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6. 24. 05:48

실패는 없다

(갈 3:23-29)

 

의란 무엇입니까? 의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러니까, 의로워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이죠. 그러면 어떻게 의로워질 수 있느냐의 문제가 남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율법이 그 일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율법대로 살면, 의로워진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의로워지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멋져 보여서요?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인물이 되니까요? 그런 것은 이차적입니다. 의로워지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구원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이란 유대인들에게 의로운 사람의 몫인 셈이죠. 유대인들은 그냥 그렇게 생각하면서 모세에게서 율법을 받은 이래로 율법을 열심히 지키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것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 의하면, 율법을 통해서는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악만 밝혀줄 뿐, 우리를 의로움으로 이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예수라는 분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 난감한 일입니다. 그 예수라는 사람은 유대인들에 의해 로마당국의 손에 넘겨져 처형을 당한 인물이었거든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예수가 십자가 형에 처해 죽었다는 사실은 그가 의롭지 못하다는 증거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를 이들은 그리스도로 소개하면서 예수라는 분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의로워질 수 있을 뿐, 율법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와 주님으로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구원사건, 즉 우리를 의롭게 한 사건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부활때문이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예수는 유대인들에 의해 로마당국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 처형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무덤에 누워 있는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험한 꼴 당하고 죽었던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이 믿기 참 힘든 일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한 예수를 직접 만났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이 일의 증인으로 자처하고 나선 겁니다.

 

사도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과 예수의 그리스도, 주님 되심을 증거했을 때 그것을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믿었던 사람들은 처음에 다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전해졌으니까요. 이들은 처음에 복음을 받아 들었을 때, 유대교 내에서 율법을 준수하며 예수를 믿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서부터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을 너머, 사마리아와 땅끝(이방지역)으로 퍼지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방지역으로 복음을 전파하는데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바울입니다. 바울이 쓴 서신서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이방 사도로 부르셨다는 고백이 촘촘히 들어 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한 지역 중 하나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배경이 되는 갈라디아 입니다.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 지역에 세워진 교회에 보낸 편지인 것이죠. 이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바울은 이렇게 갈급한 마음으로, 강력한 필체로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일까요?

 

갈라디아는 이방지역입니다. 유대인들이 주축을 이룬 지역이 아닙니다. 그 말은 유대인의 율법이 영향을 미치는 지역이 아닙니다. 문화 자체가 유대인들의 문화와는 관계가 없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갈라디아 교회에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율법을 지켜야만 온전히 의를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와 함께 율법의 필요성을 동시에 강조한 것이죠.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즉 구원 받는다는 것을 이들도 인정했지만, 어딘가 좀 부족해 보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강조하는 이유는 율법의 준수만이 의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율법은 단순히 종교생활만이 아니라 일상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의 모든 것을 규정합니다. 예컨대 소가 이웃집 밭에 들어가서 곡식을 망가뜨리는 경우나, 성폭력이 발생한 경우도 율법이 대답을 제시합니다. 율법에 정진해 살면 모든 것이 의로운 상태로 복귀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는 유효합니다. 지금도 우리의 사회를 그나마 정돈시켜 주는 것도 법 때문입니다. 법이 없다면 무법 천지겠죠. 아마도 자동차 타고 다니기도 쉽지 않을 겁니다. 도로교통법 때문에 자동차 운전하고 다니는 것도 질서가 유지되는 것이니까요.

 

이에 대해 바울은 놀랍게도 본문에서 유대인들의 전통을 거부합니다. 율법이 정의롭게 하는 게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는 율법의 한계를 정확하게 뚫어보았습니다. 법은 일시적으로, 또는 표면적으로 정의를 말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정의를 세우지 못합니다.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은 세계에서 법이 가장 잘 정비된 나라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미국에서 오랫동안 사신 여러분들이 느끼시기에 이 나가 정의로워 보입니까? 억울하고 답답한 일이 하나도 없으세요?

 

그리고 더 중요하고 현실적인 문제는 이것입니다. 법이 우리를 보호해 줍니까? 가령 누군가를 살인하거나 강간하면 그 일을 행한 가해자는 무기징역 또는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것이 법입니다. 이러한 법이 있다고 한들, 살인이나 강간 사건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이러한 법이 있는 것 때문에 우리가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습니까? 법은 법이고, 사건은 사건입니다. 아무리 법이 있어도, 살인이나 강간 사건이 일어나고 나면, 피해자나 그 가족은 그 사건으로 인해서 인생을 망치게 됩니다. 가해자가 아무리 무기징역이나 사형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망가진 인생은 회복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법이 모든 것을 의롭게 규정해 주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율법의 요구가 이 세상의 성공과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우리는 늘 불안합니다. 남들과 비교해서 뒤떨어진 삶을 살 가봐. 그래서 대도시에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남보다 좋은 학교를 나와야 하고, 남보다 큰 비즈니스를 해야 하고, 좋은 옷, 좋은 차, 좋은 집 등등이런 것의 성취가 곧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인들이 삶의 완성을 어떻게 추구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일반적으로는 존경받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또는 행복한 조건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돈도 좀 잘 벌고, 이름도 내고, 착한 일도 하고, 취미활동도 잘 하고, 스펙도 잘 쌓고, 등등 ... 할 일이 많습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습니다. 목사의 경우에는 교회를 크게 키우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이런 노력들은 다 필요합니다. 모두 좋은 율법들입니다. 모두 열심히 자기 몫을 감당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은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인생을 걸면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의미해집니다.

 

의로움은 삶의 완성이나 성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는 데서, 즉 그리스도로 옷 입는 데서 옵니다. 바울은 3 2절에서 갈리디아 교회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의로움을 이루고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성령, 즉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은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대한 증언을 듣고 믿는 데서 온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성령 받는 것은 40일 금식기도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통해서 일어나는 신비로운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너무 허무한가요?

 

복음을 듣고 믿는 데서가 아니라, 율법의 요구를 이룸으로 의를 이루고 구원을 성취하려는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3:3).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다, 라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한 구별은 헛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내가 조금 부자로 살았던 가난하게 살았던, 도시에 살았던 시골에 살았던, 많이 배웠던 많이 배우지 못했던, 몸에 장애가 있던 없던, 그것들은 모두 율법의 요구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지 못하면 실패한 삶이라고 자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자로 살지 못하면 실패한 삶이다. 시골에 살면 실패한 삶이다. 많이 배우지 못하면 실패한 삶이다. 몸에 장애가 있으면 실패한 삶이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해서 그들보다 뭐 하나라도 우위에 있지 않으면 불안해 하면서 실패한 삶이라고 규정하고 비탄에 잠기는 것이 우리들의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자꾸 '성공'하게 해달라는 부르짖음으로 치닫습니다. 율법의 요구, 이 세상의 성공의 기준을 이루기 위해서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라는 기도를 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예수님의 삶은 실패 중의 실패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처형 당한 사람의 삶이 뭐가 승리의 삶입니까? 그런데, 바로 거기에서 부활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을 놓치면, 우리는 복음을 통한 의를 믿지 못하고,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삶을 사느라 허우적댈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 본다면, 우리가 남들보다 좀 우월하게 살았다고 교만할 것도 없고, 남들보다 좀 못한 삶을 살았다고 부끄러워할 것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그리스도로 옷 입고 있느냐입니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기만 한다면, 우리 삶에 실패란 없습니다. 그러니 주어진 환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 붙들고 불꽃처럼 사십시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으면, 여러분은 이미 하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사는 자들에게는 실패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교해도 괜찮은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사명 감당하면서 한평생 살아도 괜찮은 겁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불안해 하지 말고, 평안 가운데 사십시오. 다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구원 사건에 집중하면서, 즉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사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을 의롭게 할 것이며, 구원으로 이끌 것입니다. 아멘.

