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와 교회

 

요한계시록 12장의 여자와 용 이야기는 이 세상에서 교회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그림언어다.

 

아이는 탄생하여 광야로 도망한다. 그곳은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피난처이다. 광야는 출애굽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광야는 하나님의 보호와 임재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고, 믿음의 싸움 없이는 머무를 수 없는 곳이다.

 

교회는 예수를 따라 광야로 나가, 그곳에서 철저히 하나님의 양육을 받으면서 생존해야 한다. 하나님의 양육은 광야에서의 유일한 생존 방법이다.

 

교회는 때로 이러한 유일한 생존 방식을 잊어버곤 한다. 교회가 광야에 있지 않고 고기와 밥을 주는 애굽으로 되돌아 갔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로 이사 온 후 가장 마음에 드는 것 중 하나는 도처에 광야가 널려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LA로 가는 5번 고속도로를 타면 끝없이 펼쳐지는 광야의 길이 참 좋다. 엔젤스캠프로 가는 길에 만나는 광야도 참 좋다.

 

그런 물리적인 광야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 광야다. 삶의 자리가 광야인 것을 영안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광야인 것이 보이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 광야인 것이 보이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하여 다른 것에 매달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다.

 

하나님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신다.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신다. 이게 보이면 사는 것이고, 이게 보이지 않으면 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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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두 증인 이야기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십자가의 길을 가는 두 증인 이야기'가 참 좋다. 두 증인은 굵은 베옷을 입고 마흔 두달(1,260일)동안 사역을 한다. 이 두 증인은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로 불리는데, 스가랴 4:10을 배경으로 보자면, 이들은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로 볼 수 있으며,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교회 공동체를 의미한다.

 

이들은 사역을 감당하며 '쓴맛 단맛'을 다 보고, 저항과 핍박에 부딪힐 것이지만, 주님은 이들을 모세와 엘리야처럼 보호하신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님처럼 예루살렘에서 죽게 된다. 이들의 삶이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삶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은 수치와 고난 가운데 사흘 반 동안 죽은 상태로 있을 뿐이며,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부활하여 하늘로 높여 올려진다.

 

두 증인의 이야기는 교회 공동체의 사역의 목적을 뚜렷이 보여준다. 교회 공동체는 고난과 핍박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여, 열방을 향하여, "돌아오라!"고 외쳐야 한다. 그 선포를 통하여 땅에 사는 자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다.

 

증인은 고난을 피할 수 없다. 증인의 삶을 살면서 직면할 수 있는 저항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 그럴 필요도 없다. 주님이 지켜주실 뿐더러, 죽더라도 주님께서 영광 중에 일으켜 세워 하늘로 올려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거대 서사가 참 좋다. 이러한 거대한 이야기의 관점에서 우리의 소소한 일상을 들여다 보면,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이 이러한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축복이고 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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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소확행과 작은교회 운동

소확행,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뜻으로, 1986년 발표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 <랑겔한스섬의 오후>에서 주조된 개념이다. 소확행은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삶의 방식이다. 특별히 한국사회에서는 1997IMF 사태 이후, 저성장과 불평등이 구조화되면서 행복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던져진 후, 현대인들의 삶에 새롭게 등장한 행복의 개념이다.

예전에 학업, 취업, 결혼은 자연스러운 생애주기였다. 한 사람은 고등학교든 대학이든 공부를 마치고 취직을 한 뒤, 사회에 정착하면 자연스럽게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며 살았다. 그때 사람들은 미래에 대하여 희망을 가지고 행복을 꿈꾸며 살았다. 그러나, IMF이후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생애주기는 불안정해지기 시작했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가중되었다. 더 이상 미래에 대한 욕망보다는 당장의 행복에 관심을 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나는 작은교회 운동이 이러한 사회적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교회의 생태계도 자본으로 인해 저성장과 불평등으로 구조화되었다. 자본이 있는 큰교회는 살아남기 유리해졌고, 자본이 없는 작은교회는 생존조차 불투명해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을 이길 힘은 없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아무리 설교를 잘 해도, 자본을 갖춘 교회를 따라가지 못한다.

소확행이 개인주의 사회의 결과이듯, 교회가 개교회주의로 가면서 개인이 자기만의 행복을 찾아가야 하는 것처럼, 개교회도 자기만의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자본이 없는 작은교회가 우리도 언젠가는 큰교회가 될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은 헛된 꿈일 뿐이고,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꿈꾸는 교회가 되는 것이 더 현실적이 되고 만 것이다.

이러한 현실이 비극인지 잘된 일인지 아직 결정짓기에는 이르다. 작은교회가 소확행을 꿈꾸는 개인들에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되어줄 수 있다면, 작은교회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소확행 교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교회가 되지 못한 좌절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떠밀리듯이 소확행을 시행하는 교회에 머문다면, 자기 자신에게도, 소확행을 찾는 현대인들에게도 비극이 될지 모른다.

자본에 의한 불평등한 구조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자본을 쥔 큰교회는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서 구석구석 소비하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것이다. 자본이 없는 작은교회는 그런 큰교회를 보면서 부러워하거나 또는 시기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가 가져온 사회적 병폐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작은교회는 소확행을 추구하는 이 시대의 수많은 작은 이들과 또다른 행복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세상을 보듬어야 하는 존재지 세상에서 좌절하는 존재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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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작심삼일(作心三日)

우리는 이 말을 부정적인 의미에서 사용한다. ‘마음 먹은 게 삼 일도 안 돼서 꺾인다는 뜻으로 말이다.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의지가 그만큼 나약하다는 부정직인 인식을 담겨 있다.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이다. 인간의 의지는 박약하고 게으르고 초라할 때가 많다. 3일만 지나도 우리는 기억을 잊은 듯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간다.

그런데, 어느 날, ‘작심삼일이 다른 뜻으로 다가왔다. 왜 우리는 마음 먹은 것을 3일도 지속시키지 못할까? 그것이 온전히 인간의 의지 박약 탓일까? 인생을 살아보니, 그런 것 같지 않다. 우리는 굳게 결심하여 그것을 실행하려고 하나 인생의 굴곡이 그것을 지키지 못하도록 막는다. 인생은 하루가 멀다하고 변화무쌍하다. 오늘의 결심을 내일까지 이어갈 수 있는 안정성이 우리 인생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혹시 작심한 것을 3일 이상 지속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의지가 대단하기 때문이라기 보다, 그냥 은혜다.

, ‘작심삼일이 이렇게도 다가왔다. ‘작심하고 3일만 하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 경험상, 무엇이든지 3일을 넘기는 것은 좋지 못하다. 일례로 들어, 한 권의 책을 읽는 데, 3일 이상 쓰는 것은 좋지 못하다. 3일이 넘어가면 흥미도 떨어지고 기억력도 흐려져 읽은 내용이 전혀 기억도 나지 않을 뿐더러 빨리 읽기를 끝내야 한다는 부담감만 마음에 쌓인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이면 책을 읽으면, 3일 이내에 끝내려고 한다. 이것을 실패하면, 뿌듯함 보다는 죄책감이 몰려온다.

