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9. 19. 04:36

사래 사건

창세기 9

(창세기 12:10-20)

 

사래는 아브람(아브라함)의 아내 이름입니다. ‘사래 걸렸다할 때의 그 사래가 아니고, ‘손사래 치다할 때의 그 사래도 아닙니다. 사래는 복의 근원 아브람의 아내입니다. 나중에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뀌고, 사래는 사라로 이름이 바뀝니다. 아브라함은 만국의 아버지라는 뜻이고, 사라는 만국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똑같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쓰임 받았습니다. 사래가 아브람의 종속적인 존재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구체적인 단어 (베라카)’을 언급하시면서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니까, 이제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면서 창대함과 번영을 꿈꿀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무슨 일인지, 약속한 형통은 오지 않고 오히려 기근이라는 시련이 닥쳤습니다. 아브람은 적지 않게 당황했을 겁니다.

 

기근은 굉장히 무서운 겁니다. 생명의 파괴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기근의 원인은 가뭄, 전쟁, 자연 재해, 곤충 등입니다. 이러한 것들 때문에 농사가 제대로 안 돼서 먹거리가 떨어지는 현상을 기근이라고 합니다. 기근이 오면 세상은 아비규환이 됩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 욕구인 식욕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은 비극 중의 가장 큰 비극입니다. 죽음에 처해지게 되는 이유 중 굶어 죽는 것만큼 비참한 것은 없습니다.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적어도 음식 가지고 장난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다른 것은 다 몰라도,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내주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선행인 것입니다. (입양한 아이(2)를 부부싸움 때문에 굶어 죽게 한 어느 젊은 부부 이야기)

 

아브람의 정착지, 가나안 땅에 얼마나 기근이 심했는지 더 이상 그 땅에서 살아갈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이주를 결심합니다. 애굽 땅으로. 애굽은 늘 풍요의 상징입니다. 실제로 애굽은 매우 풍요로운 나라였습니다. 지금은 미국이 풍요의 상징이고, 미국이 풍요롭게 잘 사는 나라이지만, 그 당시 애굽은 세계 최고의 풍요로운 나라였습니다. 나일강 때문이었습니다. 나일강이 가져다 주는 풍요 때문에 애굽 사람들은 나일강을 신으로까지 받들었습니다. 그 신의 이름이 오시리스입니다. 바로(애굽의 왕)는 오시리스의 화신으로 불렸습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가 걸리면 우왕좌왕하게 되어 있습니다. 도를 닦는 도인이 아니라면, 먹고 사는 문제를 놓아두고 의연할 사람은 없습니다.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근이 오면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는 것이지요. 도둑질이나 강도질이라도 해서 자신과 가족의 배를 채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을 버리고 풍요의 땅 애굽으로 향합니다. 기근의 위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기근을 피해 애굽 땅에 도착했을 때 한 가지 문제가 더 발생합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로 인한 문제였습니다. “내가 알기에 그래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니”(11-12).

 

기근으로부터의 위기 의식은 이제 아내 사래의 외모로부터의 위기 의식으로 바뀝니다. 기근으로부터의 위기는 애굽으로의 이주로 해결되었는데, 아내 사래의 외모로부터의 위기는 해결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얼굴에 흠집이라고 내시겠습니까? 아브람은 이 문제를 이렇게 해결합니다. 아내 사래를 자신의 아내가 아니라, 누이라고 신분을 속입니다. “원하건데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13).

 

저는 이 문제를 두고 적지 않은 고민을 했습니다. ‘아브람은 왜 그랬을까?’ 실제로 나중에 애굽의 바로 왕은 아브람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18-19).

 

아브람의 관심은 생명 보존과 안전에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래를 누이라 속이는 것을 통해서 아브람은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확보하기 원했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13). 이러한 아브람의 행위를 놓고 많은 주석가들은 아브람을 비판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이나 아내의 위험은 차선으로 두고, 자신의 안전과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는 대신 거짓말을 통해 안전과 생명을 확보했다고 말입니다. 이러한 비판은 이런 말로 들립니다. 아브람은 비록 기근을 만났지만 가나안 땅에 남아 있어야 했고, 아내 사래의 아리따움 때문에 살해 위협에 놓인다 해도 절대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저는 이러한 주석들에 대해서 손사래를 치고 싶습니다. 제가 보기에 아브람의 행동은 불신앙의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신앙적인 행위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우선, 기근은 총체적인 위기입니다. 약속의 땅에 기근이 내렸더라도 믿음으로 버티면 먹고 살 수 있다는 생각은 굉장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구조적인 악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쓰나미가 닥치면 그 사정권에 들어온 것은 모두 파괴되고 맙니다. 쓰나미가 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버티고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황당한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광신입니다. 쓰나미가 닥치면 그 자리를 어서 피하는 것이 오히려 믿음의 행위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초인으로 만들어주는 어떤 주문 같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자연의 법칙에 지배를 받는 우리가 자연의 법칙을 받지 않는 초인적인 존재로 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 있는 자들은 무모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자연 법칙에 더욱더 충실하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소박하게, 나누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로 압니다.

 

두 번째로, 아내 사래로부터 온 위기를 해결한 방법은 옹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그 당시 풍습상, 더군다나 애굽 사람도 아닌 이방인으로서 기근을 피해 온 아브람 일행에게 애굽 사람들이 환대를 베풀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어떠한 방법을 써서든 그들을 착취하려 했을 겁니다. 그 중 가장 큰 가능성은 약자에 대한 폭력입니다. 여성은 예나 지금이나 폭력의 대상이 되기 쉬운 약자입니다. 아리따운 아내 사래가 애굽에서 봉변 당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아브람이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아내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까지도 어려움에 처하게 될 거라는 것은 눈에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 같은 것은 아무 쓸모 없어지는 겁니다. 존재가 없어지는데, 약속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약속도 성취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아내 사래를 누이라 속이는 작전은 굉장히 기막힌 작전입니다. 이 작전이 기막힌 작전이었다는 것은 그 이후로 벌어지는 일로 인해 증명됩니다. 우선 애굽의 고위관리들이 사래의 외모에 반합니다. 일반 사람이 아니라 고위관리들의 눈에 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생명을 보존할 가능성이 더 커졌다는 뜻입니다. 사래에게도 잘 된 일이고, 아브람에게도 잘 된 일입니다. 작전은 대성공합니다. 단순히 고위관리 정도가 아니라, 애굽의 바로 왕의 눈에 띄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애굽 왕은 그 대가로 아브람에게 양과 소와 노비와 얌수 나귀와 낙타등 수많은 선물을 하사합니다. 아브람은 기근 때문에 먹을 것이 없어서 애굽 땅으로 왔는데, 단순히 기근만 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 작전이 성공적인 작전이었다는 것은 이후 하나님의 개입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와 그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셔서 사래의 신분이 무엇인지 드러나게 하십니다. 사래는 아브람의 누이가 아니라 아브람의 아내라는 사실을요.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을 아브람 자신이 처음부터 밝혔다면, 아브람과 사래는 이렇게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아브람의 우려대로 아브람은 죽음에 처해지고, 사래는 원치 않는 폭력에 시달리며 모진 고통 속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래의 신분이 무엇인지 온 천하에 드러나게 하심으로 아브람도 살고 사래도 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드러나게 하셨으므로, 아브람과 사래는 바로 왕에게 아무런 해를 받지 않고, 하사 받은 선물도 하나 빼앗기지 않고, 오히려 부자가 되어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 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톡톡히 누리는 아브람과 사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브람의 꾀가 정말 자신만의 안위를 위한 것이었다면, 사래는 처음부터 아브람의 꾀를 순순히 따르지 않았을 겁니다. 어느 부인이 자신만 살겠다는 남편을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남편의 말에 순종하겠습니까? 그러나 사래는 아브람의 계획에 아무런 반항도 없이 그대로 따릅니다. 이것은 그만큼 사래가 남편 아브람을 신뢰했다는 뜻입니다. 남편의 지혜는 단순히 살기 위한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한 거룩한 지혜라는 것을 자신도 깨달았던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아브람과 사래는 담대하게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약속의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거라는 믿음이 그들에게는 있었던 것이지요.

 

사래 사건은 옹졸하고 치졸한 아브람의 꼼수가 아닙니다. 자연인으로서,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한 믿음의 사건입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는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구원을 가져다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처럼 초자연적인 인물이 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연 법칙에 순종하며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딱따구리 한 마리가 열심히 나무를 쪼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고 있는데 갑자기 마른벼락이 치더니 그 나무를 반으로 쪼개 놓았습니다. 이것을 보고 놀란 다른 짐승들이 그 딱따구리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너에게 무슨 힘이 있어서 그 큰 나무를 쪼갤 수 있니?’ 그러자 딱따구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단지 나에게 맡겨진 일을 매일 성실히 했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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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9. 8. 22:35

미래를 여는 교회

(빌레몬서 1:1-25)

 

오늘 우리가 읽은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개인적으로 보낸 편지입니다. 여기에는 기막힌 사연과 기막힌 간청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따라 가다 보면 그리스도인이란, 그리고 교회란 무엇인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라는 문구를 보면, 빌레몬은 골로새 교회의 중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노예를 거느리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그의 집이 골로새 교회의 모임 장소로 사용된 것을 보면 말이죠. 옛날에는 정치적인 이유와 재정적인 이유로 지금처럼 교회 건물을 자유롭게 지을 수 없었기 때문에 성도들 중 여유가 있는 집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 편지를 빌레몬에게 쓴 바울은 현재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 정황이 자세히 나와 있는데, 3차 전도여행 후에 사도 바울은 박해 당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 거기에서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해 로마로 압송 당합니다. 로마에 압송된 바울은 재판을 받기 전 미결수 신분으로 감옥에 갇혀 있었고, 비교적 자유로운 감옥 생활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시시때때로 복음을 전하고 자유롭게 글도 쓸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빌레몬서 외에 에베소서와 빌립보서 등도 옥중서신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의 교우인 빌레몬에서 친필(대부분의 바울 서신은 대필해서 쓴 것입니다.)로 편지를 쓴 이유는 오네시모라는 사람 때문입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 때문에 그랬는지는 정황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서 도망쳤습니다. 도망쳐서 로마까지 왔는데, 거기서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노예제도가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 상황이 얼마나 일촉즉발의 상황인지 감이 잘 안 잡히실 겁니다. 그러나 2천 년 전 로마시대 때는 인구의 35-40% 정도가 노예였습니다. 노예제도가 합법적이었고, 사회의 기반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예제도를 뒷받침하고 있는 법도 잘 발달해 있었습니다. 그 중 도망친 노예는 주인이 사형에 처해도 주인은 아무런 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아주 당연한 처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오네시모가 처해 있는 상황은 생사가 달린 절체절명의 상황인 것입니다. 바울의 이 편지가 오네시모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매우 긴급한 상황인 것이죠.

 

물론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의 주인 빌레몬에게 이 편지를 쓴 이유는 오네시모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빌레몬이 죽인다 해도 아무도 뭐라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 사도 바울이 무슨 권리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죽이지 말라고 부탁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이러한 곤란한 상황에서는 방관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지혜로워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력을 다해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살려 달라고 부탁합니다.

 

지금처럼 통신이나 교통이 발달된 시절이 아닌 그 때에 도망자 오네시모가 로마에서 사도 바울을 만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밖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는 듯 합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드라마틱 하죠. 도망자 노예 오네시모는 도망친 로마에서 바울을 만났고,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거기에 골로새 교회를 세운 에바브라도 함께 있었던 듯 합니다. 그 에바브라를 통해서 골로새 교회의 상황과 빌레몬에 대해서, 그리고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에 대해서도 들었겠죠.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를 알게 된 바울은 적지 않은 고민을 했을 겁니다. 오네시모가 도망친 것에 대해서 눈 감고 있자니 양심에 거리끼고, 그렇다고 오네시모를 돌려보내자니 도망친 노예에 대한 사형제도를 모를 리 없던 바울은 그것도 양심에 거리꼈을 겁니다. 그렇다면 두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빌레몬서를 쓰게 된 동기인 것입니다. 법을 어기지 않으면서 생명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것만큼 보람찬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울은 고심 끝에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그냥 돌려 보낸 것이 아니라, 아주 파격적인 부탁을 하면서 돌려 보냅니다. 그 파격적인 부탁이 빌레몬서의 핵심입니다.

 

우선 바울은 빌레몬을 우리의 사랑 받는 자요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빌레몬이 바울을 만나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바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아마도 빌레몬은 사도 바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를 존경하거나 아니면 그를 신앙의 롤 모델로 생각했을 겁니다. 이방 선교계의 대부 사도 바울을 개인적으로 안다는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에게서 이러한 호칭을 듣는다는 것은 매우 자랑스러운 일인 것이죠.