 

 

* 이 설교의 몇몇 부분은 정용섭 목사님의 설교에서 가져왔습니다. 바울 서신을 갖고 설교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편지문 형태로 '교리'를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 서신은 율법과 복음의 문제를 놓아두고 첨예하고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을 정확하게, 그것도 좀 재미있게 설명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또한 바울 서신은 오직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성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에 관심이 없는 요즘 기독교인들에게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한다는 것이 정말로 힘듭니다. 그래서 바울 서신을 갖고 말씀을 전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정말이지 '복음'이 먹히질 않습니다. 교인들의 표정과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목사가 지금 무슨 말을 하나...' 아.. 정말이지, 복음을 전하는 일은 정말 도전이 되고 절망적입니다. 제가 지금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는데도 말이죠. 이게 참 아이러니입니다.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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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짧은 인생론

 

 

누가 그러더군. 세계는 두 번 진행된다고.

한 번은 우리가 그것을 보이는 그대로 보는 순간.

두 번째는 그것이 존재하는 그대로 전설로 새겨지는 순간.”

 

인생은 좋은 책을 만나야 하는 거야.

어떤 책이 좋은 책이냐고?

그것은 두 번째 세계를 보여주는 책이지.

 

인생은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거야.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냐고?

그것은 두 번째 세계를 사는 사람이지.

 

그런데 이것 또한 명심할 것.

좋은 책,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첫 번째 세계에 대해서는 환멸을 가질 것.

두 번째 세계에 대해서는 동경을 품을 것.

그렇게 환멸과 동경 속에서 방황할 것.

그래서 때로는 만남이 어긋난다는 것.

 

건투를 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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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3. 6. 20. 12:59

 

살아 남은 자의 슬픔

창세기 1

(창세기 4:1-15)

 

쉼보르스카의 시 <우화>입니다.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어부들이 바다 깊은 곳에서 유리병을 낚아 올렸어요. 그 병에는 종이 쪽지가 들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써 있었답니다:

사람들이여, 나 좀 구해주세요! 나 여기 있어요. 대양이 나를 파도에 싣고서 무인도에 갖다 버렸답니다. 모래사장에 나와 도움을 기다리고 있어요. 서둘러주세요. 나 여기 있을게요.”

 

이 쪽지에는 날짜가 누락되어 있군. 틀림없이 이미 늦었을 거야. 유리 병이 얼마나 오랫동안 바다를 떠나녔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첫 번째 어부가 말했습니다.

 

게다가 장소도 적혀 있질 않군. 대양이 한둘도 아니고, 어디를 말하는지 통 알 수가 없잖아.”

두 번째 어부가 말했습니다.

 

늦은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야. ‘여기라는 섬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이니까.”

세 번째 어부가 말했습니다.

불현듯 어색한 분위기와 함께 침묵이 흘렀습니다. 보편적인 진실이란 원래 다 그런 법, 생각하기 나름이니까요.

 

여기 생각하기 나름인 사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 사건입니다. 왜 가인은 아벨을 죽였을까요? 우리는 흔히,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가 제사 행위에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아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아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여기서 의문은 한 가지 더 늘어 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아벨의 제사는 받아주시고, 가인의 제사는 안 받아 주셨을까요?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가인의 마음 속에 들어가 볼 수 없고, 하나님의 마음은 더더군다나 들어가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가인의 엄마 하와는 가인을 낳았을 때 가인에게 매우 기대를 걸었던 모양입니다. 하와는 가인을 낳은 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1). 이를 풀어서 다시 옮기면 이런 뜻이랍니다. “내가 여호와와 함께 한 사람(남자)을 얻었다.” 하와는 자신의 힘으로 아들을 낳았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얻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낳은 아들이라면, 분명 자신의 앞날에 이 아들을 통해 영광이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을 겁니다. 하와는 이 사람에게 어떤 희망을 품었던 것이죠.

 

그런데, 세월이 지난 후, 엄마의 기대와는 달리 기대주가인은 엉뚱하게도 살인자가 됩니다. 그것도 인류 최초의 살인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쉼보르스카의 다른 시 <베트남>입니다.

 

여인이여, 그대 이름은 무엇이냐? – 몰라요

어디서 태어났으며 어디 출신인가? – 몰라요

왜 땅굴을 팠느냐 몰라요

언제부터 여기 숨어 있었느냐? – 몰라요

왜 내 약지를 물어뜯었느냐? – 몰라요

우리가 당신에게 절대로 해로운 짓을 하지 않으리라는 걸 아는가? – 몰라요

당신은 누구 편이지? – 몰라요

지금 전쟁 중이므로 어느 편인지 선택해야만 한다 몰라요

당신의 마을은 존재하는가? – 몰라요

이 아이들이 당신 아이들인가? – 맞아요

 

이 시는 쉼보르스카가 베트남 전쟁 때 구찌 땅굴에 살았던 베트공 여인을 생각하며 쓴 시입니다. 수많은 질문에 도리도리 고갯짓을 하며 몰라요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이러한 상황을 우리는 도처에서 만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서도 발견됩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 몰라요!

 

이 대답 속에는 자신도 왜 아벨을 죽였는지 모르겠다는 대답이 들어 있는 것일 겁니다.

 

여러 해 전, 한국에서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호찌민에 살았던 베트남 여성 후인마이가 대한민국 천안시 문화동의 한 방에서 전과 6범의 남편에게 구타당해 늑골 18개가 부러져 죽은 채 발견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후인마이는 죽기 전날 남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물론 이렇게 죽게 될지 몰랐지만, 그것이 그녀의 유언장이 된 셈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무슨 음식 먹어? 물 먹어?라고 물으며 식모처럼 잘해주고 싶었어. 나는 결혼하기 전에 호찌민에서 일했어. 우리 가족에게 어려움 있었어. 가족을 위해 고생스러운 일 많이 했지만 월급은 적었어. 어느 해는 냉동식품 회사에서 일하고 어느 때는 가구 공장에서 일하고 어느 때는 고무 농장에서 일했어. 일 없으면 남의 논밭에서 일했어. 나는 힘든 일과 고생스러운 일을 잘 알아. 나는 한국에 와서 당신에게 이야기 많이 하고 싶었지만 잘 안 되었다. 하나님은 나에게 장난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무슨 말을 하는지 당신은 잘 모를거다(베트남어로 썼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에게 장난치고 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장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밖에는 자신의 인생을 설명하고, 위로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겠죠.

 

<가인과 아벨>의 사건도 하나님의 장난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 밖에는 그 사건을 이해할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심리학자가 이 사건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한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런 진단을 내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단서는 5절 이하에 나오는 가인의 심리상태에 대한 묘사입니다.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분노를 잘 느끼는 사람의 특징은 어려서부터 통제를 잘 받지 못한 탓일 가능성이 큽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가인은 엄마의 기대주였기 때문에, 엄마의 사랑은 많이 받았어도, 엄마에게 통제를 잘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귀하고 곱게 자란 아이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상황을 맞닥뜨리면 분노를 쉽게 표출합니다.

 

분노를 노출하고 있는 가인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분노를 잘 다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분노는 존재를 죄의 지뢰밭으로 이끕니다. 터트리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릅니다.

 

가인은 안색이 변할 정도로 몹시 분한 마음을 품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를 아우 아벨에게 풉니다. 분노를 터트립니다. 터진 분노에, 아우 아벨이 죽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입니다. 분노를 풀고 나면, 정신이 드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우가 죽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입니다. 자신은 분노를 풀어내서, 살아 났지만, 그 분노의 폭발 때문에 아우가 죽었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 몰라요!” 가인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당황합니다. 후회합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아우 아벨은 이미 죽은 상태입니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들은 세상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고아원 동기인 젊은 부부는 애를 낳자마자 족족 고아원에 넘깁니다. 만삭의 아내는 변기에 앉아 힘을 주다 그만 변기 속에 풍덩 아이를 낳게 됩니다. 그런데 그 아이를 꺼내서 닦아놓고 보니 눈과 코가 없었습니다.

 

평생 가정을 가져본 적 없이 무료 급식으로 연명하는 폐품팔이 할아버지는 어느 날 가출 소녀를 만나게 됩니다. 노인은 마냥 좋아 10대의 가출 소녀를 아가라 부르며 집 안에 받아들이고 그것을 가족이라 생각하며 가출 소녀를 매일 기다립니다.

