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1. 10. 23:34

어디에 관심을 두고 사십니까?

(살후 2:1-5, 13-17)

 

 

최근 뉴스 중 제 마음을 아프게 한 기사가 있습니다. <기러기 아빠의 유언>이라는 제목의 기사였습니다. 53살 먹은 아빠가 자신의 삶을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이유는 아내와 아들을 미국 유학 보내 놓고 한국에서 혼자 살면서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져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랍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그 기러기 아빠는 아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모든 분들한테 짐을 덜고자 이 길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00아 끝까지 책임 못 져서 미안하다. 아빠처럼 살지 말고 열심히 살아라. 정말로 숨 막히는 세상이다. 아빠는 몸 건강, 정신 건강 모두 다 잃었다. 아무쪼록 모든 분께 죄송합니다.”

 

더 가슴 아픈 것은 기러기 아빠의 장례식에 아내와 아들이 참석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비행기 삯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네요. 그래서 장례는 형제와 친척만 참석했다고 합니다. 참 가슴 아픈 일입니다.

 

기러기 아빠가 아내와 아들을 유학 보낸 이유는 더 행복한 삶을 준비하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참 비참합니다. 행복은 온데 간데 없고, 가슴 아픈 사연만 남았습니다. 아내 또한 아들의 행복을 위해서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왔지만, 미국에서 아들 뒷바라지 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아빠를 이렇게 허무하게 보낸 아들은 어떠한 정신적 외상을 입었을까요? 정신 차리고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 되면 좋겠지만, 그렇게 한들 아빠가 다시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무슨 소용이 있나 싶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렇게 각박합니다.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할지 모르는 세상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주인공들인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도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던 것 같습니다.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할지 몰랐던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마음이 흔들리고, 두려워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격려의 편지를 써서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었습니다. 그런데 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그렇게 마음이 흔들리고 두려워했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되면 마음이 흔들립니다. 삶에 대한, 행복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되면, 위의 기러기 아빠를 통해서 보았듯이, 마음이 흔들리고 두려운 마음에 돌이킬 수 없는 가슴 아픈 선택을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바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그릇된 행동을 낳아,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삶의 질을 망가뜨립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재림에 대한 오해입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전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에 대해서 논하는 글을 써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데살로니가 교회에 부작용을 낳고 말았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 몇몇이 사도 바울의 첫 번째 편지를 보고 예수님의 재림 시기를 오해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오로지 다시 오실 예수님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행동했던 그들의 마음도 이해할 만 합니다. 그들의 삶이 너무도 고단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인생살이의 고단함 만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것에서 오는 고단함이 컸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 당시 예수를 믿는 잃은 크나큰 위험을 떠안아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이 예수 믿는 것을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어디를 가든 예수 믿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방해하는 것을 넘어, 종교적 또는 정치적인 탄압을 받았습니다. 종교적 또는 정치적 탄압을 받은 경험이 별로 없는 우리들에게 그러한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 아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나, 목숨에 위협을 날마다 느끼며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고단한 일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삶이 고단한 사람일수록 그 고단함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한 법입니다. 병이 깊은 사람일수록 지푸라기라도 하나 잡고 싶은 심정에 그 병을 낫게 하는 약이 있다고 하면 그것이 아무리 혐오스러운 음식이라고 할지라도 먹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처럼 예수 믿는 것이 고단하다 보니, 하루 빨리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의 삶을 고단하게 하는 불의한 세력들을 물리쳐 주길 바랐던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재림이 지연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기독교가 안고 있는 크나큰 딜레마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24:34)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한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9:1)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증언과는 달리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됐습니다. 그들은 진실로 자신들이 죽기 전에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소망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종교적, 정치적 탄압 속에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세월이 지나갈수록 이 세대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죽어나갔을 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 징조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더 광신적으로 예수님의 재림에 매달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생각을 포기하고 그냥 생활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2천 년 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만 닥친 딜레마가 아닙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닥치는 딜레마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고 계십니까?

 

사실, 지금은 교회에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을 전하기 쉽지 않은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 다시 오시겠다는 예수님은 2천 년이 지나도 다시 오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교회에서 종말, 재림등의 단어를 써가며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기를 치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오늘 말씀을 붙들어야 하는 이유는, 성경의 증언을 우리 마음대로, 우리의 취향대로 골라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종말, 재림등의 언어는 사기꾼들의 언어가 아니라, 우리 기독교의 언어입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은 묵상이 필요한, 하나님께서 만들어가시는 미래를 알려주는 중요한 언어입니다. 그 언어가 담고 있는 세계가 너무 깊기 때문에 우리가 잘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 그 언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우리의 관심입니다. 우리가 가장 관심을 두어야 할 부분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복음입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가장 관심이 없는 부분이 예수님의 재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저 예수 잘 믿어 지금 여기에서 잘 먹고 잘 살게 되는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예수의 재림이고 뭐고, 지금 먹고 살기 힘들어 죽겠는데, 예수가 다시 오든 말든 그것은 내 알 바 아니고, 그냥 이 숨막히는 세상에서 숨통이나 좀 텄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숨통 트이는 데는 이 최고이니까, 돈이나 좀 잘 벌 수 있게 해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더 이하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렇게,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복음인 예수님의 재림은 묻혀 버린 시대입니다.

 

사도 바울은 재림의 문제로 마음이 흔들리고 두려움을 갖고 살아가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크게 두 가지 교훈을 줍니다. 첫째, 재림에 대한 징후에 대해서 미혹되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의 재림이 있기 전에 배교하는 일이 있고 멸망의 아들이 먼저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것들을 파악할만한 지혜가 부족하다는 겁니다. 무엇이 배교이고, 누가 멸망의 아들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내 교파들끼리 서로 치고 박고 싸우는 모습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모두들 자기들은 정통이고, 다른 이들은 이단이라고 합니다. 자기들만 옳고 다른 사람들은 틀렸다고 하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얼마나 지혜가 없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둘째,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고 합니다. 흔들리고 두려워하는 이유는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지 못하고, 자꾸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사막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침반을 따라 가는 겁니다. 그런데 사막에서는 나침반이 틀렸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나타납니다. 그렇다 보니, 나침반을 믿지 못하고 자기의 판단을 의지하여 길을 나서게 됩니다. 물론 자기의 판단을 의지하면 속은 편할지 몰라도, 사막에서 자신의 판단을 의지하다가는 결국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이처럼, 사막처럼 숨막히는 세상에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나침반, 즉 사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진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따라서 이 세상을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숨막히는 세상, 여러분은 어디에 관심을 두고 사십니까? 사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 조차 모르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정신 없이 살아갑니다. 개미 집단의 80%가 그냥 앞의 개미가 가는 대로 별생각 없이 그냥 따라 다니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개미보다 나은 존재라고 생각하며, 개미를 보면 우습게 생각하고 침 바른 손가락 끝으로 하찮게 죽여 버리지만, 생각해 보면 개미나 우리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왜요? 별 생각 없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우리의 나침반이 무엇인지, 우리가 이 숨막히는 세상에서 어디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야 하는지 성경의 가르침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을 놓쳐 버리면 우리의 인생이 개미처럼 하찮은 인생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재림)’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성경의 증언을 그대로 따라간다면, 이 세상은 숨막히는 세상이 아니라, 위로와 소망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삶은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잃는 안타까운 삶이 아니라, 생명력 넘치는 귀한 삶이 될 것입니다.

 

저도 사도 바울의 말을 인용하여, 여러분께 복을 빌어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6-17).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0. 31. 03:41

하나님께서 듣고 계시니까, 괜찮아!

창세기 12

(창세기 161-16절)

 

테네시 윌리암스(Tennessee Williams)는 그의 소설 유리동물원 (Glass Menageries)에서우리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냥꾼이고, 싸움꾼이고, 사랑꾼이다(We human beings are basically hunters, fighters, and lovers.)”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기본적으로 갈등과 노력과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그 자체로 괴로운 것이죠. 뭔가 견뎌 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생을 두고 토마스 벅스톤(Thomas Buxton)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평범한 재능과 비범한 인내가 있다면 얻지 못할 것이 없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인내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가장 아쉬움이 남는 장면에서는 언제나 인내의 문제가 떠오릅니다. ‘그 때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인내하지 못했기 때문에 망가진 삶의 한 부분이 떠오를 때마다 우리는 밤잠을 설치며, 후회합니다. 인내해야 하는 그 순간은 고달프지만, 인내의 열매는 매우 달콤합니다. 인내해야 하는 그 순간 인내하지 않고 포기하면 살 것 같지만, 결국 인내하지 못한 것 때문에 인생은 더 쓴 맛을 봐야 합니다.

 

오늘은 그런 이야기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람(아브라함)과 사래(사라)가 인내하지 못해서 생긴 인생의 굴곡.

 

그 전조는 15장에서 이미 드러납니다. 그 이전에 아브람이 목숨 걸고 조카 롯을 구해 온 이유도 아마 이런 것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에게 자식이 없으니, 조카 롯에게라도 유업을 물려 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런 생각은 늙어가는 아브람에게서 끊이질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는데 자식이 생길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아브람은 자신의 상속자로 자신의 종 엘리에셀을 지목합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15:2).

 

이렇게 흔들리는 아브람의 믿음을 바로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자손에 대한 약속과 함께 횃불 언약을 세워주십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초조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초조함이 아내 사래에게도 당연히 전해졌겠죠. 금방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도 자녀에 대한 약속 성취가 지연되자, 이번에는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흔들립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16:2).

