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19. 9. 30. 13:25

하나님의 큰일을 말할 수 있는 은사를 간구하는 기도

(2:1-13)

 

주님,

우리에게도 오순절에 임한 성령을 부어 주소서.

성령이여 임하옵소서.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도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소서.

오늘날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방언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 방언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방언을 받았다고, 성령이 임했다고

우쭐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받은 은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시고

홀연히 임하게 되는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오직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9. 30. 13:23

성령과 방언

(사도행전 2:1-13)

 

본문은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한 사건을 전하고 있다. 이때만 해도 성령이 어떤 분인지 잘 몰랐다. 기독교 역사/신학에서 성령론이 자리잡은 것은 성령강림절 후 3,4백년이 지나서이다. 특별히 329년에 태어나서 390년에 죽은, 갑바도기아의 교부 중 나지안주스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Nazianzus)에 의해서 기독교의 성령론은 큰 발전을 이루게 된다.

 

성령론을 영어로 ‘pneumatology’라고 한다. 헬라어로 성령을 프뉴마라고 하기 때문이다. 성령론은 성령이란 무엇인지’, 성령의 본성에 대하여 논하는 분야이다. 성령론의 발전은 기독론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졌고, 성령론의 발전과 함께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이 발전된다. ,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person)이다. 이것을 아는 것은 기독교인에게 정말 중요하다. 이것을 모르면, 성령을 어떤 귀신이나, 또는 알라딘 램프에 나오는 지니 같은 존재로 취급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성부 하나님의 존재를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온전히 알 수 없듯이, 성령 하나님의 존재를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본문에서도 성령의 임재를 묘사할 때 모두 비유를 들어서 설명할 뿐이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이라든지,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등은 비유적인 표현이다.

 

성령의 임재를 묘사하는 낱말 중, 가장 중요한 낱말은 홀연히(아프노)’이다. 홀연히라고 번역된 헬라어의 아프노갑자기, 기대하지도 않았는데의 뜻을 가지고 있다. 성령은 우리가 임하라고 해서 임하는 분이 아니다. 알라딘 램프의 지니는 램프를 문지르면 나타난다. 램프의 주인인 알라딘이 소환하면 지니는 거기에 복종해야 한다. 그런데, 성령은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임하지 않는다. 우리가 성령이여 임하소서!’라고 주문을 건다고 성령이 임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성령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반대다. 성령이 우리의 주인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홀연히임한다.

 

홀연히라는 말은 우리의 신앙에 두 가지 큰 의미를 준다. 하나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간구할 때에 그것이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홀연히의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홀연히의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자칫 잘못하다간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께 실망할 수 있다. 무엇인가를 바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안 들어주실 때, 우리는 낙심하여 하나님이 안 계신가보다한다. 그런데, ‘홀연히의 믿음의 입장에서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낙심하는 것 자체가 불신앙이다.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알라딘의 램프의 요정처럼 ~’하고 나타나서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실 의무가 하나님에게 전혀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교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일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한 가지, ‘홀연히의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홀연히나타나셔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우리가 더 이상 안 된다고 할 때, 더 이상 소망을 갖지 못할 때, 더 이상 무엇인가를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은 홀연히나타나셔서,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일하신다. 이러한 홀연히의 믿음을 가지고 산다면, 우리는 섣부르게 낙담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홀연히의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홀연히 나타나셔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체험한 사람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홀연히의 믿음을 너무 좋아한다.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소란을 떠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이 아니라, 온유와 겸손으로 잠잠한 가운데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의 삶을 돌보신다. 지금 이곳에서도 그러한 홀연히의 역사가 많이 일어나지만, 좀 더 세월이 지나서 그 은혜를 나누기로 하고, 한 가지, 조지아에서 경험한 홀연히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교회 건축할 때, 기도 의자를 만들면, 이런 마음이 들었다. ‘내가 기도하는 시간만큼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이다. 내가 1시간 기도하면 하나님은 1시간 일하실 것이고, 내가 10시간 기도하면 하나님은 10시간 일하실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한만큼 일하신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와 상관 없이 일하시는 분이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홀연한 역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땅에 떨어지도록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다.

 

기도 의자를 만들고, 그 기도 의자를 의지하여 교회 건축을 위해 2년을 기도했다. 부족한 게 많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기도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기도 의자에 무릎 꿇고 앉아서 기도를 시작하면, 대개 2시간 정도 기도를 했다. 그렇게 2년을 기도했는데도, 하나님은 아무런 응답이 없으셨다. 마음에 약간 낙심이 왔다. 그래서 하나님께 넋두리를 했다. “주님, 이렇게 응답을 안 주십니까? 낙심되지만, 주님께서 더 기도하라고 하시는 줄로 믿고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날 하박국의 말씀을 묵상했다.

 

그런데, 하박국 23절의 말씀을 읽는 중이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는 말씀을 묵상하는 순간,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성경에서 매직 아이처럼 한 건물이 떠올랐다. 그래서 수련목 전도사님에게 차를 대라고 하여 그 매직 아이처럼 떠오른 건물이 있는 곳에 가 보았다. 그랬더니, 그 건물과 부지가 For Sale로 나와 있었다. 간판에 적혀 있던 전화번호로 곧바로 전화를 했는데, 가격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이었다. 그러면서 교회 건축 프로젝트가 진행이 되는데, 정말 홀연히임한 하나님의 은혜였고, 수많은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다른 일들은 다음에, 기회가 될 때 나누겠다.)

