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0. 17. 09:04

잃은 양의 시편

(시편 119:105-112) 

 

제목을 정하고, 마음이 흐뭇했다. 원래 119편은 토라시로 불린다. 그런데, 내가 119편을 잃은 양의 시편이라고 명명한 이유는 마지막 절 때문이다. “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119176). 무리를 떠나 길을 잃은 양이 길을 찾아 무리로 돌아가기 위해 얼마나 애타는 심정이었겠는가. ‘살려달라고 내지를 수 있는 가장 간절하고 큰 소리로 구원을 호소했을 것이다. 또한, 잃은 양을 찾아나선 부모와 무리의 심정을 어떠했겠는가? 동일한 마음으로 살려달라고 내지를 수 있는 가장 간절하고 큰 소리를 구원을 호소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구원을 간구하는 잃은 양이다.

 

시편 119편은 가장 긴 시편이면서, 성경에서 가장 긴 장이다. 일명 토라 시라고 불리는데, 그 이유는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를 따라 총 22연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토라즉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사모함이 절절하게 표현되어 있다. 시편 119편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얼마나 복된 인생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된다면, 더할 나위없이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119편은 크게 다섯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 단락(1-24)복 있는 자에 대한 노래를 담고 있다. 첫 단락에서 시인은 묻는다. “누가 복 있는 사람인가?(누가 행복한 사람인가?)” 우리 인생은 모두 행복을 찾아 나선 방랑자와 같다. 각자 나름대로 삶 속에서 행복이라는 것을 찾아 누리며 산다. 그런데 시인은 이 노래를 통하여 누가 행복한 사람인지를 알려준다. 사실, 이것은 비밀을 알려주는 것과 같다. 그러니 귀 기울일 만하다. 누가 행복한 사람인가? 주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며 열심히 교회에 다니지만, 정작 행복한 사람이 되는 법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알려주지도 않는다.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지혜의 비밀을 알려준다. “행복하기를 원하는가? 그러면 주의 말씀을 사모하라!” 시편 1편도 같은 말을 한다. “복 있는 사람은(행복한 사람은)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 이것을 우리는 얼마나 실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우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실생활에서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처럼 살아간다.

 

우리 스스로에게도 그렇지만, 우리 자녀들에게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 되는 법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며 사는가? 세상은 물질에 압도되어물질을 많이 가지면 행복할 거라고 가르친다. 전혀 행복하지 않으면서도 물질을 많이 가지게 된 것 때문에 자신이 행복한 것처럼 착각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삶이 갑자기 무너진다. 이런 빈곤한 인생이 없다. 물질은 신기루와 같아서 마치 우리가 행복한 것인 양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에 취해 살다가 어느 순간 삶이 무너지는 것을 모르고 사는 게 현대인들의 불행이다.

 

모두 다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한 모습을 보면서 안타깝다.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아무리 외쳐도 듣지 않는다.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이 행복인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지 않는다. 그러니, 가까이 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나의 인생은 왜 이럴까, 한탄만 하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다시 한 번, 자기 자신에게, 우리의 자식들에게 비밀의 지혜를 가르치자. 행복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라. 주야로 묵상해 보라.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라. 신비하게도,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와 자녀들의 삶을 행복하게 만든다.

 

두번째 단락(25-48)말씀이 가리키는 길에 대한 노래가 담겨 있다. 우리는 지금 길을 걷고 있다. 이것은 인생에 대한 좋은 메타포이다. 그런데, 이 길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해 줄지 몰라 우리는 날마다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두려워한다. 그런데, 우리가 말씀이라는 길을 걸으면, 그 길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한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번째 단락(49-88)기억하고 지켜야 할 말씀에 대하여 노래한다. 시인은 기억이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쓴다(49, 52, 55). 말씀을 기억한다는 것은 생명을 지키는 것과 같다. 말씀을 기억해 두면, 고난과 시련의 시간에 낙심하지 않고 담대하게 그 고난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다. 기억하지 못하면 죽는다. 실패한다.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기억하면 산다. 성공한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에 대한 보상은 상상을 초월한다.

