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3. 5. 31. 10:51

성령의 숨

(사도행전 2:1-21)

 

1. 신약은 ‘구약의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말을 여러 번 한 기억이 있다. 구약을 잘 모르면, 신약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이 마음 속에 잘 와 닿지 않는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역사를 잘 모르면, 현재 우리에게서 발생하고 있는 일들의 의미를 잘 모를 수 있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잘 모르면, 현재 한국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의미를 잘 모를 수 있다. 기쁨과 안타까움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연속성 속에서 생긴다. 치열하게 싸워왔던 것이 발전되고 해소된 모습을 모이면 기쁜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안타까움과 슬픔, 때로는 분노가 차오르는 법이다. 현대인들의 마음에 기쁨과 슬픔의 감정이 밋밋해진 이유 중 하나는 역사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 힘들다 보니, 역사의 흐름에 마음 둘 겨를이 없다.

 

2. 성령강림 사건이 우리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려면, 적어도 세 가지의 구약 역사(이야기)를 알아야 한다. 일단, 오순절이 무슨 날인지를 알아야 한다. 오순절은 칠칠절, 맥추절이라고도 하며, 밀의 첫 수확을 하나님께 드리는 농경제이다. 이후 유대인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날을 기념하는 날로도 오순절을 지켰다. 오순절은 기쁨으로 가득 찬 날이다. 농사를 지어 그 첫 수확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도 기쁨이 넘치지만, 출애굽하여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는 것도 기쁨이었다. 오순절을 축제의 시간이다.

 

3. 우리가 세화하늘축제를 5월달에 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교회의 설립을 축하는 의미로서이고, 둘째는 성령강림절을 앞두고 그 기쁨에 동참하기 위함이다. 오순절의 역사적 의미를 깊이 알고 있다면, 우리는 성령강림 사건이 얼마나 기쁜 사건인지 인식하게 될 것이고, 그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축제의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 세상이 지고 있다. 성령강림절이 있는 때쯤 언제나 미국에서는 메모리얼 데이 연휴가 있어서, 성령강림의 기쁨을 모든 교우들이 교회에 함께 모여 누리는 것을 잘 못하고 있다.

 

4. 오순절 사건, 성령강림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자.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1절). 여기서 오순절 날이 ‘이르매’는 오순절 날이 ‘꽉 찼다’는 뜻이다. 부풀어 오르는 풍선을 생각해 보면 된다. 풍선에 바람이 꽉 차면, 사람들은 긴장한다. 이제 곧 풍선이 ‘펑’하고 터질 것을 기대하고 예상하기 때문이다. 오순절 날이 ‘꽉 찼다’는 말은 오순절 날에 뭔가 사건이 ‘펑’하고 터질 것을,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예수님의 제자들과 가족들이 기대하고 예상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말씀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너무 기대없이 살아가는 것 같다. 신앙생활에 있어, 반성이 필요한 부분이다. 

 

5. 오순절이 ‘꽉 차자’, 성령이 오셨다. 성령이 오신 사건은 그 자체적인 사건이 아니다. 성령의 오심 사건은 예수의 승천 사건과 한 짝을 이루고 있다. 오순절이 ‘꽉 찼을’ 때, 예루살렘에 모인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 가족들이 뭔가 사건이 발생할 것 같은 기대감에 휩싸여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오순절이 꽉 찼기 때문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일 때문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오순절이 꽉 찼을 때, 그들은 예수님이 보내시겠다고 약속한 성령이 올 것을 기대하고 기다렸다. 그리고 정말 사건이 ‘펑’하고 터졌다. 얼마나 기뻤을까.

 

6. 우리에게도 이러한 신앙의 기쁨이 있으면 좋겠다. 약속 받고 기대한 것이 실제로 우리의 삶에 ‘펑’하고 터져 올 때, 얼마나 기쁜가.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게 중요하다. 우리가 모두 어떠한 문제 때문에 괴로움 가운데 있는데, 또는 괴로움은 아니어도, 어떠한 일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 가운데 있을 때, 실제로 우리가 소망하던 것이 삶 속에서 ‘펑’하며 터져 나올 때의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한 기쁨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소망을 주님께 두는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의 가족들이 큰 기쁨을 누리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소망을 주님께 두었기 때문이다. 주님께 소망을 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될 것이다. 아멘!

 

7. 성령이 오신 사건은, 두 번째로, 구약의 노아의 방주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노아의 방주 사건이 발생하기 전 상황이 전개된다. 창세기 6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하면서 이 땅 위(지구)에는 참 어려운 일이 발생했다. 사람들이 서로 평화롭게 살면 좋은데, 그렇지 못하고, 이 땅 위에 온갖 죄악이 가득 차길 시작했다. 얼마나 죄악이 가득 차게 됐는지, 6장 5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한탄하신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 6:5-6).

 

8.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창 6:3). 노아의 방주 사건, 즉 땅 위에 있던 사람이 모두 멸망을 당하게 되는 사건은 하나님의 영이 사람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그냥 멸망당한 것,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과 함께 하지 않으니, 노아의 방주 사건에서 보듯이, 온 지면에 죽음이 난무했다. 이것은 굉장한 메타포다.

 

9. 그런데, 오순절에, 성령강림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은 노아의 방주 사건을 뒤집는 이야기이다. 사람을 떠났던 하나님의 영이 사람에게 돌아온 사건이다. 노아의 방주 사건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라.” 그런데, 성령강림 사건은 이것을 뒤집는 사건이다. 성령강림 사건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사건이다.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리라!” 이것을 우리가 잘 아는 용어로 바꾸면, “임마누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 할렐루야! 성령강림 사건은 단순히 성령이 오신 사건이 아니라, 이렇게 역사를 뒤집는 사건이다. 놀랍지 않은가?

 

10. 다른 것은 차치해 두고, 성령이 오셨을 때, 확연하게 발생한 일이 있다. 사도행전은 그것을 2장 4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니라.” 그리고, 성령을 받은 제자들과 그의 가족들이 다른 언어들로 말하는 것을 들은 군중들은 이렇게 반응한다.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행 2:6-8).

 

11. 이것은 분명히 구약 성경의 다음 사건을 떠오르게 한다.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 성령이 사람을 떠났을 때 사람들 사이에 발생한 일은 오해와 미움과 죽음이었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에게 없고 그냥 육신만 남으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 ‘죄’가 흘러 넘쳤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사람과 다시 함께 하니 육신을 넘어선 뭔가 새로운 존재가 됐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던 오해와 미움과 죽음이 물러가고, 그 사이에 이해와 사랑과 생명이 넘쳐났다. 그렇다. 성령강림 사건은 바벨탑 사건을 뒤집는 사건이다. 불통에서 소통으로 바뀐 사건이다.

 

12. 성령강림 사건은 단순히 성령이 오신 사건이 아니다. 역사를 뒤집어 엎는 사건이다. 땀 흘려 지은 농사의 수확물을 거두는 것과 같은, 출애굽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으면서 언약을 맺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은, 기쁨이 넘치는 사건이고, 노아의 방주 사건을 뒤집어 엎는 사건이고, 바벨탑 사건을 뒤집어 엎는 사건이다. 불통, 그로 인한 죄와 사망이 물러가고, 소통, 그로 인한 사랑과 생명이 넘치는 사건이다. 성령강림절은 기독교의 단순한 절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새로운 역사를 행하신 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날을 기뻐하고, 또 기뻐한다. 역사가 뒤집혔다. 천지가 개벽했다.

 

13.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수사적 표현이 아니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가 삶에서 고통받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불통 때문이다. 말이 안 통하는 거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니, 상대방에 대하여 사랑의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나라와 나라가 서로 이해를 못하니, 상대 나라에 대하여 사랑의 마음을 가질 수 없다. 소통하지 못하고, 불통만 늘어나니, 서로 미워하고, 서로 싸우고, 서로를 죽인다. 내가 나를 죽이고, 내가 상대방을 죽이고(사람이든 자연이든), 나라가 나라를 죽인다. 그리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죄가 넘치는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는. 그래서 사는 게 너무 힘들다.

 

14.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종교적 구호가 아니다. 바로 나의 생명을, 우리의 생명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다는 것이다. 구원이 실제로 임했다는 뜻이다. 삶의 역전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역사가 바뀌었다는 뜻이다. 성령을 받은 자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사도행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성령을 받은 베드로와 열한 사도는 두려움을 떨쳐내고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모인 만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큰 일’을 말했다. 하나님의 큰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이루신 일이다. 그것은 다른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바꾸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없는 육신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받은 새사람으로 거듭났다는 것이다. 불통 가운데 서로 미워하고 죽일 것이 아니라, 소통 가운데 서로 사랑하고 생명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옛사람으로 살지 말고 새사람으로 살라는 것이다.

 

15.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강림사건이 역사를 어떻게 뒤집어 놓은 것인지를 안다면, 특별히 죄와 죽음이 만연했던 노아의 방주 사건과 불통과 교만과 죄악이 만연했던 바벨탑 사건이 어떻게 뒤집어졌는지를 안다면, 우리는 성령을 받은 사람으로서 기쁨 가운데,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어떠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영(아버지의 영), 그리스도의 영(아들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 그러니,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사람답게 어디에 있던지,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떠한 존재와든지, 소통하고, 사랑하고, 생명이 넘치는 삶을 일구어 가라. 싸우지 말고, 정죄하지 말고, 파괴하지 말고, 폭력을 행사하지 말고, 사랑으로 보듬고, 무한히 용서하고, 깊이 이해하고, 생명을 풍성하게 나누라. 이것이 바로 더 이상 육신으로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숨을 쉬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성령의 숨을 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길!

Posted by 장준식

[신자유주의 체제의 악마성]

 

"금융 시장은 연금 연령 인상, 급여 축소, 노동 유연성 향상을 요구한다. 경제의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를 지배한다."

(<탈성장>, 69쪽)

 

'연금 연령 인상'은 인간을 부려먹을 수 있을 때까지 부려먹겠다는 뜻이고, '급여 축소'는 노동력의 가치를 평가절하시키겠다는 뜻이고, '노동 유연성 향상'은 노동자를 노예 취급하겠다는 뜻이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이처럼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체제다. 

 

신자유주의 체제를 수용한 요즘 국가가 악마인 것은 금융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의 보이는 손으로 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는 최고의 우상숭배자인 것이다. 요즘 정부가 하는 일은 연금 연령 인상, 급여 축소, 노동 유연성 향상을 위한 일들뿐이다. 국가 경제의 발전을 위한 대승적 결단이라는 미사여구를 가져다 붙이고 있지만, 한 마디로, 악마 짓이다. 인간을 희생시키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확보하고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노동 시간의 단축이다. "시민의 자치 활동을 이루려면, 그만큼 많은 휴식처가 필요하고, 토론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도 확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탈성장>, 83쪽).