 

이것은 우리가 매일 만나고 있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입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일들을 만나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일까요? 어쩌면 처음 인간이었던, 아담과 하와에게서 시작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처구니 없게, 아담과 하와는 기대주가인이 아우 아벨을 돌로 쳐 죽이는 일을 겪게 됩니다. 아벨은 어처구니 없게 다른 사람도 아닌 형 가인에게 돌에 맞아 죽는 일을 겪게 됩니다. 가인은 어처구니 없게 자신의 분노를 아우 아벨에게 풀어내는 일을 겪게 됩니다. 이것은 모두, 에덴동산에서 살아 남은 자들이 겪은 슬픔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처구니 없는 일은 하나님의 아들이 죽은 사건입니다. 사람이 죽는 거야 최초의 인간 때부터 있어왔던 일이라 익숙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죽는 일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에덴동산을 떠나 이 땅에 온 존재는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는 어처구니 없는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죽인 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나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 그에 대한 인간들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요? 당연히 몰라요!”입니다.

 

커트 보네거트의 <레퀴엠>이라는 시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지구가

목소리를 갖게 되고

아이러니가 무언지 알게 된다면

우리가 저지른 학대에 대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는 게 바로 아이러니다

 

이것이 살아 남은 자의 가장 큰 슬픔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몰라요!”라고 대답하긴 했지만, 사실 가인은 자신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는 그 아이러니!

 

가인은 그러한 아이러니를, 그러한 슬픔을 가슴에 지니고 살게 됩니다.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15). 가인이 하나님께 받은 표는 자신의 죄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죄를 면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가 바로 그러한 표가 아니겠습니까? 십자가는 내 죄를 들춰내는 거울이기도 하지만, 내 죄를 감춰주는 가죽 옷이기도 한 것이죠. 비록 우리의 인생이 어처구니 없고, 아이러니하고, 슬픈 일로 가득 차 있다 할지라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극복될 수 있다는 희망, 그것은 정말이지 눈물 나도록 감사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어처구니 없는 하나님의 장난을 보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봅니다.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인생은 충분히 희망적입니다. 그러니 눈물을 닦고 힘을 냅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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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3. 6. 17. 14:10

나그네와 나룻배

 

구름에 달 가듯이 가던 나그네가

강 마루에서 나룻배를 만났다.

 

나를 좀 저기 강 건너편까지 데려다 다오.

 

이 강은 왜 건너려고 하시나요?

 

글쎄, 나를 잊기 위해서

 

지금까지 당신은 자신을 찾기 위해 나그네로 살지 않았나요?

 

그랬지그런데 저 강 건너편에서 또 다른 나를 찾기 위해서는

나를 먼저 잊어야 하지 않을까 싶네만.

 

그렇군요. 그러나 우선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이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저랑 친해지셔야 해요.

 

어떻게 해야 자네와 친해질 수 있나?

 

그건 당신에게 달렸지요.

 

그날부터 나그네는 나룻배와 친해지기 위해서

나룻배와 시간을 많이 보냈다.

 

, 여름, 가을, 겨울,

관계를 만들어 내는 의미 없는 시간들을 보내고,

관계에 의미가 생길 때쯤

나룻배는 나그네에게 등을 내밀었다

 

출렁이는 강물을 가로지르며

나룻배와 나그네는 서로 머뭇거렸다.

 

나룻배는 강물에 눈물을 씻어내며 나그네에게 물었다.

 

당신은 나를 버릴 작정이신가요?

 

그게 무슨 소리지?

 

강을 건너고 난 뒤 당신은 당신의 길을 갈 테니까.

강을 건넜는데, 더 이상 내가 필요하진 않겠죠.

 

……

 

어쩌실 셈인가요?

 

나그네는 강을 건너는 동안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나룻배는 반대편 강 마루에 도착했다.

 

강물은 출렁였다. 나룻배의 마음도 출렁였다.

나룻배의 출렁임은 강물의 출렁임 때문인지

마음의 출렁임 때문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 출렁임 가운데 아무 말 없이 한 참 서있던 나그네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괴나리 봇짐을 메고

뭍을 향해 두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나룻배를 향해 말했다.

 

고맙네. 나를 잊으시게나.

나도 저 강을 건너오면서 나를 잊었다네.

나도 잊은 나의 모습을 자네가 간직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다만 나는 자네의 그 출렁임만은 간직해 두겠네.

 

나그네는 떠나고

나룻배는 홀로 남아 강물의 흔들림에 몸을 맡겼다.

기억한들 소용 없으므로.

나그네와 나룻배를 이어주는 것은 출렁임 밖에는 없으므로.

 

그렇게 나그네는 자신을 찾기 위해 출렁였고

그렇게 나룻배는 간직하기 위해 출렁였다.

 

강 마루에 가 보라.

그러면 나룻배가 왜 출렁이는지

이제는 알게 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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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6. 17. 04:46

2013 6 16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1:12-26

제목: 기도의 퀄러티가 삶의 퀄러티이다

  

신약성경 중 마음에 와 닿는 성경을 고르라면, 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고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과 기도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성령행전 또는 기도행전이라 불리고, 누가복음은 성령복음 또는 기도복음이라고 불립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꼭 지향해야 하는 삶의 가치를 너무도 잘 가르쳐 주는 지표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는다면,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어디로 가게 될지 모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어떤 신적인 힘을 지칭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성령을 일컬어 예수의 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령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과 더불어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을 차지하고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에 생명의 영이고, 예수의 영이기 때문에 진리의 영이십니다. ,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뜻은 생명의 길로, 진리의 길로 나아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지금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는데, 그 길에 끝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지금 나아가는 길 가운데 눈에 보이는 주변환경은 온갖 우리의 욕망을 자극시키고 만족시키는 것이 있어 즐거울지 몰라도, 그 길의 끝에 우리의 생명을 삼켜버리는 지옥이 있다면, 그 길은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이 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지금 나아가는 길 가운데 눈에 보이는 주변환경이 우리의 욕망을 절제시키고 실망시키는 것이어서 재미 없다 할지라도, 그 길의 끝에 우리의 생명을 충만하게 하는 천국이 있다면, 그 길은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이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해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생명의 길, 진리의 길로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결코 우리를 죽음의 길, 거짓된 길로 이끌지 않으십니다. 생명과 진리는 성령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겁니다. 우리는 본질에서 벗어나 방황하고 좌절하고 죄를 짓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욕망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영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산다면, 우리의 미래는 참으로 희망찬 것이죠.

 

오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생을 건 제자들이 어떻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는지에 대한 기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제자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지만,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120명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모여 예수님의 약속을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교회 모습입니다. 기본적으로 교회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그분의 약속을 간절히 사모하는 자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그분의 약속을 간절히 사모했던 120명의 제자들은 모여서 주님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14b).

 

저는 개인적으로 이 말씀에 마음이 참 끌립니다. 이 부분을 영어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These all with one mind were continually devoting themselves to prayer.” 여기서 ‘one mind’라는 말과, ‘continually’라는 말, 그리고 devoting themselves’라는 말이 모두 ‘prayer’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의 아주 기본 자세를 말해주는 귀한 용어들입니다.

 

우선 ‘one mind’라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기독교인에게 기도란 혼자서 하는 기도는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요즘 시대는 너무 개인주의가 판을 치는 시대가 이것이 마음에 잘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도는 그냥 골방에 들어가서 혼자서 하면 되지, 무슨 ‘one mind’로 하라는 것일까?’, 라며 의문을 품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한 번도 혼자서의 기도를 말한 적이 없습니다. 기도는 언제나 공동체성을 지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연결된 한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동상이몽이라는 한자성어가 있습니다. ‘같은 침상에 누워 있으면서 다른 꿈을 꾼다는 뜻입니다. 이런 기도는 이방인들의 기도입니다. 자신의 유익만 구하는 이기적인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기본적으로 사랑의 기도가 되어야 하는데, 자신만의 유익을 구하는 기도는 사랑의 기도, 즉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랑은 기본적으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말 그대로 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 말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기도가 아닌, 자기 희생적인 기도, 즉 이웃을 향한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일례로, 현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비즈니스는 경쟁을 기반으로 합니다. 한 쪽이 흥하면, 한 쪽은 쇠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나의 비즈니스가 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런데 이 기도 속에는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지만, 자동적으로 이런 뜻도 들어가 있는 겁니다. ‘주님, 나의 경쟁상대인 저 사람의 비즈니스가 하게 하여 주옵소서.’ ‘저는 그렇게 기도한 적 없는데요. 저는 저의 비즈니스를 흥하게 해달라고 했지, 나의 경쟁상대인 저 사람의 비즈니스가 쇠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 없는데요.’ 물론 그렇습니다. 겉으로 볼 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만 들어 있지, 이웃의 유익은 아랑곳 하지 않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한 마음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 비록 우리들이 경쟁관계에 있지만 저도 흥하게 하시고, 저 사람도 흥하게 하여 주옵소서.’ 물론 공동체성이란 이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다만 일례를 들어서 그것이 무엇인지 조금 맛을 본 것이지요.