 

우리가 홀연히의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요, 또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믿는 것이다. 이 믿음 가운데 있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또한 걱정 근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홀연히역사하실 것이다. 이것을 알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긴장감 있는 삶을 사는 것인지 모른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자의 입술에는 감사와 찬송, 그리고 간증이 늘어간다. 누군가에게 들려줄, 그리고 누군가 들었을 때에 흥미진진한 삶의 이야기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홀연히 임한 성령이 제자들에게 건네 준 것은 방언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된다. 성령이 제자들에게 방언의 역사를 일으키신 것이지, 방언이 곧 성령의 역사는 아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방언이 엉뚱한 증명서가 된다. 방언을 하면 마치 성령을 받은 것처럼, 방언을 하지 못하면 마치 성령을 받지 못한 새내기 신앙인처럼 취급하는 데 잘못 쓰인다.

 

많은 이들이 이런 의심을 갖는다. “목사님, 저는 방언을 못합니다. 방언을 하고 싶은데, 방언이 나오질 않습니다. 저는 성령을 받지 못한, 믿음이 없는 사람인가요?” 이것은 방언만이 성령의 역사라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성령과 방언은 별 상관관계가 없다. 물론 성령께서는 방언이 필요한 이들에게 방언을 주시지만, 방언이 곧 성령의 임재는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본문을 접하면서 이러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제자들은 성령을 받았을 때, 왜 방언을 했을까?”

 

방언은 자기 자랑의 도구가 아니다. 방언은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다. 방언하는 사람이, ‘나 성령 받았나봐. 나 신앙이 좋은가봐하면서 방언하지 못하는 사람들보다 우위에 있는 신앙인처럼 생각한다면, 오히려 방언을 받지 아니함만 못한 것이다. 본문에서,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했을 때, 그들이 방언을 하게 된 이유는 11절에 나와 있다. 열방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인 사람들이 제자들의 방언을 듣고 자기들끼리 한 말이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제자들에게 방언의 은사가 내린 이유는 오순절을 맞아 세계 각국에서 예루살렘에 모인 열방의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큰일을 증언하게 끔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천사의 말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울리는 꾕과리와 같은 소음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때로 이러한 불경한 생각을 한다. ‘성령이 계시다면, 나에게 임하셔서 내가 방언을 할 수 있도록 한 번 해 보세요!’ 방언은 내 의심을 종식시키는 도구이거나, 하나님을 시험하는 도구가 아니다. 방언은 오직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기 위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사(선물)이다.

 

처음, 제자들이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을 때 그들이 성령을 통해 받은 은사는 방언이었다. 그것을 가지고 제자들은 열방을 향해 하나님의 큰일을 증언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을 때, 우리가 초대교회 제자들처럼 방언을 받게 될지 아닐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게 필요하다면 방언을 받겠지만, 아마도 방언보다는 다른 은사를 주어서 열방을 향해 하나님의 큰일을 증언하게 하실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방언의 은사는 이미 구글통역기가 받는 것 같기 때문이다.)

 

성령은 홀연히 임하신다. 그리니,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 달라고 자해수준으로떼쓰지 말라. 잔잔하고 묵묵히, 성실하게 신앙생활하다 보면, 성령은 홀연히 우리에게 임할 것이다. 아니, 우리가 묵묵히 성실하게 맡은 바 사명을 다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 안에 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에게 어떠한 은사를 주실 지 모른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휘말린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큰일을 증언하고자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성령은 때와 상황에 맞게 우리에게 기대하지 않은 은사를 주어, 그 은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큰일을 열방에 증언하도록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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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나무를 사랑한다면

 

아마존과 인도네시아 숲의 나무들이 불타고 있다. 지구의 허파들이 불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지만, 발화의 원인이 자연에 있지 않고 인간에게 있다니, 속상한 마음이 더하다. 고대인들에 비해 상상력이 부족한 현대인들에게 숲에서 불타고 있는 나무들은 그저 나무겠지만, 상상력을 조금만 발휘하면 나무는 그저 나무가 아니다. 고대인들은 나무에 대하여 어떠한 상상력을 가졌을까?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는 아폴로와 다프네의 사랑 이야기가 나온다. 쿠피도(큐피드, 에로스)에게는 여러 종류의 화살이 있다. 쿠피도의 화살은 사랑에 목마르게 만들기도 하지만, 사랑을 지긋지긋하게 만들기도 한다. 쿠피도의 '사랑을 목마르게 하는' 화살에 맞은 아폴로는 쿠피도의 '사랑을 지긋지긋하게 여기게 만드는' 화살에 맞은 다프네를 사랑하게 된다. 서로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쿠피도의 화살을 맞은 아폴로와 다프네의 사랑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아폴로는 다프네에게 사랑을 갈구하며 그녀를 좇지만 다프네는 아폴로의 사랑을 멀리하며 도망친다.

다프네를 향한 아폴로의 사랑은 뜨겁다. 다프네를 바라보는 아폴로의 시선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아폴로의 가슴은, 타작 마당에서 검불을 태우는 불길, 혹은 밤길 가던 나그네가 새벽이 되자 내버린 횃불이 잘 마른 울타리를 태우듯이 그렇게 타올랐다."


둘은 사랑의 경주를 시작한다. ‘사랑을 목마르게 하는화살에 맞은 아폴로는 다프네를 따라잡겠다는 욕심에 가득 찼고, ‘사랑을 지긋지긋하게 여기게 만드는화살을 맞은 다프네는 잡히면 끝장이라는 공포에 전심전력을 다해 도망쳤다. 둘의 어긋난 사랑은 아폴로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다. 큐피도의 날개가 함께 했던 아폴로의 추격이 더 빨랐기 때문이다. 결국, 아폴로는 다프네를 따라잡아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바로 그때, 다프네는 자신의 아버지 페네이오스에게 이렇게 기도한다. "아버지, 저를 도우소서. 강물에 정말 신력이 있으면 기적을 베푸시어 전신의 은혜를 내리소서. 저를 괴롭히는 이 아름다움을 거두어 주소서."


