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22. 11. 9. 06:33

믿음으로 살기를 간구하는 기도

(롬 1:17-32)

 

바울의 입술을 통해 애정 어린 마음으로 로마교회를 다독이신 주님,

우리도 동일한 사랑으로 다독여 주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비참한 현실을 돌아보는 이유는

의기소침하거나 자괴감을 느껴야 하거나 자포자기 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지를 자각하고

의인으로 다시 거듭나기 위함임을 믿습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주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아름다운 구원의 역사를

우리가 망가뜨리지 않도록

자신감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도와주소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진리의 일이 되게 하소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진리가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비참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서로의 존재를 비난하거나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온 몸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를 보듬게 하시고

평화를 일구어 나가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의 삶 자체가 영광송이 되게 하소서.

감사와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오직 주님께만 올려드립니다.

“겨 묻은 개여, 똥 묻는 개를 나무라지 말라.”

주여, 우리 가운데 평화를 주옵소서.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부어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온 우주만물의 주님의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1. 9. 06:31

겨 묻은 개여, 똥 묻은 개를 나무라지 말라

(로마서 1:17-32)

 

1. 비슷한 속담이 두 개 있다.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 나무란다.”라는 속담과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라는 속담이다. 같은 말 같지만, 뉘앙스가 좀 다르다. 앞의 것은 ‘사람에게는 크고 작은 잘못이 있기는 마찬가지인데 어리석게 잘못의 크고 작음을 따지는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고, 뒤의 것은 ‘자신의 잘못이 더 크고 또 변변치 못한 사람이 남 흉보기를 잘한다’는 뜻이다. 앞의 것은 ‘겨 묻은 나나, 똥 묻는 너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뜻이고, 뒤의 것은 ‘못난 놈!’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앞의 것의 의미를 생각하며 본문을 들여다보려 한다. 이것은 인간 존재의 평등에 관한 이야기다.

 

2. 기후변화 공부를 하면서 가장 좋은 점은 막연히 알고 있던 것에 대하여 정확하고 폭넓은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본문의 전개를 보면, 바울은 ‘올바른 지식은 올바른 행동의 전제’라는 스토아 철학 전통을 따르는 것을 볼 수 있다. 굳이 이러한 철학적 전통을 말하지 않더라도, 올바른 지식이 올바른 행동의 전제라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식이다. 인간은 아는 만큼 행동할 수 있다. 지식의 범위를 벗어나 행동하는 것을 우리는 무모하다고 말한다. 물론 행동이 지식의 범주 안에만 갇혀 있으면 안되지만, 일차적으로 우리는 행동하기 전에 지식을 얼마간 갖출 필요가 있다. 그래야 행동을 바르게 할 수 있고, 무엇보다, 행동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다.

 

3. 미국에 청소년 환경단체, ‘우리 어린이들의 신뢰(Our Children’s Trust/자녀들의 신뢰/자녀세대의 신뢰)’가 있다. 우리 아이들(자녀들/자녀세대)이 가진 신뢰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어른들(어른세대)이 자신들의 미래를 지켜줄 것/열어줄 것이라는 신뢰이다. 그런데, 기후변화를 보니, 그러한 신뢰가 무너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어린이들의 신뢰’ 단체의 청소년들은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들의 소장은 이렇다. “미국 정부가 기후변화로 인해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권리가 훼손되지 않도록 보호하지 못한 것은 헌법을 위반한 것이다!” 자녀 세대의 미래를 희망 차고 밝게 만들어 주는 것은 부모 세대의 의무이다. 이것은 도덕적 의무이기도 하지만, 법적인 의무이기도 하다.

 

4. 로마서에서 바울은 로마교회 교인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물론 이것은 실제적 소송은 아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은 소송이다. 영적인 소송이다. “우리 어린이들의 신뢰” 단체가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처럼, 바울은 로마교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나는 그 소송장이 1장 17절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5. 이 문장에서 바울은 로마교회를 향해 어떠한 소송을 하고 있는 것 같은가? 믿음으로 살아야 할 의인들(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이들)이 지금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소송장이다. 로마교회는 강한 자들, 즉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약한 자들, 즉 유대인 그리스도인이 함께 세운 공동체이다. 쉽게 말해, 로마교회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섞여 있는 공동체이다. 이들은 모두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아 한 몸을 이루어 교회 공동체를 세운 이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가운데 발생하는 실제적인 문제들을 풀어나갈 때, 그 문제를 해결할 가장 중요한 열쇠는 ‘믿음’이다.

