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응원
(로마서 8:35-39)
1. William Jefferson Clinton. 미국의 제42대 대통령, 빌 클린턴과 떼어놓을 수 없는 팝송이 있다. Rock Band 그룹, Fleetwood Mac의 ‘Don’t Stop Thinking About Tomorrow’이다. 이 곡은 클린턴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을 때 선거곡으로 사용됐던 노래다. 이후 클린턴은 중요한 전당대회를 할 때마다 이 곡을 계속해서 사용했다. 한 전당대회에서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Keep putting people first. Keep building those bridges. And don't stop thinking about tomorrow!" 그리고, 곧바로 스피커를 통해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If you wake up and don't want to smile
If it takes just a little while
Open your eyes and look at the day
You'll see things in a different way
Don't stop thinking about tomorrow
Don't stop, it'll soon be here
It'll be better than before
Yesterday's gone, yesterday's gone
Why not think about times to come
And not about the things that you've done
If your life was bad to you
Just think what tomorrow will do
2. Don't stop thinking about tomorrow. Don't stop, it'll soon be here. 아주 단순한 가사이지만, 진리를 담고 있다. 우리는 사는 게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내일이 온다는 것을 별로 생각하지 않고 산다. 잠시 멈추는 일은 정말 중요한데, 우리의 삶은 마치 고속도로 같아서 멈출 수 없는 것 같다. 멈추어 설 겨를을 안 주는 세상이지만, 이러한 때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예전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 같다. 신앙을 가지면 그래도 다른 이들보다 멈추어 서서 자기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더 많을 수밖에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안식일의 의미는 ‘멈춤’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이 ‘멈춤’을 잘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멈춤’이 얼마나 중요하면 하나님의 법이 되었겠는가.
3. 우리가 요즘 피부로 경험하고 있는 기후변화 현상도 결국 인간이 멈추지 못해서 생겨난 위기이다. 인간의 삶에 있어, 온도유지는 가장 중요하다. 신체의 에너지 중 90%는 온도유지에 쓰인다. 몸의 온도가 1-2도만 달라져도 인간은 거의 죽을 지경에 처하게 된다. 기후 위기가 닥친 원인도 온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지구 온도의 1-2도만 달라져도 엄청난 난리를 겪는다.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연인 사이에서도 온도가 조금만 달라져도 관계가 힘들어지고, 가족도 그렇고, 교회 공동체도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신체 온도, 마음의 온도, 기후 온도, 그리고 관계 온도, 사회적 온도라는 말 등을 쓴다. 그러니까, 결국 인생이란 무엇인가? 온도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인생이란 온도를 유지하고 맞춰가는 것이다.
4. 바울은 왜 로마교회에 편지를 써 보냈을까? 바울이 보기에 로마교회는 참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공동체 내의 온도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사회적 온도가 안 맞으니까 교회 내에 불협화음이 많았다. 강한 자들의 온도와 약한 자들의 온도가 서로 맞지 않았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냉소와 비난을 쏟아 놓았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교회 공동체에서 발생하면 안 되는, 아주 민망한 일이었다. 바울의 고민은 한 가지였다. 어떻게 하면, 로마교회 공동체의 온도를 적정 수순으로 유지시킬 수 있을까?
5. 그렇다면, 무엇부터 고민을 해야 할까? 공동체의 온도를 무너뜨리는 요인(원인)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다. 우리가 진지하게 진행하고 있는 ‘기후변화 프로젝트’도 마찬가지 작업을 하고 있다. 왜 기후가 이렇게 변화하여 인간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는가? 그 원인을 찾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원인(요인)을 알면, 해법을 찾기에 좀 수월한 법이니까. 물론, 원인을 알아도 해법이 묘연할 수 있고, 원인을 알고 해법을 알아도, 그것을 실제로 실행에 옮기는 게 아주 어려울 수도 있다. 사실, 기후변화 문제도 원인과 해법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게 쉬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골치가 아픈 것이다.
