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5. 27. 04:03

2013 5 26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학개 1:1-15

제목: 황폐함을 보라!

 

서울 가신 오빠가 나를 사랑한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비단구두이다. 그러면 내가 오빠를 사랑한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비단구두를 사가지고 오실 거라는 그 마음, 간절히 기다리는 그 믿음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십자가로 대표된다. 십자가를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하는 증거는 무엇인가? 십자가 목걸이 하고 다니면 되는가? 교회 안 빠지고 열심히 다니면 되는가? 헌금 많이 하면 되는가? 봉사 열심히 하면 되는가? 착한 일 많이 하면 되는가? 아마도, 그것은 각자마다 다 다를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신다는 증거는 성전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 또한 성전이었다. 성전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율례대로 제사 드리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학개 선지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그러는 것일까?

 

학개서의 배경은 포로귀한 이후이다. 바벨론에 의해서 유다는 망하고, 모든 백성이 흩어지고 고관들은 포로로 잡혀갔다. 이들은 하나님께 범죄했다는 생각 때문에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회복해 주실거라는 소망 가운데 살았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포로생활을 한지 70년 정도가 지나서, 바벨론이 페르시아에게 망한 뒤, 고레스 칙령에 따라 유다 백성들은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것이 BC 537년의 일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17년이 지난 BC 520년에 일어난 일이다. 포로 귀환한 지 17,8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이들이 처음 포로 귀환했을 때, 의욕을 가지고 성전을 재건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여러 난관에 부딪혀 성전 재건의 사역을 손 놓는다. 그리고 성전 재건에 관한 생각을 이렇게 가졌다.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2). 여기에는 이러한 숨은 뜻이 들어 있다. ‘자신들은 성전 재건을 해보려고 했는데, 방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성전 재건을 못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그러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외부의 요인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것이다.’ 이런 것을 심리학적 용어로, ‘핑계라고 하는 거다. 그러면서 이들은(바벨론에서 귀환한 사람들) 성전을 재건하는 일보다 자신들이 거주할 집을 짓는 일을 더 우선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만약 이들의 판단이 옳았다면 이들의 삶은 풍요로워졌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신의 집을 먼저 세우려 했던 이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일을 간섭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잠시 멈추고, 이들은 이들의 삶을 되돌아 보아야 한다. 학개 선지자는 이 상황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5).

 

성전 재건의 일을 뒤로하고, 당장 먹고사는 문제와 자기 집을 짓는 일이 더 시급하다고 생각한 이들의 삶을 한 번 보라. 6절 말씀을 좀 쉬운 성경으로 그대로 읽어보자. “너희는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했으며,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품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돈을 넣음이 되었다.” 농사일과 집 짓는 일에 온 정성과 마음을 쏟아 부었는데, 그들은 기대했던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이럴 때 삶에 패닉이 온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학개 선지자는 다시 한 번 말한다. “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Consider your ways.”(7).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시무 레바르켐알 다르케켐)”(7). ‘심 레바르는 문자적으로, ‘마음을 두다’, 즉 대상에 마음을 기울여 주의하고 생각하는 행위를 표현한 것이다. ‘다르케켐은 문자적으로, ‘너희의 길들에인데, 이것은 삶의 여정이나 행동 방식 등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말은 그들이 걸어가는 길과 삶의 방식, 현재 그들이 살아가면서 취하는 행동들 전반을 포함하는 표현이다. 멈춰 서서 자신의 삶을 좀 진지하게 돌아보라는 뜻이다. 왜 이럴까? 왜 이렇게 만족이 없을까? 왜 이리 평안하지 못할까? 왜 이렇게 풀리지 않을까?

 

어려움을 겪고 있는 포로귀환 공동체에게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해법을 주신다. 8절 말씀이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8). 그냥 겉에서 보기에는 굉장히 간단한 처방이다. 성전만 재건하면 된다! 이렇게 쉬운 것을 왜 이들은 17,8년 동안이나 하지 않고 있었을까?

 

겉보기에는 그래도,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성전 재건을 방해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자신들의 마음 또한 성전 재건이 우선 순위가 아니었다. 마음도 없을 뿐더러, 마음에도 없는 일을 하려는데, 방해까지 심하다면, 당연히 그 일 하기는 힘들어지는 거다. 마음에도 없었는데, 마침 그 일을 하는데 방해되는 것이 나타나면, ‘아 잘 됐다! 그냥 핑계 대고 그만 둬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연약한 마음이다. 교회 오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었는데, 마침 자동차 시동이 안 걸리면 우리는 대뜸 마음에 핑계가 생깁니다. ‘내가 안 갈려고 그랬던 것은 아니고, 자동차 시동이 안 걸려서 못갔어!’

