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6. 13. 06:25

2011 6 12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사도행전 2:1-21

제목: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다

 

오늘은 부활절 마지막 주일이자, 성령강림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부활의 기쁨을 마무리 하면서, 성령을 통하여 그 부활의 기쁨을 세상에 전하게 되는 시점입니다. 성령강림절은 유대인의 절기인 오순절과 겹쳐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강림절을 그냥 오순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말은 성령이 오순절에 내려오게 된 특별한 연유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왜 성령이 하필이면 오순절에 내려오셨는지, 그리고 오순절에 강림한 성령은 어떤 분인지를 살펴 볼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유대인의 3대 절기는 유월절, 칠칠절(오순절), 그리고 초막절(장막절)입니다. 유월절은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고, 보리의 첫 수확을 드리는 날입니다. 칠칠절(오순절) 10흘의 유월절 축제가 끝나고 40일 후에,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은 날을 기억하면서, 밀의 첫 수확을 하나님께 드리는 날입니다. 그리고 초막절(장막절)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지낸 것을 기념하면서 가을 수확을 끝내고 드리는 감사제입니다. 추수감사절 같은 절기입니다.

 

유월절은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출애굽 할 당시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에는 여호와의 신이 들어가지 않았고, 그 피가 발라져 있지 않은 애굽 사람들의 집에는 여호와의 신이 들어가서 장자를 모두 죽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애굽의 바로 왕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일컬어 유월절의 어린양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유대인들이 구원 받았던 것처럼, 유월절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피로 모든 사람이 구원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오순절(칠칠절)은 성령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오순절에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을 기념하면서 마침 수확한 밀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래서 오순절이 되면 예루살렘에는 빵 굽는 냄새가 진동을 했습니다. 빵을 구워 함께 나누면서 오순절의 기쁨을 나누었던 것이지요.

 

이건 여담입니다만, 초막절(장막절)은 현재까지 예수님과 상관 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초막절을 예수님의 재림과 연결시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아마도 초막절기에 재림하실 거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재림 장면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예수님의 재림 전에 일곱 천사가 일곱 양각 나팔을 부는 장면이 있습니다. 초막절의 첫날을 나팔절이라고 하는데, 민수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여 유대인의 달력 7월 초에 나팔을 불어 안식일로 정하여 쉬라고 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쓰는 태양력으로 하면 10월쯤 됩니다.

 

20년 전 다미 선교회라고 한국에서 떠들썩했던 이단이 있었는데, 이들이 주장한 예수님의 재림이 바로 10월이었습니다. 그들이 터무니 없이 그렇게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바로 제가 지금 설명 드린 것을 근거로 해서 그렇게 주장한 겁니다. 이단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평범하고 신실한 기독교 신자보다도 성경지식이 더 많습니다. 그들도 그럴진대, 우리들은 얼마나 더 열심을 내야 하겠습니까?

 

초막절과 예수님의 재림을 연관 짓는 것은 그냥 추측일 뿐입니다. 아무도 그 때를 모릅니다. 어느 때 오시는지 알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아마도 평소에는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세상 사람보다 더 못되게 살다 주님 오신다고 한 때에만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그것을 이용할 뿐입니다. 알 수 없고, 알아도 별로 유익이 되지 않는 것에 신경 쓰지 말고, 매일매일을 주님 오시는 날로 생각하고 깨어 기도하면서 사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매일매일을 주님이 오시는 날로 생각하면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종말론적인 삶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능력이 임합니다. 그렇게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이 어떻게 내리게 됐는가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사실 그날이 언제인지 제자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그저 예수님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에 모여 한마음 한 뜻으로 기도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성령이 오순절에 강림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이들이 약속을 붙들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들은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기 보다는, 그 약속이 가져다주는 유익만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원하는 때 원하는 장소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불경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건 신앙이 아니라, 욕심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특별히 샤머니즘 전통에서 형성된 문화를 가지고 있는 한국인들은 기독교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령을 샤머니즘 전통에서 이해를 합니다. 그렇다 보니, 성령을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자꾸 이해하려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귀신이 부리는 능력 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자꾸 열광주의적으로 생각합니다. 무당이 신 내리면 열광적으로 날뛰듯이, 성령을 받으면 그렇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시쳇말로 난리 뽕짝을 펴야 성령이 임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의 말씀에서도 성령을 그렇게 묘사하는 듯 합니다.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했을 때 그 모습을 본 유대인들은 그들이 술 취한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는 장면에서도 성령을 바람과 불의 혀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좀 조심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우리의 감각으로 표현하다 보니 그렇게 표현한 것이지, 그것이 성령의 실제 모습은 아닙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한 이해가 없으면 우리는 성령을 자꾸 오해하게 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분의 주권과 그분의 속성을 이해하고 아는 듯 하지만, 성령에 대해서는 우리의 인식 안에서 제한을 두고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이것이 성령이다 저것이 성령이다하고 성령을 받았네 못받았네쉽게 평가합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우리가 마음대로 인식하고 평가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곧 하나님인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우리 마음대로 인식하고 평가할 수 있습니까?

 

성령은 자유롭게 활동하시고 스스로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도 보십시오. 성령이 임했을 때 그 임재를 바라보는 시각이 모두 달랐습니다. 성령을 바람으로 보기도 하고, 불로 보기도 했습니다. 통일된 묘사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성령은 우리의 인식능력으로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놓아두고, 어떤 사람들은 방언을 인식했고, 어떤 사람들은 술 취했다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냐면, 성령이란 우리의 인식 능력으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라, 그분이 스스로 우리에게 말씀 하셔야 우리가 올바로 인식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베드로의 설교에서 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두고 이러 쿵 저러 쿵말이 많은 가운데, 성령께서는 사도 베드로의 입을 빌려서 이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스스로 말씀하십니다. 14절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성령은 이렇게 스스로 말씀하시고 자신의 역사를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을 보십시오. 우리는 너무 쉽게 우리 마음대로 성령의 역사를 해석하고 말은 만들어 냅니다. “성령이 이렇게 했어. 성령이 이렇게 역사했어. 이건 성령의 일이야. 이건 아니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영인 성령은 당신의 때에 우리에게 역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조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원한다고 오고, 우리가 원하지 않는다고 오지 않고, 그러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기도 하면서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우리에게 임하고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인 성령은 당신의 때에 임하고 역사하고, 자유로운 바람처럼 당신의 뜻대로 임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입니다. 성령을 우리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 불경한 생각, 이교도적인 생각을 버리시고, 성령께 여러분의 삶을 맡겨 보십시오. 성령께 여러분의 삶을 의탁하십시오. 바람처럼 임하시고 불처럼 임하시는 성령께서 여러분의 삶을 온통 구원으로 채워주실 겁니다.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1. 6. 8. 01:14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거나 고독하지 않다는 뜻 


어떤 분이 덕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이웃이 있습니다. 이웃이 있다는 말은 주변에 아껴주는 사람, 따르는 사람, 사모하는 사람, 감싸주는 사람, 도와주는 사람, 존경하는 사람, 협조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합니다. 방언이라든지 예언 같은 것은 덕을 세우기 위한 것이라면서요. 영어 성경에서 덕을 세우다는 말을 ‘edify’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마음을 풍요롭게 하거나, 인격을 고양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덕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거나 다른 사람의 인격을 고양시키는 역할을 하는 사람인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이런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누구든지 마음이 풍요로워지고, 인격이 고양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 땅에서 하늘 나라를 맛보았습니다. 마음이 풍요로운 인격자, 이것이 바로 덕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외롭거나 고독할 겨를이 없겠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마음이 풍요로운 인격자입니다. 스스로를 한 번 돌아보십시오. 나는 덕 있는 신앙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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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6. 6. 04:35

2011 6 5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누가복음 24:44-53, 사도행전 1:1-11

제목: 예수는 주님이시다

 

오늘은 승천주일입니다. 다음 주는 성령강림절(오순절)입니다. 승천일은 정확히 지난 목요일이었습니다. 승천일로부터 열흘 후에, 예루살렘에 모여서 기도 가운데 있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하늘로부터 내렸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는 주일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두 개의 본문을 읽었습니다. 하나는 누가복음이고 다른 하나는 사도행전입니다.