 

노동에 시달린 현대인은 무기력과 무관심에 빠져 있다. 이것은 세상을 바꾸어 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기득권 세력들의 기획이다. 이러한 악마적 기획들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말하지 않고 '복음'을 말할 수 없다. 이런 것을 외면하면서 복음만을 외치는 자는 '보이지 않는 손'에 봉사하는, 또 하나의 우상숭배자에 불과하다.

Posted by 장준식

[문명의 바깥으로]

 

이번 한국 방문 중 신촌에 가서 연세대와 홍익문고를 들렀다. 학교 구경 잘 하고, 교내 식당에서 밥 잘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예전 학교 다닐 때 습관처럼, 홍익문고에 들러 책 한권을 샀다. 나희덕 시론집 <문명의 바깥으로>.

 

예전 학교 다닐 때 습관처럼, 지하철에서 책을 꺼내 들어 읽기 시작했다. 서문을 읽고, 첫번째 챕터를 읽었다. 내가 요즘 깊은 관심을 갖고 교회 식구들과 공부하고 있는 '기후변화'에 대한 주제였다. 제목은 '자본세에 시인들의 몸은 어떻게 저항하는가'. 도나 해러웨이에 대한 언급을 시작으로, 백무산, 허수경, 그리고 김혜순의 시를 분석한 글이다. 그리고 다시 도나 해러웨이를 언급하며 글을 맺는다. 마지막 부분을 직접 옮겨본다.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 해러웨이는 자본세의 파괴가 극심한 지구 곳곳에서 그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창의적 공동체들을 '퇴비 공동체'라고 불렀다... 따라서 만물과 '살'을 공유함으로써 그들과 함께하는 '시쓰기'는 일종의 '친척 만들기' '퇴비 만들기'라고 할 수 있다. 심보선의 말을 빌리면, "시란 시인의 고뇌에서 탄생하여 나아가는 수직적인 이행이 아니라, 하나의 몸에서 또다른 몸으로 나아가는 평면적 확장"이다. 그는 수평적 이행과 새로운 고동체의 탄생을 위해 모든 형태의 이분법과 위계를 부정하고 낯선 타자들과 함께하는 것, 이러한 저항과 창조는 생태적인 동시에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37쪽).

 

인류세/자본세를 맞아, 시인의 시쓰기는 일종의 '친척 만들기' '퇴비 만들기'라고 할 수 있다는 나희덕의 말은 희망적이다. 시인들만이라도 저항과 창조에 적극적이면 숨통이 트이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시인들만의 저항과 창조만으로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게 참 어려운 시절인 듯하다. 이번 한국 방문에서 내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근대가 파괴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회복하고 피난처를 복구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관심이 없다기 보다, 정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책의 제목이 말해주고 있듯이, 문명의 바깥으로 향하는 것은 저항과 창조의 행위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문명에 갇혀 있는 듯하다. 문명의 바깥이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고 산다. 문명의 바깥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는 마치, 애굽에서 400 여년동안 살던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는 일과 같다. 그들은 문명국인 애굽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발터 벤야민이 사유했듯이, 우리 시대는 또다시, 아니 더 절실하게 '메시아적 사유'가 필요하다. 문명의 바깥으로 우리를 데리고 나갈 메시아가 필요하다. '시쓰기'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에게 시적 상상력이 필요한 것만은 분명하다. 내가 메시아가 될 수 없으니, 메시아가 도래하는 강력한 상상력이라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시대에 메시아를 상상하는 일은 또한 생태적인 동시에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Posted by 장준식

인사만 잘해도 좋은 그리스도인이다

 

로마서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로마서를 바울의 교리서로 읽는 것입니다. 그러한 오해와 편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저명한 신약 학자 스캇 맥나이트는 로마서를 거꾸로 읽어보라고 제안합니다. 이것은 로마서를 1장에서부터 읽는 것이 아니라, 로마서의 마지막 장인 16장부터 읽는 방식입니다. 로마서 16장을 먼저 읽으면, 우리는 로마서에서 ‘교리’를 먼저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먼저 만납니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라”(롬 16:1).

 

뵈뵈를 로마교회에 소개하는 문구를 시작으로 이어지는 로마서 16장의 내용은 온통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며 바울은 ‘문안하라’라는 말을 합니다. 지금 바울은 인사 중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인사하는 중입니다. 우리는 인사하는 일을 별거 아닌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인사’만큼 중요한 것도 없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긴 공간을 할애하여 인사를 나누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 교회에 바울이 편지를 써서 보낸 이유이기도 합니다.

          

로마교회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연합하여 세운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두 부류는 자라온 환경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에서 서로 다른 차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두 부류는 한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많은 갈등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갈등이 깊어지면 서로 간에 가장 먼저 끊기는 것이 ‘인사’입니다. 인사는 단순히 안부를 묻는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자신들의 삶에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인사를 안 한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자신들의 삶에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16장에 열거되고 있는 이름들은 모두 이국적인 이름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어떤 사람이 유대인 그리스도인인지, 이방인 그리스도인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로마교회 구성원들은 바울의 이 편지를 읽으면서 거기에 열거된 이름들이 누구인지,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 아주 잘 알았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을 열거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인사를 나눌 것을 권면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1장에서부터 논의한 내용의 결론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서로의 차이 때문에 발생한 갈등, 그 갈등 때문에 발생한 상처, 반목, 이러한 것들을 거두어들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 받아들이는 일은 ‘인사’로부터 시작합니다.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라는 사회학 용어가 있습니다. 팬데믹 동안 이 말을 사용해서 서로의 건강을 지킬 수 있는 거리의 의미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사회학에서 ‘사회적 거리’는 원래 사람들 사이에 서로를 서로의 삶에 얼마나 깊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측정하는 데 쓰는 용어입니다. 일례로, 한국인은 타인종을 자신들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굉장히 큰 거리감을 둡니다. 특정 인종은 회사나 마을에서 인사 정도 나누는 것, 그들과 식사 정도 하는 것은 허용하지만 결혼을 통한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꺼려합니다. 이러한 것을 두고 ‘사회적 거리’라는 말을 씁니다.

          

팬데믹 동안 아시안 혐오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지금도 아시안들은 미국 사회에서 매우 약자로 살아갑니다. 그만큼 미국 사회에서 아시안들은 사회적 거리가 멀다는 뜻입니다. 사회적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는 ‘인사’보다는 ‘폭력’을 쓰기 십상입니다.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 어떤 사람인지 가리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인사를 반갑게 나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적 거리가 가깝다는 뜻이고, 서로가 서로를 자신들의 삶에 잘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애석하게도 혐오와 폭력이 늘어난 요즘 세상에서, 아시아인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좀 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손쉬우면서 의미 있는 일은 ‘인사’입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 보세요. 인사만 잘 해도 좋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의 인사에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지와 복음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Posted by 장준식

나아만의 신앙과 게하시의 불신앙

ㅡ 게하시처럼 하면 안 되는 이유

 

신앙은 삶의 상태입니다. 신앙과 삶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살고 있는 지를 보면 신앙의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삶의 변화를 말합니다. 이전에는 ‘저렇게’ 살았었는데, 신앙을 갖은 후에는 더 이상 ‘저렇게’ 살 수 없고, 이제는 ‘이렇게’ 살게 되는 것이죠. 물론 이것이 그 사람의 성품(성격)까지도 변하게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타고난 성품은 신앙을 가진 이후에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앙을 가진 후에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삶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한 신앙의 삶이 무엇인지, 우리는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아람 사람으로서 이방인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나병에 걸려 어려움에 처했고, 그것을 긍휼히 여긴 ‘몸종(나아만 장군 아내의 몸종)’이 나병을 고칠 방도를 일러줍니다. 그렇게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 선지자에게 오게 되고, 이 사건을 통해서 비로소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열왕기하 5장은 오롯이 나아만 장군 이야기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나아만 장군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당연히,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아만 장군을 구원하셨습니다. 그가 구원받는 방식은 매우 독특합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나아만 장군의 신앙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나아만 장군의 신앙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요?

 

나아만 장군에게서 보이는 신앙의 모습은 6가지 정도 됩니다. 첫째는 그가 ‘하나님 앞에 섰다’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겸손을 말합니다. 나병이 낫기 전, 나아만 장군은 하나님 앞에 서지 않았습니다. 그가 나병을 고치기 위해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왔을 때, 그는 엘리사 선지자가 자신 앞에 서서 자신을 알현할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병을 고침 받은 후, 엘리사 선지자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엘리사 선지자 앞에 선 것입니다. 신앙은 이렇게 겸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로 세상을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경험한 사람, 즉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섭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나아만 장군은 직접적인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 아나이다”(왕하 5:15). 이전에 나아만 장군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 여호와’였습니다. 이것은 신에 대한 간접고백일 뿐입니다. 그러나 나아만 장군은 신앙을 갖게 된 후, ‘너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에서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으로, 고백의 방향을 바꿉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 들어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의 이야기 아니라, 이제 자신의 이야기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은 하나님을 완전히 ‘삶’으로 경험하게 하고 느끼게 합니다. 하나님은 ‘너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나의 실존으로 파고 들어오는 사건입니다.

 

셋째,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 선지자에게 예물(gift, blessing)을 드립니다.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 선지자에게 병 고침을 받고자 올 때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물론 병고침을 받은 후 엘리사 선지자에게 드리는 선물은 새로운 선물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올 때 가지고 온 선물입니다. 그러나 처음 가지고 올 때의 선물과 이제 신앙을 가진 후 엘리사 앞에 내어 놓는 선물의 성격은 완전히 다릅니다. 처음에 나아만 장군이 선물을 가져올 때 그 선물의 성격은 ‘포상품’이었습니다. 자신의 병을 고쳐준 것에 대한 보상, 또는 ‘시혜’(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베푸는 것) 정도의 의미를 가진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신앙을 갖게 된 나아만 장군의 예물은 완전히 다른 성격을 지닙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대한 표징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게 표현하는 성례전 같은 성격을 가집니다. 신앙인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모두 그러한 뜻을 가집니다.