이 기도를 마치자 마자, 다프네의 몸은 나무로 변하기 시작한다. 다프네가 나무로 변신했지만 그 아름다움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무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폴로는 다프네를 여전히 사랑했다. 그는 나무로 변한 다프네에게 키스했다. 아폴로에게 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니라 그토록 갈구하던 사랑, 다프네였다. 나무에는 다프네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그 아름다움은 아폴로로 하여금 나무에게 키스하게 만들었다.


우리에게 이런 상상력이 있다면, 우리는 함부로 나무에 불을 지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왜 나무를 괴롭히는가. 나무에게서 무엇을 빼앗고 싶은 것일까. 나무의 아름다움인가? 그렇다면 나무는 도대체 무엇으로 변신해야 그를 괴롭히는 아름다움을 벗어던질 수 있을까? 나무가 다시 다프네로 변신한다면 그때서야 불지르는 일을 멈출 것인가.


나무를 사랑한다면, 나무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면, 나무 안에 우리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다프네의 숨결이 드리워져 있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결코 나무를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이러한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것 같다.


"아버지, 우리를 도우소서. 숲속에 정말 신력이 있다면 기적을 베푸시어 전심(轉心, 마음을 바꾸는 것)의 은혜를 내리소서. 우리를 괴롭히는 이 추악함을 거두어 주소서. 우리 마음에서 아름다움을 알아보지 못하는 추악함을 걷어내고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순결함을 주소서."


아마존과 인도네시아 숲의 나무들을 태우고 있는 불이 하루 빨리 소멸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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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9. 9. 24. 00:35

사도들처럼 부활을 증언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사도행전 1:12-26

 

주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

사도들과 예수님의 가족들이 가진 용기와 희망을 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모였으며

그곳에서 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증인을 세우고자

맛디아를 선출하여 유다를 대신해 사도로 세웠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미 임했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요,

하나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한 것을 선포하기 위하여

함께 일할 사도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증언에 기댄 우리의 신앙도

그들과 같이 용기와 희망으로 가득 차게 하시고,

우리도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낙심하지 말고 끝날까지 부활의 주님을 전하게 하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9. 24. 00:32

부활과 사도

(사도행전 1:12-26)

 

어떤 사건을 경험하고 나면, 우리는 이런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지?” 그렇다고 동일한 사건 경험이 동일한 행동을 낳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일제 시대를 경험했으면서도 그에 대한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일제에 부역하거나, 무관심 하거나, 또는 일제에 저항하여 독립운동을 하거나.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였겠는가.) 사건의 경험은 그 사람의 본성/본질을 드러내 준다.

 

하나님이 다가오시는 절대적인 경험은 사뭇 다른 반응을 불러온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충격적인 절대 경험을 했다. 그들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경험했고, 무엇보다 부활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의 승천을 경험했다. 이러한 경험들은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경험들이다. 그야말로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그들에게 믿음을 넣어 주시지 않으면 경험을 하고도 경험하지 못한 신비로운 경험들이다.

 

아무튼, 그들은 하나님이 다가오시는 절대적인 경험을 예수의 사건을 통해 경험했고,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결단을 해야 할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믿음은 그들을 아주 특별한 삶으로 이끌었다. 그들이 그러한 삶을 주도적으로 선택했다라고 말하기 보다는, 성령에 이끌려 그러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해 보인다.

 

주체’, ‘자기 생각’, ‘너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는 상황일 수 있다. ‘내가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는 현대인들에게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는 개인권리에 대한 침해 정도로 느껴질 뿐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다가오시는 절대적인 경험은 나와 너사이의 구분을 없앤다. 그 순간이 바로 구원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나와 너의 사이를 구분 짓는 온갖 경계를 허무는 사건이다. 구원의 순간에는 나와 하나님사이의 구분도 허물어진다. 구원은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서 일치하는 순간이다.

 

우리는 살면서 그러한 구원의 순간을 잠깐 잠깐 경험하면서 산다. 바로 사랑의 순간이다. 사랑은 그래서 위대한 거다. 우리의 죄성이 그 사랑을 지속시키지 못해서 그렇지, 사랑을 통해 우리는 잠깐의 구원을 경험한다. 사랑하면 나와 너를 구분 짓는 경계가 허물어지고, 사랑은 나와 너를 하나 되게 한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냥 사랑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영원한 사랑의 하나님 안에 있으면 우리는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을 경험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으로돌아왔다. 본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들의 명단을 열거한다. 그 명단에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와 여자들(여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의 가족들(어머니와 형제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거기에 머물렀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그 자체가 예수의 부활에 대한 행동적 선포이다.