 

스마트폰 때문에 현대인들이 기억력은 스마트하지 않다. 기계에 의존하게 된 포스트 휴먼(Post-human)은 생명을 얻고 있는가, 잃고 있는가? 우리는 정말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전화번호를 기억해야 할 절체절명의 순간에, 스마트폰의 배터리가 다 돼서 스마트폰을 켤 수 없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전화를 걸 수 있는가? 구글 맵이 없으면 길을 모르는 우리가 길을 잃었을 때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암송의 전통이 사라진 것을 우리는 슬퍼해야 한다.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외우려 하지 않는다. 키워드만 넣으면 어렵지 않게 스마트 폰을 통해서 원하는 말씀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기억인가? 우리는 우리의 기억을 기계에 맡겨 놓고 무슨 일을 하면서 사는가? 기억을 맡겼다는 것은 생명을 맡겼다는 것과 같다. 우리는 정말 생명이 있는 존재인가?

 

기억하는 일은 쉽지 않다. 고되다. 그러나 기억된 순간 우리는 그 기억으로 인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한다. 생명을 살리겠다는 교회가 가장 중요한 생명 살리는 일을 안 하면 모순인 것이다. 한 구절만이라도 외워보자.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105). 그리고, 나 자신 뿐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는 것에 대한 사모함과 열정을 쏟아보자. 우리가 말씀을 붙들면, 힘들고 어려울 때 그 말씀이 우리를 붙들어 준다. 정말 그렇다. 그 경험을 하고 나면, 말씀이 얼마나 강력한 구원의 밧줄인지 깨닫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될 것이다.

 

네번째 단락(89-144)가장 뛰어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노래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혜롭고 값지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품은 자신을 노인보다 지혜롭다고 말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순금보다 값지다고 노래한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길을 비추시는 빛이다. 빛이 없으면 우리는 깜깜한 길을 온전히 걷지 못한다. 위험에 처해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시기에 우리의 길을 안전하게 인도하신다.

 

마지막 다섯 번째 단락(145-176)말씀과 기도에 대하여 노래한다. , 의인의 삶에 대하여 노래한다. 말씀과 기도는 의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단락 중에 있는 이 말씀이 눈에 들어 온다.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니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147-148). 의인은 말씀을 묵상한다. 의인은 묵상한 말씀에 근거해서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한다.

 

그냥 아무렇게나 주저리는 기도는 의인의 기도가 아니다. 그것은 이방인의 기도다. 의인은 말씀에 기대어 기도한다. 말씀과 기도는 동전의 양면과 같지만, 말씀 없이 기도할 수 없다. 말씀을 사모하여 묵상하는 자는 그 말씀에 기대어 기도하게 된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말씀은 자연스럽게, 필연적으로 기도를 불러온다. 기도가 안 나오고 기도를 못하는 사람은 말주변이 없어 그런 게 아니라 말씀을 붙들고 묵상하지 않아서 그렇다.

 

시편 119편은 지루하게 긴 시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도 귀하고 값진 것이라 그것을 사모하는 마음이 너무 절절하여 그 절절한 마음을 오롯이 담아내느라 길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말씀의 귀함을 어떻게 다 담아내겠는가. 그 간절한 마음이 마지막 176절에 담겨 있다. 시인은 자기 자신을 잃은 양이라고 말한다. 서두에 밝혔듯이, 자기 자신을 잃은 양으로 생각하여 구원을 갈망하며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에게 주님은 반드시 잃은 양을 찾으시는 구원자가 되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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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공의회, 오리엔트 정교회, 동성애 문제

 

오리엔트 정교회(Oriental Orthodox Church)라는 기독교 교파가 있다.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교파이다. 이들은 451년에 있었던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집트, 서아시아, 에티오피아 등지에서 토착적으로 발전한 기독교 종파이다.

 

기독교 교리의 발전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는 '기독론'이었는데, 기독론 논쟁의 핵심은 '신성과 인성이 한 실체 속에 어떻게 공존하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크게 세 가지의 기독론이 전개된다.

 

첫째는 아폴리나리우스주의이다. 이들은 예수의 신성와 인성을 편지지와 봉투를 비유로 들어 설명한다. 인성인 봉투가 신성인 편지지를 끌어 안고 있다는 것이다. , 예수의 인성 안에 예수의 신성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 설명이 가지고 있는 한계는 예수를 완벽한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다른 형태의 가현설로서 예수의 죽음으로 예수는 인간의 육체를 구원할 수는 있지만 영혼에 대해서는 구원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남긴다. 그래서 이 생각은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단죄된다.