 

게다가 바울은 빌레몬을 매우 크게 칭찬을 합니다. 그대로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4-7). 몇 자 안 되는 편지에서 바울은 많은 부분은 빌레몬에 대한 칭찬으로 채웁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사도 바울에게서 이러한 칭찬을 들은 빌레몬의 마음이 얼마나 뿌듯했겠습니까? 그 동안 교회를 섬기면서 어렵고 힘들었던 마음이 씻은 듯이 녹아 내렸을 겁니다.

 

빌레몬에 대한 칭찬에서 이 문구에 눈길이 머뭅니다.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그러면서 내 자신을 한 번 되돌아 보게 됩니다. ‘나로 인해 성도들의 마음은 평안함을 얻을까? 아니면 나 때문에 짜증날까?’ 그러면서 빌레몬은 어떻게 했길래 성도들에게 평안함(refreshment)을 주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 답은 그 윗구절에 있습니다.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빌레몬에게는 사랑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은 있는데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은 있는데 사랑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과 믿음, 어느 한 쪽이 좀 부족하면 성도들에게 평안한 마음을 주기 쉽지 않습니다. 또한 사랑과 믿음이 누구를 향한 것이냐도 중요합니다.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은 주 예수와 모든 성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것도 똑같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주 예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은 있는데,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은 있는데, 주 예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 예수를 사랑하는 것과 모든 성도(이웃)를 사랑하는 것 중 어느 한 쪽이 좀 부족하면 성도들에게 평안함을 주기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아보지만, 일단 균형이 잡히면, 그 결과 성도들에게 평안함을 주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바울 사도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칭찬을 들으면서 마음이 환해졌을 빌레몬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살려 달라는 부탁을 넘어 그를 종이 아닌 형제로 받아 달라는 부탁입니다. 이것인 매우 파격적인, 파격적이다 못해 전복적인 일입니다. 왜냐하면, 노예제도가 기반을 이룬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빌레몬 개인에게 하는 부탁을 넘어 골로새 교회에게 하는 부탁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편지의 인사말에서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2)라고 쓰고 있는 겁니다. 빌레몬 한 명만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종이 아닌 형제로 받아들인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빌레몬이 속한 공동체 전체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큰 갈등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민감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레몬 개인을 넘어 골로새 교회 공동체에게 이 문제의 적극적인 해결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바울의 부탁대로 빌레몬과 골로새 교회 공동체는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그를 종이 아닌 형제로 받아 들였을까요? 아니면 바울의 편지를 그 자리에서 찢어 버리고, 오네시모를 노예법에 따라 사형에 처했을까요? 당연히 바울의 부탁대로 빌레몬과 골로새 교회 공동체는 일을 처리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가 이렇게 우리에게 성경의 형태로 전해져 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빌레몬과 골로새 교회 공동체가 바울의 부탁대로 오네시모에게 자비를 베풀고 그를 종이 아닌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바울과의 관계 때문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들은 주 예수의 복음에 온 생명을 걸고 산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20). 바울이 주 안에서 기쁨을 얻는다는 말은 곧 그들이 이 일을 주 안에서 처리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 빌레몬과 골로새 교회 공동체는 복음을 귀로만 들은 것이 아니라, 복음을 삶으로 살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충만하지 않으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믿음인 것이죠. 그야말로, 빌레몬에 대한 바울의 칭찬은 립서비스가 아니라, 실제였다는 것입니다. 도전이 되는 신앙입니다. 꼭 본받아야만 하는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더 이상 노예제도가 있는 시대에 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빌레몬서에서 일어난 일과 똑같이 노예를 종이 아닌 형제로 받아들이는 일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보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빌레몬과 골로새 교회 공동체가 오네시모의 미래를 열어준 것처럼 미래를 여는 그리스도인,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충만한 정도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 안에서 용기를 내시고 지혜를 간구하셔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모든 상황에서 미래를 열어가시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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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9. 5. 04:37

()하란

창세기 8 

(창세기 11:27-12:9)

 

노아와 홍수 이야기는 족보로 끝납니다. 그리고 새로운 이야기의 출발점도 족보로부터 시작됩니다. 성경에서 족보를 삽입하는 이유는 뼈대 있는 집안을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족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섭리)에 대한 외적인 표현입니다. 족보를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선택)가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볼 수 있는 것이죠.

 

오늘 우리는 노아의 아들 셈의 족보 중, 새롭게 시작되는 족보를 만납니다. ‘데라라고 하는 인물부터 시작하는 족보입니다.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11:27).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데라가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다가 하란에 정착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데라의 가족사를 발견합니다. 데라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막내 아들인 하란이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죽습니다. 막내 아들의 죽음을 두고 아버지 데라가 얼마나 슬퍼했는지, 그가 가족들을 데리고 그 땅을 떠나는 것을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고통 중에서 가장 큰 고통은 참척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참혹할 에 근심할 으로 구성된 이 말은 말 만들어도 참혹하고 근심스럽습니다.

 

우리는 흔히 아브라함이 본토친척아비의 집을 떠날 때,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좀 틀린 말입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된 것은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참척의 고통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의 추억이 묻어 있는 곳에서, 그것을 견뎌내며 잘 지낼 부모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떠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데라는 가족들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납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원래 목적지는 가나안 땅으로 가는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데라는 가나안 땅으로 가는 도중, 하란 땅에 뿌리를 내립니다. 정착이라는 것은 사실 삼박자가 맞아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데라는 하란 땅에서 참척의 고통을 잊을만한 무엇인가를 발견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성경이 알려주는 것은 없지만, 아마도 쾌락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서 242절에 데라에 대한 짧은 기사가 다음과 같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24:2).

 

인간은 기본적으로 고통에 취약합니다. 고통 당할 때 인간은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기 십상입니다. 미국 광고 중에 이것을 재미나게 표현한 광고가 있습니다. 스닉커즈라고, 초콜렛바 광고인데, 이런 문구를 활용합니다. “You are not you when you’re hungry. 배고플 때 당신은 당신의 원래 모습이 아닙니다.” 참 재치 있는 광고입니다. 그러니, 배고플 때 얼른 스니커즈라도 먹으라는 광고입니다.

 

데라는 참척의 고통으로 인해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하란 땅에서 우상숭배를 통하여 참척의 고통을 잊은 것을 보면 말이죠. 물론 데라에게는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삶의 몸부림을 치더라고,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꼭 던져 볼 필요는 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질문 속에서 바로서기는 쉽지 않겠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신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오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질문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데라에게는 그러한 질문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거기, 하란 땅에서 생명이 다하기까지 살다 죽었겠지요.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11:32).

 

동생의 죽음, 아버지의 방황, 어지러운 환경 등, 우울한 환경 속에서 자란 아브라함에게도 분명 간절함이 있었을 겁니다.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 그러한 간절한 소망 때문인지,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소명을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12:1). 내 마음이 원한다고 다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실수하기 십상입니다. 아브라함, 얼마나 그 지긋지긋한 환경 속에서 벗어나고 싶었겠습니까? 특별히 우상숭배의 쾌락을 통해 고통을 잊으려고 하는 타락한 아버지의 그늘에서 아브라함은 얼마나 벗어나고 싶었겠습니까? 웬만한 사람 같으면 그냥 뛰쳐나왔겠죠. 그러나, 내가 하고 싶다고 섣불리 행동에 옮겼다간 인생이 더 꼬일 수 있습니다. 시쳇말로, 쓰레기 차 피하려다 똥 차 만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소원이 있더라도, 가장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사실 믿는 이들에게는 이것이 가장 큰 과제 중 하나죠.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내가 들은 것이 하나님의 음성인지 아닌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제가 여기에 대해서 말씀 드릴 수 있는 것, 그리고 누누이 강조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 듣는 법은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시를 쓰는 것과 같습니다. 시 쓰는 것을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을까요? 물론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도 대학 다닐 때, ‘시쓰기라는 수업을 들은 적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정말로 시를 쓰는 사람들은 시쓰기를 배워서 시를 쓰게 됐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뭐라고 말하나요? “시가 내게로 왔다!”라고 말합니다.

 

위대한 예술가들은 모두 이런 식입니다. 미켈란젤로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은 무엇인가를 조각하지 않았다고 말이죠. 그는 그저 대리석 덩어리 안에 있는 그 무엇을 발견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불필요한 부분들을 제거하고 나니까, 그 안에서 피에타 상이나 다비드 상, 모세 상 같은 것들이 나왔다고 말합니다. 베토벤 같은 음악가도 똑 같은 말을 합니다. 그는 그저 들려오는 악상을 노트에 적었을 뿐이라고 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듣기에는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생각하겠지만, 이것이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경험해 본 사람들은 그들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갈 겁니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도 모두 같은 말을 합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316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여기서 하나님의 감동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들은 뭔가를 기록하기 위해서 억지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는 것인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가르쳐 줄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지에 들어선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신적 경이감인 것이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신적 경이감을 체험한 사람들은 절대로 경솔하거나 경박스럽지 않다는 겁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도 않고, 자신이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교만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떠벌리지도 않습니다. 그저, 무쏘의 뿔처럼 자기 길을 갈 뿐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그러한 모습을 발견합니다. “떠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은 순종합니다. 순종이란 바로 그런 것이죠.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는 것. 우리는 아브라함이 본토친척아비의 집을 떠날 때 룰루랄라했을 거라 생각하지만, 분명 마음이 무거웠을 겁니다. 누구든지, 자신에게 익숙한 삶을 뒤로하고 새로운 곳으로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피하고 싶은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의 마음을 따라 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눌러 앉아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순종했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12:4).

 

하나님께서는 왜 아브라함에게 본토친척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서 떠나라고 하신 곳은 하란입니다. 하란은 우르와 함께 달을 숭배하던 지역으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데라는 우상숭배를 통해서 고통을 잊어보려고 했던,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던 사람입니다. 그런 곳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구출하기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이후에 일어나게 될 출애굽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출하란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모든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시니까요.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통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새롭게 하실 때에는 기존에 있던 것에서 하기를 원하십니다. 나도 모르게 나를 묶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나오기를 바라십니다. 나를 묶고 있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께 예배 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한 속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면, 우리는 결국 하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살다 죽을 겁니다. 데라처럼.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출하란하여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가나안 땅으로 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께 집중합니다.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12:8). 결국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출하란시키신 이유는, 아브라함을 새롭게 하셔서 하나님 당신께 집중하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도 출하란이 필요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예수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우리들에게도 날마다 그 음성을 건네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듣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는 이래저래 삶의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속박 당하고 있어,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하나님께 예배 드리지 못하는 삶을 살아 갑니다. 지금 이 시간 이렇게 예배당에 나와 앉아 있다는 것이, 내가 지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고,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있는 것이라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냥 일상의 스케줄 중 하나로 그러는 경우가 허다하죠.

 

각자의 삶은 각자가 가장 잘 아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출하란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정신차리고 잠시만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순종입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출하란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정말로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가 우리에게는 얼마나 있을까요?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출하란은 그 누구를 위한 일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것만 기억해 두면 됩니다. 순종은 현재 내가 쥐고 있는 보장된 유익, 이익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일 같지만, 결국 그것은 오히려 나에게 더 큰 유익으로의 여행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러한 영적 혜안을 갖는다면, 순종이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을 겁니다.

 

출하란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도 아브라함처럼 이 되십시오. 축복의 통로가 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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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9. 1. 12:25

항복하라

(예레미야 2:4-13)

 

예레미야서는 남유다 왕국의 몰락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참 쉽지 않은 겁니다. 사랑하는 조국이 망해가는 모습을 그린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이 일에 부름 받았다는 것은 참 괴로운 일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을 지 이해가 가는 대목입니다. 얼마나 고달팠으면 그의 별명이 눈물의 선지자이겠습니까?