 

다음으로 ‘continually’‘devoting’은 하나로 묶어서 살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단어를 통해서 우리는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여서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던 제자들이 얼마나 기도에 집중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계속해서 기도했는데, 단순히 그냥 기도하는데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라, 기도에 헌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양과 질이 함께 갔다는 뜻입니다. 1시간이든 2시간이든, 기도의 양도 중요하지만, 1시간 2시간 기도할 때 그 기도의 질 또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시간만 때우는 기도를 드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기도한다고 앉아 있긴 하지만, 중언부언하는 기도, 딴 생각 하는 기도를 드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 ‘continually’‘devoting’은 무슨 일을 하든 매우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끊임 없이 운동하는 사람, 그리고 운동할 때 운동에 집중하는 사람은 건강할까요 아닐까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끊임 없이 공부하는 사람, 그리고 공부할 때 딴 생각 안 하고 공부에 집중하는 사람은 공부를 잘 할까요 아닐까요? 반대로, 눈 온다고, 비 온다고, 바람 분다고 그런 날은 운동 안 하고, 운동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됐다 싶은 날, 마음에 내키는 날만 운동하고, 그나마 운동하면서 운동에 집중하지 않는 사람이 건강할까요 아닐까요? 눈온다고, 비 온다고, 바람 분다고 그런 날은 공부 안 하고,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됐다 싶은 날, 마음에 내키는 날만 공부하고, 그나마 공부하면서 공부에 집중하지 않는 사람이 공부를 잘 할까요 아닐까요?

 

굉장히 단순한 진리이지만, 우리는 이것을 간과하면서 살아갑니다. 기도도 마찬가지 입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 기도하면서 기도에 집중하는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할까요 아닐까요? 눈이 온다고, 비가 온다고, 바람이 분다고, 왠지 기도가 안 되는 우울한 날이라고 하면서 기도를 거르고, 그나마 기도할 때 딴 생각하면서 기도하는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할까요 아닐까요?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기도를 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헌신해서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매우 중대한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집중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굉장히 중요한 한 가지 문제를 처리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배신해서 자살해 죽은 예수님의 열 두 사도 중 하나였던 가룟 유다의 자리를 보궐하는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의 사도를 열 둘로 유지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12라는 숫자는 완전 숫자인데, 야곱의 12 아들, 이스라에르이 12지파처럼, 12 사도들은 이제 예수님으로 인해 시작된 새 이스라엘을 통치하도록 임명된 지도자의 지위를 확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누가 앉느냐는 교회의 미래를 결정하는 매우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이들은 이 문제를 놓아두고, 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집중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그 자리를 맡게 될 두 사람을 천거합니다. 그들은 요셉과 맛디아였습니다. 이 중 한 사람은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12 사도의 자리에 앉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과 봉사의 직무를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결과는 맛디아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맛디아가 아니라, 요셉으로 선정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매우 첨예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매일 벌어지는 문제와도 같습니다. 우리는 늘, 인생을 살아가면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됐을 때,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 어떤 선택이 올바른 선택인지, 우리의 미래를 밝게 해줄 것인지, 우리는 지혜가 부족하여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지금 하는 선택은 나의 미래를, 나의 인생을, 나의 삶을 이렇게도 바꿀 수 있고, 저렇게도 바꿀 수 있습니다. 인생은 선택의 결과이고, 어떠한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나의 삶의 질은 달라집니다. 그 모든 변수를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영이시고 진리의 영이신 성령은 우리가 어떠한 길로 나아가야 하는지 아신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생명의 영이시고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기도에 헌신하는 것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방법을 택하지 않으시는 분들은 점 집에 찾아가시겠죠.)

 

예수님의 12 사도로 맛디아가 아니라, 요셉이 선택되었다면 초대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많은 것이 달라졌겠죠. 그러나, 우리는 믿습니다.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모여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던제자들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요. 왜냐하면, 이들은 분명,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선택이라면, 이 세상 어느 것보다 신뢰할만한, 그리고 삶의 질을 바꾸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기 때문입니다.

 

'레미제라블'의 저자 빅토르 위고(Victor Hugo)는 나폴레옹이 패망하게 된 워털루(Waterloo)전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격전이 있던 날 아침, 작달막한 키의 나폴레옹 황제는 싸움이 벌어질 벌판을 바라보며 사령관에게 그 날의 작전을 설명했다. “여기에 보병을 배치하고 저쪽에는 기병을, 그리고 이쪽에는 포병을 배치할 것이오. 날이 저물 때쯤 영국은 프랑스에게 굴복되어 있을 것이며 웰링턴은 나폴레옹의 포로가 될 것이요.” 하고 자신에 넘치는 야무진 소리로 말했다.

 

이 말을 듣던 한 사령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각하,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성패는 하늘에 달렸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나폴레옹은 그의 작달막한 몸을 쭉 펴서 키를 늘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장군은 이 나폴레옹이 친히 계획을 세웠다는 것과 나폴레옹이 성패를 주장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라오.” 하고는 듣기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빅토르 위고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부터 이미 워털루 전투는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나님께서 비와 우박을 퍼부었으므로 나폴레옹의 군대는 계획한 작전을 하나도 펼 수가 없었다.]

 

전투가 벌어진 그날 밤에 나폴레옹은 웰링턴 장군의 포로가 되었고 프랑스는 영국에 굴복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나간 역사를 다 알 수 없고 다 판단하여 말할 수 없지만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군인 제1통령·황제로 제1제정을 건설했고 제1통령으로 국정을 정비하고 법전을 편찬하는 등 개혁정치를 실시했으며, 유럽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며 세력을 팽창한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프랑스의 입장에서 보면 위대한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위대한 전략가로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광활한 영토를 점령했습니다. 그가 세운 전략들은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려하지 못한 하나의 변수 때문에 그는 전쟁에 패하였고 다시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그가 놓친 하나의 변수는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잠언서 16 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이와 비슷한 구절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잠언 16:1). 오늘 말씀에 근거해서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의 인생은 생명의 길, 진리의 길로 걷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언 16:25).

 

그렇다면, ‘어떻게, 생명의 길, 진리의 길로 이끄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관심사입니다. 그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는 것’,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지금 어떻게 기도하고 있느냐는 단순한 신앙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에게 잘 보이고, 의무를 감당하고 말고의 문제는 더더욱 아닙니다. 이것은 나의 현실적인 실존적인 삶의 문제입니다. ‘내 삶의 질이 곧 기도의 질로 결정난다는 엄청난 메시지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너무도 자명한 일이 아닙니까?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지 않으면, 우리는 생명의 길, 진리의 길로 갈 수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지 않으면, 내가 보이게 바르고 좋아 보이나, 필경 사망의 길일 수 있다는 경고를 경히 여기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생명을 걸기로 결단한 사람답게, 예수의 영인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 위해서, '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집중하여 기도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입니다. 기도의 퀄러티가 삶의 퀄러티입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먹느냐, 내가 지금 어떤 옷을 입고 있느냐, 내가 지금 어떤 집에서 사느냐, 내가 지금 무슨 차를 타고 다니느냐, 내가 지금 어떠한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느냐가 삶의 퀄러티가 아니라, 내가 지금 어떻게 기도하고 있느냐가 삶의 퀄터티를 결정합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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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마중물 기도의자

 

요즘에는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지만, 옛날에는 우물에서 바가지로 물을 펐습니다. 요즘과 옛날 중간에는 펌프질을 해서 물을 펐습니다. 기억하실 겁니다. 물을 한 바가지 부은 다음 손잡이를 잡고 아래위로 펌프질을 하면 펌프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왔던 펌프를. 그 물을 받아서 생활용수로 사용을 했지요. 펌프에서 물을 얻으려면 물 한 바가지를 꼭 부어야만 했습니다. 그 물 한 바가지를 마중물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콜링 워터(Calling Water)라고 하고, 경제학 용어로 쓸 때는 죽어 있는 투자욕구, 성취욕구를 유발해 주는 정책을 일컫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깊은 곳에 숨겨진 것을 퍼낼 때 마중 나가서 데리고 오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기도의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자를 마중물 기도의자라고 이름 붙여 봤습니다. 기도의자를 사용해서 기도할 때 기도의 샘이 터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붙여본 이름입니다. 이 기도의자는 특별히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도움을 줍니다. 기도할 때 여러 가지 자세를 잡고 기도할 수 있으나, 뭐니뭐니해도 기도는 무릎 꿇고 할 때 가장 겸손한 마음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무릎을 꿇은 채로 오랜 시간 동안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접힌 다리가 저리고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되면 무릎이 상해서 건강에 치명타를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안된 것이 바로 기도의자입니다.

