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두 가지 불행]

 

1. 칸트를 통해서 근대국가 건설을 하지 못한 것

 

유럽과 미국, 심지어 일본도 근대 국가를 건설하는데 있어 칸트 철학을 근간으로 삼았다. 근대 국가의 특징 중 하나는 '공화주의'이다. 공화주의는 입법권과 행정권, 그리고 사법권을 철저하게 분리하여 서로 견제하게 하는 정치 체제다. 근대 국가는 칸트가 제시한 공화제가 어떻게 작동하느냐에 따라서 정치의 건강 상태가 달라진다.

 

유럽은 일찍이 칸트 정치철학을 바탕으로 근대 국가 설립에 힘을 쏟았다. 미국은 유럽에서 건너온 칸트주의자들에 의해서 공화제를 수립했다. 일본조차도 칸트에게서 정치철학을 배워 근대 국가를 수립했다. (한국에서 통용되는 칸트 철학 용어는 모두 일본어에서 차용된 것이다. 그래서 한국 사람이 칸트 철학을 이해하는 게 쉽지 않다. 한국인들이 평상시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칸트 책은 일본용어로 된 한국어이다. 그래서 칸트가 어렵다. 칸트의 한국어 용어 번역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그냥 일반 사람들도 칸트를 더 쉽게 공부할 수 있다. 철학책을 보면 더 확연히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 한국은 아직 일제시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의 정치는 겨우 민주화를 이루었지만, 공화제로 아직 발돋음 하지 못했다. 삼권분립이 약하다. 행정권에 입법권과 사법권이 끌려다니는 형국이다. 그래서 한국의 정치는 아수라장이다.

 

한국의 정치 상황을 변화시키려면, 칸트 공부를 제대로 해야 한다. 정치인들이 칸트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그래야 서구 사회와 대등한 관계에서 국제 관계를 이끌어 나갈 수 있다.

 

정치에서도의 도덕의 부재, 그리고 종교에서의 도덕의 부재는 모두 칸트 정치철학을 잘 모르는 데서 오는 부작용들이다. 칸트의 도덕(정치)철학은 정치와 종교의 부패를 막고 비판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다. 서구 사회의 거대한 두 권력, 즉 정치(정부)와 종교는 비판의 대상이다. 비판 받지 않는 정치와 종교는 부패할 수밖에 없다. 철학의 임무, 그리고 신학의 임무는 정치와 종교를 비판하는 일이다. 그래서 정치와 종교가 인간성을 훼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2. 68혁명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

 

한국 사회의 불행 중 두 번째 것은 한국 사회가 68혁명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서구 근대 역사에는 아주 중요한 두 개의 혁명이 있다. 하나는 1848년 프랑스에서 있었던 소위 '국민국가들의 봄'(Spring of Nations)이고, 다른 하나는 1968년 프랑스에서 시작돼 온 유럽을 휩쓸고 미국, 그리고 일본을 휩쓸었던 68혁명이다.

 

1848년 혁명은 그렇다 치고, 1968년에 있었던 68혁명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한국 사회의 큰 불행이다. 68혁명은 베트남 전쟁 반대를 기치로 일어난 혁명이었는데, 그 당시 한국은 미국의 요청에 따라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하지만 베트콩의 요청으로 김일성은 1969년 김신조 일당을 남파했고, 그것 때문에 남한은 공안정국에 휩싸여 그당시 전세계를 휩쓸었던 68혁명이 일본을 거쳐 현해탄을 건너오려다 막혀버렸다.

 

일본의 양심적 학자들, 즉 일본의 대동아전쟁의 책임을 통회하는 학자들, 일제 강점기 문제나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일본 정부에 책임을 묻고 한국 정부나 국민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학자들은 모두 68혁명 세대의 일본 학자들이다. 그만큼 68혁명은 세계 정치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어 놓았다. 독일이 2차 세계 대전과 아우슈비츠 사건(나치 사건)에 대해서 통감하고 진심으로 사죄하는 이유도 68혁명을 거쳤기 때문이다. 한국이 정치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세계의 흐름에 뒤처진 이유는 68혁명의 물결에 휩쓸림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선진국들은 칸트 정치철학을 바탕으로 근대 국가를 세웠고, 68혁명을 거치면서 정치적, 사상적 진보를 이루었다. 칸트와 68혁명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았으면서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하지만, 면면히 한국 사회를 들여다 보면, 칸트와 68혁명을 거친 선진국들에 비해서 부족한 것이 많다. 무엇보다 사상의 토대가 약하다. 한국은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선진국 대열에 올라섰을 뿐, 사회, 문화적 깊이와 진보성에 대해서는 아직 전근대적인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많다. 성(gender, homosexuality)의 문제만 봐도 그렇다.

 

3. 결론: 칸트와 68혁명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한국이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 한국보다 앞선 서구의 선진국(일본 포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경쟁하려면, 지금부터라도 칸트와 68혁명을 열심히 공부하여 근대 국가의 기틀과 사상을 재점검하고, 사회 속속들이 깊게 칸트와 68혁명의 가치를 내면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동시에 단순히 그것들을 내면화시키는 것을 넘어, 칸트와 68혁명을 재해석하고, 그것이 가져다 준 부작용들을 최소화시키고, 더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사회를 재구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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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감사절 풍경

 

감사절, 잘 보내셨는지요? 가족들과 함께 좋은 시간 보내셨을 줄 믿습니다. 명절이 오면 혹시 쓸쓸한 분이 계시지나 않을까, 마음이 쓰이기도 합니다. 다행히 우리 교회에는 가족과 멀리 떨어져 혼자 지내시는 분이 없어, 한시름 놓았습니다.

 

저희 가정은 오랜만에 선/후배 목사님들 가정과 모임을 가졌습니다. 알래스카에서 목회 중인 목사님 가정이 감사절 연휴를 맞아 배이지역을 방문하는 덕에, 겸사겸사 모였습니다. 막상 모임 장소에 가보니, 오기로 한 목사님들보다 더 많은 인원이 모였습니다. 처음 모임에 나오는 후배 목사님 가정도 있었고, 정말 오랜만에 보는 후배 목사님 가정도 있었습니다.