 

둘째는 네스토리우스주의이다. 우리에게는 '경교'라고 알려진 종파이다. 네스토리우스는 양성론을 주장한다.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이 분리 구별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연합(union)' '결합(conjunction)'용어가 사용되는데, 네스토리우스는 신성과 인성이 예수 안에서 '결합'되었다고 본다. 두 본성의 실체가 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실체 안에 두 본성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단어의 선택이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상대 진영에 서 있었던 악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에게 공격을 당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431년 에베소 공의회가 열리는데, 네스토리우스는 이곳에 참석하지 않았고, 이 회의를 주관했던 키릴로스는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한다. 네스토리우스의 생각은 신학적 단점 때문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대결 때문에 단죄된 부분이 많다.

 

셋째는 키릴리우스 파였던 유티케스주의이다. 이들은 기독론을 설명하기 위하여 물과 포도주의 비유를 드는데, 물과 포도주가 섞여서 혼합되어 새로운 것이 되는 것처럼 변하지 않는 두 본성(신성과 인성)이 섞여 그리스도가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주장을 편다. 예수는 신성과 인성이 완전하게 함께 있지만, 인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단성론이라고 한다.

 

이들의 생각은 451년에 열린 칼케돈 공의회를 통해서 단죄된다.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은 아폴리나리우스주의와 네스토리우스주의, 그리고 유티케스주의 모두를 단죄한다. 칼케돈 공의회를 통해서 기독론이 정착되는데, 그리스도 안에 인성과 신성이 실제로 연합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쪽으로 교리가 정착된다.

 

칼케돈 공의회에서 기독론을 표현하는 방식은 동방교회의 전통인 부정신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기독론은 '무엇이다'라고 정의를 하면 거기에는 반론이 제기되기 쉽기 때문에, 부정신학의 형식으로 '무엇이 아니다'의 방식을 통해서 옳지 못한 생각들에 대하여 저항하는 방식으로 기독론을 정립한 것이다. 다음은 칼케돈 공의회에서 부정신학의 방식으로 서술한 기독론이다.

 

"우리 모두는 만장일치로 가르친다. 한 분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자는 완전한 신과 완전한 인간으로 섞이거나 변화되거나 나뉘거나 분리되거나 함이 없는 두 본성이다. 이 두 본성 사이에 두 분의 연합을 통하여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며 오히려 각 본성의 동일성은 보존되면서 한 인격과 존재에서 동시에 나타난다." (Documents of the Christian Church)

 

칼케돈 공의회의 결의를 거부한 키릴리우스파(유티케스주의자들/단성론자들)는 칼케돈 공의회(451) 이후에 독자적으로 기독교를 발전시킨다. 그것이 오리엔트 정교회(Oriental Orthodox Church)이다.

 

교회의 공적인 회의(공의회)는 무엇인가를 결정하기 위한 모임이다. 교회 공의회는 그 시대의 중요한 문제들을 정의하고, 신학을 정리해서 합의된 교리를 도출해 내는 순기능도 있지만, 합의된 교리를 도출해 내는 순간 그것을 수용하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는 집단들을 생산해 내는 역기능도 있다.

 

이 시대의 교회들은 교회사에서 겪었던 이러한 문제를 반복해서 겪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동성애 문제이고, 대표적인 교단이 미연합감리교회이다.

 

미엽합감리교회는 동성애 문제에 대하여 합의된 신학적인 교리와 교회법을 도출하기 위해서 무단히 애를 쓰고 있다. 그리고 곧 합의된 교리와 교회법이 도출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합의된 교리와 교회법을 도출해 내는 순간 그것을 수용하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는 집단들이 반드시 생기게 될 것이다.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의 열린 마음이다. 우리에게 칼케돈 공의회를 거부해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오리엔트 정교회가 낯설다고 해서 그들을 함부로 이단이라고 정죄할 수 없듯이, 교회의 공의회를 통해서 합의된 교리와 교회법에 반기를 든다고 해서 그들을 함부로 이단 취급하는 것은 편협한 마음일 뿐이다.

