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은 하나의 철학이다

 

최근에 읽은 책 중에 『10권을 읽고 1000권의 효과를 얻는 책 읽기 기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언뜻 보면 그냥 자기계발 책 같은데, 내용은 그렇지 않습니다. 서문에서 저자가 ‘이 책은 단순히 실용서가 아니다’라는 것을 밝히기도 하죠. “그렇기에 이 책이 그저 단순한 실용서로 읽힐 것이 아니라 읽기에 대한 생각을 묻는 아주 가벼운 철학서로서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희망한다”(9쪽).

 

이 책은 ‘다독’이 미덕이 된 우리 시대의 독서 풍경을 되돌아보며 교정해 주는 책입니다. 다독(책을 많이 읽는 것)만이 독서의 미덕이 아니라, 책을 적게 읽는 것도 얼마든지 삶에 큰 의미를 준다는 것이죠. 책의 제목처럼, 천 권의 독서보다 열 권의 독서가 인생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천 권의 독서를 했지만 독서를 많이 했을 뿐 거기에서 남는 게 없다는 정말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열 권의 독서를 했어도 그 독서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힌다면 인생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소독(少讀/적게 읽기)-심독(心讀)-탐독(探讀)-숙독(熟讀)’할 것을 권합니다.

 

요즘 ‘독서모임’이다 ‘인문학 공부’다 ‘뭐’다 해서 책 읽는 모임이 많습니다. 독서를 통해서 인생역전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문학 열풍은 실제로 인문학에 관심이 있어서 그런게 아니라, 인문학 공부를 하면 창의력을 키울 수 있고, 그것이 좋은 직장을 얻는 데 도움이 되고, 수입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 때문에 생겨난 열풍입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책을 ‘욕망’합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욕망에 있어, 책은 성숙의 대상이 아니라 성과의 수단인 것이다”(20쪽).

 

우리는 왜 책을 읽어야 할까요? ‘나’는 왜 책을 읽고 있습니까? (물론 책을 잘 안 읽으시는 분들에게 이러한 질문은 별 의미가 없겠습니다만) 독서는 성과의 수단인가요, 아니면 성숙의 대상인가요? 독서는 참 좋은 것이고, 원래 독서는 ‘영혼의 양식’이라고 불리며 인간을 성숙하게 만들어 주는 인생의 동반자였는데, 어느새, 우리가 사는 시대는 독서를 성과의 수단, 즉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시킨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책을 읽는다’는 행위를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이 책에서 읽은 문장 중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것은 다음 문장이었습니다. “우리에겐 여유를 가지고 나를 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 인생을 엉망으로 만드는 원인은 결핍이 아니라 과잉 때문이다. 느리게 걷는다 해서 도착이 늦어지는 것은 아니다”(106쪽).

 

정말 그렇죠. 우리가 사는 시대는 과잉의 시대입니다. 과잉 때문에 우리의 인생도, 우리의 지구도 망가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과잉을 좆아서 삽니다. 무엇이든지 비워내기 보다, 무엇이든지 채우고 넘쳐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보니, 불안은 끝없습니다. 과잉은 결코 채울 수 없는 신기루이기 때문입니다.

 

과잉의 시대에 결핍은 부족함이나 불안함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철학입니다. 결핍되었다고, 부족하다고 덜 행복하거나 인생이 망가지지 않습니다. 과잉이 아니라 결핍을 지향하는 것,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케노시스’라고 합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7-8). 기독교의 구원은 결핍을 통해서 왔습니다. 결코 과잉을 통해서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과잉의 시대에 결핍을 지향하는 것은 하나의 철학이자,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의 신앙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나를 열어주세요

 

나희덕 시인의 시 중에 <나를 열어주세요>라는 시가 있습니다. 한 번 천천히 읽어 보세요.

 

옆구리에 열쇠구멍이 있을 거에요.

찾아보세요. 예, 거기에

열쇠를 꽂아주세요.

아니면 태엽이라도 감아주세요.

여기 계속 서 있는 건

아무래도 너무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몇 걸음이라도 걸어야 살 것 같아요.

열쇠를 찾을 수 없다고요?

당신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있잖아요.

손가락만큼 좋은 열쇠는 드물죠.

때로는 붓이 되기도 하고 칼이 되기도 하는 손,

지문의 소용돌이를

열쇠구멍의 어둠에 가만히 대보세요.

예, 드디어 열렸군요.

이제 구멍 밖으로 걸어갈 수 있겠네요.

태엽을 넉넉히 감아주세요.

염려하지 마세요. 곧 돌아올 테니까.

내 구두에는 스프링이 달려 있어

통, 통, 튀어 올랐다가도 이내 가라앉고 말지요.

혹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눈먼 둘부리에 걸려 넘어진 줄 아세요.

당신의 인형이라는 것도 잊은 채

땅에 코를 박고 허둥거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다시 일으켜줄 어떤 손을 기다리면서.

 

(나희덕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에서)

 

인형이 말을 하는 듯합니다. 누군가 태엽을 감아주지 않아 그냥 그 자리에 계속 머물고 있는 인형입니다. 움직이지 않고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지루하고 답답합니다. 그래서 인형은 누군가 태엽을 감아주어 머물러 있던 자리에서 움직여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합니다. “여기 계속 서 있는 건 / 아무래도 너무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몇 걸음이라도 걸어야 살 것 같아요.”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한 가지 일을 오랫동안 하다 보면, 지루함과 답답함을 느낍니다. 삶이 권태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인형처럼 상상합니다.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싶고,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 같은 것 말이죠. 인생은 기본적으로 지루하고 답답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기분전환’을 필요로 합니다.

 

인형의 바람대로 누군가(물론 인형의 주인이겠지만요) 태엽을 감아줍니다. 이제 움직일 수 있게 된 인형은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런데 그게 참 쉽지 않습니다. 얼마 못 가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맙니다. 땅에 코를 박고 허둥거리는 인형은 누군가 자기를 구원해 주기를 갈망합니다.

 

우리는 지루해 하고 답답해 하면서 일탈을 꿈꿉니다. 그런데 그게 생각처럼 우리의 삶을 구원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차라리 우리는 지루하고 답답한 일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게 더 좋습니다. 그런 순간이 바로, 내가 열리는 순간이겠죠. 일상에 나를 열 때, 그 일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을 맛보게 될 테니까요.

 

일상이 답답하고 지루하다면, 잠시 이렇게 기도해 보세요. “주님, 나를 열어주세요!”

Posted by 장준식

사순절에 들어서며

 

사순절이 돌아왔다는 것은 봄이 왔다는 소식입니다. 벌써 꽃 피는 봄이 왔네요. 봄에 관한 시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만, 그 중에서 문정희 시인의 <아름다운 곳>이라는 시가 눈에 띕니다.

 

봄이라고 해서 사실은

새로 난 것 한 가지도 없다

어디인가 깊고 먼 곳을 다녀온

모두가 낯익은 작년 것들이다

 

우리가 날마다 작고 슬픈 밥솥에다

쌀을 씻어 헹구고 있는 사이

보아라, 죽어서 땅에 떨어진

저 가느다란 풀잎에

푸르고 생생한 기적이 돌아왔다

 

창백한 고목나무에도

일제히 눈펄 같은 흰꽃들이 피었다

누구의 손이 쓰다듬었을까

어디를 다녀와야 다시 봄이 될까

나도 그곳에 한번 다녀오고 싶다

 

나희덕 시인은 <어떤 나무의 말>에서 “제게 입김을 불어넣지 마십시오. 당신 옷깃만 스쳐도 저는 피어날까 두렵습니다… 부디 저를 다시 꽃 피우지는 마십시오.”라고 말하고 있는 반면에, 문정희 시인은 “누구의 손이 쓰다듬었을까. 어디를 다녀와야 다시 될까. 나도 그곳에 한 번 다녀오고 싶다”라고 말한다. 나희덕 시인의 시에서는 생명을 거부하는 허무주의가 엿보이지만, 문정희 시인의 시에서는 생명을 향한 갈망이 엿보입니다. 생명에 대한 두 가지 태도에서 어떤 것이 더 마음에 와 닿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허무주의나 생명에 대한 갈망이나 생명을 깊이 탐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공동적으로 나타나는 감정입니다. 생명을 사랑하지 않으면 허무주의에 빠지지도 않겠죠. 생명을 너무 사랑하는데, 그 생명이 아픔을 주고 고통을 주고 하니까 그 아프고 고통스러운 생명에서 벗어나 빨리 좀 쉬고 싶다는 갈망이 담기는 것이겠죠. 또한 누구나 생명의 꽃을 활짝 피우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문정희 시인이 고백하는 것처럼 ‘눈펄 같은 흰꽃들’을 보면 나도 그꽃들처럼 활짝 피고 싶다는 욕망이 작동을 하는 것이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생명이 활짝 필 수 있을까,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한 듯 싶습니다.

 

봄과 사순절이 어깨동무 하고 우리 곁에 오고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봄을 느끼며 사순절의 의미를 좀 더 깊이 체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봄은 겨울을 이겨낸 것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희망과 따스함과 용기로 다가오는 것처럼, 사순절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절대적인 희망이 절기입니다. 사순절은 그야말로 ‘기독교인이 되기 좋은 절기’입니다. 하누카가 오롯이 유대교의 절기인 것처럼, 사순절은 오롯이 기독교의 절기입니다. 유대교인이 아니면 하누카에 아무런 감흥이 없듯이, 기독교인이 아니면 사순절에 아무런 감흥이 없습니다.

 

학창 시절 국문과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었을 때, 이란에서 온 외교관 한 명과 국문학 수업을 같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이란 외교관이 배가 고파서 힘들다는 말을 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라마단 기간이라 해가 떠 있는 동안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어서 쫄쫄 굶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슬람의 라마단 절기는 무함마드가 꾸란(코란)의 계시를 받은 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슬림들(이슬람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라마단을 특별하게 생각하며 그들에게 지워진 의무를 열심히 지킵니다.

 

그런데 정혜윤의 어떤 책에서 재밌는 사실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무슬림들이 라마단에 금식하는 것은 법으로 정해져 있어서 철저하게 지켜야 하지만, 라마단 기간이라도 그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겁니다. 바로, 비행기를 탔을 때랍니다. 그들의 두 발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닿아 있기 때문에 비행기 안에서는 라마단 기간이라 할지라도 금식하지 않고 마음껏 먹어도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슬림들은 라마단 기간에 비행기를 탔을 때 미친듯이 먹는답니다. 비행기가 착륙하면 또다시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죠.