인간에게 3이라는 숫자는 대단히 신비스러운 듯싶다. 동양사상에서도 3은 완전수이고, 기독교에서도 3은 완전수이다. 뇌과학에서도 3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기억하는 데 최소의 수로 생각한다. 세 번은 봐야 머릿속에 박힌다는 뜻이다. 무엇이든지 3일 정도는 지나봐야 그 일의 모양을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결정을 할 때도 3일 동안 생각하며 천천히 결정하는 게 지혜다.

인생은 너무 변화무쌍하다. 아무리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지켜낼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일이 다반사 일어난다. 마음 먹는 것 자체도 힘들지만, 마음 먹은 것을 지켜내는 일은 더 힘들다. 그래서 혹시 마음 먹은 것을 지켜냈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의 의지의 대단함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의지가 지켜질 수 있도록 돌보아준 어떠한 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인은 그 힘을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작심삼일. 작심하고 3(또는 세 번)만 해보자. 그리고, 그 작심이 3일 동안 지속되도록 은혜를 간구해 보자. 3일 뒤에(또는 3번 뒤에), 우리의 삶은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겨우 3, 또는 겨우 세 번인 것 같지만, 3, 또는 그 세 번이 인생을 바꾼다. 참을 인() 세 번이면(세 번만 참으면) 살인도 면할 수 있다 하지 않았는가.

Posted by 장준식

교회 없는 세상이라니, 아무 신비도 없어

 

인간이여, 너희들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

이마 아래 선명한 두 개의 불순물

눈동자라 불리는 작고 동그란 요물단지로

너희들은 너무 먼 곳의 빛과 어둠을 보았고

그것들을 전부 이곳에 데려왔다 그리하여

이 고귀한 땅은 미래라는 원숭이들의 난장판으로 전락했다

.

.

여름꽃의 독에 탐닉하여

일생의 복을 탕진한 자여

극장 없는 세상이라니

아무 신비도 없어

아무 신비도 없어

.

.

이곳은 한때 극장이 있었지요

사람들은 행복했지요

사람들은 언덕 너머에 사는 원숭이 떼 같은

미래 따위는 개의치 않았지요

극장은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이 천변만화하는 동시에 적재적소에 정돈되는

신비로운 곳이었지요

ㅡ 심보선, '극장의 추억' in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

 

내가 사는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에는 미래를 선도하는 기업이 즐비하다. 우리 집에서 다리 건너 10분만 가면 '페이스북' 본사가 있고, 그 밑으로 내려가면 '구글' 본사가 있고, 그 밑에 내려 가면 '애플' 본사가 있다. 우리 교회 옆에는 '테슬라자동차' 본사가 있다. 다니는 곳곳마다 우리가 현재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IT 관련 제품의 선도 회사의 본사가 즐비하다.

 

그런데, 미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 '교회'를 찾기가 쉽지 않다. 실리콘밸리 지역에서 집 구하는 것과 교회 건물 구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이다. 미래 산업이 발달하고 전세계에서 IT 관련 종사자들이 몰려오고, 땅값이 오르고 집값이 오르자, 기존에 있던 사람들은 바깥으로 내몰리고, 그때문에 기존의 교회 부지들은 모두 개발업자에게 팔려 집과 회사건물을 짓는데 사용되었다.

 

미래를 선도하는 기업에 취직하기 위하여 미래를 꿈꾸며 몰려온 사람들 때문에 그야말로 '이땅은 미래라는 원숭이들의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이곳에서 종교는 그들이 꿈꾸는 미래를 가로막는 불순물에 불과하다. '요즘도 교회 다니는 사람이 있어?'가 상식적인 언어이다. 그래서 이곳의 지형도는 일요일에 교회 가는 인구가 5%도 안 된다.

 

이곳에서 살면 살수록 느껴지는 풍경은 사람들이 '여름꽃에 탐닉하여 일생의 복을 탕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역에서 오래 살며 이 지역의 변하는 풍경을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어느 특정 지역을 지날 때마다 그곳에 있었던 교회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지금은 모두 집이 들어서 있고, 회사부지로 바뀌어 있다.

 

'교회 없는 세상이라니, 아무 신비도 없어, 아무 신비도 없어'라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미래를 선도한다는 이곳의 기업들은 미래를 준비한다고 하지만, 얼마나 지독하게 미래를 걱정하며 사는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이곳의 하늘은 온통 한 숨으로 뿌옇다.

 

'이곳은 한 때 교회가 있었지요. 사람들은 행복했지요. 그때는 미래 따위에 개의치 않았어요.' 교회가 없어진 땅, 미래가 들어왔지만, 그들이 말하는 미래는 도대체 무슨 미래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안하기만 하다.

 

교회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신비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신비는 불안이 아니라, 기대이고 희망이다. 미래는 희망이어야지, 불안이면 안 된다. 미래를 선도하는 기업들은 '여름꽃에 탐닉하여 일생의 복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마술과 같다.

 

그나마 얼마 안 남은 교회부지도 '탐닉'에 위협당하고 있다. 실리콘밸리 지역의 싸움은 지독한 영적인 싸움이면서, 동시에 지독히 현실적인 싸움이다. 땅이 없으면 신비도 없다. 땅이 미래다. 땅을 빼앗긴 교회는 미래도 신비도 다 빼앗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 실리콘밸리의 영적 싸움은 땅을 지키는 싸움이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부활이 요구되는 곳이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Posted by 장준식

원 이광수, 가장 잘한 일


100년 전, 개화 초기 한국 사회의 3대 천재 중 한 명으로 불리던 춘원 이광수, 교과서에서 배운 계몽주의소설무정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를 문학가로 알고 있지만, 실상 그는 언론인이면서 사회운동가였다. 국문학자 김윤식이 이광수에 대한 글에서 평가하고 있듯이, 그에게 문학은 여기(餘技)였다.


이광수는무정’, ‘유정’, 그리고등 한국 근대 소설의 한 획을 긋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는 언론을 통하여서 수많은 논설을 발표하였는데, 대표적인 논설로 <민족개조론>이 있다. 민족개조론을 발표한 후 이광수는 안창호와 함께 수양동우회를 결성한다. 수양동우회는 자신의 민족개조론을 실천으로 옮길 단체였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그의 독창적인 생각이라기 보다는 도산 안창호의 <실력양성론>의 연장선에 있었다. 일찍이 도산은 급진적인 독립운동에 맞서 점진적인 독립운동에 대한 주장을 펼쳤는데, 그 핵심 사상이실력양성론이다. 급진적인 독립운동을 하고자 했던 독립운동가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력충돌을 일으켜 즉각적인 대일항전에 나설 것을 촉구했으나, 도산은 그들의 생각에 반대하며 힘을 먼저 기르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이광수가 <민족개조론>에서 강조하는 무실ㆍ역행ㆍ충의ㆍ용감의 자기개조 및 자아혁신은 이미 안창호가 <실력양성론>에서 주장하던 내용이었다. 이광수와 안창호는 같은 평안도 사람으로서 이광수는 안창호의 제자였다. 독립운동에 대한 두 사람의 생각은 같았는데, 급진적인 독립운동보다는 점진적인 독립운동, 즉 힘과 실력을 먼저 기른 후 영구적인 독립의 기회를 맞는 것이 더욱더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믿었다.