 

사래는 후사가 아브람의 몸을 통해서 나와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래는 아브람의 종속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람과 사래 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약속이지, 아브람에게서만 이루어지는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후사는 아브람의 몸을 통해서 나와야 하지만, 똑같이 사래의 몸을 통해서도 나와야만 하는 것입니다.

 

인내하지 못하고 마음이 흔들릴 때, 우리는 자꾸 다른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도 믿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결과와 자기 합리화된 믿음의 결과는 매우 다릅니다. 믿음의 결과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만, 자기 합리화된 믿음의 결과는 볼썽사나운 결과를 낳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오늘 말씀에서 봅니다.

 

사래의 생각대로 아브람은 사래의 몸종 하갈과 동침을 합니다. 그리고 하갈은 아이를 임신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엉뚱하게 꼬여 돌아갑니다. 사래와 주종관계에 있었던 하갈이 임신을 못하는 자신의 주인을 업신여기기 시작합니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16:4b). 인간은 이렇게 자기가 좀 유리한 위치에 올라섰다고 생각하면, 생각이 비뚤어지지 시작합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에게 흔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주 발생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조금만 지체 높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자신이 하나님이 된 양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업신여기게 됩니다.

 

사래는 자신의 몸종 하갈이 이렇게 나올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관계에 금이 가면, 암투가 벌어지고 폭력이 그 자리에 들어섭니다. 예외 없습니다. 사래와 하갈 사이에도 폭력이 들어섭니다. 잘잘못을 가리기 힘든 상태가 됩니다. 진실은 없어지고, 진흙탕 개싸움만 남게 됩니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16:6b). 좀 더 힘 센 위치에 있었던 사래가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그러나 이미 관계는 금이 간 상태입니다. 되돌릴 수 없습니다.

 

이렇게 관계에 금이 가는 폭력 사태가 벌어지면, 이미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폭력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가장 나쁜 것이 폭력입니다. 폭력은 악의 대표적인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주님은 평화이신데, 어떻게 그 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들 사이에 폭력이 들어설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평화 대신 폭력이 난무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지닌 죄성(罪性) 때문입니다. 피조물의 한계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우리는 피흘리기까지 죄()과 싸워야 합니다. 이 말은 사랑과 평화로 폭력이 들어설 자리를 없게 만들어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브람 가정에 닥친 폭력 사태는 일차적으로 아브람과 사래가 인내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주인이 인내하지 못하니, 종인 하갈도 인내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인내하지 못한 아브람과 사래, 주종관계를 인내하지 못한 하갈. 인내하지 못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인생은 이렇게 볼썽사납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서 봐야 하는 것은 폭력 사태에서 패자가 된 하갈에게 내린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이 세상은 공중권세 잡은 자가 다스리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사랑과 평화의 세상이 아니라, 폭력으로 얼룩진 죄악된 세상입니다.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약자는 늘 내몰리게 되어 있습니다. 힘이 약한 하갈이 힘이 센 사래에게 내몰렸듯이 말이죠.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아브람과 사래에게 집중합니다. 하갈에게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언뜻 보아도 아브람과 사래가 힘이 세고, 하갈은 힘이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힘 센 것에 마음을 둡니다. 그리고 그것을 동경합니다. 세상은 이러한 인간의 심리를 이용해서 장사를 합니다. 이 물건을 소유하면 다른 사람보다 더 힘 센 사람이 될 거라는 환상을 심어 줍니다. 드라마 같은 것도 재벌이나 부잣집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소재로 한 것이 시청률이 높습니다. 가난하게 지지리궁상 떨면서 살다 죽은 이야기는 싫어합니다. 가난한 현실도 지긋지긋한데, TV에서까지 그러한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이 세상의 폭력의 희생자들이지, 폭력의 승리자들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갈에게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힘이 약한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돌보심 없이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폭력의 패배자, 폭력의 희생자, 약자였던 하갈은 힘 센 사래 앞에서 도망쳐 광야로 갑니다. 광야는 힘 센 자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입니다. 참 척박한 곳이지요. 어쩔 수 없이 그곳에 간 하갈은 술로 가는 길에 있던 샘 곁에서 지친 몸을 달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하갈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일이 발생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내하지 못해 일어난 폭력 사태로부터 비롯된 비극을 치유해 줍니다. 우선 갈리진 관계를 이어줍니다.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16:9).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끊겨진 사래와의 관계를 다시 잇는 길은 원래의 관계였던 주종관계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하갈의 비뚤어진 생각을 바로 잡아 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주종관계의 회복을 말하지 않으시고, 하갈의 존엄성을 보장해 주십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사장이 되어야 인간이 존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종업원이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이 사장만 못한 것이 아닙니다. 담임목사이기 때문에 더 존귀한 존재가 아닙니다. 부교역자이기 때문에 담임목사보다 존귀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기 때문에 존귀한 것이 아닙니다. 종이기 때문에 존귀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주종관계가 그 사람의 존귀함을 결정짓지 않습니다.

 

하갈이 다시 사래의 몸종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하갈 자신의 존엄성을 인정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이르시기를 아들을 낳으면 이스마엘이라고 이름을 지어주라 하셨습니다. 이스마엘의 뜻은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겁니다. 존엄성이 없는 자, 존재감이 없는 자는 그 누구도 그의 말에 그의 인생에 그의 고통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그렇게 돌아갑니다. 힘 없는 자의 고통에 누가 귀를 기울여 줍니까? 힘 없는 자가 죽어 나가도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세상은 온통 힘 있는 자의 말에만, 힘 있는 자의 고통에만 귀를 기울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온통 힘 있는 자가 되려고 영혼까지도 팔아 먹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힘 없고 존재감 없는 하갈의 고통에 귀를 기울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갈의 독특한 하나님 경험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험 사람은 이제 이 세상 어떤 것에서도 자신의 존엄성을 확인하려 들지 않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자신의 존엄성을 확인합니다. 그래서 하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16:13).

 

사랑하는 여러분! 사실 우리는 이 세상의 폭력의 희생자들입니다. 그냥 우리가 조용히 자기 할 일 하면서 먹고 사는 데만 신경 써서 그렇지, 어떤 정의로운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의 악과 더불어 싸우겠다고 덤벼보십시오. 우리는 십중팔구 세상의 폭력에 희생자가 되고 맙니다. 또한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성취하고 소유해도, 우리는 그것을 한 순간에 모두 잃어버리는 폭력의 상황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을 일컬어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의 것들로부터 우리 자신의 존귀함을 확인하려 드는 것 자체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라지고 없어지고 짊어지고 가지도 못할 유한한 것들에서 존귀함을 찾으려 든다면, 우리의 존귀함은 그것이 사라지는 그 순간 몽땅 사라지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갈이 자신의 존엄성을 사래와의 주종관계가 아닌, 하나님의 들으심(또는 돌보심), 즉 하나님에게서 찾았다는 것은 모든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놀라운 사건임을 우리는 꼭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하갈은 더 이상 사래의 몸종으로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존엄성은 거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그랬기 때문에 하갈은 다시 사래의 몸종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갈은 자신을 향해,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듣고 계시니까, 괜찮아!(이스마엘)" 물론 이스마엘을 품고 있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면서 말했겠죠.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0. 28. 04:38

이것밖에 드릴 것이 별로 없어요

(마가복음 12:41-44)

 

성경 시대의 공간적 배경은 이스라엘 유대 땅(팔레스타인)이지만, 사회문화정치적 배경은 여러 문명이 섞여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 시대에는 이스라엘 땅에 유대문화, 그리스문화 그리고 로마문화가 공존해 있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화폐 단위만 보아도 그 상황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달란트, 드라크마, 데나리온 등 우리에게 익숙한 화폐 단위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이 화폐 단위는 각각 유대, 그리스, 로마의 문화를 반영한 화폐 단위입니다.

 

달란트는 유대인들의 화폐 단위입니다. 드라크마는 헬라인들의 화폐 단위입니다. 데나리온은 로마인들의 화폐 단위 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등장하는 렙돈과 고드란트는 어느 나라의 화폐 단위일까요? 렙돈은 헬라인들의 화폐 단위이고, 고드란트는 로마인들의 화폐 단위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과부는 두 렙돈을 성전 헌금함에 넣었는데, 이는 그 당시 유대땅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인들의 화폐가 아니라, 헬라인들의 화폐를 이용하여 헌금한 것입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렙돈은 헬라의 화폐 단위 중 가장 작은 단위입니다. 우리 나라 말로 이나 으로 번역하여 부를 수 있는 단위 입니다. 그러니까 과부가 성전의 헌금함에 넣은 돈은 두 전’, 또는 두 푼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화폐 단위를 이용하여 가치를 계산해 보면, 렙돈은 노동자 하루 품삯의 1/64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노동자 하루 품삯을 100불로 친다면, 렙돈은 약 1.5불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참 별 거 안 되는 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헌금을 많이 한 부자를 칭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얼마 안 되는 헌금을 드린 과부를 칭찬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교훈은 그 이전에 나오는 외식하는 자의 경고에 대한 말씀과 대조를 이루는 말씀입니다. 외식하는 자들은 한 마디로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긴 옷 입고 다니면서 눈에 남들 눈에 띄는 것을 좋아하고, 눈에 잘 띄니까 사람들에게 인사 받게 되고, 또한 회당과 잔치 자리에 가면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기도할 때도 남들 눈을 의식하여 길게 기도합니다. 거룩함이나 사회적 책임 또는 기도 자체에는 관심이 없고, 그러한 것들을 이용해서 오직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데만 관심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에 비해, 가난한 과부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드러낼 외적인 아름다움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드러나지 않은 아름다움을 알아보시고,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을 칭찬하는 대신,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십니다.