 

6. 그러나, 이들은 믿음으로 살아야 할 의인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업신여겼고, 약한 자들은 강한 자들을 비판했다. 믿음을 제일 원리로 생각하여 그들 사이에 있는 갈등을 해결했어야 마땅한데, 이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강한 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지위를 믿음보다 먼저 내세웠고, 약한 자들은 자신들의 가지고 있는 선민의식을 믿음보다 먼저 내세웠다. 그렇다 보니, 교회 공동체가 흉해졌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한 로마교회 공동체를 향하여 영적인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다. 로마교회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로마교회에 소송을 제기합니다!”

 

7. 본문은 매우 문제적인 본문이다. 특별히 26절과 27절은 동성애 문제를 다룰 때 자주 소환되는 본문이다.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색깔이 달라진다. 우리는 여기에서 동성애 문제를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바울의 소송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란다’라는 속담이 가진 의미에 비추어서 본문을 들여다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로마교회가 당면한 문제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여러 번, 로마교회가 당면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 간의 갈등 말이다.

 

8. 바울은 인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현실을 ‘고통’이라는 한 단어를 통해서 표현하는 반면에, 바울(기독교)은 인간의 현실을 ‘죄’라는 한 단어를 통해서 표현한다. 고통과 죄, 그냥 듣기만 해도, 인간의 현실은 비참하다. 불교나 성경에서 표현하는 인간의 현실 외에,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인간의 현실을 경험하면서 그 현실을 표현할 수 있는 한 단어는 무엇이 있을까? 죽음, 한, 허무, 부조리 등이 떠오른다. 아무튼,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의 현실은 그리 긍정적이지 못한 것 같다.

 

9. 바울은 왜 로마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내며, 살가운 인사를 나눈 뒤, 곧바로 이렇게 처참한 인간의 현실에 대해서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바울은 사디스트인가? 로마교회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은 것인가? 일면식도 없는 이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면서 이렇게 처참한 인간의 현실을 드러냄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너무 예의 없는 행동처럼 느껴진다. 한 번 생각해 보라. 누군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나에게 와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한 뒤, 갑자기, 내 인생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일장 연설하듯이 늘어놓는다고 생각해 보라.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10. 사실, 우리가 전도할 때, 이러한 실수를 많이 저질렀다. 특별히 (한국에서 한 때 유행했던) 사영리 같은 것을 가지고 전도할 때, 인사를 나눈 뒤 첫 번째 하는 말이 이런 것 아니었나? “당신은 죄인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상대방을 다그친다. “네 죄를 인정하렸다!” 상대방이 죄를 인정할 때, 그때 복음을 제시한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셔서, 죄인인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고, 당신을 구원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별로 유쾌하지 못한 방식으로 전도를 했다. 그때는 그렇게 해야만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러한 전도 방식이 얼마나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드는 전도방식이었는지, 반성해 본다.

 

11. 로마교회 사람들은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바울이 그들을 전도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제시하기 전에, 그들이 얼마나 죄인인가를 인정하라고, 이렇게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말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을 또다시 전도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이렇게 인간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서 주구장창 일장 연설을 하고 있는 것일까?

 

12. 여기에서 바로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란다’라는 속담이 필요하다.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업신여겼고, 약한 자들은 강한 자들을 비판했다. 쉽게 말해서, 서로 자신들이 잘났다고 교만하게 군 것이다. 이렇게 자기가 더 잘났다고 교만을 떠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 메타인지라고 한다. 헤겔은 이렇게 메타인지를 할 수 있는 존재를 ‘대자적 존재’라고 표현했다. 한자어라서 말이 어려운데, 개념은 쉽다. 내가 나에게서 한 발짝 물러나서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13. 인간은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니, 그러한 능력을 발휘할 때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물이나 식물과 인간이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동물이나 식물은 ‘즉자적 존재’이다. 자기 자신으로만 머물러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메타인지를 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은 메타인지가 가능하다. 가능하지만, 실제로 잘 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동물이나 식물 같은 존재들이 많다. 메타인지가 부족한 사람을 만나면 참 어렵다.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 노력해야 한다. 즉, 우리는 늘 자기 자신을 한 발짝 물러나 돌아볼 줄 알아야 하고, 그러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리고 좋은 사람들과 친교를 하는 일도 중요하다. 내가 메타인지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좋은 친구다.

