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1. 7. 05:21

2011 11 6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4:13-18

제목: 소망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제 2차 전도여행 때 세운 교회입니다. 그때는 교회를 세운다는 것이 지금과는 달랐습니다. 바울이 교회를 세우겠다고 사람들을 끌어 모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전하면 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끼리 모여 자연스럽게 교회가 형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교회는 굉장히 자생적으로 형성이 되었다는 것이죠. 다른 말로 하면 자발적이었다는 겁니다. 이 자발적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무엇인가 억지로 하면 일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 내키는 일을 하면 헌신하게 되는 것이죠. 교회는 억지로 형성되지 않습니다. 자생적으로, 자발적으로 형성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독교적인 용어로 성령의 역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의 역사에 맡기는 훈련이 꼭 되어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시작하신 일이니 성령께서 마치도록 그분께 모든 것을 내어드려야 한다는 것이죠.

 

사실 우리는 이것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교회의 일이 성령이 일이라는 것조차도 감지하지 못하고 삽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들의 못난 욕심이 성령의 일을 자꾸 방해하고, 성령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초대교회의 영성 중, 우리가 가장 놓치고 사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죠. 그들은 철저하게 성령의 역사에 자신을 맡길 줄 알았습니다.내가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성령께서 다 알아서 할거니까 내가 할 일이 없지 뭐하면서 뒤로 물러나 있지도 않았습니다. 주의 일에 최선을 다했지만, 그렇다고 성령의 역사를 거슬러 분에 넘치게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 일행이 제 2차 전도여행 때 데살로니가에 도착하여 거기에서 전도를 할 수 있는 시간은 3주 정도 밖에 안 됐었습니다. 바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전도하는데 박해와 방해가 너무 심해서 어쩔 수 없이 그곳을 떠나 베뢰아로 피신해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3. 정말 짧은 시간입니다. ‘더 머물러 있으면서 복음을 더 전하면 좋을 텐데..’, 이러한 아쉬운 마음으로 바울 일행은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큰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바울 일행의 전도사역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곳에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짧은 3주 간에 뿌려진 복음 위에 자생적으로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바울 일행은 고린도에 가서 전도사역을 펼치고 있을 때 그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씌어진 서신서가 바로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생각지도 않았는데, 성령의 역사로 인해 데살로니가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이. 3주 동안 머물면서 바울이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3주 동안 전하지 못하고 온 것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펜을 들어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로하고 그들에게 더 깊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우선 데살로니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잘 이해하고 실천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바울의 복음을 잘 받아들였다는 증거가 1 3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요약하면, 이들이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서 잘 성장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복음의 핵심을 잘 파악하고 그 안에서 잘 성장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위로와 감사와 사랑을 전하며 그 복음 위에 더 굳건하게 서 가라고 격려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단숨에 써내려 간 편지가 아닙니다. 몇 개의 편지를 엮어서 편집한 서신서입니다. 자세히 읽어보면 시간의 간격들이 보입니다. 그 중 하나가 3 6절입니다.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디모데가 데살로니가를 다시 방문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에 머물면서 바울이 디모데를 데살로니가에 다시 파송했었겠죠. 그곳에 상황을 더 살펴보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디모데는 바울의 명을 받아 데살로니가에 가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하고 그들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쁜 교제를 나누고 그들의 소식을 가슴에 담아 고린도로 되돌아 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바울에게 전합니다.

 

그런데 디모데가 가져온 소식을 보면 무엇인가가 달라졌습니다. 위에서 우리가 살펴본 1 3절의 말씀과 이제 살펴볼 3 6절의 말씀을 비교해 보면 그것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3 6절 말씀의 일부분입니다. “너희의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1 3절과 비교해 볼 때 여기에 빠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소망입니다. 이들은 아직까지 믿음과 사랑 안에서 성장해 가고 있긴 했으나, 소망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소망 없이, 믿음과 사랑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소망이 없으면 정말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미래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꾸 현세적인 축복만을 바라는 기복신앙으로 흐를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마음이 뭔가에 눌린다는 겁니다. 위로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소망을 잃어버리게 되었을까요? 바로 재림의 지연 때문입니다. 이들이 바울 일행에게 복음을 들었을 때 이들이 갖게 된 소망 중 하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그리스도가 곧 다시 오실 거라는 것이죠. 그것이 어떤 것인지 이들은 로마 황제의 귀환식에 빗대어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16절 말씀이 그 표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이는 로마 황제의 귀환식을 형상화한 표현입니다. 그렇게 한 데는 특별한 연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아는 것도 기독교를 올바로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당시 온 세계의 주님(퀴리오스)은 로마 황제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부정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온 세계의 주님(퀴리오스)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당국으로부터 박해 받았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입니다. 바울 일행의 데살로니가 전도사역을 전하고 있는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바울 일행의 전도사역을 방해하고 박해한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며 소란을 피웁니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로마 황제)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주님, 퀴리오스)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사도행전 17 7).

 

로마 황제가 전쟁에서 귀환할 때나 어딘가를 행차할 때 천지가 진동하는 광경을 연출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보기에 그렇게 천지가 진동하는 광경은 로마 황제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참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나 어울리는 광경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로마 황제의 그것에 투영해서 생각하고 묘사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 어떠한 모습으로 오실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초대교회가 로마 황제의 모습에 투영해서 묘사했던 그 모습 그대로 오실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한 모습으로 다시 오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멋진 모습으로 재림해야 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리 기다려도 오시지 않는 것이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큰 근심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소망을 잃어버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죠. 바울 일행에게 복음을 들었을 때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이 살아 있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거라는 확신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다림 속에서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한 두 명씩 죽어갔다는 겁니다. 그리고 재림의 소망 가운데 박해를 견디면서 살았는데, 이제는 더 이상 박해를 견디어낼 힘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데살로니가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가장 큰 딜레마였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서 아직까지 믿음과 사랑 안에서 신앙생활을 이어나가긴 했으나 소망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디모데에게서 그 소식을 전해들은 바울은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소망을 다시 심어 주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바울은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이렇게 소망이라는 말을 힘주어 말하고 있는 이유를 이제 좀 아셨을 줄로 믿습니다. 여기서 자는 자들이란 바로 재림의 소망 가운데 살다가 먼저 죽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이 먼저 죽은 자들을 생각하며 슬퍼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구원의 은혜가 미치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복음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큰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증거하면서 그들을 소망 가운데 다시 거하게 합니다. 우선 그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상기시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이들은 죽은 자들이 어떻게 될 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 만의 부활이 아니라,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을 담보하는 약속이라는 겁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그를 믿는 믿음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예수처럼 다시 살리실 거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바울은 죽은 자들의 부활이 지금 살아 있는 자들의 부활보다 앞 설 거라는 복음을 전합니다. 부활의 순서를 굳이 정하자면, 예수가 가장 먼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한 것이고, 그리고 죽은 자들이 그 뒤를 따를 것이고, 현재 살아 있는 자들이 부활의 몸을 마지막으로 입게 될 거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지금 살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이 예수 안에서 먼저 죽은 자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뭡니까?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하는 걱정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부활이 무엇인지잘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기우(불필요한 걱정, 쓸데 없는 걱정)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바울의 편지를 받아 든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제 소망을 회복하지 않았겠습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를 살리셔서 우리의 그리스도, 메시아가 되게 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리고 부활이 무엇인지를 더 깊이 깨달은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동안 잃었던 소망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소망이 회복될 때 일어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18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그렇습니다. ‘위로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바로 이것 아닙니까? 서로를 위로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위로할 여력이 없어서 못합니까? 나 먹고 살기 바빠서 못합니까? 마음이 강퍅해서 못합니까? 아직 믿음이 없어서 못합니까? 아닙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이 마음에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에 대한 소망입니까? 바로 부활에 대한 소망입니다. 부활에 대한 소망이 왜 없습니까? 내가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선한 일도 많이 하는 것 같아, 그래도 내 안에는 믿음도 있고 사랑도 있는 것 같은데, 왜 이 마음에 위로가 없고 왜 저 마음에 위로를 전해주지 못합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가 평생 품고 살아야 할 부활에 대하여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는 있는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가 부족하여, 우리 가운데 위로가 없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참된 위로는 결코 다른 데서 오지 않습니다. 각종 엔터테인먼트로 위로 받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서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목마르게 하는 우물물과 같다는 겁니다. 그러니 어디에 우리가 더 집중하고, 어디에 우리의 생명을 걸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부활의 소망만이 우리에게 참된 위로를 줍니다. 그 위로를 받고, 그 위로를 나누어주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그리스도인입니까?