 

서구 역사에서 기독교인들도 오랫동안 사순절을 철저하게 지켜왔습니다. 다른 종교인들에 비추어 보면, 기독교인들은 이제 기독교만의 독특한 절기인 사순절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기독교 문화가 많이 세속화됐기 때문입니다. 세속화라는 것은 신앙심이 많이 퇴색되고 옅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종교적인 법에서 좀 더 자유로워져서 개인의 양심에 따라 종교행위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유대교나 이슬람교가 지배하는 사회는 종교법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어 종교의 법에 따라 사회의 구성원들이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기독교 문화가 강한 유럽이나 미국 같은 곳에서는 종교법이 사회의 구성원들을 속박하지 않습니다. 종교가 철저히 개인의 양심의 영역으로 들어간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미국 사회에서 그 누구도 종교의 법으로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구속할 수 없습니다. 즉, 사순절이 되었다고, 그 누구도 종교적 행동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금식을 강요할 수 없고, 기도를 강요할 수 없고, 선행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상황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 좀 더 진지하게 책임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그러한 것을 하지 않으며 비난을 당하거나 처벌을 받기 때문에 금식하거나 기도하거나 선행을 한다면, 그것을 ‘진실한 금식, 기도, 선행’이라고 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그러한 경건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우러난 신앙의 행위일 때, 그것은 ‘진실한 신앙의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이죠. 사순절을 향한 우리의 양심이 경건하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은 기독교인들만의 절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 말했듯이, 기독교인이 되기에 참 좋은 계절입니다. 사순절기를 다른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보낸다는 것은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나 자신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드러낼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세화 공동체’로서, 이번 사순절은 조금 특별하게 보내 보려고 합니다. 팬데믹 동안 조금은 흐트러진 경건의 모양을 다시 갖추어 보려고 합니다. 하루 일과를 마쳐 놓고 고요한 시간에 초를 켜 놓고 기도도 해보고, 사순절 묵상집을 통해서 사명을 다시 발견해 보려고 합니다. 지난 3년 간의 팬데믹 시간을 되돌아 보면서 소감을 담은 글도 한 번 써 보려고 합니다. 그것을 모아 ‘세화사랑’을 발간해 보려고 합니다. 기후위기를 극복해 보려는 마음으로 ‘Dear Tomorrow’ 편지도 써 보려고 합니다. 집에서 조그맣게 농사를 지어 장터를 열어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담아 ‘몸으로’ 신앙을 표현해 보려고 합니다

 

기독교인이 되기 좋은 계절, 꽃이 활짝 피어 자기를 뽐내듯, 우리도 활짝 피어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의미 있고 행복한 사순절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함께 이 특별한 시간을 보내게 되어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2. 14. 04:11

우리의 사역이 믿음을 일으킨다

(고린도전서 3:1-9)

 

1. ‘지구적 집단 트라우마 상태.’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트라우마를 겪게 되면, 극도의 긴장상태가 유지된다. 우리 몸에서는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데, 공격성이 높아진다. 요즘, 미쳐 날 뛰는 것 같은 사건사고가 많은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극도의 긴장상태가 유지되니까,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 공격성이 높아지고, 조그마한 트리거가 생기면 공격성이 실제 실행으로 옮겨진다. 아주 위험한 상태인 것이다. 트라우마 상태에서는 마음이 겉잡을 수 없이 혼란해진다. 불안, 걱정, 원망, 화남, 슬픔 등 다양한 감정 반응이 나타나는데, 위에서 말한 것처럼 공격성이 높아진 상태이기 때문에 이러한 감정에 대한 컨트롤이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러한 시대에 인간은 말 그대로 ‘walking beast/walking bomb’가 되기 쉽다.

 

2. 좀비 드라마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The Walking Dead”를 보면, 실제로 그렇다. 그 드라마에서 무서운 것은 좀비가 아니다. 인간이다. 모든 인간이 좀비로 변해버린 세상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집단 트라우마에 걸려 극도의 긴장상태로 살아간다. 공격성이 높아지고, 자신에게 생긴 여러가지 감정의 변화를 어떻게 컨트롤 해야 할지 몰라 힘들어한다. 살아남은 인간들이 서로 힘을 합해서 평화롭게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하고,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상대방에게 위협을 가하고 착취한다. 좀비가 무서운 게 아니라 인간이 무섭다. 인간은 아주 무서운 짐승이 된다.

 

3. 트라우마 상태가 되면 무력감과 불안감 때문에 해야 할 일을 잘 실행하지 못하게 된다. 몸에서 그 현상이 나타나는데, 잠을 잘 못 이루게 되고, 두통이 생기고, 소화불량이 생기고, 식욕부진이 생긴다. 몸이 자기의 역할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삶에도 큰 영향이 온다. 하던 일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 공부하던 학생은 학교에 가는 게 싫어지고, 직장생활 하던 회사원은 일 하는 게 싫어지고, 자신이 의미 있게 하던 일들에 대해서 왠지 거부감이 들면서 손을 놓게 된다. 트라우마는 신앙생활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기도할 수 없게 되고, 무엇보다 늘 다니던 교회마저 발걸음을 끊게 된다. 트라우마 상태에서 드는 가장 보편적인 생각은 이런 것이다. “학교 가면 뭐해.” “돈 벌면 뭐해.” “교회 가면 뭐해.”

 

4. 각종 미디어와 SNS 플랫폼이 전세계를 초연결 사회로 만들어서 지구촌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가까워졌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는 트라우마를 겪는다. 각종 미디어와 SNS에 올라오는 뉴스들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전혀 기쁨을 주지 못한다. 매일 보는 뉴스에서 총기관련 사건사고를 보는데, 그 뉴스를 보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한테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감사하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한테 언제 저런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불안하다.’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감사 헌금을 내지 않는다. 그 돈으로 총을 산다.

 

5. 이러한 시대에 자기 자신을 잘 보살피는 일은 너무도 중요하다. 우리는 지금 ‘지구적 집단 트라우마 상태’에 있다. 이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구적 집단 트라우마 상태에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발생하고 있는 ‘무력감과 불안함’의 자기장이 잘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나에게 피부로 와닿지 않는다고 해서 나에게 무력감과 불안함의 자기장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방사선 같은 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잘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방사선에 조금만 노출되면 우리는 머지 않아 아주 심각한 병에 걸리게 될 위험이 높다. 마찬가지다. 지구적 집단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요즘, 무력감과 불안함 때문에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될지, 너무도 위태위태하다.

 

6. 상황은 좀 다르지만, 고린도교회는 아주 큰 혼란 가운데 있었다. “내 형제들아 클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고전 1:11).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복음을 전해서 교회를 세웠는데, 그곳에서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왔을 때, 사도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파겠는가.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본인들의 상태가 어떤지를 적나라하게 말해주어야 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1).

 

7.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은 스스로를 착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앙이 ‘신령하다’고 생각했다. 즉, 그들은 스스로 ‘나는 믿음이 좋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며, 이렇게 뽐냈다. “나는 바울에게 속한 사람이야.” “나는 아볼로에게서 신앙을 배웠어!” “나는 게바의 제자야!” “무슨 소리들 하고 있어 정말. 나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구!” 이렇게 스스로 자신의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는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에게 바울은 직격탄을 날린다. “너희는 육신에 속한 자야! 너희들의 신앙은 그냥 어린 아이들의 신앙 수준 밖에 안 돼!”

 

8.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우리도 우리의 신앙 상태를 엄청 착각하면서 살고, 우리도 우리의 정신 상태를 엄청 착각하면서 산다. “착각하지 맙시다!” (소확행, 어쩔TV, 돼지런하다)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근자감’이라는 말이 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는 뜻이다. ‘나는 괜찮아. 나는 괜찮을거야.’ 우리는 이렇게 근자감을 가지고 산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가끔 근자감을 지닌 소들이 나온다. 사자가 다가오는데, 도망가지 않고 뿔을 들이대면서 사자에게 덤벼드는 소들이 있다. 대개 사자에 의해서 한 방에 제어된다. 사자가 오면 도망치는 게 상책인데, 사자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근자감’을 지닌 소는 대개 사자의 밥이 된다.)

 

9. 우리는 지금 굉장히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괜찮지 않다. 우리의 신앙도, 우리의 정신도 괜찮지 않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직격탄을 날린 것처럼, 나도 직격탄을 날려보자면, 요즘 많은 신앙인들이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한다. 유튜브를 통해서 여러 설교자들의 설교를 듣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교류가 있고, 나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것은 어느 정도 도움이 되지만, 나와 전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것은 그리 도움이 되지 못한다. 위로 받았다, 나는 신앙이 괜찮다는 착각만 불러 일으킬 뿐이다.

 

10. 우리는 괜찮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근자감’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이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주 낮은 자세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아주 기초로 돌아가는 것이다.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일 중에 하나는 아주 기초적인 일부터 안 된다는 것이다. 밥을 먹어야 하는데, 밥 먹기를 싫어 한다. 사람들과 교제를 해야 하는데, 사람 만나기를 싫어한다. 몸을 좀 써야 하는데, 몸 쓰는 것을 귀찮아 한다. 이런 기초적인 일부터 되지 않으니까, 더 중요하고 큰 일들을 하는 것은 꿈도 못 꾼다.

 

11. 고린도교회가 그랬다.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되지 않았다. 그러니 더 큰 일을 행하게 되는 것은 꿈도 못 꾸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 3:2). 그러면서 바울이 아주 중요한 말을 한다. 3장 3절이하의 말씀을 풀이해서 말하면 이런 것이다. ‘누구는 바울에게 속했다고 말하고, 누구는 아볼로에게 속했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의 믿음에는 문제가 없다고 뽐을 내지만, 서로 그렇게 시기와 분쟁을 하고 있으니, 아볼로에게 속했네, 바울에게 속했네,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바울에게 속했네, 아볼로에게 속했네,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와 아볼로가 행한 것을 그대로 배우라. 우리는 그저 각각 받은 은사에 따라서 봉사의 일을 한 것이고, 우리의 봉사를 통해 너희들의 믿음이 자라난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을 자라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12. 여기서 우리들에게 실제적으로 중요한 말씀은 고린도전서 3장 5절이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아볼로와 바울은 사역자였다. 사역자(minister)는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몸을 쓰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믿음을 갖게 된 것은 아볼로와 바울이 사역을 했기 때문이다. 봉사를 했기 때문이다. 몸을 썼기 때문이다. 사역은, 봉사는, 몸을 쓰는 일은 믿음을 일으킨다. 믿음은 사역으로, 봉사로, 몸으로 일으키는 것이다.