 

진짜 의사와 가짜 의사의 차이점은 그들이 의사 면허증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논할 가치 조차 없는 상황이지요. 그렇다면 진짜 의사와 가짜 의사의 차이점은 무엇이겠습니까? 환자의 병을 고쳐주려고 하느냐, 아니면 환자의 병을 통해 돈을 벌려고 하느냐, 정도가 될 것입니다. 의사는 여러 가지 정황을 통해서 환자의 미래를 예견할 수 있습니다. 진짜 의사는 그것을 감지하고 어떻게 해서든 죽음으로 치닫고 있는 환자를 생명의 길로 돌려 놓으려고 하겠지요. 그러나 가짜 의사는 그 환자가 죽든 살든 별로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냥 환자를 통해서 돈벌이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레미야가 살던 시대에는 선지자가 예레미야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여러 명의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조국 남유다의 앞날을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유독 예레미야만 조국의 앞날을 다르게 내다봤습니다. 예레미야의 고통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조국의 운명을 알아버렸다는 것이고, 그 운명이 불행했다는 것이고, 그것을 전해도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이 없는 것만큼 외로운 것은 없습니다. 그럴만한 사람들이 그러면 오히려 이 무식한 것들하면서 침이라도 퉤퉤 내뱉을 수 있지만, 예레미야 예언의 청중은 유식하고 교양 있고 권력 있는 예루살렘의 주민들과 고관들, 그리고 왕이었습니다. 알아 들을 만한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니, 예레미야의 심정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게다가 예레미야 예언의 청중이 힘 있는 사람들이다 보니, 예레미야 예언을 못 알아 들은 것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동원해서 자신들의 구미에 맞지 않는 예언을 한 예레미야를 죽이려 들기까지 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이것이었습니다. 남유다 왕국이 바벨론에 의해서 망한다는 것입니다. 망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게다가 남유다의 왕과 고관들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성과도 있었습니다. 앞날이 그렇게 불투명하지만은 않았습니다. 한국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국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한국이 곧 중국에 의해서 멸망 당할 거라는 예언을 하고 돌아다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현재 그렇게 큰 어려움이 없는 상황 속에서 그 멸망 예언을 들은 한국인들은 멸망을 예언하고 다니는 그 사람을 어떤 취급할까요? 미친놈 또는 매국노 취급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언을 보면, 이것이 단순히 국제 정세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닌 듯 합니다. 예레미야는 나라의 앞날을 좀 더 근본적인 문제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택하셔서 세우신 나라입니다. 소위 시내산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이것은 혼인관계의 비유로까지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신랑이고, 이스라엘은 신부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서로에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문제가 발생한 겁니다. 신부가 신랑을 버리고 외도를 했다는 것이죠. 이것을 일컬어서,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검증하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5). 다른 말로 표현해서, 하나님 당신이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무슨 잘못한 게 있느냐를 물으시는 겁니다. 여기서 조상들은 출애굽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조상들이 출애굽을 하면서 경험한 하나님에 대해서 뭔가 불의한 것을 발견한 것이 있느냐를 물으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이나 고관들이 선지자들이 어떠한 잘못을 범했는지에 대해서 고발하십니다. 율법을 다루는 제사장들은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냐?’하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고관들은 정의를 굽게 하고,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바알의 이름으로 엉뚱한 거짓 예언만 전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즉 남유다에게 닥칠 운명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알려주는 겁니다. 그것을 요약적으로, 그리고 은유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구절이 바로 13절 말씀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13). 여기서 두 가지 악이란 하나님을 떠난 것과 다른 신에게 간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볼 수 있는 상황은 이런 것입니다. 이들이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은 이들도 나름대로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했다는 겁니다. 인간은 누구나 생존을 위해서 투쟁합니다. 우리가 늘 고민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나에게 생명을 가져다 줄까? 어떻게 해야 내가 살 수 있을까? 생존의 문제는 우리 인간에게 아주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생존의 문제를 가지고 투쟁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여기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지적하는 것은, 생존의 문제를 위한 투쟁을 하되,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알고 해야 한다는 겁니다.

 

남유다는 그것에서 실패한 겁니다. 남유다도 왕국을 존속시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투쟁했습니다. 나라가 망하는 것을 방관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남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엉뚱한 웅덩이를 팠다는 겁니다. 생명의 근원이 아닌, 곧 터질 웅덩이를 팠다는 겁니다. 웅덩이를 파는 그 때는 그것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착각이었습니다.

 

이것은 남유다의 실제 역사에서 이런 상황을 반영한 비유입니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남유다는 왕국을 존속시키기 위해서 주변국들과 긴밀한 동맹을 맺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예언은 이들이 바벨론과 화친을 맺고 바벨론과 잘 지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남유다의 왕과 고관들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바벨론이 아니라 애굽과 동맹을 맺고, 오히려 바벨론을 무찔러야 할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오판은 결국 바벨론의 심기를 건드린 꼴이 되었고, 바벨론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애굽은 물론이고 남유다까지 복속시키십니다. 결국 남유다는 바벨론에게 망하게 된 것이죠.

 

이렇게 국제 정세를 잘못 읽고 오판한 이유는 남유다의 왕과 고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신들에게 계속되는 풍요와 안정을 가져다 줄 거라고 예언한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 헛된 것, 즉 우상숭배를 하니까 인간성의 상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상은 결국 우리에게 인간성의 상실만 경험하게 합니다. 지금 내가 우상을 섬기는지, 하나님을 섬기는 지 알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은 인간 냄새를 풍기느냐, 썩은 내를 풍기느냐를 보면 됩니다. 우리가 그냥 모르는 척 하고 넘어가서 그렇지, 인간 냄새가 무엇인지 우리는 압니다. 그리고 무엇이 썩은 냄새인지도 압니다. 애써 눈감는 것 자체도 이미 썩은 내를 풍긴다는 증거겠죠.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다시 싸우고 너희 자손들과도 싸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9).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굉장한 희망의 말씀입니다. 그렇게 당신을 버리고 우상(헛된 것)에게로 간 당신의 백성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들과의 관계를 끊지 않으시고, 싸우셔서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시고 관계를 회복하시겠다는 의지를 보이십니다.

 

바벨론에게 망하고 포로 잡혀가는 남유다 왕국은 처절한 절망은 경험합니다. 그들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말해주었던 성전이 파괴되고, 왕들이 잡혀 죽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떠나 포로생활을 하게 됩니다. 정말이지, 모든 것, 그들의 삶의 근간이었던 모든 것이 파괴된 경험을 합니다. 이것만큼 더 큰 절망은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마저 이들을 버리시겠다고 하셨다면, 이들은 절망을 넘어, 그냥 멸망으로 치달았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희망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다시 싸우고 너희 자손들과도 싸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9). 여기서 싸운다는 것은 다툼을 통해서 관계를 끝장내버리겠다는 뜻이 아니라, 법적소송을 통해서 권리를 되찾아 오겠다는 뜻입니다. 위에서 말씀 드렸듯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시내산 계약으로 맺어진 계약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관계를 파기하고 마음대로 떠나버린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법적 관계를 다시 세우시겠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잘못된 판단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나 헛된 것을 추구하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인생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의 삶을 지탱해 주는 모든 것이 무너졌더라도,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데, 왜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포기합니까?

 

또한 하나님께서는 다시 싸우고 싸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싸움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빨리 항복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과 싸워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본적으로 생수의 근원,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삶을 두고, 존재를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절망이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닌 것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아닌 것, 영원하지 못한 것은 언젠가는 그 존재조차도 사라지고 맙니다. 그것이 사라졌을 때, 그 밀려오는 절망감을 어떻게 감당하시렵니까?

 

이스라엘은 근본적으로 영원하신 하나님께 존재의 근거를 두고 살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전에, 왕에, 그리고 땅에 존재의 근거를 두고 살았습니다. 돌과 나무로 지은 성전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인간인 왕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피조 세계인 땅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영원한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안 계십니다. 영원한 하나님께 존재의 근거를 두지 않고, 성전, , 땅에 존재의 근거를 두고 살았던 이스라엘은 영원할 줄 알았던 성전, , 땅을 빼앗겼을 때 멘붕(멘탈붕괴)에 빠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가장 중요한 교훈을 주시는 겁니다. , 그들의 존재 근거는 성전, ,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디에 존재 근거를 두고 사십니까? 돈 몇 푼 번 것에 기쁨을 느끼시고, 돈이 좀 없는 것에 비애를 느끼십니까?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에서 자꾸 기쁨과 비애를 찾으니까 그러는 겁니다. 그것은 그냥 잠시 뿐입니다. 있다가 없어질 것은 우리에게 참된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다른 말로, 우리에게 절대로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참된 기쁨, 즉 구원을 가져다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싸우고 또 싸우시는 하나님께 순순히 항복하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 아닐까요?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은 자칫 절망으로 치달을 수 있는 우리에게 참으로 희망입니다.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아멘.

 

 

*설교 제목을 <항복하라>라고 정했지만, 이런 설교 제목도 괜찮을 것 같군요. <우리의 존재 근거이신 하나님>

 

* 설교를 '기독론적'으로 더 발전시키고 싶었지만, 그러면 설교가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그만 두었습니다. 기독론적으로 발전시키지 않아도,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우리의 존재 근거이신 하나님이 잘 드러났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렇죠?^^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8. 29. 05:04

누가 세상의 주인인가?

창세기 7

(창세기 11:1-9)

 

창세기 10장은 노아의 세아들의 족보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노아 가족의 잔혹사 이후, 어찌되었든 노아의 가족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땅에서 번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후손들이 온 땅의 지면에 흩어져 번성하기를 바라셨던 것이죠. 그러다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문제가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볼 바벨탑 이야기입니다.

 

바벨탑 이야기는 그냥 그 스토리만 보면 조금 쌩뚱 맞습니다. 시날 평지에 이르러 거기에 모여 살고자 했던 인간들, 그리고 그곳에 도시를 만들어 흩어져 살지 않기를 바랐던 인간들, 또한 거기에서 높은 탑을 쌓았던 인간들. 그 모습을 보고 염려스러워 인간의 언어를 흩으시는 하나님의 행동. 무엇이 그렇게 잘못이기에 하나님께서는 바벨을 심판하시는 것일까요?

 

바벨탑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좀 더 큰 틀에서 보아야 합니다. 성경이 현재의 형태로 기록되기 시작한 시기는 바벨론 포로기 때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살 때, 그들에게는 지금과 같은 형태의 성경이 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구전(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으로만 성경이 대대로 전해졌지요. 나라가 존재할 때는 그것이 아무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다른 나라의 포로로 잡혀갔을 때, 위기가 닥쳐 온 것이지요.

 

우리 나라의 일제 강점기 시대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 일본에서 행했던 일 중 가장 악랄하게 했던 것이 언어말살 정책입니다. 그 나라 사람의 말은 곧 그 나라 사람의 존재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언어가 없어지면 존재도 없어지는 겁니다. 우리 나라 역사를 보아도 국어 사전이 편찬되고 국어를 지키기 위한 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일제강점기였습니다.

 

바벨론에 의해서 나라가 망하고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 이들에게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이들에게 구전으로 내려오던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보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바벨론 포로기 때 그 동안 구전으로 내려오던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로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구약성경입니다.

 

또한 그 뿐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이렇게 심판을 받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으며, 자신들의 정체성은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반성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자신들의 죄악의 뿌리가 어디에 있었는지도 찾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을 함부로 다룬 바벨론에 대한 심판도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 바벨탑 이야기는 그것과 잇닿아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처참하게 짓밟은 바벨론은 그 당시 세계를 제패한 제국이었습니다. 이들은 온 세상의 모든 나라를 정복하여 절대 왕국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 정황이 바로 오늘 말씀에 나오는 시날 평지에 정착하는 장면입니다. 그 중에서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4).

 

여기에는 바벨의 욕망이 드러나 있습니다. 이들은 탑을 쌓아 그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려 했습니다. 이는 즉, 자신들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려고 하는 욕망인 것이죠. 또한 이름을 내고라는 것은 소유와 지배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출세라는 말인데, 사람들이 출세하고자 하는 이유는 이름을 내는 일을 통해서 갑과 을의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름이 난 갑은 소유와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서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출세하려고 하는 겁니다. 이름이 나야, 갑의 위치에 올라서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유권과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 바벨은 자신들이 하나님이 되어서 이 세상에 대한 소유권과 지배권을 가지려는 욕망의 표출인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다른 사람들을 정복하는 형태로 나아갈 뿐 아니라, 이 세상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도전을 줍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비록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온 신세이지만, 이들은 성경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이 세상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리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창세기 1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 세상의 주인은 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보기에 바벨론은 그것을 망각하고, 자신들이 이 세상의 주인인양 하나님 행세를 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 가장 무서운 심판이 임할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바벨론을 심판하게 될 거라는 예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죠.

 

바벨론의 심판 예언은 구약의 예언서 전반에 흐르는 기류입니다. 특별히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의 대선지서에서 그 심판 예언이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그러한 기류의 입장에서 오늘 말씀을 들여다 보면, 오늘 말씀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언어를 주신 이유는 자기 존재에 대한 자각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결국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던지는 가장 깊은 철학적 질문은 이것 아닙니까? “나는 누구인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얼마나 찾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을 달라집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하루는 꾀죄죄한 옷차림에 흐트러진 모습으로 프랑크푸르트의 한 공원에 앉아 있었습니다. 공원 관리인은 그가 노숙자인줄 알고당신 누구요?”하고 퉁명스럽게 물었습니다. 그때 쇼펜하우어가 몹시 괴로운 어조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발 나도 내가 누구인지 좀 알았으면 좋겠소.”

 

니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현대인은 두 가지 병()을 갖는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 첫째의 병이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둘째의 병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언어로 자기 자신에 대한 탐구를 태어나면서부터 하는 인간은 결국 자신의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도서 12:1-2).

