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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10.25 홈리스
  2. 2012.10.25 창조는 발견이다
  3. 2012.10.22 신품(信品)이 중요합니다!
  4. 2012.10.02 경이로운 하나님 나라 1
  5. 2012.09.29 한단지몽(邯鄲之夢) 1
  6. 2012.09.24 결초보은(結草報恩)
  7. 2012.09.17 탄식하는 기도
  8. 2012.09.07 대기만성(大器晩成)
  9. 2012.09.01 시대가 아프다 1
  10. 2012.08.29 유능제강(柔能制剛)
  11. 2012.08.28 육신의 웰빙 1
  12. 2012.08.25 청출어람(靑出於藍)
  13. 2012.08.24 나는 강간 당했다 1
  14. 2012.08.22 지란지교를 꿈꾸며
  15. 2012.08.17 파렴치(破廉恥) 1
시(詩)2012. 10. 25. 00:08

홈리스

 

큰 아들 감기예방접종 하고 오는 길, 빨간 신호에 걸려 교차로에서 잠시 정차한다. 교차로 모퉁이, 홈리스 아저씨가 붉은 색 카트를 세워두고 손에는 플래카드를 들고 구걸하고 있다. “I am homeless. God loves all.” 그의 손에 쥐어줄 현금이 없어 난감해 하고 있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큰 아들의 질문: “아버지, 저 아저씨는 저거 손에 들고 왜 저렇게 서 있어?” 이제 다섯 살 난 아들에게 이 세상의 부조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순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멈칫하다가 나는 이렇게 대답해 준다: “, 저 아저씨는 저거 들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중이야.” 아들은 커서 홈리스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될 것이고 오늘처럼 홈리스를 보면 동전 몇 푼 손에 쥐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홈리스의 손에 동전 몇 푼 쥐어주는 동정심을 갖는 것보다 홈리스를 생산해 내는 이 세상의 부조리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정의와 용기를 갖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참으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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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2. 10. 25. 00:06

창조는 발견이다

 

컬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했고

뉴턴은 중력의 법칙을 발견했다

이 세상에 발견되지 않는 게 어디 있으랴

피에타상을 조각한

미켈란젤로도 대리석 속에 누워 있던

예수와 그의 어머니를 발견했을 뿐

그는 무엇인가를 창조하지 않았다

인간에게 창조라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인간에게 창조라는 것이 어울리는 것일까

창조는 인간의 속성이 아니라 신의 속성이 아닌가

인간은 그저 신이 창조해 놓은 것을 발견할 수 있을 뿐

그 어느 것도 창조할 수 없으리라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찾을 것이라

인간에게 있어 창조는

구하는 일이요

찾는 일이요

두드리는 일이리라

신이 창조해 놓은 것을

그저 발견했을 뿐인데

그것을 창조라고 일컫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

그 불경스러운 불명예를 뒤집어 쓰지 않기 위해

나는 오늘도 신의 창조를 발견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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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꽃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은 꽃의 화용(花容)만 봅니다. 꽃의 겉모습만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꽃을 보면서 예쁘네 안 예쁘네 라는 평가만 내립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꽃의 향기와 아름다움만을 본다면 그것은 꽃을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꽃은 화용을 보는 것이 아니라, 화품(花品)을 봐야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매란국죽(梅蘭菊竹,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일컬어 사군자(四君子)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 꽃나무들의 화품 때문이지 화용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 볼 줄 모르는 사람은 사람의 외모만 봅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면서 잘 생겼네 못생겼네 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인품(人品)을 보아야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성인군자는 인품이 매화처럼 매서운 세파에도 굽히지 않는 고매함을 지니고 있고, 난초처럼 기세와 자태가 곧고, 국화처럼 굳은 지조를 지니고 있고, 대나무처럼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강인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양사상에서는 자연이나 인간이나, 생긴 것은 다를지라도 ()이라는 측면에서는 서로서로 통하는 것들을 지니고 있다고 보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면서 살았습니다. 이런 것들이 한국에서는 선비정신으로 통했던 것이죠. 그래서 사람은 무엇보다 인품이 중요합니다.