 

렙돈은 마카비 왕조 가운데 알렉산더 얀네우스 왕(기원전 103-76) 때 사용하던 돈입니다. 이 시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다윗 왕국의 영화를 회복한 시절로 평가됩니다. 특별히 성전을 정화하여, ‘수전절의 기원을 만들기도 하죠. 수전절은 히브리말로 하누카라고 하는데, 그 뜻은 ‘dedication’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누카를 영어로 ‘Feast of Dedication’이라고 합니다. 마카비 왕조가 이방인들로부터 성전을 탈환하여, 다시 하나님께 올려드린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절기입니다. ‘는 닦을 ’, ‘은 전각 로서, 수전절은 <성전을 다시 고친 절기>라고 풀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성전을 다시 고쳤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신앙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수전절은 무너진 신앙을 다시 회복하는 절기인 것이죠. 그러므로 가난한 과부가 성전에 와서 헌금함에 두 렙돈을 넣었다는 것은 그녀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헌금이었다는 겁니다. 그냥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외식하는 자들의 개념 없는 헌금과는 달리, 과부의 헌금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신앙의 회복의 소망이 담긴 소중한 헌금이었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저는 이것을 기도의 힘이라고 믿습니다. 사실 가난한 과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고, 로마는 세계 최강의 나라로 발돋움 하여 전 세계를 자신의 발 아래 둔 엄청난 힘을 지닌 나라였습니다. 그 엄청난 힘 앞에서 가난한 과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로마 총독이 머무는 관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할 수도 없고, 칼과 방패를 들고 나가서 로마군과 싸울 수도 없습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힘센 용병들을 고용할 수도 없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나님께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답답한 현실을 돌아보면서 다윗 왕과 같은 힘센 존재가 나타나서 그들을 그 답답한 현실에서 구원해 주기를 바라면서 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메시아 사상입니다. 메시아가 나타나서 다윗 왕처럼 주변 나라들을 다 굴복시키고 성전을 회복시키고 자신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소망은 묘연해 보였습니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로마 황제에게 도전장을 내밀 수 있을만한 환경이 전혀 조성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절망 가운데 살았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삶을 꾸려 간 것도 사실은 이해할 만 합니다. 세상을 바꿀 수 없으니, 자존심이라도 지켜야겠다는 마음이었겠죠. 그러나, 그러한 자존심마저 지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가난한 과부는 그저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담아 성전 헌금함에 두 렙돈의 헌금을 넣습니다. 정말 두 렙돈에는 하나님의 향한 겨자씨 같은 믿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런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죠. “이것밖에 드릴 것이 별로 없어요!”

 

우리의 주위를 한 번 둘러보십시오.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문제들이 널려 있습니다. 우리가 나약하고 게을러서가 아니라,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지닌 한계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벗어나고픈 욕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한 욕망을 담아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있고, 그러한 욕망을 담아 애니메이션이나 영화가 제작됩니다. 600만불의 사나이, 원더우먼, 쏘머즈 그리고 슈퍼맨 등의 드라마나 영화는 그러한 인간의 욕망이 담긴 제작물들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낍니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그 꿈이 물거품처럼 사라집니다. 카지노나 복권에 집착하는 사람들도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답답한 현실을 극복해 보려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답답한 현실을 극복해 보려고 노력해도 별로 나아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마음은 점점 황폐해집니다.

 

우리는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이야기를 통해서, 답답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최고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600만불의 사나이나, 원더우먼 또는 수퍼맨은 아닐지라도 우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간절한 마음이 담긴 기도에 있다는 겁니다.

 

목회를 하면서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상황이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일례로 최숙희 성도님이 지금 병원에 계신데, 목사로서 그분을 심방할 때마다 느끼는 좌절감은 그분을 위해서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가서 말동무나 조금 해드리고, 두 손 잡고 기도나 해드릴 뿐이지, 저는 그분의 병을 낫게 해줄 수도 없고 그분이 늙어서 죽어가는 것을 막을 수도 없습니다.

 

지난 주에는 이분께서 리헵을 받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병원에 누워 있는데, 자신이 젊었다 생각하는 사람들도 다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런데 참 이상하죠?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계속 살겠다고 이러고 있으니인생을 오래 살고 보니까, 다 소용 없더라고요. 지난 날을 돌아보면 재밌는 일이 참 많았는데, 지금 와서 돌아보면 욕심 부리면서 산 사람은 다 떠나고, 욕심 부리지 않고 산 사람들만 아직 살아 있더라고요.’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는 이분을 위해서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 가슴 아팠습니다. 이분뿐만이 아닙니다. 지난 주에 변 사모님이 애기를 낳았습니다만, 애기는 낳는 사모님을 위해서 목사인 제가 해드릴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산통의 아픔은 그냥 변 사모님 자신이 겪어야 하는 것일 뿐,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요즘 김문규 권사님이 일하러 안델루시아라는 곳으로 가 계십니다. 지난 금요일 밤 830분쯤에 전화를 드렸는데, 김 권사님이 그러십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좀 울적했는데 목사님께서 전화를 주셨네요. 가족 떨어져서 먼 곳에 와 있는 것도 힘들고, 거기다가 찬바람까지 부니까 마음이 좀 울적하네요.’ 그러실 것 같아서 제가 전화를 드린 것입니다만, 그렇게 마음 울적해 하시는 김 권사님을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 제 마음을 울적하게 했습니다.

 

뉴스를 봐도, 거기에는 수많은 상처와 아픔이 생산되는 일들이 즐비합니다. 돈 때문에 부모를 죽인 사건, 욕정 때문에 한 여인의 인생을 망가뜨린 사건, 남편의 외도 때문에 가슴 아픈 여인의 사건, 유괴, 납치, 강간, 살인 등의 일들을 통해 가슴 아픈 사람들에게 제가 해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또한 답답하게 돌아가는 정치 상황과 경제 상황을 보면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 때문에 제 자신이 초라해집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라는 겁니다. 기도는 일차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겸손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피조물과는 달리 창조주로서 전지전능하시다는 신앙고백입니다. 기도는 기본적으로 탄식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탄식은 단순한 징징거림과 다릅니다. 징징거리는 것은 내 주변만 맴돌 뿐, 자기 연민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나 탄식은 나의 곤경, 또는 우리의 곤경을 하나님께 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징징거림은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못하지만, 탄식의 기도는 내적이든 외적이든 분명 어떠한 변화를 가져옵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참으로 별로 없습니다. 그런 우리가 드리는 기도조차도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의 가치 밖에는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탄식하는 마음으로, 겨자씨만한 믿음을 담아서 기도를 드린다면, 우리의 주님께서는 두 렙돈 만한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원래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누가 아파해도 대신 아플 수 없고, 누가 죽어가도 대신 죽을 수도 없습니다. 누가 아파도 그 아픔을 치유해 줄 수 없고, 누가 죽어가도 그 죽음을 막아 줄 수 없습니다. 지금 현재의 공간과 지금 현재의 시간에만 존재하는 우리는 다른 공간, 다른 시간에서 고통 받으며 신음하는 자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의 몸짓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비의 몸짓처럼 얼마나 보잘것없습니까? 그야말로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같은 몸짓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께서는 간절한 마음으로 드리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가난한 과부에게 하셨던 그 말씀을 우리에게도 해주십니다.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어려운 일이 있으십니까? 현실이 답답하십니까? 어찌할 바를 몰라 방황하고 계십니까? 지금 바로, 무릎 꿇고 기도하십시오. 그 두 렙돈 같은 기도에 '이것밖에 드릴 것이 별로 없어요'라는 겸손한 마음을 담아 주님께 기도해 보십시오. 죽음을 이기신 생명의 주인이시 우리 주님께서 두 렙돈 같은 여러분의 기도를 받으시고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독립기념일과 세례

 

미국의 가장 중요한 국경일이라고 할 수 있는 독립기념일은 1776 7 4, 펜실베니아 필라델피아에서 대륙의회가 독립선언문을 공식적으로 채택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날입니다. 독립 선언문은 독립 국가가 되기 위한 미국 식민지의 확고한 의지를 담은 강력한 성명서입니다. 독립기념일에는 1941년 법정 공휴일로 선언된 이후 해마다 축하행사가 전국적으로 벌어집니다. 미국의 건국 이념을 다시 되새겨보는 이날,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자유와 독립을 축하하기 위해 각지에서 피크닉, 가두 행진 및 연주회, 화려한 불꽃놀이 행사 등의 기념축제로 뜻 깊은 하루를 보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독립기념일을 갖는 의미 있는 날이 어떤 날일까요? 아마도 세례 받은 날이 아닌가 싶습니다. 세례는 진노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의 신분이 변하고, 죄의 권세에서 죄 가운데 살던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얻게 된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의식입니다. 그야말로, 독립(Independence)하는 날이지요. 미국이 영국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하고 만세를 불렀듯이, 한국이 일본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하고 만세를 불렀듯이, 세례 받은 날은 사탄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하고 그리스도인의 만세인 할렐루야 아멘을 외쳐 부르는 귀한 날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날의 기쁨을 잊어버리고, 내가 언제 세례 받았는지 조차도 기억하지 못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세례 받은 날짜를 한 번 기억해 보고, 나름대로 그날을 '독립기념일'처럼 기념하기 위해서 의미 있는 이벤트를 마련해 보는 것은 어떨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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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0. 21. 05:41

전도자의 직무

(딤후 3:14-4:5)

 

사도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 같은 관계입니다. 2차 전도여행 때 드로아에서 디모데를 만난 후, 사도 바울은 평생동안 디모데와 복음을 위하여 동고동락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이든 바울은 자신의 순교적 운명을 예감하고, 세상을 떠나기 전 아들 같은 디모데에게 목회자의 사명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교훈을 남깁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전하는 교훈이라는 것, 즉 유언과도 같은 교훈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말씀을 읽어 내려가면 한 문장 한 문장이 가슴 절절합니다.