 

탈무드에 따르면, 유대인들의 경우, 어느 도시에서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가 십자가에 처형되었을 때, 그 아내나 남편, 부모는 그 도시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들은 다른 장소로 이주해야 했다. 그들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에게 임한 저주가 그 도시에 머무르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명의 삶 플러스, 20186월호, 30). 신명기 2123절에 이런 말이 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예수님 당시, 십자가 처형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이랬다. 십자가 처형은 일종의 낙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동생들은 다른 도시로 이주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은 너무도 명백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알고 있었던 주변 사람의 시선이 얼마나 따가웠겠는가. 게다가 예수를 십자가 위에서 처형시킨 당국의 당사자들은 얼마나 그들이 불편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과 가족들은 예루살렘을 떠날 수 없었다. 아니, 떠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그들이 유하고 있던 다락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도했다. 이들이 한 곳에 모인 이유, 그리고 그곳에 모여서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한 이유는 부활때문이었다. 부활의 경험은 이렇게 일치된 마음과 행동을 낳는다. 이들 모두 한 성령에 이끌려,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일치)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이루어 한 곳에 모여 기도하며 예배하고, 봉사하는 한 가지 절대적인 이유는 예수의 부활 경험이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이들이 모여서 한 마음으로 기도한 뒤, 행한 행동 또한 매우 특이하다. 이것 또한 예수의 부활에 대한 행동적 선포이다. 그 행동을 촉발한 이는 사도 베드로다. 베드로가 촉발한 행동은 가룟 유다가 배반함으로서 공석이 된 열두 번째 사도의 자리를 채우는 일이었다. 베드로는 그것이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밝힌다. 그는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69:25),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109:8). 이 말씀은 유다의 자리를 대신할 다른 사도가 선출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지 못했으면, 사도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부활이 없었다면, 이들은 그냥 모두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다. 부활 경험이 없는데, 이들에게 십자가에 달려 죽은 한 사내가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뿔뿔이 흩어질 수 없었다. 부활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에겐 부활을 증언할 사도가 필요했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대신할, 열 두 명의 사도 말이다.

 

베드로는 열 두 번째 사도를 선출할 필요성을 말한 뒤, 사도의 조건과 직무를 말한다.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21-22a)여야 한다. 사도는 다른 열 한 명의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해야한다(22b).

 

사도의 직무는 분명하다.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는 자이다. 다른 말로 해서, 사도는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자이다. 그러나, 한 명의 사도를 뽑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 당시에 적어도 500명은 되었기 때문이다(고전 15:6). 그러면 그들 중에 누가 사도의 직무를 수행할 조건을 갖춘 사도가 될 것인가? 그것은 예수님이 열 두 사도(제자)를 부르실 때, 사도 바울을 부르실 때와 똑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26). 수많은 후보 중에 최종 후보로 올라간 이는 두 명이었다. 바사바(Barsabbas)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Justus)라고도 하는 요셉(Joseph)과 맛디아(Matthias). 이들은 제비 뽑는 방식을 통해서 이 둘 중에 맛디아를 열 두번째 사도로 선출한다. 이들이 제비를 뽑았다는 것은 주사위 놀이하듯, 운명, 행운에 사도 선출을 맡겼다는 뜻이 아니라, 사도의 선택이 그리스도/하나님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도의 선택 원리는 자격(qualification)아니라 선택(calling/부르심)이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자격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 선택 때문이다.

 

부활 경험은 하나님이 다가오시는 절대 경험이다. 그러한 절대 경험은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는다. 우리는 그 경험에 압도되어 다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은 예루살렘을 떠날 수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어 무덤에 묻혀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부활을 했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이 세상을 다스리는 주님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흩어질 필요가 없었고, 오히려 부활을 증언하기 위하여 모였으며, 다른 열 한 사도와 더불어 함께 부활을 증언할 열 두 번째 사도가 필요했다. 그들은 주님께 기도했고, 주님의 선택에 맡겼다. 열 두 번째 사도로 뽑힌 맛디아는 주님이 선택한 사도가 되어, 주님의 부활을 증언했다.

 

우리는 지금, 사도의 증언을 듣고, 그 증언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사도의 증언을 듣는다는 것은 그냥 어떤 사람의 증언을 듣는 게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는 것과 같다. 그게 바로 사도에게 주어진 권위이다. 교회는 사도의 증언을 들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사도의 증언을 담고 있는 성경은 그래서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는 것이다.


예수는 부활하셨다. 사도들은 예수의 부활을 증언한다. 우리는 사도의 증언을 듣고,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다. 사도의 증언을 통하여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한다. 그 일치가 구원이다. 예수의 부활과 사도의 증언, 그리고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사도의 증언을 통하여 예수의 부활을 믿는 우리들, 우리들은 하나님께 선택 받은 자들이다. 얼마나 감사한가. 이 부활의 은혜를 땅끝까지, 세상 끝날까지, 사도들과 더불어 증언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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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I am OK.

 

여러분의 기도 덕분에 한국에서의 일정을 잘 마치고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제가 한국에 도착했을 때는 태풍 링링이 소멸된 상태라 감사하게도 궂은 날씨 때문에 어려움을 겪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쉬이 비 오는 날씨가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간간히 비가 오는 중에 추석 명절을 맞아, 가족들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추석 명절 동안 인천에 사시는 큰어머니를 찾아 뵈었습니다. 못 찾아 뵌 지 오래 되었는데, 벌써 연세가 90이 되셨고, 치매가 걸려 저를 알아보지 못하셨습니다. 저를 형의 아들로 생각하시더군요.

 

명절 때 집안 어르신들을 몇 분 찾아 뵌 것 외에는 별다른 약속 없이 어머니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 중에 하루 특별히 시간을 내어 모 방송사의 OOO PD를 만나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덕분에 요즘 서울에서 한창 인기 있는 광화문 근처의 서촌과 북촌 구경도 하고, 통인시장도 다녀오고, 광화문 먹거리에서 맛있는 음식도 먹었습니다. OOO PD가 다음날 병원 검진이 있어 늦지 않은 시간에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저는 저녁 때쯤 OOO PD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오늘 병원 OK?”