Posted by 장준식

비극. 아무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극이 아니면 사람들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리스의 희곡 중에서도 희극보다는 비극이 더 유명하고 재미있는 것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오이디푸스 왕 같은 비극이 대표적이지요. 그렇다면 비극은 왜 연출될까요? 대부분의 경우가 욕심 때문입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이런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한국 축구대표팀이 아르헨티나에게 4 1로 패배한 사건입니다. 축구 전문가들은 이 경기의 패배 원인을 감독의 전술 실패로 꼽지만, 인간의 심리 이면을 들여다 보아야 하는 목사인 제가 보기에는 이 경기의 패배 원인은 분명 욕심에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와 한국의 축구 실력은 차이가 납니다. 아르헨티나에는 세계적인 선수가 즐비합니다. 세계 최고의 공격수 메시를 비롯해 이과인, 테베스, 베론 등, 이름만 들어도 엄지 손가락을 추켜 세우기에 부족함이 없는 선수들이 즐비합니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한국은 아르헨티나를 따라 잡을 수 없습니다. 한국 축구대표팀은 이런 점을 겸허하게 수용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변을 일으켜 보겠다고 하는 욕심이 이러한 점을 간과하게 만들었습니다.

 

더군다나 24년 전, 한국 팀의 허정무 감독과 아르헨티나 팀의 마라도나 감독의 악연이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방해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24년 전 멕시코 월드컵 당시 허정무 선수는 월드컵에 처음 출전하여 아르헨티나 대표팀 선수로 나왔던, 세계 최고의 공격수였던 마라도나 선수를 전담 마크했었습니다. 그 당시를 회고하면서 마라도나 감독은 한국 선수가 태권도 축구를 했다고 비아냥댔고, 허정무 감독은 그건 태권도가 아니라 축구였다고 심리전을 펼쳤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허정무 감독에게 오기가 발동했던 것 같습니다. 남아공 월드컵 첫 번째 경기였던 그리스 전에서 상당히 좋은 경기를 펼쳐 그리스를 이긴 선수들도 한 번 해 볼만하다고 자신감이 붙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기가 과했고, 자신감이 과했던 것이죠. 박지성 선수도 아르헨티나에게 패배라는 충격을 안겨주겠다고 말한 것을 보면 말이죠.

 

한국은 아르헨티나를 이겨보려는 욕심이 앞섰습니다. 욕심이 앞서면 상황 판단이 흐려지는 법입니다. 한국 팀의 욕심의 결과는 4 1, 대패였습니다. 비극입니다. 한국 팀은 아르헨티나 팀에게 한 수 배우겠다는 겸허한 마음으로 승패와 상관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경기에 임했어야 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경기에 임했다면 오히려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기겠다는 지나친 욕심은 대패의 비극만 안겨주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욕심은 눈을 가리고 상황 파악에 혼선을 주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비극은 사람들의 비웃음 거리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비극만 낳는 욕심, 십자가에 못박읍시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0. 31. 05:15

2011 10 30일 주일 예배 설교 (종교개혁주일)

본문: 여호수아 3:5-17

제목: 십자가는 면죄부가 아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개신교인이라면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종교개혁에 대해서 꼭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개신교는 태생부터가 개혁적입니다. 개혁이 개신교의 정체성이라면 개신교는 자기 자신을 돌아볼 때 개혁적이어야 합니다. ‘에클레시아 샘퍼 레포만다’. 이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 슬로건 중의 하나였습니다. ‘늘 개혁되는 교회’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을 통해서 종교개혁정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모세가 죽은 후 이스라엘의 새로운 영도자가 된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진입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스승에게서 리더십을 이어받은 여호수아는 하나님으로부터 강하고 담대하라는 위로의 말씀을 받고 드디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입성합니다.

 

가나안 땅으로의 입성은 요단강을 건너는 일에서 시작이 되는데, 요단강을 건너는 일은 철저하게, 늘 그랬듯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져야만 했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의 하나님의 지시는 이렇습니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들러 멥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들러 멘 제사장들이 백성들보다 앞서 요단강에 들어섭니다. 이들이 요단강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요단강은 멈추어 섭니다. 요단강에 댐을 하나 건설한 것처럼 물길이 막힙니다. 그리고 드러난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곳을 건너갑니다.

 

흐르는 요단 강물이 멈추어 선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낸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하찮은 신으로 전락시키는 불경스러운 일에 해당됩니다. 요단 강물이 멈추어 선 것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히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10절 말씀에 그것이 나와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다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실 줄을 이것으로서 너희가 알리라.”

 

사실 가나안 땅으로 입성하는 일은 룰루랄라그렇게 휘파람 불며 할 수 있는 한가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곳에 살고 있는 족속들(가나안, , 히위, 브리스, 기르가스, 아모리, 여부스: 가나안 일곱 족속이라 부름)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문을 열고 어서 옵쇼하면서 반겨주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행해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 방법이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은 희생이 불가피 합니다. 가나안 족속들과 싸우다가 목숨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전쟁을 이끌어야 하는 여호수아도 사실은 두렵고 떨렸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서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위로하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두려워 떨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는 위로의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여호수아가 이럴진대, 일반 백성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들도 두려워 떨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징표가 바로, 요단 강물이 멈추는 것이었고, 마른 땅으로 그곳을 건너는 일이었습니다.

 

두려워 떨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사건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을 지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두려움 가운데 떨고 있게 놓아두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당신의 위대한 능력을 통해서 그 두려움을 가려주시고, 그 마음에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어 주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요단강을 건너는 일은 세례를 받고(요단강 하면 세례가 떠오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땅 위에 세워진다는 것이죠. 세례 받는다고 ~’ 하면서 어딘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두 발 딛고 사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천국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례를 받고 시작된 천국의 삶을 살면서, 예수 믿기로 결단한 나를 대적하는 원수를 몰아내고, 나의 일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일을 시작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늘 넘어지기 쉽습니다.

 

오히려 내 일상에 있는 하나님의 원수와 손잡는 일이 더 쉬워 보입니다. 그러면 그들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냥 그들이 원하는 대로, 그들이 시키는 대로 살면 적어도 전쟁은 피하면서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고 이 세상을 보니 이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의롭지 못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어야 할 죽음의 일들뿐인데 어떻게 그것과 전쟁을 벌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종교개혁자들의 마음도 이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침잠해 들어가다 보니 그 당시 교회가 얼마나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면죄부였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는 돈을 주고 ‘면죄부’만 사면, 자신의 죄는 물론이고, 죽은 조상, 곧 부모님, 조부모 그리고 그 윗대의 조상 누구의 죄도 면제되어 하나님의 징벌과 심판을 면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많은 평신도들은면죄부만 사면, 회개할 필요도, 선행할 필요도 없게 되었습니다. 요즘 시대로 하면 자판기에 돈을 넣으면 음식을 만드는 고생할 필요도 없이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돈만 있으면 됩니다.

 

그래서 1517 10 31일 마르틴 루터는 ‘95개조 논제1항에서우리들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회개하라 …’( 4:17)고 선포하셨을 때, 그 말씀은 신자들의 전 생애가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참회, 회개가 되어야 한다고 게시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돈으로 값싸게 팔려 나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루터의 눈에는 면죄부가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죽이는 죽음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과 맞서 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요즘 개신교회도 면죄부만 팔지 않을 뿐이지 중세의 교회가 저지는 만행을 똑같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회개의 선포가 없는 설교를 통하여 오로지번영’, ‘일등’, ‘제일’, ‘축복’, ‘평안’, ‘큰 꿈등의 수식어를 붙인 축복만을 선포함으로써 영생을 위한 십자가의 복음을 값싸고 천한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에 합당한 회개 없이 그저 예수를 믿기만 하면 모든 일이 만사형통되는 듯이 예수의 이름을 면죄부로 팔아먹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는 면죄부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만사형통할 거라는 값싼 복음에 속지 마십시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모르핀을 맞듯이 우리의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불의, 그리고 내 안에 있는 불의와 맞서게 하는 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깊은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죄 용서가 없이는 참된 영적 평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평안하다pax’, ‘평안하다pax’고 외치면 우리의 삶에 평안이 찾아옵니까?