 

여기서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 ‘, 성전만 건축하면 만사 OK이구나!’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읽으니까, 신앙의 발전이 없는 거다. 이것은 철저하게 고대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에서 해석해야 한다. 이들에게 성전은 무슨 의미, 무슨 상징인지 살펴야 한다. 이들에게 성전은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다. 아주 실재적인 문제였다. ‘성전이 있고 없고는 아주 실재적인 문제였다. 다른 말로 해서, 지난 17,8년 동안 이들에게 성전이 없었다는 것은 이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요즘 말로 옮기면, 이들은 없이 17,8년 동안이나 산 것과 똑같다. 17,8년 동안 돈 없어서 홈리스로 살았다고 생각해 보라. 이들의 삶이 얼마나 피폐했겠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이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삶이 그렇게 피폐했음에도, 왜 그랬는지 그 문제의 근원을 몰랐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삶의 황폐함이 안 보였다는 것이다. 서서히 뜨거워지는 물에 들어간 개구리는 자신의 운명을 잘 알지 못한다. 자신의 처지를 눈치채지 못한다. 그냥 물 속에서 놀기 바쁘고, 숨쉬기 바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뜨거워진 물에 인생을 마감하고 만다.

 

개구리에게 필요한 것은 잠시 멈추고 주변을 살피는 것이다. 뭔가 좀 이상한데?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Consider your ways!”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포로귀환한 유다 백성들에게 성전 건축을 재개하라고 부르신 때는 이들이 한가하게 놀고 있을 때가 아니다. 곡식들이 한창 자라나는 시기였다. 굉장히 바쁜 시기였다. 지금 당장 하는 일을 멈추면 굶어 죽게 될지 모르는 그런 시기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것은 밑 빠진 독에 물붓기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너 자신을 한 번 되돌아 보아라!’

 

사실, 하나님의 말씀도 중요하지만, 오늘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유다 백성들의 반응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즉각 반응한다. 14절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모든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공사를 하였으니…”

 

이들은 예전에 안 그랬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지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감동을 못받았다. 예레미야가 그렇게 목에 피가나도록 외쳤지만, 이들은 오히려 예레미야를 잡아 가두고 예언을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다. 그런데, 포로생활을 겪고 돌아온 이들의 반응은 달랐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두려움이 있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변화이다.

 

예수를 믿기 전과, 예수를 믿은 후의 삶 중 달라져야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다. 예수 믿기 전이나, 예수 믿은 후나,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동일하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다르다. 예수 믿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콧방귀를 꼈는데, 예수 믿은 후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는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으시는 분들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실 줄로 믿는다. 예수 믿은 후에도 정신 없이 살다 보면, 무엇이 우선 순위를 가져야 하는지 헷갈리고 놓치는 경우가 있다. 성건 재건을 방해했던 도비야 같은 요소가 우리 삶을 둘러 싸고 있다. 그것과 싸우다 보면 정신 없다. 정신 못 차린다. 당연한 거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삶에 어려움이 닥쳤을 때 잠시 멈추고 자신의 행위를 진지하게 되돌아 볼 줄 아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대개 정신 차리고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멀리 뭍에서 떠나 있는 경우가 있다. 탕자처럼 아버지 집을 떠나서 허랑방탕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정신 차리고 배의 방향을 틀어서 뭍으로 돌아오면 된다. 그럴 때, 정신 차리고 발걸음을 돌려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면 된다.

 

자신의 삶에 너저분하게 널려 있는 황폐함을 좀 보시라. 육신의 황폐함, 정신의 황폐함, 마음의 황폐함, 관계의 황폐함, 경제의 황폐함 등, 잠시 멈추고 돌아보면 이랬나!’싶은 정도로 황폐해진 삶의 한 부분이 보일 것이다. 그럴 때, 우리를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란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5. 20. 05:59

2013 519일 성령 강림 주일(오순절) 예배 설교

본문: 2:1-4

제목: 믿고 기대하는 자에게 성령이 온다!

 

워싱턴에 가면 미국 국방성이 있습니다. 그 건물을 일컬어 펜타곤이라고 합니다. 건물의 모양이 오각형 모양으로 생겼기 때문입니다. Pente라는 말은 헬라어로 숫자 5를 나타내는데, 그래서 Pentecost라고 하면 오순절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 나라 말에서열흘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순절은 열흘이 다섯 번 지난 날, 즉 오십일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궁금해지는 것은, 무엇으로부터 오십일이 지난 날을 오순절이라고 했느냐 입니다. 거꾸로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오십일을 거슬러 올라가면 무슨 날인가 입니다.