 

13. 바울이 비참한 현실을 말하는 것은 정죄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다. 로마서를 잘못 읽으면 비참한 현실을 진술한 말씀이 인간을 정죄하는 데 잘못 쓰인다. 우리는 수없이 많이 그러한 순간을 목격했다. 정죄를 당한 인간은 의기소침해지고, 그 정죄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렇게 정죄하고 있는 사람에게 포로가 되기 십상이다. 착취는 그러한 메커니즘을 통해서 발생한다. 우리는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말하는 본문을 가지고 인간을 정죄하는데 쓰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를 쉽게 정죄하는 나쁜 사람들의 술수에 넘어가서는 안된다.

 

14. 바울이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말하는 것은 정죄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을 알려주려는 것이다. ‘나는 원래 이런 놈이야’, 이런 자괴감이나 자포자기에 빠지게 하려는 게 아니라, ‘그렇지 나는 원래 존귀한 사람이지, 그러니 힘을 내야지’,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울은 로마교회의 컨텍스트에서, 서로를 정죄하고 있는 강한 자들이나 약한 자들이 존재론적으로 얼마나 평등한 존재인지를 메타인지 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말하고 있는 맥락은 정죄가 아니라, 평등이다. 바울에게서 이 말을 들은 로마교회 성도들은 이렇게 마음을 먹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렇지. 내가 무슨 자격으로 상대방을 업신여기겠어. 내가 무슨 자격으로 상대방을 판단하겠어. 우리의 존재가 다 이렇게 평등한데. 우리가 다 불경과 불의 속에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사람들인데. 저 사람이나 나나, 오십보 백보지 뭐. 겨 묻은 내가 무슨 자격으로 똥 묻은 개를 나무라겠어.”

 

15. 바울은 본문에서 왜 이렇게 인간의 현실이 비참하게 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아는 지식을 태초부터 주셨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공경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고 한다. 이렇게 흉한 일, 비참한 현실이 로마교회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하고 있다. 바울이 본문에서 열거하고 있는 악습(29-31절)과도 같은 일이 로마교회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를 업신여기고 비판하는 일, 본인들이 스스로 인식을 하고 있지 못해서 그렇지, 인간의 비참한 현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 안에서 여전히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지금 바로 그 현상에 대해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16. 로마교회 공동체 안에서 왜 그렇게 흉한 일이 발생했는가? 바울이 말하는 매우 일반적인 인간의 비참한 현실이 발생한 원인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데,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자신이 가진 사회적 지위의 우월성, 자신이 가진 선민의식의 우월성이 믿음보다 먼저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통렬한 지적이고 소송이고,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주는 메타인지의 선물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로마서를 읽을 때 바울의 정서를 세심하게 읽어낼 필요가 있다. 정죄의 정서로 읽으면 안 되고, 사랑의 정서를 가지고 읽어야 한다. 바울은 지금 로마교회 성도들을 정죄하는 게 아니라, 사랑의 마음으로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본인들의 모습을 조금 돌아보십시오!’(메타인지)

 

17. 로마서를 성경으로 받아들여 읽고 있는 우리들에게 바울의 애정 어린 소송은 로마교회를 향한 소송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에게 하는 소송으로 다가온다. 복음을 듣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구원받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는 의인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무엇을 하든지, 무슨 일을 만나든지, 무슨 일을 해결하려 할 때든지, 그 모든 것의 원리는 믿음이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존중해야 한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존중하는 일이 진리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the truth will set you free)”(요 8:32)고 할 때, 그 뜻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존중하는 일은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이다. 이 말이 어느 대학교에 걸려 있다 보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이 ‘학문적 성과를 통해서 얻게 된 지식이 우리를 자유케 해준다’는 뜻으로 오해되고 왜곡되기도 하지만, 진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존중하는 것이다. 지식이 진리가 아니라 존재가 진리다. 하나님이 진리다.

 

18. 우리는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 즉, 진리가 드러나도록 살고 있는가? 다시 말해,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존중하며 살아가는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가? 그렇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일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그 자체가 영광송(doxology)이어야 한다. 지금, 로마교회는 그렇지 못하다.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혹시 그러한 것은 아닌가? 나 자신에서 한 발짝 떨어져 나 자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메타인지가 필요하다. 바울은 우리에게 애정 어린 마음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겨 묻은 개여, 똥 묻는 개를 나무라지 말라.” 비참한 현실을 직면하여,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보듬고 살아야지, 서로에게 악한 일을 저지르면 안 된다. 오직,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존중하는 일이 우리 삶 속에 일어나도록, 진리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할 것이다. 그것이 로마교회의 평화요, 곧 우리의 평화이다.