 

여기서 “~하기 전에라는 것은 죽음 또는 종말을 의미합니다. 죽기 전에, 종말이 이르기 전에 우리 인간이 기억해야 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뻔하고 흔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생을 조금 진지하게 살고 있는 분들은 이것이 무슨 말인지 알 겁니다. 또한 인생을 오래 사신 분들도 이것이 무슨 말인지 깨달음이 있으실 겁니다. 인생은 그야말로 생로병사인데, 인생이란 태어나서 살다 늙고 병들어 죽는 것입니다.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도,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나에게는 그 차례가 오지 않을 거라고 착각하고 사는 것이 우리네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착각과는 상관 없이, 우리 인생에서 다른 것은 몰라도, 꼭 찾아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우리 인간이 던지는 질문,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궁극적으로 던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죽음, 종말이 없다면, 우리는 그러한 질문을 특별히 던지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주어진 삶을 살면 되니까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죽음, 즉 종말이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호화롭게 살아도, 아무리 이름을 내고 살아도, 아무리 큰 업적을 이루었다 해도, 그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죽음’, 종말의 순간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실존 앞에서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바벨탑 이야기에서 가장 큰 비극은 그들이 언어를 잃어버렸다는 겁니다. 언어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존재를 잃어버렸다는 것인데, 존재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 모르고 멸망 받았다는 뜻입니다. 구원이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나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피조물인 내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어리석음을 벗어버리고, 창조주 하나님께 모든 인생을 맡기는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창조주께서 피조물을 돌보실 때, 우리는 창조주께서 갖고 계신 모든 선한 것들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이 되어 스스로의 생명을 유지하겠다고 마음 먹는 그 순간, 피조물인 우리는 스스로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죠.

 

땅에서 뿌리 뽑힌 나무는 꽃도 피울 수 없고,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한국에 있는 모교회 옆에 라일락 나무가 있었습니다. 해마다 봄이 되면 라일락 나무는 꽃을 피워 아름다운 향기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에는 그 나무의 주인이 나무를 뿌리째 뽑아 공터에 버려두었습니다. 한창 라일락 꽃이 핀 시기였습니다. 물론 어느 기간 동안 뿌리 뽑힌 라일락 나무는 라일락 향기를 발할 수 있었지만, 며칠이 지나자 곧 그 나무는 죽어버렸고, 그 이후로 더 이상 봄이 되었을 때 라일락 향기를 나누어주지 못하고 존재가 사라져버렸습니다.

 

라일락 향기는 그 나무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 때 생산될 수 있는 아름다움 입니다. 이처럼, 피조물은 창조주에게 뿌리는 내리고 있을 때만 그 생명을 아름답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깨달아 가는 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 이 땅에서 뿌리가 뽑히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완전히 다른 세상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죽음을 통해 이 땅에서 뿌리가 뽑히는 것 같은 경험을 하는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들려줍니다. 만약 우리에게 죽음이 없다면, 죽음이 극복된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는 영원히 라일락 향기를 발산하며 아름답게 살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아니,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죽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죽이시는 분입니다. 그 일이 실제로 예수라는 사람에게서 일어났다고 하는 것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언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를 믿을 때, 우리에게도 똑같이 죽음을 죽이는 사건, 즉 구원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언어로 무엇을 하십니까? 악한 일을 꾸미십니까? 욕하십니까? 남의 일에 감나라 콩나라 간섭하십니까? 남 뒷담화 하십니까? 세상 살기 힘들다고 불평하십니까? 바벨탑을 쌓으십니까? 하나님처럼 되려고, 욕망을 분출하고 계십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아무리 성공적인 것 같아도, 곧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려다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언어로 바벨론을 건설하지 마시고, ‘나는 누구인지에 대한 해답을 찾으십시오. 누가 세상의 주인인지 탐구하십시오. 누가 창조주고, 누가 피조물인지, 깨달으십시오. 죽음을 이기신, 죽음을 죽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일을 행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거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의 생명의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8. 26. 04:42

하나님 나라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맞이하는 것이다

(눅 12:32-40)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생 최대 목표는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이 있어도, 아무리 믿음이 좋다 해도, 아무리 좋은 일을, 착한 일을 많이 해서 공로를 많이 세운다 해도, 그 모든 것을 다 합쳐도 하나님 나라를 살 수 있을만한 값어치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은 것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반응은 포기입니다.

 

배고픈 여우가 길을 지나갑니다. 위를 올려다보니까 포도가 주렁주렁 열여 있었습니다. 그 포도를 따먹으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결국 그 포도를 따먹을 수 없었습니다.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여우는 결국 포도를 포기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저 포도는 어차피 신포도라 먹을 수 없어!’ 포기에 대한 자기 합리화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뭐 어차피 나 같은 놈이 무슨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겠어! 그리고 그런 것이 존재하기나 하겠어!’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바로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익숙한 소유의 개념으로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소유의 개념으로 접근합니다. 소유하지 못하면 안절부절 못합니다. 소유하고 싶어 안달을 부립니다. 돈도 많이 소유하고 싶어하고, 좋은 차도 소유하고 싶어하고, 좋은 집도 소유하고 싶어하고, 지식도 소유하고 싶어하고, 명예도 소유하고 싶어하고, 심지어 사랑도 소유하고 싶어합니다. 부부관계가 힘들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소유의 개념으로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너는 내 꺼라는 것이죠. 그래서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서로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도 소유의 개념으로 접근합니다. 믿음이 많다 적다, 라는 말로 믿음의 정도를 표현합니다. 믿음을 소유의 개념으로 접근하게 되면, 내가 쌓아놓은 믿음 덕분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 주실 거라고 오해하게 됩니다. 복 받는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쌓은 믿음, 내가 소유한 믿음이 기준이 됩니다. 믿음이라는 것도 결국 하나님을 위한 것, 이웃을 위한 것이 되지 못하고, 나를 위한 것에 머뭅니다. 믿음도 내 소유이니, 내가 누려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런 식으로 하나님 나라에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오늘 말씀은 전혀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법에 따라 그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싶어 하면서도, 내 방식대로, 이 세상 방식으로 하나님 말씀을 받아 들면,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다른 뜻으로 해석 됩니다.

 

오늘 말씀의 첫 구절을 보십시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적은 무리는 예수님의 제자 그룹에 대한 특별한 호칭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서워 말라고 하신 이유는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당연히 무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우의 신포도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나라가 자신들에게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는 상관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 나라를 받기에는 자신들이 너무도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받지 못한다는 것은, 구원 받지 못한다는 말인데, 구원 받지 못한 삶만큼 두려운 삶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즉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는 나의 어떠한 공로로 인해 소유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에, 사실 아무런 공로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주시는 것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사실 우리는 여기에서 걸려 넘어집니다. 우리는 공짜를 매우 좋아하지만, 사실 공짜로 받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익숙하지 않습니다. 공짜는 뭔가 구린 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받으면서도 찝찝해 하는 것이 공짜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어떻게 공짜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값비싼 희생을 치르고 나서도, 받을 수 있을까 말까 한 것이 하나님 나라이어야지 하나님 나라가 값어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물건 값이 오히려 비싸야지 잘 팔린다고 합니다. 청바지 하나 만드는데 사실 별로 돈이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원가가 얼마 안 든다고 양심 있게 1만원, 2만원, 10 20, 정도 값을 매겨 놓으면 별로 안 팔린답니다. 10만원 20만원, 100, 200불 정도로 값을 매겨놓아야 불티나게 팔린다고 합니다. 비싼 값을 지불해야만 그 값을 지불하고 산 내가 빛나 보이고 특별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는 웬만큼의 공로 가지고서는 발 붙일 수 있은 곳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교회에 건축헌금 1억 정도, 10만불 정도는 헌금해야 하고, 꼬박꼬박 십일조 내야 하고, 감사헌금도 자주해야 하고, 각종 절기 헌금에, 새벽 기도 나오는 것은 기본이고, 교회에서 하는 모든 행사와, 교회를 위한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궂은 일을 도맡아 해야 하고, 그리고 적어도 교회에서 집사 직분을 이상을 받아야, 웬만하면 장로 직분까지 받아야,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자격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 하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해야 하나님 나라의 값어치가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값어치는 하나님 나라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얻기 위해 얼마나 비싼 값을 지불했느냐에 있다는 겁니다. ‘너 같은 사람은 여기 들어올 수 없어!’라면서 저 사람과 나 사이에 선을 긋습니다. ‘나는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사람이야! 내가 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고 힘썼는지 알아! 얼마나 비싼 값을 치렀는지 알아? 내가 그 동안 교회에 물심양면으로 갖다 바친 게 얼마인데! 너 같은 사람하고는 차원이 다르지!’

 

그런데 오늘 말씀 33절을 보니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소유를 팔라고 하십니다. ,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팔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러면 어느 이단 사이비 집단처럼, 집 팔고, 자동차 팔고, 적금 깨고, 가족 관계도 다 팔고, 그리고 그냥 교회에 들어 앉아 예수님 다시 오시기만 바라고 있으면 된다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부자 청년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루는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여쭙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 말은 어떻게 해야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십계명을 죽 나열하십니다. 부자 청년은 그 말을 듣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굉장한 청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굉장한 청년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예수님께서는 여기서도 모든 소유를 다 팔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소유를 다 팔고 예수님을 따르면 구원이 보장된다는 말씀인가요? 그러면 우리 이 말씀과 오늘 본문 말씀대로 모든 것을 다 팔아야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오해하고 문자적으로 이해해서, 정말로 재산 다 팔아 먹고 교회에 모여 예수님 오시기만 기다리고 있으려는 사람은 믿음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야말로 광신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바로 이겁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의개념으로 접근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생각 자체를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를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이게 뭐냐, 이게 바로 온전한 회개요, 좀 유식한 말로 메타노이아라는 것입니다.

 

바람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잡았다, 소유했다 하는 그 순간 사라지는 것이 바람입니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숨결의 나라, 성령의 나라는 바람과 같기 때문에 우리가 소유할 수 없습니다. 내가 잡았다,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없어지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 자체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고, 이 말씀 이전에 나오는 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와 관련해서 보아야 하는 말씀입니다. 생명을 소유에서 찾으려 했던 어리석은 부자는 소출이 풍성해지니까 그 모든 곡식을 쌓아둘 곳간을 크게 짓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유를 모두 거기에 차곡차곡 넣어둡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게 단순히 재물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소유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사람은 생명을 소유에서 찾았습니다. 생명이란 하나님 나라, 하나님, 성령을 말하는데, 이것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위에서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믿음조차도 소유의 개념으로 지니고 있던 사람입니다. 이런 자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나님 나라를 잡았다고,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라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저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입니다. 소유의 개념을 굳이 적용하자면, 하나님 나라가 내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나라의 소유입니다. 우리가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칠 때, ‘하나님은 내 것, 나의 소유라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소유의 개념으로 하나님 나를 접근하지 말라는 말씀은, 누가 주인이고 누가 종인지 똑바로 구분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소유로 접근하게 되면, 내 자아가 주인이 되고 이 세상 모든 것, 심지어 하나님까지 나를 위한 존재,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나의 소유물이 되고 맙니다. 이것만큼 큰 우상숭배가 또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소유의 개념을 버리고, 메타노이아, 온전한 회개의 개념으로 하나님 나라에 접근하면, 누가 주인이고 누가 종인지 똑바로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인이시고 나는 그분의 소유라는, 나는 그분의 피조물이라는 올바른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이죠.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렇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내가 그 어떤 무엇으로도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으십시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고, 나는 하나님의 종,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소유이지, 하나님이 나의 소유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련된 그 무엇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그 무엇도 하나님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니, 결국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 무엇도 소유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소유하려는 재물조차도, 사랑도, 생명도, 심지어 믿음도 우리의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려고 드니까, 인생이 허무한 겁니다.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려 드니까,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이 잡았다고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시시해지고 시들어지는 것입니다. 소유하려고 드니까, 다시 오실 주님 맞을 준비가 안 되는 겁니다. 소유했는데 여기서 누리고 여기서 즐겨야지, 가긴 어딜 가냐고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어리석은 부자처럼 내가 내 영혼에게,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합니다.

 

소유한 것이 많다 보니까 거기에 신경 쓰느라고, 하나님 부르시는데 그 음성이 안 들리는 겁니다. 하나님 부르실 때 즉시 네 여기 있습니다!’하고 달려갈 수 있도록 허리에 띠를 띠고즉 의복을 갖춰 입고, ‘등불을 켜도 서 있어야하는데 소유한 것이 많다 보니까, 그것을 즐기느라 허리띠 풀어 헤치고 등불 내팽기치고 긴장 풀고 사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주님이 와서 문 두르려도 두드리는 그 문소리가 안 들리는 겁니다.

 

아직까지도 뭔가를 소유하지 못해, 뭔가를 소유하려고 안달이신 분은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종 부리듯이 부리려고 믿음까지도 소유하려고 드실 겁니다. 내 눈에는 나 밖에 안 보이고, 내 마음 속엔 나만 가득 차서, 내가 내 삶의 주인 노릇 하면서 살아가느라 정신이 없으실 겁니다.