 

13. ‘일으킨다’라는 말을 좀 더 풀이하면 세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1) 믿음이 생기게 한다 (없던 것이 있게 됨)

2) 믿음이 자라게 한다 (있는 것이 더 풍성)

3) 믿음이 다시 서게 한다 (죽었던 것이 다시 살아난다)

 

14. 몸(사역, 봉사)을 써야, 믿음이 생긴다. 몸을 써야 믿음이 자란다. 몸을 써야 시들했던 믿음이 다시 선다. 신앙이 괜찮지 않은 이 시대에 우리는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몸을 써야 한다. 몸을 써서 예배당에 오는 것을 해야 한다. 몸을 써서 기도하는 것을 해야 한다. 몸을 써서 성경을 읽는 일을 해야 한다. 몸을 써서 어떤 봉사라도 한 가지 해야 한다. 일례로, 유튜브로 여러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일은 아주 손 쉽다. 그냥 틀어 놓고 듣기만 하면 되니까. 그러나, 성경을 펴고 읽는 일은 쉽지 않다. 좀 더 적극적으로 몸을 써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몸을 쓰지 않으면, 믿음이 생기거나, 자라거나, 다시 서지 않는다. 몸을 쓰지 않고 하는 일은 그저 착각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몸을 쓰지 않고 운동을 해보라. 그러면 나는 착각할 것이다. 나는 건강해. 그런데 정말 그런가?

 

15. 교회 일은 아주 작은 것도 크고 거룩한 일이다. 하다못해, 주보를 접는 일, 주보를 나누어 주는 일도 크고 거룩한 일이다. 출애굽기 성막 이야기를 보면, 아무나 주의 일을 할 수 없었다. 택하심을 받은 사람만 할 수 있었다. 나는 주일 준비를 하면서 방송 장비를 셋업하고, 헌금함을 옮겨 놓으면서 출애굽기의 성막 이야기를 늘 떠올린다. 그러면, 카메라 삼각대를 설치하는 일, 강대상을 옮기는 일, 마이크를 설치하는 일이 정말 다르게 다가온다.

 

16. 사랑하는 사람의 말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유언처럼 들리는 법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것은 아무리 작은 물건이라도 유품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 받았다고, 나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고, 그렇게 정체성을 가진다면, 교회에서 하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그것이 유언처럼, 유품처럼 들리고 느껴질 것이다. 그게 믿음 아닌가?

 

17. 괜찮지 않은 시대에, 우리는 거창한 일을 할 수 없다. 괜찮지 않은 시대에, 우리가 우리의 신앙, 그리고 우리의 삶을 잃지 않고 건강하게 지키려면, 아주 작은 것부터 몸으로 하는 게 중요하다. 사역, 봉사, 이런 거창한 말 말고, 그냥 몸으로 하는 일이 중요하다. 와서 주보라도 접으라. 와서 주보라도 나누어 주라. 와서 교회 마당에 흩어져 있는 쓰레기라도 주우라. 와서 미디어팀 장비 설치하는 것이라도 거둘라. 와서 부엌 냉장고 정리라도 하라. 와서 친교실에 식탁 의자라도 설치하라. 일찍 와서 오는 사람들에게 반갑게 인사라도 하라. 우리의 사역이 믿음을 일으킨다. 몸을 움직이는 것. 몸으로 뭔가라도, 아주 조그마한 것이라도 하는 것. 그것이 이 괜찮지 않은 시대에 나를 살리고, 이웃을 살린다.

Posted by 장준식

[기후교회로 가는 길]

 

9. 기후위기와 희망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살았다.” 미국 원주민 크로우 부족의 위대한 추장 플렌티 쿠즈(Plenty Coups)의 말입니다. 미국 정부의 강압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의 삶의 방식대로 살지 못하고 인디언 보호 구역으로 들어가 산 지 30년이 지난 뒤, 추장 플렌티 쿠즈는 이처럼 슬픈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슬픈 삶은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살 때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왜 기후변화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그 이유를 가장 잘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기후변화로 인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미 팬데믹으로 인하여 우리는 그렇게 산 경험을 했습니다. 모든 것이 멈춘 순간의 그 당혹감, 이해 못하는 삶을 살 때, 인생은 무의미해집니다. 생명력이 없어집니다. 이것은 정말 슬픈 일이고, 최악의 인생입니다.

 

기후변화에 맞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짐 안탈 목사는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이런 모든 사실들을 알고도 여전히 희망을 지닐 수 있습니까?”(기후교회, 287쪽). 사실 누구나 그렇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압도하는 뭔가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나면, 희망보다 절망이 앞서는 법입니다. 가령 정치세계의 추잡함을 알고 나면 희망보다 절망이 앞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매일 들려오는 정치판의 추잡한 이야기들을 보면서 혀를 쯧쯧 차기만 할 뿐, 어떤 희망을 갖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냥 정치에 대해서 관심을 끄는 일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기후변화 문제에도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관심을 가져봤자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으니, 그냥 관심을 끄는 것입니다.

 

우리도 똑 같은 질문을 받았다고 가정해 보죠. “당신은 어떻게 이런 모든 사실들을 알고도 여전히 희망을 지닐 수 있습니까?” 『기후교회』에서 짐 안탈 목사가 제시하는 ‘기후위기의 세계에서 희망에 찬 삶을 살아가기’를 따라가 보면, 우리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우선 그는 낙관주의와 희망을 구분합니다. 낙관주의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사태가 호전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낙관주의의 문제는 그저 그러한 기대를 할 뿐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낙관주의는 비용이나 위험을 동반하지 않는, 그저 마음의 태도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낙관주의를 넘어서 희망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무엇일까요?

 

희망의 전제조건은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라고 짐 안탈은 말합니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을 성경의 용어로 다시 표현하면 ‘회개’가 아닐까 합니다. 회개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대개 회개하지 않는 자는 현실을 외면합니다. 현실을 철저하게 외면하니까 회개를 하지 못하는 것이죠. 기후변화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가장 힘든 일 중 하나는 기후변화의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현실을 직시하게 되면 두려운 감정과 우울한 감정이 몰려오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기후변화의 현실을 직시하게 될 때 밀려오는 두려움과 우울함에 맞설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앙이 필요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기후변화의 현실을 직시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신앙은 두려움과 우울함을 넘어서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자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희망의 전제조건,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슬픔을 표시하기’ 입니다. “슬픔의 연기와 사랑의 불꽃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생명을 사랑하고, 어린이들을 사랑하고, 자연세계에서의 기쁨을 사랑하는 이라면 누구든지, 기후변화의 현실을 인정하는 것은 슬픔을 가져올 것이다”(기후교회, 290쪽). 기후변화의 현실을 직면하게 되었을 때, 우리의 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생명의 파괴’입니다. 과학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스(Science Advances)'에 최근 발표된 연구 결과에 따르면, 2100년까지 생물다양성이 25% 감소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슈퍼 컴퓨터로 시뮬레이션을 돌려서 얻어낸 결과인데, 탄소 배출량이 줄어들지 않으면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의 아이들은 잠자리나 코끼리, 코알라 같은 곤충이나 동물들을 보지 못하게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슬픈 현실 속에서 희망을 갖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슬픔을 표현하기’ 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위대한 지혜입니다. 월터 브루그만은 『현실, 슬픔, 희망: 세 가지 긴급한 예언자적 과제들』에서 성경의 지혜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예언서를 읽어보면, 거기에 흐르는 감정은 ‘슬픔’입니다. 특별히 예레미야서 같은 경우, 거기에는 망국의 슬픔이 깊이 베어 있습니다. 왜 예언자들은 그렇게 ‘슬픔’을 표현했을까요? 이에 대해서 월터 브루그만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멍해져서 말로 표현 못하는 정당한 슬픔의 상태에선, 내가 제안하기로는, 예언자적인 과제는 사라져버린 세계에 대한 공공의 슬픔을 장려하고 허락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내가 보여주었듯이, 이것이 장차 다가올 파괴를 기대하면서 예언자들이 한 것이다… 건강하고 새로운 대안적인 삶은 슬픔을 공유하고, 밖으로 드러내고,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그 표현된 슬픔은 폭력에 대한 대안이다. 더군다나 그런 슬픔은 잃어버린 것을 새로운 것을 위한 에너지로 전환한다… 지름길은 없다. 그런 과제는 부끄러워하지 않는 신뢰와 못 본 체하지 않는 역사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끌어안고, 정직한 말들의 포용 속에서 편히 쉬도록,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진혼곡(requiem)을 드리는 것과 같다”(기후교회, 292쪽). 

 

여기서 우리는 예언자들이 ‘공공의 슬픔을 장려했다’는 것과 그러한 슬픔의 표현이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에너지’가 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기후변화의 현실에 직면하여 그 현실이 가져올 슬픔에 대하여 공적으로 슬퍼하는 일을 장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슬픔의 공공성이라고 말해도 좋을 듯합니다. 누구에게나 공유되는 슬픔은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에너지를 모으는데 가장 큰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슬픔이 공유될 때, 우리는 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고, 그 한 마음으로 기후변화를 위한 행동을 모두 함께 실행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희망의 전제조건입니다. 희망은 낙관주의와 달리 행동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아직 그 모습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존재(하나님)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히 11:1, 공동번역성서 개정판). 기후변화의 현실을 직면한 기독교 신앙의 희망은, 지금껏 그랬던 대로 변함없이, 하나님입니다. 기후변화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로 인한 슬픔을 공적으로 표현할 때,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희망은 ‘하나님’입니다. 이 말을 이렇게 오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희망이시니 기후변화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희망이라는 말은 전혀 이런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동참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해 기후변화의 문제를 이겨낼 수 있는 좋은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대표적인 유산은 사도행전 2장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행 2:44-45). 이러한 풍경을 일시적이거나 광기로 바라보면 안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할 때만 이룰 수 있는 공동체의 삶입니다. ‘현대의 예레미야’로 불리는 환경운동가 빌 맥키븐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후변화에 대해 개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이기를 멈추는 것이다”(기후교회, 307쪽). 상품을 많이 팔아 이윤을 남기는 것을 최선의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와 상업주의는 개인주의를 부추깁니다. 우리는 여기에 너무 길들여 있어서 ‘개인이기를 멈추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할 뿐더러 잘 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우리의 생명이 선물이라는 것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안다면, 우리는 개인이기를 멈추고 좀 더 많은 자비와 관대, 돌봄과 웃음과 기쁨을 누리며, 그리고 나누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은 좋은 것입니다. 신앙은 나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구원(꿈)을 이루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후변화의 현실 앞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기후변화가 가져오는 두려움과 우울함을 넘어 희망을 말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 함께, 기후변화의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그 현실을 똑바로 마주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기후변화가 가져오는 생명의 파괴에 대해서 공적인 슬픔을 표현하고 공유하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이야기 하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삶’이 아니라 ‘충분히 이해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Posted by 장준식

[기후교회로 가는 길]

 

8. 함께 증언하기

 