안창호는실력양성론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도덕적인 국민, 실력 있는 국민, 화합하는 국민을 만들고자 흥사단과 수양동우회를 조직한다. 이 두 단체는 각기 미주와 한국에서 세워진 단체인데, 이 단체는 직접적인 독립운동 활동이나 정치활동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훗날 일제에 의하여 수양동우회가 정치단체로 지목되어 안창호와 이광수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옥고를 치른다.


안창호와 이광수는 대단한 독립운동 의지를 지닌 분들이었다. 안창호는 미국에 있는 가족을 돌보지 못한 채 평생 독립운동을 하느라 세상을 떠돌아다녔고, 이광수는 2.8 독립선언서의 기초를 작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안타깝게 안창호는 수양동우회 사건의 옥고 후유증으로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38년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스승을 잃은 이광수는 망명지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친일행각을 한다.


우리는 이광수를 기억할 때 한국 근대의 위대한 소설가이자 문장가로 기억하지만, 친일행각을 벌인 반역자로도 기억한다. 친일행위 때문에 해방 후 이광수는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구속됐고, 구속수감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납북되어 자신의 고향 땅에서 삶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8 독립선언서를 쓸 정도로 대단한 독립 운동가였던 이광수, 그가 왜 안창호의 죽음 이후 친일 행위자로 돌아섰는지에 대한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어느 안창호 연구서에는 안창호가 이광수의 친일 행위를 예견해서 망명지에서 이광수의 귀국을 극구 말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이유는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던 사상에 이광수가 깊게 물들어 있었는데, 안창호는 그것을 걱정했다는 것이다. 그 사상이란사회진화론이었다.


사회진화론은 그 당시 제국열강들이 약소국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쓰였던 사회과학의 사상이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영향을 받은 영국의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에 의해서 주장된 사회진화론은 인종차별주의나 파시즘, 나치즘을 옹호하는 근거와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약육강식 논리에 사용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유행하던 사상이다. 그 당시 최첨단의 지식인이었던 이광수가 세계를 휩쓸고 있었던 사회진화론에 휩쓸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그의 민족개조론도 결국 사회진화론의 측면에서 보면, 민족의 개조가 사회진화론적 입장에서 다른 민족보다 우위에 올라설 수 있는 길이었기에 이광수는 그토록 민족개조론을 통하여 약육강식의 국제사회에서 힘 있는 민족의 배양을 이루고자 했던 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한민족을 실질적으로 다스리고 있는 일본이 사회진화론적 측면에서 보면 한민족보다 더 훌륭한 나라이고 본받아야 할 나라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을 보면, 사상이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얼마나 무서운 도구인지 알 수 있다.


어떠한 사람의 행위는 한 가지의 잣대로 평가할 수 없을 만큼 그 안에는 복잡한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이광수는 분명 친일행위를 저지른 인물이지만, 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지식인이었던 한 인간의 고뇌와 맞물려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이광수의 친일 행위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그 당시 피 흘려 죽어 가며 끝까지 항일 했던 민족 지도자들에게 아픔이 되기 때문이다.


이광수의 친일행각에 대한 좀 더 깊은 연구와 평가를 뒤로하고, 그의 일생의 말년에 그가 행한 일 중 잘한 일은 <안창호 평전>을 쓴 일이다. 이광수는 한국역사의 인물 중 이순신과 안창호를 가장 존경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동시대를 살았던, 스승으로 모셨던, 깊은 영향을 받았던 안창호에 대한 평전을 기술한다.


이광수의 <안창호 평전>은 안창호 연구의 귀중한 사료이다. 안창호와 평생 사귐을 가지며 안창호와 함께 독립운동을 벌였던 동지로서 이광수는 안창호의 삶과 그의 사상에 대하여 글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이광수의 <안창호 평전>을 읽고 있노라면, 이광수의 파란만장한 삶이 애처롭고, 그러면서도 이렇게 훌륭한 책을 후대에 남겼다는 게 고맙기도 하다.

Posted by 장준식

별을 본 사람은 길을 떠난다

 

떠난다는 말은 참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어린 시절, 하늘에는 별도  많았다. 밤 하늘을 수 놓은 별을 올려다보는 것 만으로도 어느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보는 것보다 더 큰 환희가 있었다. 별을 보면 시 한 구절이 입에서 저절로 나왔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별은 외로운 인생의 친구요,팍팍한 삶의 희망이요, 희미한 미래의 비전이었다.

 

성경에 나오는 에 대한 이야기 중 가장 으뜸은 동방박사들 이야기(마태복음 2)’이다. 동방박사들은 유대 땅을 기준으로 동쪽 나라에 살던 사람들인데, 어느 날 하늘의 별을 관찰하다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의 별이 하늘에 떠 있는 것을 보고 그를 경배하러 유대 땅에 왔다.

 

그들이 보았다는 그의 별은 어떻게 생긴 별이었을까? 무슨 별을 보고 그의 별이라고 한 것일까? 그 별은 일시적으로 그때 그 곳에만 뜬 별이었을까? 아니면, 지금도 그 별은 하늘에 떠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밤하늘을 쳐다본다. 그런데 도무지 동방박사들이 그의 별이라고 가리켰던 그 별이 하늘에 떠 있는 것 같지 않다.

 

아마도 그 별은 여전히 하늘에 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지구의 대기는 점점 어두워졌고, 하늘의 별은 점차 줄어갔다. 별이 없어진 게 아니라 나쁜 공기가 하늘의 별을 가린 것이다. 하늘의 별이 하나둘씩 보이지 않게 되면서, 사람들은 더 외로워졌고, 희망과 비전을 잃고 마음의 병을 앓기 시작했다. 외로울 때 위로해 주는 친구가 없어졌으니, 팍팍한 삶에 빛을 비춰주는 희망이 없어졌으니,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비전이 사라졌으니, 당연한 결과이다.

 

도시의 문명 속에서, 밤이 너무 환해서 하늘을 쳐다볼 수 없고, 별이 너무 없어 하늘 쳐다보는 재미를 상실한 우리들이 별을 보고 길을 떠난 동방박사들처럼 길을 떠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우리들은 좀처럼 길을 떠나지 않는다. 모험을 하지 못한다. 그저 머문 자리에서 안주하기에 바쁘다. 하늘을 올려다보지 못하고 땅만 쳐다보면서 산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낮에 잃은 것을 밤이여 돌려다오." 낮은 이성이고, 밤은 상상력이다. 이성이 세상을 난도질하는 사이, 밤의 상상력은 자취를 감췄다. 밤 하늘의 별은 상상력의 원천이었는데, 별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된 도시 문명에 사는 우리들은 상상력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길 잃은 아이처럼 웅크리고 앉아 있을 뿐이다.

 

별을 본 사람은 길을 떠난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길을 떠났다. 길을 가다 멈추어 서지 않았다. 별이 멈출 때까지 계속해서 갔다. 중간에 헤롯 궁전에 들렀지만 궁전의 화려함과 권력의 달콤함에 빠져 엉뚱한 사람을 경배하지 않았다. 동방박사들은 하늘의 별을 보고 길을 떠났기 때문에 하늘 아래 땅에서의 영화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별이 머문 곳에는 헤롯의 궁전과는 대비되는 평범한 집이 있었고, 그 안에는 헤롯 대왕과 대비되는 힘 없는 산모와 아기가 있을 뿐이었다. 동방박사들은 가장 귀한 예물을 드려 가장 힘없고 연약한 산모와 아기를 경배했다. 그들의 시선은 도움이 필요한 연약한 자(산모와 아기)에게 머물렀다. 별을 보고 길을 떠나온 결과다.