 

그 중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익숙한 구절입니다. 특별히 이 구절이 그렇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16, 17).

 

우리는 오늘 말씀을 받아 들면서 우리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를 다니면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신분증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부름 받은 전도자라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가대한 깨달음이 없이는 열정이 생기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이상, 사람은 그 신분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법입니다.

 

안데르센 동화 중에 <미운오리새끼>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이 동화는 <성냥팔이 소녀>와 함께 안데르센 자신의 불운한 어린 시절을 형상화시킨 동화로 유명합니다. 안데르센은 굉장히 불운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 즉 자기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난 뒤에, <미운오리새끼>에 등장하는 미운오리새끼가 사실은 오리가 아니라 백조인 것을 깨달은 후 하늘로 비상했던 것처럼, 그렇게 하늘을 나는 동화작가가 되었습니다. <미운오리새끼>에서도 미운오리새끼는 자신이 백조라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말썽꾸러기로만 살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백조라는 것을 깨닫고 난 후에는 백조처럼 우아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교회 다니는 이들은 자신이 그냥 교회만 들락날락 거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부름 받은 전도자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분도 아닌,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 부름 받았다는 것은 매우 색다른 존재감을 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것과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성경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듣는 설교가 재미 있으신가요? 재미가 없으신가요? 설교가 재미 없으신 분들은 성경 말씀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요즘 메이저리그 포스트 시즌인데, 야구를 봐도 야구가 재미 없는 이유가 뭐죠? 야구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알아야 재미있는 겁니다. 학창 시절에 수업 시간이 재미 없었던 이유가 뭐죠? 예습을 안 해 갔기 때문입니다. 뭔가를 좀 먼저 알고 있으면 재미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성경을 잘 알아야 하고, 우리가 누구인지 잘 알아 오늘 설교 제목처럼 전도자의 직무를 잘 감당해야 합니까? 사도 바울도 무슨 이유가 있으니까 디모데에게 전도자의 직무를 잘 감당하라고 신신당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이유는 41절 말씀을 살펴 보면 압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4:1)

 

이 말씀은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대한 교훈입니다. 살다 보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 거라는 겁니다. 우리의 의지나 바람과는 상관 없이 꼭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고,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종말입니다. 개인의 삶에서는 죽음이 종말이겠지만,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는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가 종말입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게 될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는 것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게 되는 날이 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채로 서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 아무 것도 숨길 수 없는, 에덴동산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겁니다. 벌거벗었을 때, 부끄러움을 느끼느냐, 부끄러움이 없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느냐 아니냐가 결정됩니다. 죄 짓기 전, 아담은 벌거벗고 있었어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죄 지은 후, 아담은 자신의 벌거벗음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아담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려야 하는 이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고, 관심이 없고 몰라서 그렇지,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이야기. 하나님 나라가 왔을 때 어떻게 할 것이냐는 이야기.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 없이, 우리가 좋던 싫던,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던 관심이 없던 과 상관 없이 꼭 임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면서 살지 않습니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도 말하고 있는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의 차이는 바로,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살고 있느냐, 무엇을 인식하면서 살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 최고의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곧 이 세상이 어떠한 일이 닥칠 거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문제는 그것을 알아차리느냐, 아니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곧 일어날 일을 대비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자와 같고,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은 겁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모래 위에 집을 지으면서 삽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지금 당장 먹고 사는 것이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먹고 사는 것이 급한데, 지금 당장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무슨 신경을 쓸 겨를이 있냐고 합니다. 그러나, ‘창수는 언제 일어날지 모르지만 일어납니다. 그리고 창수가 한 번 일어나면, 모든 것을 빼앗깁니다. ‘창수를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창수가 바로 마지막 날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는 날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 가운데는 먼저 죽음이라는 형태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사실 무의식 중에 죽음을 대비하면서 삽니다. 그에 대한 대비로, 좋은 배우자도 만나고, 재물도 쌓고, 자식도 낳아 키웁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살아서 하는 모든 행위는 은연 중에 죽음을 준비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준비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그러한 것들은 죽음앞에서 굉장히 무력합니다. 배우자도, 재물도, 자식도, 내가 죽음을 맞이할 때, 결코 나와 함께 하지 못합니다. 그냥 우리는 그렇게 쓸쓸하게, 아무 것도 없이, 벌거벗긴 채로 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무엇하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렇게 벌거벗긴 채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미국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나이 드는 것의 미덕>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이 드는 것의 미덕 중 첫 번째는 목표를 갖는 것이고 두 번째는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을 매우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합니다만, 구원이란 지미 카터의 말을 빌리자면,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과 잘 지내는 것이 곧 구원입니다. 이 땅에서는 그것이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성경은 한 마디로, 하나님과 잘 지내는 법, 이웃과 잘 지내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은 이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의로운 자만이 하나님과 얼굴을 대면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 잘 지내려면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길이 성경에 있다는 겁니다. 또한 의로운 자란 하나님의 사람이고 온전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선한 일을 행하는 능력을 지닌 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잘 지내지 못하고, 이웃과 잘 지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온전하지 못하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쟤 좀 이상해!’ 이상한 사람과 어떻게 잘 지낼 수 있습니까? 악한 일을 하는 사람과 어떻게 잘 지낼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전도자의 직무가 무엇인지 우리는 이제 알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잘 지내는 것이고, 이웃과 잘 지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잘 지내는 사람은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섰을 때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이웃과 잘 지내는 사람은 이웃과 얼굴을 맞대고 섰을 때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만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잘 지낼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 가운데 처해져 있는 사람들을 성경을 통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자들로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이 일을 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4:3-4).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과 직접 대면할 날이 꼭 오고야 말 것이라는 진리를 사람들은 잘 듣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지금 당장 눈에 앞에 보이는 쾌락이나, 지금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수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때에 닥칩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우리에게 임합니다. 일차적으로 인생 가운데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릅니다. 전도자의 직무는 바로 그것을 대비하는 겁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면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해나가는 데 있어 사도의 교훈을 들으십시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4:2).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0. 10. 06:13

아브람의 승리 교회의 승리를 위하여

창세기 11

(창세기 14:1-23)

 

소돔 땅으로 간 롯에게 위기가 닥칩니다. 평화는 나 혼자만 평화롭다고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공동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평화롭게, 잘 살아보겠다고 소돔 땅으로 간 롯 개인은 평화로웠을지 모르지만, 그가 속한 공동체에 평화가 없었기 때문에 롯은 평화를 빼앗기는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개인의 평화도 중요하지만, 공동체의 평화는 더 중요합니다.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서 개개인이 노력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또한 공동체는 개인의 평화를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공동체가 평화로워도 개인이 괴로우면 소용이 없습니다. 이렇게 공동체와 개인은 상호작용에 의해서 평화를 만들어 갑니다.

 

롯의 위기는 전쟁에서 비롯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 번의 전쟁 이야기가 나옵니다. 먼저 동방의 네 왕들과 서방의 다섯 왕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집니다. 첫 번째 전쟁에서 동방의 네 왕들이 승리를 거둡니다. 그 결과 서방의 다섯 왕들은 동방의 네 왕들을 섬기게 됩니다. 그러한 상태가 12년 동안 지속되다가, 13년째 되는 해에, 서방의 다섯 왕들이 배반합니다. 그 배반에 응징하기 위해서 동방의 네 왕들이 두 번째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에 맞서 서방의 다섯 왕들이 모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전쟁에서도 동방의 네 왕이 승리를 거둡니다. 승리한 동방의 네 왕은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갑니다. 바로 그 때, 소돔에 살고 있었던 아브람의 조카 롯도 포로로 끌려 갑니다.

 

어떤 사람(전쟁에서 도망한 자)에 의해서 이 소식이 아브람에게 전해집니다. 롯이 포로로 끌려 갔다는 소식을 들은 아브람은 군대를 소집하여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세 번째 전쟁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을 치르는 일은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전쟁은 큰 상처를 남기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이긴 쪽이 전리품을 챙길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전리품이 전쟁의 상흔을 다 치유해주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은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손자병법에서도 가장 좋은 병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평화롭게 살던 아브람은 불가피하게 전쟁에 휩싸이게 됩니다. 자신의 욕심을 따라 갔던 조카 롯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욕심을 따라가는 사람은 자신 뿐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도 피해를 입히게 됩니다. 나의 평화뿐만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욕심을 접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두 번의 전쟁에서 승리한 동방의 네 왕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아브람은 자신의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318명의 용사들, 그리고 자신과 동맹을 맺은 부족의 젊은이들을 이끌고 전쟁에 나가 승리를 일구어 냅니다. 그리고 빼앗겼던 모든 재물과 특별히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 돌아옵니다. 정말 기적 같은 일입니다.