Posted by 장준식

[기후교회로 가는 길]

 

3. 목표의 재설정이 필요한 교회

 

CO2.Earth에 보면 대기중 탄소 농도 수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즘 탄소 농도는 415 ppm 근처를 맴도는 듯합니다. 요즘 우리는 아무리 바빠도 주식 시세 확인하는 데는 시간을 쓰지만, 탄소 농도 확인하는 데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짐 안탈 목사는 『기후교회』에서 아주 재미난 말을 합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주소에 살고 있는데, 그 주소는 407번지라고 합니다. 책을 쓸 당시 지구의 탄소 농도는 407 ppm이었던 듯합니다. 책이 출간된 지 몇 년 지나지 않았는데, 그 사이에, 탄소 농도가 조금 더 올라간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같은 주소에 살고 있습니다. 탄소 농도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의 주소를 가리킵니다. 매우 재미 있는, 그리고 의미 있는 상상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떠한 삶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제시해 주는 선지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구약의 예언서는 우리에게 좋은 지침서가 됩니다. 이사야서나 다니엘서 같은 대선지서와 아모스와 말라기 같은 소선지서를 보면,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의 주된 관심사가 무엇이었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선지자들은 당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의견을 피력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목표를 설정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제시합니다. 목표 설정을 잘한 공동체는 살아남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공동체는 멸망 당할 것이라는, 다소 단순해 보이는 메시지가 전해집니다.

 