 

그러나, 메타노이아, 참된 회개를 통해서, 누가 주인이고 누가 종인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정립하고, 이 세상을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가지고,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 즉 이 세상 모든 것은 소유의 개념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으신 분은 하나님 주신 모든 것을 누리시면서 하나님 부르실 때에 네 제가 여기 있습니다!’하면서 하나님께로 가실 준비를 잘 하고 계실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서다시 오신 주님을 맞을 준비에 가슴 설레는 삶이어야 합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아직도 이 세상을 소유의 개념을 갖고, 소유하는데 정신 팔려서 살아가시는 분은, 주님 맞을 준비를 못하실 겁니다. 그러나, 메타노이아, 참된 회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가지고 살아가시는 분은, 주님 맞을 준비를 철저하게 하고 계실 겁니다. 여러분께서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십니까? 주님 맞을 준비를 하고 계십니까?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8. 22. 05:25

드러내는 자와 가리는 자 - 노아 가족의 잔혹사

창세기 6

(창세기 9:18-29)

 

불에 타 죽는 것도 끔찍하고, 물에 빠져 죽는 것도 끔찍합니다. 홍수심판은 물에 빠져 죽는 심판입니다. 우리가 문자의 형태로 홍수심판을 접해서 그렇지 얼마나 끔찍한 심판입니까? 지금도 여전히 물 때문에 죽는 사람이 많습니다. 특별히 요즘에는 쓰나미(해일) 때문에 죽는 사람이 많습니다. 몇 년 전에도 동남아시아와 일본에 쓰나미가 닥쳐서 수 만명이 희생 당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그러한 현상들이 참 이상한 겁니다. 왜냐하면, 홍수심판 끝에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무지개 언약이라는 것을 맺으시는데, 그 요점은 이것입니다.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9:15).

 

어떤 사람은 동남아시아나 일본의 쓰나미 피해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간주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이 그렇게 입에 붙이고 사는 성경적인일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지개 언약을 통해서 다시는 물로 육체를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쓰나미 피해를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비성경적인, 우매한 지식에서 나온 망언에 불과한 것이죠. 그러면 뭡니까? 알 수 없는 일인 겁니다. 그냥 사고인 것이죠. 우리가 그 뜻을 어떻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저, 쓰나미로 피해 당한 사람과 그의 가족을 위해서 잠시나마 기도할 수 밖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사건사고에 하나님의 심판을 갖다 붙이면 안 되는 겁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선교사인 아펜젤러 목사님도 목포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사람들을 구하다 물에 빠져 죽으셨는데, 그럼 그분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인가요? 물에 빠져 죽었으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노아(인간) 사이에 무지개 언약이 맺어졌다는 겁니다. 이는 어느 특정한 심판(물 심판)을 내리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더 이상 피조물을 벌하는 방식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언약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 인간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벌하는 방식으로 심판을 내립니다. 사법기관이 그렇게 작동합니다. 일례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에게는 종신형에 처하든지, 아니면 무기징역에 처하든지, 벌하는 방식으로 심판을 내립니다. 그렇게 해야 피해를 당한 입장에서는 위안을 받을 수 있고, 때로는 속이 시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 방식은 무지개 언약이래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벌하는 방식으로 심판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누군가 악한 일을 저질렀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벌을 내리실 것(천벌)을 기대하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간구합니다. 극악 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자에게는 당연히 죽음이라는 천벌을 내려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갑작스러운 죽음 말이죠. 벼락을 맞아 죽는다든지, 갑자기 암에 걸려 죽는다든지, 아니면 교통사고라도 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바람입니다.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른 자에게 인간이 내릴 수 있는 최고의 심판은 죽음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해주시기를 바라는 것이죠. 그러나, 죽음은 극악무도한 자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태로든 모든 사람이 당하는 일이라는 것이죠. 좀 일찍 죽거나, 예상치 못하게 죽거나, 수명을 다하고 죽거나, 축복 속에서 죽거나,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지, ‘죽는다는 현상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겁니다. 그러니까, 분한 마음에 나에게 나쁜 짓을 한 그 사람을 법이든 하나님이든 죽음이라는 것으로 심판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사실 생각해 보면 소용 없는 일입니다. 결국 도 언젠가는 죽음에 처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더 이상 심판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십자가에서 발견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무지개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피조물을 벌하는 방식으로 심판하지 않으시고, 당신 스스로 죄악을 짊어지시는 방식으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지개 언약의 핵심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용서라는 용어를 쓰시는 겁니다. ‘용서는 단순히 잘못한 것을 없던 일로 눈 감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란 심판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는 메타노이아(회개)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절대로 할 수 없는 영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여기서 영적이라는 뜻은 그 근본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용서란 하나님과 잇닿게 하는 신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살펴볼 노아 가족의 잔혹사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가족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 농사도 시작합니다. 그가 가장 먼저 지은 농사는 포도 농사였습니다. 성경 문화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포도 농사가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왜 중요한 지에 대해서는 요즘에 주보에 실리고 있는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의 글을 보시면 됩니다. 노아는 포도 농사를 지어, 수확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마셨습니다. 포도주는 당분이 높아서 마실 때 취하는 줄 모릅니다. 그래서 한 번 마시면 많이 마시게 됩니다. 게다가 노아는 홍수심판에서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므로, 방주에서 나온 이래 처음 지은 농사에서 얻은 열매로 만든 포도주니,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마음껏 마셨겠습니까? 그러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와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겠죠.

 

문제는 노아가 포도주를 먹고 취한 것에 있지 않고, 그것을 본 아들들이 어떻게 처신했는가에 있습니다. 요즘처럼 대중목욕탕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목욕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시절을 사는 우리들이 보기에는 좀 이해가 안 가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들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느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잘 보십시오. 아버지가 술 취해서 하체를 드러내 놓고 자는 것을 최초로 목격한 사람은 함(가나안의 아버지)입니다. 함은 그 모습을 목격하고는 밖으로 나가 두 형제에게 그 사실을 알립니다. 이 부분을 묘사한 문장은 이겁니다.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22). 여기서 보다라는 말은 라아인데, ‘주목해서 관찰해 보았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체에르바인데, ‘발가벗음, 노출, 외음부등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함은 아버지의 하체를 주목해서 관찰해 보았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하체를 주목해서 관찰해 본 것도 모자라, 밖으로 나가 형제들에게 자기가 본 것에 대해서 상세하게 보도합니다.

 

함의 잘못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버지의 수치를 가리기 보다 드러냈다는 것이죠. 수치()는 가려야 하는 것이지,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노아에게 잘못은 자신의 수치()를 드러낸 것이고, 함의 잘못은 아버지의 수치()를 드러낸 것입니다. 우리가 창세기 2장에서 보았듯이, 아담과 하와는 죄를 범한 이후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알고 그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치마를 엮어 입었습니다. 죄를 저지른 자나, 그 죄를 본 자나, 그것을 가려야 하는 것이지, 드러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함의 경솔하고 경박스러운 행동에 비해, 다른 두 형제 셈과 야벳은 완전히 다르게 행동합니다. 함의 상세한 보도를 들은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장막으로 달려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함처럼 경솔하고 경박스럽게 행동한 것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아버지의 벌거벗음(수치, )를 가립니다.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질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23).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수치()를 보지도 않았을 뿐더러, 가려주었습니다. 이것이 함과는 다르게 행동한 셈과 야벳의 모습입니다.

 

무지개 언약이 맺어지기 전이라면, 함의 행동이 옳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벌건 대낮에 술취해서 하체를 드러내 놓고 자는 아버지의 추태를 까발리면서 아버지를 벌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지개 언약을 통해서 더 이상 벌 주는 것을 통해서 심판을 내리지 않으시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의 행동은 하나님의 약속에서 어긋나는 불의한 행동이 된 것입니다. 반면에, 셈과 야벳의 행동은 하나님의 무지개 언약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수치를 드러내는 방식이 아닌, 덮어주고 가려주고 용서하는 방식으로 그 수치를 자신들이 짊어지는 방식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겁니다.

 

이러한 셈과 야벳의 행동이 답답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후에 술에서 깨어난 노아가 이 일을 알 고 난 뒤 내리는 저주와 축복을 통해서 어떠한 것이 옳은 행동인지 알게 됩니다. 노아는 자신의 수치를 가리지 않고 오히려 드러낸 함을 저주합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들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25). 형제들의 종도 아니고, 형제들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은 아주 지독한 저주입니다. 반면에, 노아는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지 않고 가려준 셈과 야벳을 축복합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26-27).

 

이 후의 진행되는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셈을 택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드라마입니다. 반면 가나안의 아버지 함과 그의 자손들, 특별히 가나안은 죄가 가려지지 않고 드러나며 그 드러난 죄 때문에 멸망해 갑니다. 드러내는 자와 가리는 자의 운명은 매우 엇갈립니다. 드러내는 자는 멸망하고, 가리는 자는 생명을 얻습니다.

 

우리는 남의 수치(허물, )를 드러내는 것을 매우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수다의 주제로 삼기도 하고, 재미 있어 하며, 그들이 쉽게 멸망(벌 받기)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것은 함의 자손이 되는 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무지개 언약을 믿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는 불신앙의 행동입니다. 더군다나 무지개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정하는, 성령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이런 사람은 용서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용서를 그저 잘못한 일 눈 한 번 감아주는 일 정도로 생각하는 경솔하고 경박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남의 수치(허물, )를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가려주고 덮어주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셈의 자손입니다. 무엇보다 비 온 뒤 구름 사이로 아름답게 떠오르는 무지개를 보면서 하나님의 무지개 언약을 기억하고, 그 언약을 믿고 따르며, 무지개 언약의 성취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바라보면서, 참된 용서를 실천하면서 사는 거룩한 사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몸으로, 온 몸으로, 생명으로, 우리의 수치(허물, )를 가리셨습니다. 벌 하신 것이 아니라 용서하셨습니다. 벌 하는 방식으로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용서하는 방식으로 심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48절에서 이렇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겁니다. “무엇보다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여러분은 드러내는 자입니까? 아니면, 가리는 자입니까? 불의한 방식으로 잘못된 것을 눈감아 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가에서 하신 것처럼, 벌하는 방식으로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는 방식으로 심판하라는 겁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욱더 깨달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8. 19. 05:26

십자가 앞에서 허무를 논하지 말라

(전도서 1:2, 3:1-11)

 

전도서는 전도사님이 쓴 책이 아닙니다. 전도서는 전도하러 나가자할 때 전도가 아니라, ‘코헬레트라는 말인데, 이는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해 무리를 모으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설교자라는 말이 더 어울립니다. 전도자는 무엇을 말하기 위해서 무리를 모은 것일까요? 오늘 말씀만 보면, ‘인생은 허무한 것이다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무리를 모은 것 같습니다.

 

제가 개그 한 마디 한 번 해보겠습니다. “너 나한테 불만있냐?” “아니, 물도 있다.” “바나나가 웃었다. 네 글자로 무엇이라고 하는가?” “바나나킥이게 그 유명한 허무 개그입니다.

 

허무라는 말을 정확히 설명하자면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 말에 대한 설명을 장황하게 들어야 이해 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사춘기가 지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허무라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인생의 경험을 통해서 압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저를 38 살에 낳으셨기 때문에, 저는 제 친구들의 어머니들보다 적어도 10년 정도는 더 늙으신 어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38살에 자식을 낳는 일은 우리 어머니 세대에는 좀 이례적인 일이죠. 저희 어머니께서 벌써 일흔 일고십니다. 이 생각만 해도 벌써 허무합니다. 우리 어머니가 그렇게 늙으셨다니요. 늙으신 어머니 덕분에 어려서부터 인생의 허무함에 대해서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제 또래의 친구들보다도 철이 일찍 들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께서 가끔 그러셨습니다. ‘내 마음은 스무 살 같은데, 벌써 내 나이가 일흔이 넘었구나! 세월이 정말 빠르다. 참 허무하다.’

 

오늘 전도서의 말씀을 보면, 허무함 그 자체입니다. 헛되다는 말이 다섯 번이나 반복되어서 나옵니다. 얼마나 허무했으면 이렇게 반복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인생의 허무함만을 떠올려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사실, 전도서의 저자는 허무함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다는 것이죠. 전도자가 하고 싶은 말을 제가 이렇게 표현해 보았습니다. “인생은 허무하다. 그런데 안 허무하다.” 말도 안 되는 말 같지만, 이게 왜 말이 되는 말인지 우리는 묵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허무함의 극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십자가 입니다. 십자가만큼 허무함이 자리하고 있는 곳도 없습니다. 우리는 현재 십자가를 허무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의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를 올바로 이해하고, 허무함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예수를 통해서 천지개벽이 얼어날 것만 같아서 그분을 따라 다녔던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주 무대 삼아 활동하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에 놀라 예수님을 무작정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택하신 12명의 제자들까지도, 사실 예수님께서 이루실 일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면서 자신들이 무슨 중요한 인물이나 된 것처럼 의기양양해서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사역을 완성하시러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던 때를 기억합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를 외치면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종려나무는 승리의 상징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상징적인 나뭇가지입니다. 그들 모두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가시적인 승리를 그들에게 안겨다 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께서는 그야말로 정말 허무하게 아무런 저항도 안 하시고, 로마 당국에 잡혀,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정죄 당하고, 로마 제국의 고위 관리인 본디오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은 뒤 십자가 형에 처해지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처형이 십자가 형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십자가 형은 극악무도한 죄인에게 내려지는 형벌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는 신성모독죄의 명목으로, 로마제국에게는 국가반란죄의 명목으로, 그렇게 십자가 형에 처해졌습니다.