 

기도의자는 무릎 꿇고 기도할 때 무릎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그냥 무릎 꿇고 기도할 때보다 더 오랜 시간을 무리 없이 기도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물론 기도가 1시간 이상 길어지면 기도의자도 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만, 어찌되었든 기도의자는 기도의 샘에서 거룩하고 참된 기도가 콸콸 쏟아져 나오도록 도와주는 마중물 역할을 하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마중물 기도의자를 가졌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기도가 쏟아져 나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갈급함이 있어야 기도가 나오는 것이죠.

 

아무쪼록 기도 없이 살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마중물 기도의자가 기도의 샘이 터지는데 조그만 힘이 될 수 있다면, 태양이 내리쬐는 무더운 날, 땀을 뻘뻘 흘리며 톱밥을 먹어가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만든 것에 대한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기도의 샘아, 터져라!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6. 10. 06:59

2013 6 9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욥기 42:1-17

제목: 신앙의 도약

 

고난에 대한 명언들이 많다. 그 중 기억에 남는 명언은 세 가지 정도다: 1) 고난은 가면을 쓴 커다란 행운이다영국속담, 2) 고난이 없으면 성공도 없다소포클레스, 3) 고난은 의식의 시작이다도스토예프스키.

 

이 중에서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고난에 대한 명언을 좋아한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고난을 좋아할 이유도 없다. 고난에 대한 명언들은 모두 고난을미화(美化)’시키고 있지만, 명언들에서 미화되고 있는 고난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못하다.

 

대개 사람들은 고난을 만나면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고난에 걸려 넘어지거나, 고난을 외면하거나. 고난이 아무리 주는 유익이 크다고 미화되고 있어도, 고난을 겪고 나면 인생에는 고난의 얼룩이 남게 마련이다. 그리고 고난을 통해서 얻는 것도 있지만, 잃게 되는 것 또한 만만치 않다. 그래서 인간은 되도록이면 고난을 피하는 것이 좋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은 사실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고난은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은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고난이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고난을 당하면 사람들은 대개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원인을 자꾸 묻곤 한다. 특별히 기독교인들은 고난이 닥치면 신앙이 위축된다. ‘내가 뭐 잘못했나?’ 영락없이 죄책감에 휩싸인다. 그리고 모든 고난을죄의 문제로 치부하며, 결론을 회개로 이끌어 간다.

 

사실 신앙인의 입장에서 이것만큼 고난의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고난이 닥쳤을 때 무조건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시고, 이 고난을 거두어 주시며, 제게 다시 당신의 은총을 허락하옵소서하면 오히려 겸손해 보이고 신앙심도 좋아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고난을 정당하게 이겨내는 방법이 아니다. 이것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을 이겨내는신앙적인방법 같으나, 깊이 들여다보면, 고난의 문제를 살짝 비켜가는 처세술에 불과하다.

 

한 번 자신에게 질문해 보자. 인생을 살면서 맞닥뜨린 고난 중,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진실로 만난 적이 있는지를. 위의 회개의 기도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께 아부해서 지금 당하는 고난에서 빨리 벗어나기만을 바라는 얄팍한 수사적 표현일 뿐이다.

 

그렇다면, 고난을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욥기에서 배운다. 욥기는 우리를고난을 진지하게 대하는 영성의 세계로 인도한다. 고난을 당했을 때 가볍게회개기도를 통해서 고난을 넘기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온 존재를 다해 직면해서 그 고난에 임재하고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영성을 가르쳐 준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고난은 쓰레기에 불과하다.

 

욥기에 나타나고 있는 고난의 영성은 대게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고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고난을 직면한다는 것은 현재 나에게 일어난 고난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다. 대게 사람들은 자신에게 고난이 닥치면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하면서 고난을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고난을 겪으면서도 더 이상의 진전 없이 마음만 상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기서 속으면 안 된다. 우리는 고난을 겪으며 마음만 상한 상태로 그 고난을 시간 속에 묻어 둔 채 사는 것을산전수전다 겪은 양 생각한다. 그 자체로 어느 정도의유익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고난의 기억은 나의 인생의 에너지가 되지 못하고, 그림자만 될 뿐이다. 그러므로, 고난을 겪을 때 우리는 온 몸을 다해서 그 고난을 우리 인생에 수용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을 억누르지 않는 것이다. 고난은 엄청난 에너지를 소진하게도 하지만, 엄청난 에너지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 에너지가 바로 분노의 에너지다. 분노를 잘 다스리지 못하면 이는 필경범죄로 이어진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범죄의 대부분은 인생의 고난에서 생성된 분노의 에너지를 잘못 다스려서 생긴 것들이다.

 

그렇다면 고난으로 생성된 분노의 에너지를 어떻게 해야 건전하게 풀 수 있는 것일까? 이 세상에서 고난의 분노를 받아줄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분노해야 한다. 신앙인은 이것을 잘하지 못한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서 분노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분노를 엉뚱한 데가 풀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범죄자가 된다.

 

고난의 분노를 하나님을 향해 푼다는 것은 하나님께 자신의 상황을 그대로 탄원하는 것을 뜻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대한 자신의 분노를 숨기지 않으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그리고 오히려 자기를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은 용서하셨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이들은 자기들이 지금 무슨 죄를 저지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노와 좌절감의 표현을 방향 없이 허공에 또는 애꿎은 이웃에게 하지 말고, 하나님께 향하여 해야 한다.

 

세 번째 단계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고난을 삶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고난의 분노를 하나님을 향해 풀었다면, 이제 그 고난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을 만날 차례다. 왜냐하면, 고난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욥의 고백은 옳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욥기 2:10).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고난을 통해 겪는 고통이 가라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고난에 의해서 생성된 분노와 좌절의 에너지를 선한 것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뿐이시다.

 

욥은 오늘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고난에 의해서 생성된 분노와 좌절의 에너지를 선하게 바꾸는 단계에 다다른 것이다. 고난을 이겨내는 마지막 단계에서의 고백은 공교롭게도 자기 자신의 무지에 대한 고백이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42:3).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고백의 속성이다. 이 고백은 패배자로서의 고백이 아니라, 깨달은 자로서의 고백이다. 고난을 회피한 자의 고백이 아니라, 고난을 자신의 온 존재로 맞닥뜨린 자의 고백이다. 그렇다면 이 고백을 통해서 욥이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이 고백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창조주되심에 대한 인정이 들어 있다. 즉 고난의 문제는 신비로운 창조 주권 차원에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차원에서 들여다 보아야 해결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욥에게 인식의 전환이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인식의 전환은 이렇게 표현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

 

이는 풍문으로만 하나님을 알다가, 고난을 거치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하게 인식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틀이 바뀐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좀처럼 바뀌지 않는 것이다. 가치의 전환은 그렇게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 여러분은 무엇에 가장 큰 가치를 두고 살아가시는가? 한 번 생각해 보시라. 그것이 잘 바뀌지 않을 것이다. 돈에 가장 큰 가치를 두고 사시는 분은 무엇을 해도 돈만 보일 것이다. 그것을 중심으로 삶을 꾸려나갈 것이다. 건강에 가치를 두신 분은 건강을 중심으로 삶을 꾸려나갈 것이다.