 

넷째, 나아만 장군은 자유를 얻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예배하겠다고 선포합니다. 그런 의미로 이스라엘의 흙을 얻어갑니다. 그러면서 나아만 장군은 자신이 모시는 아람 왕과 함께 림몬 신전에 들어가서 절하게 될 때, 그것은 림몬 신을 섬기는 의미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윗사람을 모시는 신하 된 입장에서 불가피한 일이라는 것을 밝힌 후, 그러한 자신의 행위를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엘리사는 그의 용서 구함에 이런저런 말을 보태지 않고 그저 ‘평안히 가라’고만 대답합니다. 신앙은 이렇게 자유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만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에게만 매인 삶을 산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한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더 이상 아람의 신 림몬에게 매여 살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신앙은 나를 속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 선언입니다.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에게 예물을 받지 않은 이유는 명백합니다. 구원은 거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무엇인가를 받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릴 필요도 없습니다. 구원은 교환이 아닙니다. 구원은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나아만 장군을 당신의 백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인정했습니다. 이 자체, 이 관계 자체가 구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사 선지자는 나아만 장군으로부터 예물을 받을 이유와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관계에는 어떤 가격이 매겨지거나 교환가치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저 그 안에 사랑이 있을 뿐입니다.

 

나아만 장군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은 엘리사 선지자의 사환 게하시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거기서 엘리사 선지자는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이는데, 다음과 같이 게하시를 저주합니다.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왕하 5:27). 게하시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토록 가혹한 저주를 받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게하시가 가혹한 저주를 받은 이유를 아는 것만으로도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는 매우 가치 있는 말씀이 됩니다.

 

우리는 흔히 게하시가 거짓말을 통해서 나아만 장군에게 예물을 받은 것 때문에 가혹한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다면, 그것은 너무 지나친 처벌 같아 보입니다. 게하시의 거짓말을 보면 그렇게 큰 거짓말도 아닙니다. 그리고 나아만 장군에게 가서 예물을 억지도 빼앗아 온 것도 아닙니다. 거짓말 수준이 애교 수준이고, 나아만 장군은 게하시에게 예물을 기꺼이 내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토록 게하시에게 가혹한 저주가 임하는 이유가 된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다음 구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가 가지고 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지 아니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맹세하노니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왕하 5:20). 여기에 보면, 게하시는 나아만 장군을 ‘이 아람 사람 나아만’이라고 부릅니다. 게하시에게 나아만 장군은 여전히 이방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반란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 나아만 장군에게 ‘구원’을 베푸셔서,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게하시는 나아만 장군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고, 나아만 장군을 ‘타자화’시켜서, 그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어내려고 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구원을 자기 자신이 뒤집어버리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신앙으로 살면서 나아만에게서 신앙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배우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게하시 사건을 통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사람들, 즉 구원하신 사람들을 우리가 임의대로 ‘이방인’ 취급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 하나만 제대로 배우고 이해해도, 신앙인이 자기 마음대로 누군가를 ‘이방인/타자’ 취급하며,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게하시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나아만 장군을 자기 마음대로 이방인 취급하여 그에게 폭력(거짓말/물품강탈)을 행사했습니다. 이러한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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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5. 9. 08:12

스데반 사건: 죽음에 이르는 설교

(사도행전 7:55-60)

 

1. 우리는 성경의 이야기를 자꾸 낭만적이고 은혜롭게 읽으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성경의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의 상태는 ‘애통함’이어야 한다. ‘라멘트(Lament)’의 마음.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성경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면 안 되고, 내가 그 불 속에 들어가 있다는 상상력을 가지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더 간절하고 명확하게 들린다. 그래야 성경을 통해서 삶의 실질적인 유익을 누릴 수 있다.

 

2. 성경을 읽을 때, 낭만적이고 은혜롭게 읽는 대표적인 이야기 중 하나가 스데반 집사의 순교 이야기다. 아마도 스데반의 모습을 묘사한 이 문장 때문일 것이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 6:15). 그리고 죽을 때 “성령 충만하여” 의연한 태도로 죽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은 스데반 사건이 가진 의미를 좀 더 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문학적 장치들이지, 실제로 스데반의 죽음이 낭만적이거나 은혜롭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죽음은 힘들고 아프다.

 

3. 스데반 사건은 사도행전 6장에서부터 시작된다. 구제할 때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자, 구제를 좀 더 효율적으로 하고, 갈등의 요소를 좀 더 보듬고자 일곱 집사를 선출한다. 그 중에, 스데반이 있다. 그때 스데반에게는 이런 수식어가 붙는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a man full of faith and of Holy Spirit)”. 일곱 집사 중에서도 스데반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남다른 성품과 신앙을 가진 스데반의 이야기가 좀 더 구체적으로 나오게 될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4. 스데반의 이야기는 사도행전 6장 8절에서 이렇게 이어진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사도행전은 예수의 부활 이후에 부활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전하는 성경이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것, 그리고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한 것은 무슨 매직 같은 일을 행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으로 인해 드러난 하나님 나라를 전한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세상은 바뀌었다. 부활 사건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 이전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5. 스데반이 전하는 새로운 세상, 하나님 나라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성경은 그들을 이렇게 기록한다. “이른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갈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행 6:9). 이들을 규정해 주는 용어는 ‘헬라파 유대인’이다. 히브리파 유대인은 유대땅에 살고 있는 유대인을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말한다. (한국 사람인데, 우리처럼 외국에서 사는 사람들 같은 것이다.)

 

6. 스데반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복음)는 무엇일까? 이것은 신약성경을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인데, 사도 바울도 자기 서신에서 계속해서 전한 것이다. 믿음을 통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자녀(백성)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지금은 이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진술이지만, 사도행전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 말은 굉장히 혐오스러운 말이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특권이 강탈당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7. 1922년,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 날을 제정하며 이렇게 선언했다.

1) 어린 사람을 헛말로 속히지 말아 주십시오

2) 어린 사람을 늘 갓가히 하시고 자조 이야기하여 주십시오

3) 어린 사람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하여 주십시오

4) 어린 사람에게 수면과 운동을 충분히 하게 하여 주십시오

5) 리발이나 목욕 가튼 것을 때맛처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6) 낫분 구경을 식히지 마시고 동물원에 자조 보내주십시오

7) 장가와 시집 보낼 생각마시고 사람답게만 하여 주십시오

 

100년이 지난 지금은 너무도 당연한 상식이 된 어린이에 대한 인권이다. 그러나 100년 전만 해도, 어린이에게는 인권이라는 것이 없었다. 다른 말로, 어린이는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다.

 

8. 스데반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하고 새로운 세상(하나님 나라)이 열린 것을 선포했을 때, 유대인들, 특별히 스데반과 관련해서는 헬라파 유대인들은 스데반의 복음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스데반을 기소한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정당한 기소는 아니다. 매우 비열한 방식으로 스데반을 기소한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백성들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행 6:10-13).

 

9. 스데반의 기소가 정상적인 기소가 아니었다는 것을 성경은 드러내고 있다. 아무튼,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기소한 구체적인 내용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율법이고, 다른 하나는 성전이다. 스데반이 율법과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것은 신성모독 죄를 말하는 것이다. 스데반이 지은 죄는 신성모독 죄였다. 성경에서 신성모독 죄는 돌로 쳐 죽임을 당한다. 스데반이 죽을 때 돌로 쳐 죽임을 당했는데, 그 이유는 공회가 스데반을 모함해서 죽인 죄목이 신성모독 죄였기 때문이다. 스데반의 죽음은 이렇게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울분을 토하게 되는 죽음이다.)

 

10. 속임수와 강제로, 억울하게 공의회에 서게 된 스데반은 의연했다. 그는 그곳에서 변론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설교를 한다. 그의 긴 설교는 사도행전 7장 전체를 장식한다. 설교를 통해서 스데반이 하고 싶은 말은 한 마디로, 유대인들의 기만과 불신앙이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이방인을 받아들였는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불경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들이 하나님보다 더 크고 위대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게 우상숭배이고, 이게 신성모독 아니면 무엇인가!

 

11. 그런데, 왜 (헬라파) 유대인들은 회개(마음을 돌이켜 복음을 받아들여, 이방인들을 자기들의 형제로 받아들이는 일)하지 않고, 분노하여 스데반을 죽였을까? 유대인들은 스데반이 자신들의 특권의식을 무너뜨리고 빼앗아 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스데반을 죽였다. 율법과 성전은 유대인들의 특권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무너지니 자신들의 삶도 무너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난 유대인들은 스데반에게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신성모독죄를 씌워 돌로 쳐 죽였다. 이렇게 자기 정체성을 이루는 것을 빼앗긴 자는 포악해진다. 하나님을 믿은 게 아니라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믿은 것이다. 주시는 자도 하나님이요 거두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하고 믿지 않으면 우리는 포악한 괴물이 된다. 생명을 죽이고 헤쳐도 그것을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다.

 

12. 스데반의 죽음은 정말 안타까운 죽음이다. 희생된 거다. 칭송받을 죽음이 아니라 안타까운 희생의 죽음이다. 가해자에 의해서 피해를 당한 죽음이다. 복음 증거하다 죽어도 괜찮다는 말은 무책임한 말이다. 복음을 핑계로 사람의 생명을 사지로 몰면 안된다. 이 사건 이후로 그리스도인들이 흩어진다. 무서워서 살아남으려고 그렇게 한 것이다. 이건 마음 아픈 일이다. 복음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스데반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말은 아주 못된 말이다. 하나님은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생명을 희생시키는 분이 아니다. 가슴 아픈 죽음 앞에서 우리는 그저 숙연해질 뿐이다.

 

13. 스데반의 죽음이 가슴 깊이 숙연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가 전한 하나님 나라(복음) 덕분에 우리(이방인들/유대인이 아닌 자들)가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스데반처럼 행할 수 있을까? 의도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설교(복음 전하는 일/하나님 나라 전하는 일)는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유대인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였다고 전한 복음 때문에 스데반은 죽었다. 그리고 그 복음의 열매는 지금 우리가 따먹고 있다. 이렇게 누군가의 핏값으로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누군가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의 피를 흘릴 수 있을까?

 

14.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 운동 덕분에 요즘 세상은 어린이 천국이 되었다. 어린이 천국은 그냥 온 게 아니다. 누군가의 희생 덕분이다. 스데반의 설교(복음전파) 덕분에 우리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그냥 우연히 된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희생 덕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십자가의 복음을 전한 신실한 신앙의 선배들 덕분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도 누군가의 구원을 위해서 기꺼이 ‘죽음에 이르는 설교’를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15. 무겁고 무서운 부르심 같지만, 너무 힘들고 어려워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스데반의 모습을 보면 그 일이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스데반이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니, 그의 얼굴은 천사와 같았고, 그는 죽을 때 누구를 원망하거나 억울해하지 않고, 오히려 성령 충만하여 누구도 보지 못한 하나님과 그 우편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 이런 기쁨과 은혜가 충만하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가 넉넉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스데반 사건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더 성숙하게 하시길 기도한다.