 

목사들이 모이면, 목회 이야기로 이야기 꽃을 피웁니다. 저희들이 나눈 이야기의 주제는 팬데믹 이후 교회의 변동이었습니다. 교회의 상황이 공통적인 것은 팬데믹 이후에 교인의 3분 1은 교회로 돌아오고, 3분의 1은 하이브리드 참석(현장과 온라인)을 하고, 3분의 1은 증발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팬데믹은 신체(body)에 끼친 영향보다 정신(soul)에 끼친 영향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바이러스는 백신을 통해서 퇴치했는데, 정신의 바이러스는 아직 퇴치를 못한 것입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미래 목회로 흘렀습니다. 미래 목회에 가장 영향을 끼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주제는 기후변화와 AI로 모아졌습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기후변화가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는지 잘 못 느끼지만, 당장 알래스카에서 목회하고 있는 목사님 가정은 기후변화가 얼마나 심각한지 몸으로 체험한다고 합니다. 예년에 비해 눈이 두배 왔고, 빙하가 녹아 하천의 물이 너무 불어나 주변의 집들이 쓸려 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연어가 돌아오질 않고, 고래 사냥에도 어려움이 있다고 합니다.

 

자연재해가 인간의 삶을 얼마나 바꾸어 놓을 수 있는지, 우리는 이미 지난 팬데믹을 통해서 경험했습니다. 극지방의 눈이 녹으면서 그동안 인간이 경험하지 못한 바이러스의 출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바이러스 팬데믹을 또 겪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는 것이죠. 게다가 기후변화는 바다와 땅을 황폐화시켜, 어느 시점에 달하면, 식량폭동을 가져올 것이라는 전망이 큽니다. 조금 춥거나, 조금 더워지는 것은 인간이 견뎌낼 수 있으나, 식량 제배가 되지 않아 식량폭동이 일어나면 인간의 삶은 야만으로 치닫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우스갯말로, 비옥한 내륙지방으로 이사를 가고, 총을 구비해야 하는 시절이 되었다고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정말 끔찍한 농담이면서 현실이 될 가능성이 큰 농담입니다.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일은 인간의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을 바꾸어야 하는 지난한 노력이 따라는 것이라, 몇 마디 말로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무력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기후변화 대화는 그만 두고, AI로 대화의 주제를 옮겼습니다.

 

실리콘밸리는 AI의 메카죠. 가장 강력한 AI는 실리콘밸리에서 개발되고 있는 중입니다. Open AI라는 회사가 선두를 달리고 있고, 그들이 내놓은 ChatGPT는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에 깊이 파고 들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의 개발로 인하여 세상이 떠들썩합니다. AGI는 인간의 도움 없이 스스로 수학문제 같은 것을 풀 수 있는 단계의 AI를 말합니다.

 

앞으로 AI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질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AI가 목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한 대화를 활발히 진행했습니다. 저희들이 내린 결론은 AI를 적극 배워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ChatGPT를 활용하여 필요한 교회 사역을 하는 방법에 대해서 아주 실천적이고 구체적으로 배우는 자리를 마련하자고 했습니다. 영어로 사역을 해야 하는 목회자들에게는 이미 ChatGPT가 상당히 도움을 주고 있답니다. 영어 설교도 교정해 주고, 기도문도 만들어 주고, 영상작업하는 시간도 획기적으로 단축해주고 있답니다.

 

옛날에는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통용됐지만, 이제 이 말은 ‘5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로 바뀐 것 같습니다. 점점 변하는 속도가 빨라, 변하는 세상을 따라가기 쉽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래에 대하여 불안감을 안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때에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이 시대에 응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모이면 좋은 것은 내가 현재 걱정하고 힘들어하는 것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한걱정’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걱정 보따리를 서로가 서로의 앞에 풀어 놓으면, 모두 비슷비슷한 걱정이기에 불안을 줄일 수 있고, 무엇보다, 함께 이야기하면서 걱정을 해소할 올바른 방향에 대해서 배울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로 모이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서로의 걱정 보따리를 풀어놓고, 우리가 얼마나 비슷한 걱정을 하면서 살아가는지 확인하면서 고립감에서 벗어나고, 함께 그 걱정을 풀어나갈 지혜를 배우는 것이 교회 공동체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유익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함께 손을 잡고 기도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 함께 위로하며 기도하며 희망찬 미래를 열어가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있어, 든든합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오래 사는 게 좋은 걸까?

 

히스기야 왕은 다윗 왕과 요시야 왕과 더불어 유다 왕국 최고의 성군(聖君) 중 한 명입니다. 히스기야 왕을 뒤이어 그의 아들 므낫세가 왕위에 오릅니다. 므낫세가 왕위에 오를 때의 나이가 12살이었습니다. 므낫세 왕은 55년간 남유다 왕국을 다스립니다. 그런데 므낫세에 대한 평가는 역대 왕들 중 최악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아합과 쌍벽을 이루며, 누가 더 악한 왕인가 배틀(battle)을 벌일 정도입니다.

 

자식 농사는 알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성군 히스기야의 아들이라면 아버지를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좋았을 뻔했는데,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는 최고의 악한 왕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보면 어리둥절해집니다. 자식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 것인지, 미궁에 빠지는 듯합니다. 정말 겸손하게 주님께 맡기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잠언 1장 7절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

 

우리 시대는 이것을 가르쳐 주는 곳이 없습니다. 학교 교육은 온통 ‘지식’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지식의 ‘시작’(beginning)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이런 저런 비상한 일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큰 지식을 가지고 이런 저런 훌륭한 일을 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식’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런 유익도 없습니다. 이것은 역사가 가르쳐 준 교훈이기도 합니다. 찬란했던 계몽주의의 끝이 처참한 전쟁(1,2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교훈 앞에서 사람들은 경악했고, 홀로코스트 유대인 대학살 사건은 ‘인간의 조건’을 되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식’이 없는 인간의 지식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데까지 이를 수 있는지, 인류는 역사에서 확인했습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서 저질러지는 악한 일들은 모두 ‘알파와 오메가(처음과 끝)’이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발생합니다. 지식의 시작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므낫세에게는 이러한 지식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므낫세 왕의 행위를 서술하고 있는 성경의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 없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므낫세 왕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한 것 외에도 또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립니다. 이런 므낫세 왕의 행위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래 사는 게 좋은 걸까?”