 

욥은 고난을 통해서 이제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틀이 바뀐 것이다. 이제 욥은 세상을 하나님이라는 창문을 통해서 바라본다. 그래서 그는 마음을 바꾼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42:6). 여기서 회개는 히브리어 나함이라는 단어인데, 이는 마음을 바꾼다는 뜻을 담고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회개와 조금 다르다. 만약 욥이 통상적인 회개, 즉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의미에서 죄를 인정했다면, 이는 전체적으로 모순에 빠진다. 욥에게 닥친 고난은 욥의 죄 때문이 아니었다.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라고 다그쳤지만, 욥은 거기에 저항했다.

 

여기서 욥이 하는 회개는 마음을 바꾸는 행위이다. 그동안 하나님에게 법정소송을 제기하거나, 탄식에 빠져든 자신의 마음을 바꾸기로 결심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아픔을 훌훌 털어버리고 자신의 일상으로 되돌아갈 준비를 했다는 뜻이다. 어려운 일 당한 사람들의 특징은 마음이 그 어려운 일에 가 있기 때문에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삶이 비뚤어지고 어긋나고 파탄에 이른다. 그러나 욥은 그러한 상태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일상으로의 복귀를 결정한 것이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 자의 중대한 삶의 변화이다.

 

하나님은 욥의 편에 서셔서, 오해를 회복시켜 주시고, 명예를 회복시켜 주시고, 삶을 회복시켜 주신다. 우선 엘리바스, 빌닷, 소발을 꾸짖으시며, 욥을 제사장 삼아 속죄할 것을 명령하신다. 친구들에게 정죄 당하던 욥이 하나님에 의해서 친구들의 속죄를 담당하는 중재자(제사장)가 된 것이다.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게다가 하나님께서는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주신다.

 

하나님을 만난 자리에서는 언제든지 화해가 일어나고 생명의 회복이 일어난다. (하나님을 만났다는 지표!) 이것이 참 놀라운 역사이다. 우리는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봤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세상의 분노와 좌절이 절정에 다른 자리이다. 분노와 좌절의 끝은죽음이다. 죽음은 부정적인 에너지의 끝이다.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이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과의 조우가 일어났다. 그것의 결과는 부활이 일이었다. 부활은 화해와 생명의 메시지이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곳에 일어나는 놀라운 은총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한다. “고난은 의식의 시작이다.” 고난을 통해서 무엇을 의식하기 시작할 것인가? 바로 하나님이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의식하지 못하면 그 고난은 그냥 형벌로 남겨질 것이고, 그림자 같은 상처만 남길 뿐이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의식하는 자는 고난을 통해 거듭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욥기에서 바로 이것을 봤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도약이다. 고난을 통해 이러한 신앙의 도약이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지 않는다면, 고난으로 가득 찬 우리의 인생은 허무에 빠질 수 있다. 허무한 인생을 살라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고난을 통해서 당신을 의식하기 원하신다.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길 원하신다. 고난을 통해 당신을 만나 더 풍성한 은혜, 화해와 생명의 은총을 누리기 원하신다.

 

고난을 은근슬쩍 회피하지 마시라. 온 존재를 다해 맞닥뜨리시라. 고난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시라. 신앙의 도약을 이루시라. 그것만이 인생을 새롭게 하는 능력임을 믿으시라. 아멘.

 

 

Posted by 장준식

아무것도 얕보지 말라

 

곳곳마다 들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들꽃의 정체는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꽃을 피우는 절기 이외에는 그 정체를 알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체를 알아보기 힘들다기 보다는 자신의 정체를 잡초로 위장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평소 우리는 그것이 잡초라고 생각하기에 뽑고 또 뽑아 그 씨를 말려버리려고 합니다. 잔디 깎는 기계로 깎아대고, 잡초를 죽이는 화학약품도 뿌려봅니다. 그런데도 어김없이 봄이 오면 고개를 쑥쑥 들어대는 들꽃을 보면 차라리 신비롭습니다.

 

 

요즘 이곳 저곳을 다니다가 보게 되는 들꽃 때문에 오가는 길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즐겁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미안한 마음도 갖습니다. 평소에는 전혀 생각도 안 하다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때만 관심을 가져주니 말입니다. 올 해부터는 들꽃에 관심을 좀 가져야겠습니다. 관심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내년 봄에도 어김없이 흐드러지게 피어날 들꽃을 기다리는 마음을 갖는 것이지요.

 

푸른 하늘만큼, 시원한 바람만큼, 따스한 햇살만큼 요즘 저에게 기쁨을 주는 들꽃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를 얕보지 말라." 그렇습니다. 이 세상 어느 것도 얕봐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솔로몬의 영화도 저 들에 핀 꽃들보다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들꽃처럼 소소한 것에도 하나님의 숨결이 숨어 있음을 아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영성일 것입니다.

 

오늘 집으로 돌아가면서 눈에 들어노는 들꽃을 물끄러미 바라 보십시오. 제가 들꽃으로부터 들은 목소리가 들리나 안 들리나 한 번 확인해 보시죠. "아무 것도 얕보지 말라."는 세미한 음성이 들리는 신비로운 일이 여러분의 귓가에 펼쳐지기를 두손 모아 빕니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6. 3. 11:43

2013 6 2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왕상 17:8-24, 7:11-17

제목: 당신은 선지자입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과 신약의 두 본문은 매우 비슷한 내용을 전해줍니다. 비슷한 두 본문의 내용을 가지고 우리는 어느 시각에서 본문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존재가 바뀌게 됩니다. 첫째는 우리가 과부의 입장이 되는 겁니다. 과부의 입장에서 오늘 본문을 바라보면, 우리가 살면서 하나님만 끝까지 붙들면 우리의 삶을 돌보시고 채우시는 은총을 체험하게 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둘째는 우리가 엘리야와 예수님의 입장이 되는 겁니다. 엘리야와 예수님의 입장에서 오늘 본문을 바라보면,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어디에 있든지 어디를 가든지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내고 있는 교회력은 성령강림절 후 두 번째 주일을 가리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총의 역사가 모두 이루어진 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부의 입장보다는 엘리야와 예수님의 입장에서 오늘 본문을 바라보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끊임 없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과부처럼,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하나님 외에는 붙들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심령이 가난한 자, 또는 그냥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단장의 마음, 이 창자가 끊어지도록 아픈 마음으로 간절히 하나님의 은총을 사모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외에 붙들 수 있는 것이 너무도 많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이 입술에서 감사가 사라졌습니다. 풍요로움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보지 못하고, 풍요로움으로 오히려 하나님을 가려버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 본문은 오히려 엘리야와 예수님의 시각으로 살펴야 합니다.

 

우리의 시대는 시돈과 같은 시대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명하여 시돈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시돈은 바알숭배의 중심지요, 예루살렘과 대비되는 이방인의 도시였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더러, 그곳에 가서 살라고 하십니다. 돈이, 풍요로움이 세상을 지배하는 우리 시대와 다를 바 없는 곳이 바로 시돈입니다. 돈을 벌어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 돈을 벌어 내 욕심을 모두 표현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까지도 팔아먹고 자기의 탐욕스러운 삶을 지지해 줄 수 있는 것을 신으로 모시고 사는 시돈과 우리 시대는 닮아 있습니다. 바로, 그런 곳에 들어가서 살라고 엘리야를 부르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 시돈과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참으로 재미 있으신 분입니다. 시돈과 같은 이방 도시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보내주신 후원자가, 사르밧 과부였다는 겁니다. 우리 상식 같으면, 엘리야를 이방 도시에 보내시면서 든든한 후원자,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팍팍 밀어줄 수 있는 든든한 후원자를 붙여 주시는 것이 도리에 맞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텐데, 하나님께서는 사르밧 과부를 엘리야의 후원자로 붙여 주십니다.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고대 사회에서 고아와 더불어 과부는 약자 중의 약자였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는 고아와 과부를 착취하지 못하게 하는 율법이 명시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약자 중의 약자인 과부 중에서도, 오늘 말씀을 보니까 더 약자인 과부를 엘리야의 후원자로 붙여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약자여도, 끼니를 그나마 대충 때울 수만 있다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숟가락 하나 그냥 더 얹어서 먹으면 되니까요.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붙여준 과부는 오늘을 마지막으로 식사를 하고, 이제 굶어 죽을 처지에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상황이, 이것 먹고 자살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게 마지막 음식이니까 이것 먹고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상황이 이런 사람한테, 엘리야의 요청은 참으로 어이 없어 보입니다.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무슨 조직 폭력배도 아니고, 힘 없는 어린 아이 삥 뜯는 동네 깡패도 아니고, 이제 마저 남은 한끼 식사 하고 굶어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에게 그것 마저 내놓으라니요?