"우리는 토지를 공공의 재산으로 만들어야 한다. We must make land common property." 미국의 정치경제학자 헨리 조지(Henry George)가 그의 저서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에서 주장한 사상입니다. 이것을 ‘토지공개념’이라고 부릅니다. 19세기 후반 미국과 유럽에서 유행을 이끌었던 정치경제학적인 용어입니다. 사유 재산 제도가 극에 달한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거의 통용되지 않는 개념이지만, 자본주의가 뿌리는 내려가고 있는 시점에 이러한 ‘토지공개념’이 사회적으로 인기를 끌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사실 ‘토지공개념’은 레위기에서 좀 더 강력한 형태로 제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레위기 25장 23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것임이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이것은 헨리 조지가 제시한 ‘토지공개념’보다 훨씬 더 강력한 공개념입니다. 헨리 조지가 말한 토지공개념은 정치와 경제의 차원에서 균등한 이익의 분배를 위한 조치이지만, 레위기에서 말하는 ‘토지공개념’은 땅에 대한 개념을 신학화 합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땅은 피조물의 소유가 아니라 창조물의 소유입니다. 땅과 같은 피조물로서 인간은 땅을 소유할 권리와 능력이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기후변화의 위기를 맞닥뜨린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이 땅을 마치 자기의 소유물처럼 마음대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선포가 인간의 역사를 이끌었다면 인간은 기후변화의 위기를 맞닥뜨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후변화의 문제는 도덕적인 문제를 넘어서 신앙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아니, 기후변화는 근본적으로 신앙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땅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마음대로 착취한 죄의 문제입니다. 좀 더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기후변화는 하나님에 대하여 반역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죄는 이처럼 필히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기후교회』에서 짐 안탈은 “공동체 행동이 우리를 두려움에서 해방시킨다”라고 말합니다. 사유 재산 제도가 극에 달한 현재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유 재산 제도에 대하여 회개하고 부정하는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것을 선포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일은 결코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행동’이 중요한 것이죠. 함께 증언할 때 두려움에서 벗어나 담대하게 외칠 수 있는 것이죠. 우리는 우리 시대에 횡행하는 불의한 일들에 대항하여 시민불복종 운동을 통해서 불의를 바로잡으려 했던 ‘소로, 간디, 도로시 데이, 랍비 헤쉘, 마틴 루터 킹 목사’ 등이 행한 공적인 행동을 예외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도덕적 용기를 칭송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그들의 예외적인 행동을 우리의 삶에서 저만큼 멀리 두려고 합니다. 짐 안탈은 도덕적 행동이 대세를 이루려면 시민불복종 운동 같은 예외적 행동에 참여하는 사람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일에 그리스도인이 앞장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유쾌한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큰 쓸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짐 안탈 목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파괴될 것이라는 두려움은 행동을 위한 강력하 촉매다”라고 말합니다(기후교회, 269쪽). 1960, 70년대 미국에서 환경운동의 촉매가 된 것은 레이첼 카슨이 쓴 『침묵의 봄』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에서 레이첼은 우리가 잃게 될,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전합니다.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은 사랑하는 것을 잃게 될까봐 두려워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곧 환경운동의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현재, 우리가 처한 기후위기는 레이첼이 유발한 두려움보다 훨씬 큰 두려움을 유발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때보다 덜 두려워하는 듯합니다. 그만큼 우리가 그동안 사랑하는 것들을 많이 잃어버린 탓도 있고, 요즘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는지조차 분간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탓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사는 세상은 환경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메마른 세상입니다.

 

『기후교회』에 짐 안탈이 제시하는 사고의 전환은 기후변화에 대처해야 하는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준다. 그는 빌 맥키븐이 이룬 환경운동의 변화를 소개하며, 예전에는 기후변화가 소비자 편에 끼치는 영향에 초점을 두었다면, 이제는 기후변화의 공급자에게 초점을 두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사고의 전환이다. 소비자 편에서 아무리 환경보호를 위해서 노력을 해도 기후변화의 공급자가 지구 파괴를 멈추지 않는다면 기후위기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급자에게 초점을 두는 방향은 우선 개인과 기관들에게 화석연료 회사에 투하자는 것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는 일부터 시작하도록 독려한다. 주식을 소유하는 것은 단지 돈을 벌려는 것만 아니라 그 회사의 주식을 소유함으로써 그 회사의 활동을 승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후교회, 270쪽) 기후변화를 유발하는 회사의 주식을 팔아치우거나 사지 않는 행동은 그 회사가 행하는 활동들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짐 안탈은 수탁자(fiduciary)의 책임에 대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수탁자란 다른 이의 재산을 대신 관리해 주는 개인 또는 단체를 일컫는 말이다. 증권 회사 같은 수탁자는 고객들의 투자금을 맡아 고객 대신 주식에 투자하여 이익을 극대화하여 다시 나누어 주는 일을 한다. 그러나 짐 안탈은 우리가 맞닥뜨린 기후위기를 생각할 때 이러한 일반적인 개념을 벗어 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수탁자들의 도덕은 화폐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환경을 헤치는 기업들에게 투자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시장자본주의 체제에서 자연환경은 ‘외부효과’이다. 이익 창출의 고려 대상이 아니다. 예를 들어, 석유회사들은 석유를 땅에서 추출하면서 망치는 자연환경에 대한 비용을 전혀 지불하지 않는다.

 

이러한 시장자본주의 체제에서 발생하고 있는 ‘외부효과’ 문제는 신앙의 세계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다. (보수)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외부효과’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내가 구원받으면 그만이기 때문에, 구원에 있어 외부적인 것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큰 집, 큰 자동차, 안락한 삶, 이런 것들이 구원의 증거라면, 이러한 삶을 위해서 희생되는 ‘외부효과들(자연이 망가지는 일)’은 완전 무시될 수밖에 없다. 시장자본주의 체에서 우리가 누리는 부의 혜택은 대개 외부효과들을 무시한 것에서 오는 열매들이다.

 

“오직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 것만이 토지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통제를 정당화한다”(기후교회, 278쪽). 정말 그렇다. 성경은 말한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토록 성경공부를 많이 하고 성경을 중요시하면서도 정작 토지(땅)에 대한 우리의 지배와 통제를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고, 토지를 사적으로 많이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께 복 받은 것이라 생각한다.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강력한 첫 걸음은 땅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성경적으로’ 형성하는 것이다. 땅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땅은 누구도 소유할 수 없다. 교회의 땅을 공동의 것으로 바꾸는 일을 할 때 교회의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진정성을 얻을 것이다. 교회 재산의 사유화는 교회를 무너뜨리는 최악의 길일 뿐만 아니라, “땅은 나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반란이고, 공공선을 헤치는 부도덕한 일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로서 우리는 함께 이것을 증언할 수 있는가.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3. 2. 6. 12:55

영원한 응원을 간구하는 기도

(롬 8:35-39)

 

주님,

우리 인간의 실존을 깊이 생각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작심삼일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도적적 비난이 아니라 그냥 우리의 형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응원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고통을 이겨내고,

우리가 살아내고 성숙할 수 있는 것은

따스한 응원 덕분입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시는 영원한 응원을 기억합니다.

따스하지만, 어쩔 수 없이 부족한 인간의 응원을 넘어

주님이 우리에게 해주시는 영원한 응원을 힘입어

하루하루 잘 이겨내고

하루하루 좀 더 성숙한 인간이 되어보려 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따스하게 보존하시기 위하여 보내주시는 응원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그 영원한 응원에 힘입어 우리도 따스한 응원을 건네주는

성숙한 인간이 되겠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여서

우리의 영원한 응원이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23. 2. 6. 12:53

영원한 응원

(로마서 8:35-39)

 

1. William Jefferson Clinton. 미국의 제42대 대통령, 빌 클린턴과 떼어놓을 수 없는 팝송이 있다. Rock Band 그룹, Fleetwood Mac의 ‘Don’t Stop Thinking About Tomorrow’이다. 이 곡은 클린턴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을 때 선거곡으로 사용됐던 노래다. 이후 클린턴은 중요한 전당대회를 할 때마다 이 곡을 계속해서 사용했다. 한 전당대회에서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Keep putting people first. Keep building those bridges. And don't stop thinking about tomorrow!" 그리고, 곧바로 스피커를 통해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If you wake up and don't want to smile

If it takes just a little while

Open your eyes and look at the day

You'll see things in a different way

 

Don't stop thinking about tomorrow

Don't stop, it'll soon be here

It'll be better than before

Yesterday's gone, yesterday's gone

 

Why not think about times to come

And not about the things that you've done

If your life was bad to you

Just think what tomorrow will do

 

2. Don't stop thinking about tomorrow. Don't stop, it'll soon be here. 아주 단순한 가사이지만, 진리를 담고 있다. 우리는 사는 게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내일이 온다는 것을 별로 생각하지 않고 산다. 잠시 멈추는 일은 정말 중요한데, 우리의 삶은 마치 고속도로 같아서 멈출 수 없는 것 같다. 멈추어 설 겨를을 안 주는 세상이지만, 이러한 때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예전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 같다. 신앙을 가지면 그래도 다른 이들보다 멈추어 서서 자기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더 많을 수밖에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안식일의 의미는 ‘멈춤’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이 ‘멈춤’을 잘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멈춤’이 얼마나 중요하면 하나님의 법이 되었겠는가.

 

3. 우리가 요즘 피부로 경험하고 있는 기후변화 현상도 결국 인간이 멈추지 못해서 생겨난 위기이다. 인간의 삶에 있어, 온도유지는 가장 중요하다. 신체의 에너지 중 90%는 온도유지에 쓰인다. 몸의 온도가 1-2도만 달라져도 인간은 거의 죽을 지경에 처하게 된다. 기후 위기가 닥친 원인도 온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지구 온도의 1-2도만 달라져도 엄청난 난리를 겪는다.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연인 사이에서도 온도가 조금만 달라져도 관계가 힘들어지고, 가족도 그렇고, 교회 공동체도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신체 온도, 마음의 온도, 기후 온도, 그리고 관계 온도, 사회적 온도라는 말 등을 쓴다. 그러니까, 결국 인생이란 무엇인가? 온도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인생이란 온도를 유지하고 맞춰가는 것이다.

 

4. 바울은 왜 로마교회에 편지를 써 보냈을까? 바울이 보기에 로마교회는 참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공동체 내의 온도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사회적 온도가 안 맞으니까 교회 내에 불협화음이 많았다. 강한 자들의 온도와 약한 자들의 온도가 서로 맞지 않았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냉소와 비난을 쏟아 놓았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교회 공동체에서 발생하면 안 되는, 아주 민망한 일이었다. 바울의 고민은 한 가지였다. 어떻게 하면, 로마교회 공동체의 온도를 적정 수순으로 유지시킬 수 있을까?

 

5. 그렇다면, 무엇부터 고민을 해야 할까? 공동체의 온도를 무너뜨리는 요인(원인)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다. 우리가 진지하게 진행하고 있는 ‘기후변화 프로젝트’도 마찬가지 작업을 하고 있다. 왜 기후가 이렇게 변화하여 인간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는가? 그 원인을 찾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원인(요인)을 알면, 해법을 찾기에 좀 수월한 법이니까. 물론, 원인을 알아도 해법이 묘연할 수 있고, 원인을 알고 해법을 알아도, 그것을 실제로 실행에 옮기는 게 아주 어려울 수도 있다. 사실, 기후변화 문제도 원인과 해법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게 쉬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골치가 아픈 것이다.