 

오늘 말씀에, 승전고를 울리며 돌아오는 아브람 일행을 맞이한 자들이 등장합니다. 소돔 왕과 살렘 왕 멜기세덱이 그들입니다. 이들이 아브람 일행을 맞이한 장소는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였습니다. 왕들이 왕의 골짜기에서 아브람을 맞이하는 것을 보면 아브람의 위치가 왕의 반열에 올라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은 이렇게 존귀한 대접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우선 살렘 왕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먼저 알현합니다. 살렘은 예루살렘을 가리키고, 멜기세덱은 의로운 왕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멜기-, 세덱-의로운). 성경은 이 사람을 가리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소개답게 아브람을 알현한 멜기세덱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송축하면서 아브람을 이렇게 축복합니다.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19, 20).

 

멜기세덱은 아브람을 축복하면서 중요한 사실을 말합니다. 아브람의 승리가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 같으면 멜기세덱의 이 진술을 우습게 여겼을 겁니다. 목숨 내 놓고 뛰어든 전쟁인데, 그 공이 자신에게 오지 않고 하나님께 돌려진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오를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이었던 아브람은 멜기세덱의 선언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멜기세덱의 축복에 대한 반응으로 십일조를 바칩니다. 이 십일조는 아브람이 목숨 내놓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거둔 피값의 전리품 중 일부였습니다. 만일 아브람이 믿음 없는 사람이었다면 절대로 멜기세덱에게 피값의 일부인 십일조를 바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자신의 승리는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인정했고, 그 신앙고백의 표현으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십일조의 개념이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십일조는 수입의 10분의 1을 정확히 떼서 드리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신앙고백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신앙고백과 감사하는 마음 없이 수입의 10분의 1을 의무적으로 드린다면, 그것은 십일조 정신을 심각하게 헤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헌금을 세부화시켰습니다만, 그것은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편의상 그런 것이지, 헌금의 정신 자체가 그렇게 세부화된 것은 아닙니다.

 

모든 헌금은 십일조 정신에서 비롯됩니다. 십일조 정신이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신앙고백과 감사의 마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요, 거룩한 헌금을 세속적으로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헌금은 불쌍한 사람 돕는 적선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송축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드리는 자, 즉 즐겨내는 자를 기뻐하신다는 말씀이 바로 이런 맥락입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과의 은혜로운 만남에 이어, 소돔 왕과의 세속적인 만남이 이어집니다. 타락한 도시의 왕답게 소돔 왕은 본색을 드러냅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은 이름대로 아브람과 의로운 관계를 맺었다면, 소돔 왕은 아브람과 세속적 관계를 맺습니다. 그것은 소돔 왕의 요청에서 드러납니다.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21). 이를 쉬운 성경으로 다시 옮겨보면 이런 겁니다. “사람은 나에게 주라! 그리고 너는 그 소유물을 너 자신을 위해서 취하라!”

 

아브람에게 더 많은 선물을 안겨줘도 시원치 않을 판에, 아브람이 목숨 걸고 되찾아온 사람과 재물 중, 사람은 자신에게 돌려달라는 소돔 왕의 요청입니다. 이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소돔 왕은 처음부터 아브람을 알현하러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취하러 온 것이었다는 겁니다. 소돔 왕의 탐욕스러움이 아브람의 존귀함을 헤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속적인 사람과는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것을 알았던 아브람은 소돔 왕에게 단호하게 말합니다.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23).

 

만약 아브람이 소돔 왕의 말대로 사람은 돌려주고 재물을 취했다면, 나중에 소돔 왕은 우쭐대면서 아브람이 부자가 된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고 떠벌리며 아브람의 명성에 먹칠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빌미로 아브람에게 곤욕스러운 일들을 안겨주었을 겁니다. 아브람은 그러한 것을 미리 차단합니다. 아브람은 멜기세덱과의 예배에서 보여주었듯이, 그를 돕고 계시는 것은 하나님이지 소돔 왕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세속적이고 탐욕스러운 소돔 왕과 엮이지 않기 위해서 소돔 왕의 요청대로 사람뿐만이 아니라, 재물까지도 모두 돌려줍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믿음의 행위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소돔 왕의 요청대로 모든 것을 돌려주되, 아브람과 함께 목숨 내놓고 전쟁에 참여했던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은 제하고 돌려줍니다. 이는 아브람이 하나님 앞에서 매우 공정하고 관대한 처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불필요하게 희생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의란, 믿음이란 이렇게 나도 살고 주변 사람도 살리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믿음과 사랑과 의(윤리)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 시대의 교회에 가장 요청되는 덕목입니다. 찬송가 600, <교회의 참된 터는>에서 고백되고 있듯이, 교회의 참된 터는 우리 주 예수입니다. 우리 주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되어 나타난 하나님의 참된 말씀입니다. 우리 주 예수는 하나님의 참된 계시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는 참된 터인 우리 주 예수 위에 세워지지 못하고, 세상의 욕망 위에 세워지는 듯한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참된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모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데 무슨 몇 백억, 천억짜리 교회당 건물이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모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데 누추하지 않을 만큼의 공간만 있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만큼의 터를 세워나가는 지혜와 겸손 그리고 소박함이 필요한 때입니다. 아브람처럼 욕심과 교만을 내려놓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감사한 마음만이 우리의 삶에 자리 잡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아브람처럼 덕을 쌓는 교회가 그리운 시대입니다. 덕은 희생을 의미합니다. 누군가 덕망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가 가진 재물이나 지식 때문에 그렇게 덕망 있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진 것을 통해서 희생했기 때문입니다. 희생이란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생이란 사랑 없이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덕목입니다. 우리 교회 친교실에는 덕불고 필유린이라는 고사성어가 걸려 있습니다. 이는 덕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희생하여 섬김의 도를 실천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유는 그를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얄팍한 종교적 욕망의 충족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생명)을 십자가에서 내어주셨다는 복음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굳이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지 않아도, 우리를 능히 구원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을 내어놓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희생없이 의로운 나라,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생명)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는 믿음의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을 더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즉 더 사랑하는 자가 더 희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롯이 삼촌 아브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아브람은 조카 롯을 더 사랑했습니다. 더 사랑했기 때문에 아브람은 롯을 위해서 목숨을 내걸고 전쟁을 일으켜 롯을 위험에서 건져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독생자의 생명을 통하여 우리를 죄(죽음)에서 건져 주신 것입니다. 이 사랑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욱더 희생할 수 있게 됩니다. 솔로몬의 판결에서도 더 사랑하는 진짜 어머니가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희생하듯이 더 사랑하는 자가 희생하는 법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덕을 쌓아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지체가 모여 교회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희생(사랑)을 통해 쌓는 덕이 교회를 교회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듯이, 자기 자신을 내어놓으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시간, 물질, 마음을 빼앗지 마시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여러분의 시간, 물질, 마음을 내어놓으십시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9:24)는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마지막으로 아브람처럼 하나님 앞에서 공정하고 관대하게 처신하는 교회가 그리운 시대입니다. 의로움이란 자신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요즘 교회는 자신의 교리나 신념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너무도 희생시키고 있습니다. 기독교 윤리의 바탕은 사랑이지, 옳고 그름을 가리는 심판이 아닙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잠정적입니다. 이 말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뜻입니다. 심판은 오직 마지막 날에 심판주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십니다. 그때까지 교회는 판단하지 말고, 사랑으로 용서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의로움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함께 전쟁에 참여했던 동맹부족의 젊은이들(아넬, 에스골, 마므레)을 희생시키지 않았습니다. 요즘 일어나는 종교전쟁이나,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동성애 문제 등을 돌아볼 때, 우리는 우리의 의로움과 신념을 위해서 힘 없는 자들을 희생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차분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동성애를 옹호하자는 뜻이 아니라, 동성애가 잘못됐다는 신념 때문에 그들에게 불필요한 폭력을 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무튼, 의로운 삶을 살기 위한 구체적인 지침인 기독교 윤리는 사랑이 바탕 되어야지, 그 자리에 폭력이 들어서면 안 된다는 겁니다.

 

아브람의 승리는 사랑(희생)과 믿음 그리고 도덕성(윤리, 의로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이 어두운 시대에 교회가 승리할 수 있는 비결도 다르지 않다는 것 또한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교회의 승리를 위하여, 아브람의 승리를 은혜로 받으시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 주의: 이 설교의 마지막 부분 중 동성애 문제를 거론한 것은, 동성애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쓴 것이 아님을 밝혀 둡니다. 동성애 문제에 대한 저의 개인적 입장을 듣고 싶으신 분은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십시오. 이 문제에 관해서는 공개적으로 입장을 표명하고 싶지 않습니다. 비겁해서가 아니라, 공개적으로 입장을 표명할만큼 확실한 신학적 입장을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동성애 문제가 그렇게 저에게 영향을 끼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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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0. 6. 23:09

우리는 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가?

(고전 11:17-34)

 

오늘은 세계성찬주일입니다. 으레 하는 성찬식이지만, 이렇게 성찬주일을 따로 떼서 제정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지난 2천년 간의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가장 심각한 문제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교회의 분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야 할 교회가 교리적인 이유 또는 정치적인 이유로 분열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크게 볼 때, 주후 1054년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의 분리, 주후 1517년에 일어난 종교개혁으로 인한 개신교의 분리, 주후 1534년 영국 성공회의 분리 등 수많은 작고 큰 교회의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신 것은 일치Unity’인데, 실제 우리가 행한 것은 분열이었습니다. 이러한 심각성을 인식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교회일치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다각도로 노력해 왔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세계성찬주일의 제정입니다. 1982년 페루의 수도 리마에 모였던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는 가톨릭과 정교회를 포함한 세계교회가 공감하는 성만찬 예식서를 채택하고, 성만찬을 통한 일치를 추구하며 이 날을 지키기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탄생하게 된 것이 세계성찬주일입니다.

