마나 복 받은 민족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 지구상에 유대인과 같이 하나님의 복을 받은 민족은 없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어처구니없는 상황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복을 받은 민족인데, 하나님에게 반역(revolt)하고 결국 망하는(destroyed) 그들의 모습을 본다. 결정적으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8. 바울이 유대인을 향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의 가치에 대해서 인정하면서도 부정하는 이유는 그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무익한 것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유대인들)과 언약을 맺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보듯이,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신실하지 못했다. 출애굽기의 가데스 바네아 사건에서 보듯이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반란을 일으켰고, 여리고성 전투 이후 아이성 전투를 하면서 탐욕을 버리지 못해 전투에서 패하고, 가나안 땅에 정착한 뒤 사사시대를 통해서 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마치 하나님이 없는 모습’이었다.

 

9. 그뿐만 아니다. 열왕기상하의 역사기록이 보여주듯이, 사무엘 시대 이후에 사울 왕을 세워 왕정이 시작된 이래 다윗 왕 이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이 집권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에 충실하고 신실한 나라를 세워간 역사가 거의 없다.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의 활동을 통해서 보듯이, 오므리 왕조(아합왕)와 예후왕조 등에서 보듯이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신앙은 온데간데없고, 바울과 아세라 등 우상을 섬기기에 바쁘고,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주변의 힘센 제국들을 의지하다, 의지하던 바로 그 제국에 의해서 나라가 멸망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불충과 불의의 역사이다.

 

10. 이스라엘(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 사이에서 불충하고 불의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언약에 충실하시고 의로우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냥 지엽적인 이스라엘의 역사로 끝나지 않고 인류의 보편적인 역사로 확대되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보편적인 인류가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불충하고 불의한 가를 그림언어로 보여주듯이 펼쳐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11. 가치는 저절로 생성되지 않는다. 하나님에게 선택 받은 민족이라고, 율법을 받았다고, 하나님께 다른 민족과 비교할 수 없는 복을 받았다고 해서, 그들의 가치가 천년만년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복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며, 그 안에 머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냥 놓아둔다고 가치가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가치를 계속 가치 있는 것이 되도록 부지런히 노력해야 한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12. 새로운 교회력이 시작되는 대림절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 본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I am a Christian”이라는 고백이 무슨 가치를 지니는가?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데, 우리는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유대인보다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역사를 보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유대인들을 판단하고 핍박했는가? 그런 것을 생각하면,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뒤집어서 적용되는 듯싶다. 로마서에서는 유대인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지만, 현재 우리는 동일하게 이방인의 가치가 무엇이지, 그리스도인의 가치가 무엇인지, 질문을 받고 있는 것이다.

 

13. 그리스도인의 가치는 다른 데서 오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아는 데서 온다. 대림절에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서 이루신 일들에 주목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림절에 네 개의 촛불을 켜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찬양한다. 소망, 사랑, 기쁨, 평화의 촛불이 그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소망을 주셨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셨고, 우리의 기쁨이 되셨고, 평화를 이루셨다. 그리스도인의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들을 묵상하면서 동일하게 그렇게 살아가는 데 있다.

 

14. 우리는 소망 가운데 있는가. 혹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낙심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마음에는 소망이 더 가득한가, 아니면 낙심이 더 가득한가?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가? 혹시 우리 안에 미움이 가득한 것 아닌가? 우리는 기쁨이 충만한가? 혹시 우리는 우울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무슨 노력을 하고 있는가? 불화하는 것을 보면서도 마음 아파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가치를 땅에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15. 나는 무엇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시 집중하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인의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일은 성경을 들여다보는 데서 시작된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를 기록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읽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은 구원은 이 세상 어떠한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것이다. 우리는 그 가치 있는 것을 가치 있게 머물도록 하고 있는가? 아니면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치 있는 삶을 굳건하게 지켜 나가는 복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