 

인품이 그 사람을 결정하는 것이지, 외모가 그 사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들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가야 합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신품(信品)"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기품이라고 할까요?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신품으로 판단 받습니다. 기품 있는 믿음, 품위 있는 믿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죠. 믿음이 매화처럼 고매하고, 난초처럼 곧고, 국화처럼 지조 있고, 대나무처럼 강인함을 지니고 있다면, 기품 있는, 품위 있는 믿음을 지녔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우리의 중시을 보십니다. 그 중심이 바로 "신품"입니다. 기품 있고, 품위 있는 믿음의 소유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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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경이로운 하나님 나라

 

<미운 오리 새끼>, <성냥팔이 소녀>, <벌거벗은 임금님>, <인어공주>. 전 세계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동화들입니다. 이 동화를 지은 작가의 이름이 안데르센입니다. 위에 열거된 동화들은 모두 안데르센 동화집에 나오는 이야기들 입니다. 덴마크 출생인 안데르센은 매우 가난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안데르센은 어머니에게서 신실한 기독교 신앙을, 아버지에게서는 상상력과 교양을 배웠습니다. <성냥팔이 소녀>는 어린 시절 너무도 가난해서 구걸까지 해야 했던 어머니의 어린 시절을 소재 삼아 쓴 이야기로 유명하고, <미운 오리 새끼>는 안데르센이 작가로 데뷔한 이후에도 그의 출신 때문에 홀대 받은 것을 소재 삼아 쓴 이야기로 유명합니다. 가난과 홀대에 시달렸던 그가, 그토록 인류 역사에 남을 동화를 창조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가난과 홀대에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지긋지긋한 권태로움이 그를 세계적인 동화작가로 만든 것입니다. 가난과 홀대 속에서 그가 그냥 가난과 홀대만 보았다면 그는 결코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동화작가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안데르센은 가난과 홀대 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보았습니다. 그의 동화는 그 속에서 그가 본 것을 그대로 적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동화는 꾸며낸 이야기라기 보다는 그가 경험하고 인식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의 근거로 삼고 있는 성경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권태로운 이 세상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를 경험하고 인식한 믿음의 사람들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 써 내려간 하나님 나라 이야기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나타난 새로운 창조,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경험하고 인식하려면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성령의 영감이 꼭 필요합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 성경은 그저 지루하고 따분한, 세상 이야기와 다를 바 없는 권태로운 이야기가 될 것이지만, 성령 받아 믿음의 눈으로 본다면 성경은 경이로운 하나님 나라를 담고 있는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성경 속에서, 그리고 권태로운 삶 속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경이로운 하나님 나라가 보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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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2. 9. 29. 04:36

한단지몽(邯鄲之夢): 한단에서 꾼 꿈이라는 뜻 / 인생의 덧없음과 영화의 헛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당나라 현종때 도사 여옹(呂翁)이 예전의 조나라 수도였던 한단으로 가던 도중 주막에서 가난한 청년 노생(盧生)을 만났습니다. 노생은 출세해서 부귀영화를 누려보고 싶은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습니다. 주막집 주인이 밥을 짓기 시작하는데 노생이 졸고 있자 여옹이 베개를 주면서 그것을 베고 자면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노생은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결혼하고 수상이 되었다가 모함으로 귀양살이도 하고, 다시 복직하여 많은 손자를 두고 80세까지 잘 살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하품을 하니 이 모두가 꿈이었습니다. 더구나 주막집 주인은 아직 밥을 다 짓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옆에 앉아있던 여옹이 인생은 원래 다 그런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노생은 그 가르침을 명심하겠다고 감사하며 한단을 떠났습니다. - 심기제(沈旣濟)의 침중기(枕中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지난 며칠간 자신들에게 일어났던 일이 꿈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들이 따르던 예수라는 분을 통해 무엇인가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랫동안 메시아를 기다려왔던 터라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예수라는 분이 바로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나 이분은 자신들을 이 지긋지긋한 로마의 압제로부터 그 옛날 다윗처럼 용맹하게 자신들을 구원해 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참으로 ‘한단지몽’과 같았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유대인들은 ‘호산나’ 외치며 그를 반겨주었습니다. 그런 그들의 외침과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의 꿈과 희망은 모두 십자가에서 물거품이 되어 날아갔습니다. 예수의 생전에 그를 따랐던 이 두 제자는 꿈같았던 한 때를 기억하며 고향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가는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그가 누군지 몰랐습니다.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가는데 이 사람은 도대체 어디서 온 사람인지, 한바탕 도성 예루살렘을 시끄럽게 했던, 그리고 온 유대를 들썩이게 했던 예수라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사람에게 그 일에 대하여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고향집에 당도하자 그 사람에게 자신들의 집에서 유숙하고 갈 것을 권했습니다.