 

오늘 읽지 않은 다른 본문들(에베소서 1:15-23, 시편 47)도 모두 예수님의 승천기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문자에 집착하는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문자에 집착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올바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 문자가 담고 있는 의미를 잘 살펴야 건전하고 올바른 신앙을 지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특히나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다루고 있는 기사인데, “예수께서 하늘로 올려지셨다라는 서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온전하게 파악해야 올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요즘 드라마들은 시즌 별로 제작이 됩니다. 그래서 시즌 1, 시즌 2, 이렇게 붙여져 드라마가 제작됩니다. 시즌 별로 주제와 중점이 다릅니다. 하지만 등장하는 인물이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같습니다. 성경도 그렇게 씌어진 부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입니다. 누가라고 알려진 같은 저자가 이 두 개의 책을 썼습니다. 그러니까 요즘 말로 바꾸면, 누가복음은 시즌 1이고, 사도행전은 시즌 2입니다. 시즌 1인 누가복음은 사도행전 1 1-2절에서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즌 2인 사도행전은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성령을 제자들이 받고, 교회를 이루어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의 능력을 어떻게 펼치는지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니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따로 읽으며 안 되고, 꼭 같이 읽어야 합니다. 드라마를 볼 때, 시즌 1을 알아야 시즌 2가 재미있는 것과 동일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나타나셔서 몇 가지 당부의 말씀과 승천하시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할 것은 승천하시는 장면이 자세하게 기록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면, 승천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승천이 담고 있는 뜻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4 51절을 보십시오. 승천 장면을 간단하게 한 줄로 처리합니다.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사도행전에서도 같은 기사를 적고 있습니다. 1 9절 말씀입니다. 여기서도 승천 장면이 한 줄로 처리됩니다.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게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승천의 상황이 중요했다면
,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는 한편의 드라마 장면을 보는 것처럼 그 상황을 매우 자세하게 묘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늘로 올려졌다라는 말 한 마디로 예수님의 승천을 묘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가 날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하늘에 오르사…” 사도신경은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성령에 대하여 고백하는 신앙고백입니다. 예배 시간에 고백하는 공동신앙고백문이었기 때문에 길게 만들 수 없었고, 매우 짧게 핵심사항만 넣어서 만들었습니다. 사도신경의 3분의 2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고백인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고백 가운데는 그의 태어나심, 고난 당하심, 죽으심, 부활하심, 승천하심, 그리고 다시 오심이 고백되고 있습니다. 이 짧은 신앙고백에 오늘 우리가 주제로 삼고 나누고 있는 승천하심이 들어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의 고백은 그 진술 하나 하나가 담고 있는 뜻이 중요한데, 신앙고백은 단순히 예수라는 인물이 태어나고 고난을 겪고 죽었는데, 삼일 만에 부활해서 승천했고, 다시 올 거다, 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 하나가 담고 있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오르사라는 구절, 즉 하늘로 올려지셨다, 승천하셨다는 구절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하늘에 오르사”, 하늘로 올려지셨다라는 것은 바로 뒤에 나오는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와 쌍을 이루는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떤 분인지 특별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압니다. 그런데 예수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신격화시키는 것에는 익숙해도, 신을 인격화시키는 데는 서툰 것이 인간입니다. 다시 말해서 보이는 형상을 가지고 이것이 신이다, 라고 우상숭배하는 것은 쉬운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인간의 형상을 입었다라는 사실을 믿기는 어렵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습관과는 정반대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육신 하신 하나님인 예수가 누구인지 사람들은 파악하기 힘들어 합니다. 그렇다 보니, 세상은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인 예수를 급기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극악 무도한 일까지 저지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제자들을 비롯한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세상 사람들에게 올바로 밝혀야 할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목숨을 다해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밝히고 돌아다녔습니다.

 

그들이 예수가 누구인지 증거하기 위해서 외친 신앙고백이 바로, “예수가 하늘로 올려지셨다는 것과 예수가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라고 하는 진술입니다. 이는 예수가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하는 고백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이 십자가에 매단 예수가 실은 하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충격적인 고백인지 상상이 가십니까? 옛날에 읽은 동화책 중에 왕자와 거지라는 동화책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분들이 왕자와 거지를 알 것입니다. 왕자는 거지 행세를 하고, 거지는 왕자 행세를 한 것이죠. 그러면서 벌어지는 해프닝들을 그려놓은 동화책이 왕자와 거지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거지 행세를 하는 왕자가 어떤 나쁜 사람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신들이 죽인 사람이 거지가 아니라 왕자였다는 것이죠.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왕자를 죽인 그 사람들은 하늘이 내려 앉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될 겁니다. 왕자가 어떤 사람입니까? 왕이나 다름 없습니다. 이제 이들은 꼼짝 없이, 왕의 명령에 의해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동일한 상황입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한낱 시골 출신 뜨네기인 줄 알았는데, 그의 선동적인 사상과 연설 때문에 골머리를 썩어서 로마 당국과 유대교 지도자들은 합작해서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체제와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는데, 알고 보니 그가 하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섬뜩한 일입니다.

 

예수는 세상 사람들이 그랬듯이 저들의 손아귀에 놀아날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권세자들은 자신들이 생사박탈권을 쥐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죄 없는 예수를 십자가 위에서 처형했지만, 사실은 알고 보면 진짜 생사박탈권을 쥐고 있는 분은 그들이 죽인 예수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자들은 이 사실을 온 삶을 다해서 전했습니다. 예수가 누구인지 이들은 알고 있었기에, 자신들이 알고 있는 예수를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는 그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하나님이었다는 것이죠.

 

사도 바울을 이 상황을 에베소서 1 21절과 22절에서 이렇게 진술합니다.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모든 통치, 권세, 능력, 주권입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를 그의 발 아래 복종하게했다는 진술입니다. 바로 이겁니다. “하늘로 올리셨다”, 즉 승천은 이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리 우주선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도 주님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하늘로 올라가는 사람이 주님이 되어야 한다면, 우주비행사가 우리의 주님이 되어 이 세상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습니까? 하늘로 올라갔다고 주님이 되는 건 아닙니다.