메시지의 선포는 단순하지만, 그것을 수용하고 따르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선지자들의 메시지 선포가 현재 우리들에게 표면적으로 다가와서 그렇지, 그 당시 사람들은 살아가느라 삶에 묻혀 무엇이 문제인지 전혀 파악을 하지 못했으니까요. 이러한 현상은 지금도 마찬가지로 경험되는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심각한 삶의 문제가 무엇인지 잘 모를 뿐더러, 설사 알고 있다 하더라도 삶의 방식을 바꾸거나 목표를 재설정하는 일을 잘 하지 못합니다. 생활방식을 바꾸는 일은 하루 아침에 되지 않을 뿐더러, 많은 에너지가 소요되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흐르고, 시대는 바뀝니다. 그러면서 인류가 맞닥뜨리게 되는 문제도 바뀝니다.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때그때 마다 인류가 맞닥뜨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헌신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발견합니다. 6세기의 베네딕트(Benedict)회 수도사들은 로마제국의 붕괴와 더불어 유럽의 경작지들과 숲이 파괴된 사실에 초점을 맞춰, 숲에 나무를 다시 심고 물이 흐르는 길을 새로 내고 개울과 연못을 만들어내고 퇴비거름을 개발하여 소개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그들은 땅과 물의 회복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신앙의 실천이자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고 믿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나치 정권에 맞서 ‘고백교회의 비상 교육 신학교’(핑켄발데/Finkenwalde)를 세워, 나치 정권이 하는 일에 대하여 “의견을 달리하고 저항하는” 그리스도인과, “영적인 훈련, 희생, 그리고 확장된 도덕적 상상력으로 구별되는 새로운 방식의 기독교인”을 양성하고자 했습니다. (기후교회, 112쪽)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에 맞는 목표를 재설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짐 안탈 목사는 묻습니다. “교회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한때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제공해주었던 필요들을 이제는 사람들이 다른 방법들을 통해 성취하는 길을 찾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만 보더라도, 선교 초기에 사람들은 교회가 제공하는 교육이나 복지를 제공받으려고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그러나 교육기관이 발달되고 복지사회가 되면서 이제 교육과 복지를 위해서 교회를 찾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이민교회의 상황도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예전에 이민자들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 한국 음식이나 문화에 대한 그리움 등을 달래기 위해서, 그리고 정보를 얻기 위해서 교회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정보통신과 교통수단의 발달, 그리고 경제적 풍요로 인하여 그러한 것들은 직접 해결 가능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요즘엔 시간이 없어서 한국에 못 가지 돈이 없어서 못 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교회는 무엇을 위한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후변화로 인한 수많은 위기를 맞닥뜨리고 있는 이 시대에, 교회가 목표를 재설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요청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 이것은 도덕적인 신앙의 결단입니다. 교회는 어떻게 목표를 재설정해야 할까요? 짐 안탈 목사는 교회의 목표 재설정을 위해서 미국인과 미국교회를 비판적으로 돌아보고 있는데, 그 비판은 한국인과 한국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한국 사회는 너무도 미국 사회와 닮아버렸기 때문입니다. 미국인 정서의 가장 특징적인 것 중의 하나는 엄격한 개인주의입니다. 그렇다 보니, 미국 교회는 그 정서에 부응하여 오랫동안 개인구원에 집중하는 ‘복음’을 전해왔습니다. 이것은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가 가진 특징입니다. 한국 사회가 경제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60, 70년대에 미국의 복음주의를 배워온 한국 목회자들에 의해서 한국교회도 미국교회처럼 개인구원에 대한 복음을 대중화시켰습니다. 이는 경제성장과 더불어 점차 개인화되어 가는 한국인들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기후위기를 통해서 인간이 살아가려면 인간만 잘 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머지 피조물과도 상호의존 가운데 있다는 것을 통감하게 되었습니다. 기후위기가 교회에 주는 교훈은 너무도 명백합니다. 인간의 영혼 구원에만 초점을 맞추었던 그동안의 신앙 행태는 잘못된 것이고, 모든 만물에 대한 구원으로 구원의 의미를 확장시키는 일은 너무도 중요한 이 시대의 신앙의 과제가 된 것입니다. 즉, 인간 중심의 구원론에서 하나님 중심의 구원론, 또는 종말론적 구원론으로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이는 구원을 말할 때 인간 개인의 구원만을 더 이상 말할 수 없고, 총체적인 구원(holistic salvation)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지구의 구원 없이 인간의 구원은 없다’라는 말로 바꾸어 쓸 수도 있겠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우리는 ‘황금률 2.0’에 대하여 반드시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짐 안탈 목사는 말합니다. “우리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부르심을 받았고, 또한 이 새로운 지구 위에서, 우리는 미래의 세대들이 오늘 바로 이웃집에 사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웃임을 인정해야 한다”(기후교회, 126쪽). 이 황금률은 기후변화에 맞선 청소년들의 단체 “우리 어린이들의 신뢰(Our Children’s Trust)의 활동을 통해서 부각됩니다. 이 단체의 청소년들은 지난 2015년, 미국 연방 정부를 상대로 다음과 같은 소송을 걸었습니다. “미국이 기후변화 때문에 우리들의 미래에 대한 권리가 훼손되지 않도록 보호하지 못한 것은 헌법을 위반한 것이다!” 황금률 2.0은 지금 현재 동시대에 존재하는 사람들만 우리들의 이웃이 아니라, 앞으로 올 세대(generation to come)도 우리의 이웃이라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기후변화에 도덕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우리 시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 세대를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기후변화로 인하여 극심하게 겪게 될 당면한 사회적 문제들을 앞에 놓아두고, 교회가 목표를 재설정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목표를 재설정해야 하는 지도 분명해 보입니다. 이 주제에 대하여 우리 시대의 선지자 역할을 하고 있는 토마스 배리(Thomas Berry)나 래리 라스무쎈(Larry Rasmussen) 같은 신학자들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산업 공학기술 시대에서 생태 시대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특별히, 라스무쎈은 지난 170년간 땅에 근거한 경제로부터 자연을 착취하며 자연이 유기체적으로 신생을 못하게 만드는 산업경제로 체제가 이동하는 동안 교회는 이에 저항하지 못하고 목줄에 매인 듯 개처럼 질질 끌려왔다고 비판합니다. 기후위기 시대를 맞아, 더 이상 교회는 개처럼 질질 끌려가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묻습니다. “교회는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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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훈맹정음]

 

"눈이 사람의 모든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영혼이니 시각장애인들이 배움을 포기하지 않도록 교육에 힘써달라."

ㅡ 훈맹정음 창시자 송암 박두성 선생의 유훈.

 

1926년 11월 4일, 송암 박두성 선생은 훈맹정음을 만들어 시각장애인들의 교육에 힘썼다. 일제 시대, 선생은 시각장애인들이 일본어로 된 점자를 통해서 왜곡된 역사를 배우고 있는 교육 현장에 통탄하여 한글로 된 점자를 만들어 보급했다.

 

송암 선생은 강화도 출생이다. 강화도 출신 중 훌륭한 분들이 많다. (은퇴하면 강화도 가서 살아야 하나. 귀향인가?^^)

 

송암 선생은 1931년 성서 점역에 착수하여, 1957년 신구약 모두 점역을 완성했다. 점자 성경 최신판은 대한성서공회에서 2001년에 출간한 개역개정 판이 있다. 점자 공동번역성서도 있다(1979년). 