 

밤 하늘에 별이 별로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별이 없으니 길도 없고, 길이 없으니 떠나는 사람도 없다. 머문 자리에 안주하여 자기 자리를 지키는 데만 온통 정신이 팔려 있으니 돌봄이 필요한 연약한 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다툼만 늘어간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가장 큰 과제 중 하나는 하늘의 별을 되살려 놓는 일이다. 별이 하늘을 수놓게 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외롭다고 울지 않을 것이고, 사는 게 팍팍하다고 좌절하지 않을 것이고, 미래가 불안하다고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 별을 본 사람은 동방박사들처럼 길을 떠날 것이다. 별을 보고 길을 걷다 별이 머문 곳 아래 놓여 있는 연약한 생명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장 값진 것을 내어 놓으며 생명을 보듬고 보살피는 방식으로 경배할 것이다. 구원은 떠남이 만드는 신비이다

Posted by 장준식

삶의 자리를 생각하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 안에 있는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위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요한계시록 1:9).

 

요한이 하고 있는 '형제/자매'라는 자기 규정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환란을 당하면서도 인내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과의 동일화(identification)이다. 누군가와 동일하게 되는 일은 중요하다. 그 사람이 환란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자신은 고난 당하지 않으면서 고난 당하는 자들을 위로하는 일은 공허하다. 동정은 누구나 할 수 있으나, 동일화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사람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며 그들을 동정하는 것은 바리새인의 신앙일 뿐이다.

 

요한은 밧모 섬에 있다. 그는 유배 중이다. 그곳에 머물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요한은 그곳에 기꺼이 머문다. 유배를 유배라 여기지 않는다. 그가 그곳에 있는 이유는 유배를 당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거하기 위함'이다.

 

어디에 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거기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하는 지가 중요하다. 자신이 현재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을 하고 있지 못하면, 아무리좋은 자리에 가도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을 하지 못한다.

 

우리는 날마다 물어야 한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나는 무엇을 보고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 나라를 보고 있으며,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을 하고 있는가?’ 내가 있는 자리는 벗어나고 싶은 유배지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거하기 위한밧모 섬 같은 은총의 자리인가.

Posted by 장준식

외로움을 극복하는 법

 

그는 "외로움은 주관적 고통"이라며 "원하는 사회적 관계와 누리고 있는 사회적 관계 사이의 차이가 바로 외로움"이라고 강조했다.

ㅡ 딜립 제스트 박사, UCSD 교수, 국제노인정신의학회지에 발표한 내용 중

 

원하는 사회적 관계와 누리고 있는 사회적 관계의 차이를 좁혀 나가는 것이 외로움을 덜어내는 중요한 일인 것 같다.

 

제스트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지혜의 수준과 외로움 사이에 역학관계가 있다고 한다. 지혜가 많은 사람은 외로움을 더 느끼지만, 지혜가 없는 사람은 외로움을 더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지혜가 외로움을 막는 요인이 된다는 것이 신기하다며,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성경의 대표적인 지혜서인 잠언과 전도서는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1:7).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그리하라"( 12:7).

 

이것이 종교적인 언어로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것은 매우 실존적인 언어이다. 제스트 박사가 신기해하고 있듯이, 지혜는 외로움을 덜어내는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은 강제성을 띠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것도 자기의 삶 안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 실존적인 언어를 종교적인 언어로 바꾸는 이유는 종교의 힘을 빌어 실존의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절실함이 스며든 지혜이다.

 

인간은 외롭다. 이데아의 자아와 현실의 자아 사이에 언제나 괴리와 부조리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두 자아 사이의 일치를 꾀하기 위해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지혜이다. 그 지혜란 무엇인가? 그것은 끊임없이 창조주를 기억하는 일이다.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하면, 지혜란 끊임없이 우리 인생의 유한성을 기억하는 일이다.

 

인생의 유한성을 기억할 때, 우리의 존재는 조만간 세상에서 없어진다는 것을 기억할 때, 인간은 헛된 꿈을 꾸지 않으며, 이데아의 자아와 현실의 자아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이상의 일을 하려 드는 무모한 삶을 살지 않으려 할 것이다.

 

인생을 외롭게 만드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내가 원하는 사회적 관계와 내가 누리고 있는 사회적 관계는 얼마나 일치를 이루고 있는가. 나는 혹시 헛된 꿈을 꾸고 있지 않은가. 나는 혹시 잘못된 꿈을 꾸고 있지 않은가. 결국, 원하는 것이 없으면 외롭지 않다. 원하는 것이 없는 상태가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상태이다. 우리에게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외에 무엇이 필요하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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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한국의 선교적 위치

 

이사야 19장은 한국 교회의 선교적 비전을 보여주는 신비한 말씀이다. 이사야 시대에 이스라엘이 앗수르와 애굽 사이에서 고난도 외교를 폈던 것처럼, 요즘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고난도 외교를 펴고 있다. 현재 한국은 중국보다는 미국과 더 가까운 동맹을 맺고 있지만, 앞으로의 국제 정세는 안개 속에 있는 것 같아 그 어느때보다 민족적 지혜가 요구되는 상황이다.

 

이사야 19장은 애굽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앗수르 세력에 맞서 살 길을 찾기 위해 하나님 대신에 애굽의 힘을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굽에 대한 심판은 이스라엘이 오판하지 않고 나라를 지켜 나가게 하기 위함 하나님의 지혜다. 특별히 이사야 19장에서 주목해서 봐야 할 대목은 이 구절이다. “그 날에 애굽이 부녀와 같은 것이라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흔드시는 손이 그들 위에 흔들림으로 말미암아 떨며 두려워할 것이며”(16).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왕이실 뿐 아니라 만군의 왕이시다. 그 분은 애굽 위에 손을 흔드신다. ‘흔들다(테누파)’는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리는 요제와 같은 뜻이다. 레위기의 제사법 중 요제라는 제사법이 있는데, 이는 제사장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 흔들어서 드리는제사를 말한다. 제사장이 제물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며 흔드는 이유는 그 제물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애굽 위에 손을 흔드신다는 것은 애굽도 하나님의 것이요, 그들 또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뜻이다. , 애굽은 하나님보다 크지 않다. 힘이 세지 않다.

 

개인이든 국가든 살아가며 주변의 힘 센존재에 기대는 경향이 있다. 특별히 국제정세 가운데 국가가 존속하기 위해서 주변의 힘센 나라에 의존하는 것은 한국 역사에서도 흔한 일이었다. 특별히 한국은 5천년 역사에서 오랜 세월 동안 중국에 많이 의존하였다. 한국이 미국에 의존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최근 미국과 중국이 벌이고 있는 무역 전쟁은 세상을 편가르기 하는 것 같다. 이사야 시대에 앗수르 세력과 반앗수르 세력(애굽과 구스 등)이 맞선 것과 같은 격이다. 최근 미국은 중국의 이동통신 기업 화웨이의 CFO 멍완저우를 체포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화웨이가 대이란제재(sanction)를위반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내면적인 이유는 IT 업계에서의 중국의 추격을 저지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분석이 있다. 미국의 우방은 미국과 행보를 같이하여 국내 통신기술 시장에서 중국의 화웨이를 퇴출시키고 있는 분위기다. 그러나, 한국의 LG 그룹은 미국의 우방들의 행보와는 달리 5G 통신망에 화웨이 제품을 쓰겠다고 공표하여 뭇매를 맞고 있다.