 

6. 로마교회의 온도를 형편없이 망가뜨린 원인은 무엇일까? 율법과 죄이다. 로마교회에서 율법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율법에 대한 태도가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 사이에 온도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강한 자들, 즉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율법과 상관없는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율법에 대해서 차가운 마음을 가졌다. 약한 자들, 즉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서부터 율법 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율법에 대하여 뜨거운 마음을 가졌다. 이렇게, 율법에 대하여, 찬 기류와 뜨거운 기류가 만나니, 거기에서 폭풍우가 몰아칠 수밖에 없었다.

 

7. 율법에 대하여 서로 다른 온도를 지닌 두 그룹을 화해시키는 바울의 해법은 무엇인가? 율법이 아닌 성령의 법, 즉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면 율법의 온도차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게 얼핏 보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쉽지 않은 이야기이다. 율법의 유령이 아직까지 교회를 떠돌고 있는데,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시대마다 윤리적 이슈가 발생했을 때, 교회는 그 문제를 놓아두고 분열을 경험했다. 현재 교회를 분열시키는 가장 큰 이슈는 동성애이다. 바울이 지금 시대에 와서 동성애 문제로 분열되고 있는 교회를 보면서 안타까워하며 편지를 쓴다면, 아마도, 동일한 해법을 제시했을 것이다.

 

8. 바울은 로마교회를 분열시키는 율법의 문제보다 좀 더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원인을 말한다. 그것은 죄이다. 죄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우리가 정말로 조심해야 하는 것은 죄를 단순히 도덕의 문제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죄를 도덕의 문제로 보면, 우리는 쉽게 사람을 정죄하고 만다. 성경에서 ‘죄’를 말할 때 도덕의 문제는 이차적인 것이다. 성경에서 ‘죄’를 말할 때 우리는 우선 존재론적 차원에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9. 죄를 도덕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과 죄를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의 차이는 이런 것이다. 우리 말에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어떻게 사유하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진다. 우리는 대개 ‘작심삼일’을 한 개인의 의지박약 정도로 해석한다. 뭔가를 결심했을 때, 하루 정도는 의욕적으로 그 일을 하다가, 한 삼일만 지나도 그 의욕은 온데간데없고 또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현상을 일컬을 때 쓰는 것에 익숙하다. 그러면서 우리는 작심삼일의 현상을 보이는 그 사람에게 비난하거나 비꼬는 말투로 이렇게 말한다. ‘내 그럴 줄 알았어. 작심삼일이지 뭐.’

 

10. 그러나, 작심삼일은 그렇게 도덕적인 차원의 해석보다 더 깊은 해석이 가능하다. 우리가 어떠한 일을 작심해서 실행하고자 할 때, 하루 이틀 정도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다가도 우리는 삼일 째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일을 계속해서 진행하기 어려운 난관에 봉착하기도 한다. 아주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한 사람이 앞으로 운동을 열심히 해보겠다고, 그래서 건강한 육체, 장난 아닌 몸매를 가져보겠다고 결심하고 운동을 시작하고 나서, 하루 이틀 다니다가, 갑자기 삼일 째 자동차 사고를 당해서 결심한 일을 이루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작심삼일은 우리가 아무리 뭔가를 잘 해보겠다고 결심해도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막히게 되는, 인간의 실존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운동을 열심히 해보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삼일만에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사람에 대해서 도덕적 비난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1. 바울은 로마교회에 바로 이러한 인간의 실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죄의 문제를 도덕적 차원에서 바라보면, 율법은 상대방을 정죄하는 도구로만 쓰일 뿐이다. 정죄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악마화시킨다는 뜻이다. 상대방이 정죄되고 악마화되면, 그 상대를 향한 폭력은 쉬워지고 정당화된다. 죄인이고 악마인 상대에게 가하는 나의 폭력은 폭력이 아니라 정의로 둔갑한다. 이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는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12. 그러나 죄의 문제를 실존의 차원에서 바라보면, 완전히 상황이 달라진다. 율법은 상대방을 정죄하는 도구로 쓰이는 게 아니라, 상대방을 보호하는 도구로 쓰인다. 상대방에게 필요한 것은 정죄가 아니라 응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로마교회를 볼 때, 강한 자들이나 약한 자들이나 서로가 서로에게 업신여김과 비난을 늘어놓았는데, 사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업신여김이나 비난이 아니라, 응원이었다. 하지만, 업신여기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응원하려면 서로에 대한 긍휼한 마음을 먼저 갖는 게 중요했다. 서로에게 긍휼한 마음을 갖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동일한 처지, 동일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인데, ‘너나 나나’ 똑같이 ‘죄에게 팔린 형편’이라는 것을 존재론적 차원에서 아는 것이다.

 

13. 7장의 이 말씀은 모두의 고백이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7:18, 19, 24). 그렇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작심삼일’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아무리 선한 일을 하려고 해도 이상하게 선한 일이 선한 결과를 낳지 못하고, 악한 결과를 가져온다. 아무리 건강해지려고 운동을 열심히 하고 좋은 음식을 먹어도, 하루아침에 닥치는 암발생을 피할 수 없다.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사건사고가 불현듯 발생해 상해를 입거나 목숨을 잃기도 한다.

 

14. 선한 마음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했는데, 결과가 좋지 못한 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아무의 잘못도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원래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탄식 밖에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비난인가? 정죄인가? 업신여김인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응원이다.

 

15.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고통을 겪는다. 고통을 겪는 일은 어쩔수없다.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오죽하면 이런 말까지 등장했겠는가.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고통을 즐길 수 있겠나. 고통은 고통일 뿐이다. 고통이 오면 괴롭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정말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놓칠 수 있다. 우리들은 흔히, ‘사람은 고통을 통해서 성숙해진다’고 말한다. 이 말은 고통을 정당화시키는 아주 위험한 말이다. 고통은 악한 것이다. 고통이 아무리 인간을 성숙시키는 도구로 쓰인다고 해도, 고통을 선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16.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 성장하지 않는다. 고통을 통해서 성장한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어떤 사람은 고통을 통해서 성장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고통을 통해서 삶을 마감하기도 한다. 이 둘의 차이가 무엇인가? 고통의 크기? 고통의 질? 고통의 종류? 그렇지 않다. 고통이 사람을 성숙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따스한 응원이 고통을 이겨내고 성숙하게 만든다. 고통이 닥쳐 왔을 때, 그 고통을 이겨내고 성숙해지느냐 아니냐는 고통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 있을 때 받는 따스한 응원에 있다.

 

17. 바울은 8장에서 인간의 탄식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탄식에 대해서도 말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총제적으로 참 어렵다. 하지만, 그렇게 넘쳐나는 탄식 가운데서도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시는 ‘영원한 응원’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탁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26절). 이 얼마나 따스한 응원인가.

 

18. 8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장 34절도 이렇게 증언한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죄가 아니라, 따스한 응원이다. 죄라고 하는 깊은 심연에 빠진 우리인데, 누가 누구를 정죄하리요! 창조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종말의 때까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따스한 응원이다.

 

19. 우리는 인간이기에 일차적으로 인간의 따스한 응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 인간의 응원도 영원하지 못하다. 좋은 마음으로 응원했어도, 그 응원이 언제 어떻게 끊어질지 모르고, 언제 어떻게 그 응원이 비난으로 바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죄에 팔린 인간의 실존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영원한 응원이 필요하다. 영원하다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응원, 우리 인간의 응원처럼 선하다가 어느새 악으로 바뀐 응원이 아니라, 변함없이 따스하고 선한 응원을 가리킨다. 그러한 응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올 수 있다. 그 영원한 응원을 목소리를 담고 있는 것이 로마서 8장 34절에서 39절의 말씀이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20. Don’t Stop Thinking About Tomorrow! 지난 날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일 있든지, 내일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말라. 이것은 희망의 메시지이다. 우리가 내일(투모로우)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있는 이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영원히 응원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응원 때문에 살고, 이 응원을 마음에 품고,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응원의 손길을 건넨다. 따스한 응원이 우리를 살린다. 영원한 응원이 우리를 살린다. 죄에 지지 말고, 따스한 응원, 영원한 응원의 힘으로 내일을 꿈꾸자.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23. 1. 31. 07:13

곤고한 실존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

(롬 7:14-25)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주님, 우리가 아무리 옷으로 가리고 화장을 해도

우리의 곤고함을 가릴 수 없습니다.

이 곤고함을 어쩌지 못해

바울처럼 절규하는 우리들을 돌보아 주옵소서.

우리는 곤고하고 비참하게 살기 위하여 이 땅 위에 온 것이 아닌데

우리의 삶은 나도 모르게,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곤고하고 비참하게 되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절망하고 낙심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절망과 낙심 가운데 살며

우리의 귀중한 생명, 삶을 낭비하지 않기를 바라시는 줄 믿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이 곤고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소서.

주여, 주님께서는 이 곤고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신 줄 믿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죄에 팔린 우리들,

그래서 죄의 노예로 살아가는 우리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주권과 자유를 허무하게 빼앗긴 우리들,

주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줄 믿습니다.

주여, 우리를 도우소서.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선한 일이

우리 안에서 완성되도록 도와주소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1. 31. 07:10

죄에 팔린 인간

(로마서 7:14-25)

 

1. 로스앤젤레스(LA)의 할리우드 거리에 가면 유명 영화인들의 손바닥을 조형 떠서 바닥에 장식해 놓은 거리가 있다. 2000년 1월, 내가 미국에 처음 여행 와서 그곳에 갔을 때 바닥에 새겨진 유명인들의 손바닥 중 가장 먼저 찾아본 것은 ‘로빈 윌리엄스(Robin Williams)’의 손바닥이었다. 1998년에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한 <패치 애덤스>를 감명 깊게 보았고, 그보다 훨씬 전인 1989년에 그가 주연한 <죽은 시인의 사회> 또한 마음에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 같은 경우는 각색을 해서 연극으로 만들어 문학의 밤에서 친구들과 공연을 하기도 했다.

 

2. <패치 애덤스>는 참 좋은 영화다. ‘패치(patch)’라는 말이 참 따뜻하다. ‘상처를 치유하다’라는 뜻을 가진 ‘patch’는 뭔가 해지고 어긋난 것을 다시 정상적으로 돌려놓는 것을 말한다. 영화 <패치 애덤스>, 주인공 애덤스는 상처받은 영혼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는 일을 한 덕에 ‘패치’라는 별명을 얻었다. 애덤스, 본인의 삶도 평탄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패치’라는 별명을 얻고 정신적인 상처까지 치료하는 좋은 의사가 되겠다고 다짐하고 의사가 되기 위해 의과대학에 입학한다. 의과대학에 입학하자 마자 그는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친구들과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해나간다. 그러다 어느 날, 정신 이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혼자 갔던 여자친구가 환자에게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한다.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던 일이 엉망이 된 순간이었다.