 

이미지 정치가 판을 치는 요즘,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성경과 세상을 읽는 방법을 더 많이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눈으로 성경을 읽고 세상을 읽었다가는, 이미지 정치의 술수에 넘어가 '개끌려가듯' 끌려다니기 쉬운 세상이다.

 

눈 버리기 쉬운 세상, 눈으로 보는 것에 실망하고 절망해서 배움이나 저항을 포기하지 말고, 영혼이 중요한 것이니 정신 바짝 차리고 더 열심히 공부하고 저항할 일이다.

 

송암 선생처럼 창조적으로 저항하는 일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다. 평범한 사람들의 창조적 저항이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22. 11. 1. 03:53

성인(聖人/Saint)과 성인(成人/Grown-Up)

(로마서 1:8-17)

 

1. 종교개혁 505주년을 기념하는 종교개혁주일, 그리고 성인들(Saints)의 삶을 기억하고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가 된 것을 기뻐하는 만성절 주일에 로마서를 살펴보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만성절 전야제 때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루터의 종교개혁에 도화선이 되었던 로마서 1장 17절이 포함된 본문을 살피는 것은 더더욱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개신교인들에게 만성절은 우리의 신앙과 삶, 그리고 이 세상의 일들을 두루두루 살피기에 참 좋은 날입니다. (의도했던 것은 아닌데, 어떻게 하다 보니, 오늘, 로마서의 이 본문을 살펴보게 됐네요.)

 

2. 바울은 이 편지를 로마교회에 써서 보냈지만, 우리는 이 편지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유익한 방식으로 읽어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우선 두 가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첫째는 바울이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라고 한 것과, 둘째는, 로마교회에 “복음을 전하기 원하다.”는 말입니다. 왜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할까요? 원래 복음은 부끄러운 것일까요? 도대체 복음이 무엇이길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복음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3. 그리스도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되지 않은 복음은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이라는 말을 하지만, 그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지만, 바울 당시 로마인들에게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로마의 십자가 형을 받은 예수와 연관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에서 십자가 형에 처해지는 사람은 로마에 거역하는 무리였습니다. 로마인들은 높은 지위를 갈구했고, 모든 것은 로마가 가진 군사력에 의해 움직였습니다. 로마 사회는 굉장히 정치적인 사회였습니다. 로마인들이 사용했던 라틴어는 굉장히 정치적인 언어입니다. 그렇다 보니, 굉장히 수사적인 언어이기도 합니다. (기회 있으면 아이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면 정말 좋습니다.)

 

4. 그러니까, 로마교회에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바울이 굉장히 그들의 마음을 보듬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긴 했지만, 혹시라도, 마음에 거리낌이 있을 지 모르는 것에 대해서, 오히려 본인들의 신앙에 대하여 담대한 마음을 가지라고 격려하는 말인 것이죠. 그러면서, 바울은 로마교회에 “복음을 전하기 원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게 좀 이해가 안 가는 말입니다. 로마교회는 이미 복음을 들어서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인데, 그들에게 복음을 또 전한다고 하는 것이 좀 이상해 보입니다. 이미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대개 ‘복음을 전한다(흔히, ‘전도’라고 말합니다만)’고 했을 때, ‘회심자를 얻기 위한 행위’ 정도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 안 믿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하는 행위, 그래서 교회 나오게 하는 것’을 ‘복음 전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복음을 이렇게 좁은 의미로 생각하는 데 익숙한 이들은 바울이 로마교회에 “복음을 전하기 원한다”는 말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5.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를 믿고 교회 다니는 사람을 만드는 것’을 넘어서, ‘삶의 전환’을 말하는 것입니다. 회심을 할 뿐만 아니라, 삶의 방식 자체를 바꾸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면서도 세상이 요구하고 원하는 삶의 방식을 따라 사는 것은 복음을 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로마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듣고 교회를 다니면서 여전히 로마인들이 갈망했던 삶의 방식, 즉 높은 지위를 갈구해서 그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수많은 정치적 술수를 쓰고 사람을 죽이고 차별하는 행위를 하거나, 군사력(힘)에 의지하는 삶을 사는 것은 복음을 들은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좀더 논의 좁혀서 얘기하면, 예수를 믿고 로마교회를 세운 로마교회 구성원들이 여전히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로 갈려서(분열되어서) 서로 업신여기고 판단하면서 불화하는 삶을 사는 것은 복음을 실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7. 몇 절 안 되는 구절이지만, 우리는 바울의 진술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첫째, 우리는 우정을 배웁니다. 9절과 10절을 보면,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한 우정을 드러내고 갈망합니다. 바울은 기도하면서 끊임없이 로마교회 성도들을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우정이란 이런 것이죠. 상대방을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 이것뿐만이 아니라, 바울은 자신의 편지를 받은 로마교회 성도들을 꼭 대면하여 만나고 싶어했습니다. 우정은 이런 것입니다. 상대방을 기도 안에서 끊임없이 생각하며, 만나고 싶어하는 것. 우리 교우들 간에도 이러한 우정이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지 모릅니다.