 

삭개오처럼 뼈를 깎는 회개의 삶 없이( 19:8), 심판 받아야 마땅한 자신의 모든 죄를 면죄부 하나로 값싸게 용서받고자 한다면 우리는 종교개혁 이전에 면죄부를 사서 값싸게 구원 받으려고 했던 그들과 다를 바 없는 파렴치한에 불과합니다.

 

십자가는 면죄부가 아닙니다. 믿음은 평안이 아니라 오히려 싸움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믿음으로 싸워 죄로 물들어 있던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몰아냈듯이, 우리가 십자가를 붙들고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이 세상과 내 안에 있는 죄(죽음의 세력)와 싸워 그러한 것들을 이 세상과 내 안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마태복음 7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부르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우리의 구원을 자판기에서 뽑아내듯이 값싸게 만들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는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지, 돈을 주고 값싸게 살 수 있는 면죄부가 아닙니다. 십자가 목걸이 걸고 다닌다고, 십일조 생활하고 주일성수 한다고 그것으로 우리의 죄값을 치르려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죄값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만이 치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상의 신앙생활이 값싼 면죄부가 되지 않게 하십시오. 우리 일상의 신앙생활이 이 세상과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죄(죽음의 세력)와 맞서 싸우는 믿음의 전투가 되게 하십시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깊은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죄용서 없이는 참된 영적 평안이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우리의 삶에서 개혁해야 하는지 깊은 감동이 오시는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죄로 물든 가나안의 일곱 족속이 어서 욥쇼~’라며 반겨주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나아갈 때 죄로 물든 우리의 삶이 어서 옵쇼~’라며 우리를 반겨주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입성한 순간 그들의 삶은 전쟁에 휩싸였듯이, 그리스도인은 예수 믿기로 결단한 순간 영적인 전쟁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건 필연입니다. 구원은 자판기에서 돈을 넣고 물건 빼듯이 그렇게 값싸게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시장에 가서 잘 차려놓은 반찬을 사다가 먹는 것과 같이 쉽게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구원은 오히려 농부가 되어 농사짓는 것과 같습니다. 농부가 열매를 맺기까지 얼마나 수고를 아끼지 않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농부의 수고가 열매를 보장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수고가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열매를 맺기 바라는 농부가 수고하는 것처럼, 구원을 받기 바라는 신앙인이 그에 합당한 수고(회개)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종교개혁주일을 맞아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꼭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면죄부처럼 여긴 것은 아닙니까? 수고 없이 열매만 바란 것은 아닙니까? 회개 없이 구원만 바란 것은 아닙니까?

 

구원 받기가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른 땅을 밟고 요단강을 건넌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서의 전쟁이 승리로 끝날 것이라는 소망에 대한 징표였듯이, 십자가는 우리가 우리의 일상에서 영적인 전쟁을 치를 때 힘겹고 어렵지만 반드시 이기게 될 거라는 징표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우리 모두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맙시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0. 25. 23:27

2011 10 23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신명기 34:1-12

제목: 무엇이 죽어야 하는가?

 

죽음의 사진 3 , 아기의 죽음, 로마시대 사람들의 죽음, 가다피의 죽음

 

지금 보여드린 죽음의 사진 3장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오늘 본문도 모세의 죽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10절이 전하고 있듯이,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절대적인 지도자였습니다. 그 이후에 등장한 그 어떤 선지자도 모세의 명성에는 필적하지 못했습니다. 이적을 많이 베풀었기로 유명한 엘리야 선지자도 모세와 같은 반열에 올라서지 못했습니다. 큰 학자요 선지자였던 이사야 같은 사람도 마찬가지 입니다. 모세 이후에 모세와 필적할만한 명성을 가진 사람은 다윗 왕 정도입니다. 그것도 그가 왕으로서 그러한 명성을 가진 것이지 선지자로서 그런 명성을 지녔던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모세처럼 다윗이 하나님을 대면한 것도 아닙니다.

 

모세만큼 인생을 파란만장하게 산 사람도 없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고비를 넘겼고 죽을 때까지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이스라엘의 둘 도 없는 영도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모세가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쓰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고생이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는 계기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 반대로 하나님께 쓰임 받다 보면 고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받는 고생 때문에 우리가 영웅심리에 사로잡힐 수는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받은 고생이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모세의 삶을 통해서 그것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모세의 궁극적인 사명이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그들을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면서 모세는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겼고,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세의 수고와 고생이 하나님 앞에서 가 되지 못했습니다. 만약 모세의 수고와 고생이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되었다면, 모세는 그것을 빌미로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요구했을 겁니다. “하나님, 내가 이렇게 고생하고 수고했는데 그것을 봐서라도 나를 가나안 땅에 드리셔야 마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받아 주지 않으셨을 겁니다. 하나님과 대면하였던 모세가 사실 그렇게 공치사 할 생각도 안 했을 겁니다. 모세의 인생의 목적은 가나안 땅 입성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가 목적인 사람은 하나님과 대면한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 이상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대면하지 못해서 그렇지, 하나님과 대면한 사람들은 절대로 이 세상의 그 무엇도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대면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 예수님의 세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을 따라 변화산에 올랐을 때 거기에서 내려오지 않으려 했습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하면서 그곳에 눌러 앉아 있기를 청했습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영적인 체험입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불러 느보 산에 있는 비스가 봉우리에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나안 땅을 보여주십니다. 눈으로만 볼 수 있을 뿐, 그곳에 들이지는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모세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죽었을 때(우리는 이것을 일컬어 소천이라고 합니다.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죽은 것이죠. 하나님의 사람은 죽을 때도 그냥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죽습니다.) “나이가 백이십 세였으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다고합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해서 모세가 건강했다는 뜻이고 아직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 충분했다는 뜻입니다. 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직무를 수행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기력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자동차를 빗대어서 설명하면, 폐차시켜야 할 정도로 노쇠하고 망가져서 폐차시긴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 쌩쌩한 차, 아직도 10년은 더 탈 수 있는 차를 그냥 폐차시켰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질문이 한 가지 생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는가?’입니다.

 

이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모세보다 여호수아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동안 모진 훈련을 받은 여호수아를 배려해서도 아닙니다. 모세가 미워서도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모세가 므리바 물 사건 때 자기의 의를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드러냈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입성하지 못했다고 알고 있지만, 실은 그것보다 더 깊은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정말 그 이유 때문이라면 오히려 하나님이 옹졸하게 보일 뿐입니다. 겨우 그 이유 때문에 그토록 사랑하는 당신의 종, 그리고 그렇게 수고한 종을 내치신다는 것이 아무리 하나님의 주권을 운운한다고 해도 납득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요? 바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일은 온전히 새로운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에 담아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했던 겁니다. 일종의 패러다임 쉬프트입니다. 이전 것이 죽지 않고서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전 것의 대명사가 바로 모세입니다. 그 모세가 죽지 않고서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수 없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전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대를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전 것을 떠나보내야 합니다. 온전히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전 것인 모세를 데려가십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그 모세를 온전히 보내게 하기 위해서 30일 동안 애곡하게 하십니다. 30일은 단순히 모세의 죽음을 슬퍼하는 기간이 아니라, 모세, 즉 이전 것을 떠나 보내고 새로운 것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인생의 다음 단계로 온전히 접어들기 위해서는 이전의 것을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죽여야 합니다. 일례로, 20대가 되었는데 아직도 10대처럼 옷을 입고 다니고 행동하고 다닐 수는 없습니다. 어른이 되었다면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려야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를 떠나 한 남자와 또는 한 여자와 가정을 꾸렸다면 이제 부모의 그늘에 벗어나야 합니다. 아직도 부모 밑에서 응석부리는 어린아이처럼 군다면, 온전한 가정을 꾸밀 수 없습니다.