6. 로마교회의 온도를 형편없이 망가뜨린 원인은 무엇일까? 율법과 죄이다. 로마교회에서 율법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율법에 대한 태도가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 사이에 온도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강한 자들, 즉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율법과 상관없는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율법에 대해서 차가운 마음을 가졌다. 약한 자들, 즉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서부터 율법 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율법에 대하여 뜨거운 마음을 가졌다. 이렇게, 율법에 대하여, 찬 기류와 뜨거운 기류가 만나니, 거기에서 폭풍우가 몰아칠 수밖에 없었다.
7. 율법에 대하여 서로 다른 온도를 지닌 두 그룹을 화해시키는 바울의 해법은 무엇인가? 율법이 아닌 성령의 법, 즉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면 율법의 온도차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게 얼핏 보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쉽지 않은 이야기이다. 율법의 유령이 아직까지 교회를 떠돌고 있는데,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시대마다 윤리적 이슈가 발생했을 때, 교회는 그 문제를 놓아두고 분열을 경험했다. 현재 교회를 분열시키는 가장 큰 이슈는 동성애이다. 바울이 지금 시대에 와서 동성애 문제로 분열되고 있는 교회를 보면서 안타까워하며 편지를 쓴다면, 아마도, 동일한 해법을 제시했을 것이다.
8. 바울은 로마교회를 분열시키는 율법의 문제보다 좀 더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원인을 말한다. 그것은 죄이다. 죄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우리가 정말로 조심해야 하는 것은 죄를 단순히 도덕의 문제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죄를 도덕의 문제로 보면, 우리는 쉽게 사람을 정죄하고 만다. 성경에서 ‘죄’를 말할 때 도덕의 문제는 이차적인 것이다. 성경에서 ‘죄’를 말할 때 우리는 우선 존재론적 차원에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9. 죄를 도덕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과 죄를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의 차이는 이런 것이다. 우리 말에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어떻게 사유하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진다. 우리는 대개 ‘작심삼일’을 한 개인의 의지박약 정도로 해석한다. 뭔가를 결심했을 때, 하루 정도는 의욕적으로 그 일을 하다가, 한 삼일만 지나도 그 의욕은 온데간데없고 또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현상을 일컬을 때 쓰는 것에 익숙하다. 그러면서 우리는 작심삼일의 현상을 보이는 그 사람에게 비난하거나 비꼬는 말투로 이렇게 말한다. ‘내 그럴 줄 알았어. 작심삼일이지 뭐.’
10. 그러나, 작심삼일은 그렇게 도덕적인 차원의 해석보다 더 깊은 해석이 가능하다. 우리가 어떠한 일을 작심해서 실행하고자 할 때, 하루 이틀 정도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다가도 우리는 삼일 째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일을 계속해서 진행하기 어려운 난관에 봉착하기도 한다. 아주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한 사람이 앞으로 운동을 열심히 해보겠다고, 그래서 건강한 육체, 장난 아닌 몸매를 가져보겠다고 결심하고 운동을 시작하고 나서, 하루 이틀 다니다가, 갑자기 삼일 째 자동차 사고를 당해서 결심한 일을 이루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작심삼일은 우리가 아무리 뭔가를 잘 해보겠다고 결심해도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막히게 되는, 인간의 실존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운동을 열심히 해보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삼일만에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사람에 대해서 도덕적 비난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1. 바울은 로마교회에 바로 이러한 인간의 실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죄의 문제를 도덕적 차원에서 바라보면, 율법은 상대방을 정죄하는 도구로만 쓰일 뿐이다. 정죄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악마화시킨다는 뜻이다. 상대방이 정죄되고 악마화되면, 그 상대를 향한 폭력은 쉬워지고 정당화된다. 죄인이고 악마인 상대에게 가하는 나의 폭력은 폭력이 아니라 정의로 둔갑한다. 이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는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12. 그러나 죄의 문제를 실존의 차원에서 바라보면, 완전히 상황이 달라진다. 율법은 상대방을 정죄하는 도구로 쓰이는 게 아니라, 상대방을 보호하는 도구로 쓰인다. 상대방에게 필요한 것은 정죄가 아니라 응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로마교회를 볼 때, 강한 자들이나 약한 자들이나 서로가 서로에게 업신여김과 비난을 늘어놓았는데, 사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업신여김이나 비난이 아니라, 응원이었다. 하지만, 업신여기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응원하려면 서로에 대한 긍휼한 마음을 먼저 갖는 게 중요했다. 서로에게 긍휼한 마음을 갖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동일한 처지, 동일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인데, ‘너나 나나’ 똑같이 ‘죄에게 팔린 형편’이라는 것을 존재론적 차원에서 아는 것이다.