 

큰 나라들의 전쟁이 노골화되면 작은 나라는 큰 나라들 사이에서 눈치를 보아야 한다.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이 앗수르와 애굽 사이에서 그랬던 것처럼 지금 한국이 딱 그렇다. 이런 상황에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사야 19장은 그에 대한 지혜를 주고 있다.

 

나라가 어렵고, 시대가 어렵고, 국제정세가 어려울수록 교회는 성경을 통하여 지혜를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 이사야 19장은 이스라엘이 앗수르와 애굽 사이에서 더 힘 센 나라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그 힘 센 나라들을 그 발 아래 두고 계신 하나님을 의지할 것을 강력하게 선포한다. 힘들고 어려울수록 이 땅의 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을 의지해야 한다. 한국은 실제적으로 미국도 중국도 너무 믿지 말아야 한다. 이 땅의 힘을 의지하다가 나라를 빼앗기는 수모를 다시 겪을 수 있다.

 

이미 한국은 그러한 경험을 한 바 있다. 19세기 말, 제국주의가 판을 칠 때, 제국을 표방한 나라들은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해 혈안이었다. 조선은 그 당시 일본의 표적이었는데, 각 제국들은 자신들의 표적을 확실히 확보하기 위해서 서로 간에 협약을 맺는다. 그 당시 고종 황제는 러시아의 힘에 의지하고 있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을 통해 조선에 대한 청의 간섭을 물리치고, 러일전쟁을 통해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간섭을 물리쳤다. 그리고 마침내, 일본은 미국과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다. 그 밀약을 맺은 이후, 미국은 한국에서 영사관을 물렸고, 일본은 조선통감부를 통해 조선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한다.

 

현재 미국은 한국의 최고 우방이지만, 역사를 볼 때, 자신의 이익과 관련하여 어떠한 자세를 취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최근 중국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미 사드 배치문제로 한국 기업(롯데)에 대한 제재를 시행한 이력이 있다. 이렇듯 땅의 은 믿을 만한 게 못된다.

 

이사야 19장은 앗수르와 애굽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날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앗수르와 애굽이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나라가 되고, 그들은 서로 왕래하며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거라고 한다. 이사야는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라”(24)는 말씀을 선포한다.

 

한국(교회)이 거대한 힘,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나라들에 대하여 주권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주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면서, 미국과 중국이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며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협력하도록 기도하며 선교의 고삐를 놓치 않는 것이다. 특별히 중국은 아직도 신앙의 불모지와 다를 바 없다. 기독교는 중국 영토 내에서 공적인 활동을 할 수 없다. 그런 상황 속에서 중국인들을 향한 복음 전도의 길은 매우 위험하고 험난하다.

 

중국 선교의 한 방법은 미국에 살고 있는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미 우리 주변에는 중국교회가 많이 존재 한다. 그들의 신앙은 한국의 7,80년대 신앙처럼 뜨겁다. GTU에서 공부하는 한 중국 친구는 중국의 종교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 오듯 왔다고 고백하는 친구도 있다. 그러므로, 신앙의 선배 격인 한국(이민)교회는 중국이 미국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배하는 나라가 되도록 중국(이민)교회와의 협력을 통해서 중국의 복음화를 위해서 기도하며 힘써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에서 살아남기 위한 한국(교회)의 선교적 위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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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요한계시록 개론서, <십자가와 보좌 사이>를 읽고

 

저자가 결론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의 저술 목적은 요한이 여러 가지 문학적 장치들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것을 밝힘으로써 요한계시록을 보다 접근하기 쉬운 책으로 만드는 것”(116)이다. 책은 요한계시록을 문학으로 읽을 것을 요청한다. “만약 우리가 요한이 사용한 방법들(문학적 장치들)을 이해한다면, 요한계시록은 독자들이 읽기를 꺼려하는 책이거나 현대의 예측 차트가 아닌 본래 목적의 그것, 즉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에 대한 증언으로 보일 수 있다”(18).

 

저자는 저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요한계시록을 문학적으로 읽어내는 일을 해 나간다. 책은 개론서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의 첫 장부터 자세히 살펴보는 방식이 아닌 5개의 소주제(구속의 드라마 /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에 대한 서술 / 하나님의 적들에 대한 서술 / 어린양의 전쟁 / 오늘날 요한계시록 읽기)를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삼위일체 하나님 사역거룩하지 않는 삼위일체(unholy Trinity)’와 대조하면서 서술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의 드라마는 거룩하지 않는 삼위일체와의 전쟁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때 하나님의 백성과 불신자들의 행동은 구속의 드라마 속에서 분리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신실하고 정결하지만, 거룩하지 않는 삼위일체의 기만에 속아 넘어간 불신자들은 추하고 악한 일들을 통해서 사탄에게 신실하다.

 

저자는 요한계시록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요한은 발생반복(recapitulation/재현)’이라고 불리는 문학적 장치를 통해서 구약성경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은 하늘에서 뚝 덜어진 문서가 아니고, 구약의 예언자적 전통에 서 있는 문서라는 뜻이다. 구약과의 연장선 상에서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찬양이고, 하나님이 아실 일에 대한 소망의 기록이다.

 

개론서라는 지면의 제약상 저자는 모든 문학적 비유를 세세히 풀어내지는 않지만 요한계시록을 본래의 기록 목적에 합당하게 해석하도록 돕기에 충분하게 풀어낸다. 특별히 요한이 왜 7이라는 숫자를 사용했는지(7이라는 숫자는 완전과 보편을 나타낸다), 또한 왜 6이라는 숫자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대적인 짐승의 숫자를 만들어 내는지(6은 인간의 숫자이고, 7이 아닌 불완전한 숫자이다)를 명확하게 설명한다. 게다가 저자는 하나님의 대적인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왜 거룩하지 않는 삼위일체(unholy Trinity)인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맞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을 조롱하는지를 비교적 자세히 밝힌다.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하면서 주로 참고한 학자는 리처드 보캄(Richard Bauckham)G. k. 비엘(G. K. Beale)이다. 두 학자의 책을 참고하여 논의를 진행시켰다는 것은 이 책의 개론적 설명이 신뢰할 만한 것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보컴과 비엘은 요한계시록 연구 분야에서 가장 인정받은 학자들이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대한 설명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고 그 적용에서 비롯된 것이다. 저자는 오늘날 요한계시록 읽기에서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의 로마제국에 대한 비판을 상기시키면서,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를 적용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서 현대인들에게 탄압방탕이 개인들의 행동 속 뿐만 아니라 사회의 구조 속에 내재된 것을 환기시키면서, 주류 문화와, 정치권력에 맞설 것을 주문한다. 그런데, 저자가 미국인이어서 그런지 미국이 잘못한 옛일(Jim Crow ) 정도만 언급하고 넘어갈 뿐, 현재 미국이 저지르는 잘못에 대한 비판은 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고, 지면의 제약상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신기하고 안심되는 점, 그리고 책에 대한 신뢰를 할 만한 또다른 점은 저자가 삼위일체 사역 뿐 아니라 전례(Liturgy/예전), 그리고 성례전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침례교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침례교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수인 것을 감안하면 약간 이례적이다. (물론 미국의 학풍은 한국의 학풍과는 달리 어느 교단을 막론하고 보편적인 것이 있다.) 그가 그러한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지적으로 배우는 것뿐 아니라 몸으로 반복해서 행하는 것을 통해서도 형성되기때문이다(109).