 

반대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는 주님이기 때문에, 모든 통치와 권세, 능력 주권을 지니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러한 권세로 모든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하늘로 올리셨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승천주일을 맞아,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예수는 주님이시다!” 누가 여러분의 삶의 주인입니까? 누가, 무엇이 여러분의 삶을 다스리고 있습니까? 여러분께서는 누구의, 무엇의 발 앞에 엎드려 계십니까? 누가, 무엇이 여러분의 생사박탈권을 쥐고 있습니까? 승천주일을 맞아, 우리는 예수께서 하늘로 올려지셨다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아멘 하면서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께서 주님이시다는 것을 고백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1. 6. 2. 20:20

춘풍접인 화기만면(春風接人 和氣滿面):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태도로 사람을 접하고 화평한 기운이 얼굴에 넘쳐야 한다는 뜻


백제 유적지에서 출토된 백제의 미소는 참으로 화기만면한 얼굴입니다
. 안동하회탈도 화기만면한 얼굴입니다. 일찍이 도산 안창호 선생은 우리 국민에게 '훈훈한 마음으로 빙그레 웃는 얼굴'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는 빙그레라는 기업 이름도 있고, 백제의 미소를 형상화해서 심볼마크를 만든 LG라는 기업도 있습니다. 사람의 얼굴은 사람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마음이 기쁘지 않은데 억지로 웃는 얼굴은 부자연스럽고 금방 탄로납니다. 그러나 마음이 기쁜 얼굴은 누구에게든지 즐거움과 기쁨을 줍니다.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할 것을 주문합니다. 그 중에서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으라고 합니다. 이 복음의 신을 신은 사람의 얼굴을 어떻겠습니까? 한 마디로 빙그레일 것이고, ‘화기만면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을 믿고 사는 그리스도인의 얼굴은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화평한 기운이 넘쳐야 합니다. 복음을 들으셨습니까? 빙그레 웃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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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5. 30. 06:45

2011 5 29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벧전 3:13-22

제목: 희망을 노래하라!


구약성경도 그렇지만, 신약성경을 읽을 때 이 성경이 씌어진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꼭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이 씌어지던 당시는 현재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와 너무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는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우리 자신의 아이덴티티로 사용합니다. 개인신상조사 같은 것을 작성할 때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쓰는 것은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많은 이들이 기독교인이 되어 교회 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자랑스러워 합니다. 사회적으로도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대접까지야 못 받아도 적어도 함부로 취급 당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기독교는 세계 최대의 종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씌어지던 당시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기독교인’,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부끄러움을 당하기 쉬웠고, 박해를 당하기 쉬웠고, 놀림을 당하기 쉬웠습니다.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까? 부끄러움 당하고, 박해 당하고 놀림을 당하면서까지 어떠한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우리가 교회 다니는 것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사회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당하고 박해를 당하고 놀림을 당하고 있는데, 여기 나와서 앉아 있는 분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는 누구든지, 존경 받는 자리, 칭찬 받는 자리, 보상 받는 자리에 서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초대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자리가 세상으로부터 존경 받는 자리, 칭찬 받는 자리, 보상 받는 자리가 아니라, 부끄러움을 당하는 자리, 박해를 받는 자리, 놀림을 받는 자리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건 뭔가 혁명적인 일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뭔가 확실한 것을 붙잡고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는 이 세상의 이치와는 정반대되는 행동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세상의 원리와는 다른 삶을 살게 했을까요?

 

우선 우리는 이들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고난(Suffering)을 감당하기 위해서 어떻게 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로 이들은 미래에 시선을 집중했습니다. 그리스도인 자신들의 미래와 자신들에게 고통을 가하는 자들의 미래를 생각했습니다. 미래를 바라보는 신앙을 종말론적인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미래라는 것이 세상이 생각하는 그러한 미래가 아닙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미래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이 계속해서 흘러 도달하는 시간을 말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미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미래입니다. 단순히 시간이 흐른다고 오는 미래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신적인 시간의 미래입니다.

 

그때가 되면, 고통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켰던 그리스도인 자신들은 하나님께로부터 큰 상급을 받을 것이고, 자신들을 못살게 굴었던 박해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벌을 받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초대 기독교인들의 이러한 생각조차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현세적인 축복에만 매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 아무런 희망도 없는 자들에게는 종말론적인 신앙이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갚아주신다는 신념은 이들이 박해 상황 속에서도 신앙을 지킬 수 있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둘째, 그들은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진짜 삶인지 세상 사람들보다도 확실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 생각이 오늘 우리가 읽은 14절 말씀에 명확하게 진술되어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세상이 십자가 위에 매단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입니다. “란 나이브하게 이야기해서, “옳은 일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옳은 일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들이 복된 자들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고난 받기를 싫어합니다. 아무리 옳은 일이라 하더라도 고난을 받으면 그 옳은 일을 헌신짝처럼 던져버리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를 살리셔서 그리스도로 세우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옳은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고난을 가져다 준다고 해도 말입니다.

 

셋째, 이들이 고난을 감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자신들의 신앙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셨으니 그를 믿는 자는 무조건 고난 당해야 한다는 논리가 아닙니다. 무조건적인 고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이들이 깨달은 사실이 있다는 겁니다. 의인이 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산다고 해서, 그러한 삶 자체가 그런 삶을 사는 자에게 고통과 고난을 피하게 해주는 것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많이 듣습니다. “어떻게 예수 믿는 자들에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 예수 믿으면 잘 먹고 잘 살고 복 받아야 하는 것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예수를 믿는데, 교회를 다니는데 저렇게 흉악한 일이 일어날 수 있어?”

 

하나님의 뜻대로 의롭게 사는 삶,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삶은 축복을 보장하지만, 그렇다고 고통과 고난을 피하게 해주지는 않습니다. 거기에는 고통과 고난이 불가피하게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삶, 순종의 삶을 통해서 그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초대 기독교인들은 고난 속에서 주님이 고난 당한 것을 생각하면서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고통과 고난을 당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고난이 다가왔을 때 그것을 어떻게 다루고 극복하느냐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것을 배운 그리스도인은 결코 고통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종말론적인 신앙, 올바른 신념, 주님에게서 배운 의로운 삶의 원리 등으로 무장한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의 사방으로부터 오는 고난을 두려움 없이 극복하면서 신앙을 지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을 그 당시 세상은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주후 133년경 철학 교사 아리스테이데스가 로마 하드리안 황제에게 제출한 기독교를 위한 변증서를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그리스도가 죽임을 당하고 장사되셨습니다. 그분을 따르던 자들은 예수님이 3일 후에 살아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말합니다. 황제시여, 지금 기독교인들은 그들 마음에 새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준행하면서 죽은 자의 부활과 다가오는 세상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간음을 범하지 않으며, 거짓 증언도 일체 하지 않습니다. 재물을 모으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재산을 탐내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부모를 공경하며 이웃을 사랑합니다. 또 공정한 입장에서 판단하며,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는 우상을 섬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지 않을 일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에게 해를 끼치려 하는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고, 원수 된 자들의 유익을 위해 힘씁니다. 또 종이나 하녀, 자녀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기독교인이 되도록 설득하고, 종이나 하녀가 신앙을 받아들이고 기독교인이 되면, 아무런 차별 없이 종이었던 자를 형제라고 부릅니다. 또 그들은 신앙의 형제 가운데 누군가 감옥에 갇히거나 구세주의 이름으로 인해 핍박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고 그가 옥에서 풀려날 수 있도록 모든 힘을 기울입니다.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있고 형편도 그리 좋지 못하다면, 2-3일을 금식해서 아낀 양식을 자기보다 더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어 줍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언제라도 생명을 내어 놓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황제여,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잘 먹고 잘 살고 사회적으로 칭찬과 부러움을 사던 초대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산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소외 당하고, 부끄러움을 겪고 박해를 당하고 놀림을 당하던 초대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살았습니다.

 

희망이 없는 상황, 희망을 노래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이들은 희망 가운데, 희망을 노래하면서 살았습니다. 이들의 삶 자체는 희망 가운데 있었고, 이들의 삶 자체가 희망의 노래였습니다. 이들은 그야말로, 오늘 15절에서 권면하고 있는 것처럼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따로 구구절절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이들의 삶 자체는 이들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였습니다. 이유를 묻는 자에게 이들의 삶은 곧 대답이었습니다.