 

며칠 동안 메시지에 응답이 없던 OOO PD는 제가 비행기 타고 귀국하는 날 통화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간 벌어진 일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다니던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는데, 유방암이 의심된다며 급하게 큰 병원에 갔었답니다. 그런데, 큰 병원에서 다행히도 작은 병원에서 오진을 한 것 같다며, 몇 개의 혹이 있지만 괜찮다고 했답니다. 며칠 사이에 지옥과 천국을 오갔다며, 저의 메시지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서 답을 못했다고 말하더군요. 그러면서 지금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I am OK.” 그리고 전한 OOO PD의 말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I am OK.’라고 말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 인줄 몰랐어요.”

 

그렇죠. 우리가 모두 잘 지내는 것 같아도, 인생이 하루 아침에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누군가 나에게 “Are you OK? 잘 지내세요?”라고 물어올 때, “I am OK. 네, 잘 지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릅니다.

 

올해는 한국에 갈 계획이 전혀 없었는데, 잘 지내고 계시던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수술 소식을 듣고 서둘러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어머니의 수술 소식을 알게 된 것도 어머니의 수상한 전화 때문이었습니다. 카톡 전화를 하신 어머니께서 뜬금없이, “잘 지내니? 너희들만 건강하면 됐다.”하시며 전화를 끊으셔서, 수상쩍어 형에게 전화를 했더니 어머니가 간을 3분의 1 잘라내는 수술을 해야 한다는 소식을 전해와서 계획에 없던 한국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I am OK.” 이 세 마디 말을 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이 세 마디의 말을 누군가에게 할 수 있다면, 참 다행스러운 일이고, 참 감사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Are you OK?” 미소와 함께 이런 대답을 듣고 싶네요. “I am OK.”

Posted by 장준식

용서의 근본적인 필요성

 

요즘 저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를 읽고 있습니다. 그의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용서하는 능력은 다모클레스의 칼처럼 모든 새로운 세대에 걸쳐 값을 치러야 하는 과거의 행위를 구제한다. 예수의 표현은 훨씬 급진적이다. 복음서는 신이 인간을 용서하기 때문에 신과 같이남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남을 용서할 때만신도 그와 같이인간을 용서해준다고 가르치고 있다. 용서의 의무를 주장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행위하는 것을 인간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조건)

 

한국에 방문해서 보니, 한국의 추석 문화가 많이 바뀌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옛날에는 추석 때 모든 가족이 함께 모여 성묘를 갔었습니다. 각자 집에서 음식을 해서 바리바리싸 들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묻혀 계신 곳에 가서 음식을 풀어놓고 먹으며 가족애 가운데서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힘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성묘의 풍경이 많이 사라진 듯합니다. 일단 요즘은 대부분 화장(cremation)을 하기 때문에 묘가 없습니다. , 가족이 모두 모일만한 장소가 없는 것이죠. 또한 뉴스를 보니 추석명절을 맞아 혼자서 명절을 보내는 인구가 전체 인구의 5분의 1이라고 합니다. 대한민국의 인구를 5천만으로 봤을 때, 산술적으로 1천만명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혼자서 명절을 보내는 것이지요. 대단한 숫자입니다. 그만큼 사회의 공동체성과 가족애가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명절 때가 되면 공항이 붐빕니다. 성묘 가는 것보다 여행을 택하는 가정이 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명절의 풍경과 용서가 무슨 상관관계에 있을까요? 현대인들은 용서의 가치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꼴 보기 싫은 사람, 안 보고 살아도 밥 먹고 사는 데 별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옛날 문서(성경 포함)에 용서가 최고의 가치로 서술되고 있는 이유는 옛날에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생존이 아예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오랜 세월 동안 농경사회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요즘처럼 과학기술이 발달되지 않았던 그 때에 농사짓는 일은 인간의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중요했습니다. 아무리 상대방이 미워도,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죠. 그래서 서로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협력하기 위하여, ‘용서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삶의 기술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상대방이 없어도 생존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상대방을 용서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용서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사회구조가 되다 보니, 용서의 가치가 점점 줄어들어, 이제 사람들 사이에서 용서란 구시대 유물이 되어 가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조건을 망가뜨리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현대인들이 외로운 이유는 여러 가지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그 중에서 현대인들을 외롭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용서의 부재입니다. 상대방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그 사회구조와 생각 자체가 용서의 필요성을 없애고, 실제 삶에서 용서의 가치가 실현되지 않기 때문에 현대인들의 삶은 더 외로워져만 갑니다. 물론 상대방이 없어도 물리적으로 살아가는 데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만 먹고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나와 똑 같은 인간의 따스한 말과 손길을 필요로 합니다. 터치가 없으면, 인간의 내면은 메말라 갑니다. 용서의 부재는 그 터치를 가로막는 큰 장애물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현대인은 잘 먹고 잘 산면서도 그렇게 외로워합니다.

 

성묘를 같이 가야 하는데, 가족끼리 서운한 것이 있더라도 그것을 풀지 않고 성묘를 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가족끼리 서운한 것이 있더라도 성묘를 준비하며, 또는 성묘 가서 조상님들 앞에서 밥상을 차려 놓고 서로 용서하며 화해를 이루고 서로의 삶을 터치해 주었습니다. 그 프로세스가 아주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한 용서의 자리 자체가 없어졌습니다. 성묘를 번거롭게 여길 뿐 아니라, 성묘할 수 있는 장소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한나 아렌트가 말하고 있듯이,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위가 무엇인지 모르고 행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는 행위가 더 필요한 것이고, 용서의 가치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소중한 인간의 조건입니다.