 

무엇인가 승리를 가져다 줄 사람이라고 굳게 믿었던 예수는 그렇게 허무하게 십자가 형에 처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냥 모든 것이 끔찍한 죽음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냥 죽는 것도 허무한데, 십자가 형에 처해져 죽었다는 그 사실이 더 허무했습니다. 예수를 바라보던 사람들 모두는,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허무하게 십자가를 바라보고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십자가 사건의 허무함은 복음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얼마나 허무했으면 그토록 열렬히 쫓아다니던 제자들이 하나 같이 모두 도망갔겠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허무를 논하지 말아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십자가만큼 허무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허무하게 죽으셨다는 것이죠.

 

,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십자가 앞에서 허무를 논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또 등장합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끝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부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허무하게 달려 돌아가신 그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겁니다. 바로 이 부활 사건은 우리 인생의 모든 허무함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우리 인생이 궁극적으로 허무한 이유는 젊음이 사라졌기 때문도 아니고, 늙어가기 때문도 아니고, 결국, 죽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아무리 행복하게 산 사람도, 인생을 아무리 화려하게 산 사람도, 죽음 때문에 그 인생은 궁극적으로 허무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차피 죽을 인생 내 마음대로 살다가 죽지 뭐’,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차피 죽을 인생 좀 가치 있은 일을 하다가 죽자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 부류의 사람들은 모두 죽음이라고 하는 궁극적인 허무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냥 인생은 내가 아무리 애써 부인해도 허무한 겁니다. 죽음 때문입니다.

 

장영희 씨의 매우 공감 가는 글입니다.

 

나는 스무 살 학생들과 살아갑니다. , 말만 들어도 슬며시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하는 스무 살. 손가락 관절 하나하나까지 나긋나긋하고 발에는 스프링을 매단 듯 통통 가볍게 걷고, 어떻게 저 비좁은 공간에 인간의 내장이 다 들어갔을까, 의심될 정도로 가느다란 허리, 맑고 총기 있는 눈빛,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머리카락, 온몸으로 젊음을 발산하는 스무 살 학생들 사이에 쉰 살 내가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내가 스무 살 때는 쉰 살 난 사람들을 보며 한 살 한 살 나이 먹어 쉰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애당초 쉰 살로 태어나는 별종인간들처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음식점에 갔다가 5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 여남은 명이 , 숙자야” “영미야하며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고 아, 저들도 이름이 있구나. 저들도 우리처럼 아무개야 하고 서로 이름을 부르는구나,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들도 다 똑같을 겁니다. 제가 스무 살 때는 연세 드신 분들을 보면서 그 분들은 원래부터 그렇게 나이를 잡수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이가 먹고 보니, 그것이 아니라,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 어느새 늙었다는 겁니다. 나도 곧 50이 되고, 60이 되고, 70이 되고, 하다가 어느 순간 이 세상을 떠날 내 차례도 오겠다는 생각을 하면, 덜컥 겁이 납니다. 그리고 인생이 참 허무해집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한 사실을 전해 줍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우리가 죽었는데, 우리의 인생이 허무하게 끝났는데,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극복했다는 말입니다. , 이 말이 여러분에게 실질적으로 다가옵니까? 아무리 이 말씀을 받아 들어도, 우리는 결국 죽게 되는데 무엇이 다시 살았다는 말인지 도통 이해가 안 가십니까? 바로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믿음이고, 바로 이 순간 그냥 죽음으로 인생을 허무하게 끝낼 것이냐, 아니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부활의 삶을 바로 지금 이 순간 살 것이냐를 결정해 주는 것이 믿음입니다.

 

왜 믿음이 필요한가? 골로새서 33절이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이라는 아주 실질적인 사실이, 드러나 있지 않고,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성령에 의한 믿음의 눈이 아니고서는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영생, 즉 죽음을 극복한 새로운 삶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다시 이 땅에 임하시는 그 날에 그 감추어져 있던 영생의 신비가 우리에게 드러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지금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고 우리의 감각으로 느낄 수도 없는데, 무엇이 영생이고, 무엇이 죽음을 이긴 것이고, 무엇이 부활이라고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 부활이라고 하는 엄청난 사건을 믿음을 통해 나의 사건으로 접하지 못하면,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죽음의 문제, 즉 허무함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골로새서 3 5절 이하에 등장하는 육체의 일들은 무엇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왜 음란을 행하고,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과 그리고 분함과 노여움과 비방과 입이 부끄러운 말과 거짓말을 하면서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성적인 악행, 물질적인 악행, 그리고 언어적인 악행을 행하면서 살아가는지 아십니까? 이 모두는 우리의 인생이 허무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허무하기 때문에, 그 허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 허무를 좀 극복해 보려고 그러한 일들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죠. 허무한 인생, 이 마음에서 들 끊는 욕망이라도 채워보자.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욕망을 채워도 허무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무리 욕망을 채워주는 그것이 잠시는 즐거운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금방 식상해지는 것이 우리네 인생살이입니다. 어떻게 해야 인생의 허무를 극복해야 할지 몰라, 야단법석인 것이 우리네 인생살이입니다.

 

여기에 길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부활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궁극적으로 인생의 허무함을 십자가에 못박고 새 사람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1절에서의 말씀처럼, 그야말로 위의 것을 찾으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위의 것을 찾으며 사는 사람들, 새 사람을 입은 사람들, 부활을 사는 사람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육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붙들고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십자가 앞에서 허무를 논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 보다 더 허무한 것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십자가에서 우리 인생의 모든, 그리고 궁극적인 허무가 극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끼십니까? 그래서 그 허무를 좀 가려보려고 육의 일을 행하면서 사십니까?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십자가에서 일어난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받으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의 사전에서 허무함이라는 단어는 사라질 것입니다. 아니, 허무함이 사라질 때까지(평생 안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끝까지 십자가에서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에 집중하면서 사십시오.

 

아이작 뉴턴 경(Sir Isaac Newton, 1643-1727)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가운데 한 명입니다. 그는 영국에서 태어난 물리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광학자, 자연철학자이며 연금술사이고 신학자입니다. 그의 업적으로는 고전역학 정립, 만유인력의 법칙 발견, 미적분학 정립, 기하광학의 학문적 체계화 등 수없이 많습니다.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었지만 나이가 많아져 세상을 떠날 즈음에 건망증이 들어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나이도 잊어버리고 생일도 잊어버렸습니다. 그의 친구나 후배들이 찾아와 인사를 해도 뉴턴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와 가깝게 지내온 사람들을 만나도 뉴턴은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누구시더라?" 하고 물었으니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안타까움은 이루 말하기 힘들었습니다. 한번은 제자 중 한 사람이 답답한 마음을 견디지 못해 그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지금 거의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계신 것 같은 데 그래도 지금 기억하고 계시는 것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것이 무엇인지 말해주세요"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뉴턴이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기억하는 게 꼭 두 가지가 있어"하고는 "한 가지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는 것이지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기쁘고 즐거운 이유, 우리의 인생이 전혀 허무하지 않은 이유, 바로 저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붙들고, 부활을 사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3. 8. 15. 02:16

연탄

 

월동준비의 꽃은 연탄

아홉 개의 구멍에서 꽃처럼 불을 피워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동면하지 못하는 인간들의 몸과 마음은

일정 온도를 유지하지 못하면 동사하고 마는데

무엇보다 연탄은 그 일에 쓸모가 있었다

연탄 들어오는 날

온 가족은 줄지어 하나가 되고

광 한 켠에 착착 쌓여가는 연탄을 바라보며

걱정을 덜어냈다

이미 마음은 동사를 면하고

몸은 아랫목을 향하고 있었다

겨울 내 제 몸을 불사르는 연탄 꽃 덕분에

몸과 마음은 화사했다

춘 삼월 꽃 샘 추위를 이겨낸 봄꽃이 피기까지

겨울 내 연탄 꽃은 활활 피어 올랐다

그것은 모두 부지런한 아버지 덕분이었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한테서 성실을 배웠다

 

봄은 성실하게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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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8. 12. 02:58

하늘에 있는 지체

(에베소서 3:12-17)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새로운 세상은 숨이 가쁘기도 하고 가슴이 벅차기도 합니다. 숨이 가쁜 이유는 새로운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는 인간이 너무 연약하기 때문이고, 가슴이 벅찬 이유는 새로운 세상은 마치 태어나서 처음 보는 아름다움 풍경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들여다 보면서 환희에 빠져들기도 하지만, 또한 절망하기도 합니다. 환희에 빠져드는 이유는 뭔가 새로운 것, 진리를 알아가는 기쁨 때문이고, 절망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이처럼 새로운 세상을 어떻게 설교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니 구원이니 용서니 사랑이니 하면서 기독교적인 용어를 자주 듣기 때문에 그것이 가지고 있는 무게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용어들이 담고 있는 가치들을 캐내어 들어가다 보면 그것은 우리들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를 지닌 것들이 아닌 것을 금방 압니다. 다시 말해, 죄니 구원이니 용서니 사랑이니 하는 것들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역과 하나님의 영역 사이에는 말할 수 없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것을 일컬어 무한한 질적 차이라고도 표현했는데,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의 영역으로 다가서는 일이 망망대해 저편 에덴동산을 바라보는 일보다도 막막하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흔히 극명한 대조를 할 때 하늘과 땅을 빗대어 말합니다. 우리는 땅에 있고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십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딜레마가 생깁니다. 땅에 있는 우리들이 어떻게 하늘에 있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땅에 있는 지체인 우리들이 어떻게 하늘에 있는 지체로 거듭날 수 있을까요?

 

지난 주 우리는 <땅에 있는 지체>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부끄러운 말, 거짓말. 이것을 특별히 언급하는 이유는 이것들이 인간관계와 공동체를 허물기 때문입니다. 이 중에서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은 성적인 악행을 말하고, ‘탐심은 물질적인 악행을 말합니다. 성적인 악행은 남자-여자의 가장 기초적인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것이고, 물질적 악행은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생존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또한 진노(분함, 노여움)와 잘못된 언어생활(비방, 부끄러운 말, 거짓말)은 인간관계와 공동체를 해치는 것들입니다.

 

성서기자가 특별히 이러한 부분들을 죽여야 할 땅에 있는 지체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것이 교회의 운명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311절 말씀을 다시 읽어 봅니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이 말씀에서 거기에는이 가리키는 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그저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교회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교회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해도, 박사학위 받는 것으로도 모자랍니다. 다만 오늘 말씀과 관련하여 교회를 정의해 보면, 교회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만남, 교제, 공동체)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실체입니다. 오늘 말씀에 근거해 보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신분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고, 둘째는 거룩한 사람이며, 셋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이 세 가지가 바로, 지난 주 살펴보았던, ‘새사람의 본질입니다. 또한 이것이 바로 땅에 있는 지체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하늘에 있는 지체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은 신분이 완전히 변화된 사람입니다. 신분이 변화되면 의복이 달라집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도, 탕자가 허랑방탕한 삶에서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탕자를 향해 사랑의 마음으로 먼저 행하는 것은 새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탕자가 당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죠.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택하고 사랑하셔서 옛 사람의 옷을 벗기고, 새사람의 거룩한 옷을 입혀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입어야 할 새사람의 옷입니다.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참음, 용납, 용서. 그냥 듣기만 해도 위에서 보았던 땅에 있는 지체의 모습인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부끄러운 말, 거짓말과는 너무도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덕목들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새사람의 옷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들을 대하실 때 보여 주신 태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입어야 할 새사람의 옷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옷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뿌리는 내리고 있는 덕행이고, 교회 안에서 서로 적용하며 살도록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혜의 덕행입니다.

 

오늘 말씀은 여기에서 더 한 가지 중요한 것을 말해 줍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14). 우리 나라 말로는 더하라는 단어를 썼지만, 원래는 12절에서 쓰인 입어라입니다. 그리니까,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어라가 더 정확한 번역입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라는 말은, 모든 옷을 입고 그 옷이 흐트러지지 않게 띠(벨트)를 매듯이, 사랑으로 옷 입기의 완성을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성경 곳곳에서 누누이 강조되고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다른 덕행(은사)들은 그 의미를 상실하거나, 그 순수성을 의심받고, 결국은 아름답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10절에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하기도 했고, 성 어거스틴은 사랑하라 그리고 네 마음대로 하라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사람을 헤치기 보다, 사람을 살리고, 인간관계를 깨기 보다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하며, 공동체를 해치기 보다 공동체를 세우는 일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여기서 한 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말합니다. 성도들이 부르심을 받아서 비로소 교회를 이루는 것이 아니고, 교회는 성도들이 부르심을 받기 이전부터 있었으며, 그들이 부르심을 받아서 비로서 들어가는 삶의 터전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교회를 세우셨으며, 사람들을 그 교회 안으로 부르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평강을 누리게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평강을 누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감사가 넘치는 삶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이렇게 명령합니다.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감사는 믿음을 표현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깊은 방식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누구도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감사를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장은 예배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예배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믿음이고, 믿음이 있으면 감사가 넘치게 되고, 그것을 밖으로 표출하는 행위가 예배인 것이죠.