 

므낫세가 왕에 즉위할 때 나이가 12세였습니다. 계산을 해보면, 므낫세 왕은 히스기야가 생명을 15년 연장 받았을 때 낳은 아들입니다. 히스기야가 15년 생명 연장을 받지 않았다면 므낫세는 태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므낫세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사람처럼 보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당신을 판 가룟 유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으니라”(마 26:24).

 

인류 역사에 보면 태어나지 않았다면 자기 자신에게 좋을 뻔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현대 세계사에서는 ‘이디 아민’ 우간다 독재가가 그런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이 사람은 집권 8년간 50만명을 학살했습니다. 경제를 심하게 망쳐 우간다를 파탄으로 몰고 갔습니다. 7-80년대 세계인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던 이 독재자는 ‘검은 히틀러’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캄보디아의 독재자 ‘폴 포트’도 태어나지 않았다면 자기 자신에게 좋을 뻔한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집권하는 동안 130만명에 이르는 캄보디아 국민을 학살했습니다. 킬링필드라고 불립니다. 폴 포트는 “국가 발전을 가로막는 자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는 일념을 가지고 학살을 시행합니다. 인류 역사의 비극입니다.

 

므낫세는 자그마치 55년 동안 통치를 합니다. 남,북 왕조 통틀어서 가장 오랜 기간 통치한 왕입니다. 오래 통치한 것 때문에 나라가 더 망가집니다. 므낫세 왕은 아버지 왕과는 달리 친앗수르 정책을 폅니다. 남쪽 네게브 지역을 개간해 농지를 확장하고, 앗수르의 비호 아래 주변국들과 무역량을 증대시켜 경제적 안정을 추구합니다. 이는 장기간 통치의 기반이 됩니다.

 

오래 사는 게 좋을 걸까? 므낫세 왕을 보면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히스기야가 15년 더 생명연장을 받지 못했다면 므낫세 왕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므낫세가 55년간 장기 통치를 하지 못하고 일찍 죽었더라면 남유다가 그렇게 허망하게 바벨론에게 멸망당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래 사는 일은 좋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래 사는 게 좋은 걸까’를 묻게 만드는 인생을 사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오래 사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어떤 사람에게 오래 사는 것은 슬픈 질문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므낫세처럼 말이죠.

 

므낫세 이야기는 반면교사 삼아야 합니다. 잘 살아야 겠구나, 다짐하게 됩니다. ‘오래 사는 게 좋은 걸까?’라는 질문이 아니라, ‘오래오래 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감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인생을 살아야겠구나, 하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오래오래 함께 해 주세요’라는 말이 나오는 인생을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몸담고 있는 곳에서, ‘오래오래 함께 해 주세요’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그것만큼 인생을 보람차고 의미있고 복되게 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오래오래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히스기야에게 배우는 기도의 지평

 

히스기야(Hezekiah)는 고대 남유다 왕국의 13대 왕이었습니다. 그는 25세에 왕에 즉위하여 29년간 통치하였습니다. 그가 통치하던 시대는 국제정세가 순탄치 못했습니다. 앗수르라는 거대 제국이 패권을 차지하고 있던 시절이었는데, 그의 재위 얼마 전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 당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앗수르의 위세는 꺾이지 않았고, 제국 주변의 약소국들은 힘을 합해 어떻게든 제국의 위협으로부터 각자 나라를 보호해 보려고 했습니다.

 

예로부터 다음의 세 가지는 인간의 삶을 망가뜨리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전쟁, 기근, 전염병. 인류의 문명은 이 세 가지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요즘 용어로 바꾸면, 안보, 경제, 그리고 보건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안보 문제는 오늘날보다 매우 노골적이었습니다. 제국은 약소국들에게 노골적으로 조공을 요구했고, 이에 응하지 않는 나라가 있으면 제국은 군대를 이끌고 가서 위협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처음에 친앗수르 정책을 펴며 앗수르 제국에 조공을 바쳤으나 앗수르의 횡포가 나날히 늘어나면서 반앗수르 봉기에 가담을 합니다. 그 일 때문에 결국 남유다는 앗수르의 침공을 받습니다.

 

제국의 침략 전쟁. 국가적 위기 앞에서 히스기야는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히스기야에게 기도행위는 단순히 무릎 꿇고 골방에서 기도하는 게 아니라 신앙 공동체 안에서 위기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신앙의 일이었습니다. 다행스럽게 히스기야 왕 때 이사야라고 하는 걸출한 선지자가 있어 히스기야를 도왔습니다. 앗수르에게 대항하고 싶지만 그럴만한 힘이 없는 남유다를 향해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국가적 위기 앞에서 온 힘을 다해 기도한 히스기야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전언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실 것이다!”(왕하 19:31).

 

히스기야는 골방에서 기도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반앗수르 봉기에 동참하여 앗수르 제국의 침략을 대비하며 예루살렘 성을 정비합니다. 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 바깥에 있었던 기혼샘에서 물을 끌어옵니다. 수로를 만들고 그 물을 저장할 연못을 만듭니다. 그것이 실로암 연못입니다.  또한 히스기야는 성벽을 중수하고, 식량을 비축하고, 군사력을 증강시킵니다. 그리고 흩어져 있던 권력들을 모아 중앙집권화시키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면서 연안국들과의 동맹을 강화합니다. 이렇게 히스기야는 기도하면서 실제적인 방어 계획을 세웁니다. 이러한 준비는 앗수르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이 함락되지 않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히스기야는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정말 많은 일을 합니다. 이 일을 행하는데 있어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였습니다. 히스기야는 기도하면서 일을 한 대표적인 성경의 인물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집니다.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왕하 20:1). 제국의 압박으로 인하여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인 상황에서 히스기야의 죽음 예고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히스기야는 낯을 벽으로 향하고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는 매우 특이했습니다. 보통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하면 회개를 하면서 기도하는 데 반해, 히스기야의 기도는 회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왕하 20:3).