 

사실 이런 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겪게 되는 소소한 것들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신앙을, 우리의 존재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이 시간 질문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기로 정하셨습니까?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주님이시고 하나님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인하여 여러분은 구원 받았습니까?

 

예수 믿기로 정했다면, 우리의 삶은 새로운 시대에 접어든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에 접어든 우리들에게는 이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삶의 방식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이미 하늘 나라에 가 있는 것처럼 이 땅에서 천국을 사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하나님의 통치에 들어섰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살 때 가졌던 것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아무리 유용하다고 할지라도 하늘 나라에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버려야만 합니다. 필요 없는 것들이니까요.

 

제가 이 시간 그러한 것들이 무엇인지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겠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거나, 알아 가는 중입니다.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며 솔직해집시다. 다만 알고 있으면서도 알아 가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하거나, 아직까지 이전 것을 버리기 아까워서 그냥 내 삶 안에 두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죽음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싶으셨겠습니까? 모세를 죽이고 살리는 건 내 마음대로 하는 거야, 하는 당신의 주권을 가르쳐 주고 싶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우리는 철저하게 믿고 따라야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납득되지 않게 비상식적으로 당신의 주권을 남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모세의 죽음이 헛되지 않는 것은 바로 그의 죽음을 통해 이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으로 보게끔 온 정성을 다해 가르시고 보여주고 계신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저 십자가에서 봅니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도래한 새로운 시대를 보아야 합니다. 구원의 시대, 은혜의 시대, 새창조의 시대, 새로운 피조물의 시대, 종말의 시대를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그것을 보는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시대에 필요하지 않는 것들 을 나의 삶에서 지워버릴 것입니다. 그것들을 십자가에 못박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의 삶 속에서 무엇이 죽어야, 다음 단계로 접어들 수 있을지 우리는 날마다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삶 속에서 무엇이 죽어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오늘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떠나 보내기 위해 애곡하십시오. 그것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온전히 떠나 보내고 새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를 사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십시오. 성령께서 도우실 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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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1. 10. 20. 08:16

이렇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

- 사랑은 상식만큼 피어난다

 

어린 시절 비 올 적마다 엄마가 만들어 주신 도너츠. 지금 생각하면 끔찍하다. 기름에 튀긴 거라 끔찍하고 그런 걸 정신 없이 먹었다는 것이 끔찍하다. 그런데 그 시절엔 그것이 상식이었다. 기름에 튀긴다는 사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것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행복했을 뿐이고 그런 사실에 풍요롭다고 느꼈을 뿐이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는 나에게 맛있는 간식을 주신 것이 아니라 독을 주신 것이나 다름 없다. 지금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 트랜스 지방이 엄청 들어간 기름에 튀긴 도너츠를 간식으로 주셨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엄마의 사랑에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엄마의 상식에서는 그것이 최선이었고, 그것이 엄마가 자식들에게 베푼 최고의 사랑이었다. 사랑의 행위는 늘 바르고 정직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사랑은 상식에서 벗어나 있고 상식을 비껴간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아는 만큼, 자신의 상식 선에서만 사랑을 베풀 수 있다. 그것을 넘어서는 사랑은 이미 인간의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상식만큼 피어난다. 상식만큼만 사랑을 이해하고 받으면 된다. 그래서 난 이렇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이면 엄마의 그 끔찍한도너츠가 그립고 또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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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우리 나라 대한민국이 세계 축구사에 명함을 내밀기 시작한 때가 1986년 멕시코 월드컵부터입니다. 그 이후 한국은 7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의 대기록을 세우며 지금 남아공에서 열리고 있는 월드컵에 출전했습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우리나라 선수 중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수가 몇 없었습니다. 차범근 선수가 가장 유명했고, 지금 현재 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는 허정무 선수 정도가 다였습니다. 이때만해도 우리 나라 축구 역사상 최강의 팀이라고 불리며 월드컵에 출선했었습니다.

 

그러나, 월드컵의 벽은 너무도 높았었죠. 예선에서 모두 패하며 예선탈락하고 맙니다. 차범근 선수 같은 특출한 세계적인 선수가 있었지만, 그 선수 한 명이 모든 것을 이루어 낼 수는 없었습니다. 축구는 협동경기이기 때문입니다. 누구 하나만 잘해서 되는 스포츠가 아니라, 모든 선수들이 골고루 잘해야 합니다. 그래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부터 한국 축구팀의 전체적인 실력이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홈그라운드의 이점도 있었지만 전체적인 수준이 올라간 덕분에 한국은 4강 신화를 일구어낼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2002 월드컵 때 한국 선주 중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수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특출한 선수는 없었지만 모든 선수가 골고루 기량을 갖추었기 때문에 가능한 성적이었습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한국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누비는 장면을 보면 그동안 얼마나 한국 축구가 발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선수도 다수 보유하고 있고, 전체적인 기량이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16강 이상)을 기대해 볼 수 있는 것이죠. 단순한 몽상이 아니라, 현실에 바탕을 둔 짜릿한 소망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신앙)생활이라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신앙)생활은 누구 하나의 특출한 믿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구성원들의 평균적인 영성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사사 시대를 통해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사와 같은 놀라운 카리스마를 지닌 사람이 한 명 있다고 해서 그 공동체가 번성하지 않습니다. 강력한 카리스마의 소유자가 없어도, 모든 구성원들의 마음이 한 마음을 이루어 협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다면 그 공동체는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는 이러한 협동정신을 키워야 합니다. 나 혼자 믿고, 나 혼자 은혜 받고, 나 혼자 하늘의 복을 받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애초부터 버려야 합니다. 교회(신앙)생활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한 몸이 되어서 하는 것입니다. 전체적인 영성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공동체에 속한 모든 분들이 일정 수준의 영성을 지니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거름이 되어 주고 힘이 돼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사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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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1. 10. 10. 08:34

노마십가(駑馬十駕): 둔한 말이 열흘 동안 수레를 끌고 다닌다라는 뜻 / 이는 곧 재주 없는 사람이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훌륭한 사람에 미칠 수 있음을 비유함

 

순자의 수신편에는,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고 하지만, 둔한 말일지라도 열흘 동안 달려 간다면 이를 따를 수 있다(夫驥一日而千里, 駑馬十駕則亦及之矣)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한 '반 걸음이라도 쉬지 않으면 절룩거리며 가는 자라도 천리를 갈 수 있고, 흙을 쌓는데도 멈추지 않고 쌓아나가면 언덕이나 산을 이룰 것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노마(駑馬)란 걸음이 느린 말을 가리키며, 재능이 없고 무능한 사람을 비유하기도 합니다. 말이 수레를 끌고 다니는 하루 동안의 노정(路程)을 일가(一駕)라 하니, 십가(十駕)란 곧 열흘간의 노정을 말합니다. 이는 곧 재주 없는 사람이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훌륭한 사람에 미칠 수 있음을 비유한 것입니다. - 순자(荀子) 수신편(修身篇) –

 

저는 개인적으로 이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재주 없는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됩니다. 어느 정도까지 따라갈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이상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재능을 지닌 사람만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더디게 성장하는 나를 기다려주지도 않습니다. 하루 만에 천리를 달리는 천리마를 노마가 열흘 동안 달려서 따라간다 한들, 그것이 노마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뱁새가 황새 좇아가다가는 가랑이만 찢어지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자꾸 그런 것을 요구합니다
. 앞서 가는 사람을 따라가야 거기에 무슨 성공이 보장되어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불안하게 합니다. 그것에 휘말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각자의 교유한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도록 창조하셨습니다. 남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자기 자신의 고유한 성품과 속도를 찾고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 가는 것으로 만족하고 우쭐대지 말아야 합니다. 노마는 하루에 백리 가는 것으로 만족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얼마나 성실하게 가느냐이지, 나에게 주어진 길이 아닌데 남 따라서 그 길을 달려가느라 괜한 고생하는 건 미련한 짓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자신의 속도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생각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대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빨리 달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속도를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내가 하나님의 온전한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한국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빨리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별로 좋은 습관이 아닙니다. 빨리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열심은 방향이 올바를 때 효과를 내는 것이지, 방향이 올바르지 않으면 그 열심 때문에 오히려 화를 당하게 됩니다. 올바른 방향을 향해 알맞은 속도를 내기 위해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대로, 주신 은혜대로만 해 보십시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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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히브리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5:12). 예수를 믿은 지 꽤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린 아이의 초보 신앙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히브리서 공동체(교회)를 향한 질타입니다.