 

용서하십시오. 살아가는 데 상대방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기독교적인 용어로, 그것은 사탄이 주는 생각입니다.). 상대방과의 협력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그러면 용서의 가치가 새롭게 다가올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알고 행하는 것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모두 모르고 하는 것이지요. 모르고 한 일 때문에 상처받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저 용서해주는 것 밖에 무슨 도리가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처럼, 우리가 그렇게 용서한다면,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실 것입니다. 그게 구원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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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낀낀세대가 온다

 

김호기 교수의 '40대를 생각한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읽었다. 그는 현재의 40대를 '낀낀세대'라 명명한다. 86세대와 2030세대 사이에 놓여, 앞과 뒤가 다 막혀 있기 때문이다.

 

20여 년 전, 1990년대 이 '낀낀세대' X세대 또는 신세대로 불렸다. 그때의 논쟁을 아직도 기억한다. 바로 나 자신이 X세대였고, 새로운 가치관을 가진 신세대였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압구정동과 강남역을 누비며, 부여된 신세대의 자유를 만끽했다. 그러나, 김호기 교수가 지적하듯이, 1997, 대학 졸업을 앞 둔 시기에 외환위기(IMF)를 겪으면서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사회학자들은 X세대, 신세대의 특징으로 "개인주의, 탈권위주의, 감성주의, 소비주의"를 꼽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인주의이다. 그러나 이 개인주의는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시장적 개인주의'로 발전했다고, 김호기 교수는 지적한다. 신자유주의의 가치 아래, X세대는 자신의 시장적 가치를 증명하기 위하여 시장적 개인주의의 길을 어렵게 걸어왔다.

 

김호기 교수가 지적하는 40대의 어려움이 눈에 간다. 낀낀세대이기에 아직 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민주화 세대인 86세대에 눌려 있고, 2030세대에 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주 정확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 전반에서 이제 두각을 드러내야 할 40대에 처한 X세대 중 지도자급 인사로 발돋움 한 친구들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그의 분석 중 더 눈이 가는 것은 평균수명의 증가로 사회활동 연령의 연장을 고려할 때, 낀낀세대(40)가 한국 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시기가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현재 40대인 '낀낀세대' '대기만성형 세대'라고 부르고 싶다. 또는 '윤동주세대'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윤동주는 사촌 송몽규에 비해 성장이나 활동이 더디었는데, 그러한 사실로 인해 윤동주는 사촌 송몽규에게 열등감을 느낄 때가 많았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위안하며, '나는 대기만성형 인간이야'라고 말하곤 했다. (송우혜가 쓴 <윤동주 평전>에 보면 이 상황이 잘 나와 있다.)

 

김호기 교수는 말한다. "낀낀세대는 민주화의 가치를 공감한다는 점에서 86세대와, 개인주의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밀레니엄세대와 통한다. 끼어 있다는 것은, 발상을 달리하면 다리를 놓을 수 있다는, 두 세대를 아우를 수 있다는, 그리하여 통합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40, '낀낀세대'에 주어진 사명은 "점증하는 세대갈등에서 교량적, 포용적, 통합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데"있다. 이것은 실로 나의 목회현장에서도 경험하는 바이다. 나는 낀낀세대라 연령이 높은 층이 가지고 있는 가치도 존중하고 이해할 수 있는 '과거의 경험'과 젊은 층이 가지고 있는 가치도 존중하고 이해할 수 있는 '현재의 경험'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다.


'낀낀세대'가 한국 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그것을 감지하고, 낀낀세대가 가지고 있는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세대통합을 이루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기 위하여, 비록 지금은 다른 세대에 묻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지 못한다 할지라도, 묵묵하게 실력을 기르고 자리를 굳건히 지키다 보면, 시대를 이끄는 주역의 자리에 오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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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비판적 사유의 중요성

 

김승섭은 그의 저서 <우리 몸이 세계라면>에서 권력을 통해 어떤 지식이 생산되는지에 대하여 보건지식의 역사를 추적하며, 특별히 여성에 대한 보건지식이 보건역사에서 어떻게 왜곡되어 왔는지를 추적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문제는 매뉴얼과 교과서 역시 누군가의 관점에서 생산된 과거의 지식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지식의 생산 과정에는 과거의 편견과 권력 관계가 스며들어 있습니다"(30).

 

에모리에서 공부할 때, 'Comparative Theology' 수업 시간에 마지막 페이퍼를 쓰면서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신학 대결에서 아타나시우스가 결국 승리한 역사를 거론하며, 그때 생성된 '삼위일체 지식'에 대한 비판을 가한 적이 있다. 그 당시에 생성된 '삼위일체 교리'는 치열한 권력 싸움의 바탕 위에서 아리우스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한 것에 의문을 제기하며 써내려간 페이퍼는 교수님(David S. Pacini)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보건지식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지식도, 내가 몸담고 있는 기독교의 신학지식도 마찬가지다. 신학지식도 생산되는 과정에서 과거(그당시)의 편견(한계)과 권력 관계가 스며들어 있다.

 

그러므로, 신학지식이 생산되는 과정에 스며든 그 시대의 편견과 권력 관계를 파헤쳐 그 지식에 숨은 의도를 파악하고, 그것을 지금의 시대에 정의롭게 재생산(재해석)해 내야 하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신진 신학자들이 해야 할 작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중요한 과제일 뿐 아니라, 사명이다.

 

과거의 지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그대로 재생산해 내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생명)에게 고통을 가한다면, 그것만큼 게으르고 무모하고 악한 일이 없는 것이다.