 

그들은 함께 집으로 들어가 음식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음식을 먹을 때 그 사람이 감사 기도를 하고 나누어 먹자 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들은 알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며칠 전에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예수라는 것을 깨닫자 마자 예수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생시인지 모를 지경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생시인지, 아니면 부활의 주님을 몰라 보는 이 세상이 생시인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거나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그냥 무작정 “믿습니다!”를 외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자에게 부활은 한낱 꿈에 불과합니다. 부활의 현실이 무엇인지를 고민해 보지 않으면, 부활은 우리의 참된 미래가 아니라 이 땅에서의 한낱 꿈에 불과합니다. 부활은 ‘한단지몽’처럼 인생의 덧없음과 영화의 덧없음을 말해주는 계몽의 사건이 아니라, 참된 우리의 실존을 말해 줍니다. 궁금증을 갖고 질문해 보십시오. 부활이란 무엇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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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2. 9. 24. 03:41

결초보은(結草報恩): 풀을 맺어 은혜에 보답한다는 / 죽어서까지라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음

 

춘추시대 진나라에 위무자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평소에 그는 아들 위과를 보고 아비가 죽은 뒤에 아기를 낳아보지 못한 서모를 개가시켜 잘 살도록 하라고 항상 일러 왔습니다. 그러다가 무자가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자 다시 과에게 명령하길, “내가 죽거든 너의 서모도 나를 따라 같이 죽게 하여 합장을 시켜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 후 무자가 죽게 되자 위과는 그의 아버지 무자가 병이 깊었을 때 분부한 명령은 제 정신에서 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무자가 생존 시에 누누이 분부하던 뜻을 따라 순장하지 않고 서모를 살려 주어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게 했습니다. 그 뒤 진()나라와 ()나라가 싸움이 벌어져 위과가 전쟁에 나가 진()의 유명한 장수 두회와 싸워 위태로울 때 서모 아버지의 망혼(亡魂)이 나와 풀을 잡아 매어 두회가 탄 말이 걸려 넘어지게 하여 두회를 사로잡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날 밤 위과는 꿈 속의 싸움터에서 풀을 맺던 그 노인을 만났는데 자칭 개가한 서모의 아버지라 하면서 자기 딸을 죽여 합장시키지 않고 살려 시집 보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습니다.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 구원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예배도 열심히 드려야 하고,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해야 하고, 전도도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인간으로서 이치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보답의 차원에서 하는 신앙생활은 그렇게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에 빚진 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피차 사랑의 빚 외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합니다( 13:8).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만큼 하나님을 허무하게 만드는 일 또한 없을 겁니다.

 

우선,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의 은혜는 무슨 보답을 바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은혜는 순전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에게 구원은 필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는 구원하는 일이 본성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은혜에 보답 차원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하나님 입장에서는 실로 생소한 반응인 것입니다.

 