 

저자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나 쾌락, 거짓 예언과 마주할 때, 여전히 그리스도께 신실하게 반응하도록 하기 위해 교회가 예배를 통하여 믿는 이들을 잘 인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성만찬의 중요성과 세례의 중요성, 그리고 말씀 선포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특별히 저자가 말하는 성만찬의 의미가 마음에 와 닿는다. “성만찬은 우리에게 과거를 상기시키고 미래를 내다보게 해 준다”(112). 저자는 말한다. “기억과 소망, 이 두가지 모두는 우리에게 현재를 살아갈 힘을 부여한다”(113). 세례도 말씀 선포도 모두 이 두 가지를 기억하고 실천하기 위한 전례들인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기억하고, 우리는 하늘의 보좌를 소망한다. 그래서 책 제목처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두 번의 오심(십자가와 보좌) 사이에서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신 승리를 믿고,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소망하면서 살아간다. 요한계시록은 미래의 일에 대한 감춰진 코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에게 신실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소망의 복음이다.


Posted by 장준식

시간과 교회력

 

수많은 위인들이 시간에 대한 명언을 남겼다. 그만큼 시간이라는 것이 우리 인간에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시간에 대한 명언 중, 나의 가슴에 가장 남는 명언은 고대 그리스의 비극작가 소포클레스가 남긴 이것이다.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 하루는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하루이다.”

 

같은 개념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서 다가오는 느낌이 다르다. 광고계의 전설 데이비드 오글비(David Ogilvy)의 일화도 유명하다. 뉴욕 거리에서 한 맹인이 이런 문구를 들고 구걸하고 있었다. “저는 맹인입니다. 도와주세요! I am blind. Please help!” 오글비는 그 문구를 이렇게 바꾸어 주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날이네요. 하지만 전 볼 수가 없네요. It’s beautiful day, but I can’t see it.” 그 이후, 뉴욕의 맹인은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시간에 대한 명언은 대개 시간을 아끼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시간이 짧기 때문에 시간을 아껴야지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성경은 시간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할까? 대표적인 예로 에베소서의 말씀을 들 수 있다. “시간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5:16). 언뜻 보면, 이 말도 다른 여느 시간에 대한 명언처럼 시간을 아끼는 것에 대한 말 같다. 그러나, 헬라어 원어를 보면 번역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시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시간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제공한다.

 

시간을 아끼라라는 말에서 아끼다의 헬라어는 엑사고라조이다. 이는 구해내다, 해방하다, 자유롭게 하다의 뜻을 가진 동사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다시 번역하면, “시간을 구해내라 때가 악하니라라고 할 수 있다. 정말 멋진 말이다. 시간을 구해내다. 시간을 해방하다. 시간을 자유케 하다. 그리스도인에게 시간은 단순히 아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구해내야 하는 것이다.

 

교회력은 교회의 행사력이 아니라 구원의 시간이다. 그리스도인의 몸인 교회가 교회력을 쓰는 이유는 교회는 구원 받은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구원 받은 공동체는 세상의 시간을 살지 않고 구원의 시간을 산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력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세상 사람은 달력으로 11일에 새로운 해를 시작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대림절(Advent)에 새로운 해를 시작한다. 대림절은 희망의 절기이다. 그리스도인은 대림절에 구원자(메시아, 그리스도)가 오시기를 기다린다. 대림절에 그리스도인은 구약성서를 통해서 고백된 그리스도가 이미 왔다는 것을 고백함과 동시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뒤,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그 그리스도가 이제 곧 다시 오길 것을 고백한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기다림의 종교다. 그 기다림은 헛된 기다림이 아니라 이미 구원의 완성을 이루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의 거룩한 기다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시간은 세상 사람들이 사는시간과 같지 않다. 세상 사람들은 시간을 아끼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된 시간 안에서 산다. 시간을 아끼는 행위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구원된 시간 안에 사는 자만이 구원을 받는다.

 

그리스도는 시간 안으로 들어오셔서(성육신 하셔서) 시간을 구원하신, 시간 너머에 계신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구원된 시간 안에 머물 뿐이다. 구원된 시간 안에 머무는 그리스도인은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그리고 이웃을 위하여 시간을 내어준다. 아낌 없이 내어준다.

 

한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 알고자 한다면, 그 사람이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를 보면 된다. 자기를 위하여 시간을 아끼는 사람과 주님과 이웃을 위하여 시간을 내어주는 사람의 삶은 같을 수 없다. 자기를 위하여 시간을 아끼는 자는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 머물지만, 주님과 이웃을 위하여 시간을 내어주는 자는 이미 구원 안에 머문다


시간을 아끼지 말고 시간을 내어주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원 받은 자가 또다른 어떠한 구원이 필요하길래 시간을 아끼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원 받은 자는 다른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아낌없이 시간을 내어준다. 그 아낌 없이 내어주는 시간이 또다른 구원을 낳을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파괴와 평화

 

2차 대전이 한창 중이던 19443, 미국에서는 엄청난 프로젝트가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장소는 뉴 멕시코 로스 알라모스(Los Alamos, New Mexico), 프로젝트 책임자는 오펜하이머(Robert Oppenheimer)였다. 이들이 만든 것은 원자 폭탄이었고, 책임자 오펜하이머는 원자 폭탄 폭파 시험을 트리니티(Trinity)’라고 이름 붙였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 용어가 인류 최초의 대량 살상 무기 프로젝트에 쓰인 것은 비극일까 희망일까. 1945716일 새벽, 원자 폭탄 폭파 시험에 성공한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이제 우리 모두는 미친 사람이 된 거야!”

 

어떤 신학자는 그들이 대량살상 무기 프로젝트에 트리니티의 용어를 가져다 쓴 이유를 자신의 흔적을 감추어 죄의식과 양심을 숨기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원자 폭탄 실험 책임자였던 오펜하이머는 대량살상 무기 개발에 기여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자기 합리화를 했는데, “가장 파괴적인 무기의 개발은 언젠가 전쟁이 아니고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 희망하였다. 어떻게 파괴가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는가?

 

오펜하이머의 희망은 자기 합리화에서 비롯된 망상일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사야서 17장에는 다메섹(아람)의 심판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아로엘의 성읍들이 버려져서 양 떼가 지나가다가 몸을 뉘어도 아무도 그들을 놀라게 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17:2, 우리말성경).