혹자는 이 본문을 가지고,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주님의 종을 잘 대접해야 축복 받는다는 이상한 이야기를 합니다. 주님의 종을 잘 대접해서 나쁠 건 없지만, 오늘 본문은 그것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에게 어이 없는 요청을 한 것일까요?

 

이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열왕기에 흐르고 있는 전체적인 맥락을 봐야 합니다. 사르밧 과부의 형편과 매우 대조되는 본문이 열왕기상 4:22, 23절에 나옵니다. 바로 솔로몬의 식탁이 얼마나 풍성했는지에 대한 본문입니다. “솔로몬의 하루의 음식물은 가는 밀가루가 삼십 고르요 굵은 밀가루가 육십 고르요 살진 소가 열 마리요 초장의 소가 스무 마리요 양이 백 마리이며 그 외에 수사슴과 노루와 암사슴과 살진 새들이었더라.” 어떻습니까? 사르밧 과부가 지니고 있었던 한 움큼의 밀가루와 약간의 기름과는 너무도 다른 식사 풍경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솔로몬은 축복 받았고, 사르밧 과부는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 반대입니다. 솔로몬은 이러한 풍요로움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점점 잊어 갔습니다. 위에서 예기한 것처럼, 풍요로움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점점 타락해서 풍요로움으로 하나님을 가려 버리고,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알다시피, 솔로몬 왕 이후에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우상숭배의 징벌로, 하나님께서는 팔레스타인 지역 전역에 가뭄을 내리십니다. 그 가뭄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던 사람이 바로, 사르밧 과부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사르밧 과부가 살고 있는 시돈은 바알숭배의 중심지였으므로, 이 상황이 주는 메시지는 굉장히 큽니다.

 

농경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입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농사는 망칠 수밖에 없습니다. 적절한 비는 농사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이들이 바알을 숭배한 이유는 바알이 비를 내리고 멈추는 것을 주관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현상을 보고, 옛날 사람들은 참으로 멍청하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무엇을 섬기느냐, 대상만 다르지 그 근본적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요즘에 세상을 주관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돈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본산인 미국이 특히 그렇습니다. 돈이 되지 않는 것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않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상품 가치로 봅니다. 돈이 될 만한 사람에게만 투자합니다. 돈이 안 된다 싶으면, 이제 더 이상 상품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면 쓰레기 버리듯 버려 버립니다.

 

남의 이야기 할 것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여러분이 운영하는 비즈니스를 찾는 손님들을 여러분은 무엇으로 보입니까? 그들을 Sir, ma’am, 이라고 보통 부르는데, 진짜 그들이 Sir이고 ma’am이어서 그렇게 부릅니까? 바꾸어서, 우리가 어느 상점에 갔을 때, 그들은 우리에게 Sir, ma’am 하고 부릅니다. 그들이 정말 우리를 Sir로 생각하고 ma’am으로 생각해서 그렇게 부른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손님이나, 우리 자신에게 Sir, Ma’am 하고 부르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를 보여드리고자 할 뿐입니다.

 

우리 시대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에서 Sir, Ma’am은 인격적인 언어가 아니라, 비인격적인 언어, 그저 돈이 매개가 된 사무적인 언어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인식하든 인식하고 있지 못하든, 그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알숭배에 자신들도 모르게 빠져들었듯이, 우리도 돈(맘몬)숭배에 우리들 자신도 모르게 빠져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엘리야라는 한 선지자가 한 일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오늘 똑똑히 보아야 합니다. ‘사르밧 과부여, 당신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 지도자의 잘못이요, 당신의 지도자들과 당신이 믿고 있는 바알이 이 세상의 주관자가 아니요 당신을 먹고 살게 해주는 신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세상의 주관자시요 당신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인 줄 아시오!” 이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선지자, 엘리야가 어떻게 사르밧 과부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에서 보이듯이, 비를 내리는 분은 누입니까? 바알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입니까? 가루와 기름을 공급하시는 분, 생명을 주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바알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입니까?

 

어떠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게 하시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게 하셨을까요? 가루와 기름이 막 스스로 불어났을까요? 사실, 이건 하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그렇게 역사할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미신입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큰 축복 중의 하나가 뭔지 아십니까? 수고한대로 소출을 거두는 것입니다. 내 손과 발이 아무리 힘써도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거둘 수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공부 열심히 해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시면 공부한 만큼의 결실을 맺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사르밧 과부에게 아들이 있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아마도 아들이 수고한 대로 그 손에 가루와 기름을 쥘 수 있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을 겁니다. 내가 수고한 대로 내가 먹고 살 수 있는 것은, 내 수고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거기에 임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면 감사하게 되는 거고, 이것을 모르면 내가 수고 해서 번 돈 가지고 내 마음대로 쓰는데 뭐가 잘못이야하면서 자신의 욕망만 드러내게 됩니다.

 

상황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가루와 기름이 떨어져 굶어 죽게 된 상황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이 사르밧 과부에게 발생합니다. 가루와 기름의 공급원이었던, 사르밧 과부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그의 아들이 죽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제는 정말 죽게 되었습니다. 이제 살아갈 이유도 없어졌습니다. 살 소망이 없는 것이죠. 엘리야에게 한 사르밧 과부의 원망에서 그것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한계를 정해 놓고 하나님을 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까지는 내가 하나님을 믿겠는데, 여기를 넘어가면 하나님은 더 이상 없는 거야!’ 사르밧 과부에게 신앙의 믿음의 마지노선은,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이 죽게 되자, 사르밧 과부는 돌변합니다. 절망합니다. 흔들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우리에서 발견되는 신앙의 한 형대입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정해놓은 신앙의 마지노선은 어디까지 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신앙에는 마지노선이 없습니다. 그 끝이 없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그 끝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 문구를 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이 문구를 보고,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 우리 신앙의 마지노선은 죽음까지야! 이 정도 마지노선을 생각하고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은 그나마 참 괜찮으신 분들입니다. 그런데, ‘죽도록 충성하라, 죽기까지 순종하라라는 말들은 단순히 죽음까지만의 한계를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 다 바쳐서 그리고 죽음 이후에까지, 영원히 하나님을 신앙하라 믿으라는 뜻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이 상황을 아주 잘 말해주고 있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계신다면 나는 지옥에 가겠다.” 끝까지 예수님 붙들겠다는 말입니다. ? 지옥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한다기 보다, 예수님이 안 계신 곳이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어디든지, 예수님이 계신 곳이라면, 그곳이 아무리 지옥과 같은 곳이라도,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천국입니다.

 

하나님을 놓는 순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믿음을 져버리는 그 순간, 그곳은 바로 지옥이 되는 겁니다. 사르밧 과부에게 지옥의 순간은, 아들이 죽었을 때 하나님을 놓아버린 바로 그 순간입니다. 아들이 죽었다는 그 사실이 지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렸다는 그 사실이 지옥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선지자, 엘리야는 지옥으로 변한 사르밧 과부의 삶을 천국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죽은 아들을 살게 한 것입니다. 죽은 것을 살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선지자가 하는 일입니다. 이 일로 인해 사르밧 과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바알이 생명을 주는 신이 아니요, 그것은 우상에 불과하고, 참 하나님, 생명을 주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초점을 엘리야에게 맞추어서 오늘 본문 말씀을 이해해 보십시오. 성령강림절 후, 성령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너무도 메시지가 분명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엘리야와 같은,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선지자로 부르십니다. 우리를 선지자로 부르셔서, 시돈과 같은 바알숭배, (맘몬)숭배가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살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살되, 바알숭배자로, (맘몬)숭배자로 이방인으로 살지 말고, 엘리야처럼 하나님의 분명한 축복의 통로가 되는 선지자로 살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참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는지 증거하는 선지자로 살라고 부르십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이 사르밧 과부처럼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여 나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는 귀한 사람입니다. 내 비즈니스를 찾아주는 손님은 내 욕망의 주머니를 채워주는 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천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주께 하듯 해야합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내 비즈니스를 찾아주는 손님은 내 돈벌이의 수단이 아니라, 내 섬김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섬겼는지,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서를 잘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나인성 과부의 슬픔에 동참하셨습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축복의 통로인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향해 불쌍히 여기는 이 마음이 꼭 있어야 합니다. 양심에 화인 맞은 것처럼, 나만 배부르면 그만이라는 무관심이 아니라, 저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할 줄 아는 긍휼함(Compassion)이 마음에 꿈틀거려야 합니다.