 

교회사가 최종원은 공의회를 통한 교리의 발전사를 서술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발전은 성서 텍스트뿐 아니라, 언어/문화/사상 등 텍스트를 둘러싼 컨텍스트에 따라 전혀 다른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런 사실을 조금만 열린 마음으로 이해한다면, 정통과 이단을 몇 가지 기준으로 간편하게 구별하는 것이 얼마나 무례하고 위험한 것인가 알 수 있다. 기독교는 텍스트 기반의 교리적 관점에서뿐 아니라, 사람들이 문화와 전통 속에서 호흡하고 살아가는 컨텍스트를 중심으로 바라보아야 한다"(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305).

 

모든 사람이 한 배에 타고 갈 수는 없다. 때로는 다른 배로 갈아타야 할 때가 있다. 중요한 것은 같은 배를 타지 않았더라도 바다 위에 떠 있는 배들은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구원을 향해 나아간다. 내가 타고 있는 배만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편협하고 이기적인 마음일 뿐이다. 바다는 넓고 아직 목적지에 우리는 다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내가 탄 배 뿐만이 아니라 다른 배도 방향을 잃지 않도록 서로 이해하고 돕는 것이다. 내가 탄 배만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고, 다른 배들은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하고 바다 위에서 침몰하고 만다면, 나의 구원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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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9. 10. 10. 08:03

토브와 헤쎄드의 하나님을 간구하는 기도

(시편 118:1-9)

 

토브와 헤쎄드의 하나님,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주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나를좁은 곳에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넓은 곳으로 옮기셔서

영혼에 만족과 평안을 주시는 주님,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께서는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언제나나의 편이 되어 주심을 믿나이다.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경험한 우리들이

그것을 우리 안에만 머물러 있게 하지 마시고

고통 가운데 있는 이웃들에게도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흘려 보내게 하소서.

우리를 통해 토브와 헤쎄드가 이웃의 삶 가운데

구현될 때,

주님께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구원의 역전을

이루실 줄로 믿습니다.

사람이나 고관을 의지하지 말고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주님만을 의지하오니,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0. 10. 08:03

토브와 헤쎄드

(시편 118:1-9)

 

시편 118편은 제의 시편으로 분류된다. , 이스라엘 공동체가 다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 사용하던 시편이라는 뜻이다. 제의 시편이기 때문에 말과 행동이 암시적으로 나타나 있고, 서로 주고 받는 교독의 형식이 나타나는 것도 특징이다. 두 무리가 서로 마주 보고 서로 주고 받는 형식이다.

 

예를 들어서, 제의를 이끄는 제사장이 1절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한 뒤, “이제 이스라엘은 말하기를이라고 선창하면, 제사장 무리들을 뒤따르는 모든 회중이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후창한다. , “이제 아론의 집은 말하기를이라고 하면, 제사장 무리들이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한다.

 

이들은 왜 여호와께 감사하는 것일까? 이들의 감사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토브와 헤쎄드이다. 토브는 선하다는 뜻이고, 헤쎄드는 인자하다라는 뜻이다. 선함과 인자함(사랑)은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이다. 이것은 신앙의 대원칙이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분을 찬양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분의 인자하심과 선하심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덕분에 생명을 유지하며 산다.

 

5~9절은 인도자의 독창이다. 인도자의 고백은 개인의 고백이기도 하고 공동체의 고백이기도 하다. 인도자가 독창을 하고 있지만, 이 예배에 참여한 모든 이들을 대신한 고백이기도 하다. 예배는 같은 경험을 한 자들의 모임이다. 같은 경험을 한 자들이 모였을 때 예배는 더 깊은 감사와 찬양이 넘친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어떠한 연대성이 묻어난다. 그것만큼 공동체를 끈끈하고 든든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5절의 말씀이 인상적이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5). 우리말 번역에는 히브리어의 문학적 기교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 구절은 반의적 평행법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와 찬양을 돌리고 있다. 우리말로 고통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메차르비좁은 곳이라는 뜻이다. 이 뜻을 살려 다시 번역하면, “내가 비좁은 곳(메차르)에서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메르하브)에 세우셨도다이다.

 

이 구절을 현대인들의 심상으로 읽으면 탐욕스럽게 변한다. 요즘 현대인들은 비좁은 곳’, ‘넓은 곳’, 이러한 심상을 떠올려 보라고 하면, 비좁은 평수의 집, 넓은 평수의 집, 또는 작은 차, 큰 차,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위의 구절을 이렇게 오해한다. “내가 좁은 평수에 사는 것에 대한 고통을 아뢰었더니, 주님께서 응답하셔서 큰 집으로 이사하게 하셨다!” 성경을 자기의 탐욕을 충족시키는 데 쓰는, 명백한 오용이다.