 

초보 신앙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 5:13), 아직도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여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입니다. 이는 존재의 차원이기도 하지만, 기능의 차원이기도 합니다. 존재 자체가 아직도 어린 아이의 인격 수준에 머문 사람은 몸이 커도 여전히 다른 사람이 자신을 뒤치다꺼리 하게 만듭니다. 기능의 차원에서도 선한 일을 하지 못합니다. 뭔가 창조적인 일, 남에게 힘이 되어 주고 아름다움을 생산해 내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초보 신앙에 머물러 있는 사람의 치명적인 약점은 하나님께 받은 약속, 기업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받았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입성했을 때 그 땅은 그들에게 영원한 기업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기업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들은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과 치열한 전쟁을 벌여야만 했습니다. 그야말로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들의 구원(약속, 기업)을 이룬 것이죠. 신앙 생활에서 믿음의 성장이 꼭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의 성장이 없으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받은 기업(구원)을 지켜내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오해를 합니다. ‘한 번 믿고 나면 구원을 절대 잃어버리지 않는다.’ 이건 정말 큰 오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경계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절대 구원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겠지만, 배교와 같은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경계 밖으로 애써 떨어져 나간 사람에게는 구원이 머물러 있을 수 없는 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은총을 입었다가 시간이 지나 대놓고 그 은총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 즉 배교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하는”( 6:6)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곳곳에서 믿는 이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하나님의 도(말씀)를 배워야 하며, 구원을 기업으로 받은 자답게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성장하지 않으면 오히려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다는 말씀에 긴장하고, 믿음의 진보를 이루는 교회가 됩시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9. 26. 03:34

2011 9 25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출애굽기 17:1-7

제목: 하나님은 생명을 주신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앞 부분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는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의 역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 시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내려주시면서 하루에 모든 가족이 먹을 양 만큼만 거두라고 명령하십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 하루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길 바라신 것이죠.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오늘 만나가 내리고 나면 언제 만나가 또 다시 내릴지, 솔직히 하나님을 믿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 먹을 만큼만 만나를 거두어 들이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 가운데 하루 이상 먹을 치의 만나를 거두어 저장해 두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됐습니까? 저장해 둔 만나는 곧 다 썩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먹지 못하게 됐습니다. 이는 단순히 인간의 욕심을 경계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더 많이 갖고 싶어합니다. 욕심도 인간이 살아가면서 너무 부리면 그렇게 좋은 것은 못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욕심을 시험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검소하게 살기를 바라신 것이 아닙니다. 이는 신앙에 대한 시험이었다는 것이죠. 광야에서 하루 하루 산다는 것은 그야말로 모험이고 도전입니다. 인간 마음이야 다 똑같지 않겠습니까?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내일을 준비해 두는 것이 뭐가 그리 잘못된 것이겠습니까?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이 진짜로 자기들 가운데 있는지 확신이 안 섰다는 겁니다. 그것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내려주셨다고 하는 만나가 눈 앞에 있긴 하지만, 그것을 내려 주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그들 눈에는 만나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만나에만 집착을 합니다. 만나를 거두어 들이는데만 신경을 골두한 나머지,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까마득한 이야기로 듣고,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심을 따라 만나를 필요 이상으로 모읍니다. 이미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이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만나 즉 먹을 것이 이들에게는 생명을 주는 우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은 계속해서 나타났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서 역사하신 하나님을 도대체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 눈에는 우리 가운데 계신 분은 하나님이 아니라, 모세였습니다. 이들은 진실로 헷갈렸던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정말 하나님이 계신 걸까?’

 

이스라엘 백성은 신광야를 떠나, 르비딤이라는 곳에 도착을 해서 캠프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곳에 물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나아와 극심한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물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불평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미 15장에서도 마라라고 하는 곳에서 물이 써서 먹지 못한 것을 두고 불평을 늘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혜를 주셔서 해결했습니다만, 이번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물을 두고 또 불평을 합니다. 이번에는 매우 극렬하게 불평을 합니다.

 

그런데 이 불평의 이면에는 이전과는 다른 그 무엇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모세의 반응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물을 두고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할 때 모세는 이렇게 응답을 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바로 이겁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는 겁니다. 무슨 시험입니까?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의 시험이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셨는데, 이번에는 거꾸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정말로 당신을 믿는지 안 믿는지를 시험하셨는데, 이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말로 계신지 안 계신지를 시험하고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불경스러운 광경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시험할 수 있는가?” 복음서에서도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 당하실 때 마귀를 향해 이런 외침을 던지지 않으셨습니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시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어지지도 않는 하나님을 무작정, 막무가내로 믿을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나약함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시험은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라는 사람이 어느 날 나타나서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애굽의 바로 왕과 맞서 싸워 이겨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나왔습니다. 이들은 어쨌든 바로 왕의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쁨을 가지고 희망 가운데 모세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것이 막막해져 버렸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삶에 혼란이 온 것이죠. 이들이 바로 왕을 피해서 도착한 곳은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 수 없는 광야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누구든지 불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믿음과 별개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커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에서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아무리 커도 삼시 세끼 밥 먹고 살아야 하고, 믿음이 아무리 커도 가족들의 생계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16 3절과 오늘 우리가 읽은 17 3절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우선 16 3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그리고 17 3절입니다.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생각해 보십시오. 적어도 이들이 애굽에 있었을 때에는 이렇게 광야에서 불안에 떨면서 굶주리는 것처럼 그렇게 굶주리지는 않았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면서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인간 취급 받지 못하고 개처럼 살았어도, 적어도 이들은 배를 채울 수 있었고 목마를 때 물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해방을 가져다 주시겠다고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무엇이 구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 이들은 지금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에 처해진 것 같았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지금 광야에서 헤매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처한 현실입니까? 예수를 믿기로 하고 교회 다니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다가오는 현실 아닙니까? 우리에게도 이러한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 믿으면 모든 일이 형통하고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는 것 아니야?” 그러면서 누군가의 전도로 교회로 따라 나서긴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셨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엇이 구원인지 모르겠다는 울림이 이 마음 속에서 들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믿음이란 확신이 아니라, 오히려 의심일 때가 많습니다. 도대체 지금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맞는 길일까? 내가 올바른 선택을 내린 것일까?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나선 이 길 위에서 우리는 수 없이 이런 의심에 둘러싸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두렵고 떨렸습니다. 이렇게 따라 나서긴 했는데, 바로의 손에서 구원을 베푼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분이 또 다른 바로와 같은 신이 아닐까? 애굽의 바로 왕도 자기 자신이 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꼼짝 없이 바로 왕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덕에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은 배불리 먹고 목마르지 않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바로의 소모품으로 소모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왕의 한 마리 짐승처럼, 개처럼 살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큰 맘 먹고 따라 나선 여호와 하나님은 스스로 바로 왕과 같지 않다는 것을 계속해서 증명하고 계셨습니다. 애굽에서 행하셨던 10가지 재앙을 봐도 그렇고, 홍해를 가른 사건도 그렇고, 물을 내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신 것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 가지고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기에는 뭔가가 부족했던 것이죠.

 

이러한 전체적인 상황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시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또 한 번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리고 이들을 믿음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명하여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호렙 산에 있는 반석 위에 서서 애굽에서 10가지 재앙을 내릴 때 썼던 그 지팡이로 반석을 치라고 명령하십니다.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대로 합니다. 그리고 반석에서는 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물을 마시고 살아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사는 것 같았던 애굽에서는 결국 기다리고 있는 것이 바로 왕으로 인한 죽음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죽은 것 같았던 광야에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이죠.