 

이것을 좀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절기 문화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 중, 유월절과 초실절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것은 교회를 좀 다니신 분은 아실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유월절은 출애굽 사건과 관련이 있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가장 중대한 절기입니다. 모세가 애굽에 들어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나오기 위해서, 애굽의 바로 왕과 싸울 때 내린 열 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재앙이 장자 재앙이었습니다. 이것은 애굽에서 태어난 장자(첫째 아들, First Son)를 모두 죽이는 재앙인데, 이 재앙으로부터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은 어린 양의 피를 현관문 문설주에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신이 장자를 죽이러 돌아다니다가 어린 양의 피가 발라져 있는 문은 그냥 통과(Passover)했습니다. 이 마지막 재앙으로 인해, 애굽의 바로 왕은 모세의 요청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줍니다. 바로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 제정된 절기가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의 어린 양과 같이 예수님의 죽임이, 그의 피가 재앙으로부터 구원해 주었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을 유월절 어린 양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 절기에 맞춰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그냥 아무렇게나 진행되는 법이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 당신께서 제정하신 뜻에 따라서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듯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은 안식 후 첫날 새벽입니다. 이 날이 유대인 절기 상으로 무슨 날이냐 하면, 초실절입니다. 초실절은 묶어두었던 보릿단의 첫 열매를 거두는 날입니다. 이스라엘에는부분이 전체를 대표한다는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 중, 처음 것을 드림으로, 그 나중에 있을 모든 것을 대표한다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첫 번째가 중요했습니다. 장자 재앙이 무서운 이유는, 장자가 그 집안의 첫 번째 아들인데, 첫 번째 아들에게 재앙이 임했다는 것은 그 집안 전체에 재앙이 임한 것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초실절에, 처음 익은 보리를 베어서 하나님께 제사(소제)를 드린 이유는, 처음 열매를 드림으로 인해 이제 앞으로 계속해서 거두게 될 열매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비는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초실절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5 20절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두고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여기서 첫 열매는 초실절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기대하고 소망할 수 있습니까? , 바로 예수님처럼 우리도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겁니다.

 

오순절은, 바로 이 초실절로부터 오십일이 지난 날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오순절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길래, 굳이 이날, 다른 날도 아니고, 바로 이 오순절 날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주신 것일까요?

 

초실절로부터 시작된 보리의 수확은 밀의 수확으로 이어집니다. 밀과 보리는 이스라엘에서 나는 곡물로서, 동물 사료로 쓰이거나 가난한 농부들이 주로 먹는 중요한 양식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신명기 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들어가서 살게 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나는 식물들에 대한 설명을 해 주실 때, 일곱 가지를 말씀해 주시는데, 밀과 보리, 그리고 포도, 무화과, 석류, 올리브, 대추야자를 말씀하십니다. 밀과 보리, 이 두 가지의 곡식과 포도, 무화과, 석류, 올리브, 대추야자, 이 다섯 가지의여름 과실이 가나안에서 나는 것들로서 그들의 먹고 산 양식이었습니다.

 

이 양식들은 두 철에 걸쳐서 수확합니다. 밀과 보리의 수확을 시작으로, 밀과 보리의 수확이 끝나면, 이제 여름 과실의 수확이 시작됩니다. 오순절은 무슨 시기인가 하면, 밀과 보리의 수확을 마치고 여름 과실 수확을 기다리는 과도기의 시기입니다. 밀과 보리의 수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하고, 여름 과실의 추수로 이어지는 새로운 시기,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때가 바로 오순절인 것입니다.

 