 

하나님은 이러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듣고 그의 병을 고쳐주시고 생명을 15년 연장시켜 주실 뿐만 아니라 앗수르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겠다는 약속도 해주십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기도의 지평을 넓혀 줍니다. 회개는 아주 중요한 것이지만, 지난 날, 살아오면서 나의 삶을 위하여, 가정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수고한 것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할 수 있는 중요한 토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살면서 잘못했던 것만 기억하지 마세요. 살면서 수고했던 것들을 기억해 보세요. 돌아보면, 우리는 참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히스기야처럼, 때로는 그 수고에 기대어 기도해 보세요. 수고의 흔적은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구원의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열심히 수고한 나 자신을 스스로 칭찬하면서, 수고하면서 사는 일을 너무 힘들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고를 헛되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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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3. 11. 8. 09:04

눈을 감고 간구하는 기도

(민수기 13:25-33)

 

신실하신 주님,

우리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흔들어 우리의 삶을 혼란케 하는 것들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옵소서.

우리는 눈을 감고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기 원합니다.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믿음으로 바라보기 원합니다.

눈으로 바라본 것 때문에 잘못된 증언을 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잘못된 길로 가서

결국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스라엘을 봅니다.

주여, 우리는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히스기야처럼

눈으로 보지 않고 믿음으로 보는 주의 자녀가 되고 싶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거든,

삶이 막막하거든,

눈을 더 크게 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눈을 감고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는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눈을 감는 것은 신앙의 힘입니다.

이 힘을 잘 사용하게 하시고,

이 힘으로 세상을 이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3. 11. 1. 07:13

축복권을 위한 기도

(민수기 6:22-27)

 

주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지어져 가야 하는지를

말씀을 통해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자주 잊어버립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날마다 마음에 새기고

주님께서 우리는 불러 이 세상을 향한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신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제사장처럼, 나실인처럼 주님께 부르심을 받은 자요

우리 자신을 드리고 헌신한 자로서 주님과 동행하게 하시고,

주님께 순종하는 자로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기쁜 마음으로 행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특별히,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축복을 빌어주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민수기에서 가르쳐 주신

축복의 선언을 나 자신에게 행할 뿐 아니라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행하게 하여 주셔서

하나님의 복이 친히 임하는 놀라운 역사가 우리 삶 가운데 가득하게 하옵소서.

주님, 축복할 수 있고, 축복할 때 실제로 주님께서 복을 주시는,

이 거룩하고 특별한 은총을 소홀히 여기지 말게 하시고,

영광으로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권을 겸손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잘 사용하게 하옵소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실제적인 복, 구원을 베푸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3. 10. 26. 03:27

하루를 마감하며 드리는 기도

 

주님,

오늘 제가 한 모든 일이

주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한 일이었는지,

하루를 돌아보며 주의 은혜와 자비를 간구합니다.

제가 한 일 중에 저의 욕심과 교만에서 비롯된 일이 있었다면

용서하시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어 주소서.

그리하여 욕심과 교만으로 행한 일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주 안에서 선하게 사용되게 하옵소서.

 

오늘 있었던 억울한 일은 주님께서 갚아 주시고

오늘 있었던 슬픈 일은 위로해 주옵소서.

어려움에 처한 자를 조금 더 도와주지 못한 것을 용서하시고

제 손으로 살피지 못한 것들은 주님께서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살펴 주옵소서.

 

세상 모든 이들이 평화로운 잠자리에 들게 하옵소서.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주님을 생각하며

이렇게 평안하게 누워서 잘 수 있는 것이

주님의 은혜인 것을 잊지 말게 하시고,

자고 일어나 새힘을 얻어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주님께 받은 모든 은총을 아낌없이 나누는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냈습니다.

오늘 맺은 열매는 내일을 위해 쓰이게 하시고

나의 생명이 주님 안에 있는 줄 믿사오니

자는 동안

모든 악하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가져가시고

나의 생명을 새롭게 하사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열어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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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10. 24. 13:11

도시에서 광야처럼 살기

(민수기 1:1-19)

 

1.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 BC 587년 유다가 망하고, 헬라화가 되었을 때, BC 300년경 히브리 성경을 헬라어로 옮기는 작업이 진행됐다. 평범한 사람들이 사용하던 코이네 헬라어로 번역된 헬라어 성경은 ‘70인역(셉튜아진트)’로 불린다. 신약 성경 시대는 여전히 헬라 시대였으므로, 신약 성경도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AD 382경부터 성경은 라틴어로 번역되기 시작한다. 히에로니무스(제롬)이 번역한 라틴어 성경을 불가타라 부른다. 로마 제국의 영향 아래 성경이 헬라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된 것이다. 그러나, 16세기 종교 개혁 때, 마르틴 루터에 의해 독일어로 성경이 번역되었고, 그 영향으로 각자 나라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는 길을 열었다. 아무튼, 성경은 크게,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의 영향 아래서 번역되고 발전되었다

 

2. 성경 중에서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셉튜아진트)가 특별히 중요하다. 예수님 당시, 신약 시대 때 성경은 ‘70인역’이었다. 사도 바울은 70인역 헬라어 성경에서 구약 성경을 인용하며 자신의 편지들을 썼다. 70인역(헬라어 성경)에서 민수기를 ‘숫자들(아리테모이)’라고 번역했다. 70인역의 영향이 얼마나 광범위한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어 성경도 ‘민수기’라고 부른다. 그러나, 원래 히브리어에서 민수기는 ‘베미드마’, 즉 ‘광야에서’이다.

 

3. 민수기를 헬라어로 ‘숫자들’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는 민수기에 두 번에 걸친 인구 조사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민수기는 36장까지 있는데, 1장과 26장에 인구 조사 이야기나 나온다. 예나 지금이나 인구 조사(Census)를 하는 이유는 병역과 조세 때문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인구 조사를 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서서히 국가의 요소를 갖추어 갔다는 뜻이다. 인구 조사했더니, 장정(20세 이상/싸움에 나가서 싸울만한 남자)만 60만명 정도 되었다. 정확하게는 1차 조사 때 603,550명, 대략 40년 후에 시행된 2차 조사 때 601,730명이 계수되었다.