 

세계성찬주일을 지키면서, 우리는 무엇보다 일치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일치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실 이 단어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일치라는 것을 산업화처럼 어떠한 규격으로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우리 인간은 로보트가 아닙니다. 로보트는 프로그램밍을 통해서 똑 같은 생각과 똑 같은 행동을 하게 끔 만들 수 있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인간의 삶은 로보트의 그것과는 완연히 다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서 이루기 원하셨던 일치란 무엇일까요? 이것은 아주 구체적인 것인데, 사랑이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하면 에로스의 사랑을 먼저 떠올립니다. 이것은 성애의 사랑인데, 에로스의 사랑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결핍에서 오는 사랑을 말합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뭔가 부족함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 인간은 무단히 노력합니다. 그러므로 에로스의 사랑은 자신의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자기중심적 사랑인 것이죠.

 

자기중심적 사랑은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그것을 채우고 나면 만족할 것 같지만, 결국 또 다른 결핍에 대한 욕구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인간은 평생 그 욕구를 채우다가 인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결국 이런 자기중심적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의 인생은 허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이러한 에로스의 사랑과는 매우 대조적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을 일컬어서 아가페 사랑이라고 하는데, 이는 자기중심적 사랑인 에로스의 사랑과는 질적으로 다른 이타적인(타자 중심적인) 사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인간에게 이러한 사랑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아가페 사랑은 인간에게서 가능한 사랑이 아니라, 신에게만 가능한 사랑입니다. 신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속성이 바로 사랑’, 아가페인 것이죠. 그 아가페의 사랑이 극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일치를 이룬다는 것은 이러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아가페의 사랑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그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아무리 우리가 많이 소유하고 먹는다 해도, 그것이 우리 인간의 연약한 본질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어도, 우리는 결국 죽게 되고,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쌓아도 우리는 결국 죽게 되고,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져도 우리는 결국 죽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저 생명을 약간 보존해 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생명을 약간 보존해 주는 음식이나, 업적, 또는 재산과는 질적으로 다른,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시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인해서, 완전히 다른 존재로 거듭나며 완전히 다른 세상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생명의 빵,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생명의 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 아가페 사랑을 배우고 실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것을 나누면서 모든 사람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까, 어느 순간 그러한 아가페 사랑이 깨진 것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먹는 문제입니다. 식욕은 가장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먹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고린도교회는 아가페를 실천하기 위해서 공동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를 초대했습니다. 자신의 배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특별히 배고픈 자들, 가난한 자들을 생각한 것이죠. 그러나 음식을 차려 놓고 가난한 사람들, 배고픈 자들이 와서 함께 식사하기를 바라는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의 의도대로 가난한 자들이나 배고픈 자들이 제 시간에 와서 공동식사에 참석하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겁니다. 넉넉한 사람들이야, 시간을 아무 때나 낼 수 있지만, 가난한 자들, 배고픈 자들은 과중한 노동에 시달려 아무 때나 시간 낼 수 있는 형편이 못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일이 반복되고 장기화 되면서, 불평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을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자는 것입니다. 먼저 먹을 사람은 먼저 먹고, 나중에 오는 사람을 위해서 음식을 남겨 놓으면 되지 않느냐는 주장입니다. 물론 일리가 있습니다.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는 법이니까요.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하다 보니, 공동식사를 마련하는데 별 기여가 없는 가난한 자들이 굴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자신들이 공동식사에서 무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공동식사는 일치를 위한 식탁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게 된 차별의 식탁이 되고 만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바로 이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분열되어 있으니, 여러분이 한 자리에 모여서 먹어도, 그것은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제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 한 자리에서 먹고 마신다 해도, 서로에 대한 마음의 담을 허물지 못하면 그것은 주님의 만찬과 무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이렇게 조언합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33, 34). 이것이 바로 아가페 사랑입니다.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서로에 대한 배려입니다. 나 자신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먼저 생각해 주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결여될 때,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일치와 상관 없는 공동체가 되고 마는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성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나의 종교적 욕망을 채우는 수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을 통해서 구원에 대한 욕망을 채우고 만다면, 그것은 결국 아가페의 사랑이 아니라, 에로스의 사랑을 하고 말 뿐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으면서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결국 또 다른 결핍과 허무만을 생산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그리스도와의 참된 일치를 이룬다면, 우리 안에 아가페의 사랑이 불꽃처럼 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흘러 넘치는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습니다. ‘먹으러 모일 때 서로 기다리라!’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아가페의 사랑으로, 즉 결핍이 아닌 만족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결핍이 아닌 만족을 느낄 때, 아가페 사랑을 서로 나눌 때, 우리는 비로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서로에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앞에 차려진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드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여러분의 것으로 받으십시오.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 있는 결핍, 허무, 불평의 마음을 만족, 희망, 그리고 감사의 마음으로 바꾸십시오. 그렇게 살 때, 우리의 삶은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능히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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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9. 26. 06:50

신앙의 안전지대

창세기 10

(13:1-18)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피신했던 아브람 일행이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옵니다. ‘사래사건을 통해 일촉즉발의 상황에 처했던 아브람이었지만, 하나님의 돌보심 덕분에 모든 가족이 무사히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그냥 돌아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자가 되어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2).

 

애굽에서 돌아온 아브람 일행은 벧엘과 아이 사이에 터를 잡고 거주합니다. 그 지역에 자리를 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예전에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처음 들어왔을 때에도 이곳에 자리를 잡은 적이 있습니다. 이곳에서의 정착은 두 번째로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정착했을 때 첫 번째 정착했을 때와는 달리 문제가 발생합니다. 바로 소유의 넉넉함 때문이었습니다. 첫 번째 정착했을 때 없던 문제가 두 번째 정착했을 때 생긴 것을 보면, 아브람 일행의 재산이 얼마나 많이 불어났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소유가 많은 데 왜 싸우나?’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들의 재산은 지금과는 달리 돈이 아니라 가축 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소나 양 등을 풀어놓고 먹일 수 있는 공간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다툼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말씀을 보니까, 좁은 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것 같습니다. 아브람과 그의 조카 롯, 그리고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 등이 좁은 지역에서 목축업을 하려니 서로 많이 부대꼈던 것이지요.

 

이런 상황 속에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길은 서로 갈라서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지역으로 가서 가축 떼들을 키우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다 똑같다고, 좋은 지역을 차지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좋은 지역을 차지하려면 먼저 움직여야 합니다. 정 안 된다면 가위바위보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지요.

 

우리 인간 사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욕심때문입니다. 더 많이 차지하고, 더 좋은 것을 차지하려는 욕심 때문이지요. 이것만 잘 다스린다면 문제를 최소화시킬 수 있을 텐데, 그것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까, 아브람은 그것을 잘 극복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우선권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한국 사람에게는 나이가 가장 큰 우선권이죠. 그래서 나이가 깡패라는 말도 있습니다. 나이 많은 어르신이 나서면 나이 어린 것들은 입도 뻥끗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예절이라 배웠습니다. 나이 외에도 우선권을 정해주는 예법들이 많이 존재합니다. 한국 문화 속에서 성장하신 분들은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들입니다.

 

어느 문화나 연장자가 우선권을 갖는 것은 보편적인 문화입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 일행 중 우선권을 갖는 것은 연장자인 아브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속에서 아브람은 자신의 우선권을 조카 롯에게 양도합니다. 친족끼리 싸우는 것이 볼썽사나운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조카 롯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떠나 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9).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동서남북 사방을 둘러 본 뒤 좋다고 생각하는 곳으로 먼저 가면 자신은 조카 롯이 선택하지 않은 다른 곳을 선택하겠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아브람에게는 이런 여유로운 마음이 있었을까요? 아브람이 부자였기 때문에? 아니면, 조카 롯을 사랑했기 때문에? 우리가 아브람의 마음 속에 들어가 볼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본문에 나와 있는 그의 행동을 살펴 본다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듯도 합니다.

 

우선 아브람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습니다. ‘제단을 쌓다라는 말은 예배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무작정 예배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예배의 주도권은 우리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먼저 드려서 초월적 존재의 마음을 달래 주는 어느 종교의 제사와는 다릅니다. 기독교의 예배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한 반응이 곧 예배입니다. 특별히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베푸신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 드린다는 것은 복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이미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 예배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임한 복에 대한 감사로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예배를 아예 이런 식으로 부릅니다. 그들이 말하는 미사감사성찬례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성찬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베푸신 은혜()를 재현하고,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 감사예배를 드리는 것이지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관계가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예배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적어도 아브람은 이것을 정확하게 인식했던 것 같습니다. 아브람은 예배를 아무 때나 드린 것이 아니라, 즉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복에 대한 반응으로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만 소유한 사람이었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하셨다, 또는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결코 감사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께 예배 드릴 수 있었던 것이죠. 이러한 믿음이 없었다면, 아브람이 어떻게 조카 롯에게 우선권을 양도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마도 조카 롯보다 좋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조카 롯에게 먼저 양보했습니다.

 

롯이 만약 믿음의 사람이었다면, 삼촌 아브람이 우선권을 양도했을 때 그것을 덥석 받아 들지 않았을 겁니다. 삼촌 아브람처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만 소유하겠다는 믿음이 있었다면, 롯은 절대로 삼촌 아브람보다 앞서지 않으려 했을 겁니다. 그런데, 롯의 비극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애석하게도 롯은 삼촌 아브람이 우선권을 양도했을 때 얼씨구나 좋다생각하고 그것을 덥석 받아 듭니다. 그리고 자신의 눈에 좋아 보이는 요단지역을 택합니다. 롯의 눈에 자신이 택한 곳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의 땅과 같이보였습니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모든 것이 흡족해 보였습니다. 그곳에 가면 더욱더 번영할 수 있을 것 같고,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롯은 그곳으로 갑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그의 선택에 대해서 이러한 간접적인 평가를 내립니다.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13).