Posted by 장준식

종려주일을 보내며

 

종려주일(Palm Sunday)입니다. 부활절 전 주일이기도 합니다. 부활절 전, 예수님은 종려주일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날을 종려주일로 부른 것,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을 부활절로 부른 것은, 모두 그 사건이 일어난 후의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돌아보며 그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붙인 이름입니다. 종려주일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이 손에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호산나’를 외쳤기 때문입니다. 호산나의 뜻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입니다. 이들이 바라는 구원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스라엘은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제국에 지배를 받아왔습니다.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망하고(BC 587년), 그 이후에 나타난 페르시아, 그리스, 그리고 로마 제국에 의해 순차적으로 지배를 당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사분오열된 그리스 제국은 지역 안배를 통해서 권력을 나누어 가졌는데, 그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린 제국을 ‘셀레우코스 제국’이라 부릅니다. 그 중에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라는 황제가 유대인의 성전에 우상을 배치하여 성전을 더럽힌 사건이 있었는데, 그 사건이 발단이 되어 유대인들이 혁명을 일으킵니다. 그것이 바로 BC 164년에 마카비가 일으킨, 그 유명한 마카비 혁명입니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그때의 혁명을 기념하기 위하여 ‘하누카’를 지키고 있습니다. 12월이 되면, 기독교인들은 ‘성탄절’(Christmas)를 지키지만, 유대인들은 ‘하누카’(Hanuka)를 지킵니다.

 

하지만 마카비 혁명을 통한 유대인의 독립도 오래 못 가고, 로마 제국에 의해서 또 지배 상태에 들어가게 되죠. 그래서 기원전 2세기와 1세기를 지나는 동안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아 사상’이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가 와서 제국을 몰아내고 자신들을 구원해 줄 거라는 사상이 유대인들 사이에는 팽배했고,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기대가 가득했습니다. 이는 마치 일제시대에 저항시인 이육사가 <광야>라는 시를 통해서 ‘초인’이 도래하여 조선을 구원해 줄 것을 기대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그래서 그 당시 유대인들은 자녀를 낳으면 ‘Jesus’라고 붙이는 게 유행이었습니다. Jesus는 여호수아(Joshua)와 같은 뜻을 지닌 이름인데, 그 뜻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입니다. 그러니까, Jesus에는 이미 ‘메시아’의 의미가 들어가 있는 것이죠.

 

이런 일련의 역사적 사건을 보면,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환영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에게 어떠한 구원을 원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로마 제국을 이스라엘 땅에서 몰아내고 마카비처럼 혁명을 이루어 나라를 되찾고, 이스라엘의 민족성과 종교를 지켜줄 것으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긴급한, 현실적인 구원에 대한 기대였습니다. 그들의 소망대로 예수님의 구원이 발생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은 더 깊은 차원에서 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셨던 것이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현실에서 제국을 몰아내고 주권을 되찾았다고 하더라도, 그 나라는 오래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종려주일을 맞아 주님을 맞이하며 ‘호산나’를 외칩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호산나’는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말입니다. 아주 깊은 간절함이 담긴 말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당장 구원받아야 할 것이 한 두 개가 아닙니다. 나 자신의 문제, 가족의 문제, 직장의 문제, 또는 사회적 문제 등,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들이 한 두 개가 아닙니다. 일단 호산나를 외치며, 그러한 문제들이 해결되고 평안을 되찾을 수 있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간구하는 것은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기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궁극적인 구원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깊은 묵상을 하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종려주일입니다. 종려나무가 이스라엘에서는 흔한 나무라 그 나뭇가지를 꺾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했던 것이겠죠. 만약 한국에서 이 일이 발생했다면, 한국 산천에 흔한 개나리나 진달래를 꺾어서 예수님을 환영했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손에 잡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간절한 마음으로 ‘호산나’를 외칠 때,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는 그 길에 우리는 무엇을 놓아드릴 수 있을까요? 아마도, 교회 뜰에 핀 유채꽃 같은 것을 꺾어서 그 길에 놓아드리면 어떨까요? 아무튼, 우리의 일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일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를 외치면서, 우리의 삶의 문제를 주님께 말씀드리면 좋겠습니다. 호산나는 종려주일에만 외치는 특별한 구호가 아니라, 그냥 우리의 일상에서 흔하게 외치는 구호가 되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4. 4. 00:25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마태복음 21:1-11)

 

1. 종려주일은 사순절 마지막 일주일의 시작이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가장 절정을 이루는 시간이다. 그러나 몰입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할 것이다. 드라마에서 가장 절정을 이루는 회차는 순간 시청률이 올라간다. 기독교인이 평소에 자기 신앙에 별로 몰입을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때만이라도 신앙에 몰입하면, 큰 유익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몰입합시다!” 히브리서는 이것을 이렇게 말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예수를 바라보자!” 적어도, 사순절 동안은, 그리고 그 중에서도 고난주간만큼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몰입하고 집중할 수 있는 신앙이 있어야 한다.

 

2. 종려주일에 읽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나귀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그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면서 먼저 도달한 장소는 감람산 기슭에 있던 벳바게라는 마을이다. 이것을 특별하게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저자의 의도가 있다. 성경은 굉장히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성경은 역사의 기록이면서 경전이다. 역사의 기록이 경전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 역사에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의 역사, 거기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가 거룩한 것이고, 경전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3. 우리는 어떠한 사람을 ‘성인(Saint)’라고 부른다. 그 사람을 거룩한 사람이라고 칭하는 이유는 그 사람 자체의 인격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성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성인을 통해서 우리는 그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본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을 성인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삶을 통해서, 나의 인격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드러나시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믿는 자를 일컬어서 ‘성도(거룩한 무리)’라고 칭하는 것이다. 우리의 인격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부족한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4. 성경의 대표적인 예가 다윗 왕이다. 다윗 왕은 여러가지 인격적인 결함이 많았던 사람이다. 적군과 당당히 맞서지 못하고 목숨을 부지하고자 미친놈 행세도 했고, 자기의 충직한 장수 우리야의 아내를 비열한 방식으로 취하기도 했고, 자식(압살롬)과의 불화로 왕궁에서 쫒겨나기도 했고, 동고동락 했던 부하 장수(요압)와 극심한 갈등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게 다윗 왕, 다윗 왕조가 그리움의 대상이요, 회복의 목표가 된 것은, 다윗 왕을 통해서, 그리고 다윗 왕조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충만히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 왕과 다윗 왕조는 이상적인 왕과 왕조가 된 것이다.

 

5.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면서 예수님의 일행이 감람산 벳바게로 먼저 간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예루살렘으로 곧장 가지 않고 감람산에 들렀다 가는 여정의 동선은 다윗 왕을 연상시킨다. 다윗 왕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사무엘하 15장 이하의 말씀에 보면,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감람산을 넘어 나귀를 타고 피신한다. 예수님이 감람산에서부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것은 무엇을 연상시키는가? 당연히 다윗의 왕의 귀환을 연상시킨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고 메시아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이다.

 

6. 벳바게 근처에 이르자, 예수님은 제자 두 명을 맞은 편 마을로 보내 매인 나귀와 나귀새끼를 풀어 데라고 오라고 하신다. 그리고 누가 ‘왜 나귀를 끌고 가오?’라는 둥의 말을 하면, ‘주가 쓰시겠다’라고 말하면서 끌고 오라고 한다.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냥 거의 도둑질이나, 아니면 무대뽀 행동 같다. 어디에 주차 되어 있는 차를 끌고 가면서 누군가 ‘왜 당신 차도 아닌데 그렇게 마음대로 끌고 가오’라고 할 때, ‘주가 쓰시겠다’라고 말하면, ‘별 미친놈 다보겠네’라면서 욕을 먹을 것이다.

 

7. 조선시대 때도 교통 수단을 말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부류가 있었다. 마패를 지닌 자였다. 우리는 대개 드라마 같은 곳에서 암행어사가 마패를 가지고 다니며, ‘암행어사 출두요’ 할 때 마패를 꺼내 드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 당시에 마패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그 당시에 이렇게 남의 나귀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은 왕족이나 랍비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나귀를 끌고 오면서 ‘주가 쓰시겠다’라고 했을 때, 이 용어를 통해서 드러내고 싶은 것은 분명하다. 예수는 다윗 왕의 자손(왕족)이고, 랍비라는 것이다. 특별이 ‘주’라는 호칭은 그리스도인에게 각별한데,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수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신앙의 고백이 담긴 것이다.

 

8. 나귀의 주인은 자신의 나귀를 기꺼이 ‘주께’ 내어드렸다. 이러한 행위는 현재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신앙의 지침이 된다. 우리가 우리의 소유를 주님께 기꺼이 내어 드리는 이유는 그것을 주님께서 쓰시기 때문이다. 나귀의 주인이 그 나귀를 아무리 잘 사용했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그 나귀를 사용하신 것만큼 중요하고 소중한 일을 위해서 사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주님께 내어드린 그 나귀가 얼마나 귀한 일을 했는가. 안 그랬으면 그냥 짐이나 옮겨 나르는 일꾼 역할을 했을 텐데, 주님께 내어드린 나귀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등에 태우고 예루살렘에 이르는 놀라운 일을 했다. 그 덕분에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소식이 전해진 것 아닌가.

 

9. “주가 쓰시겠다” 할 때 믿음으로 내어드린 우리의 소유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어떠한 위대한 일을 하게 될 지 우리는 잘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늘 이렇게 기도할 줄 알아야 한다. “주님, 주가 쓰시겠다 말씀하시면 순종하는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내어드리겠습니다. 내가 이것을 사용하는 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주님을 믿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저에게 말씀해 주옵소서. 나귀를 내어드린 그 사람처럼, 저도 내어드리겠습니다. 주님 영광 받으옵소서! 아멘.”

 

10. 이어지는 이야기를 보면,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이사야 62장의 말씀과 스가랴 9장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예언의 성취’라는 뜻이다. 우발적 사건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발생한 구원 사건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삶이 성경에 잇대어 있어야 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다. 우리가 매일 성경을 진중하게 들여다보며 거기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그 숨결로 숨을 쉬며 하루하루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우발적인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구원 사건인 것을 선포해야 하기 때문이다.

 

11. 되는 대로 사는 우발적인 삶과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삶은 질적으로 다르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삶은 매 순간이 구원 사건이다. 삶이 구원 사건이라는 뜻은 무엇인가?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넘친다는 뜻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담대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넘치는 자의 삶은 아무도 못 말린다. 담대한 마음, 즉, 용기 있는 자의 삶은 아무도 못 건드린다. 이렇게 놀라운 삶은 ‘예언의 성취’가 있는 삶, 즉 말씀에 잇대어 있는 삶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은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자기의 삶을 발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12.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구원 사건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5절 말씀이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마 21:5). 이사야서는 예수님 사건(메시아 사건)을 이해하는 데 가장 필수적인 구약 성경이다. 이사야 61장은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회당에서 읽은 대표적인 말씀이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사 61:1).