 

2천 년이 지난 지금, 기독교인의 상황은 혁명적으로 변했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마이너러티(minority)가 아닙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박해를 받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놀림을 받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의를 위해, 순종한 삶을 위해 무슨, 어떠한 고난을 당하면서 삽니까? 고난은커녕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의를 위해 살고, 순종하는 삶을 산 결과고 축복이라고 선전되고 있습니다. 무슨 의로움을 보였고, 무슨 순종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번영하고 잘 되는 것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가 되어버렸습니다.

 

고난이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 때문에 포기하는 것들에서 오는 것입니다. 요즘 기독교인들(특히 기독교가 중요 종교로 자리잡고 있는 세계에 살고 있는)이 겪는 고난은 초대 기독교인들이 겪는 고난과 매우 다릅니다.

 

1) 요즘에는 교회 봉사를 위해, 예배를 위해, 해야 할 다른 활동들을 못하게 되는 것이 고난으로 다가옵니다. 2) 그리고 요즘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고난은 다음 사실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 보상이 우리가 원하는 물질적인 보상, 더 많은 친구를 지니게 되고, 더 좋은 지위나 직장을 갖게 되는 형태로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 그리고 초대 기독교인들은 사회적으로 힘이 없었기 때문에 정의롭지 못하고 평등하지 못하는 사회를 향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정의롭지 못하고 평등하지 못한 사회를 견디는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기독교인들은 사회적인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불의와 불평등을 향해 얼마든지 목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부조리를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하는 것이 고난으로 다가옵니다.

 

도대체 요즘 시대에 기독교인들이 당하는 고난이 무엇인지,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고난이 기독교의 핵심적인 주제도 아닙니다. 다만, 이것 한 가지만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고난은 단순히 불편하고 억울하고 힘든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의 고난은 희망을 노래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이지만 고난이 아닙니다.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나 즐겁게 늘 부르네~ 이 노래를 부를 때에 큰 평화 임하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입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마음에 품은 분은 희망을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1. 5. 28. 01:43

어느 부활절 아침의 기억



부활절 아침이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교회에 도착했을 때

내가 본건

파헤쳐진 빈 무덤이 아니라

파헤쳐진 빈 에어컨이었다

 

부활의 기쁨은 온 데 간 데 없어졌고

근심이 나를 짓눌렀다

 

그러고 보니 그 마음이

예수를 찾아갔던 여인들의 마음이 아니었던가?

예수의 시신이 온전하게 보관되어 있을 거라는

기대,

혹시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는

불안,

그들의 마음은

꼭 내 마음과 같았으리라

 

부활절 아침,

도둑이 파헤친 건

에어컨이 아니라,

그들의 양심이요

이 세상의 추악함이요

나누지 못하고 사는 우리들의 모자란 마음이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빈 무덤 앞에 선 여인들에게 들렸던

천사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이미 내 마음 속에는 그보다 더 귀한

그분의 음성이 들려왔다

 

용서하여라 그들에게 복을 빌어주어라!”

 

부활의 기쁨은

파헤쳐진 빈 에어컨에 서린

죄악보다 컸다

 

에어컨은 보험처리 하면 된다


* 이 사건이 얼마나 황당한 일이었는지 상상이 안 갈 것이다.
교회 리노베이션 공사 마지막 날, 즉 에어컨 설치를 완료하는 날이었다.
그날이 바로 4월 23일 토요일(부활절 하루 전 날이었음).
그런데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그날 밤 도둑이 들어
새로 설치한 지 하루도 안 된 에어컨을 떼어 간 것이다.
부활절 아침 (24일), 나는 가슴이 떨리고 손이 떨렸다.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아서가 아니라,
파헤쳐진 빈 에어컨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활의 기쁨은 모든 것을 용서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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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5. 26. 22:25

2011 5 25일 수요 예배 설교

본문: 23:1-8

제목: 의로운 가지에 맺힌 열매가 되라

 

흐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흐름을 바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흐름을 바꾸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지금 남유다의 흐름은 멸망입니다. 이 흐름을 바꾸어 보려고 몇 몇 선지자들이 부단하게 애를 씁니다만, 이미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흐름을 바꿀 수 없습니다.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자동차가 지금 낭떠러지로 향하고 있습니다.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고 있는 자동차를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자동차 안에는 사랑하는 부인과 자녀들이 타고 있습니다.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는 자동차를 온 몸으로 막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애가 타겠습니까? 괴력 같은 힘이 나올 것입니다. 저 밑에서부터 흘러나오는 탄성을 참을 수 없습니다.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해 굴러 떨어지는 자동차를 막아보려고 죽을 힘을 다합니다. 그러나 이미 자동차는 낭떠러지로 향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역부족입니다.

 

지금 남유다의 상황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있는 남유다를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쓰십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대표적인 선지자가 이사야,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기록한 예레미야입니다. 이사야서는 66장이나 되고, 예레미야서는 52장이나 됩니다. 게다가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면서 비탄에 잠겨 애가를 따로 지었습니다. 그것이 예레미야서 다음에 나오는 예레미야 애가서입니다. 이 두 선지자가 남긴 예언서의 분량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남긴 예언서의 내용 또한 최고 수준의 예언들(문학작품)입니다.

 

그러나 이미 남유다는 자정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유능하고 강력한 선지자들이 그들 곁에 있어도 그들은 그 예언자들의 말씀을 알아들을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만큼의 비극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요즘 한국에서는 전문직 범죄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전문직은 사회 지도층을 말합니다. 지도층이란 무슨 뜻입니까? 사회적으로 모범이 되어야 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지도층, 즉 교수·변호사·의사·예술인 등 전문직 종사자가 저지르는 범죄가 크게 늘고 있고, 이들이 저지르는 폭행 방화 상해 절도 강간 등 강력 범죄도 증가 추세라고 합니다.

 

"나는 잡히지 않는다"는 지나친 확신이 전문직 종사자의 범죄가 증가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합니다. 사회지도층 인사가 지식이나 경험을 지나치게 믿고 완전범죄를 꿈꾼 채 강력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사회 전반적으로 번져 있는 도덕 불감증이 이러한 범죄를 더 부추긴다고 합니다.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대 사회의 전문직 종사자들(모든 분야의 모든 사람이 그렇지만)은 과도한 경쟁 속에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사는데, 안타까운 것은 이들이 이러한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를 올바른 방법으로 푸는 법을 몰라서 범죄의 형태 등으로 분노를 해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한 전문가(경찰대 표창원 교수)가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이는 제도권 교육이 도덕이나 인격수양 등을 다루지 못하고 경쟁 위주의 지식 전달만 강조하다 나타난 폐해다. 그리고 전문직 종사자가 사회지도층으로서의 자격을 잃어가는 증거다.”

 

이런 것이 흐름이라는 겁니다. 사실 우리도 이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도덕 불감증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마음입니다. 게다가 과도한 경쟁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들도 매한가지 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삶 가운데 갈등과 다툼만이 증폭하고, 그렇기 때문에 결국 자살 같은 극단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한국은 대통령에서부터 초등학생까지 누구나 자살을 저지르는, 자살 공화국이 되어버렸습니다.

 

남유다의 상황이 이보다 더 했다는 겁니다. 예루살렘의 죄악상은 백성들의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예식에 이르기까지 두루 퍼져 있었습니다. 근본적으로 나라의 지도자들이 타락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이후 지금까지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나그네와 과부를 압제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고 힘 없는 자들을 강탈했으며 죄 없는 사람을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우상숭배로 하나님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가 걸리지만 안으면 된다는 도덕불감증이 팽배한 것처럼, 이스라엘은 자기들 마음대로 살면서 죄를 지으면서도 성전에 나가기만 하면 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살았습니다. 이에 대해 예레미야는 이렇게 비판합니다. 예레미야서 7 4절과 9-10절 말씀을 간추려서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범죄를 보십시오. 모두 십계명에 명확하게 명기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도둑질 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거짓 맹세하지 말라).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하고 있는 겁니다. 벼락을 따라가서 맞아 죽으려는 행동과 같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러면서도 뻔뻔하게 성전에 가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라고 외친답니다.