 

조카 롯을 떠나 보내고 아브람은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당신을 바라보는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으로 처음 부르실 때의 그 음성을 다시 들려 주십니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15,16). 아브람은 자신이 원하고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는 것만 바라보았습니다. 그 결과는 18절로 이어집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지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18).

 

무엇입니까?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반응으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 즉 예배 드렸습니다. 아브람에게 예배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대한 반응이었다는 것이 여기서 또 한 번 드러납니다.

 

반면에 롯의 선택한 지역은 신앙적으로 안전지대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누가 보아도 그곳은 참 좋은 지역이었습니다. 에덴 동산 같고 애굽의 땅과 같다는 표현이 그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그곳은 신앙의 안전지대가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살펴볼 말씀에서 그것이 여실히 증명됩니다. 그곳은 신앙의 안전지대가 아니라, 심판의 장소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모르고, 눈이 보기에 좋은 곳만 찾아서 갑니다. 그것이 멸망으로 가는 길임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맹모삼천지교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맹자 어머니가 맹자의 교육을 위해서 세 번 이사를 한 일화에서 비롯된 고사성어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떠한 선택을 할 때, 제일 먼저 경제(, 수입)를 생각하고, 둘째 자식의 교육을 생각합니다. 신앙의 안전지대 같은 것은 순위에도 들지 못합니다. 물론 경제도 생각해야 하고, 교육도 생각해야 합니다. 인생을 사는데 굉장히 중요한 문제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이라면 그러한 것들과 더불어, 내가 선택하는 것이 신앙적으로 안전지대에 거하게 하는 것인가를 꼭 고려해야 합니다.

 

사실 그러한 것은 따로 항복을 구분해서 고려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제든 교육이든, 내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인가를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에게 들어오는 수입도, 내 힘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인 줄 아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는 겁니다. 교육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인 줄로 아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인가! 아니면 내가 나 잘 난 맛에 이룬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우리가 지금 신앙의 안전지대에 거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만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삶은 예배로 모아졌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만 소유한 삶입니까?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 감사의 예배를 드리십니까? 신앙의 안전지대에 거하십시오. ,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만을 소유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그래야, 우리의 삶은 감사로 넘치는 복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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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9. 19. 04:36

사래 사건

창세기 9

(창세기 12:10-20)

 

사래는 아브람(아브라함)의 아내 이름입니다. ‘사래 걸렸다할 때의 그 사래가 아니고, ‘손사래 치다할 때의 그 사래도 아닙니다. 사래는 복의 근원 아브람의 아내입니다. 나중에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뀌고, 사래는 사라로 이름이 바뀝니다. 아브라함은 만국의 아버지라는 뜻이고, 사라는 만국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똑같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쓰임 받았습니다. 사래가 아브람의 종속적인 존재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구체적인 단어 (베라카)’을 언급하시면서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니까, 이제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면서 창대함과 번영을 꿈꿀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무슨 일인지, 약속한 형통은 오지 않고 오히려 기근이라는 시련이 닥쳤습니다. 아브람은 적지 않게 당황했을 겁니다.

 

기근은 굉장히 무서운 겁니다. 생명의 파괴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기근의 원인은 가뭄, 전쟁, 자연 재해, 곤충 등입니다. 이러한 것들 때문에 농사가 제대로 안 돼서 먹거리가 떨어지는 현상을 기근이라고 합니다. 기근이 오면 세상은 아비규환이 됩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 욕구인 식욕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은 비극 중의 가장 큰 비극입니다. 죽음에 처해지게 되는 이유 중 굶어 죽는 것만큼 비참한 것은 없습니다.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적어도 음식 가지고 장난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다른 것은 다 몰라도,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내주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선행인 것입니다. (입양한 아이(2)를 부부싸움 때문에 굶어 죽게 한 어느 젊은 부부 이야기)

 

아브람의 정착지, 가나안 땅에 얼마나 기근이 심했는지 더 이상 그 땅에서 살아갈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이주를 결심합니다. 애굽 땅으로. 애굽은 늘 풍요의 상징입니다. 실제로 애굽은 매우 풍요로운 나라였습니다. 지금은 미국이 풍요의 상징이고, 미국이 풍요롭게 잘 사는 나라이지만, 그 당시 애굽은 세계 최고의 풍요로운 나라였습니다. 나일강 때문이었습니다. 나일강이 가져다 주는 풍요 때문에 애굽 사람들은 나일강을 신으로까지 받들었습니다. 그 신의 이름이 오시리스입니다. 바로(애굽의 왕)는 오시리스의 화신으로 불렸습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가 걸리면 우왕좌왕하게 되어 있습니다. 도를 닦는 도인이 아니라면, 먹고 사는 문제를 놓아두고 의연할 사람은 없습니다.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근이 오면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는 것이지요. 도둑질이나 강도질이라도 해서 자신과 가족의 배를 채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을 버리고 풍요의 땅 애굽으로 향합니다. 기근의 위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기근을 피해 애굽 땅에 도착했을 때 한 가지 문제가 더 발생합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로 인한 문제였습니다. “내가 알기에 그래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니”(11-12).

 

기근으로부터의 위기 의식은 이제 아내 사래의 외모로부터의 위기 의식으로 바뀝니다. 기근으로부터의 위기는 애굽으로의 이주로 해결되었는데, 아내 사래의 외모로부터의 위기는 해결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얼굴에 흠집이라고 내시겠습니까? 아브람은 이 문제를 이렇게 해결합니다. 아내 사래를 자신의 아내가 아니라, 누이라고 신분을 속입니다. “원하건데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13).

 

저는 이 문제를 두고 적지 않은 고민을 했습니다. ‘아브람은 왜 그랬을까?’ 실제로 나중에 애굽의 바로 왕은 아브람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18-19).

 

아브람의 관심은 생명 보존과 안전에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래를 누이라 속이는 것을 통해서 아브람은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확보하기 원했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13). 이러한 아브람의 행위를 놓고 많은 주석가들은 아브람을 비판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이나 아내의 위험은 차선으로 두고, 자신의 안전과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는 대신 거짓말을 통해 안전과 생명을 확보했다고 말입니다. 이러한 비판은 이런 말로 들립니다. 아브람은 비록 기근을 만났지만 가나안 땅에 남아 있어야 했고, 아내 사래의 아리따움 때문에 살해 위협에 놓인다 해도 절대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저는 이러한 주석들에 대해서 손사래를 치고 싶습니다. 제가 보기에 아브람의 행동은 불신앙의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신앙적인 행위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우선, 기근은 총체적인 위기입니다. 약속의 땅에 기근이 내렸더라도 믿음으로 버티면 먹고 살 수 있다는 생각은 굉장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구조적인 악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쓰나미가 닥치면 그 사정권에 들어온 것은 모두 파괴되고 맙니다. 쓰나미가 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버티고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황당한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광신입니다. 쓰나미가 닥치면 그 자리를 어서 피하는 것이 오히려 믿음의 행위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초인으로 만들어주는 어떤 주문 같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자연의 법칙에 지배를 받는 우리가 자연의 법칙을 받지 않는 초인적인 존재로 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 있는 자들은 무모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자연 법칙에 더욱더 충실하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소박하게, 나누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로 압니다.

 

두 번째로, 아내 사래로부터 온 위기를 해결한 방법은 옹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그 당시 풍습상, 더군다나 애굽 사람도 아닌 이방인으로서 기근을 피해 온 아브람 일행에게 애굽 사람들이 환대를 베풀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어떠한 방법을 써서든 그들을 착취하려 했을 겁니다. 그 중 가장 큰 가능성은 약자에 대한 폭력입니다. 여성은 예나 지금이나 폭력의 대상이 되기 쉬운 약자입니다. 아리따운 아내 사래가 애굽에서 봉변 당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아브람이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아내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까지도 어려움에 처하게 될 거라는 것은 눈에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 같은 것은 아무 쓸모 없어지는 겁니다. 존재가 없어지는데, 약속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약속도 성취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아내 사래를 누이라 속이는 작전은 굉장히 기막힌 작전입니다. 이 작전이 기막힌 작전이었다는 것은 그 이후로 벌어지는 일로 인해 증명됩니다. 우선 애굽의 고위관리들이 사래의 외모에 반합니다. 일반 사람이 아니라 고위관리들의 눈에 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생명을 보존할 가능성이 더 커졌다는 뜻입니다. 사래에게도 잘 된 일이고, 아브람에게도 잘 된 일입니다. 작전은 대성공합니다. 단순히 고위관리 정도가 아니라, 애굽의 바로 왕의 눈에 띄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애굽 왕은 그 대가로 아브람에게 양과 소와 노비와 얌수 나귀와 낙타등 수많은 선물을 하사합니다. 아브람은 기근 때문에 먹을 것이 없어서 애굽 땅으로 왔는데, 단순히 기근만 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 작전이 성공적인 작전이었다는 것은 이후 하나님의 개입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와 그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셔서 사래의 신분이 무엇인지 드러나게 하십니다. 사래는 아브람의 누이가 아니라 아브람의 아내라는 사실을요.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을 아브람 자신이 처음부터 밝혔다면, 아브람과 사래는 이렇게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아브람의 우려대로 아브람은 죽음에 처해지고, 사래는 원치 않는 폭력에 시달리며 모진 고통 속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래의 신분이 무엇인지 온 천하에 드러나게 하심으로 아브람도 살고 사래도 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드러나게 하셨으므로, 아브람과 사래는 바로 왕에게 아무런 해를 받지 않고, 하사 받은 선물도 하나 빼앗기지 않고, 오히려 부자가 되어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 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톡톡히 누리는 아브람과 사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브람의 꾀가 정말 자신만의 안위를 위한 것이었다면, 사래는 처음부터 아브람의 꾀를 순순히 따르지 않았을 겁니다. 어느 부인이 자신만 살겠다는 남편을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남편의 말에 순종하겠습니까? 그러나 사래는 아브람의 계획에 아무런 반항도 없이 그대로 따릅니다. 이것은 그만큼 사래가 남편 아브람을 신뢰했다는 뜻입니다. 남편의 지혜는 단순히 살기 위한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한 거룩한 지혜라는 것을 자신도 깨달았던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아브람과 사래는 담대하게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약속의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거라는 믿음이 그들에게는 있었던 것이지요.