 

13. 이사야 60장~63장은 특별히, 여호와의 종(메시아)을 통해서 이루어질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선포에 대한 말씀이 실려 있다. 스가랴서도 마찬가지다. 시온의 딸, 즉 예루살렘의 주민, 즉, 이스라엘에게 선포된 말씀이다. 다윗 혈통의 왕이 등장함으로써 하나님이 다윗과 맺으셨던 언약대로 다윗 왕조가 회복될 것임을 선포하고 있다. 이렇게 이사야서와 스가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드러내 준다. 지금 예루살렘으로 입성한 예수가 바로, 여호와의 종으로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실, 다윗의 왕의 자손, 메시아라는 것이다.

 

14. 하지만, 자기의 삶이 예수님처럼 성경에 잇대어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반응은 다르다. 자기의 삶이 성경에 잇대어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지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환호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 21:9). 그러나, 자기의 삶이 성경에 잇대어 있지 않는 사람들은 시큰둥하게, 그냥 이렇게 예수를 말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마 21:11).

 

15.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성경에 잇대어 있어 예언의 성취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그분을 향하여 ‘호산나’를 외치고 있는가? 아니면, 그냥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 서로가 서로의 삶을 알아보는 것의 관건은 ‘우리의 삶이 어디에 잇대어 있는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잇대어 있는 사람들은 서로를 깊이 이해하게 된다. 그의 삶은 그냥 우발적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삶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서로를 깊이 이해하게 된다.

 

16. 예수의 삶이 우발적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예언의 성취요 구원 사건이라는 것을 깊이 알았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깊이 사랑했다.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갔고, 죽은 후에도 그 무덤에 찾아갔다. 그러나, 예수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 자들, 즉,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잇대어 살지 못했던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고, 그의 죽음을 헛된 죽음으로 조작하려고 술수를 썼다. 예수는 정확하게 예수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고난을 당했다.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17. 이해할 수 없고, 불필요한 고통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고, 정확하게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삶의 이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그냥 우발적으로 서로 만나고 대하고 사귐을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무엇을 회복해야 할까?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잇대는 것이다. 나의 삶이 우발적인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잇대어 있는 삶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18. 우리 자신에게 솔직하게 물어보자. 나는 얼마나 성경을 가까이 하고 있는가. 성경을 읽으면서 그냥 읽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하나님의 말씀에 잇대어 있어야 한다는 개념(신앙)을 가지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려고 읽고 있는가. 나뿐만 아니라, 가족 구성원 누구에게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잇대어 살도록 권면하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의 삶, 그리고 가족의 삶, 또한 만나는 모든 이들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과 잇대어서 이해하도록 노력하고 있는가. 정확하게 사랑한다는 것, 정확하게 사랑받는다는 것은 말씀에 잇대어 그 사람의 삶을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지 못할 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고통을 안겨주게 된다.

 

19. 삶이 고통스러운 사람이 있는가. 관계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나 스스로에게. 부부 관계 속에서, 자녀와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그 누군든지와의 관계 속에서. 고통을 느끼는가. 그렇다면, 우선,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잇대어서 생각해 보라. 그러려면, 우선 성경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찾으려는 갈망이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예언의 성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성경에 잇대어 있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구원 그 자체가 된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우발적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잇대어 살라. 그럴 때 우리는 정확하게 사랑하게 된다.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반대로, 정확하게 사랑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Posted by 장준식

[신앙의 행위]

 

우리는 엘리사 선지자의 활동을 통해서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의 행위를 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위함’이죠.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신앙이란 단순히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창조신앙이란 인간 존재와 하나님과의 연결성을 아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가장 인간다울 뿐만 아니라, 생명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 신앙은 풍성한 생명을 누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길(way)에 대해서 많은 묵상과 연구를 해왔습니다. 그것을 은혜의 방편(means of grace)라고 하는데, 감리교의 효시, 존 웨슬리(John Wesley) 목사님이 제시한 것이 가장 유명합니다. 그가 제시하는 은혜의 방편은 경건과 선행으로 나누어지는데, 경건(practices of piety)에는 성경읽기, 기도, 금식, 정기적인 예배 참석, 성례전, 교제(fellowship), 성경공부 등이 있고, 선행(good works)에는 병자 방문, 감옥에 갇힌 자 방문, 배고픈 사람 먹이기, 기부, 정의 추구 등이 있습니다. 물론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은혜의 방편들을 찾아볼 수 있겠죠.

 

엘리사의 전성시대를 알리고 있는 에피소드들을 담은 열왕기하 4장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신앙의 행위가 제시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시되고 있는 신앙의 행위는 위에서 살펴본 ‘은혜의 방편’과 좀 다릅니다. 은혜의 방편은 외적인 것이지만, 엘리사 선지자의 활동에서 제시되는 것은 내적인 것입니다. 신앙의 행위는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깊어져야 마땅합니다. 그래야 외적인 은혜의 방편이 진실한 신앙의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엘리사 선지자의 활동에서 제시되는 ‘내적인 은혜의 방편’은 무엇일까요?

 

열왕기하 4장은 과부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선지자 생도가 아내와 두 아들을 세상에 남겨두고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남편을 잃은 여인은 두 아들을 키우기 위해서 이런 저런 일을 하면서 살아보지만 결국 삶의 막바지에 다다릅니다. 더 이상 생활비도 없고, 두 아들이 노예로 팔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남편의 스승이었던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엘리사 선지자에게 ‘살려 달라’고 간청합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내적인 은혜의 방편 첫번째는 ‘간절함’입니다. “선지자의 제자들의 아내 중의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이르되”(왕하 4:1).

 

과부의 부르짖음에 엘리사 선지자는 응답합니다. “내가 너를 위해 어떻게 하랴?”(왕하 4:2). 사실 과부는 어떻게 해야할 지 몰랐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이란 이제 기름 한 그릇 밖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적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자신이 가진 것에서부터. 엘리사 선지자는 기름을 담을 빈 그릇을 최대한 많이 빌려오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빌려온 기름 그릇을 가지고 들어가 문을 닫고 기름을 부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두 번째 내적인 은혜의 방편을 보는데, 그것은 ‘순종’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이 이웃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했겠습니까? 그런데, 과부는 엘리사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여 한 번 더 어려운 일을 합니다. 그리고 그 지시대로 방에 들어가 기름을 붓습니다. 순종하지 않았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렇게 과부와 두 아들은 경제적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납니다.

 

엘리사 전성시대의 다음 에피소드는 수넴 여인 이야기입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 선지자를 존귀하게 여기고 극진히 대접합니다. 수넴 여인은 앞에 등장했던 과부와는 다른 신분을 가진 여인입니다. 부유했고 존경받던 집안의 여인입니다. 그런데 수넴 여인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수넴 여인이 돋보이는 것은 하나님이 무시당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푸대접 받던 시절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극진히 대접했다는 데 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 시대는 겉으로는 부강했으나 속으로는 매우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아합 왕이나 아하시야 왕 이야기를 보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었고, 하나님의 사람을 푸대접했습니다. 엘리야는 심지어 핍박을 받았습니다. 엘리사도 사람들에게 별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시절에 하나님의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극진히 대접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세 번째 내적인 은혜의 방편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섬김’입니다. 섬김을 받은 엘리사 선지자는 뭔가 답례를 베풀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수넴 여인에게 무엇을 해줄까를 묻습니다. 그러나 수넴 여인은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수넴 여인은 그러한 상태를 돌려서 말합니다. “나는 백성 중에 거주하나이다”(왕하 4:13). 현재 상태에 만족하고 있고,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말은 이렇게 해도 왜 바라는 게 없겠습니까? 그 당시 여인에게 정말 중요했던 것은 자식인데, 자식이 없는 수넴 여인의 처지를 알게 된 엘리사 선지자는 그녀의 태를 열어줍니다. “한 해가 지나 이때쯤에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왕하 4:16).

 

정말로, 엘리사 선지자의 예언대로 수넴 여인은 일 년 후에 아들을 품에 안습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런데, 그 기쁨도 잠시, 어린 아들이 조금 성장하여 개구장이 아이가 되었을 때 추수하는 아버지를 보러 밭에 나갔다가 ‘머리야 머리야’ 하면서 쓰러집니다. 망연자실한 수넴 여인은 죽은 아들을 데려다가 엘리사 선지자가 묵는 방 침실에 눕혀 놓습니다. 그리고 갈멜산에 있던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갑니다. 갑자기 자신을 찾아오는 수넴 여인을 멀리서 보고 엘리사 선지나는 몸종 게하시를 보내 맞이합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엘리사를 보자마자 수넴 여인은 엘리사의 발을 붙잡고 주저 앉습니다. 그리고 자식 잃은 괴로움을 표출합니다.

 

섬김을 통해서 선물로 받은 아들이 변고를 당하자 수넴 여인은 망연자실했습니다. 그러나 수넴 여인은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가 아픔을 표현하며 도움을 구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네번째 내적 은혜의 방편을 봅니다. 그것은 ‘신뢰’입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살아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왕하 4:30). 엘리사는 수넴 여인과 함께 그녀의 집으로 갑니다. 그리고 죽어서 침상에 누워 있는 아이를 살려냅니다. 수넴 여인의 신뢰를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셨고, 수넴 여인은 그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간절함, 순종, 섬김, 신뢰, 이러한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외적인 은혜의 방편들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정기적인 예배에 참석하고, 친교를 나누고, 성경공부 하는 일, 그리고 어려운 이들을 돕고 정의를 구하는 일들, 이 모든 일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좋은 방편(means)들 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간절함, 순종, 섬김, 그리고 신뢰입니다. 이러한 내적인 은혜의 방편들이 자리를 굳건하게 잡고 있어야 외적인 은혜의 방편들이 빛을 발합니다. 외적인 은혜의 방편들을 연습하면서 내적인 은혜의 방편들을 추구하는 신앙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성숙한 신앙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는 좋은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당신 탓이 아닙니다]

 

내가 '거대서사'에 대한 분석과 이야기를 자주 하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싶어서 그렇다. '당신 탓이 아닙니다.' 내 삶이 왜 이렇게 힘든지, 거대서사를 이해하고 나면 내가 이렇게 힘든 이유가 내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내 전공은 정치신학이다. 정치신학을 전공하기 위해서는 정치철학 공부는 필수다. 정치 철학자들의 책을 읽으면 거대서사를 알 수 있다. 거대서사는 우리가 왜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밝혀 준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우리 고유의 것이라기 보다 대개 큰 세력에 의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길들여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한 마디로, 우리는 자유롭게 살고 있는 것 같으나 그것은 착각일 뿐 우리는 무엇인가에 노예로 살아갈 때가 많다.