 

3. 우리 인간의 삶이라는 게 그런 것 같다. 아무리 좋은 마음을 가지고 선한 일을 행해도 그것이 그렇게 생각만큼 선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 같다. 요즘에는 선한 일 하는 것도 쉽지 않다. 선의를 가지고 누군가를 도와주었다가 오히려 해를 당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누군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면서도 그를 도와주기 위해 선뜻 나서지 않는다. 우리는 마음이 너무도 많이 움츠려 든 사회에 살고 있는 듯하다.

 

4. 나희덕 시인의 ‘호모 루아’라는 시를 읽었다. 고개가 끄덕여 지기도 했고, 마음이 씁쓸해 지기도 했다.

 

호모 파베르이기 전에

호모 루아, 입김을 가진 인간

 

라스코 동굴이 폐쇄된 것은

사람들이 내뿜은 입김 때문이었다고 해요

부드러운 입김 속에

얼마나 많은 미생물과 세균과 독소가 들어 있는지

거대한 석벽도 버텨낼 수 없었지요

 

오래전 모산 동굴에서 밤을 지낸 적이 있어요

우리는 하얀 입김을 피워 올리며

밤새 노래를 불렀지요

노래의 투명성을 믿던 시절이었어요

노래의 온기가 곰팡이를 피우리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몸이 투명한 동굴옆새우들이

우리가 흘린 쌀뜨물에 죽었을지 모르겠어요

 

입김을 가진 자로서 입김으로 할 수 있는 일들

허공에 대한 예의 같은 것

 

얼어붙은 손을 녹일 수도

유리창의 성에를 흘러내리게 할 수도

후욱, 촛불을 끌 수도 있지만

목숨 하나 끄는 것도 입김으로 가능해요

참을 수 없는 악취

몇 마디 말로

영혼을 만신창이로 만들 수 있지요

 

분노가 고인 침으로

쥐 80마리를 죽일 수 있다니,

신의 입김으로 지어진 존재답게 힘이 세군요

그러니 날숨을 조심하세요

입김이 닿는 순간 부패는 시작되니까요

 

* homo Ruah, ‘Ruah’는 히브리말로 ‘숨결, ‘입김’을 뜻함.

(나희덕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에서)

 

5. 왜 그럴까?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의지를 가지고 좋은 일을 해도 그 결과가 선하게 나오는 일이 드물고, 더군다나, 위의 시가 서술하고 있듯이, 우리의 입김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입김이 여러가지 악한 일을 한다. ‘영혼을 만신창이로 만들 수’도 있다고 한다. 시에서 표현하고 있는대로, 신의 입김(ruah)으로 지어진 존재인데, 우리의 입김은 왜 신처럼 선하지 못하고, 이렇게 악할까?

 

6. 로마서 7장의 마지막 부분은 매우 시적이다. 아주 강력한 용어들이 등장을 하고,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표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한 용어는 이것이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14절). 상품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팔렸도다’를 들으면, 그냥 상품을 사고 파는 정도의 이미지만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교회에 써 보낸 이 편지에서 그가 사용하고 있는 ‘팔렸도다’의 용어는 ‘노예를 사고 파는 것’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죄에게 노예로 팔렸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7. 현대인들은 대체적으로 노예에 대한 경험이 없다보니, 노예가 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별 감흥이 없다. 노예는 단순히 다른 존재에게 속해서 그가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노예는 주권과 자유를 박탈당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노예가 된다는 것은 고된 노동을 하게 된다는 뜻 이전에,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주권과 자유를 박탈당한다는 뜻이다. 이게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우리는 잘 느끼지 못한다.

 

8. 요즘 사람들이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들다고 아우성 치는가?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어서 별로 불편할 게 없어 보이는 세상이지만, 사람들은 못살겠다고 아우성 친다. 아우성 치다 스스로 목숨을 놓아버리는 사람도 부지기 수로 많다. 통계를 보면, 2000년 이전과 2000년 이후의 자살률을 비교하면, 2000년 이후에 자살한 사람이 훨씬 많다. 삶은 더 풍요로워진 것 같은데, 왜 사람들은 못살겠다고 아우성 치는가.

 

9. 예전에 한국에서 대학을 구분할 때는 서울,연,고대, 그리고 기타대로 구분했다. 그러다, 수도권 대학과 지방대로 구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식으로 대학을 구분하지 않는다. 한국의 대학은 의대와 기타대로 구분된다. 올 대학입시 통계를 보면 서울,연고대에 합격한 학생 중 2200여명이 등록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어느 대학이든, 의대에 합격한 학생들이 등록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지금 모두 ‘의사’가 되고 싶은 사회다. 왜 그럴까? 이유는 단순하다. 돈 때문이다. 현재 의사가 가장 안정된 직업이라는 생각이 편만하기 때문이다.

 

10. 그런데 실제로 의사를 하면서 행복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제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잘 하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일을 하면서 산다. 노동이 아름다우려면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잘 하는 일을 해야 하는 건데, 노동이 힘든 이유는 우리가 돈에 팔려서 우리가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 내가 별로 잘 하지 못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겉으로 보기에는 아닌 것 같으나, 우리가 얼마나 노예처럼 사는지 모른다. 우리의 주권과 자유는 별로 없고, 우리는 누군가에게 팔린 사람처럼, 그렇게 노예로 산다. 그래서 요즘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즐비하다.

 

11. 요즘 한국에서는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라는 방송이 인기를 얻었다. ‘어른’이라는 용어를 붙인 이유는 요즘 우리 시대에 ‘어른’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어른’은 무슨 의미일까? 말씀과 연관해서 설명하면, ‘노예처럼 살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 죄에 팔리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 주권과 자유를 빼앗기지 않은 사람이 아닐까? 그래서 노예처럼 사는 사람을 도와주고, 죄에 팔리려고 하는 사람을 도와주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주권과 자유를 존중해 주는 사람이 아닐까? 김장하 선생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돈을 벌었다면 결국 아프고 괴로운 사람들을 상대로 해서 번 건데, 그 소중한 돈을 함부로 쓸 수 없었다. 똥은 쌓아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뿌려 버리면 거름이 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방송 마지막에 김장하 선생은 이런 말을 한다. “아무도 칭찬하지도 말고 나무라지도 말고 그대로 봐주기만 하라고 말하고 싶다.”

 

12. 바울은 자기 자신이 죄에 팔렸다고 말한다. 그래서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일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좋은 일을 하고 싶은데, 선한 의도를 가지고 착한 일을 하고 싶은데, 이상하게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한 일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우리 모든 인간이 고백하는 바다. 우리 인간의 실존이 그렇다. 그래서 바울처럼 우리도 이런 고백을 하게 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

 

13. 이것만큼 비참하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고백이 있을까? 이것만큼 가련하지만 동시에 솔직한 고백이 있을까?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곤고하다. 뭔가 잘 살고 있는 것 같고, 뭔가 잘 하고 있는 것 같고, 뭔가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늘 부족하고 죄스럽고 행복하지 못하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에도 수도 없이 절망에 빠지고 낙심한다. “What a wretched I am. Who will rescue me from this body of death?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3. 1. 16. 18:06

따스함을 잃지 않기를 간구하는 기도

(롬 7:1-6)

 

주님,

따스함을 잃어버리기 쉬운 이 시절에

다시 한 번 선포합니다.

“나는 예수와 결혼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경험한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따스함을 빼앗아가려는

그 어떤 것들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따스함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그 절대적 사랑의 경험이

우리의 시선과 손길을 늘 따스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모든 것이 차가워지고 있는 이 시절에

예수와 결혼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따스함을 잃지 않고 있다면,

그것이 이 세상의 소망인 줄 믿습니다.

예수와 결혼한 우리들,

서로가 서로를 보듬으며 따스한 공동체를 만들게 하시고

함께 더불어 차가워지는 세상을 보듬어 안게 하옵소서.

우리의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1. 16. 18:04

나는 예수와 결혼했다

(롬 7:1-6)

 

1. 작년 말(2022년 11월)에 출간되어 세간의 관심을 끌고 우수출판콘텐츠에 선정되기도 했던 『태극기와 한국교회』를 읽었다. 민주주의가 발달되면 시민들의 시위도 늘어나는 법이다. 한국의 시위 풍경을 보면 언제부터인가 민주화 진영은 촛불을 들고 시위를 하고, 보수 진영은 태극기를 들고 시위를 한다. 보수 진영, 특히 보수 기독교 진영에서 태극기를 들고 시위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국가 상징인 태극기와 기독교 보수 진영은 무슨 연관을 지니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래서 저자는 국가상징인 태극기와 기독교의 관계사를 연구해서 그 결과를 저작물로 내어놓았다.

 

2. 역사를 돌아보는 일은 오늘의 문제가 왜 발생했고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 꼭 필요하다. 역사는 과거를 공부하는 일이지만 과거에 머무는 게 아니라 미래를 열어젖히는 일이다.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은 점점 답답해져 가고 있다. 현실이 감옥이나 지옥처럼 느껴지면 인간은 병리적 현상을 나타낸다. 사는 것을 못 견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나 자신에게 자해하는 일을 넘어 상대방에게도 해를 끼치는 일이 급격히 늘어난다. 즉 혐오와 폭력이 늘어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에 따스함이 줄어든다. 급격히 모든 게 서늘해진다.

 

3. 서늘한 사회는 누구에게나 고통이다. 인간은 36.5도의 체온을 유지해야 하는 것처럼 마음의 온도도 일정 온도를 유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매우 사나워진다. 그래서 인간은 신체적으로도 36.5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거의 모든 신체 에너지를 쓰는 것처럼, 마음의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모든 정신적 에너지를 쓰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인간다움이란 서로의 몸과 마음이 적정 온도를 유지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인간다움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몸과 마음의 적정 온도를 잃어버리는 것이고, 다른 이의 몸과 마음의 온도를 빼앗아버리는 것이다. 이런 사회는 슬픈 사회이다.

 

4. 한국의 근대사는 차갑다. 몸과 마음의 따스함이 없어 모든 사람들이 괴로웠다. 힘센 자들(나라와 민족)의 폭력이 난무했고, 약한 자들(나라와 민족)은 굴욕을 겪어야만 했다. 『태극기와 한국교회』에는 그러한 폭력과 굴욕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사람들에게 따스함을 안겨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태극기와 기독교였다. 국가상징으로서 태극기는 스러져가는 국가의 운명을 보듬으며 안간힘을 써서 지켜내려는 힘을 주었고, 기독교는 따스함을 잃어가는 한국인들의 마음에 스며들어 그들의 온도를 지켜주었다. 한마디로, 태극기와 기독교는 따스했다.