 

생성된 지식에 대하여 비판적 사유를 하는 작업은 우리가 거기에 무고한 희생을 당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고된 작업이다. 비판적 사유와 해석은 늘 필요하다. 아니, 지식생산과 그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식생산을 해내는 일에 비판적 사유와 해석은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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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9. 9. 2. 02:51

그리스도께서 오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유다서 1:1-25)

 

주님,

주의 형제 유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이는 주께서 오고 계시다는 뜻일 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오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안다면,

유다서에 등장하는 거짓교사들과 같이

분열을 일으키며 성령이 없는 자 같이 살지 아니할 것이요

가인과 발람과 고라와 같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로

살지 아니할 것이요,

무엇보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양

방탕한 삶을 살지 아니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직시하고

믿음 위에 우리 자신을 세우고 성령으로 기도하며

주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게 하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9. 2. 02:49

그리스도께서 오고 계신다

(유다서 1:1-25)

 

유다서의 저자 유다는 예수님의 동생이다. 예수님의 동생 중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 중 한 명이었고, 또다른 동생 유다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초대교회를 지켜온 인물 중 한 명이다. 신약성경(특별히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배척 받으시는 장면을 기록하며 그의 동생들 이름이 거론될 뿐이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으냐”(13:55). 이런 정황을 볼 때, 유다는 예수님의 막내 동생이었던 것 같다. (아닐 수도 있다. 성경은 예수님의 가족에 대하여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1절에서는 두 가지 정황을 엿볼 수 있다. 첫째, 저자 유다가 특별히 야고보의 이름을 거론하는 이유이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일 수 없다. 예수님의 제자 중 가장 먼저 순교한 사람이 야고보이다(12:2). 대신,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서 초대교회의 기둥 중 한 명이었다. 유다가 야고보의 이름을 거론하는 이유는 야고보의 권위에 기대어 말씀을 전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야고보의 권위를 인정했기에 그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 이 서신 또한 그들에게 진중하게 읽혔을 것이다.

 

둘째, 인사를 전하며 이렇게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1b). 이것을 직역하면, “그리스도의 소유로 보존된(완료형 분사)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한 번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은 계속 주님에 의해 거룩함이 보증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과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러한 생각은 기독교 역사에서 계속하여 논쟁이 되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예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구원 받은 사람은 그 이후에 어떠한 죄를 지어도 그 구원을 보장 받느냐, 아니냐, 에 대한 논쟁이다.

 

유다가 이렇게 야고보의 권위에 기대어 교회를 위하여 편지를 쓰는 이유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권면을 주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권면하는 근본적인 이유, 즉 초대교회가 직면한 문제는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때문이었다. 표현이 참 재밌다. 이 사람들은 왜 가만히들어왔을까? 이렇게 표현하는 이유는 그들이 교회에 들어와 조금씩 성도들에게 다가가 인식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애찬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그 말은 이제 그 가만히 들어온 이들이 신뢰를 얻어 그들의 말과 행동에 영향력이 생겼다는 뜻이다. 영향력이 생긴 그들이 어느 순간 잘못된 가르침을 교회 공동체에 퍼뜨렸던 것이다.

 

가만히 들어온 이들의 잘못된 생각은 교회 공동체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위에서 이야기한 구원의 보장과 관련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도 쉽게 빠질 수 있는 오류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그 믿음으로 인하여 단번에 구원을 받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물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있는 것을 확신하면서, 신독(누가 있든 없든 성실하게 그 일을 행하는 것)에 힘쓸 것이다. , 믿음에 합당한 삶(윤리적인 삶)을 살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온 이들은 어느 순간부터 교회 공동체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는데, 그들의 논리는 매우 신앙적인 것 같으면서도 매우 방탕한 것이었다. , 그들은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구호를 외치듯, ‘한 번 구원 받은 사람은 영원히 구원 받은 것이라고 하면서 방탕한 삶을 살아도 괜찮은 양 교회 공동체를 흔들었다. 이렇게 믿음의 도를 엉뚱하게 해석하고 그 믿음의 도를 가지고 교회 공동체를 어지럽히는 무리들을 일컬어 유다는 꿈꾸는 사람들이라고 비판하고(8), 특별히, 그들을 일컬어 본능에 충실한 이성 없는 짐승이라고 말한다.

 

유다는 그들을 구약에 등장하는 몇 명의 인물에 빗대어 폭로한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11). 유대교 전통에서 가인은 불경의 선조, 궤변을 사용하는 악행의 대명사로 묘사된다(필로, 요세푸스의 기록). 발람은 뇌물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려 했다(23:4-5, 13:2). 또한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행음하게 만들었다(2:14). 고라는 다단, 아비람과 함께 당을 짓고 모세와 아론을 대적한 인물이다(16:1-35, 26:9-19, 106:16-18). 유다가 구약에 등장하는 최고의 악당들을 동원해서 가만히 들어온 이들을 폭로하는 이유는 그들이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교회의 권위있는 가르침에 도전하여 교회 공동체를 멸망의 길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유다는 가만히 들어온 자들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16). 다른 말로, 이들은 믿음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나, 사실 이들에게는 믿음의 도가 전혀 없는 이들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것은 초대교회가 직면한 최대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초대교회가 직면한 최대의 문제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재림 지연이었다. 이것은 마치, 성춘향이 직면했던 문제와 같다. 성춘향과 이몽룡이 사랑을 키워가던 중, 남원 부사였던 몽룡의 아버지가 동부승지로 임명되면서 몽룡도 한양으로 떠나게 된다. 이몽룡을 돌아와서 자기와 혼인해 주기만을 기다리던 성춘향은 큰 문제에 봉착한다. 기다리던 이몽룡이 생각처럼 빨리 돌아오지도 않았을 뿐더러, 어느날 이몽룡이 돌아왔는데, 거지꼴을 하고 돌아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춘향은 정절을 지키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새로 부임한 남원부사 변학도의 횡포가 심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의 상황이 마치 성춘향과 같았다. 돌아온다던 그리스도께서는 돌아오지 않으시고, 주변의 핍박은 늘어가는 상황에서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이러한 상황은 기독교의 역사가 2천년이 된 지금 더 심각하다. 우리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으실 것처럼 생각하여, ‘먹고사니즘귀차니즘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마치, 정절을 지키기 포기한 방탕한 성춘향이 된 것은 아닌가.