또한 신앙생활을 할 때 보답의 차원에서 하는 것은 신앙의 한계를 미리 정해 놓는 처사가 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 깊고 크셔서 우리가 헤아릴 수 없고 갚을 수도 없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 다 끝났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저버릴 수 있게 됩니다. 다 갚았으니 더 이상 하나님과 관계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은 쉽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서 떠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보답의 차원에 머물면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보답의 차원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단순히 물에 빠져 죽어가던 사람을 건져낸수준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을 죄의 개념과 연관시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원은 죄에서 건져냄이라고 생각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구원에 대한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구원 사건인 이유는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분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기때문입니다. 구원의 더 깊은 내용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지,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지 않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었다면 부활도 없었겠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만으로는 구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죽음이 구원의 징표라면 이 땅을 살다 죽은 모든 사람이 구원자로 칭송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은 부활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보아야 그의 죽음이 구원의 효력을 갖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부활의 관점에서 구원을 보지 않고, 죽음 그 자체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원은 죄에서 건져냄의 개념보다 훨씬 더 깊고 넓습니다. 구원은 새로운 창조요 생명의 완성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보답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궁극적인 생명의 차원에 들어섰기 때문에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결초보은의 신앙생활을 넘어, 존재의 변화(새로운 피조물, 생명의 완성) 차원으로 들어가는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이루는 신앙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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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편은 시이며, 기도문입니다. 시편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언어는 탄식의 언어입니다. “탄식이라는 말을 국어사전은 이렇게 정의합니다. “한탄하여 한숨을 쉼. 또는 그 한숨”. 그리고 국어사전이 제시하는 예문은 이렇습니다. “그는 밤이 너무나 긴 것을 탄식하며 어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었다.” “그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탄식했다.”

 

성경은 성령께서 임하시면 탄식하는 마음이 생긴다고 합니다( 8:26). 그것이 성령께서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시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연약한 우리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한숨 쉽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바로 그 탄식을 통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를 알게 하십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그 이유를 안다면 우리는 더 이상 탄식하지 않아도 됩니다. 기뻐하거나, 감사하거나, 둘 다 하거나 하면 됩니다.

 

탄식하지 않는 자는 죽은 자입니다. 살아 있는 자가 어찌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기도할 때 탄식의 언어로 기도하지 않는 자는 그 마음이 이미 죽어 있는 자이거나, 성령 받지 못한 자입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악한 일에 대해서 죽어 있고, 내 이웃에게 일어나는 악한 일에 대해서 죽어 있는 사람은 탄식하지 않습니다. 어둠이 걷히길 바라지 않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그야말로 어둠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빛의 자녀라면 지금 내 삶에 드리워져 있는 어둠이 물러가길 탄식할 것입니다. 빛의 자녀는 어둠 속에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탄식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으며, 탄식의 언어는 우리의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고 눈에서 눈물이 나게 하며 가슴을 두드리게 만듭니다. 여러분은 기도할 때 어떠한 언어와 어떠한 모습으로 기도하시는지요? 성령이 함께 하시는 탄식의 언어로, 탄식의 형상으로 기도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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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2. 9. 7. 04:44

대기만성(大器晩成): 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는 / 크게 사람은 늦게 이루어짐의 비유

 

삼국 시대, ()나라에 최염(崔琰)이란 유명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촌 동생인 최림(崔林) 외모가 시원치 않고 출세도 하고 일가 친척들로부터도 멸시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최염만은 최림의 인물됨을 꿰뚫어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이나 솥은 그렇게 쉽사리 만들어지는 아니네. 그와 마찬가지로 인물도 대성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너도 그처럼 '대기만성'하는 그런 형이야. 두고 보라고. 틀림없이 인물이 테니…' 과연 말대로 최림은 마침내 천자를 보좌하는 삼공(三公)중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 삼국지(三國志) 위지 최염전(魏志 崔琰傳) –

 

나다나엘 호손이 < 바위 얼굴>이라는 단편소설이 생각나게 하는 고사성어입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어네스트는 어릴 엄마가 해준 바위 얼굴에 대한 전설을 마음에 품고 살아갑니다. 마을에서 태어난 아이가 자라서 인물이 되고 또한 외모도 바위 얼굴을 닮아가게 거라는. 어네스트는 그러한 인물이 나타날 것이라 믿었고 그를 만나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마음을 품고 살면서 바위 얼굴을 닮았다고 생각하는 몇몇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개더골드, 올드 블러드 앤드 선더, 그리고 올드 스토니 피즈가 그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딘가 모르게 위엄 있게 있는 바위 얼굴의 인품을 고스란히 간직하지 못한 같다는 생각에 어네스트는 실망을 합니다. 시간이 흐릅니다. 이제 어네스트는 백발의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바위 얼굴을 닮은 인물은 나타나지 않는 했습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어네스트가 바위 얼굴을 닮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바위 얼굴을 닮고 싶다는 염원과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기대가 어네스트를 바위 얼굴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네스트는 동네 사람들의 평가에 우쭐해 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바위 얼굴을 닮은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네스트는 그저 자신의 인생을 살뿐이었습니다.