 

8. 둘째로, 바울에게서 우리는 우정을 나누는 사이에서 실제적으로 발생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11절에 보면,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해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만나서 악한 일을 꾸미고 남을 험담하는 것은 우정이 아닙니다. 우정을 나눈 사람들은 만나서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줍니다. 우리 나라 말로 ‘신령한 은사(spiritual gift)’로 번역되어 있어 그 뜻이 모호한데, 이것을 풀어서 설명하면, 영혼을 풍성하게 하는 선물’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다짐이 있어야 합니다. 우정을 나누는 우리들 사이에 있는 만남 가운데 서로가 서로의 영혼을 풍성하게 하는 선물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선물을 줄 수 있는 인격과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 삶이 되겠습니까?

 

9.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을 만나서 ‘신령한 은사’, 즉 그들의 영혼을 풍성하게 하는 선물을 나누어 주고 싶었습니다. 로마교회의 정황에서 이 선물이 무엇인지를 너무도 자명합니다. 우리는 이미 바울이 로마교회에 주고 싶은 ‘선물’이 무엇인지 15장에서 확인했습니다. 한 마디로, “서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주는 선물을 받으면, 로마교회는 더 강건해집니다.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로 나뉘어 서로를 업신여기고 판단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며 평화롭게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서로를 받아들인 삶’입니다. 이러한 삶은 당연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는 것이죠. 우리의 삶에도 이러한 선물이 가득하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10. 셋째로, 바울은 11절에서 로마교회 사이에 있는 ‘신뢰’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우리 나라 말로는 ‘너희와 나의 믿음’이라고 번역했지만, 여기에서의 믿음은 ‘faith’의 의미보다는 ‘trust’의 의미로 쓰였습니다. ‘너와 나’ 사이에 신뢰(trust)가 있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바로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서로 신뢰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위로가 됩니다. 신뢰라는 것은 이런 것이죠. ‘저 사람은 나에게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나를 떠나거나 배신하지 않을 거야. 언제나 내 곁에서 큰 힘이 되어줄 거야.’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언제 내 곁을 떠날지 모르는 사이, 관계가 조마조마한 사이 간에는 위로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서로에게 신뢰를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말이든, 행동이든, ‘나는 너와 함께 할 거야. 그러니 걱정마.’ 이러한 싸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위로를 받습니다.

 

11. 넷째로, 우리는 바울에게서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삶의 자세(basic life attitude)를 배웁니다. 이게 제일 중요합니다. 바울은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오페일레테스)라.” 영어로는 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한다. “I am under obligation both to Greeks and to barbarians, both to the wise and to the foolish.” ‘헬라인이나 야만인,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라는 말은 ‘모든 사람들에게’라는 뜻입니다. 의미를 더 확대하면,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에게’라는 뜻입니다. “I am under obligation”이라는 말, 나는 빚진 자”라는 말은 복음을 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정말 중요한 삶의 자세입니다.

 

12. 만성절(All Saints Day)은 기독교의 성인을 기리는 날입니다. 특별히 켈트족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기독교는 켈트족의 문화인 샴하인을 받아들였는데, 그날 켈트족은 죽은 조상들의 혼을 달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 문화에 착안하여, 기독교는 신앙을 지키다 죽은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날로 삼았습니다. 할로윈은 ‘만성절 전야’라는 뜻입니다. 할로윈은 매우 영적인 날입니다. 할로윈은 매우 경건한 날입니다. 순교자를 기억하고, 또한 좀 더 축일을 확대하여, 기독교의 성인을 기억하면서, 그들처럼 우리도 성스러운 삶을 살 것을 다짐하는 날입니다. 이러한 날이 루터의 종교개혁 시대에는 면죄부를 파는 날로 타락하여 바로 이날 루터는 반박문을 내었던 것이죠. 좋은 문화가 아니라 그 문화를 타락시키는 무리들이 나쁜 것이죠.