 

우리는 십자가에서 그것을 결정적으로 확인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 같았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참된 역사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살고 싶으십니까? 산 것 같으나 죽은 자로 살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죽은 것 같으나 산 자로 살고 싶으십니까? ‘여호와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안 계신가의심이 들 때마다 저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는 의심이 아니라, 확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죽은 것 같은 상황, 마른 뼈 같은 상황에서도 우리가 의지하고 믿을 분은 한 분 하나님 밖에는 안 계십니다. 끝까지,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붙들고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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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1. 9. 23. 06:56

양포지구(楊布之狗): 양포라는 사람의 개 / 겉이 달라졌다고 해서 속까지 달라진 걸로 알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


양주(
楊朱)의 아우 양포(楊布)가 아침에 나갈 때 흰옷을 입고 나갔었는데, 돌아올 때는 비가 오기 때문에 흰옷을 검정 옷으로 갈아입고 들어왔습니다그러자 집에 기르고 있는 개가 낯선 사람으로 알고 마구 짖어댔습니다. 양포가 화가 나서 지니고 있던 지팡이로 개를 때리려 하자 형 양주가 그것을 보고 양포를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개를 탓하지 마라. 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만일 너의 개가 조금 전에 희게 하고 나갔다가 까맣게 해 가지고 들어오면 너는 이상하게 생각지 않겠느냐?" –한비자(韓非子)

 

이 고사성어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다니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임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적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적 사건이 세상에서 초자연적으로 일어나는 기적과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사건은 그야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지만, 예수님의 이적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징표였습니다. 이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이적을 베푸시면서 놀라운 능력과 힘 보여주셨던 예수님은 이상하게도 아무런 힘도 없이 초라하게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상황을 보고 매우 혼란스러워했습니다. 급기야 예수님을 조롱하기까지 했습니다. “남은 구원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더냐!” “네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그 십자가에서 당장 내려와 봐라!”

 

십자가 사건을 기점으로 예수님의 옷은 흰 옷에서 검은 옷으로 바뀌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전파하는 흰옷이 벗겨지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검은 옷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절망과 실망에 사로잡혀 패닉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겉 모양이 달라졌다고 속 모양까지 달라진 것으로 착각한 것이죠.

 

우리 인간은 겉 모양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죄성입니다. 그래서 2천 년 전 사람들이 골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의 은총이 멈춘 것처럼 보인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절망 속에서 좌절해야 할까요?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 끝이 형편 없어 보이는 십자가일지라도 끝까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과 신실하심을 믿고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할까요? 무엇이 생명의 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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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9. 19. 01:57

2011년 9월 18일 주일예배 설교
본문: 마태복음 20장 1-16절
말씀: 지금은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때


오늘 말씀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로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비유의 말씀의 앞뒤 문맥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비유의 말씀 앞에는 부자청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비유의 말씀 뒤에는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부자 청년과 포도원 품꾼의 비유,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 이 세 가지 이야기가 도대체 어떤 연속되는 의미를 품고 있기에 성경에 나란히 기록이 되어있을까요.

그 이유를 풀어보기 위해 우리는 먼저 부자 청년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모든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던 어느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찾아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부자청년은 모든 율법을 지켰기에 영생을 얻을 줄을 확신하였기에 예수님의 입에서 "당신은 영생을 얻을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습니다."라는 말을 들을 꺼라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영생, 즉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부자청년은 모든 율법을 철저히 지켰다고 예수님께 당당하게 말을 하였지만 정작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순종치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19장 27절 말씀에서 주님 앞에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는데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부자 청년은 자신의 것을 포기하지 못해서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지만 자신들은 모든 소유를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니까 무엇인가 보상을 받지 않을까하는 것이 베드로의 질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을 심판하실 때 너희가 내 좌우편에서 그들을 심판하는 영광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에 대한 전제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이 새롭게 될 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예수님을 따른다는 조건이 붙어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이 맞아 떨어질 때 제자들이 세상을 심판하는 자리에 예수님과 함께 앉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새롭게 되는 때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거친 후에야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때까지 나와 함께하여야한다는 두 번째 조건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함께 동참을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그들에게는 예루살렘에 입성만 하면 자신들에게 어마어마한 권력이 따를 것이고 그때에 자신들 중에서 누가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포도나무 품꾼의 비유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절 말씀을 보면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라고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천국은 포도원 주인과 같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당시의 품꾼들의 삶은 지금 인력시장에서 일하는 일꾼들과 같은 삶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루벌어 하루 먹고 살기도 어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기에 하루를 일하지 못하면 하루 동안 주린 배를 채울 수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요즘과 마찬가지로 일할 사람은 넘쳐나고 일할 자리는 너무나 적었기에 많은 품꾼들이 일을 구하고자 노력을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일하는 행운을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이러한 품꾼들에게 포도원 주인이 찾아간 것은 포도원 주인의 전적인 은혜였습니다. 그렇기에 처음 구한 품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겠노라 말했을 때 그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포도원 주인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런데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우리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두 가지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하나는 왜 주인은 다섯 번에 걸쳐서 일꾼을 구했던 것인가? 이구요. 다른 하나는 왜 주인은 모든 일꾼들에게 동일한 한데나리온의 품삯을 지급하였는가? 입니다.

우선 첫 번째 의문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 포도원 일꾼을 구하는데 그치지 않고 제 삼시에도 나가서 품꾼을 구하고 제6시, 제9시 그리고 일을 마치기 한 시간 전인 제11시에도 품꾼을 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력시장에 가서 일꾼을 구할 때 제일 먼저 보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들의 체격과 건강상태입니다. 많은 고용자들이 일꾼들 중에 가장 체격이 건장하고 일을 잘할 것 같은 사람들을 뽑아내어 데려갑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약하고 일을 하기 힘들 것만 같은 사람들이 남겨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매일 반복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늦은 시각까지 일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다음날도 일을 구하지 못할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랬기에 주인은 11시까지 다섯 번에 걸쳐서 일꾼을 불렀던 것입니다. 주인이 불러주지 않는다면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주인의 세심한 배려와 은혜가 있었기에 예수님은 천국을 포도원 주인으로 비유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인 왜 모든 일꾼에게 동일한 품삯을 지급하였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전에 우리는 이스라엘의 문화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의뢰인-후견인 제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제도는 부자가 가난한 자를 돌봐주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이 제도에서 의뢰인은 후견인을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가난한 자는 부자를 택할 수 없었고 자신의 후견인이 되어 달라 요청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 제도에 빗대어서 이 비유를 해석하자면 포도원 주인은 품꾼을 선택하여 품삯을 지급할 수 있지만 품꾼은 주인을 선택할 수도 품삯을 정할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주인은 처음 부른 일꾼에게만 한데나리온의 품삯을 정하였고 나머지 일꾼들에게는 자신들이 한 일에 상당한 품삯을 지급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랬기에 주인이 얼마를 주던지 간에 그것은 주인의 뜻이고 후견인으로서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주인의 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품삯을 받는 시간이 되자 11시에 온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고 이른 아침에 온 사람들이 은근히 더 많은 돈을 받을 것이란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자신들에게 한데나리온의 품삯이 돌아오자 주인을 원망하였습니다.