 

4. 민수기는 대략 40년 정도의 시간의 기록이 담겨 있다. 1차 조사는 출애굽 후 13개월 후에, 2차 조사는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고,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두고 시행된다 민수기를 이해하려면, 인수 조사를 기준으로 보는 것보다, 지명을 중심으로 보는 게 좋다. 민수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가데스 바네아 사건이다. ‘가데스 바네아’를 꼭 기억해야 한다. 민수기는 크게 세 지명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시내산 – 가데스 바네아 – 모압 평지.

 

5. 시내산에서 발생한 일은 성막(어디에서 제사를 드리나), 제사법(제사법(어떻게 제사를 드리나), 제사장(누가 중재하나), 정결법(누가 제사에 참여할 수 있나), 절기법(언제 제사를 드리나), 인구조사, 진영 갖춤 드이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발생한 일은 정탐꾼 사건과 이스라엘의 반역이다. 이 사건 때문에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 보내게 되고, 출애굽 1세대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빼놓고 모두 광야에서 죽는다. 모세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압 평지에서 죽는다. 모압 평지에서 제2차 인구조사(출애굽 2세대)가 시행되고, 모세는 출애굽 2세대들에게 설교를 한다. 그 설교의 구체적인 기록이 민수기 다음에 나오는 신명기이다.

 

6. 민수기는 ‘숫자들’이라는 관점보다, ‘광야에서’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우리에게 더 큰 유익이 있다. 성경의 가르침 대로 산다는 것,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사는 것이다. 이것을 조금 어려운 말로 성사적 존재/sacramental being라고 한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은 세속적 존재/non-God being/secular이다. 세속 사회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종교)와 관계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회다. 세속화는 근대의 개념이다. 근대(현대)의 특징은 신을 사회 활동에 신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사적 존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하다고 믿는다. 인간은 하나님과 연결된 삶을 사 때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광야란 하늘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고 하나님과의 동행이 필수적인 곳이다.

 

7. 광야는 온갖 소리(소음)로부터 자유로운 곳이다. 하나님의 음성, 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는 데 있어 특징/속성이 있다. 하나님의 음성은 언제나 세미하게 들려온다. 광야 같은 고요와 침묵이 없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 엘리야 선지자도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왁자지껄한 한바탕 싸움을 벌인 후, 광야로 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새 힘을 얻었다. 세례 요한도 광야에서 살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사역을 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시험 받으시며 사역을 준비하셨다. 광야는 궁극적 소통의 자리이다.  

 

8. 현대인들이 가장 애 먹는 일은 소통이다. 현대인들은 ‘말이 안 통한다’고 호소한다.
소통에는 상업적 판매 기술로서의 소통과 관계의 깊이를 위한 소통이 있는데, 특별히 관계의 깊이를 위한 소통의 부재는 심각하다. 현대인들은 주로 도시에서 생활을 한다. 도시는 온갖 소음이 난무하는 곳이다. 각종 기계음, 각종 언론 보도, 엔터테인먼트, 일자리 등에서 들려오는 소음들은 우리의 정신을 쏙 빼놓는 것들만 있다. 무엇보다 도시의 삶은 내 이야기가 상대방에게 먹히게 해야 먹고 살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언어 표현이 유혹적이거나 폭력적이다. 그래서 도시에서 사는 현대인은 주체적이기 힘들고, 늘 누군가/무언가의 지배 아래 있다.

 

9. 도시인들을 보라. 주체적으로 소유하고 소비하는 사람이 있나? 우리는 불필요한 소비와 불필요한 말을 하면서 산다. 집에 놓여 있는 물건들을 보라. 소유를 보라. 우리는 정말 필요한 물건들을 구매하기 보다, 온갖 유혹적이고 폭력적인 언어로 포장된 광고들에 의해서 물건을 구매하기 일쑤다. 게다가 도시인들은 바쁘게 살다 보니, 남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을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누군가 나의 이야기(감정)에 귀기울여주거나, 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더라도 기억하지 못한다. 서로가 서로의 삶의 문제를 나누고, 진지하게 기도하지 못한다. 우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세상)가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우리는 어느새 서로에게 무관심한 사람이 된다. 소통이 안 된다. 말이 안 통함, 감정의 나눔 부재, 무관심은 관계의 상처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관계의 붕괴까지도 가져온다.

 

10. 현대 도시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영성은 ‘도시에서 광야처럼 살기’이다. 물리적으로 광야 같은 환경 만들면 좋으나, 실제로 조용한 데를 찾기 쉽지 않다. 그렇다고 진짜 광야 같은 시골 같은 곳을 자주 찾는 것도 어렵다. 시간과 비용 문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시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도시의 삶 가운데서 광야처럼 사는 방법을 배우고 실천할 필요가 있다. 도시에서 광야처럼 살기를 배우고 실천하지 못하면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외로움과 괴로움을 벗어날 길이 묘연하다.

 

11. 다음은 ‘도시에서 광야처럼 살기’의 방법들이다. 다음에 제시된 방법들을 하나씩 실천하다 보면, 하나님과의 소통도 이웃이나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소통도 조금씩 회복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1) 눈을 감고 심호흡 자주 하기

2) 모든 기기를 멀리하기 (스마트폰/TV)

3) 책 읽기 / 시 읽기 / 성경 읽기 (침묵과 집중이 저절로 된다)

4) 기도 시간 갖기 (기도문 읽기)

5) 상대방에게 귀기울이기 (공감)

6) 교회를 광야처럼 오기 (광야 나오는 행위)

 

12. 현대 도시인들은 숨을 잘 쉬지 않고 산다. 바쁘다 보니 숨쉬는 것도 잘 못한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자주 하는 일은 가장 손쉽게 광야로 가는 방법이다. 현대인들의 정신을 가장 혼미하게 만드는 것은 스마트폰이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통해서 세계 곳곳의 사람들과 연결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시각적으로 습득하는 정보는 흥미를 유발시키고 뭔가 강력한 지식을 구축하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못하다. 자극적인 영상으로 획득된 정보들은 오히려 우리의 뇌를 조정한다. 그것들은 반성적/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막고 맹목적으로 따르게 만든다. 그러므로, 스마트폰이나 TV 같은 기기를 통해서 습득하는 정보보다, 책으로 습득하는 정보들이 삶을 더 깊게 만들고 소통을 원활하게 한다.