13. 7장의 이 말씀은 모두의 고백이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7:18, 19, 24). 그렇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작심삼일’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아무리 선한 일을 하려고 해도 이상하게 선한 일이 선한 결과를 낳지 못하고, 악한 결과를 가져온다. 아무리 건강해지려고 운동을 열심히 하고 좋은 음식을 먹어도, 하루아침에 닥치는 암발생을 피할 수 없다.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사건사고가 불현듯 발생해 상해를 입거나 목숨을 잃기도 한다.
14. 선한 마음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했는데, 결과가 좋지 못한 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아무의 잘못도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원래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탄식 밖에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비난인가? 정죄인가? 업신여김인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응원이다.
15.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고통을 겪는다. 고통을 겪는 일은 어쩔수없다.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오죽하면 이런 말까지 등장했겠는가.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고통을 즐길 수 있겠나. 고통은 고통일 뿐이다. 고통이 오면 괴롭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정말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놓칠 수 있다. 우리들은 흔히, ‘사람은 고통을 통해서 성숙해진다’고 말한다. 이 말은 고통을 정당화시키는 아주 위험한 말이다. 고통은 악한 것이다. 고통이 아무리 인간을 성숙시키는 도구로 쓰인다고 해도, 고통을 선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16.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 성장하지 않는다. 고통을 통해서 성장한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어떤 사람은 고통을 통해서 성장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고통을 통해서 삶을 마감하기도 한다. 이 둘의 차이가 무엇인가? 고통의 크기? 고통의 질? 고통의 종류? 그렇지 않다. 고통이 사람을 성숙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따스한 응원이 고통을 이겨내고 성숙하게 만든다. 고통이 닥쳐 왔을 때, 그 고통을 이겨내고 성숙해지느냐 아니냐는 고통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 있을 때 받는 따스한 응원에 있다.
17. 바울은 8장에서 인간의 탄식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탄식에 대해서도 말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총제적으로 참 어렵다. 하지만, 그렇게 넘쳐나는 탄식 가운데서도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시는 ‘영원한 응원’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탁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26절). 이 얼마나 따스한 응원인가.
18. 8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장 34절도 이렇게 증언한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죄가 아니라, 따스한 응원이다. 죄라고 하는 깊은 심연에 빠진 우리인데, 누가 누구를 정죄하리요! 창조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종말의 때까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따스한 응원이다.
19. 우리는 인간이기에 일차적으로 인간의 따스한 응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 인간의 응원도 영원하지 못하다. 좋은 마음으로 응원했어도, 그 응원이 언제 어떻게 끊어질지 모르고, 언제 어떻게 그 응원이 비난으로 바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죄에 팔린 인간의 실존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영원한 응원이 필요하다. 영원하다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응원, 우리 인간의 응원처럼 선하다가 어느새 악으로 바뀐 응원이 아니라, 변함없이 따스하고 선한 응원을 가리킨다. 그러한 응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올 수 있다. 그 영원한 응원을 목소리를 담고 있는 것이 로마서 8장 34절에서 39절의 말씀이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20. Don’t Stop Thinking About Tomorrow! 지난 날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일 있든지, 내일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말라. 이것은 희망의 메시지이다. 우리가 내일(투모로우)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있는 이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영원히 응원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응원 때문에 살고, 이 응원을 마음에 품고,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응원의 손길을 건넨다. 따스한 응원이 우리를 살린다. 영원한 응원이 우리를 살린다. 죄에 지지 말고, 따스한 응원, 영원한 응원의 힘으로 내일을 꿈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