주인은 의뢰인-후견인 제도에 의해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베푼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일꾼들에게 일한만큼의 값을 쳐준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필요한 만큼의 값을 쳐주었습니다. 당시 한 데나리온은 일꾼들이 하루 벌어서 하루 먹을 수 있는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른 아침부터 수고한 일꾼들은 주인의 은혜를 왜곡하여 자신들의 품삯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주장한대로 그들은 종일 수고하였고 더위를 견디며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주인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자신들의 억울함만을 주장하는 그들을 보면서 주인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포도원 품꾼의 비유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의 말씀이 하나님의 구원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진다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말도 맞습니다. 구원은 먼저 택함을 받은 자나 나중에 택함을 받은 자나 동일하게 받는 것이 구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지금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신이유는 제자들이 이른 아침부터 수고한 일꾼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침부터 수고하여 더위를 견디며 열심히 일한 일꾼들처럼 제자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께 올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열심은 자신을 위한 열심이었고 그 마음은 이미 권력이라는 콩밭에 가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19장 27절 말씀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예수님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는데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질문은 이른 아침부터 일한 일꾼들의 질문과 같습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십니까!"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에서의 수난을 생각하시는데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무엇을 얻을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얻을지에 대해서 생각할 때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저 포도원의 일꾼들처럼 열심히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며 예수님을 따를 때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 살아갔을 때 그때에야 비로소 포도원 주인이 일꾼들에게 약속하였던 상당한 보응을 제자들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제자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포도원의 비유를 말씀하셨던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른 장작 같고 질그릇 같은 우리를 부르셔서 포도원의 일꾼으로 삼으신 주님은 우리가 그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의 사역에 열심히 동참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역이 끝나는 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한 만큼 값을 계산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 수 있을 만큼의 크나큰 은혜로 우리에게 보상을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보상을 바랄때가 아니라 열심히 일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두신 사역을 잘 감당하여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보답해야할 때라는 것입니다. '서로 누가 더 일을 많이 했느냐 적게 했느냐'로 다투며 시기하며 질투하는 때가 아니라 서로 도와서 주의 일을 감당해야할 때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의 일을 잘 감당하며 살 때 주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 할지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1. 9. 15. 02:20

금슬상화(琴瑟相和): 거문고와 비파가 서로 잘 화합한다 / 부부 사이가 매우 좋다


시경 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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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雅) 상체편(常棣篇)은 집안의 화합을 노래한 시인데 거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처자(妻子)가 매우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妻子好合] 거문고와 비파를 연주하는 것과 같으며 [如鼓琴瑟] 형제가 모두 한 집에 모여 [兄弟歸翕] 화목하고 즐겁기만 하다  [和樂且湛]”. 그리고 부부 사이를 금슬이라고 하는 것은 시경 국풍(國風) 관저편(關雎篇)에 나오는 '얌전한 처녀를 아내로 맞아 [窈窕淑女] 거문고와 비파(금슬)를 타며 사이좋게 지낸다 [琴瑟友之]'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 시경 소아(小雅) 상체편(常棣篇) –

 

그리스도인에게 어떠한 관계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윤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입니다. 우리의 존재 근거는 하나님인데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존재 또한 그것을 따르는 것이죠. 하나님의 삼위일체 존재 방식은 그야말로 금슬상화입니다.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시는 가장 좋은 예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라기 보다,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해야하는 것은 교회 공동체의 존재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 형상을 닮은 교회에 분쟁이나 분열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에서 벗어났는지를 말해줄 뿐, 교회의 존재 방식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삼위일체 형상을 회복해 가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관계든 금슬상화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부부관계든, 부모자식관계든, 친구관계든, 교회공동체관계든, 어느 관계든 원리는 똑같습니다. 화목이란 일치된 마음에서 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되면 우리의 삶은 언제든지 화목합니다. 서로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십자가 아래 모여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화목을 이루어가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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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9. 12. 04:11

2011 9 11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마태복음 18:21-35

제목: 용서는 권세다

 

오늘 본문은 용서에 관한 말씀입니다. 용서는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공헌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들여다볼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의 지표가 되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한 마디로 용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용서 받는 것도 서툴고, 용서 하는 것은 더더욱 서툽니다. 인생을 살면서 용서 받지 못하고 살았거나, 용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는 더욱더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의 경험과 이성을 모두 뛰어넘습니다. 우리의 육체의 법을 뛰어 넘어 새로운 인생, 새로운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우리가 얼마나 받아들였느냐, 얼마나 깨달았느냐의 정도에 따라서 나의 삶을 붙들고 있는 분노와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마태복음에서 베드로는 언제나 교회의 대변인 역할을 합니다. 그의 질문은 그 당시 랍비들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질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랍비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용서는 세 번까지 하고 그 이상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한 번 용서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세 번까지 용서하라니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려고 노력해 보신 분은 잘 아실 겁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랍비들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죠. 그래서 베드로는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랍비들과는 다를 것을 예상하고,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하고 물었던 겁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완전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한계를 벗어나시는 분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일곱 번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의 질문에 칭찬을 받을 거라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상상할 수 없었던 용서의 가르침을 주십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이것을 숫자적으로 계산하면, 490번입니다. 그러나 이는 문자적으로 용서를 490번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일곱이 유대인들에게 완전수임을 고려할 때 이는 무제한적인 용서를 가리킵니다.

 

말은 멋있어 보입니다. 대인배 같아 보입니다. “무제한으로 용서하라!”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근거와 이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에 대해서 천국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용서를 빗대어서 하신 이 천국의 비유는 비교적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임금입니다. 다른 부류는 임금의 종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류는 종들의 동료입니다.

 

임금의 종들은 임금에게 엄청난 빚을 졌습니다. 그 규모가 일만 달란트라고 합니다. 우리가 탈랜트라고 하는 그 달란트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쓰는 화폐 단위와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에 마음에 와 닿지 않지만, 이것이 얼마나 큰 단위인가를 알고 나면 놀라움을 금치 못하실 겁니다.

 

1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 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그러니까, 1달란트는 6,000명의 하루 품삯입니다.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100불로 치면, 1달란트는 60만불입니다. 한국돈으로는 6억정도가 되지요. 그런데 오늘 말씀에 종이 임금에게 빚진 것이, 1달란트가 아니라, 1만 달란트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계산이 안 되니까, 쉽게 다시 설명하면, 한 사람이 평생 60만불(6) 정도 모을 수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이게 1달란트입니다. 이것을 1만 번 해야 갚을 수 있는 빚입니다. 우리가 만약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1만번을 다시 태어나 평생동안 모으고 또 모아야 갚을 수 있는 규모의 빚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한 마디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죄를 빚의 개념으로 바꾸어서 설명하시는 것인데,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는 이처럼 우리 힘으로는 청산할 능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니다. 조금 유식한 말로, 실존이라고 합니다. 우리 존재의 본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갚을 능력이 없는 종에게 임금은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으라고 합니다. 임금은 사실 이 종이 그 돈을 갚으나 갚지 않으나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그거 없다고 임금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거 없어도 임금은 충분히 살 수 있습니다.

 

임금의 이 명령 앞에 어쩔 도리가 없는 종은 임금 앞에 바짝 엎드려 애원합니다.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로서 다 갚으리이다.” 이렇게 바짝 엎드린 종의 모습이 애처로웠던 임금은 그 종의 모습을 불쌍히 여겨 그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임금이 종의 빚을 탕감해 주는 것 외에는 종이 빚을 갚는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장면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없는 빚을 탕감 받은 종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서 자기에게 빚는 자기의 동료를 만납니다. 그리고 낯을 변하여 동료의 멱살을 잡고 자기에게 진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종의 동료가 그에게 진 빚은 백 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고 했습니다. 백 데나리온의 빚은 노동자가 100일 동안 일해서 갚을 수 있는 정도의 빚입니다. 사실 이것도 그렇게 만만한 규모는 아닙니다. 그런데 종이 임금에게 진 빚에 비하면 새 발의 피입니다.

 

종은 잔인합니다. 동료를 용서하지 못하고, 그를 잡아다가 옥에 가둡니다. 이 일을 본 동료들이 이 일을 임금에게 가서 고합니다. 이 소식을 듣고 임금은 노하여 그 종을 잡아 들여 이렇게 훈계합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그리고 임금은 그 종을 옥에 가둡니다.

 

이 비유를 마치시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종은 임금의 용서를 악용한 나쁜 사람입니다. 우리도 종종 이런 사람을 봅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악용의 대상이 아닙니다. 책임을 회피하라고 이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어설프게 아는 사람들이 이것을 악용합니다. ‘성경에서 죄를 용서하라고 했는데, 당신은 기독교인이면서 어찌 성경말씀대로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이요!’ 그렇게 되면,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세워진 이 미국이라는 나라에 무슨 감옥이 필요하겠습니까? 죄짓는 족족,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의 죄를 사하노라!’하고 풀어주면 되죠?