 

누군가를 기대하고 대망한다는 것은 이만큼 결과를 낳습니다. 어네스트는 살면서 바위 얼굴을 마음에 품고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바위 얼굴처럼 되려고 노력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바위 얼굴을 자기 자신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는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엄청난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꾸 무엇이 되려고 합니다. 그것만 이루고 나면 세상을 모두 얻게 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생을 살면서 무엇이 되려고 하는 것만큼 허무한 일도 없을 겁니다. 무엇이 되고 나면 다음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에게는 메시아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꾸 그리스도처럼 되려고 합니다. ‘작은 그리스도 되어야 한다는 , 세상을 짊어진 어린양 노릇을 하려고 듭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되려고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인간은 애초부터 그리스도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패배의식을 지닌 인간으로 살라는 뜻도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네스트와 같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에게 두고,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고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지요.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존재를 집중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이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게 것입니다. 닮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닮아지는 것이 아니라, 어네스트처럼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두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모습이 그리스도를 닮아 있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모두 대기만성형 인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기술이나 처세술로 도달할 있는 형상을 좇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인생을 마치는 그날까지 묵묵히 걸어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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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12. 9. 1. 03:35

시대가 아프다

 

 

시대가 아프다

나도 아프다

 

내가 아프다고 시대가 아프지 않지만

시대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

 

시대를 아프지 않게 하는 것이

내가 아프지 않게 사는 법이다

 

나는 아픈 시대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픈 시대가 나에게 사명을 물어온다

 

살고자 하는 자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 살 것이라는 말

 

아픈 시대가 나에게 요구하는 것은

삶인가 죽음인가

 

시대가 아프다 많이 아프다

그래서 나는 죽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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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와 신앙2012. 8. 29. 07:24

유능제강(柔能制剛): 부드러운 것이 능히 강하고 굳센 것을 누른다 / 어떤 상황에 대처할 강한 힘으로 억누르는 것이 이기는 같지만 부드러움으로 대응하는 것에 당할 수는 없다는

 

노자의 도덕경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사람은 생명을 유지하고 있을 때에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음을 당하게 되면 굳고 단단해진다. 풀과 나무도 살아있을 때는 부드럽고 연하지만 죽게 되면 마르고 굳어진다. 그러므로 굳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생명의 무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대가 강하게 되면 멸망하고 나무가 강해지면 꺾이게 된다. 강하고 큰 것은 아래에 자리하게 되고 부드럽고 약한 것이 위에 자리를 잡는다.” “이 세상에서 물보다 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다. 그렇지만 굳고 강한 것을 치는 데 물보다 나은 것은 없다. 물의 역할을 대신할 만한 것은 없는 것이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긴다는 것은 세상 사람 모두가 알건만 그 이치를 실행하는 사람은 없다.” - 노자 도덕경 -

 

인간은 언제나 강한 것을 원합니다. 강한 나라가 지배하고 강한 사람이 지배합니다. 그래서 나라는 군사력을 키우고, 한 개인은 권력을 키웁니다. 노자의 통찰력에 의하면 이것은 인간의 존재가 그만큼 죽음에 기울어 있다는 뜻입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죄성이라고 합니다. 죄성은 곧 죽음에 기운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죄성에 기운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결국 죽음의 냄새 밖에는 내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결국 그 죽음을 당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해 보려고 인간은 수많은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그 중 하나가 교육의 발전입니다. 교육을 통해서 인간의 존재가 나아지리라는 기대를 가졌던 것이지요. 물론 굉장히 획기적인 생각임에 틀림없습니다. 실제로 교육을 통해서 인간 존재가 나아지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 기대가 하늘을 찌르던 시대가 르네상스 이후입니다. 모든 것을 인간의 이성의 힘으로 조절하고 계량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희망을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사건이 발발했습니다. 바로 세계 1차 대전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결국 서로 죽이고 죽는 전쟁으로 치달았습니다. 그야말로 절망이고 패망이었습니다. 결국 인간의 존재는 죽음에 기운 존재라는 것이 다시 한 번 확인되었을 뿐입니다.