 

기독교인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도 바로 이런 것이다. 기독교인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신앙의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보니,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지 잘 분간을 못한다. 이는 마치, 회심 전 바울과 같다. 회심 전 바울, 즉 사울이 행한 일은 불의한 일이었으나 자기 자신은 신앙의 행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더 '열심'을 냈다.

 

열심은 좋은 것이나 방향이 잘못되면 열심은 오히려 독이 된다. 그래서 언제나 열심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아무리 열심이 있어도 방향이 잘못되어 있으면 헛된 것이요, 별로 열심이 없어도 방향이 올바르면 결정적인 순간에는 큰 힘을 발휘한다. 열심을 추구하기 보다 올바른 방향을 찾는 게 중요하다.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열심을 내는 일은 '선동'에 가깝다. 열심을 내는 일은 재밌다. 그래서 사람들은 열심을 내는 것에 더 마음을 두기도 한다. 그러나 올바른 방향을 찾는 일에는 별로 흥미를 못 느낀다. 재미도 없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열심을 내는 일이 아니다. 신앙생활은 방향을 찾는 일이다. 방향을 찾은 뒤에 열심을 내도 늦지 않다. 방향을 찾았으면 열심을 내지 않아도 된다. 대개 방향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소란한 법이다. 방향을 찾은 사람은 요란스럽지 않게 그냥 그 길을 간다.

 

하나님보다 더 큰 서사는 없다. 이것은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첫 번째 믿음이다. 구약의 십계명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그러면서 우상을 만들지 말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만들지 말라고 한다.

 

우리는 이 말씀에 '아멘' 하지만, 대개는 눈에 보이는 우상을 만들지만 않을 뿐, 하나님 아닌 서사에 지배당하면서 산다. 우리는 하나님이 가장 큰 서사라고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서사 안에 살지 못하고 우리를 둘러싼, 하찮고 보잘것없는 서사에 일희일비하면서 산다.

 

십계명에서 말하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은, 다른 서사에 지배당하지 말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가장 큰 서사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서사 안에서 살면 우리가 맞닥뜨리는 작은 서사들은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 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작은 서사가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것 인양, 두려움에 떨며, 그 작은 서사에 복종한다. 완전 우상숭배자다. 우리는.

 

우리를 지배하는 서사는 우리보다 크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거대서사라 부른다. 그러한 거대서사를 들여다보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를 둘러싼 거대서사에 압도당하거나 희생당하지 않기 위함이다. 그리고 우리가 신앙을 가지는 이유는 우리를 압도하거나 우리를 희생시키는 거대서사가 사실은 하나님이라는 절대적 거대서사에 비추어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고,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함을 얻기 위함이다.

 

우리는 여러가지 거대서사에 둘러싸여 산다. 우리를 둘러싼 거대서사를 알고 나면, 무엇보다 힘을 빼고 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내가 지금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나의 신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얼마나 거대서사의 노예로 살고 있는지 알게 된다. 이것을 알게 되면, 내 삶의 어려움들, 또는 내 삶의 죄책감들이 내탓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럴 때 나를 찾아오는 자유는 정말 달콤하다. 그 순간, 우리는 비로소 가장 큰 서사인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몇 년 전 김누리 교수가 외쳤던 말이다. 그는 이 책에서 대한민국이 불행한 이유를 다음 세 가지로 꼽았다. 1) 분단상황, 2) 야수자본주의, 3) 68혁명의 부재

이 세 가지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거대서사들이다. 불행한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이러한 거대서사의 희생자들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불행을 자신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을 안타까운 일이다.

 

공부란 우리의 삶을 억누르는 거대서사를 보는 안목을 기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 거대서사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한 지혜를 기르는 일이다. 또한 불의한 거대서사를 몰아내고 새시대를 여는 힘과 용기를 키우는 일이다. 이런 공부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나도 모르게 불의한 거대서사에 희생당할 뿐만 아니라 그 불의의 협력자가 되어 불의한 거대서사를 관철시키기 위해 '열심'을 내는 어처구니없는 인생을 살게 된다.

 

'당신 탓이 아닙니다.' 그러니 힘을 냅시다. 우리 서로의 삶을 보듬으며, 우리를 억누르는 불의한 거대서사에 저항합시다. 불의한 거대서사에 저항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입니다. 열심을 내지 맙시다. 그냥 좋은 사람과 만나 수다 떨고 맛있는 거 먹으면서 서로를 더 사랑합시다. 성공하려고 하지 말고 실패합시다. 그렇게 세상을 비웃어줍시다. 우리 모두, 가장 큰 이야기이신 하나님 안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병리적 신앙]

 

미국에는 거대한 심리적 병리 현상이 존재한다. 이는 인종차별에 기반을 둔 현상이다. 심리적 병리 현상은 세 가지다. Guilty(죄책감), Anger(분노), 그리고 두려움(Fear).

 

죄책감은 백인에게서 나오는 심리적 병리 현상이다. 분노는 흑인에게서 나온다. 두려움은 아시아인에게서 나온다. 미국 사회 이면에는 죄책감, 분노, 그리고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미국 사회가 건장하지 못한 이유이고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백인은 근대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면서 세계를 정복했고, 그 과정에서 나쁜 짓을 많이 했다. 미국에서는 대표적으로 원주민 대학살의 역사가 있다. 5000만 명 정도를 학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잡아와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데 사용했다. 이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명과 자연을 훼손한 일들이 즐비하다. 그 과정에서 백인은 '우월감'을 가지게 됐지만, 그 이면에서는 '죄책감'이 자리 잡았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백인은 '백인우월주의'를 바탕으로 자신들 이면에 있는 '죄책감'을 덮으려고 한다. 죄책감이 저변에 병리적 현상으로 자리 잡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현상은 '표리부동'이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사악한 마음을 품는다. 한 마디로, 속을 알 수 없다. 이들은 자신의 죄책감을 감추기 위해서 '선한 일'을 많이 한다. 무덤에 회칠이라도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선한 일을 통해서 속죄하려고 한다.

 

흑인은 인종적으로 최고의 피해자이다. 사람으로 취급 받지 못하고 자신들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노예로 잡혀 와서 짐승 취급을 받으며 살았다. 영혼이 있는 생명체로서 최악의 경험을 한 것이다. 그래서 흑인들에게는 '분노'가 많다. 분노가 많은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의 분노를 표출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거칠어진다는 것이다. 감정 표현이 매우 거칠다. 미국에서 흑인은 같은 영어를 쓰지만 그 표현이 매우 거칠다. 제스처도 그렇다. 분노를 표출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아시아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산다. 삶 속에서 무슨 피해를 입을까봐 노심초사한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는 이들의 특징은 절대 다른 사람의 일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매우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다. 자기가 피해 입는 것을 두려워하고, 남에게 피해주는 것을 꺼려한다. 피해를 입어도 그것을 입 밖에 꺼내기를 주저하고, 왠만한 일은 그냥 참고 넘어간다.

 

각 인종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병리적 현상은 각 인종의 신학과 예배에도 반영된다. 백인은 '죄와 용서의 신학'을 중요시한다. 백인들은 로마서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고, 그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용서하셨다는 '복음'은 그들에게 그야말로 구원의 말씀이다. 게다가 이것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 시켜주기도 한다. 자신들의 행동은 죄인인 '타자'를 구원하기 위한 구원 행위였다는 것이다. 우월감을 가지고 한 나쁜 행동들은 모두 그렇게 정당화 된다. 제국주의자들은 모두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일본이 뻔뻔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우월한 자신들이 미개한 조선인들을 구원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졸개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흑인은 해방과 기쁨의 신학을 추구한다. 억압 당하며 산 이들에게 해방은 그 자체로 구원이다. 그래서 흑인들은 해방을 이야기하는 누가복음의 말씀이나 선지서, 그리고 요한계시록 같은 성경을 좋아한다. 예배에서도 그들의 울분을 토하고,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하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나님께서 악한 사람들을 벌주시고, 약자들을 신원해 주신다는 말씀을 들으면 '에이멘'이 합창처럼 터져 나온다. 눌린 억압을 풀어주고, 묶여 있는 분노를 발산할 때 이들은 기뻐한다. 그래서 흑인 교회의 예배는 기쁨이 충만하다. 늘 축제다.

 

아시아인의 신학은 백인과 흑인의 신학과 결이 다를 수밖에 없다. 아시아인들의 신학은 대체로 '기복적 요소'가 강한데, 그 이유는 기복은 건강이나 물질의 복을 통해서 자신들이 가진 두려움을 극복하거나 달래주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아시아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주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는 말씀에 감동을 많이 받는다. 두려움에 쌓여 있기 때문에, 그래서 소극적이고 수동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들에겐 하나님의 지도편달이 필수다. 그리고 자신들의 두려움을 보호해줄 보호막이 필요한데, 그것은 대부분 물질적 복이나 건강 또는 자식이나 가족들의 평안이다. 더이상 바라지 않는다. 사회 변혁이나 미래에 대한 깊은 관심도 없다. 그냥 자기와 자기 가족이 평안하면 그만이다.

 

각 인종의 신학이나 신앙 형태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각자 자신들의 병리적 현상을 해결하려는 방식으로 기독교 신학, 신앙이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백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죄책감(guilty)을 덮으려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전유하고, 흑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분노(anger)를 해결하려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전유하고, 아시아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두려움(fear)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전유한다. 이렇게 각자 기독교를 전유하는 방식이 다르다 보니, 백인이 흑인 교회나 아시아인 교회에 가는 게 불가능하고, 흑인이 백인 교회나 아시아인 교회에 가는 게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도, 아시아인이 백인 교회나 흑인 교회에 가는 게 쉽지 않다.