 

죄의 값은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서에서도 보면 다윗 왕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통해서 죄를 범합니다.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서 자신의 충실한 장수, 우리야를 최전방으로 내몰아 전사시킵니다. 그리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에게서 아들을 낳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잘 자랍니까? 아닙니다. 죄 값은 치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래 내 종 다윗아 내가 너를 용서하마하면서 잘 먹고 잘 살게 해주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은 죄 값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나은지 얼마 안 돼서 죽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값을 그렇게 혹독하게 치릅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안 좋은 일들이 죄값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너무 죄의 숙명론에 빠지는 것도 건전한 신앙은 아닙니다.

 

죄의 값은 치러야 합니다.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이건 죄 지은 쪽이 가져야 할 당연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마음으로부터해야 합니다. 이것이 잘 되지 않으면, 결국 나만 다치게 되어 있습니다.

 

이창동 감독이 만든 밀양이라는 영화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도연이 주연을 맡은 영화인데, 신정론과 용서의 문제를 절묘하게 그린 영화입니다.

 

서울에서 남편을 잃은 이신애(전도연 분)는 그와의 추억이 담긴 밀양에 내려와 아들과 함께 살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아들마저 잃게 됩니다. 그리고 그 슬픔을 극복하려고 교회에 발을 들여놓고 신앙으로 잘 극복해서 살아가는 듯 합니다. 시간이 한 참 지나, 이제는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교회 성도님들의 격려와 도움에 힘 입어 그에게 용서를 건네러 교도소에 갑니다. 너무 긴장되는 순간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죽인 범인을 대면했습니다. 용기 있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아들을 죽인 범인이 오히려 감옥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신애에게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범인의 말인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사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이 평안하다는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이신애는 그 순간 실성합니다. 그의 마음에 드는 생각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어!!” 이신애는 모든 신앙을 다 잃어버리고, 그때부터 교회를 헤집어 놓는 악녀로 변합니다. 자신이 용서하기도 전에 그 사람(자신의 아들을 죽인 그 악마같은 죄인)을 먼저 용서한 하나님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우리의 온 존재를 통해서 깨닫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 위에서 하는 신앙생활이란 용서가 우리 삶의 근거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 삶 가운데 있는 것 중에 가장 강력한 무기는 이 아니라, “용서입니다.

 

이 세상은 이 있어야 권세 있는 자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돈이 곧 권세인 세상인 것이죠.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영혼까지도 팔아 먹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돈을 쓰면서 권세를 누리려고 합니다. 이건 이 세상이 주는 헛된 욕망에 불과합니다.

 

그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권세가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우리는 왜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사는지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모든 믿는 이들에게 용서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용서는 권세가 아니라, 미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세상이 부끄러워하는 그것으로 우리 인류는 구원을 받았다고 말이죠.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이 부끄럽게 여기고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이 세상에서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봤자, 그 돈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영원한 권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한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의 권세입니다. 용서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의 권세를 받은 자만이 용서 할 수 있습니다. 그 권세를 왜 사용하지 않으십니까? 그것이 얼마나 큰 권세인지, 아직도 깨닫지 못하시는 분들은 아직 돈이 무엇인지 모르는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지닌 것과 같습니다.

 

세상의 권세, 헛된 권세를 부리지 마십시오. 하늘 나라의 권세, 영원한 권세인 용서의 권세를 부리십시오. 용서의 권세를 누릴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늘 나라의 시민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백을 예배 때마다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아멘.


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1. 9. 8. 00:09

조명시리(朝名市利): 명성은 조정에서, 이익은 시장에서 다투라는 뜻 / 무슨 일이든 격에 맞는 곳에서 하라는 말


전국시대인 기원전 317년에 진(
)나라 혜문왕(惠文王)에게 사마착(司馬錯)은 촉지방의 오랑캐를 정벌하면 영토도 넓어지고 백성들의 재산도 늘어 일거양득이라고 건의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수상 장의(張儀)는 의견이 달라 한나라를 치고 중원으로 진출하여 패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는 명예는 조정에서 다투고 이익은 시장에서 다투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나라는 시장이고 주나라 왕실은 조정으로 본 것입니다. 이것을 다투지 않고 오랑캐 정벌을 나선다면 패자가 되는 길에서 멀어진다고 주장한 것이죠. 그러나 혜문왕은 사마착의 말을 따라 촉을 정벌하는 영토의 확장에 주력하고 맙니다. -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 –

 

닭을 잡는 데 장수의 칼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닭 잡는 데는 조그만 식칼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확대시키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원래 자기 모습 보다 더 크게 보이려는 욕구이지요. 그러다 보니 허풍이 늘고 목소리도 커지고 겉치레도 심해집니다. 참된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묵상할 기회는 늘 놓쳐버리고 나도 모르는 나의 모습을 보이면서 살아갑니다. 놀아야 할 때는 놀아야 하고, 쉬어야 할 때는 쉬어야 합니다. 공부해야 할 때는 공부 해야 하고, 운동해야 할 때는 운동해야 합니다. 부드럽게 말해야 할 때는 부드럽게 말해야 하고,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는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시기에 알맞은 행동과 말을 할 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의 격이 있고, 어른은 어른의 격이 있습니다. 부모는 부모의 격이 있고 자식은 자식의 격이 있습니다. 남편은 남편의 격이 있고 부인은 부인의 격이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성도의 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격에 맞게 해야겠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성도의 격에 맞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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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어떤 아들이 "어머니를 사랑한다. 어린양처럼 천사 같은 어머니를 하나님이 계신 하늘나라로 보내드려야 한다"고 생각해 어머니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아들은 평소 종교에 심취해서 사건 발생일 얼마 전부터 방에서 나오지 않고 방언을 하면서 괴성을 질러댔다고 합니다. 아마도 기도(방언)를 통해서 신접(하나님을 만남)했었나 봅니다. 어머니는 그 모습을 보고 겁을 먹고 있는 딸을 달래는 도중 이러한 변을 당했다고 합니다. 경찰 조사에 의하면 정신병력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조사 도중 횡설수설하는 등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다고 합니다. 존속살해(자기나 배우자의 직계가족을 죽이는 일)가 심심치 않게 일어납니다. 어머니를 죽인 아들의 진술을 보건 데, 아마도 어머니를 죽이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자신을 변호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이 진술로 살인에 대한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구약성경 창세기에서도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려 했던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의 이야기라고 은혜로 읽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그 행위도 존속살해 행위나 다름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삭 대신 양 한 마리를 준비해 주시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인하는 데에서 그쳤지만, 그 사건은 아들을 죽이려 했던 끔찍한 일이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 어떠한 경우에도 살인은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생명의 근원이시고 생명을 그 누구보다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살인을 명하시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해서 지어진 소설이 있는데, 한국 근대문학의 거장 김동인의 소설 <명문>입니다. 이 소설에서 전 주사라는 독실한 기독교인이 노망이 난 어머니를 편히 보내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칭찬 받을 선행이라고 생각하고 어머니를 독살합니다. 이 일로 전 주사는 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죽습니다. 죽어서 하늘 나라에 간 전 주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법정에 또 다시 서게 됩니다. 자신이 한 일을 통해 하나님께 칭찬 받을 거라고 확신했던 전 주사는 하나님 앞에서 의기양양하지만 하나님께서 어머니를 죽인 것은 살인죄라며 그의 지옥행을 결정하시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납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자칭 거룩한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아무데나 하나님의 뜻을 갖다 붙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의 뜻을 행했다고 생각해 놓고 하나님께 큰 상급을 받을 거라 착각하면서 사는 것이지요자신의 부족함과 자신의 생각을 마치 하나님의 뜻인 양, 하나님의 은혜인 양 에두르는 것을 보면 참으로 당황스럽고 곤혹스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분별의 은혜가 꼭 필요합니다
. 분별의 은혜가 임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데나 하나님 운운하며 하나님의 뜻이라고 갖다 붙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분별의 은혜를 꼭 간구하십시오. 그래야 엉뚱한 신앙 생활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