 

이것은 한 예에 불과합니다. 죄성에 기운, 죽음에 기운 인간의 존재를 인간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에게 구원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절대자인 하나님 없이 인간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다고 선포합니다. 구원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베풀고, 인간은 그 구원을 갈망하는 존재라고 선포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은혜라고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그 구원의 은혜의 선포자입니다. 성육신 하신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은혜를 선포했습니다. 그의 선포가 구원으로 유효한 까닭은 그가 바로 구원의 주체이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구원자로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구원 선포가 유효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은 구원의 주체가 아니라 구원의 수혜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아야 할 사람이 구원을 선포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구원의 주체만이 구원을 선포할 때 그 구원은 믿을 수 있고 확실한 것이 됩니다.

 

신앙은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구원이 참 진리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하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죽음으로 기울어진 우리의 전 존재를 걸 때 우리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솟아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지배욕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부드러운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힘없이 끌려가 십자가 위에서 조용히 처형당하셨습니다. 참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부드러우시고 약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분이 참 생명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구원자로 믿지 않을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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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풍요로운 시대가 왔습니다. 이제는 양보다 질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지요. 그래서 분 바람이 웰빙(Well-Being)입니다. 웰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육체의 건강입니다. 사실 육체의 건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그것이 너무 외모지상주의로 빠져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성을 중요시하는 기독교인들은 육체의 건강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육체는 영혼을 담는 그릇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희랍적 사고인 이분법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육체와 영혼을 자꾸 구분하려 들지만, 사실 육체와 영혼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육신이 중요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육신 없는 귀신으로 살게 하실 일이지 왜 육신 속에 영혼(루아흐)을 불어 넣어 주셨겠습니까? 육신을 가진 우리는 천사보다 높은 존재라고 성경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재림과 함께 부활하는 날, 우리의 육신도 함께 부활할 것이라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물론 어떤 형태의 육신으로 부활할 것인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요. 하지만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경우를 보더라도 육신은 우리 인간이 영원히 간직하게 될 하나님의 선물임에는 틀림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육신을 잘 돌봐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의 육신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시하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이 당시 고린도 지역에는 이상한 이단 교리가 퍼지고 있었습니다. 영혼이 구원 받는 것이니 육신은 아무렇게나 굴려도 좋다는 사상이었습니다. 이를 니골라당의 교리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 섭리와 철저하게 대립하는 이단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우리의 육신)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선하게 창조되고 거룩하게 창조되었으니, 우리의 육신도 선하고 거룩하게 보존해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의 몸을 선하고 거룩하게 보존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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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와 신앙2012. 8. 25. 05:43

청출어람(靑出於藍): []에서 나온 푸른 물감이 쪽빛보다 더 푸르다는 뜻 / 제자가 스승보다 더 나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학문은 그쳐서는 안 된다[學不可以已] 푸른색은 쪽에서 취했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고[靑取之於藍而靑於藍] 얼음은 물이 이루었지만 물보다도 더 차다[氷水爲之而寒於水].” 학문이란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이므로 중도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푸른색이 쪽빛보다 푸르듯이, 얼음이 물보다 차듯이 면학을 계속하면 스승을 능가하는 학문의 깊이를 가진 제자도 나타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나다는 뜻인 '청출어람'이 나왔으며, '출람(出藍)'이란 말도 여기서 비롯된 말입니다. -<순자(荀子) 권학편(勸學篇)>-

 

이건 학문의 세계에서나 통용되는 말이지, 신앙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보다 더 나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한다면, 우리는 모두 예수님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예수님 당시의 영지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가능성을 펼쳤던 것 같기도 합니다. 적어도 예수님보다 나은 존재는 아닐지라도 예수님과 똑 같은 존재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가르친 흔적들이 곳곳에 존재합니다. , 예수님이 부활의 몸을 입은 것처럼 우리도 지금 여기에서 그렇게 부활체로 거듭날 수 있다는 논리이지요. 특별히 이 사상은 동양사상과 맞닿아 있기에 동양철학이나 동양신앙에 심취해 있는 자들에게는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설 수 있는 사상입니다. 일찍이 동양사상(종교)신인합일(神人合一)”에 대한 목마름이 굉장했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복음서를 들여다보면 예수의 부활은 그들에게 신인합일의 사건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죠.