 

13. 현대인들은 책을 잘 읽지 않는다. 그래서 출판업계는 만년 불황에 시달리는 형편이다.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인하여 책을 읽을 기회는 더 줄어든 것 같다. 이것은 비판적 사고를 기르지 못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올바로 판단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다. 특별히 도시에서 광야처럼 살기를 위한 방법으로 내가 가장 추천하는 독서는 ‘시 읽기’이다. 시 언어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시가 제시하는 세계에 갔다오는 것은 마치 광야에 다녀오는 것과 같다. 시 읽기는 현실에 파묻혀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부터 구원해 준다.

 

14. 현대인들은 상대방의 말에 귀기울이는 것을 잘 하지 못한다. 이것을 특별히 방해하는 것은 도시의 소음과 스마트폰이다. 카페에서 만난 친구들 사이에서도 각자의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느라 서로에게 집중하지 않는다. 만나도 만난 게 아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 오는 것을 습관처럼 오는 경향이 있다. 물론 주일에 교회에 오는 습관은 좋은 습관이다. 그러나, 교회에 오는 것을 ‘광야에 나오는 행위’로 인식하면 큰 유익이 있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일은 우리가 일상에서 벗어나 뭔가 특별한 것을 경험하는 일과 같다. 교회를 광야로 생각할 때 그곳은 하나님의 음성이 더 명확히 들리는 자리가 되고, 하늘의 은혜를 간구하지 않으면 살아갈 없는 인간의 운명을 더욱더 절실히 경험하는 자리이다.

 

15. 유대교 랍비 조너선 색스는 “믿음은 소음 아래에서 들려오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이 저명한 랍비가 정의하고 있는 믿음에 근거해서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면, 우리가 얼마나 믿음 없는 삶을 사는가를 반성하게 된다. 우리는 온갖 소음에 파묻혀 소음 아래서 들려오는 음악을 듣지 못한다. 그 아름답고 즐거운 음악 소리를 듣지 못하니, 우리의 인생은 짜증나기만 하고, 소통의 부재 속에서 외로움과 괴로움 가운데 살아갈 뿐이다.

 

16. 시편 19편은 이렇게 노래한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준다.

낮마다 그것들은 말씀을 쏟아내고

밤마다 그것들은 지식을 전해 준다.

이야기도 없고 말소리도 없다.

그것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것들의 음악은 세상 끝까지 번져 간다.

 

17. 우리는 도시의 소음 파묻혀, 온갖 만물들이 전해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외롭다. 어떻게 해야 할까? 외로움과 괴로움을 어떻게 하면 이겨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도시에서의 우리의 삶에서 기쁨과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발산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도시에 광야처럼 사는 데 있다. 무엇보다, 상대방의 생각과 감정을 자주 물으라. 생각과 감정에 동감해주고, 위로해 주라. 도시에서 광야처럼 살아야, 우리는 우리의 삶을 지킬 수 있고, 당신과 나의 삶이 행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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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3. 10. 24. 12:09

도시에서 광야처럼 살기를 간구하는 기도

(민수기 1:1-19)

 

주님, 민수기의 말씀을 통하여

광야에서의 삶을 배우게 하옵소서.

깊은 도시의 삶에 익숙해진 우리들은

어느새 광야에서 사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온갖 소음에 시달리다 보니

정작 들어야 할 중요한 음성들을 듣지 못하고 삽니다.

하나님의 음성, 가까운 이들의 음성,

우리는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들의 음성조차도 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외롭고 아픕니다.

주님, 우리를 광야로 이끌어 주옵소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 법,

이웃, 사랑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주님과 동행하며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보듬으며

깨어진 우리의 삶, 깨어진 우리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시고,

우리의 삶이 주 안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옵소서.

도시에서 광야처럼 사는 게 무엇인지 보여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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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성경은 트러블 메이커인가?]

보편성과 역사성이라는 두 기둥을 잡고 신학을 했던 판넨베르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섬기는 하나님, 예수가 믿는 하나님이 유일하고도 참된 하나님일 때, 바로 그때라야만 유대인이 아닌 사람도 하나님을 믿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생길 것입니다."
(조직신학 서론, 10쪽)

구약성경 설교를 많이 하는 저로서는 요즘 여간 괴로운 게 아닙니다. 유대인의 성경, 유대인의 하나님이 믿음의 보편 대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현재 유대교 또는 여호와 하나님 신앙과는 별개로 존재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을 성경과 분리시켜 생각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1948년에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세워진 것도 성경에 근거한 시오니스트의 활동 때문이니까요.

이스라엘-하마스(팔레스타인)의 전쟁과 그들이 빚어내는 참상을 보면서 성경에 등장하는 온갖 '탄원'들이 팝콘처럼 떠오릅니다. 주변 나라들로부터 엄청난 시련을 당하며 실존적 탄원을 그치지 않았던 이스라엘과 그 탄원이 고스란히 담긴 성경을 보면서,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참상은 어떤 탄원으로 치유될 수 있을 지, 도무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보편성을 가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입니다. 이 보편성을 역사 속에서 확보하려면 현재 이스라엘-하마스(팔레스타인) 전쟁의 참상을 모른 척할 수 없습니다. 역사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은 그리스도인의 책임입니다.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가나안)을 둘러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분쟁은 십자가 고난의 현재적 역사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성이 발현되는 자리이고,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한 탄원의 자리입니다. 둘(유대인과 이방인/의인과 죄인)이 하나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막힌 담을 허무신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십자가에 달려 계신 자리이기도 합니다.

성경이 트러블 메이커가 아니라, 하나님의 현실성이라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분명해집니다. 평화와 자유가 입맞출 때까지 우리는 쉴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께서 그만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는 날이 올까요?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죄악과 폭력에 굴하지 말고, 희망 안에서 잘 버텨야 할 것입니다. 함께.

Posted by 장준식

[책 속에만 존재하는 기독교]

 

고급 기독교 서적들이 줄지어 출판되고 있다. 외국의 저명한 학자/목사/영성가들의 저작이 대부분이다. 기술의 발달로 출판 시장 접근이 용이해져, 경쟁적으로 기독교 서적이 출간되어 팔리기 위해 매력을 발산 중이다. 좋은 서적이 많이 발간되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더 많은 서적이 발간되면 좋겠다.