, 그렇다면, 왜 오순절 날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셨는지 이제 이해가 됩니다. 유월절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 사역이 예수님의 승천으로 일단락 되고, 이제 새로운 시대, 성령의 시대, 교회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오순절에 성령님을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신학적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예레미야서 31 31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시겠다는 말씀으로 유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사건은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입니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던 시기가 바로 유월절 사건이 있은 지, 50일이 지나서 입니다. 그러니까, 오순절은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사건과도 관련이 있는 날입니다. 바로 그 날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내려 주셨다는 것은, 예레미야의 예언처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새로운 언약을 맺어 주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니까,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과의 새로운 언약을 맺어 주신겁니다. 그 언약의 매개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모세였던 것처럼)인 것입니다. 그 언약의 징표가 바로 성령님(십계명 돌판이었던 것처럼)이신 겁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오순절이 이르렀다고 하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오순절은 그냥 온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는 그냥 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하신 말씀, “너희가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하신 말씀이 성취된 거라는 겁니다. 이 성취의 개념은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약속하고 있는 성령이라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라든지, 부활이라든지, 하는 것들은 그냥 아무 때나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성취된다는 깊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취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성취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 편에서는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믿고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믿고 기다리는 것을희망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는 희망의 종교인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오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분명하게 성취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분명하게 성취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부활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분명하게 성취됩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선포하신 것은 꼭 성취되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때? 하나님의 때에!(이것이 카이로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걱정 근심을 하거나, 조바심을 낼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할 일은 그저 희망 가운데 하나님 주신 삶을 성령 충만하게 기쁨으로 살아가면 된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오순절, 성령 강림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성령 강림절이 무엇인지, 왜 성령님께서는 하필 오순절에 오셨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순절은 새 시대를 여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중대한 시기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철학적 용어 바꾸어 표현하면,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온 절기입니다. 우리가 교회력의 성령강림절(오순절)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오순절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이미 새로운 시대, 새로운 패러다임에 접어 들었습니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신 새로운 시대, 하나님께서 바꾸신 새로운 패러다임, 하나님께서 던지신 주사위는 그 누구도 바꾸거나 거둘 수 없습니다. 다문, 필요한 것은 결단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여신 이 시대, 이 새로운 패러다임, 새로운 언약에, 참여할 것이나 말 것이냐!

 

하나님의 새로운 시대, 새로운 언약에 참여하는 자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여신 새로운 언약의 시대,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이고, 참여하지 않는 자는 아직도 그 은혜를 모르고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죄 가운데 살아갈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시간, 어떠한 결정을 내리시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시작된 구원의 은혜에 동참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냥 은혜를 모른 채 살아가시겠습니까?

 

믿고 기대하는 자에게 성령이 옵니다. 왜냐? 우리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고, 우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의 어린 양이 되어 우리를 대신하여 (또는 대표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잠자는 자들 가운데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부분이 전체를 대표한다”. 이 원리는 우리 믿는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사상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표해서 죽었다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죽었다가 부활할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이것을 기대하십니까? 믿고 기대하는 자에게 성령님께서 임하실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자는 이 진리(우리도 예수님처럼 죽었다 부활할 것이다!) 가운데 살 것입니다. 이 소망 가운데 살 것입니다. 이 소망 가운데 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쁘고 즐겁고 복된 삶인 것입니다.

 

바로 오늘, 믿고 기대하십시오. 성령님께서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불의 혀처럼, 믿고 기대하시는 여러분에게 임하실 것입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5. 19. 05:44

2013 5 12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고린도전서 15:50-58

제목: 인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 IV – 부활을 살라!

 

요즘 인터넷에서 화제인 그림이다. <여자의 일생>이란 제목의 그림인데, 한 여인이 아기를 낳아 기르고 세상을 떠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확률 게임이다. 내가 태어날 확률이 얼마나 됐을까? 내가 결혼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내가 살다 사고를 당할 확률은 얼마일까? 내가 살다 암에 걸릴 확률은 얼마일까? 내가 살다 예수 믿을 확률은 얼마일까? 등 이 세상의 모든 일은 확률 게임이다. 그 확률이 0-100에 이른다. 세상을 살면서 일어나는 확률 게임 중, 100%의 확률을 지니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허상이 아니다. 죽음은 실체가 있는 대상이다. 지금 내가 눈으로 보고 있는 어떠한 대상보다 확실한 실체가 있는 대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평소에 이 대상을 전혀 눈여겨 보지 않는다. 실체가 없는 허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죽음을 선고 받으면 그때부터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죽음이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즐거운 학문>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죽음, 그리고 죽음의 정숙함이야말로 우리 미래에서 유일하고 확실하며 모두에게 평등하다! 이 유일하고 확실하며 평등한 사실이 인간에게 아무런 힘도 미치지 못한다니, 또 인간들은 자신이 죽음의 형제라는 사실을 느끼지 못한다니, 이 얼마나 괴이한 일인가!”

 

평소에 우리는 살아 있다라는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한다. 그래서 지루함, 권태로움, 괴로움 등을 느낀다. 그러나, 죽음의 문턱에 들어서면 그때 비로소 생명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우리가 죽음을 이야기 하는 이유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죽음을 이야기 하는 이유는 생명의 소중함을 알기 위해서다. ‘죽는다는 것을 가볍게 여기면서 인생을 막 사는 사람을 일컬어 우리는 망나니라고 한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실체를 인식하면서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사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성인이라고 불릴 수 있다.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현실에서 평상시와 다름없이 건강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건강하게 살다가 2-3일 앓고 떠나기를 바란다. 하지만 통계적으로 그런 최후는 많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도 막연히 마지막까지 정상인과 다름없이 살다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막상 그때가 닥치면 전혀 다른 현실에 배신 당한 기분까지 든다고 한다.