 

여기서 아로엘은 아람의 통치가 미치는 최남단의 도시 이름이다. ‘아로엘의 성읍들이 버려진다는 말은 아람의 모든 영토가 철저하게 파괴된다는 뜻이다. 그곳은 이제 사람이 살지 않고, 양들이 살게 되는데, 양들이 그곳에서 몸을 뉘어도 놀라게 할 자가 아무도 없다고 한다. 여기서 놀라게 할 자가 아무도 없다는 말은 히브리어의 엔 마하리드, ‘평화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2절 전체를 다시 해석해 보면, 철저하게 파괴된 다메섹에 평화가 온다는 뜻이다. 매우 역설적인 표현이다. 파괴가 되었는데, 어떻게 평화가 오는가? 파괴가 어떻게 평화를 가져오는가?

 

우리는 이 구절을 신앙의 역설을 표현하는 메타포로 읽어야 한다. 물론 실제 삶에서도 파괴와 평화의 상관관계를 목격할 수 있다. 원자 폭탄 실험에 성공한 미국은 곧바로 원자 폭탄 생산에 들어가, 한 달 여 후,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터뜨린다. 그 대량 살상 무기를 통해 일본의 두 도시는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일본은 무조건 항복했으며, 그것으로 인해 전쟁이 끝나고 세상에 평화가 다시 찾아왔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 파괴와 평화의 상관관계는 너무도 비참하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나는 파괴와 평화는 메타포로 읽는 게 좋다. 하나님은 인간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시는 분이 아니다.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까지 영국에서 활동한 영국 국교회의 신부이자 시인이었던 존 던(John Donne)의 거룩한 시편(Holy Sonnets) 열 네번째 시를 보면, 파괴를 통한 평화, 파괴를 통한 구원의 모티브를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시는 이렇다.

 

삼위 하나님이여 / 내 마음을 부수소서!

당신을 위하여 / 내 마음을 두드리소서.

주님의 숨으로 나를 들이 마시고, 내게 빛을 비추어

고쳐주소서.

내가 일어서도록 나를 꺾으소서.

주님의 능력으로 / 나를 부수고, 때려, 태우소서.

새롭게 하소서.

 

시인은 하나님께 간구한다. “나를 부수고, 때려, 태우소서!” 이것은 참 역설적인 표현이다. 나 자신이 철저하게 파괴될 때, 나는 새로워진다. 파괴가 평화를 불러온다. 사실, 인간의 존재가 그 누구에게도 위협(놀라게 하는 것, frighten)이 되지 않는 상태는 죽음의 상태이다. 내가 파괴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은 평화를 가져온다.

 

다석 류영모는 이 역설을 깨닫고 몸소 실천했던 신앙인으로 유명하다. 다석(多夕)은 저녁(, 죽음)이 많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호처럼, 밤이 되면 널판자를 깔고 거기에 누워 죽음으로 들어가는 연습을 했다. 죽음의 실존을 깊이 깨달은 사람일수록 없는 듯 있는 사람이 되어, 그 누구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는 선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평생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살았다. 한 끼만 다른 생명을 취해 먹고, 나머지 두 끼는 자기 살을 먹었던 것이다.

 

이사야서 17장은 파괴와 평화의 역설을 말하면서,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날에 사람들은 그들을 만드신 분을 바라보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 눈을 맞출 것이다. 자기들이 손으로 만든 제단은 바라보지 않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아세라 상이나 태양 기둥은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17:7-8). 여기서 바라본다는 것은 신뢰의 태도를 가지고 보는 것을 말한다.

 

자기가 철저하게 파괴된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을 신뢰하지 않는다. 자기가 철저하게 파괴된 인간은 자기를 지으신 이를 신뢰한다.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이나 이룬 것은 구원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 손을 신뢰하는 자는 미련한 자이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뿐이시다. 자기가 철저하게 파괴된 인간은 이것을 깨닫고, 오직 자기를 지으신 이만 신뢰한다. 이러한 상태가 바로 평화의 상태이고, 이 평화는 파괴를 통해서 온다. 파괴와 평화의 역설이 심장을 찌른다.  


Posted by 장준식

샌프란시스코 베이지역의 한국인의 역사적 맥락

 

193269일자 동아일보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안창호)23세 때 경성에서 지금 부인과 혼인해서 유학의 목적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 건너간 후 얼마 안 되어 개발회사를 통해 미국으로 건너오는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늘었으나 민족적 통제기관이 없었음으로 건너오는 동포들이 타락의 구렁으로 빠지기가 쉬웠다. 이에 도산은 학업을 중지하고 다 쳐서 50여명밖에 되지 않는 동포들을 모아 친목회의 산하에 규합해서 생활 향상에 노력했고개발회사를 통해 도미하는 동포의 지도와 직업 소개에 몰두한 결과 미국인의 조선인에 대한 신용이 두터워졌다.”

 

안창호가 미국에 유학 온 때는 1902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16년 전이다. 안창호가 미국으로 유학을 나와 학업을 중단하면서까지 이미 삶의 터전을 가꾸어 가고 있었던 50여명의 한인들을 규합하여 그들의 삶을 돌본 지역이 바로 샌프란시스코이다. 샌프란시스코 배이지역에 현재 한국인은 10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대부분 한인들이 이곳에서 굶지 않고 잘 살고 있다. 참 감사한 일이다. 한인들이 이렇게 삶의 터전을 잘 가꾸어 갈 수 있는 초석을 놓은 사람이 안창호이다.

 

1930년대에 안창호의 제자 중 한 명이 샌프란시스코 배이지역으로 유학은 나왔다. 그가 다닌 학교는 버클리 소재 GTU(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 소속 학교 중 하나인 PSR(태평양신학교)이다. 그는 PSR에서 학업을 마친 뒤 한국에 돌아가 목회자가 되었고, 소설가로도 활동했다. 그가 쓴 소설은 <화수분>인데, 그는 소설을 썼을 뿐만 아니라, 김동리, 주요한과 함께 한민족 최초의 문학 동인지 <창조>를 창간했고, 1935년에는 기독교 잡지 <새사람>을 창간하기도 했으며, 한국인이 즐겨 부르는 찬송가 <내 진정 사모하는>을 번역하기도 했다. 그는 소설가이자 목회자, 그리고 신학교 교수로서 살면서 한국인의 계몽을 위해서 힘썼는데, 그가 바로 전영택이다.

 

안창호는 교민 사회를 돌보며 교민들에게 교회에 나갈 것을 권하고, 좋은 교회를 찾아 소개해 주기도 했다. 그는 교민들을 돌보며 교민들의 생활 향상에 힘썼는데, 이러한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미국의 과수원에서 귤 한 개를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것이다.” 안창호의 이러한 노력은 농장의 수입을 올렸고 한인 노동자들에 대한 신뢰를 높여 주었다. 그리고 한인 교회는 안창호의 그러한 노력을 높이 치하했다.

 

안창호와 전영택은 모두 개신교인이었다. 안창호는 장로교 교인이었고, 전영택은 감리교 목사였다. 이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을 삶의 실천으로 옮기며 살았다. 특별히 안창호는 교육자로서 기독교 신앙의 바탕 위에서 사랑의 절대 가치를 실천하며 한 사람 한 사람을 성실과 정직이 몸에 밴 사람으로 개조하려고 노력했으며, 대한독립의 소망에 가치를 두고 이웃 사랑과 나라 사랑에 온 삶을 바쳤다.