 

그런데, 여기서 더 재밌는 현상은 지배계층은 백인들이 전유하는 기독교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흑인이든, 아시아인이든, 지배계층은 백인들처럼 '죄책감'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관찰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의 기독교가 점점 더 쇠락하는 이유는 역사와 몸에 맞지 않은 신앙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미국의 복음주의를 모방하고 있다. 복음주의는 '죄책감'에 쩔은 백인들에게 최적화된 기독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복음주의는 백인 남성 지배계급에 최적화된 기독교이다. 그래서 복음주의 신학은 '죄'를 강조한다. 일단 '인간은 죄인'이라는 명제에서부터 시작한다. 그게 디폴트이다. 우월감에 젖어 있고, 그래서 자신은 지배계급에 속해야 하고, 그래서 '아래 사람들'(?)에게 저지른 나쁜 짓은 구원 행위이다. 이런 구조의 신학은 사실 한국인들에게는 전혀 맞지 않는 신학이며 신앙의 옷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허영심'이라는 게 있다. 사람들은 피지배계층으로 사는 것보다 지배계층으로 사는 것을 선호한다. 이것은 평범한 서민들도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 이야기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드라마에서 재벌 이야기, 예쁘고 잘 생기고 잘 나고 성공하는 이야기에 더 흥미를 가진다. 그런 것처럼, 신앙도 이왕이면 지배계급인 백인들이 형성해 놓은 복음주의를 선호한다. 이것은 세상에서 그렇게 살고 싶은 욕망의 반영이고,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중산층 이상 지배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미국의 복음주의를 모방한 한국의 대형교회를 선호한다.

 

오늘날 기독교가 쇠퇴하는 이유는 다방면으로 살펴봐야 하겠지만, 분명한 이유 중 하나는 기독교가 심리적 병리 현상을 달래는 데만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기독교 신앙이 그러한 심리적 병리 현상을 남몰라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 신앙은 그런 병리적 현상을 달래고 치유하는 것을 훨씬 넘어선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심리 기저에 있는 병리적 현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기독교를 자신들의 병리적 현상을 달래는 데만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가 원래 가진 '전복성'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소 잡는 데 쓰는 칼을 닭 잡는 데만 쓰는 것과 같다. 우리 시대는 소를 잡아야 하는 상황인데, 손에 쥔 칼로 닭만 잡고 있다면, 칼의 쓰임새가 너무 축소된 것이고 아까운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아우라와 탈교회 현상]

왜 탈교회 현상이 나타나는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교회에 더이상 아우라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교회에 더이상 아우리가 없게 되었는가? 교회가 잘못해서? 목회자들의 일탈 때문에? 이 말도 맞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기술의 발전 때문이다. 지난 20년간 교회는 급격히 쇠락했다. 인터넷과 SNS의 발달과 교회의 쇠락은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인터넷과 SNS의 발달은 교회의 쇠락을 이끌었다. 인터넷과 SNS의 발달이 교회의 아우라를 상실시켰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은 그의 저서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아우라에 대한 논의를 진행시킨다.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서 예술작품에 있던 아우라가 어떻게 상실되는지를 추적한 것이다. 1936년에 쓰인 책이니까, 그때의 기술이란 사진과 영상 정도다. 하지만 사진과 영상은 예술작품이 가지고 있던 아우라를 상실시키기에 충분했다. 사진과 영상은 원본의 아우라를 감소시켰다. 사진과 영상을 통해서 무한 복제될 수 있는 원본 작품은 원본만 존재하던 때와는 달리 더이상 고유의 아우라를 가지고 있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인터넷과 SNS의 발달은 모든 일상을 가벼운 것으로 만들었다. 모든 것이 가벼워지는 이유는 모든 것의 일상(사생활)이 까발려졌기 때문이다. 신비와 카리스마가 걷히니, 대상이 가진 아우라가 걷힌 것이다. 공영방송을 통해서만 접하던 정치인이나 사회적 지도층 인사들의 삶이 이제는 통제되지 않는 인터넷과 SNS를 통해서 가감 없이 노출된다. 그들의 근엄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사람들은 그들의 추잡한 사생활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것은 사회 전반에 걸쳐서 발생한 사회현상이다.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가톨릭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아동 성추행 문제가 반복되고 있었지만, 그것이 대중에게 까발려진 것은 인터넷과 SNS의 발달과 더불어 된 일이다. 언론을 철저하게 통제할 수 있었던 시절, 불과 20년 전만 해도, 몇몇 사람만이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일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가톨릭에서 행해진 아동 성추문 문제를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개신교 교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여러가지 추문들이 인터넷과 SNS를 통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기독교를 일컬어 '개독교'라고 부르고, 목사를 일컬어 '먹사'라고 부른다. 통제할 수 없는 언론이 인터넷과 SNS를 통해서 활짝 열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술의 발달은 굳이 교회를 가지 않더라도 종교적 욕구를 얼마든지 채울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 주었다. 우리가 팬데믹을 통해서 경험한 것처럼, 인터넷을 통한 예배가 가능하게 된 것은 순전히 기술의 발달 덕분이다. 그래서 그 이전에는 없던 신조어들이 생겨났다. '대면예배', '비대면예배' 같은 것들이다. 예배는 그냥 예배였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예배를 구별한다. '대면'인지, 아니면 '비대면'인지.

거기다 인터넷, 특별히 유튜브의 발달로 인하여 담임목사의 설교가 갖는 아우라는 없어진 지 오래다. 손 안에서 내가 듣고 싶은 설교를 골라서 들을 수 있는 기술이 보급됐기 때문이다. 설교를 쉽게 비교할 수 있는 것은 마치 상품을 쉽게 비교할 수 있는 것과 같아졌다. 설교가 상품처럼 골라서 들을 수 있는 것이 된 이상, 설교가 갖는 고유의 아우라는 상실될 수밖에 없다.

교회가 제대로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도 중요하고, 목회자가 지성과 영성, 그리고 도덕성을 두루두루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러한 것이 잘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탈교회 현상을 당분간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고유의 아우라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더이상 어떠한 대상에 대하여 아우라를 갖는 일을 잘 하지 못한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상품을 파는 회사에서는 상품의 아우라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톱스타를 내세워 광고하기도 하고, 상품의 가격을 범인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올리기도 하고, 한정판을 만들어 희귀성을 높여 아우라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것도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아주 쉽게 간파된다.

아우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교회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손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상품을 파는 회사들처럼 마케팅을 하는 것이다. 요즘 교회들은 대개 그러한 방식을 취한다. 한마디로, 어떻게 해서든 '스펙터클'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 교회 건물을 빚을 내서라도 블링블링하게 짓거나 리모델링을 하고, 팬시한 프로그램을 돌려서 사람들의 환심을 산다. 좀 심한 곳은 목회자를 우상화시키기도 한다. 이렇게 무리수를 두는 이유는 파괴된 아우라를 어떻게서든 다시 회복하여 교회 성장을 이루려는 목적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교회의 아우라는 다시 복구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미 판도라 상자가 열린 시대에 살고 있으며, 모든 것이 까발려진 '투명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미 의심과 불신의 에너지에 둘려 있다. 의심과 불신의 에너지는 사람들을 한 곳에 모으거나 붙들리게 하지 않는다. 의심과 불신은 분열을 불러온다. 그래서 요즘 우리가 경험하는 일들은 모두 '분열의 일' 뿐이다.

기술의 변화는 인간에게 의식의 변화를 가져온다. 기술은 인간의 의식이 따라가지 못할 만큼 빠르게 변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우리는 이제 AI의 시대를 맞고 있다. 이미 그 시대가 어떠한 시대가 될 지, ChatGPT의 론칭을 통해서 조금씩 맛보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교회(종교)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바보 같은 짓은 변화를 거부하며 비의 또는 컬트의 집단으로 퇴화하는 것이다. 사실, 요즘 한국 사회를 떠들썩 하게 만들고 있는 이단 교회들은 모두 퇴행적 행동을 보이는 종교집단일 뿐이다.

정통교회라고 자부하는 교회들이 기술의 변화에 발맞추어 신앙과 교회를 재구성하는 데 게으르다면, 즉, 활발한 대화를 거부하고 오히려 이단 교회들처럼 퇴행적 행동을 하는 곳으로 나아간다면, 머지않아 이단과 정통교회는 한 통속이 되고 말 것이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나는 신이다'에서 보인 이단들의 퇴행적 행동은 그 강도만 다를 뿐이지 이미 정통교회 내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기술이 무섭게 발전하고 있는 이 시대에, 교회가 사는 길은 아무리 생각해도, 소통과 공부 밖에 없다. 무섭게 변하는 사회와 소통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이는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셨던 격려의 말씀과 같다),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어떻게 해야 급격히 발전을 이루는 기술사회에서 교회가 지닌 고유의 아우라를 지켜내거나 또는 창조해 나가야 하는지 치열하게 '공부' 하는 수밖에 없다.

탈교회 현상을 너무 교회 자체적인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자책하거나 쉽게 비난하지 않으면 좋겠다. 물론 교회의 잘못과 목회자의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나, 아무리 교회와 목회자가 잘 해도 탈교회 현상은 막을 수 없는 쓰나미와 같다. 그러니, 조금만 더 힘을 내면 좋겠다. 그리고 새로운 교회의 아우라를 만들어 나가며, 인간성(humanity)이 한없이 무너져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고 아파하는 '인간'(human being)'에게 삶의 의미를 되찾아 주고, 따스한 마음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위로와 용기를 북돋아 주는, 기술사회를 올바로 이끌어 주는, 진리와 사랑의 교회를 세워 나가면 좋겠다.

Posted by 장준식

[안다는 것은 경외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바다의 가능성은 수수께끼처럼 난해하다. ...인류는 깊은 심연의 바다보다 우주를 훨씬 더 많이 방문했다. 바다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바다를 존중하지도 않는다. 바다를 약탈하고 더럽히면서 죽이고 있다. 우리 자신도 함께."

(탄소로운 식탁, 232쪽)

 

우리교회에서 진행하는 [기후변화프로젝트]에서 읽는 책 <탄소로운 식탁>에서 인용하고 있는 자크 아탈리의 글입니다. <탄소로운 식탁>에서 저자는 우리의 먹거리와 탄소배출의 상관관계를 살피고 있는데, 축산업과 농업, 그리고 어업 순으로 상관관계를 보여줍니다.

 

우리 식탁에 고기가 올라오기까지, 우리 식탁에 곡물이 올라오기까지, 그리고 우리 식탁에 해산물이 올라오기까지, 우리는 그냥 무심히 먹고 즐거워하지만, 우리의 먹거리가 생산되는 과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심각하게 탄소를 배출하는 구조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먹으면서 지구를 죽이고 있다는 것이죠. 물론, 이대로 가다 가는 어느 시점, 우리는 더 이상 먹지 못하고 굶어 죽거나, 아니면 그냥 갑작스럽게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먹을 것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을 만큼 지구가 황폐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먹는 것 때문이죠. 물론 이러한 일을 상상하는 일은 유쾌하지 않고 두렵기도 합니다.