 

이 구절은 유목민이었던 유대인들의 심상을 가지고 들여다 보아야 한다. 유목민들에게 넓은 곳은 소와 양을 먹일 수 있는 목초지의 심상을 가지고 있다. 이 구절은 오히려 시편 23편의 구절이 떠올라야 한다.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유목민이었던 유대인들에게 넓은 곳이라는 뜻은 매우 긍정적인 심상이다. 이것은 절대 탐욕의 표출이 아니다.

 

이 심상을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의 이야기에 적용해 볼 수 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정착하여 살아가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셔서 키우는 양떼와 소떼의 수가 많아지게 하셨다. 그때 발생한 문제는 좁은 목초지였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 더 넓은 곳을 찾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넓은 곳으로 간다는 의미는 욕망의 발로가 아니라, 생명이요 축복의 의미였다. ‘넓은 곳의 심상은 그들에게 구원을 의미하기에 좋은 심상이다.

 

또한, 6절과 7절에서 조심해서 해석해야 할 구절이 등장한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는 구절이다. 이것은 이기심의 고백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고백이다. 내 편이 아닌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고백하며, 여호와는 언제나 나의 편에 계시다는 신뢰의 고백이다. 이러한 내 편의 신앙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탄식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 버림 받은 것 같은 경험을 했다. 그러나, 그런 경험 가운데서도 예수는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께 자신의 영혼을 맡겼다. 이게 바로 여호와는 내편이라고 하는 신뢰의 고백이 담고 있는 뜻이다.

 

7절 말씀은 짧지만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다. 독창자는 내 편이 되신 여호와께서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신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당하는 고통을 원수들이 지켜보고 있다. 고통을 당하는 자의 고통은 자신만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그 고통으로 인하여 이웃들에게 시선을 돌리게 된다. 함께 예배 드리고 있다는 것은, 이들이 이제 하나님의 선하심(토브)과 인자하심(사랑, 헤쎄드)을 공동체 안에서 구체적으로 구현해야 함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사랑)은 나에게 전해지지만, 나를 통해서 고통 당하고 있는 다른 이들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 공동체는 하나님의 토브와 헤쎄드를 구현하는 공동체라는 뜻이다.

 

그렇게 될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7절의 짧은 말씀 안에는 반전이 담겨 있다. 7절의 앞 문장은 원수로 인하여 고통 당하는 나와 이웃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면, , 원수들이 고통 당하는 우리들을 지켜보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면, 7절의 뒷 문장은 하나님의 토브와 헤쎄드로 인하여 상황이 역전된 것을 말한다. 이제 우리들이 보응(고통) 당한 원수들을 지켜보게 된다는 것이다. 시선의 역전이 이루어졌다.

 

8절과 9절을 통해서 독창자는 이러한 구원의 역전이 일어나게 된 이유를 온전히 하나님께 돌린다. 사람을 의지하거나, 고관을 의지하는 자는 이러한 구원의 역전을 경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나 고관은 토브와 헤쎄드가 영원하지 않거나 없기 때문이다. 오직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하나님만이 이러한 구원의 역전을 창조해 내실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 예배 공동체는 사람을 의지하거나 고관을 의지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한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내 편 되심을 의심하지 말고,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신뢰하는 신실한 주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나 좁은 곳에서 넓은 곳으로 옮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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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9. 10. 8. 02:23

예언의 성취를 간구하는 기도


주님,

성령을 우리에게도 부어주시고

담대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하옵소서.

베드로는

담대하게 나아가 증언했습니다.

그는 성령강림 사건이

예언의 성취라고 증언했습니다.

그가 성령강림 사건을

예언의 성취라고 증언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성경을 알았기 때문이고

성경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성경을 알게 하옵소서.

그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우리의 믿음 안에서 발생하는 일들에 대하여

영적 분별을 통하여

‘이것은 예언의 성취다라고

담대하게 증언하게 하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0. 8. 02:22

이것은 예언의 성취다

(사도행전 2:14-21)


오순절에 발생한 일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크게 두 가지의 반응이 있었다. 한 부류는 그 일을 보고 놀라서 당황했고(amazement and great perplexity), 다른 부류는 그들이 술에 취했다며”, 조롱했다. 인간의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일이 발생하면 우리는 대개 이러한 반응을 보인다.