 

그런데, 우려되는 현실은 기독교가 자꾸 책 속으로만 들어가는 것 같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발간되는 기독교 서적은 꽤 수준 높은 것들이 많다. 특별히 영국 신학자들의 저서들은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에서 볼 수 있는 기독교 현상은 신앙 '공동체'의 축소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공동체를 일구는 현실 사람들은 점점 줄어드는데, 기독교 신앙에 대한 지식이 담긴 서적은 날로 수준이 높아져 간다.

 

나는 예전에 한국 기독교는 미국의 시민 종교화나 독일의 국교화 보다는 영국의 기독교 신앙의 매니아화와 같은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에 대하여 말한 적이 있다. 공동체는 축소되지만 몇몇의 기독교 매니아들이 아주 고급진 기독교 지식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갈 거라는 이야기다. 나는 이미 기독교 서적 출간의 경향을 보면서 그쪽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신앙은 공동체로 구현되어야 하는데, 공동체는 줄어들고 그 대신 기독교 신앙이 책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 같다. 요즘 출간되는 기독교 서적들을 읽어 보면, 모두 기독교의 진리를 깊고 수려하게 잘 풀어내고 있다. 그러나 정작 기독교 공동체는 하루가 멀다 하고 무너지고 축소되고 있으니, 기독교의 진리가 아무리 깊고 수려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 싶다.

 

독서를 통해 기독교의 수려하고 깊은 진리를 깨달은들, 그것이 현실 세계의 공동체로 이어지지 못하고, 자기 만족에 그치거나, 엘리트화 되거나, '그들 만의 리그'에 그친다면, 기독교 신앙은 세상을 향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묘연해질 뿐이다.

 

요즘 출간되는 기독교 서적들을 읽으면 기독교 진리를 더 깊이 알게 되고,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신앙 상식을 교정할 수 있게 되어 좋다. 그만큼 기독교 신학도 많이 발전하고 분명해진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수려하고 깊은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은 현실 교회를 자꾸 부정하게 되거나 비판하게 되면서 오히려 '가나안 성도'만 배출하게 되는 것 같다. 현실 교회에 또는 현실에 참여를 전혀 하지 않으면서 자신은 마치 참된 진리를 깨달아서 성화된 것처럼 생각하는 신앙은 분명 영지주의 신앙과 닮았다.

 

사실, 기독교 진리, 기독교 신앙만큼 단순한 것도 없다. 기독교 신앙은 무슨 도를 깨우치거나 무슨 위대한 일을 요구하지 않고 그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차별 없는 사랑'을 실천하면 된다. 기독교가 꿈 꾸는 세상은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어우러져 사는 대동세상이다. 그런데,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은 어떤가. '선교'라는 이름 하에, '전도'라는 이름 하에, 심하게는 '그리스도의 이름 하'에 온갖 차별과 배제와 혐오가 저질러지고, 사회(세상)는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독교는 책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두 손에, 우리의 두 발에, 우리의 몸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진리를 수려하고 깊게 책 속에 기록해 두는 것도 좋으나, 자신의 손과 발에, 그리고 깊은 마음 속에 새기는 것이 진짜 신앙일 것이다. '공동체'는 없어지고 '개인'만 남아 도는 이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책 속이 아니라 사람 속으로 스며드는 신앙을 꿈꾼다.

Posted by 장준식
시(詩)2023. 10. 14. 03:48

슬픔

 

눈이 멀었으니까 제 정신일리가 없지

눈이 멀었으니까 본 대로 말하지 못하고

입술이 움직이는 대로 말하는 거야

 

눈 먼 자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언제나 오지에서 먹는 음식물 같아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음식을 맛보아야 하는

미각의 슬픔을 너는 상상이나 해봤니

 

눈 먼 아비의 손을 잡고

사막을 떠돌아야 했던 꽃다운 안티고네는

이미 성인의 반열에 올라 있어

“눈 먼 아버지는 눈이 먼 채로 혼자 걸어야 해요”*라고 말하는

너는 누구니

 

 

* 박연준 시 ‘안티고네의 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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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거룩]

 

다르게 살 용기.

 

체제가 제시하는 방향을 따라 가지 않으면 도태되고 소외 될까봐 불안에 빠져 전전긍긍하게 만들어 스스로 노예의지를 발휘하도록 만드는 이 시대에,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나의 삶/구원을 주님께 맡기고, 다르게 살아갈 용기를 갖는 것,

그것이 바로 거룩이다.

 

거룩을 도덕으로 이해하면 최악의 결과가 나온다. 니체가 간파하고 있듯이 도덕은 체제가 부과한 노예의지이다. 도덕은 필연적으로 차별을 만들고, 배제와 소외를 불러와, 서로 미워하게 만들어 사회를 분열시킨다. 거룩을 도덕적 요청으로 받아들여 자기를 다른 이와 구별하려드는 순간 그 사람은 자기 모순에 빠지고 말 것이다.

 

거룩(카도쉬)은 다르게 살 용기다. 거룩은 오히려 차별을 만드는 체제에 저항하여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발산하며 '너와 나'의 화해를 이끌어 평화를 일구어 낸다.

 

예수 그리스도가 거룩하신 분인 이유는 다르게 살 용기를 가지는 게 무엇인지를 십자가에서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거룩은 온 세상을 화해로 이끌었다/이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다르게 살 용기를 요청한다. 거룩은 도덕이 아니다. 거룩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나는 저항한다. 고로 거룩하다.