 

13. 우리는 왜 어떠한 사람을 ‘성인(聖人/Saint)’이라고 부릅니까? 그들의 삶이 바울이 말하는 ‘빚진 자’의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이 무슨 ‘obligation(의무)’이 있는 사람처럼 이웃의 삶과 세상을 돌봤습니다. 사람들과 진실한 우정을 나누었고, 물심양면으로 상대방의 영혼을 풍성하게 하는 선물을 나누어 주었고, 신뢰를 잃지 않았고, 누구든지 자신의 형제자매처럼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삶을 산 사람들을 ‘성인(Saint)’라고 부릅니다. 할로윈은 귀신 분장을 하고 먹고 마시고 춤 추며 소비하는 날이 아니라, 우리도 성인들(Saints)처럼 ‘빚진 자’의 삶을 살아보겠다고 다짐하는 날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런 날입니다.

 

14. 한국어의 성인이라는 말의 의미가 가진 두 가지의 뜻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좀 더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한국어의 성인은 ‘성인(聖人/Saint)’이 되기도 하지만, ‘성인(成人/grown-up)이 되기도 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한국인이었다면 이 두 가지의 의미를 통해서 자신의 신학사상을 전개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만인제사장설’은 마르틴 루터의 신학으로부터 온 용어입니다. ‘만인제사장설’은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인(Saints)이다’라는 뜻입니다. 만성절은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성인(순교자를 비롯한, 위대한 신앙의 선조들)을 기억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인(Saint)이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즉, 어른(grown-up)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철 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철 든다는 것’은 ‘성인(Saint)가 되는 것’이라는 뜻으로 바꾸어 쓸 수 있습니다. 바울의 말을 빌리면, 성인(grown-up)이 된다는 것은 ‘빚진 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빚진 자입니다. We are under obligation to everything!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이렇게 성장하기까지, 성인이 되기까지, 우리는 수없이 많은 것들로부터 빚을 졌습니다. 스스로, 아무런 도움없이, 이렇게 성장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15. 한자어인 ‘성인(成人/grown-up)’의 뜻도 사실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성인(成人)이란 ‘인간됨을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좀 철없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좀 되라!’ 그리고 우리는 인간이 좀 덜 된 사람들에게 인간의 지위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동물의 지위를 부여합니다. 그래서 동양인의 사고에서 동물로 표현하는 욕은 최고의 모욕적인 욕입니다. (요즘에는 개들이 아주 존중받는 사회이기 때문에 ‘개새끼’라는 욕은 좀 의미를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참 이상한 것은 반려견을 키우며 반려견을 애지중지하는 사람도 욕을 할 때는 ‘개새끼’라는 욕을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이건 좀 아니지 않나요? 반려견을 존중하면 적어도 ‘개’가 들어가는 욕은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럼, 요즘에는 사람들이 하도 형편없으니, ‘사람 새끼’라고 하거나, 사람 중에 형편없는 인간을 지칭하면서, ‘ooo같은 새끼’라고 하면 좋은 욕이 될까요?)

 

16. 아무튼, 우리는 ‘성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인이 ‘성인(saint)’이든, ‘성인(grown-up)’이든, 사람이 된다는 것은 기독교 용어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과 다르지 않고, 이는 로마서의 언어, 바울의 언어로 하면, ‘빚진 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를 믿고 교회 다니는 사람’, 또는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 가는 사람’이라는 뜻을 훨씬 넘어서는 ‘빚진 자가 되는 것’, 즉,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영어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It’s time to grow up!” 보통 어른들이 철없은 아이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철 좀 들어라! / 어른이 좀 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grow up(성장해서)’해서 ‘grown-up(어른)’이 된다는 뜻입니다.

 

17. 로마교회 성도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빚진 자처럼 살아간다면, 강한 자들이나 약한 자들이나 서로 업신여기고 판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빚진 자가 되어 서로를 잘 섬길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을 이루는 그리스도인의 일이고,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의 태도이고, 로마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이룬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빚진 자’로 살아간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이 되겠습니까. 상상만 해도 행복합니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연에게도 빚진 자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자연에게도 의무를 가진 자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기후변화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입니다. 즉 우리는 “We are under obligation both to human beings and to nature.”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성인(saint 또는 grown-up)의 태도이고 삶입니다.

 

18. 종교개혁 505주년을 기념하는 오늘, 그리고 성인들을 기억하며 성인들처럼 경건한 삶을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오늘, 우리의 삶이 로마서의 고백처럼, ‘빚진 자’의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