 

본문은 사람들의 이러한 반응에 대하여 베드로를 비롯한 열한 사도들이 사람들 앞에 서서 이 일이 어떠한 일인지에 대한 증언을 전하고 있다. 베드로와 열한 사도는 사람들 앞에 서서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14).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성경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우선, 베드로는 그들이 조롱하고 있듯이, 이 일은 술 취해서 일어난 일이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그 근거는 시간이었다.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15). 3+6하면, 오전 9시가 된다. 물론 아침부터 해장술 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아침부터 집단적으로 술을 마시는 일은 그 당시의 문화 뿐만 아니라 지금의 문화에서도 없는 일이다. 술 취한 것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니 베드로는 이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말한다.

 

베드로는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에게구약성경의 예언서 중 하나인 요엘서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가 요엘서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것은 술 취해서 발생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한마디로,이것은 예언의 성취다!”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베드로와 열 한 사도는 어떻게 이것이 예언의 성취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이다.  유대인들이 보는 구약성경은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구약성경이라고 하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구약성경은 히브리인들에게는 ‘Hebrew Bible’이라고 불리고, 그들은 히브리어로 그것을 타나크(Torah, Nebiim, Ketuvim)’라고 한다. 모세오경과 예언서, 그리고 성문서의 앞 글자를 따서 부르는 것이다.

 

베드로와 열한 사도가 이 일에 대하여 이것은 예언의 성취다라고 증언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이들이 성경공부를 진지하게 했기 때문이다. 복음서에, 그리고 사도행전에는 물론 명시적으로 제자들이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더라같은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나다나엘(바돌로매)의 일화에서 보듯이,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이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 성경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예수 사건에 휘말리고 나서, 제자들은 당연히 이런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이게 뭐지?” 그 의문을 풀기 위해서 그들은 성경을 면밀히 들여다보았다. 베드로는 성경을 열심히 공부했다. 지금 자기의 인생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일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그에게는 영적분별을 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했다. 그리고, 베드로와 열한 사도는 성경을 통해서 자신들에게 발생한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한 마디로, “그것은 예언의 성취였던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들어면서, ‘, 지금 목사님이 성경공부 하자고, 성경공부에 들어오라고 말씀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나는 여러분의 자유를 존중한다. 성경공부에 참여하고 안 하고는 여러분의 자유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성경공부에 들어오라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와 열한 사도는 어떻게 자신들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하여 예언의 성취다라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렇게 말하는 것이 그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보자는 것이다.

 

예수의 사건에 휘말린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고배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을 공부한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의 유익을 준다. 아주 실질적인 유익이다. 첫째, 사건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둘째,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된다. 결국, 성경을 깊이 알면, 삶의 질이 달라진다.


내가 몇 번 증언했지만, 여러분이 얼마나 귀담아들으시고, 그것을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실천하시는지 모르겠다. 내가 조지아에서 이곳 캘리포니아로 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다. 첫째, 사도행전 169절의 말씀 때문이다.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이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다면,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 말씀 때문에 나의 삶, 우리 가정의 삶이 바뀌었다. 그리고, 두번째, 우리교회와 연결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말씀은 에스겔 166절의 말씀이다.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이다. 이 말씀을 듣고, ‘, 이 교회가 힘들구나. 그러나 하나님이 붙잡고 계시구나라는 생각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왔다. 이 말씀 때문에, 나는 이곳에 왔고, 여기서 아주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간다.

 

성경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성경의 이야기가 나에게도 그대로 이루어져야, 그래야 그리스도인의 삶을 의미 있게 살 수 있다. 나는 나에게 일어난 일이 바로 베드로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라. 베드로가 성경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는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나서서 이것은 예언의 성취다라는 증언을 하지 못했을 것이고, 제자로서의 삶을 살지 못했을 것이고, 그의 삶은 의미로 채워지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삶도 마찬가지다. 내가 성경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사도행전의 말씀을 몰랐고, 에스겔의 말씀을 몰랐다면, 나에게 벌어지는 일이 예언의 성취’, 즉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고, 아직도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 내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른 채, 의미 있는 삶을 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이 찬송을 참 좋아한다. “겸손히 주를 섬길 때 괴로운 일이 많으나 구주여 내게 힘주사 잘 감당하게 하소서”(찬송가 347 1). 산다는 것은 참 힘겨운 일이다. 힘들고 어려운 게 참 많다. 그런데, 나는 참 행복하다.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어, 나의 마음은 늘 뿌듯하고 평안하다. 마음이 낙심되지 않고, 희망이 넘친다. 왜 그럴까?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은 그냥 아무렇게나 사는 삶이 아니라, ‘예언의 성취인 것을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공부한다는 것, 그리고 그 말씀을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삶을 바꾼다. 내 인생에 벌어지는 그 수많은 사건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그 사건들 속에서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발견하기 때문에, 삶 자체의 질이 다르다.