 

믿음의 도를 굳게 붙들며 살았던 신실한 그리스도의 종 유다는 이렇게 권면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17, 18). 우리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신뢰하는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다음의 말씀을 우리 각자의 마음에, 그리고 우리 교회 공동체의 심장에 새겨야 할 것이다.

 

(함께, 거룩하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읽어보자.) “사랑하는 자들아 /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 성령으로 기도하며 /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20-23).

 

성춘향은 정인 이몽룡이 돌아올 것을 믿었기에 정절을 지킬 수 있었다. 만약, 변학도가 성춘향의 그 거룩한 마음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었다면, 성춘향한테 몹쓸 짓을 저지르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변학도가 암행어사가 언젠가는 와서 자기의 죄를 드러내어 심판할 거라는 것을 마음에 품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감히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변학도는 성춘향의 거룩한 마음도 헤아리지 않았고, 암행어사가 출두하게 될 거라는 엄연한 사실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본능에 충실한 이성 없는 짐승'처럼 행동하며 남원의 선량한 백성 공동체를 괴롭히고 무너뜨렸다.

 

그리스도께서 오고 계신다. 아니, 그리스도는 이미 우리 안에 와 계시다. 이것을 얼마나 현실적으로 깨닫고 그 진리에 붙들려 살아가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우리의 믿음의 도의 질이 달라진다. 우리의 믿음의 도의 질은 우리의 삶의 질을 결정한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받은 구원을 영원히 지키신다. 그러나 이것을 오해하는 사람은 그 구원에 머물지 못하고 그 구원을 오히려 타락시킨다. 그러한 불경한 마음이 들거든, 유다서의 말씀을 굳게 붙들라. 생명의 말씀으로 여러분을 축복한다.

 

여러분을 지켜 넘어지지 않게 하시고 기쁨 가운데 그분의 영광 앞에 흠 없이 서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우리 구주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능력과 권세가 만세 전부터 그리고 지금과 영원토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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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풍경과 이야기2019. 9. 2. 01:17

중학교 추억 소환

ㅡ 아들의 중학교 생활을 응원하며

 

아이들이 개학을 했다. 큰 아이는 7학년, 작은 아이는 5학년이 되었다. 우리가 사는 프리몬트(Fremont, CA) 지역은 7학년부터 중학교(Junior High)이다. 그래서 한국의 학교 제도와 얼추 같다. (하지만 2021, 작은 아이가 중학생이 될 때부터 제도가 바뀌어 6학년부터 중학생이 된다. 이미 다른 지역은 이렇게 하고 있지만, 우리가 사는 지역만 제도가 늦게 바뀌는 거다.)

 

나는 중학생 시절, 서초동에 있는 '영동중학교'를 다녔다. (지금은 학교가 이사하여 우면동에 있다. 그것도 우리 형 교회(벌떼교회)와 담벼락 하나 두고 붙어 있다. 학교가 교회 바로 옆에 있어 여러 편리한 점이 많은 것 같다.) 내가 다닐 때만 해도 영동중학교는 인근 중학교 중 가장 규모가 큰 학교였다. 한 학년에 1천명이 넘었다. 한 학년에 60여명씩 17, 18반이 있었다.

 

인근 지역에서 아이들이 엄청 많이 몰린 탓에 영동중학교에는 전국 1등부터 전국 꼴찌까지 다 있었다. 매우 좋은 학교였지만, 그 당시 우리는 영동중학교를 '똥통 중학교'라고 불렀다. 학교가 나빠서 그런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불렀다. 중학생 때는 ''자를 붙이면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각 중학교 학생들은 자기 학교 외에는 모두 똥통학교라고 부르며 내심 경쟁을 했다. 그랬던 시절을 생각하면, 웃음만 나온다. 아들을 생각하면, 그때가 얼마나 어린 시절이었는지 상상되기 때문이다.

 

큰 아이가 오늘부터 다니는 학교의 이름은 'Thornton Junior High School'이다. 영어 발음은 '똔톤 중학교'이다. 그런데, 이 발음이 영 까다운게 아니다. 발음 연습을 잘 하지 않으면 영락없이 'Thornton' '똥통'으로 발음하게 된다. 나는 큰 아이의 학교 이름을 발음하다가 이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혼자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물론 집사람한테 이야기했다가 썰렁하다고 핀잔만 들었지만 말이다.

 

한국에서 중학교 시절을 보낸 아버지와 미국에서 중학교 시절을 보내고 있는 아들의 공통점은 별로 없다. 그런데, 부모 마음이 그런 것 같다. 어떻게서라도 공동점을 찾아 유대관계를 돈독히 하고자 하는 것이 내리사랑인 것 같다. 마치, 김동인의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의 주인공 M이 보이는 태도와 같다. 어떻게라도 공통점을 찾아보려는 그 절박함 말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중학교 환경은 한국과 미국 사이에 태평양이 있는 것처럼 멀지만, 그래도 아들 학교의 이름 덕분에 그 거리가 개울 하나 사이로 가까워진 기분이다. 나도 영동중학교, '똥통' 중학교를 다녔는데, 아들도 'Thornton', '똥통' 중학교를 다니게 된 것이다. 이 사실 때문에, 본의 아니게 아들 학교에 정이 간다.

 

아들의 중학교 생활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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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