 

땅에 있는 지체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하늘에 있는 지체란 일차적으로 우리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지체가 손에 잘 안 잡히는 것이죠. 땅에서 하늘로 이동하려면, 우주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만유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옷을 꼭 입어야 합니다.

 

아직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지, 손에 잘 안 잡히고 이해가 안 되시는 분이 계실 겁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지체의 삶을 이해하고 그 삶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충만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만큼 하늘에 있는 지체가 되어 갈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만큼 긍휼하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를 아는 만큼 자비를 베풀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를 아는 만큼 온유해질 것이고, 그리스도를 아는 만큼 오래 참을 것이고, 그리스도를 아는 만큼 용납할 것이고, 그리스도를 아는 만큼 용서하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를 아는 만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아는 만큼 믿음이 자랄 것이고, 그리스도를 아는 만큼 감사가 넘치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를 아는 만큼 예배자로 살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아는 만큼 평강(peace)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 17절을 읽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여러분의 말과 행동이 땅에 있는 지체가 아니라, ‘하늘에 있는 지체의 모습을 보이시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새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땅에 있지만, 우리는 이미 하늘 나라를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말씀이 공허한 메아리로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날마다 더해져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한 마음 한 뜻으로 달려 갑시다. 아멘.

 

 

* 오늘 설교는 조경철 교수님의 골로새서 주석서 <오직 그리스도>에 많은 빚을 졌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3. 8. 9. 09:09

자본주의적인 시

 

맥도날드에서 시를 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적으로 시를 써야 하는데

어쩐지 내 시는 자본주의적이지 못하다

왜 그럴까 생각하다

빅맥 세트를 먹으면 될까 싶어

주문해 먹는다

고기 패드 두 개 들어간

야채가 적당히 섞인

게다가 프랜치프라이드에

무한리필 코카콜라 한 잔까지

햄버거 세트 하나도 참 자본주의적이다

이렇게 자본주의적으로 배를 채웠는데도

어쩐지 내 시는 자본주의적이지 못하다

그렇다면 내일은

스타벅스에 가서

아메리카노 한 잔 시켜 놓고

시를 써 봐야겠다

그래도 자본주의적인 시를 쓰지 못한다면

100 달러짜리 지폐 위에

낙서라도 해야겠다

뉴욕 맨하튼 월가를 누비며

물론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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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8. 8. 05:56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그 은혜를 누리는 인간

창세기 5

(창세기 8: 13-22)

 

꼬박 1년이 걸린 홍수사건이 마무리 되고,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드디어 방주의 문을 열고 나옵니다. 1년 동안 방주에 머물면서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TV든 책이든 가장 큰 약점은 냄새를 맡을 수 없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눈과 귀로만 들었을 때는 모든 것이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뭐 때로는 끔찍하기도 하지만요. 그러나 냄새를 맡는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 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1년 동안 방주에 갇혀 있으면서, 그 수많은 동물들의 땀과 똥 냄새를 맡아야 한다는 상황을 말이죠. 쉽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눈과 귀로만 듣는 것과, 직접 가서 냄새를 맡으며 체험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겁니다. 한국을 떠나 오기 전 2년 정도 중증장애인들을 돌보는 한사랑 마을이라는 곳에서 자원 봉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자원 봉사라는 말 자체는 굉장히 아름다워 보이고, 낭만적으로 보이고, 있어 보이죠. 그러나, 그곳에 직접 가서 그들과 함께 뒹굴며 그들의 땀냄새와 똥냄새를 맡으며 봉사하는 일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함께 갔던 한 후배는 한 번 가더니 다시는 못 가겠다고 하더군요. 도저히 냄새를 맡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저도 처음 자원 봉사를 간 날, 한 녀석이 화장실에서 부르는 소리가 나서 가보니까 똥을 푸지게 싸 놓고 그것을 치워 달라고 하더라고요. 똥 냄새가 얼마나 나고, 그 상황이 지저분한지, 좀 어리둥절하더라고요. 그러한 것을 이겨내고 적응해나가지 못하면 자원 봉사도 그림의 떡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겁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을 생각만 할 때는 낭만적으로 아름다워 보이고, 가슴이 타오르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은 매우 구체적인 겁니다. 보고 듣는 것만이 아니라, 냄새를 맡아가면서 해야 하는 고단한 일이죠. 믿음이란 뜬 구름 잡는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삶이라는 뜻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방주를 지었습니다. 방주를 짓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리고 그 방주 안에서 온갖 동물들과 일년 동안 갇혀 있었습니다. 그것도 햇볕 쨍쨍 내리 쬐는 날이 아니라, 비 오는 궂은 날에 말이죠. 비 오는 날 동물원에 가 보셨나요? 냄새가 진동해서 동물원에 있기 힘듭니다. 물론 1년 동안 방주 안에서 견뎌내야만 살 수 있는 이유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준행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곤혹스러운 일을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최첨단 과학장비가 없었던 노아는 일일이 손으로 다 확인해야 했습니다. 비가 그치고, 시간이 충분히 지났다고 생각된 때에 노아는 까마귀와 비둘기를 보내서 땅이 말랐는지 아직 안 말랐는지 확인합니다. 그리고 방주에서 1년의 세월을 보낸 뒤 땅이 말랐음을 확인합니다. 그런데 노아는 자기 마음대로 방주 문을 열고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옵니다.

 

레크리에이션 가운데 가라사대라는 게임이 있습니다. ‘가라사대라는 말을 해야만 사회자가 말한 대로 움직여야 하는 게임입니다. 그 게임을 하다 보면, 사회자가 가라사대를 안 했는 데도 우리의 육체가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상황, 여건, 조건을 보고 움직이지 마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움직이십시오. 그래야 노아처럼 하나님께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 받을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듣는 것인지 잘 모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일차적으로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옵니다. 우리의 귀에 대고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성경을 펴서 기계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도 우울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성경을 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눈을 감고 손으로 성경을 잡고 펴지는 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올 거라 생각하고 성경을 폈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에 이런 말씀이 써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목매어 죽으니라.” 이 말씀을 본 그는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다시 눈을 감고 성경 중 짚이는 아무데나 또 폈습니다. 그랬더니 이런 말씀이 써 있었습니다. “어서 가서 그 일을 행하라.”

 

하나님의 음성을 그렇게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이 거기에 신비로운 방식으로 숨겨 있습니다. 고요한 가운데 성경을 묵상하고, 성령의 조명을 받고, 기도할 때 신비로운 방식으로 그 음성이 들려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학원에서 무슨 기술을 배우듯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는 상황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사랑을 어떻게 기술 배우듯 학원에서 가르치고 배울 수 있습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서적 깊이로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죠. 이처럼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속에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들려 오는 것이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노아의 지속적인 의로운 행위는 환경, 여건, 조건을 보고 움직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움직인 것 외에, 방주에서 나와 정결한 짐승으로 제단을 쌓아 예배 드린 것에서도 드러납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짐승들은 방주 사건을 거치면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습니다.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고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 내라”(17). 여기서 나오다라는 단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히브리어로 야차라는 이 말은 여기서 나오다로 번역되고 있지만, 이는 하나님께서 동물을 창조하실 때 사용된 동사입니다(1:24-25). 그러니까 노아와 방주 사건, 즉 홍수사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재창조의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방주에서 나온그들에게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라는 말씀도 주십니다. 우리가 창세기 1장에서 보았던 바로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서 어떤 사건을 주십니다. 물론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가장 궁극적인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우리 삶 속에는 그것과 닮은, 우리를 새롭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건이 널려 있습니다. 우리가 인식을 하지 못해서 그렇지, 하나님께서는 그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뭔가 말씀하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고자 하십니다. 그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건을 통해서 새롭게 되는 인간, 특별히 노아에게 일어난 홍수사건은 그와 그의 가족을 새롭게 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새롭게 된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께 제단을 쌓게 된다는 겁니다. 노아는 정결한 짐승으로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제단을 쌓은 것이 아니라, 정결한 짐승으로 제단을 쌓았습니다. 여기서 쌓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바나인데, 이것은 아름다운 건축물을 예술적으로 짓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아름다움이 베어 있는 예배를 드렸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매우 진진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거듭난 우리들은 얼마나 아름다움이 베어 있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지속적인 노아의 의로운 행위, 그리고 아름다움이 베어 있는 예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열납해 주십니다. 21절 전반부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아 주신다는 것은 은혜입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아 주신다는 것 자체가 우리를 열납해 주시고 용납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안 받아 주신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앞에서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를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안 받아 주셨을 때, 가인이 얼마나 황당한 일을 저지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안 받아 주시는 상황은 죽음의 상황이나 다름 없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아 주시면 거기에는 생명이 넘치게 됩니다.

 

예배를 받아 주신 하나님께서는 말할 수 없는 은혜의 약속을 또한 해 주십니다. 그 음성을 성경에 적힌 그대로 들어 보겠습니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라”(21). 사실, 땅은 사람 때문에 애꿎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땅이라 함은 사람 빼놓은 모든 동식물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땅 자체도 의미합니다. 사람의 악함 때문에 애꿎은 것들만 피해를 봅니다. 악함은 애꿎은 것들만 피해 보게 만듭니다. 그래서 악함은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엊그제도 뉴스를 보니까, 음주 운전 때문에 야영장에서 텐트 치고 자던 두 자매가 그 자리에서 죽었고, 운전자의 아버지도 중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 중이랍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인간의 욕심 때문에 지구가 파멸로 가고 있습니다. 현재 지구의 가장 큰 문제는 경제가 아니고, 지구 온난화입니다. 환경 오염입니다.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인류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 전, 스스로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이 어려서부터 악한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제 그것 때문에 멸하지 않으시고, 인간과 땅을 보존해 주시겠다고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당신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때까지 쉬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모든 사람들에게 해를 비추시며 비를 내려 주십니다. 그러니, 스스로 멸망 길에 들어서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습니다.

 

홍수사건 이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의 악함 때문에 다시는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아무리 악한 일을 저질러도 벼락이 내리쳐서 그를 멸하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악함 때문에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악함 때문에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이십니다. 당신 스스로가 그 악함을 담당하신 것입니다.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 새로운 생명을 온 우주 만물이 누리게 되는 그날을 기다리며 새생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즉 내 자신이 흠 없고 온전한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산 제사로 올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없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은혜를 누린다는 것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악함 때문에 우리를 멸하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을 믿고 까불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궁극적 은혜를 알았다면, 이 말씀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전 5:17).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종말론적인 삶, 새생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땅에서 하늘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누리는 삶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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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3. 8. 5. 15:02

우주소년 아톰

 

난데 없이 로봇을 만들어 달라는 아들

자기는 로봇을 조종하고 싶단다

침대에 팔베개를 하고 나란히 누워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버지의 어릴 적 꿈을 들려준다

 

아버지는 우주소년 아톰처럼

지구를 지키는 지구방위대가 되고 싶었어

 

아버지의 어릴 적 꿈 이야기를 듣던 아들이

자기도 아버지처럼 지구를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단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멋진 이름을 들려준다

로보트 태권 브이

마징가 제트

그랜다이저

독수리 오형제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지구를 지키는 지구방위대

아버지는 아들에게

주제곡을 흥얼거려주고

아들은 어느새

아버지처럼 꿈을 꾼다

 

아버지의 푸르렀던 꿈을

제 꿈인 양 가슴에 꼭 품고 잠든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속삭인다

 

이 녀석 이 다음에 크면

지구를 지키기는커녕

자기 자신을 지키는 일조차도

얼마나 힘든 지 깨닫는 날이 오겠지

 

아버지는 오늘 밤 우주소년 아톰이 되어

우주를 날아 다니는 꿈을 꾸고

아버지의 꿈은 아들의 가슴에 전설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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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8. 5. 03:51

땅에 있는 지체

(골로새서 3:1-11)

 

<술과 코카인에 취한 채 죽은 미라들>이라는 기사가 지난 주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사진 제공). 이들은 500년 전 잉카제국의 종교의식(희생의식)에서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고지대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해서 불과 몇 일 전에 죽은 것 같이 보존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과학자들이 이들의 상태를 분석해 본 결과, 이들의 몸에서 술과 코카인이 다량으로 검출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들을 선택해서 희생제의에 바쳐지기까지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술과 코카인을 투입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참 비참한 것은 발견된 미라 3구의 나이를 분석해 본 결과, 두 명은 4,5세의 소년 소녀였고, 한 명은 13세의 소녀였답니다. 이 중에서 특별히 13세의 소녀의 몸에서 술과 코카인이 더 많이 검출되었는데, 이는 13세의 소녀가 자신의 운명을 인지하고 공포를 더 느꼈기 때문이랍니다.