 

사래 사건은 옹졸하고 치졸한 아브람의 꼼수가 아닙니다. 자연인으로서,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한 믿음의 사건입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는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구원을 가져다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처럼 초자연적인 인물이 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연 법칙에 순종하며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딱따구리 한 마리가 열심히 나무를 쪼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고 있는데 갑자기 마른벼락이 치더니 그 나무를 반으로 쪼개 놓았습니다. 이것을 보고 놀란 다른 짐승들이 그 딱따구리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너에게 무슨 힘이 있어서 그 큰 나무를 쪼갤 수 있니?’ 그러자 딱따구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단지 나에게 맡겨진 일을 매일 성실히 했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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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9. 8. 22:35

미래를 여는 교회

(빌레몬서 1:1-25)

 

오늘 우리가 읽은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개인적으로 보낸 편지입니다. 여기에는 기막힌 사연과 기막힌 간청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따라 가다 보면 그리스도인이란, 그리고 교회란 무엇인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라는 문구를 보면, 빌레몬은 골로새 교회의 중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노예를 거느리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그의 집이 골로새 교회의 모임 장소로 사용된 것을 보면 말이죠. 옛날에는 정치적인 이유와 재정적인 이유로 지금처럼 교회 건물을 자유롭게 지을 수 없었기 때문에 성도들 중 여유가 있는 집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 편지를 빌레몬에게 쓴 바울은 현재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 정황이 자세히 나와 있는데, 3차 전도여행 후에 사도 바울은 박해 당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 거기에서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해 로마로 압송 당합니다. 로마에 압송된 바울은 재판을 받기 전 미결수 신분으로 감옥에 갇혀 있었고, 비교적 자유로운 감옥 생활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시시때때로 복음을 전하고 자유롭게 글도 쓸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빌레몬서 외에 에베소서와 빌립보서 등도 옥중서신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의 교우인 빌레몬에서 친필(대부분의 바울 서신은 대필해서 쓴 것입니다.)로 편지를 쓴 이유는 오네시모라는 사람 때문입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 때문에 그랬는지는 정황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서 도망쳤습니다. 도망쳐서 로마까지 왔는데, 거기서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노예제도가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 상황이 얼마나 일촉즉발의 상황인지 감이 잘 안 잡히실 겁니다. 그러나 2천 년 전 로마시대 때는 인구의 35-40% 정도가 노예였습니다. 노예제도가 합법적이었고, 사회의 기반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예제도를 뒷받침하고 있는 법도 잘 발달해 있었습니다. 그 중 도망친 노예는 주인이 사형에 처해도 주인은 아무런 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아주 당연한 처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오네시모가 처해 있는 상황은 생사가 달린 절체절명의 상황인 것입니다. 바울의 이 편지가 오네시모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매우 긴급한 상황인 것이죠.

 

물론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의 주인 빌레몬에게 이 편지를 쓴 이유는 오네시모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빌레몬이 죽인다 해도 아무도 뭐라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 사도 바울이 무슨 권리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죽이지 말라고 부탁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이러한 곤란한 상황에서는 방관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지혜로워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력을 다해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살려 달라고 부탁합니다.

 

지금처럼 통신이나 교통이 발달된 시절이 아닌 그 때에 도망자 오네시모가 로마에서 사도 바울을 만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밖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는 듯 합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드라마틱 하죠. 도망자 노예 오네시모는 도망친 로마에서 바울을 만났고,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거기에 골로새 교회를 세운 에바브라도 함께 있었던 듯 합니다. 그 에바브라를 통해서 골로새 교회의 상황과 빌레몬에 대해서, 그리고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에 대해서도 들었겠죠.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를 알게 된 바울은 적지 않은 고민을 했을 겁니다. 오네시모가 도망친 것에 대해서 눈 감고 있자니 양심에 거리끼고, 그렇다고 오네시모를 돌려보내자니 도망친 노예에 대한 사형제도를 모를 리 없던 바울은 그것도 양심에 거리꼈을 겁니다. 그렇다면 두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빌레몬서를 쓰게 된 동기인 것입니다. 법을 어기지 않으면서 생명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것만큼 보람찬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울은 고심 끝에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그냥 돌려 보낸 것이 아니라, 아주 파격적인 부탁을 하면서 돌려 보냅니다. 그 파격적인 부탁이 빌레몬서의 핵심입니다.

 

우선 바울은 빌레몬을 우리의 사랑 받는 자요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빌레몬이 바울을 만나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바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아마도 빌레몬은 사도 바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를 존경하거나 아니면 그를 신앙의 롤 모델로 생각했을 겁니다. 이방 선교계의 대부 사도 바울을 개인적으로 안다는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에게서 이러한 호칭을 듣는다는 것은 매우 자랑스러운 일인 것이죠.

 

게다가 바울은 빌레몬을 매우 크게 칭찬을 합니다. 그대로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4-7). 몇 자 안 되는 편지에서 바울은 많은 부분은 빌레몬에 대한 칭찬으로 채웁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사도 바울에게서 이러한 칭찬을 들은 빌레몬의 마음이 얼마나 뿌듯했겠습니까? 그 동안 교회를 섬기면서 어렵고 힘들었던 마음이 씻은 듯이 녹아 내렸을 겁니다.

 

빌레몬에 대한 칭찬에서 이 문구에 눈길이 머뭅니다.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그러면서 내 자신을 한 번 되돌아 보게 됩니다. ‘나로 인해 성도들의 마음은 평안함을 얻을까? 아니면 나 때문에 짜증날까?’ 그러면서 빌레몬은 어떻게 했길래 성도들에게 평안함(refreshment)을 주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 답은 그 윗구절에 있습니다.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빌레몬에게는 사랑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은 있는데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은 있는데 사랑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과 믿음, 어느 한 쪽이 좀 부족하면 성도들에게 평안한 마음을 주기 쉽지 않습니다. 또한 사랑과 믿음이 누구를 향한 것이냐도 중요합니다.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은 주 예수와 모든 성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것도 똑같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주 예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은 있는데,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은 있는데, 주 예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 예수를 사랑하는 것과 모든 성도(이웃)를 사랑하는 것 중 어느 한 쪽이 좀 부족하면 성도들에게 평안함을 주기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아보지만, 일단 균형이 잡히면, 그 결과 성도들에게 평안함을 주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바울 사도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칭찬을 들으면서 마음이 환해졌을 빌레몬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살려 달라는 부탁을 넘어 그를 종이 아닌 형제로 받아 달라는 부탁입니다. 이것인 매우 파격적인, 파격적이다 못해 전복적인 일입니다. 왜냐하면, 노예제도가 기반을 이룬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빌레몬 개인에게 하는 부탁을 넘어 골로새 교회에게 하는 부탁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편지의 인사말에서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2)라고 쓰고 있는 겁니다. 빌레몬 한 명만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종이 아닌 형제로 받아들인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빌레몬이 속한 공동체 전체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큰 갈등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민감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레몬 개인을 넘어 골로새 교회 공동체에게 이 문제의 적극적인 해결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바울의 부탁대로 빌레몬과 골로새 교회 공동체는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그를 종이 아닌 형제로 받아 들였을까요? 아니면 바울의 편지를 그 자리에서 찢어 버리고, 오네시모를 노예법에 따라 사형에 처했을까요? 당연히 바울의 부탁대로 빌레몬과 골로새 교회 공동체는 일을 처리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가 이렇게 우리에게 성경의 형태로 전해져 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빌레몬과 골로새 교회 공동체가 바울의 부탁대로 오네시모에게 자비를 베풀고 그를 종이 아닌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바울과의 관계 때문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들은 주 예수의 복음에 온 생명을 걸고 산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20). 바울이 주 안에서 기쁨을 얻는다는 말은 곧 그들이 이 일을 주 안에서 처리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 빌레몬과 골로새 교회 공동체는 복음을 귀로만 들은 것이 아니라, 복음을 삶으로 살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충만하지 않으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믿음인 것이죠. 그야말로, 빌레몬에 대한 바울의 칭찬은 립서비스가 아니라, 실제였다는 것입니다. 도전이 되는 신앙입니다. 꼭 본받아야만 하는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더 이상 노예제도가 있는 시대에 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빌레몬서에서 일어난 일과 똑같이 노예를 종이 아닌 형제로 받아들이는 일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보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빌레몬과 골로새 교회 공동체가 오네시모의 미래를 열어준 것처럼 미래를 여는 그리스도인,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충만한 정도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 안에서 용기를 내시고 지혜를 간구하셔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모든 상황에서 미래를 열어가시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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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