 

이는 도덕불감증을 넘어, 하나님 불감증에 걸린 겁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종교적 현상으로 떨어지고 만 겁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여느 이방 종교처럼 죽은 신, 우상을 섬기는 겁니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우상 섬기듯이 섬기는 겁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생각하시겠지만, 이는 지금 시대도 똑같이 일어나는 매우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고 믿으십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들 사세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정말 믿는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저질러집니까? 우리야 그래도 좀 나은데, 세상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있는 세상입니까? 하나님이 없는 세상입니까? 우리는 수많은 비극을 보면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까? 하나님,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이 계시다면 저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하는, 하나님 불감증에 걸린 죄인들이 저지르는 일들 때문에 이 세상은 슬프고도 또 슬픕니다.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제가 일일이 말씀 드리지 않아도 대중매체 등을 통해서 이미 여러분들이 다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이미 기울어진 민족의 운명을 바라보면서 예레미야는 죽을 힘을 다해서 자신의 민족을 구해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지금 남유다의 상황이 어떠한지 말로 해서 못 알아 들으니까 눈에 보이게끔 퍼포먼스를 해가면서 예레미야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삶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결혼을 하지도 않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예레미야 16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독한 병으로 죽어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것이며 묻어 주지 않아 지면의 분토와 같을 것이며 칼과 기근에 망하고 그 시체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되리라.”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 봤자, 이렇게 험한 꼴만 당하게 될 텐데 무슨 가정을 꾸리겠습니까? 남유다의 상황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이렇게 될 거라는 것이죠.

 

항아리를 장로들 앞에서 깨버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합니다. 예레미야 19 11절 말씀입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 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읍을 무너뜨리니 도벳에 매장할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하리라.” 항아리가 깨지듯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남유다가 이렇게 깨진 항아리처럼 될 거라는 겁니다.

 

이렇게 처절하게 죽을 힘을 다해, 민족을 구해보려고 퍼포먼스까지 해가면서 영적인 각성을 위해 노력하건만, 이스라엘은 여전히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백성에 머물렀습니다. 예레미야서 20장에 보면,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는 예레미야를 때리고 감금하는 제사장 바스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듣기 싫다는 겁니다. 이미 죄악에 빠져 부패할 대로 부패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자를 오히려 욕하고 미워합니다. 이것이 바로 의인의 핍박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 몸으로 전하다가 결국 이렇게 수모를 겪습니다. 예레미야서 20 2절 말씀입니다.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 두었더니…”


예레미야서를 읽다 보면 기가 막힙니다
.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의문이 듭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게 세상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예레미야는 온 힘을 다했지만,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는 민족의 운명, 그 흐름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예레미야의 탓이 아닙니다. 죄악의 결과일 뿐입니다. 예레미야는 결국 동족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는데 실패했지만, 그에게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새로운 계획을 준비하고 계신 것을 알고 있었기 대문입니다. 하나님의 그 새로운 계획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5절과 6절이 핵심입니다.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누구에 관한 예언입니까?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삼은 새로운 나라를 준비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이 계획은 600년 정도 후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나사렛에서 자라고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위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의 한 의로운 가지인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며, 그가 이 세상에 가져오신 정의와 공의를 바라보며 구원 받은 백성으로 평안하게 살고 있습니다.

 

범죄가 판을 치는 세상이지만, 극도의 스트레스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세상이지만, 이러한 세상에 희망이 있는 것은 바로 의로운 가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의로운 가지에 맺힌 열매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겁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이 범했던 실수를 되풀이 하지 마십시오. 의로운 가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딱 붙어서, 의와 평화를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 위에서 평화를 누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 분만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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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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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정신성(昏定晨省) : 저녁에는 잠자리를 살피고, 아침에는 일찍이 문안을 드린다는 뜻으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도리를 이르는 말


얼마 전에 한 리서치 기관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광고문구를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 거기에서 1위를 차지한 광고문구가 보일러 광고 문구인데 여보, 아버님 댁에 보일러 놓아 드려야겠어요!”라는 문구였습니다. 이 문구가 1등을 차지한 것은 세상이 각박해졌지만 아직도 사람들 마음 속에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자리잡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도 부모님을 공경하면 장수의 축복을 누리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20:12, 5:16). 이렇게 부모 공경은 신앙의 차원으로까지 승화됩니다. 부모님을 하나님 받들듯이 우상숭배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신앙인이 꼭 갖추어야 할 윤리이고 열매라는 말씀입니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듯이, 부모 공경에 대한 마음 가짐과 실천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님을 직접 모시지 않는 자녀는 전화로라도 그 형편을 자주 살피십시오. 기억하십시오. 부모 공경은 약속 있는 계명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는 하나님께서 꼭 기억하시고 복을 베푸신다는 말씀입니다. 부모님 잘 모셔서 손해 볼 것 하나도 없습니다. 부모님 좋고, 나도 좋고, 하나님께 복도 받고, 일석삼조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5. 23. 15:56

2011 5 22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베드로전서 2:2-10

제목: 무엇이 당신 삶의 주춧돌인가?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에는 낯선 단어들이 즐비합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이 단어들이 낯설다고 느끼지 못하신 분들은 복음에 대하여 도가 텄거나, 아니면 전혀 관심이 없는 분들입니다. 신령한 젖, 보배로운 산 돌, 신령한 집, 신령한 제사, 거룩한 제사랑, 버린 돌과 모퉁잇돌,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리고 기이한 빛 등 무슨 말인지 잘 모르는 단어들이 즐비합니다. 어느 것 하나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게 뭐지?’ 하고 너무 고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듯이 위의 낯선 말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된 것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 구절은 5절입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우리더러 신령한 집이 되라고 하고,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교회 열심히 다니라는 건가요? 모두 예배를 인도하는 목회자가 되라는 말인가요? 아니면 종교적 업무를 담당하는 목회자 같은 사람만이 진정으로 신령하다는 뜻인가요? , 그런 뜻이 전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구약의 제사 제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무슨 뜻인지 파악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제사는 가장 중요한 종교 행위였습니다. 동물을 잡아서 제단에 피를 뿌리고 고기를 태워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동물을 잡아 제사를 드린 이유는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죄 때문에 죽어야 할 존재는 바로 자신인데, 동물을 대신 제물로 삼아 자기의 죄를 전가시켜 그 피를 뿌리고 살을 태워 자신의 죄를 씻었습니다.

 

이러한 구약의 제사 제도를 생각할 때 뭐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하고 하면서 이해가 잘 안 되실 겁니다. 그만큼 우리는 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라는 단어가 너무 세속화되고, 일상생활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라는 것을 생각할 때 기껏해야 도덕적 수준의 죄만을 생각할 뿐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현대인들에게 는 우스갯소리에 불과합니다. 양심을 좀 닫아버리거나, 몇 푼의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죄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그렇나 세속적인, 도적적인 수준의 죄가 아닙니다. ‘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란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세력을 가리킵니다. 죄란 생명과 관련된 중대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요소가 우리 주변에 즐비합니다. 생명을 윤택하게 하고, 생명을 살린다고 하는 것들도 알고 보면 결국 생명을 초라하게 하고 생명을 파괴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욕망, 자기열망, 그리고 교만 등도 우리의 삶을 파괴합니다. 신자유주의가 낳은 무한경쟁 사회도 우리의 삶을 파괴합니다. 무한경쟁 사회에 내던져진 우리들의 아이들의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무한경쟁 사회에 내던져진 우리의 삶이 지치고 힘듭니다.