 

안창호는 당시 한국 교회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던 선교사들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일제의 지배를 기정사실의 민족 현실로 받아들일 것에 대하여 신앙 지도를 했으며, 한인 기독교인들이 사회적/민족적 죄에 대해서는 도외시하고 개인적인 죄에만 집중하도록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때, 교인들이 예배당에 모여 죄를 자복한다 하여 울부짖고 땅에 구르는 것을 보고 안창호는 이렇게 한탄했다. “저 어리석은 백성을 어떻게 깨우칠꼬?”

 

2007, 한국에서는 Again 1907년을 외치며, 평양대부흥운동 때처럼 회개 운동을 벌였다. 그런데, 그 회개운동은 무엇을 위한 회개 운동이었나. 회개한 한국 기독교가 왜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가. 안창호가 작금의 한국 기독교를 본다면, 똑같이 한탄할 것이다. “저 어리석은 백성을 어떻게 깨우칠꼬?”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 배이지역에서 교민들의 생활 향상에 힘써 교민들이 이곳에 잘 정착하기 시작한 역사가 벌써 100년이 훨씬 넘었다. 우리는 지금 100년이 넘은 한인 이민 역사의 한 자락을 채우고 있다. 우리는 개신교인이고 한국인으로서 모두 안창호의 후예들이다. 안창호의 후예로서 우리는 어떠한 가치를 지키며 이 시대에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삶을 돌보아 주며 생활 향상에 힘쓰고 있는가. 기독교 정신으로 무장하여 사랑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삼고, 삶의 자리에서 성실과 정직으로 무장하여 나에게 맡겨진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나라 사랑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사는가. 또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교회에 나가서 신앙생활 할 것을 권고하며 좋은 교회(우리 세화교회?)를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있는가. 샌프란시스코 배이지역에서 한인으로서 사는 우리의 역사적 맥락은 안창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안창호처럼, 전영택처럼 기독교 정신으로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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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외롭게 두지 않기

 

최근 ‘노인의학 저널: 심리과학(Journal of Gerontology: Psychological Sciences)’에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 의대 연구팀의 연구 결과가 게재되었다(조선일보 기사). 그 연구에 의하면, 외로운 사람일수록 치매를 앓을 확률이 높다. 외로움은 치매 확률을 40% 증가시킨다. 이 연구가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큰 표본을 장기간 추적했다는 데 있다(12030명을 10년간 추적). 표본에는 성별, 인종, 종교, 교육 수준, 친구 및 가족과의 사회적 접촉 등의 요소가 고려되었다. 외로움이 치매를 불러온다는 사실이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누구나 외로우면 치매에 걸릴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외로움이란 무엇일까? 외로움은 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 여기서 관계는 세 가지의 관계를 말한다. 첫째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이고, 둘째는 타인과의 관계이고, 셋째는 절대 존재(하나님)와의 관계이다.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관계가 단절되면, 인간은 외로움을 느낀다.

 

대개 사람들은 외롭지 않기 위하여 두 번째의 관계, 즉 타인과의 관계를 잘 맺으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현대인들에게 더욱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인데, 현대인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 있으려고 타인을 모방한다. 같은 패션, 같은 말투, 같은 생각 등, 현대인은 자기 자신이 타인과의 연대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부단히 증명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첫 번째 관계, 즉 자기 자신과의 관계의 외로움을 불러온다. 타인과의 연대를 부지런히 증명하다 보니,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잘 맺지 못한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자기 자신을 잊어버린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상실한 사람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혼자 있는 시간에 인터넷이라도 해야 한다. 스마트폰을 손에 붙들고 있기라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자신이 혼자라는 생각에 압도당해 불안해한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절대 존재(하나님)과의 관계로 잘 못 맺는다. 생각이 온통 밖으로 향해 있고, 자기 자신이 아닌 타자로 영혼의 중심을 채우고 있으니, 절대 존재와 직면할 시간도 공간도 없다. 그렇다 보니 현대인들의 삶은 점점 더 빈곤해져 가기만 한다.

 

현대인들 중에서 치매 환자가 증가하는 이유는 오래 살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관계의 빈곤함, 즉 외로움 때문에 그런 것이 크다. 치매는 노인에게만 오는 질병이 아니다. 요즘에는 젊은이들에게도 치매가 온다. 그만큼 요즘 시대는 노인이나 젊은이나 가릴 것 없이 외롭게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김상중은 그의 책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에서 악은 아무런 내용이 없는 공허한 것이라고 말한다(85). 그는 에리히 프롬의 생각을 빌어, 인간 존재에는 죽음을 추구하는 요인인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와 삶을 추구하는 요인인 바이오필리아(biophilia)’, 두 개의 인자가 있다고 말한다(116). 여기서 전자는 악을 말하고, 후자는 선을 가리킨다. 전자는 죽음, 파괴, 폭력을 향한 인자이고, 후자는 생을 향한 생산적이며 생명력 있는 인자이다.

 

인간이 악을 생산해 내는 이유는 공허한 악의 요인(네크로필리아)으로 자기의 존재를 채우기 때문인데, 그 공허는 바로 관계의 단절에서 온다(121). 악은 자기 자신과의 단절, 세상과의 단절, 절대 존재와의 단절에서 생기는 자기혐오의 파괴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악을 생산해 내는 사악한 인간이 되지 않으려면 인간은 부단히 자기를 자기 자신과 세상과 절대 존재와 관계 맺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단절의 경험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길은 자기 자신을 세상의 일부로 인정하는 데 있다. 김상중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세계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계가 아무리 악하다 하더라도 세계와 자기 자신을 선하다 여길 수 있는 능력, 이것이 사랑의 능력입니다”(159).

 

자기 자신을 외롭게 두지 않는 방법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세계(타인)를 사랑하고, 절대 존재(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다. 이 사랑은 책임(responsibility, response+ability)을 불러온다(159). 책임이란 나 자신, 타자, 그리고 절대 존재에게 응답(response)할 수 있는 능력(ability)이다. 외로운 사람은 응답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그래서 외로운 사람은 늘 무기력하게 웅크리고 있다. 그러나 외롭지 않은 사람, 즉 자기 자신과 세상과 절대 존재와 연결되어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세계(타인), 절대 존재에 응답한다. 응답해야 하기 때문에 무기력하게 웅크리고 있을 수 없고, 응답해야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초월해서 누군가와 연합하지 않을 수 없다.

 

외로움에서 만들어지는 공허, 그 공허에서 생성되는 악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김상중이 제시하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는 세간에 대해서 말한다(163). 세간을 다른 말로 바꾸면, ‘소소한 일상이라고 할 수 있다. 소소한 일상을 사랑하며 소소한 일상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하여 책임질 줄 아는 소소한 마음이 악을 극복하는 방법이라는 말은 대단한 통찰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소소한 일상(세간)’을 공허하게 느낄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 공허가 우리를 외롭게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짜증, 배우자의 잔소리, 일터에서의 스트레스, 이 모든 소소한 일상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그리고 응답해야 할 소중한 것들이다. 그 누구도 외로워서는 안 된다. 나 자신도, 내 곁에 있는 사람도, 지금 내 앞을 지나고 있는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저 사람도. 치매에 걸려 자기 존재를 잃지 않기 위해서. 공허에 사로잡혀 악을 생산해 내지 않기 위해서.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