 

5. 이 책은 태극기와 한국교회의 관계를 다루면서 태극기와 기독교가 지녔던 따스함이 어떻게 서서히 수그러들었는지를 추적한다. 따뜻했던 태극기가 왜 따뜻함을 잃게 되었는지, 따뜻했던 기독교가 왜 따뜻함을 잃게 되었는지, 그 슬픈 역사의 기록이다. 따스함을 잃은 것은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기 마련이다. 오늘날, 따스함을 잃은 태극기와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이러한 시대착오적 행태와 구호의 현장을 지배하는 주도세력이 다름 아닌 일부 개신교 목회자들과 신자들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태극기에 대한 혐오’는 자연스럽게 ‘한국개신교에 대한 혐오’와 연동되었다… 과거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수많은 전근대와 식민지 조선인들의 가슴을 설레고 뜨겁게 했던 저 ‘십자가’와 태극기’라는 상징이, 이제는 현대의 시민사회로부터 구시대의 유물 취급을 받으며 외면당하고 있다”(379-380쪽).

 

6. 책에는 가슴 뭉클한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그 뭉클함 이면에 담긴 슬픔은 책 읽은 속도를 늦추고 잠시 멈추어 마음을 진정시키게 만든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잠시 책을 내려 놓을 수밖에 없었던 장면이 하나 있었다. 나라의 운명이 간당간당하던 1905년에 발생한 일이다. 그때 미국의 대통령 루즈벨트의 딸, 앨리스 루즈벨트가 방한한 일이 있었다. “고종황제는 일제의 국권침탈 야욕에 맞서 고군분투 중이었기에 미국 대통령 딸의 방한 소식에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앨리스 루즈벨트를 국빈급으로 환대했다”(310쪽).

 

7. 고종황제와 한국관료들은 앨리스 루즈벨트를 국빈대접했지만, 그녀의 행동은 매우 무례했다. “앨리스는 방한 기간 내내 오만하고 무례하며 방종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고종을 만나는 시간, 말 위에서 승마복과 장화를 신고 시가를 피우며 나타났다. 대한제국의 황실 격식과 의전에도 장난스럽게 대응했다. 마침내 명성황후가 모셔진 홍릉을 방문했을 때에도 도착 후 정중히 예를 갖추기 보다는 능 앞에 설치된 석상에 올라타 기념 촬영하기에 급급했다… 그는 대한제국 정부와의 어떠한 외교적 대화에도 진지하게 임하지 않았으며 수행원들과 파티와 유람만 즐기고 일본으로 떠났다”(313-314쪽).

 

8. 얼굴이 화끈거려서 책을 더 읽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잠시 책을 내려놓고 마음을 추슬렀다. 하지만, 앨리스 루즈벨트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한국의 운명을 이미 알고 있었다. 방한하기 두 달 전 미국과 일본은 ‘가츠라-테프트 밀약’을 맺었고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서로 인정한 후였다. 그리고 방한 2주 전, 미국과 영국, 그리고 러시아가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서 일본의 한반도 지배권을 승인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한 나라의 운명을 미리 알고 있었던 앨리스 루즈벨트에게 한국은 우스운 존재였던 것이다.

 

9. 따스함을 잃으면 따스한 시선도 거두어지게 되는 법이다. 따스함을 잃어버린 한국을 향해 따스한 시선을 가질 수 없었던 앨리스 루즈벨트의 행동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따스함을 유지해야 한다. 따스함을 유지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내가 따스해야 다른 이들에게 따스한 시선을 보낼 수 있는 것이고, 따스함을 유지하고 있어야 다른 이들도 나에게 따스한 시선을 보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다움이란 이렇게 따스함을 지키는 것이다. 나의 따스함과 당신의 따스함이 공존하는 것이다.

 

10. 바울이 로마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낸 근본적인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강한 자들(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약한 자들(유대인 그리스도인) 사이의 갈등 때문에 교회가 따스함을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회적 지위를 통해서 강한 자들은 사회적 지위가 시원치 않았던 약한 자들을 업신여겼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언약적 위치, 율법을 통해서 약한 자들은 강한 자들을 판단하고 비난했다. 서로 간에 평화 없는 것만큼 따스함을 잃는 것은 없다. 그래서 바울은 이 둘 사이에 잃어가는 따스함을 회복하기 위해서 강력한 언어들을 동원하여 편지를 쓴 것이다.

 

11. 바울이 율법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는 이유는 율법의 조문에 묶여 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진보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율법 조문에 묶여 있는 것은 마치 배가 바다를 향해 힘차게 항해를 해야 하는데 항구에 밧줄로 묶여 있어 나아가지 못하는 형국과 같은 것이었다. 게다가, 구원하시는 능력인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가 한 인격(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났는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 인격에 집중하지 못하고 여전히 율법(문자)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집중하고자 했다. 율법에 매어 있어서 예수에게로 가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이러한 답답한 상황을 바울은 결혼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한다.

 

12. 7장에서 바울은 율법과 복음의 문제를 결혼에 비유해서 설명한다. 여기서 남편은 율법이고, 여인은 율법에 매인 이스라엘(유대인 그리스도인)이다. 이스라엘은 율법과 결혼한 상태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여인 이스라엘이 남편 율법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남편이 죽는 것이다. 바울 당시 때만 해도 이혼이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한 번 결혼하고 나면 정말 특별한 일이 없으면, 배우자가 죽는 경우를 제외하고서 여인이 다른 사람과 결혼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남편을 막 죽이는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13.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죽지 않는 율법에게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내가 죽는 것이다.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4절). 사실 이것은 굉장한 사건이다. 율법은 죽지 않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율법의 요구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었다. 인간이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율법에 매인 인간은 영원히 죄인으로 살 수밖에 없다. 죄인으로 사는 것만큼 인간의 마음을 차갑게 하는 일은 없다.

 

14. 이런 측면에서 예수에게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선포는 복음이 될 수밖에 없다. 바울의 표현대로, 율법에 매인 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5-6절).

 

15. 율법과 복음에 대한 바울의 비유를 다시 풀어서 설명하면 이런 것이다. 율법과 결혼했을 때 여인(인간)은 행복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 결혼생활을 끝낼 수 없었다. 율법은 결코 죽지 않을 존재였기 때문이다. 율법을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인생이 답답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주 의로운 방법으로 율법과의 결혼생활을 끝낼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그게 복음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죽지 않는 율법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서, 그리스도와 결혼하는 것이다.

 

16. 율법은 자기에게 매인 존재에게 죄의 정욕이 역사하게 하여 죄를 알게 하고 죄를 짓게 하고 그래서 결국 사망에 이르게 했다. 즉, 율법은 행복한 인생을 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결혼은 완전히 달랐다. 문자인 율법과 인격인 예수는 같을 수 없다.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지만, 인격인 예수는 사람을 사랑한다. 정죄 받는 인생과 사랑 받는 인생은 다르다. 정죄 받는 인생은 차갑지만, 사랑 받는 인생은 따스하다.

 

17. 로마서에서 바울이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든 비유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은 예수와 결혼한 사람들이다. “나는 예수와 결혼했다.” 예수와 결혼한다는 것, 결혼할 정도로 예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마음이 온통 예수의 사랑으로 뒤덮이는 것이다. 사랑으로 뒤덮인 마음은 인간냄새가 가득하고, 시선과 손길이 따스해진다. 문자인 율법이 아니라, 이제 한 인격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선포는 이런 것이다. 세상이 더 따스해졌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깊이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18. 인간은 인격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법으로 살아가거나 다스릴 수 없다. 인간은 인격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오직 사랑으로 보듬어야 하고 사랑으로 품어야 한다. 법치주의만큼 인간성을 훼손하는 것도 없다. 법이 인간 위에 있으면 인간은 불행해진다. 법은 인간 아래에서 봉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사랑이 무너지고 신뢰가 무너지면, 법만 남는 법이다. 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큼 우리 인간의 마음을 차갑게 만드는 게 어디에 있는가. 사람 사이에 법이 들어서는 순간, 그 관계는 차가워질 뿐이다.

 

19. 세상이 어려워질수록, 인간은 마음의 따스함을 잃어간다. 『태극기와 한국교회』가 보여주고 있듯이, 세상이 어려워지니까 태극기와 십자가가 온기(따스함)를 잃어갔다. 따스함을 잃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사는 게 어렵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따스함을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예수와 결혼했다”는 것을 굳게 붙드는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예수를 사랑하고 있는지, 그 사랑의 온기를 잃지 않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진 사랑의 따스함은 절대적인 것이다. 절대적인 따스함을 지닌 사람은 세상이 어떠하든지 그 따스함을 유지할 수 있다. 나는 이 어려운 시절에 마음의 따스함을 잃지 않기 위하여 다시 한 번 이 사실에 집중한다. “나는 예수와 결혼했다.”

Posted by 장준식

기후변화는 결국 정치와 경제의 문제: 전가하지 말고 스스로 감당하는 삶

 

지난 2019년부터 우리는 '기후변화' 문제를 공부하며 고민해왔습니다. 처음에는 기독교 창조론과 기후변화의 문제가 어떻게 연관되어 있고, 왜 기독교인이 기후변화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함께 공부했죠.

 

팬데믹의 긴 터널을 지나면서, 작년부터 우리는 '기후변화 프로젝트: 돌보는 사람들'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기후변화 문제를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관련된 책을 함께 열심히 읽으며 발제하고 토론하고 기도합니다.

 

기후변화의 문제를 파보면 결국 그 뒤에는 정치와 경제의 문제가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기후변화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지만, 심층적으로 들어가면 정치와 경제 체제가 기후변화 위기를 유발시킨 원인이죠. 특별히 자본주의 체제는 기후변화의 주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근대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시대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와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 아래서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체제가 결국 인류의 멸망을 가져온다면, 우리는 이 체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후변화는 결국 정치와 경제의 문제를 돌아보게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과 신학이 정치와 경제의 영역 속에서 사유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는 정치와 경제의 영역이 생명으로 그 방향을 돌리게 할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접할 기회가 별로 없어서 그렇지, 기후변화에 대한 공부를 하다 보면 깜짝 놀랍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불의하고 불평등한지를요. 그리고 우리처럼 선진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추악한지를요. 하지만 그 사실을 얼마나 모르고 사는지를요. 현재의 풍요를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우리의 추악함을 '전가(다른 곳으로 떠넘기기)'하면서 사는지를요.

 

기후변화 공부를 하면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전가(impartation)'의 교리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주님께 전가하고, 주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칭의 교리가 결국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자행되고 있는 전가의 논리(외부화/부정적인 것을 안 보이는 곳으로 떠 넘기기)를 정당화시켜주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 말입니다.

 

"자본주의는 내부의 모순을 다른 곳으로 전가하여 보이지 않게 한다. 그 전가로 인해 모순이 더욱 심각해지는 참상이 필연적으로 일어난다"(지속불가능 자본주의, 41쪽).