 

성경은 증거하기를 이러한 죄의 결과, 우리는 모두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죽음이 우리 가운데 들어오게 된 겁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니라!” 구약의 제사란 바로 이렇게 죽음에 처해진 우리의 운명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죽음에서 생명으로 바꾸어 보려는 시도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목사가 되라는 뜻이 아니라, 세상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서서 생명을 중재하는 일을 합니다.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어내는 일을 하는 사람이 제사장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거룩한 일을 감당하는 거룩한 제사장이 될 수 있을까요? 자기희생적인 삶을 살면 될까요? 슈바이처나 테레사 수녀처럼 오지에 가서 남들이 가기 싫어하는 지역에 가서,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들을 하면서 살면 거룩한 제사장이 되는 걸까요? 그렇다면, 그런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만 그리스도인이고 나머지 그런 일을 하고 싶어도 능력이 안 되거나 그런 경지의 삶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건가요?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경건한 삶, 자기희생적인 삶을 사는 것은 위대한 일이지만 그것이 곧 절대적인 생명을 가져다 주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인용하고 있는 구절들을 통해서 절대적인 생명을 가져다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들어야 합니다. 요즘 성경은 6절에서 8절이 성경의 다른 부분을 인용한 것이라는 것을 잘 표시해 줍니다. 6절에서 베드로는 이사야 28 16절을 인용해서 예수 그리스를 가리켜 보배로운 모퉁잇돌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7절에서 베드로는 시편 111 22절을 인용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보배이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8절에서 베드로는 이사야서 8 14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이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돌이라고 하는 메타포(은유)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퉁잇돌, 버린 돌, 부딪치는 돌, 그리고 넘어지게 하는 돌이라고 합니다. 돌은 어디에 쓰느냐, 그리고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서 그 역할이 매우 달라집니다. 집의 기둥으로 쓰이면 든든한 주춧돌이 되는 것이고, 길 가운데 버려져 있으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다치게 하는 돌이 됩니다. 예수님을 돌이라고 생각했을 때, 믿는 자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모퉁잇돌이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불편한 돌, 쓸모 없는 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매우 불편한 부딪치는 돌,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에 불과합니다. 이런 돌은 없애는 것이 낫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로마 당국, 그리고 성난 군중들은 예수를 매우 불편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에 다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반대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는 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모퉁잇돌입니다. 영어로는 코너스톤(cornerstone)이라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영어나 한국어는 그 의미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코너스톤이나 모퉁잇돌은 왠지 구석에 놓인 별로 중요하지 않는 돌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코너스톤이나 모퉁잇돌은 주춧돌이라는 뜻입니다. 초석, 기초, 기본, 필요 불가결 한 것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초고 기본이고 기둥이라는 뜻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이 아니면 우리의 삶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바로 여기에 신앙의 신비가 있습니다. 버린 돌이 주춧돌이 되었다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귀찮아 하고 눈여겨 보지도 않고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 버린 돌이, 이 세상을 살리는 구원의 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그런 사건입니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놀라운 사건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버림 받은 사건이었습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누구도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는 버려진 사건이었습니다. 그런 사건이, 인류에게 절체절명의 구원의 사건, 생명을 가져다 주는 절대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은 신비 그 자체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 바로 부활 때문입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십자가 사건은 그냥 웃기는 해프닝에 불과했을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예수가 삼 일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습니다. 이것이 없었다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어느 한 의로운 자의 죽음에 불과했을 겁니다. 절대로 구원 사건이 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구원 사건이 된 것은 바로 부활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이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부활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부활을 기껏해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활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부활이라면 베다니에서 벌어진 죽은 나사로가 죽었다 다시 살아난 일도 부활이라고 일컬어질 터인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 다시 살아난 일과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 살아난 일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사건을 부활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만 부활 사건이라고 합니다.

 

애석하게도 부활이 무엇인지 알려 드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도 부활이 무엇인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부활의 주님을 증거할 뿐입니다.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부활이 무엇인지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만 알 수 있는 궁극적인 생명이었습니다.

 

막연하게 느껴지시나요?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시인입니다. 시인인 제가 여러분에게 시란 무엇이라고 아무리 설명한다고 해도 여러분이 시의 세계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시가 무엇인지 설명을 듣는다고 해도 당장 여러분이 시를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의 세계로 들어온 사람만 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일컬어 우리는 깨달음(각성)이라고 합니다.

 

부활은 설명으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만 알 수 있는 겁니다. 부활의 주님이 나를 찾아오시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넋 놓고 앉아 있으면 됩니까? 아닙니다. 부지런히, 부활의 주님에 대한 증언을 들어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에 대한 증언인 성경에 귀를 기울이고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를 사모하면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9절이 전해주고 있는 경지입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의 경지입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바로 이겁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원하시는 분은 계속해서 2절 말씀이 전하고 있듯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부활의 주님을 만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십시오. 세상에 나가서 생명 냄새 나는 일을 하시라는 겁니다.

 

무엇이 여러분 삶의 주춧돌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으로 여러분의 삶의 집을 지어 나가고 계십니까?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주춧돌을 삼아 신령한 집을 지어 나가십니다. 그래야 거기에 참된 생명이 깃듭니다. 그래야 거기에 생명 냄새가 납니다. 그게 살아 있는 겁니다. 그게 사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주춧돌입니다. 아멘.


* 설교를 음성으로 들으시려면 columbus.onmam.com을 이용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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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1. 5. 20. 23:42

백아절현(伯牙絶絃): 전국시대에 거문고의 명수인 백아와 종자기의 우정을 가리키는 말

백아가 거문고를 탈 때 높은 산을 표현하려고 하면 종자기는 먼저 알아듣고 산이 솟는 것이 태산 같다고 하고 강을 표현하려면 하면 큰 강물이 도도히 흐르는 듯하다고 친구의 마음을 먼저 헤아렸다고 합니다. 그 후 종자기가 병을 얻어 죽자 일세의 명인인 백아는 거문고를 부수고 줄을 끊어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고 합니다. 참 부러운 우정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우정이라고 하는 개념은 참 귀한 개념입니다. 우리는 보통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머리와 몸의 관계, 또는 주님과 종의 관계로 파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러한 것들보다 더 원하셨던 관계는 우정의 관계, 즉 친구의 관계였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친구처럼 ‘맞먹자는 뜻이 아니라, 친구가 나누는 참된 자유의 사랑처럼 그렇게 자유로운 사랑의 관계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를 줄곧 머리와 몸의 관계 그리고 주님과 종의관계로 보는데 익숙한 우리들에게 신앙의 근본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해서 꼭 필요한 메타포입니다. 우정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이십니다.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1. 5. 16. 23:42

뱀에게

 

너는 주는 것도 없이 미움을 산다

사람들에게 특별히 해악을 끼치는 것도 아닌데

너는 늘 혐오의 대상이다

마주치면 날름거리는 혀가 건방져 보여설까?

비비 꽈대는 몸뚱어리가 재수없어설까?

술 취한 듯 비틀거리며 도망치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워설까?

 

네가 악명 높다 할지라도

그래도 너는 영광스럽다

인류 최초의 인간과 함께 위대한 과업을 이루었으니

범죄의 현장에 있었던 너

타락의 현장에 있었던 너

정죄의 현장에 있었던 너

너를 고발하고 있는 거룩한 책을 아느냐?