 

다르게 살 용기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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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손 꼭 잡는 신앙]

 

히스기야 왕은 요시야 왕과 더불어 훌륭한 왕으로 평가받습니다. 히스기야가 좋은 평가를 받은 가장 큰 이유는 종교개혁을 단행했기 때문입니다. 바른 신앙을 갖는 일은 늘 어려운 듯합니다. 하루라도 자기 반성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인간의 운명인 듯하고요. 그리고 신앙이란 영의 일이라 오롯이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인 듯합니다. 신앙인에게 자기 반성이란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간절한 겸손일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은 산당들 제거, 주상(돌기둥, 신 임재 표식) 깨뜨림, 아세라 목상 찍어 버림, 모세가 만든 놋뱀 철거 등의 외적인 형태를 갖추었지만, 종교개혁의 핵심은 산당신앙에서 벗어나 성전신앙으로 가는 것입니다. 산당신앙은 오늘날에도 신앙을 괴롭히는 신앙의 형태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리보다 신앙심이 없었던 게 아닙니다. 산당신앙은 개별신앙, 사적신앙의 형태를 말합니다. 신앙을 통해 사익을 추구하는 것이죠. 신앙의 방향이 ‘자기self’에게 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사회분열을 조장합니다. 자기의 이익과 맞지 않는 사람과의 분열을 조장하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 대한 배제와 혐오가 조장됩니다.

 

반면에, 성전신앙은 공동체 신앙, 공적신앙의 형태를 말합니다. 성전신앙의 방향성은 나의 바깥입니다. 관계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성전신앙은 화합과 평화를 추구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시대보다 현재 우리의 삶이 더 산당신앙으로 기울기 쉬운 시대입니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적나라하게 폭로했듯이, 우리가 사는 시대는 남을 죽여야만 자기가 사는 시대인 듯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징어 게임 하듯,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남을 무너뜨립니다. 이런 시대에서 성전신앙을 세워 나가는 일은 고대 이스라엘에서보다 더 힘든 일입니다.

 

남유다의 히스기야 왕 시대에 북이스라엘이 망합니다. 열왕기하 18장에 그 내용이 담겨 있는데, 히스가야를 평가는 이렇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왕하 18:6). 그런데 북이스라엘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정반대입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그의 언약과 여호와의 종 모세가 명령한 모든 것을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더라”(왕하 18:12). 이게 바로 산당신앙과 성전신앙의 차이입니다. 산당신앙은 신앙을 사사로이 사리사욕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은 내가 당장은 잘 먹고 잘 살게 되는 것 같아도, 결국 사회를 분열시켜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정말 경계해야 할 신앙의 모습입니다.

 

히스기야의 신앙은 성전신앙의 모범입니다. 히스기야의 신앙 상태를 묘사할 때 사용되는 두 개의 히브리어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타흐’이고, 다른 하나는 ‘다바크’입니다. ‘바타흐’는 의지하다로 번역되었는데, 신뢰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신뢰하니까 안정감을 갖는 상태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바타흐’(의지)했습니다. 그래서 안정감을 가졌습니다. 신앙은 이렇게 안정을 주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계속 ‘불안’하다면 나의 신앙을 조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바크’는 연합하다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혓바닥이 입천장에 붙어 있는 형상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풀어서 설명하면, 어린 아이가 부모의 손을 붙잡고 그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모습입니다.

 

성전신앙은 산당신앙과 달리 하나님의 손을 꼭 잡는 신앙입니다. 손을 꼭 잡은 모습에서 ‘애정’을 봅니다. 성전신앙은 운명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나 혼자만 잘 되고, 나만 잘 살면 그만인 신앙이 아니라 더불어 잘 살고 더불어 힘든 일을 극복하는 신앙입니다. 삶을 함께 공유하면서 살아가는 것, 동행하는 신앙이 성전신앙입니다. 공동체가 이런 모습을 갖추어 나가는 것이 신앙의 성장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나라가 이렇게 성전신앙을 통해서 공동체(서로의 삶을 보듬어 주는 삶의 형태)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러한 성전신앙, 공동체 신앙은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불안을 극복하고 삶에 자신감을 가지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삶은 내가 실패하더라도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줄 공동체가 존재할 때 가능합니다. 히스기야의 삶은 형통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복을 주셨습니다. 형통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안정감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도, 우리의 교회도, 우리의 사회도, 이렇게 형통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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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근대의 의미: 보수 사회]

 

근대(modernity)의 의미는 다음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 자연에 대한 인간의 통제

(자연보다 인간의 힘이 더 강력해진 시대)

2) 국민국가의 탄생

(국가는 개인의 또다른 자아가 되었다. 애국심의 탄생)

3) 사유재산의 허용

(내 재산은 아무도 못 건드려! 이건 하나님도 못 건드려!)

 

이 외에도 근대를 규정하는 여러가지의 현상이 있겠지만, 그래도 이 세 가지가 근대를 규정하는 가장 큰 현상이 아닌가 싶다. 이런 현상을 볼 때 근대는 아무래도 근본적으로 '보수적'일수 밖에 없다. 인간중심주의, 국가중심주의, 자유(사유재산)중심주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맞닥뜨린 '기후변화'의 문제는 결국 보수 사회가 가져온 파국이다. 보수적 사고와 보수 사회는 별로 성공적이지 못하다. 인간의 성공, 국가의 성공, 자기의 성공은 찬란한 것 같으나, 그 성공이 지니고 있는 내부의 모순을 외부로 '전가'시키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한 연못에 물고기 두 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두 마리 물고기가 어느날 싸워서 한 물 고기가 죽었다. 이제 혼자 남게 된 물고기는 자신이 연못을 모두 차지한 것 같고, 더이상 싸울 일도 없어서 평안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좋아한다. 그러나 죽은 물고기가 썩어들어가고 그 썩은 물고기가 연못을 오염시켜 결국 혼자 남은 물고기마저 죽게 된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성공, 다른 나라에 대한 우리 나라의 성공, 다른 인간에 대한 나의 성공은 모두 '수탈'과 '외부 전가'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수탈과 외부 전가는 끝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분명, 근대와 헤어질 결심을 해야만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류세(Anthropocene)'는 짧을수록 좋다.  '지배와 종속'에서 벗어나 '평등'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보수적인 사회로 가야 한다. 가치가 올바르면 그 가치를 지키는 '보수'는 좋은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가치가 올바르지 못하면 그 가치를 지키는 '보수'는 좋은 것이 될 수 없다. 그저 꼴통 소리를 들을 뿐이다. 지금 근대의 가치를 지키려는 존재는 그저 꼴통일 뿐이다.

 

좋은 가치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좋은 보수 사회가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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