 

굉장히 매력적인 관찰이긴 하나, 이는 매우 위험한 생각이고 이단사설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절대로 예수님이 부활체로 거듭났던 것처럼 우리 인간이 땅에서 부활체로 거듭날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역사의 유일회적인 사건이지, 역사적으로 반복할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일컬어 구원사건이라고 평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일컬어 부활의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것을 분명하게 아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이는 종말론적 사건입니다. 종말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때를 가리킵니다. 때는 역사의 종말의 때이고 모든 만물이 새롭게 되는 때입니다. 부활이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창조의 완성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것을 선취 방식으로 우리(제자들)에게 보여진 것이죠. 그러므로 예수님을 안다는 ,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의 몸을 우리도 입게 거라는 믿음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것을 일컬어 우리는 구원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청출어람 있을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향해서 나아가긴 하지만 그것이 지금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종말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이루어진다면 이상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믿을 이유도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할 이유도 없겠죠. 우리는 그리스도보다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구원에 이르기 위해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자들입니다. 모든 만물은 말할 없는 탄식 가운데 구원을 기다립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다림에 동참한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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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12. 8. 24. 05:15

나는 강간 당했다

 

나는 그에게 강간 당했다

그런데 그는 도리어 적반하장이다

나보고 짧은 치마를 입은 게 죄란다

나보고 밤길 돌아다닌 게 죄란다

 

강간당해 몸과 마음이 산산이 부숴졌는데도

강간 당한 사실을 세상에 알리기도 쉽지 않다

알려봤자

사람들은 나를 위로하는 척 하면서도

나를 부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남의 상처는 아랑곳 않고

강간 사건을 가십거리로 만들어

희희낙락 거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강간 당한 것이 가십거리가 될 수 있는가

이것이 자신들의 음란증을 자극시켜주는

포르노라도 된다는 말인가

 

그런 일을 당하기 전에 철저하게 예방해야 한다지만

이 세상에 예방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는가

그렇게 지혜로운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미 그 일을 겪은 사람들은

어디에다 하소연 해야 하는가

 

사람들은 무조건 참으라는 조언을 한다

무엇을 참으라는 말인가

세상에 알려봤자 웃음거리만 된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은

누가 비웃음의 대상인지도 모르는 정녕

닭 대가리라는 말인가

 

나는 강간 당했다

그런데 오히려 내가 죄인이 된 기분이다

강간 당한 것만큼이나 기분이 더럽다

강간과 적반하장의 향연에

내 마음은 울고 또 울고 있다

 

 

* 이 시는 요즘 겪은 일에 대한 은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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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집 가까이에 살았으면 좋겠다”(유안진 님의 지란지교를 꿈꾸며).

 

친구와의 우정에 대해서 생각이 트일 시절, 중학교에 갓 들어간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만, 제 마음을 사로 잡았던 시()입니다. 이 시의 제목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고사성어가 관포지교(管鮑之交)입니다. 관중과 포숙이라는 사람들의 우정에서 나온 말입니다.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에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은 어릴 적부터 절친한 친구 사이였습니다. 후에 관중은 명재상(名宰相)으로 명성을 얻게 되는데, 그가 명재상이 되기까지는 친구였던 포숙의 공이 지대했습니다. 관중이 말년에 포숙에 대한 칭송의 말을 남겼는데, 그 표현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어릴 적 곤궁할 적에 포숙과 함께 장사를 할 때, 이익의 분배를 내가 포숙보다 더 많이 가져갔는데 포숙은 나를 탐욕스럽다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내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아주었기 때문이었고, 벼슬 길에 올라 많은 실수로 사람들은 나를 어리석다고 했지만 포숙은 나를 무능하다 하지 않고 때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알아주었다. 또한 내가 포숙아와 함께 전쟁터에 나갔을 때, 내가 세 번이나 도망을 치자 사람들은 나를 비겁하다고 질책했지만 포숙아는 내가 집에 연로한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알아 주었고, 또 나와 포숙아가 제나라의 두 공자인 규()와 소백(小伯)의 사부가 되었다가 내란에서 공자 규를 모시던 내가 공자 소백에게 패하여 참수형의 위기에서 포숙아의 설득으로 목숨을 구하고 오히려 재상의 자리까지 나에게 물려주어 내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도록 나를 알아주었다. 결국 나를 나아주신 분은 부모님이지만 나를 진정으로 알아준 이는 포숙아이다."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길, 좋은 음식 먹고, 좋은 생각하고, 좋은 것 많이 보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좋은 친구를 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고 있는 우리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이런 친구가 되어 줄 수는 없는 것일까요? 교회에서 이런 친구를 찾지 못하면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런지요?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줄 수 있도록, “관포지교”, “지란지교를 꿈꿉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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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와 신앙2012. 8. 17. 00:16