그 거룩한 책에 등장하는 너는

영광스럽다

 

뱀아 희망을 가져라

거룩한 책에 등장한 네가

토사구팽 당하겠느냐?

속죄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땅을 기어 다니다 보면

새하늘과 새땅을 맞이하리라

그것이 너뿐만이 아니라

너를 통해 타락한 모든 인류의

희망이 아니겠느냐!

 

 

* 새로운 사무실을 얻게 되어 좋아했는데, 며칠 전, 입구 옆에 늘어진 뱀껍질을 발견했다. 뱀이 허물을 벗어놓은 것이다. 실물도 아니고, 벗어놓은 껍데기만 봐도 혐오스러운 뱀은 참으로 불쌍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생긴 것 때문인지, 거룩한 책에 등장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생각만 해도 혐오스러운 뱀도 하나님의 새창조 때에는 오명을 벗고 인류와 화평케 되리라는 기대를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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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5. 16. 05:15

2011년 5 15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행 2:42, 벧전 2:19-25, 요 10:10

제목: 그리스도 공동체의 징표

 

참 마음이 훈훈합니다. 오늘 말씀은 마음을 훈훈하게 합니다. 그리고 확실한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중요한 건 초대교회 공동체의 삶을 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겁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에게는 확실한 징표들이 나타났습니다. 뭔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전혀 다른 세상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우물 안 개구리로 살면 그것이 전부인줄 알고 그렇게 살다 죽습니다. 그러나 우물 밖의 세상을 맛본 사람은 절대로 우물 안 개구리의 삶을 살지 않습니다. 100 여 년 전 한국이 서구 문물을 받아 들이기 전 한국 사람들의 삶과 서구 문물을 받아 들인 후의 한국 사람들의 삶은 다릅니다. 사절단으로 서구 문물을 경험하고 돌아온 사람들은 그들의 경험한 새로운 세계를 사람들에게 전했고 사람들은 점점 현재의 생활 방식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경험과는 또 다른 세상을 맛본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 공동체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이 세상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세계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갈릴리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전파하신 하나님 나라를 맛보았습니다. 이들은 바로 그러한 세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경험한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나라는 분명 이 세상과는 달랐습니다. 그 나라는 이 세상과는 다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삶의 법칙들과는 다른 법칙들을 통해서 그 나라가 구현되었습니다. 그 나라가 어떻게 다른지, 바로 그 하나님 나라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떻게 다른지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사도행전의 말씀을 보십시오.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나타난 현상이 바로 우리가 읽은 42절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도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가르침은 꼭 필요한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다른 말로 하면, 증언입니다. 증언을 들어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당 신 내리듯이 어느 순간 신이 내려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단히,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한 증언, 즉 성경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서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그분에게만 관심을 둡니다. 당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주된 관심 거리입니다. 나의 관심을 온통 집중시키는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관심이 다른데 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을 고백하고 있지 않은 겁니다.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무엇이, 누가 여러분의 주된 관심거리입니까? 예수님입니까?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된 관심을 두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모여 교제하면서 떡을 뗍니다. 여기서 교제는 공동생활 또는 협력 관계를 말합니다. 한 주님을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은 서로 협력 합니다. 함께 만나 예배 드리는 것 뿐 아니라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삶을 삽니다. 떡을 떼는 것은 주님의 만찬과 다름이 없습니다. 떡을 떼면서, 즉 함께 식사를 하면서 서로가 예수님 안에서 한 식구라는 것, 그리고 한 몸이라는 것을 확인합니다.

 

또 한 가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된 관심을 두고 사는 그리스도인은 기도하기에 힘씁니다. 기도는 세상에 대하여 눈을 감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만 집중하겠다는 신앙의 고백과도 같습니다. 기도는 이 세상에 대하여는 눈을 감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눈을 뜨겠다는 신앙의 고백과도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눈을 감고 기도하면서 여전히 내 앞에 계신 예수님이 안 보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온 하나님 나라가 안 보이고, 이 세상의 것들이 보인다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주술입니다.

 

기도는 내 욕심을 채우는 주술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겠다고 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져서 생긴 것들입니다.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에게로 다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기도는 흐트러진 우리의 영혼을 모두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집중시킵니다.

 

우리가 우리 교회 자체 건물을 구입한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거기서 모여 마음 놓고 된장국 끓여 먹으려고 교회 건물을 구입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것도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대로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우리가 원하는 시간만큼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교회 문턱이 닳도록 기도하러 드나드십시오. 기도하기 좋으시라고 교회 카펫도 쿠션을 밑에 대고 깔았습니다. 무릎 끓고 기도하거나 털썩 주저 않아서 기도해도 신체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를 했습니다.

 

두 번째로 베드로 전서의 말씀을 보십시오. 읽기만해도 은혜가 되는 말씀입니다. 처음 한 구절만 다시 읽어 봅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이는 부당하게 고난 받아도 무조건 참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부당한 고난은 이미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부당한 고난에 처해질 때가 많습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고난들이 우리 삶에는 즐비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도 부당하게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이 부당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는 이 세상의 모든 부당한 것들, 즉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심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불의, 부당함, 죄를 십자가에서 심판하셨습니다. 그것들을 십자가에서 죽이셨습니다. 없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할 때 우리가 이 땅에서 받는 부당한 고난은 십자가 위에서 심판을 받게 되는 겁니다.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삶의 문제들을 모두 가지고 기도의 자리로 나오십시오. 그 문제를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면, 하나님께서 긍휼하게 여기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그 문제를 꼭 해결해 주십니다. 그 문제와 싸워 이길 힘을 주십니다. 부당한 고난 때문에 길 잃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와 그 문제를 아뢸 때 잃었던 길을 찾게 됩니다. 25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공동체는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호 가운데 삽니다. 이 세상은 우리를 멸망시키려 합니다. 우리의 것을 도둑질 하고, 우리를 죽이고, 결국 멸망시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의 무고한 희생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셔서 생명을 얻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풍성하게 살도록 하십니다.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잠시만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소모 당한다는 느낌 안 드십니까? 그러다 결국 이 세상의 삶의 끝은 죽음일 뿐입니다. 이런 세상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를 생각해 보십시오. 온전치 못한 것을 온전하게 하시고, 죽음으로 끝나는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가운데 사는 부활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부당한 고난과 처절한 죽음에 찌들어 사는 우리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새로운 삶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공동체는 아직 부당한 고난과 처절한 죽음이 판을 치는 이 세상에 사는 듯하지만,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돌봄 가운데서 부활의 삶을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관심을 가지면 이 삶이 우리에게로 옵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징표를 확실히 세상에 보이면서 살았습니다. 징표에 집착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다 보니, 그분이 가져다 주신 새창조의 세계, 하나님 나라의 삶을 이 땅 위에서 실현하게 된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우리에게는 왜 오늘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징표가 보이지 않으냐고 반문하기 전에, 나의 삶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집중되어 있는지 먼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납니다. 이 세상의 것을 심으면 이 세상의 것을 거두게 될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것을 심으면 하나님 나라의 것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무엇을 심으시겠습니까? 우리 삶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심으셔서 하나님 나라를 거두시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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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1. 5. 13. 23:50

한단지보(邯鄲之步): 연나라의 청년이 한단(邯鄲)의 걸음걸이를 배우고자 했으나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본래의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려 엎드려 기어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제 분수를 잊고 무턱대고 남을 흉내 내다가 이것저것 다 잃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자신의 상황과 능력
, 처지와 여건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리고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 없이 남이 하니까 그냥 무턱대고 따라 하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뱁새가 황새 좆아가다 가랑이 찢어지는 격입니다. 무조건 남을 따라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 그 걸음걸이를 배우려 하는지 철저한 자기 반성이 없으면 자신의 존재조차 잊어버리는 불행한 일을 겪게 됩니다.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걸음걸이를 배우는 사람들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걸음걸이를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어정쩡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걸음걸이에 대한 철저한 묵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걸음걸이를 철저하게 소화해서 내 걸음걸이로 삼아야 하는데, 무조건 그 걸음걸이를 흉내 내려고만 하니 볼썽사납기만 합니다. 흉내만 내지 말고 내 걸음걸이로 만들어 걸어야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나를 잃어버리는 일이 아니라 나를 온전히 찾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1. 5. 13. 23:49

도광양회(韜光養晦):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밝음을 준비한다'는 뜻

희망과 목표의 달성을 위해 주변부와 강자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어려울 때, 사용되는

고사성어입니다. 유비는 조조의 식객노릇을 할 때, 살아남기 위해서 몸을 낮추고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이며 생명을 부지했습니다. 등소평이 1980년대 중국을 개혁, 개방하면서 도광양회(韜光陽晦)를 대외정책의 뼈대로 삼은 일화도 유명합니다.