 

우리는 왜 망치기만 하는 걸까요? 그 이유는 위의 문장에 나와 있습니다. "바다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바다를 존중하지도 않는다. 바다를 약탈하고 더럽히면서 죽이고 있다." 바다 뿐이겠습니까? 무엇이든, 우리는 그 대상에 대하여 관심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으려 하니, 그 대상에 대하여 경외심을 갖지 않습니다. 경외심이 없으니 존경도 없습니다. 존경이 없으니 마구 착취하는 것이죠.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프랜시스 베이컨이 말했지만, 이것은 ‘앎’에 대한 왜곡을 낳았습니다. 왜 알려고 할까요? 우리는 그동안 앎에 대한 이유를 왜곡하며 살았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은 앎을 통해서 상대방을 통제하고 착취하고, 상대방을 통해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뜻으로 썼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앎'을 내세워, 인간을 파괴하고 착취하고, 자연을 파괴하고 착취하며 살았습니다. 이것은 지난 세월 우리가 지내온 전형적인 근대의 풍경입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말은 '야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안다’는 뜻의 히브리어’야다’는 아주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마치 남녀가 깊이 사랑을 나누는 것처럼요. 깊은 사랑 안에 거하는 것만큼 성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성경에서 '안다'라는 말을 '야다'를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앎이란 경외를 불러오는 것이기 때문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거룩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앎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렇게 우리도 하나님을 앎의 대상으로 인식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일은 '경외'로운 일입니다.

 

상대방을 인식하고 알아간다는 것은 상대방을 경외한다는 뜻입니다. 앎은 경외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경외가 있어야 상대방에 대한 존경의 마음도 생기는 법입니다. 존경의 마음의 있어야 상대방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랑하며, 그와 더불어 생명을 더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그 어떤 폭력과 착취도 들어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왜 기후위기를 겪고 있습니까? 앎에 대한 인식이 비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는 것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곡과 무관심이 기후위기를 낳은 근본 원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야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들에 대하여 안다면(야다), 그것은 경외이어야 마땅합니다. 앎을 통해서 경외 이외의 다른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앎이 아니라고 말 수 있습니다.

 

경외를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앎은 앎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알려고 하는 자는 경외를 먼저 간구해야 합니다. '앎'이 알량한 밥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우리 시대에, 앎에 대한 구도적 자세를 회복하는 일은 생명을 살리는 구원과도 같습니다. 안다는 것은 경외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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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널 사랑하지 않아: 탈교회 현상]

 

발음하기도 쉽지 않은 '어반자카파'의 노래 '널 사랑하지 않아'가 있다. 이별 노래다. 슬픈 노래다. 긴 노래 가삿말을 가지고 있지만, 그 가사가 전하는 핵심 내용은 이거다. "널 사랑하지 않아. 그냥 그게 전부야."

 

사랑하지 않기에, 헤어진다는 것 때문에 마음 아프지도 않고, 상대방이 눈물을 흘려도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다. 미안하다는 말도 하고 싶지 않고, 더군다나 용서해 달라는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난 널 사랑하지 않아!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매달려 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 사랑할 수 있는 수많은 조건과 환경을 만들어 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난 널 사랑하지 않아!

 

상대방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의 기준은 '사랑함'이다. 그래서 어떤 환경이나 조건을 잘 만들어 놓으면 상대방은 나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믿음을 갖는다. 사랑의 조건이나 환경을 만들었는데도,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조바심이 난다. 화도 난다.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고.

 

그러나, '사랑하지 않음'이 기준인 사람에게는 아무리 사랑의 환경이나 조건이 조성되었다 하더라도, 사랑할 마음이 없다. 그 사람의 기준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음'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라는 저서에서 '무(nothingness)'에 대하여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인간은 존재를 기준으로 무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무는 존재의 반대, 존재의 부정, 존재가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 무는 존재를 기준으로 생각할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게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존재를 기준으로 무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무 자체를 생각해 보려고 했다. 무 자체를 생각하면, 존재를 기준으로 해서 무를 생각할 때와 다른 생각이 가능하다.

 

이러한 생각의 전환은 이런 것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저출산 문제가 아주 심각한 사회 문제이다. 그렇다 보니, 정부는 이런 저런 정책을 통해서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정부가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서 내놓은 정책들은 모두 '출산'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정부는 출산에 방해되는 요소들을 제거하거나, 출산을 장려할 수 있는 정책들이 잘 정비되면 출산율이 높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기준을 바탕으로 진행하는 정책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요즘 젊은이들은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가 삶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람한테 아무리 사랑의 환경과 조건을 인위적으로 조성해 준다고 해서 사랑하게 되지 않는 것처럼,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는 것이 삶의 기본 바탕인 사람한테 아무리 아이를 낳을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 준다고 해도 아이를 낳지 않는다.

 

왜 교회가 쇠퇴하는가? 왜 기독교가 쇠퇴하는가? 사람들은 그 이유를 여러 군데서 찾는다. 가장 그럴싸한 이유는 교회가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목회자들이 부도덕 하고, 교회가 사회보다 못한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개선하면 다시 교회는 부흥할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령의 역사가 임하면 교회는 다시 부흥하거라 믿고,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얼마전 미국의 켄터키주 소재 애즈베리 대학교에서 나타난 부흥 현상 같은 것에 고무된 반응을 보인다. 저런 현상이 릴레이처럼 발생하면 교회의 부흥이 다시 활기를 되찾을 거라고 믿는다.

 

왜 교회가 쇠퇴하는가? 왜 기독교가 쇠퇴하는가? 사실 이유는 너무도 간단한다. 널 사랑하지 않아,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 이와 같이, "교회를 가고 싶지 않아!"가 답이다. 기준이 바뀌었다. '교회를 가야지'가 기준이었다가, 이제는 '교회를 가고 싶지 않아'가 기준이 되었다. '교회를 가야지'가 존재라면, '교회를 가고 싶지 않아'가 무이다. 존재에서 무로 그 기준이 바뀌었다. 예전에 한국 사회에서 아이를 무조건 낳아야 한다는 것이 삶의 기준이었다면, 요즘 한국 사회에서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기준이 된 것처럼, 기준이 바뀌었다. 그냥, 사람들은 교회를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교회를 가고 싶지 않은 게 기준인 사람들에게 아무리 교회 다니기 좋은 환경과 조건을 조성해 준다고 해도, 즉, 교회가 사명을 잘 수행하고, 목회자가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고, 사회보다 높은 문화 수준을 유지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교회에 오지 않는다. 왜? 그냥, 교회 가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교회를 가고 싶도록 만들 수 있을까? 이것은 '교회'라고 하는 사회의 한 부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 전체를 들여다 보며, 사회 전체가 생각의 전환을 이룰 수 있도록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한국사회는 1997년 IMF 사태 이후로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체제에 깊숙이 편입되면서 사회 사체가 변했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특징은 사회를 '총체적인 효율적 시스템화' 시킨다는데 있다. 이것은 다양성을 말살하고 모든 것을 획일화시키는 시스템이다. 개인이 총체적 시스템의 효율적 부품으로 기능할 뿐이지, 그 시스템 바깥에서 자율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구조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스템의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자신의 인생을 효율적으로 조직화시키지 않으면 뒤처지고 먹고 살기 힘들다는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시스템 안에서 잘 작동하도록 다그친다. 누가 착취하지 않아도 스스로 착취한다.

 

살며, 생각하며, 사랑할 수 없는 구조 속에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일,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일, 그리고 누군가와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어 친밀한 관계를 갖는다는 일은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한국사회는 출산율도 낮을 수밖에 없고, 동시에 교회가 쇠퇴할 수밖에 없다.

 

사회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교회가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해도 교회는 계속해서 쇠퇴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다시 사는 방법은 교회 안에서 '우리들만의 리그'를 형성할 것이 아니라 교회 밖으로 나아가 사회 자체를 변혁시키려는 '투쟁'을 해야 한다. 기독교는 태생적으로 제국에 맞서는 하나님 나라 체제이다. 제국은 '총체적인 효율적 시스템화'를 추구한다. 그래야 통치가 용이하고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거기에 맞서 하나님의 생명의 풍성함, 즉 생명의 다양성과 자유로운 번성을 이루려 노력했다.

 

나쁜 교회와 좋은 교회의 차이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제국에 협력하는 교회는 나쁜 교회이고, 제국에 저항하는 교회는 좋은 교회이다. '총체적인 효율적 시스템화'를 용이하게 하는 교회는 나쁜 교회이고, 거기에 저항하여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고 다양한 인생과 생명이 풍성하게 존재하도록 그 길을 열어주는 것이 좋은 교회이다.

 

교회 다니고 싶지 않아. 탈교회 현상. 이것은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이다. 나가서 싸우지 않으면 교회의 부흥은 없다. 그냥 그렇게 교회는 계속 문을 닫을 것이다. To be or not to be, 이것이 문제다.

 

(이 글은 충코의 철학 ‘저출산의 근본 이유 고찰’에서 영감을 얻어 쓴 글이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의 유익

 

개미핥기

 

풀고 싶지 않은 문제들이 있다

답이 두렵기에

개미 떼처럼 바글바글 끓는 문제들

개미에 시달리지 않고

쫓기지 않고, 개미를 미워하지 않고

그러기 위해 나는 날름날름

개미를 삼킨다

위장(胃腸)의 일로 넘겨버린다

그래도 날이면 날마다 여전히 끊는 개미 떼

나는 또다시 날름날름

개미는 나의 양식

입속이고 뱃속이고 따끔따금 뜨끔뜨끔

 

(황인숙 시집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에서)

 

삶을 괴롭히는 문제들을 풀지 않고 넘겨버리니까 그렇게 속이 아픈 거겠죠. 그렇다고 삶을 괴롭히는 그 문제들과 씨름하느라 인생을 허비하기에도 아깝습니다. 인생은 짧은데, 문제들과 씨름하다가 언제 인생을 기쁘고 즐겁게 보낼 수 있을까요.

 

“풀고 싶지 않은 문제들이 있다 / 답은 두렵기에”라는 문장에서 마음이 머뭅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을 많이 만납니다. 문제를 풀고 싶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죠. 그 문제를 풀고 나면 나의 인생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그 두려움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그냥 문제를 묻어두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문장을 보면서 기도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봅니다. 기도란 무엇일까요? 기도는 문제를 묻어두는 행위가 아니라, 문제를 푸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풀어가는 과정이 독특합니다. 기도는 문제를 풀되, 그 문제에 인생이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는 소망의 행위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통제할 수 없고 알 수 없으니,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 그 문제를 맡기는 행위입니다.

 

기도의 유익은 뭐니뭐니 해도, ‘맡기는 것’에 있습니다. 문제를 주님께 맡기면, 그 문제는 우리의 미래를 열어주지 막아서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자의 삶은 ‘형통’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이죠. 그러나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의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의 문제를 주님께 ‘맡길 때’, 우리의 미래는 어떠한 방식으로 펼쳐질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우리는 믿을 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 우리의 미래를 선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실 것을요.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