 

그리고, 위로의 말을 건넬 줄 알아야 합니다. “울지 말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물질에 굶주린 시대가 아니라, ‘위로에 굶주린 시대입니다. 그냥 한 없는 위로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들 왜 위로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나도 위로 받고 싶은데, 나한테 무슨 위로할 힘이 있다고 내가 저 사람들을 위로해 주나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위로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러한 힘이 있는 데서 위로하면 그것이 무슨 위로입니까? 동정이지요? 위로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위로하는 것이 위로입니다. “긍휼이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먼저 위로하십시오. 죽을 힘을 다해 먼저 위로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갑절의 위로를 주실 것입니다.

 

죽은 것과 같이, 소망이 없는 곳에서 생명을 심는 거룩한 일을 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관을 만지는 수고로움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율법에 관(시체)를 만진 사람은 부정한 사람이 됩니다. 그런 것을 깨면서까지 소망 없는 곳에, 죽음이 있는 곳에 생명을 불어 넣으신 분이 우리 예수님입니다.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우리는 우리의 체면 때문에, 내 성격 때문에, 관습 때문에, 어떠한 이유에서든 수고로운 일을 피하려 하고, 자신에게 불이익이 될만한 일을 절대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고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성령 받은 선지자라면, 수고로움을 마다하거나 겪게 될지 모르는 불이익 때문에 소망을 심는 일, 생명을 심는 일, 덕을 세우는 일을 피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긍휼과 위로, 수고로움을 통해 모든 사람이 무슨 고백을 하는지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사는 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 앞에, 이 사명 앞에, 당신은 정말 선지자입니까?

Posted by 장준식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미주연회의 파행을 돌아보며

 

전쟁은 시작만 있고 끝이 없다.”는 말은 진실일까? 미주연회의 파행을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21회 미주특별연회에서는 푸르른 5, 그리고 천사의 도시(Los Angeles)에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믿기 힘든 일이 연출되었다. 차라리 연회 전날 있었던 엘에이 다저스의 경기에서 류현진이 완봉승 하는 것을 구경했다면 비행기 값이 아깝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무엇인가? 이런 이전투구를 보려고 비싼 비행기 값을 지불하고 동부에서 서부로 날아갔던가!

 

1936, 우리 나라가 일제에 의해 유린당하고 있을 때, 스페인에서는 내전이 일어났다. 이때 일어난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씌어진 유명한 두 개의 소설이 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가 그것이다. 언론기관에 몸담았던 이력이 같은 두 사람은 스페인 내전을 생생하게 목도한 뒤, 그것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특별히 헤밍웨이의 소설은 1943년 게리 쿠퍼와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어 널리 알려져 있다.

 

헤밍웨이나 오웰이나 그들의 소설에서 그들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어 가는 인간성의 문제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영화로 본 사람들은 주인공들의 사랑 이야기에 눈이 가겠지만, 헤밍웨이는 실제로 그 영화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소설에서 그려진 정치에 대해서 영화가 온전하게 그려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모든 것이 죽음으로 치닫는 전쟁의 상황 속에서 울리는 종은 조종(弔鐘)’이다. 그러나 그 종소리는 남을 위한 종소리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종소리이다. “누구의 죽음이든 나의 일부를 소멸시키니, 그것은 나 또한 인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알려고 하지 말지어다. 종은 그대를 위하여 울린다.”

 

나는 제21회 미주특별연회에서 인간성의 파괴를 보았다. 그리고 파시즘을 보았다. 헤밍웨이와 오웰이 스페인 내전에서 본 바로 그것들이다. 솔직히 목사로서의 품위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연회는 계급장 내려 놓고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 물불 가리지 않고 싸울 수 있는 합법적인 장소 아니던가! 그러나 어떠한 게임이든지, 그것이 파워게임이라고 할지라도 법칙은 있는 법이다. 그것이 깨지면 이미 인간성은 허물어진 것이다. 논리와 명분이 없는 고성방가욕설과 비난은 이미 상대방을 악으로 환원시킨 인간성의 상실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그것을 보았다. 게다가 고성이 오가는 사이에 번져 나온 파시즘을 보았다. 파시즘이 무엇인가? 국가, 민족, 인종이 개인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찬양하는 사상이다. 욕설이 오가는 사이에 어떤 이가 이런 말을 내뱉었다. “감리교는 연급이야! 너 이 XX 몇 학번이야!”

 

인간은 인간성을 상실했을 때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사상이 저도 모르게 입이나 행동으로 튀어나오는 법이다. 명분이 부족한 탄핵이나, 서로 욕설을 해대며 멱살을 잡는 것이나, ‘감리교는 연급이야!’를 외치는 말과 행동은 감리교에 몸담고 있는 목사들의 사상이 얼마나 파시즘적인가를 알려주는 지표다. 국가, 민족, 인종이 우위에 있다는 생각에 개인(인간)의 자유를 철저하게 짓밟았던 파시즘의 병폐가 감리교 목회자들 사이에 팽배해 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회의는 전반적으로 가부장적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여성 목회자에게, 그리고 소위 연급이 안 되는 젊은 목회자들에게는 발언권 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아니, 파시즘이 판을 치는 회의장에서 여성 목회자나 연급안 되는 젊은 목회자가 입을 열었다가는 생매장 당할 분위기였다.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위험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계속 배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즉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21회 미주특별연회는 이번 10월에 열리는 입법총회에 두 개의 미주 선교연회 존립에 대한 입법안을 상정할 것을 결의하고 끝이 났다. 무엇을 위해 미주연회는 둘로 나누어져야 하는가? 차라리 이념싸움이나 교리논쟁 때문이라면 부끄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위에서 말하는 첫 번째 방법을 택하는 일과 같다. 미주연회에 존재하는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을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결의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옥 같은 세상을 지옥처럼 살면 지옥이 보이지 않을 테니까!

 

연회가 끝난 다음 날 후배 목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벌써부터 줄 똑 바로 서라는 메시지가 왔다는 것이다. 어느 후배의 페이스 북에는 어쩌면 내년부터 못 만나게 될 동료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담긴 글이 남겨져 있었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싸우고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헤밍웨이와 오웰이 소설 속에서 그리고 있는 스페인 내전의 인간성 상실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스페인이 겪은 상처가 무엇인지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스페인 내전이 프랑코파의 승리로 일단락 지어졌지만, 이미 50만명 이상이 희생되었고, 그 후에 자행된 독재와 대대적 숙청은 인간성 상실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한 때 전세계를 호령했던 스페인, 그러나 그 내전으로 인한 상처 때문에 국제사회에서의 스페인의 국력은 지금까지도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전쟁은 뫼비우스의 띠와 같아서 끝나지 않을뿐더러, 스스로 멸망하는 지름길에 불과하다. 적어도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면, 그리고 적어도 우리가 목회자라면, 또한 우리가 감리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이 순간 잠시 멈춰 서서 십자가의 도를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미주연회는 분단의 아픔을 봉합하지 못하고 '합법적으로 나누어지는 것을 결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적어도 법을 만드는 힘을 지니신 분들은 입법총회에서 어떤 종소리를 울리게 할 것인지 심사숙고해 주시기를 부탁 드린다.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어 그것들에 공간을 부여'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 드린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우리 미주연회에 울리는 종소리가 '조종(弔鐘)'이 아니라, 그 옛날 온 동네에 울려 퍼졌던 생명의 종소리, 교회 종소리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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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