 

성경에서는 다윗이 사울 왕의 칼을 피해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에게 망명했을 때 고관들의 의심을 사자 살아남기 위해서 미친 척해서 위기를 모면한 일도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자신의 처한 상황이 불리하여 이런 저런 무시를 당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럴 때는 자기를 낮추면서 조용히 자신만의 힘을 키우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은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는 훈련을 꼭 해야 합니다. 공중권세 잡은 자는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싫어하고 방해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경이 넓어지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사실 우리는 공중권세 잡은 자를 이길 힘이 없습니다. 내가 스스로 빛을 드러내려고 하면 당하고 맙니다. 세상에서 빛의 사자로서 활동하는 길은 빛을 감추고 어두운 골방으로 들어가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둠 속에서 밝음을 준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빛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5. 9. 04:09

2011 5 8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24:13-35, 2:14a, 36-41

제목: 우리가 어찌할꼬?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두고 어리둥절해 있는 가운데, 예수님을 따르던 두 사람(글로바와 그의 아내)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살던 마을 이름은 엠마오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25리쯤 떨어져 있는 마을이라고 합니다. 걸어서 넉넉잡아 3시간 정도 되는 길입니다. 3시간 정도 걸으면서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예수님의 사건을 두고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한 남자가 나타나 이들과 동행을 했습니다. 이들은 이 사람이 누군지 전혀 몰랐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엠마로오 가던 두 사람이 자신과 동행하던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이들을 나무랄 수 있고 한심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오해입니다. 이들과 동행한 예수님은 이전의 예수님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알아보기 힘듭니다. 우리의 육신의 감각이 그를 감지하지 못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유령이거나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어떠한 에너지를 뿜어내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활의 몸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새창조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차원으로 설명하자면, 현재 우리가 3차원의 삶을 살고 있다면 부활의 몸은 4차원의 삶을 사는 것과 같습니다. 3차원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4차원의 삶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치 때문에 부활의 주님을 만난 엠마오로 가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겁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시점이 어느 때인가를 우리는 눈 여겨 보아야 합니다. 30절과 31절의 말씀이 그 순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우리가 행하는 어떠한 의식과 닮아 있죠? , 바로 성만찬 의식입니다. 우리가 성만찬을 성실하게 거행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만찬은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게 하는 통로입니다. 다시 말해, 부활의 주님의 만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나눌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부활의 주님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성만찬을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의 자리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그분을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 인식하게 되는, 말할 수 없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겁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우리도 그와 같이 부활의 몸을 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몸을 입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몇 마디 말로 설명하기 힘듭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온 맘과 몸으로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평생에 걸쳐 계속해서 묵상하고 또 묵상해야 합니다.

 

복음은 그것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우리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우리도 부활의 몸을 입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라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온전히 깨닫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오순절에 성령강림을 체험하고 난 후에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의 주민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베드로가 행한 설교의 핵심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베드로의 설교에서 보듯이, 설교는 예수님에 대한 증언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설교하면 제일 먼저 잔소리를 떠올립니다. 설교를 잔소리처럼 하는 설교자들 때문에 그렇게 설교의 위치가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설교는 증언이라는 것을 생각하시면서 설교를 들으시면 설교가 다르게 다가올 겁니다.

 

베드로는 요엘서와 시편의 말씀을 들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한 뒤, 36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굉장히 아이러니컬 한 진술입니다. 이스라엘은 로마 당국과 합심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를 죄인 취급했다는 겁니다. 인간의 눈에 보기에는 죄인이었던 예수가 하나님의 눈에는 의인이었고, 예수를 죽음에서 일으키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겁니다.

 

참 당황스러운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난감한 상황입니다. 우스개 소리로 바꾸어 말하면, 벌집을 잘못 건드린 형국입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신성모독자, 정치적반역자, 미치광이라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이들이 십자가의 못박은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들의 주님이요, 그들이 기다리던 그리스도(메시야)였다는 겁니다.

 

이 증언을 듣고 예루살렘에 모였던 유대인들은 마음이 찔렸다고 오늘 말씀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절망스럽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베드로가 이 날 했던 증언은 바로 지금도 이 자리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증언이 전해지고 전해져, 바로 이 시간 2011 5 8, 하나님께서 택하신 종 장준식 목사를 통해서 또 다시 증언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다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가 주님이요 그리스도라는 이 증언 앞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증언이 여러분의 귀에 들리십니까? 들리신다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반응했던 유대인들과 똑 같은 반응이 일어나야 합니다. 여러분의 입술에서는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조바심이 나야 한다는 겁니다.

 

베드로의 증언(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이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조바심을 내면서 물었을 때 베드로는 두 가지를 제안합니다. 38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베드로는 이들에게 회개세례를 받을 것을 권면합니다.

 

여기에 앉아 계신 대부분의 분들이 행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온전히 깨닫고 있는 분들은 얼마나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우선 회개는 후회가 아닙니다.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일, 후회해! 정말 죄송하게 생각해!’ 이런 것을 회개라고 하지 않습니다. 위에서 3차원, 4차원이라는 상황을 가지고 부활에 대해서 설명을 드렸듯이, 회개는 차원을 바꾸는 겁니다. 완전히 방향을 트는 것을 말합니다. 3차원의 삶을 사던 사람이 3차원의 삶을 떠나, 4차원의 삶을 살게 되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자신이 살던 3차원의 삶을 고집하면서 후회해, 미안해하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완전히 다른 삶의 국면으로 들어서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여전히 이 땅의 것을 추구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두 손에 움켜 쥔 것을 그냥 쥔 채 예수님이 이 두 손에 움켜 쥔 것을 더 견고하게 움켜쥐게 만들어 줄 거라고 기대하면서 예수님을 오히려 종부리듯이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건 회개가 아닙니다. 이건 회개를 가장한 욕망일 뿐입니다.

 

회개는 두 손에 움켜 쥔 것을 모두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르는 겁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겁니다. 내가 가던 방향으로 예수님이 따라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시는 방향으로 내가 따라가는 겁니다. 이게 회개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 바로 세례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세례 의식은 단순히 기독교의 입회 의식이 아닙니다. 세례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재현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 예수 그리스도처럼 부활체로 살아간다고 하는 선언입니다.

 

세례를 받은 자의 입에서는 이러한 고백이 흘러나와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20).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부활 공동체 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을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의 소망은 이 땅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이 복음을 들은 우리들, 이 마음 속에서 조바심이 나야 합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부활의 주님을 만나십시오. 부활의 주님과 동행하십시오. 참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서 부활의 주님을 날마다 만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