 

이것은 예언(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야”,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삶의 사건이 있는가? 우리 삶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이 예언의 성취인지 아닌지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서 삶의 질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 사건들이 예언의 성취인지 아닌지 알려면, 그것을 알아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삶을 바꾸고, 질이 다른 행복한 삶을 살아가려면, 성경공부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렇게까지 증언했는데도 성경공부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않는 분까지도 나는 존중한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주 안에서 날마다 승리하고 행복하기를 누구보다도 진심으로 바라며, 불철주야 여러분의 이름을 한 명씩 불러가며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애쓰는 이 부족한 종의 이 절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느껴지시는 분은, 마음을 돌이켜 발걸음을 돌려보시라. 성경공부는 교회의 이벤트/행사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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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9. 10. 7. 03:14

해산하는 여인처럼 오시기를 간구하는 기도

(이사야 42:10-17)

 

주여, 해산하는 여인처럼 오소서!

더 이상, 잠잠히, 조용히 참지 마시고,

나의 곤궁함을 돌아보소서.

나의 삶을 짓누르고 있는 산들과 언덕들을 황폐하게 하시고,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맹인과 같은 나를 불쌍히 여기사

친히 이끌어 구원하소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소리 높여 찬양합니다.

주의 구원하심을 기뻐 외치겠나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9. 10. 3. 08:46

신발

 

아버지 돌아가신 날

아버지 신으시던 신발도

갈 길을 멈추고 방황했네

 

따라 나설 길이 없어

정지해 있던 신발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자취를 감췄네

 

이제 그 신발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네

세상에 그렇게 많은 신발이 있어도

아버지가 없으니

아버지 신발은 한 켤레도 없네

 

평생을 따라 다니던 신발도 더 이상 따라 가지 못하는 곳에서

아버지는 무엇을 발에 걸치고 계실까

신발이 없으니

길을 나서지 못해

방황할 일도 더 이상 없는 것일까

 

, 신발을 신어보네

, 이렇게 찬란히 살아있네

가지런히 놓여 있는 신발을 신고 이렇게 길을 나서네

 

나를 따라 나서는 것은 신발 한 켤레뿐

신발이 없으면

방황도 못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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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9. 10. 2. 15:05

하품


손을 뻗쳐도 닿지 않는 광기가 있다

아침 공기가 차가워지면 더 멀어지는 광기가 있다

 

어젯밤 꿈자리는 어땠어?

아내가 묻는다

나는 하품을 한다

꿈 이야기만 나오면 나는 졸립다

 

숲길을 좀 걷고 싶었다

거기엔 검푸른 이끼가 사방으로 흩어져 있고

낙엽은 구석에 몰린 채 바람과 맞서고 있으며

새들의 무관심한 시선이 머무는 곳이다

 

같이 갈래?

아내에게 물었다

아내는 하품을 한다

숲 얘기만 하면 아내는 졸립다

 

나는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손을 펴 손금을 보여준다

숲속의 길은 내 손금보다 단순해

길 잃을 염려는 안 해도 돼

 

아내는 내 손금을 빤히 들여다 본다

거짓말 하지마

아내는 웃으며 말한다

내 몸에 난 가장 단순한 길을 보여준 건데

웃음 밖에 안 나온다

 

아내의 눈을 쳐다본다

구멍 난 빛은 눈 속에서 떠날 기미가 없다

손을 다시 한 번 뻗어본다

손금 속에 있던 숲길이 미끄러져 나간다

 

하품 좀 그만해

아내의 잔소리가 없었다면

미끄러져 나가는 손금의 숲길 속에서

넘어질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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