 

이런 기사를 보면서, 우리는 잉카제국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미개인이라는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미개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선진국이라 불리는 세상에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물론 다른 형태를 띠고 말이죠. 마약문제는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사회악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약에 희생되고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돈 때문입니다. 잉카제국의 사람들이 저렇게 비상식적으로 희생제의를 드렸던 이유는 그것이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시대 마약을 팔아 배를 채우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남을 희생시키는 것이죠.

 

몇 년 전 아이티에 허리케인이 덮쳐 수많은 피해가 났을 때도 그 와중에 고아가 된 아이들을 몰래 잡아, 그들의 장기를 내다판 파렴치한들이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고아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밖에 안 보였던 것이죠. 인간으로 보이지 않고, 돈으로 보인 겁니다.

 

이번 주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군산여자실종사건>은 가정이 있는 남자(현직 경찰)와 이혼녀와의 불륜 때문에 생긴 범죄였습니다. 둘은 몰래 만나 성관계를 가졌고, 여자는 임신한 것 같다며 남자에게 위자료를 요구했고, 남자는 위자료 300만원을 주고 관계를 끝내려고 했는데 여자가 만족하지 못하겠다며 더 많은 위자료를 요구하자 홧김에 우발적으로 저지른 살인 범죄였습니다. 남자의 살인 동기가 우습습니다. 가정이 깨질까봐 그랬다는 겁니다. 그렇게 가정이 깨지는 걸 걱정했으면 처음부터 불륜을 저지르지 말았어야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이렇게 어처구니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악을 보면서 세상이 썩었다고 한탄하며, 남의 일처럼 여기지만,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니라, 곧 나에게서 벌어질 수 있는 나의 일입니다. 인간사회에서 어떠한 죄악이 발생했다면, 그것은 그 죄악을 저지른 사람만이 저지른 죄악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저지를 수도 있는 죄악인 것입니다. 우리 각자 개인이 그 위치에 가 있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죄악된 일을 보았을 때 그것을 보며 손가락질을 하기보다, 그것을 보고 내가 저지른 죄악인 양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러한 죄악으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습니다. 그냥 지나치면, 여건 만 조성되면 언제든지 내가 그 죄악된 자리에 서게 될 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골로새서의 말씀은 땅에 있는 지체에 대해서 보여줍니다. 골로새서에서 말하고 있는 땅에 있는 지체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지 못한 상태를 일컫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상태를 일컬어 거듭난 삶, 부활의 삶이라고 합니다. 거듭나지 않고, 부활하지 않은 삶은 땅에 있는 지체에 불과합니다.

 

골로새서는 땅에 있는 지체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 보여줍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 나열되어 있는 땅에 있는 지체의 모습을 보면서 그냥 지나치기 일쑤입니다.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곰곰이 들여다 보십시오. 오늘 말씀은 우리의 실존을 비추어 주는 거울입니다. 거울을 잔잔히 들여다 보십시오.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음란(sexual immorality), 부정(impurity), 사욕(lust), 악한 정욕(evil desire)과 탐심(greed)(우상 숭배, idolatry)

 

이것과 함께 나열되는 또 다른 땅에 있는 지체의 모습이 있습니다.

 

분함(anger), 노여움(rage), 악의(malice), 비방(slander), 입의 부끄러운 말(filthy language)

 

지금 나열된 땅에 있는 지체의 모습을 하나 하나 짚으면서 모르는 척, 나와는 상관 없는 척 하고 있지만, 사실 이것이 바로 현재 우리의 모습입니다. 너무도 익숙하다 보니 오히려 낯설게 다가오는 것들입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원래 가까이 있는 것은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 법입니다.

 

남이 이러한 모습을 지적해 줘도 소용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저 비방으로만 들립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 스스로가 내 모습을 보고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능력.

 

그런데 여기서 더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땅에 있는 지체의 모습을 내 스스로가 보고 깨달았다고 해도, 그것을 내가 어쩔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부끄러운 말 등을 우리의 존재에서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느 정도까지는 될 지 모르지만, 또는 세련된 방법으로 포장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우리 실존에서 떠나지 않는 것 또한 알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말씀은 그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부끄러운 말 등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부패했는지 보여주는 이러한 악들은 죽어야 끝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슬픈 현실입니다. 여러분 주변에서 여러분을 위에서 열거한 그러한 악한 일들로 괴롭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이 바뀌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이 죽어야 끝나는 문제입니다. 막말이 심하고 성질이 더러운 사람은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다 죽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게 악한 것을 내뿜으며 사는 사람을 죽이라는 뜻입니까? 살인을 저지르라는 뜻입니까? 이것이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골로새서가 말하고 있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을 눈에 보이게 끔 해 주는 의식이 세례입니다. 세례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의식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만에 다시 일으키심(살리심)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일으키심(살리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 상황을 오늘 3절 말씀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것에 대한 실천(실제)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학이고 윤리입니다. 믿음이란 바로 이것을 보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와 함께 산, 거듭난 존재, 부활의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능력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좋다는 것은 교회 출석 잘 하고, 헌금 잘 내고, 교회 봉사 잘 하는 것 등의 눈에 보이는 것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부끄러운 말 등의 악의 문제를 잘 해결하는 것입니다.

 

교회 출석은 시간 많으면 잘 할 수 있고, 헌금은 돈 많으면 잘 낼 수 있고, 교회 봉사는 건강하면 잘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시간 많고, 돈 많고, 건강하다고 해서 다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러한 여건이 되는 사람이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많고, 돈이 많고, 건강해도,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부끄러운 말 등의 문제를 잘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시간 많고 돈 많고 건강한 사람들이 이처럼 더 부패하기 쉽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가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죽이십시오. 그것을 죽이는 방법은 이 세상의 어느 극악무도한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가장 거룩한 방법입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으십시오. 이것이 바로 새사람입니다. 새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집중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지 못할 때 우리는 어느새 우리도 모르게 땅에 있는 지체의 모습으로 되돌아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우리의 인생을 거는 실천(실제)입니다. 이것에서 실패하면, 우리는 이미 생명을 빼앗긴 거나 마찬가지 입니다. 생명을 빼앗기는 순간 우리는 이미 지옥에 떨어진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부끄러운 말 등이 얼마나 많은 지옥을 만들어 내는지.

 

제가 오늘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께 보여 드리고 싶은 것은 땅에 있는 지체의 모습입니다. 다음 주 설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살리심)을 받은 새사람이 찾으면서 살아야 하는 위의 것을 보여 드리려고 합니다.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서 감추어졌음이라"(3절). 예수 그리스도와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은 새람이 되십시오.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새사람입니다. 이는 거듭난 존재, 부활한 존재, 종말론적인 존재입니다. 이 복음이 여러분들의 귀에 들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8. 1. 08:18

믿음이 의다

창세기 4

(창세기 7:1-10) 

 

저 어딘가, 무지개 너머 저편, 저 높은 곳에는 어렸을 적 자장가 속에서나 들었던 그런 나라가 있답니다. 저 어딘가, 무지개 너머 저편에 파란 하늘이 있고 우리가 그렇게도 꿈꾸었던 그런 꿈이 정말로 이루어지는 그런 나라 말이죠.

 

어느 날엔가는 난 별에게 소원을 빌어볼 겁니다.그럼 내 뒤로 멀리 흘러가고 있는 구름이 있는 곳에서 깨어날 거에요. 그 곳은 모든 고통들이 레몬 방울처럼 녹아 버리는 그런 곳이지요. 굴뚝 꼭대기보다 훨씬 더 높은으 그 곳에서 당신은 날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저 어딘가, 무지개 너머 저편에는, 파랑 새들이 날아다닌답니다. 파랑 새들이 무지개 너머로 날아다닌답니다. 그런데 왜, 난 그 너머로 날 수 없나요?

 

귀여운 파랑새들은 기꺼이 저 무지개 너머로 날아다니는데, 그런데 왜, 난 그 너머로 날 수 없을까요?

<Over the Rainbow, 무지개 너머>

 

오늘 말씀은 홍수 이야기(설화)입니다. 홍수 이야기에는 노아라는 인물과 방주, 그리고 무지개가 포함됩니다. 무시무시한 심판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결국 무지개 언약으로 끝은 맺는 따뜻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성경 말씀이 좋은 이유는 심판과 같은 무시무시한 말씀을 하는 것 같다가도, 끝에 가서는 해피앤딩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심판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위해서 거치는 통과의례 같은 것인 거죠.

 

창세기는 희망차게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과 함께 안식에 들어가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런데, 장면이 바뀌면서 인간의 타락과 죄의 관영, 그리고 그것을 슬퍼하시고 한탄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그 뒤를 잇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심판을 통해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납니다.

 

성경에 나오는 패턴은 모두 같습니다. 희망과 타락, 심판, 그리고 새로움. 역사의 작은 사이클도 이렇게 돌아가고, 전체 구원사의 사이클도 이렇게 돌아갑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 미리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새롭게 될 것이라는 거죠.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종말론이라고 합니다. 종말론의 구체적인 모습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종말론은 구원론이라고 불러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종말론이든 구원론이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배타적인 은총 사건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배타적이라는 것은 종말이든 구원이든, 인간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는, 오직 하나님만이 일으키실 수 있는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칼뱅 같은 신학자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종말(구원)은 생명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숨쉬고 살고 있으면서도 생명이 무엇인지 잘 모를뿐더러, 생명을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는 것처럼 생명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생명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는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는 지금 생명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는 것처럼 대하지 못하고, ‘희미하게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온갖 생명을 경시하는 문제들이 인간 사회 속에 판을 치고 있습니다.

 

종말(구원)은 생명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 어느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3일만 굶어 보십시오. 당장 굶어 죽게 된 상황에서 우리의 행동이 어떻게 변할까요? 체면이고 뭐고 아무 것도 없어질 겁니다. 그저 배고픈 배를 채우고,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동물적인 근성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이 생명의 문제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매우 원초적으로 당신 자신을 일컬어,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당신 자신이 생명, 즉 죽고 사는 문제, , 구원의 문제와 관련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종말(구원)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위에서 말씀 드렸듯이, 종말(구원)은 하나님의 배타적 은총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달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말씀에 보면, 그 상황을 라는 단어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이 세대는 죄가 관영한 세대입니다. 그 상황을 표현한 구절들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6:5).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6:11-12). 그런데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의로운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노아라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구원 받을 수 있는 조건은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 스스로 의로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 기준이 우리 피조물에 있는 것이 아니고, 창조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배타적인 은총 사건이라고 하는 겁니다. 노아가 구원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노아를 의롭다고 여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성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인간의 인생은 바로 의로움과의 싸움입니다. ‘가 구원의 절대적인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한 인생의 싸움을 하십니까? 대개 인간은 먹고 살기 위해서,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싸움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싸움이 그런 것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은 ’, ‘명예’, ‘안전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갈등하고 방황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돈, 명예, 안전 등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 주고,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 같은 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러한 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고 하시니, 갈등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우리는 당연히 고민하게 됩니다. “어떻게 의로워질 것인가?(어떻게 구원 받을 것인가? 구원이란 무엇인가?)” 아직도 이 질문은 인간에게 가장 큰 질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한 민족이 유대인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생각하고, 구원에 이르는 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내린 결론은 율법으로 의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율법을 생명처럼 지켰습니다. 그런데 이들도 율법을 통한 구원에 대한 회의가 들었던 모양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에 대한 열망이 생기게 된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아직까지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그들이 기다리던 그 메시아가 바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나사렛에서 자랐고, 갈릴리에서 활동하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그 예수가 메시아(그리스도)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일이 부활이라고 또한 증언합니다. 이것을 믿는 이들은 예수를 메시아(그리스도)로 고백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 생겨난 겁니다. 이는 예수가 곧 그리스도(메시아)’라는 뜻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도들의 증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 받는 길을 열어 주셨다고 합니다. 위에서 설명 드렸듯이, 구원은 하나님의 배타적인 은총 사건인데,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셔야만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다 당신의 선한 피조물이므로,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만물이 다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창세기 7장의 홍수 이야기에서도 노아와 그의 가족만이 방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새를 포함한 정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 모두가 방주에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만물)이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 구원은 인간 스스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 바깥에서 와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안도의 큰 숨을 쉴 수 있는 이유는 다행히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이 구원 받기를 간절히 바라신다는 겁니다. 그것에 대한 의지가 분명하게 드러난 곳이 바로 십자가라는 것이죠. 십자가를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래서 우리 모두가 구원 받기를 얼마나 바라시는 지 알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는 우리들에게 구원을 길을 제시하셨는데, 그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위에서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의로운 자만이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와의 싸움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의로워질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이것을 경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생명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제시하신 구원의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떻게 의로워지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믿을 때,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믿음이 의인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믿음이 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싸움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싸움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과의 싸움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 ‘명예’, ‘안전등을 주어서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생명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돈, 명예, 안전 등이 아니라, 생명 자체이신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인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자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