 

우리가 맞닥뜨린 기후변화의 위기는 자본주의의 전가 행태가 만들어낸 참상입니다. 우리가 맞닥뜨린 교회의 위기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죄의 전가'가 결국 교회의 참상을 만들어 낸 것 아니겠는가 말이죠. 자신의 모순을 자꾸 다른 곳으로 전가하여 자신의 모순을 결국 스스로 보지도 못하고 누군가에게 보이지도 않아서 결국 무너지게 되는 참상.

 

아무튼, 우리는 모든 것을 뒤집어 보아야만 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멸망' 뿐이기 때문입니다. 기후변화를 공부하면서, 선지자 예레미야를 많이 떠올리게 됩니다. 그 당시 남유다가 그냥 가면 바벨론에게 멸망당할 뿐이라는 사실(미래)을 안 예레미야는 온 힘을 다해서 외쳤습니다. 멸망의 길에서 돌아서 생명의 길로 나아가라고 말이죠.

 

그런데, 결국 남유다의 권세자들과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생명의 길로 나아가라고 외치는 예레미야를 잡아서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려 했습니다.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이 뽑힌 채 바벨론으로 끌려 갔고, 수많은 고관들과 백성들이 결박당한 채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게다가 예루살렘 성전과 도시는 파괴되었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지도 상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기후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며 행동을 촉구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지켜내기 위해서 입니다. 삶의 자리가 사라졌는데, 어떻게 우리가 좋아하고 사랑하던 일들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겠습니다. 멸망한 자에게 무슨 예배가 필요하며, 사랑이 필요합니까. 산 자의 하나님이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지 않습니까. 더 이상 '전가'하는 체제와 신앙은 참상을 막을 수 없습니다. 전가하지 말고, 스스로 감당해야 합니다. 남이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바라지 말고, 바로 지금 내가 감당해야 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3. 1. 11. 05:26

수세주일에 드리는 기도

(롬 6:1-14)

 

주님,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를 기념하면서

우리가 받은 세례를 기억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통하여 누구이신지를 우리에게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을 구원한 메시아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례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

우리의 인간다움을 형편없이 망가뜨리는 죄와 죽음이 같이 죽었고

세례를 받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날 때

우리의 인간다움은 죄와 죽음이 없는 상태로 가장 아름답고 순결하게 살아났습니다.

그리하여 이에 우리는 인간다운 인생,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고

우리의 인간다움을 망가뜨리는 그 어떤 죄와 사망의 세력에게도 지지 않고

그들을 몰아낼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 우리의 삶을 돌아봅니다.

우리의 삶은 인간다운 삶입니까.

우리는 인간답게 잘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그 아름다운 구원을 망가뜨리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저항하게 하시고,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온전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부어 주옵소서.

우리의 세례를 기억합니다.

우리에게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1. 11. 05:25

세례의 의미
(로마서 6:1-14)

 

1. 수세주일. 주님께서 세례 받으신 것을 기념하며,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것에 대하여 돌아보는 날이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이야기는 네 복음서 모두가 전하고 있다. 그 중에서 마태복음이 가장 상세하게 그때의 상황을 전하고 있고,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간략하게 전한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사건을 전하기 보다, 그 사건이 가지고 있은 의미가 무엇인지를 전한다. 그러니까,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은 사건을 전하는데 반해, 요한복음은 그 사건에 대한 해석을 전한다.

 

2. 세례의 행위는 같지만, 예수님의 세례와 우리의 세례 간에는 차이가 있다. 예수님의 세례는 영어로 ‘inauguration’과 ‘revelation’의 의미가 짙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성령의 임재를 말하고 있고, 더불어 하늘에서 들린 소리를 전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러니까,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것은 그가 그리스도로 등극한 것 또는 드러난 것을 의미한다. 일종의 우주적 취임식인 것이다.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로서 공식적으로 선포된 것이다. 그래서 세례 이후의 예수님의 생애를 공생애(public life)라고 부른다.

 

3. 우리는 여기서 공생애, 즉 공적인 삶에 대해서 잠시 묵상해 볼 필요가 있다. 세례 이후의 예수님의 삶이 공적인 삶인 이유는 그가 ‘보냄을 받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적인 삶(private life)에 익숙한 시대에 살다보니, 공적인 삶에 대해서 무심하거나 잘 모른다.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들은 삶 자체가 ‘공적인 삶’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4.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들이 받은 세례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받은 세례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잘 알려주고 있다. 우리가 받은 세례는 순전히 그리스도와 관련된 것이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의 의미는 우리의 운명(생명)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어준다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가 죽으면 우리도 죽는 것이고, 예수가 살면 우리도 사는 것이다.

 

5.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공적인 삶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에게 사적인 삶이란 없다. 우리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겨졌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보냄을 받은 분이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과 같이 세상으로 보내졌다. ‘보냄 받은 자’로서 우리는 공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아픔과 책임감을 느낀다. 남의 일이라고 신경을 끄고 손 놓고 있지 않는다.

 

6. 그런데 이러한 세례의 중요성에 비해 우리가 실제 신앙생활 속에서 그 의미를 되새기는 일에는 매우 소홀하다. 신앙이 좋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세례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세례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기억과 실천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례 받은 날도 기억하지 못할 때가 다반사다. 생일은 기억하는데, 세례 받은 날은 기억하지 못한다. 교회에서도 이런 문화가 잘 정착되지 못했다. 생일은 축하해 주는데, 세례 받은 날은 기억도 못할 뿐더러, 기억을 못하니까 축하도 못해준다. 교회가 회복해야 할, 그리고 새롭게 창조해야 할 문화는 세례 받은 날을 기억해서 서로가 생일을 축하해 주듯이 축하하는 문화이다.

 

7. 이러한 문화를 조성해 나가는 것이 왜 중요한지 우리는 로마서를 통해서 좀 더 들여다보려 한다. 로마서 6장은 ‘세례’에 대한 깊은 신학적 의미를 전달해고 있다. 그런데, 세례의 신학적 의미를 설명하면서 바울이 쓰는 용어들은 약간 복잡하고 어렵다. 복잡하고 어려운 것에서 더 나아가, 좀 무겁다. 세례를 ‘죽음’이라는 용어와 연관짓고, ‘죄’라는 용어와 연관짓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말과, ‘죄’라는 말을 들으면 일단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렇다 보니,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의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지친다.

 

8.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이 세례에 대하여 ‘죽음’과 ‘죄’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복잡하고 무겁게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전하려고 하는 세례의 의미는 한마디로 ‘인간다움’이다. 인간다움을 헤치는 가장 강력한 것은 ‘죽음’과 ‘죄’이다. 인간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순간은 ‘죽음’과 ‘죄’를 경험하는 순간이다. 세례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다시 살아서 ‘참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 우리 인간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죽음’과 ‘죄’와 함께 죽는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날 때(부활할 때)는 ‘죽음’과 ‘죄’가 우리와 함께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 죽음과 죄가 없는, 오롯이 풍성한 하나님의 생명만이 우리와 함께 살아난다.

 

9. 인간다움의 완성과 아름다움은 더 이상 죽음과 죄가 없는 상태이다. 그러한 인간다움의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통하여 일어났다고 하는 것이 복음이다. 세례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세례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다운 인간으로 거듭난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12-13절). 이게 무슨 말인가? 더 이상 인간답지 못한 인생, 짐승 같은 인생을 살지 말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기 때문이다.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 우리의 인간다움을 망가뜨리는 죽음과 죄가 모두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생명을 입고 인간다움의 완성을 이룬 사람이다.

 

10. 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13-15절). 이게 무슨 말인가? 이제 인간답게 살라는 뜻이다. 우리의 인격이 이제 그리스도처럼 귀한 인격이 되었고, 그리스도처럼 사랑의 능력을 지니게 되었으니, 인간답게, 인생을 아름답게 살라는 뜻이다. 우리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어버리는 순간은 죽음과 죄를 맞닥뜨리는 순간이지만, 반면에 우리 인간이 인간다움을 가장 깊이 경험하는 순간은 사랑의 순간이다. 사랑할 때, 우리는 그야말로 ‘살아있음’을 느낀다. 바울은 이것을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하고 있다. 이 문장을 한 단어로 집약해서 표현하면, ‘사랑’이다. 사랑할 때 우리의 몸은 의의 무기가 된다. 모든 것을 옳게 만든다.

 

11. 수세주일.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날을 기념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세례를 돌아본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세례를 돌아보며, 우리의 인생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지금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 인간답게 살고 있다면 정말로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혹시, 나의 삶을 돌아볼 때 별로 인간답지 못한 것 같다면, 왜 나의 인생은 이렇게 인간답지 못한지에 대해서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이렇게 인간답게 살고 있지 못한 이유가 나 자신에게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잘 파악해서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훈련을 해야 할 것이다. 또한, 내가 이렇게 인간답게 살고 있지 못한 이유가 세상에 있다면, 세상을 좀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으로 바꿀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사람들과 연대하고 나 자신을 내어놓아야 할 것이다.

 

12. 세례 받은 우리들이 ‘인간다움’에 대하여 묵상하는 일은 요즘 같이 어려운 시대에 정말 중요한 영성이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자연재해가 심해져서 정치가 보수화되고 사람들의 마음이 날로 강퍅해져 가는 시대에, 우리는 아주 쉽게 인간다움을 잃어버리고 ‘야만’의 시대로 들어설 수 있다. 실제로 우리에게 들려오는 세계의 소식은 그리 인간답지 못하다. 혐오 범죄가 늘어나고 정치와 경제의 양극화 심화로 인하여 사회의 곳곳에서 갈등이 폭발하고 있다. 세상이 추해지고 악해지고 있다. 인간다움에 대한 묵상이 충분하지 않으면 야만의 시대로 휩쓸려 들어갈 수 있는 위험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13. 세례 받았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낭만적인 일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눈을 뜨는 일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인간다움을 입고 세상을 바라보니, 이 세상이 얼마나 인간다움을 잃고 사는지, 그동안 내가 얼마나 인간다움을 잃고 살았는지를 보게 되는 일이다. 인간다움을 잃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죽을 몸을 죄가 지배하도록 내어주었고, 몸의 사욕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 그것을 몰랐던 것이지, 우리 몸의 진실이 그랬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세례를 받고 인간다움을 회복한 후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 내어주지 않고, 우리의 지체를 하나님께 드리며 의의 무기로 내어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14. 야만의 시대는 멀지 않다. 야만에 휩쓸리는 일은 매우 쉽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삶이 추해지고 악해지기 십상이다. 모두가 인간다움을 잃고 야만의 시대로 휩쓸려 가려는 이 때에, 세례를 통하여 인간다움의 옷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은 끝까지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이 세상에 희망이 있는 것이다.  세례 받은 우리들, 짐승처럼 살지 말고, 인간답게 살자. 더 나 자신을 내어주고, 더 사랑하면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을 증언하면서 살자. 인간다움은 구원의 지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