파렴치(破廉恥): 염치가 없어 도무지 부끄러움을 모름

 

염치(廉恥)는 청렴하고 수치를 아는 마음입니다. 따라서 파렴치하면 그 반대의 뜻으로 잘못을 범하고도 도무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마음을 일컫습니다. 관자(管子)의 목민편에 보면 나라를 버티게 하는 네 가지 덕목이 나옵니다. 예의염치(禮義廉恥, 예의, 정의, 청렴, 부끄러움을 아는 것)가 그것인데, 일명 사유(四維)라고도 합니다. 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유 중 하나가 없으면 나라가 기울게 되고, 둘이 없으면 위태롭게 되며, 셋이 없으면 뒤집어지고, 모두 없으면 그 나라는 파멸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 곧 예의염치는 나라를 존재케 하는 매우 중요한 기본 덕목인 셈입니다. 후에 여기에다 효제충신(孝悌忠信) 네 덕목을 합쳐 팔덕(八德)이라 했습니다. 사유(四維)가 나라를 떠받치는 데 필요한 덕목이라면 팔덕(八德)은 인간관계에서 지켜야 할 네 가지 덕목인 셈입니다. 곧 사유팔덕(四維八德)은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기본 도덕률인 것이죠. - <관자(管子) 목민편(牧民篇)> -

 

염치 없이 왜 그래?”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쓰는 말입니다. 이 말은 너는 부끄러움도 없니?”라는 뜻입니다. 부끄러움(shame)은 인간 존재를 이해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개념 중 하나입니다. 심리학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는 분야이며, 특별히 신학에서는 죄의 문제와 연관해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인간은 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까요? 어떻게 해서 부끄러움의 감정이 인간에게 형성되었을까요? 물론 이는 굉장히 복잡한 메커니즘을 갖고 있어 여기에서 몇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창세기를 통해서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죄가 인간 세상에 들어오기 전까지 인간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았다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서로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나뭇잎으로 옷을 지어 입은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에서는 부끄러움과 죄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성경의 증거대로 인간이 만약 죄를 짓지 않았다면 인간은 부끄러움을 몰랐을 겁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인간은 죄를 지었고, 이제 부끄러움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이게 인간 실존이 지니고 있는 아픔이고 연약함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난다면 인간의 삶은 비극이겠죠. 하나님께서는 이 부끄러움을 역이용하셔서 구원 사건에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인간이 느끼는 부끄러움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좋은 촉매제입니다. 부끄러움이 죄에서 오는 것이라면, 그 부끄러움을 없애기 위해서는 죄사함이 꼭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죄사함은 하나님께로부터만 오는 것이기에, 부끄러움을 씻으려면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전부터 기독교의 화해 예식에는 화해 당사자들의 부끄러움을 씻어주는 과정이 꼭 들어갔던 겁니다. 화해란 곧 부끄러움을 없애주는 과정입니다. 서로에게 부끄러움이 없을 때, 그때야 비로소 화해가 된 것이죠.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는 화해를 모릅니다. 그런 자는 하나님과의 화해를 모르기 때문에 죄씻음을 받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오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 자는 이웃과의 화해를 모르기 때문에 이웃에게 손 내밀 줄도 모릅니다. 결국 그런 자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부끄러움을 모른 채, 바로 그 부끄러움에 내버려져 멸망 당하고 마는 것이죠.

 

파렴치한 사람은 인간 사회에서도 외면 당하지만, 더 심각한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께도 외면 당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끄러움을 좀 알고 사는 게 좋습니다. ‘염치있는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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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