 

드라마 같은 곳에서는 죽을 때,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죽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런데,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현실 불가능 하다고 한다. 그것은 드라마이기 때문에 극적으로 그렇게 꾸밀 뿐이지, 현실 속에서는 그렇게 죽어가는 광경이 낭만적이지 않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 있을 때 죽음에 관해서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죽음을 잘 준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우리는 지난 3주 동안 인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죽음의 순간에 인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 보았다. ‘지금 당장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하라!’, ‘감정에 휘둘리지 말라!’ 그리고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시키지 말라!’는 주제를 가지고, 후회 없는 인생을 살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살펴 보았다.

 

오늘은 인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라는 제목의 마지막 말씀으로 부활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앞 선 세 번의 말씀은 특별히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고, 또는 실천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나눌 말씀은 기독교인만의 독특한 신앙에 관한 이야기이다. 죽음에 관해서는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주제이지만, ‘부활이라는 것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말하기 힘든 주제이다. 그만큼 부활이란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매우 독특한 신앙이라는 뜻이다.

 

기독교의 기원을 사람에게서 찾자면, ‘예수라는 인물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라는 인물은 2천 년 당시 유대 땅에서 매우 흔한 이름이었다. 메시아 사상이 팽배했던 그 당시, 모든 유대인들은 자신의 자식이 메시아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예수라는 이름을 많이 붙였다. ‘예수는 구약의 여호수아와 같은 이름으로,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메시아란 구원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므로, 팍팍한 삶의 현실 속에서 자신들을 구원해줄 어떠한 인물이 등장하기를 바라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심리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그 예수가 바로 메시아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사건이 있다. 그것이 바로 부활 사건이다. 기독교의 신앙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2천 년 전,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던 예수라는 사람, 나사렛에서 살다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라는 사람, 바로 그 사람에게서 일어난 어떠한 사건에 집중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다. 예수라는 사람에게 일어난 일은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없는 매우 독특한 사건이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단어는 십자가이다. 그리고 가장 흔하게 보는 조형물도 십자가이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십자가 사건을 기독교의 기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기독교 신앙을 깊이 있게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다. 십자가 사건이 중요해진 이유는, 부활 때문이다. 부활이 없었다면, 십자가 사건은 그냥 어느 죄인의 그것과 별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중요한 이유는 십자가에서 달려 죽었던 그 사람에게 부활이라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부활을 가리켜 주는 손가락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찬송가에서도 십자가의 능력에 대해서 고백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 자체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가리키고 있는 어떠한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활이다.

 

십자가는 죽음의 자리를 가리킨다. , 우리의 죽음의 현실을 가리킨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해서 봐야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죽음의 현실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부활의 현실이다. 이것을 보지 못하면, 백날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그 능력이 나타나질 않는다.

 

우리가 읽은 본문이 들어 있는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에 대한 교훈이 담긴 곳이다. 바울 서신은 복음서보다 일찍 씌어졌는데, 바울 서신에는 예수의 일대기가 전혀 나오지 않고, 그저 이렇게 부활에 관한 복음만이 등장할 뿐이다. 복음서에는 부활에 관한 기사가 바울 서신의 그것과는 다른 형태로 등장한다. 그저, 일대기 형식으로 등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만 보아서는 부활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다. 그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정도로만 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부활이라는 것이 단순히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정도의 사건이 아님을 가리켜 준다.

 

부활이란 무엇인가? 여러분은 부활이 무엇인지 아시는가? 기독교인의 영성은 이 부활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아는 만큼 성숙해진다. 이 세상에서 잘 살려면, 그리고 세련되게 살려면 윤리도덕적인 사람이 되면 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련된 삶을 위해서, 윤리도덕적인 삶의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이란 윤리도덕적인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혀 그것과는 상관이 없다.

 

그렇다면, 부활이란 무엇인가? 부활이란 종말에 관한 실체이다. 그러니까, 부활이란 차원이 다른 이야기라는 뜻이다. 사실,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에, 자세히 설명하기도 힘들다.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어떠한 것을 설명할 때, 우리는 많은 어려움을 느낀다. 부활도 마찬가지다. 부활은 우리가 겪는 이 세상의 현실과 차원이 다른 현실이기 때문에 설명하기가 참 어렵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활에 대해서 미주알 고주알 설명하지 않고, 듬성듬성, 애매모호하게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 말씀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2-53).

 

이것은 부활의 상황에 대해서 설명하는 구절인데, 부활의 상황이 죽음과 연관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 다음 구절이 이어진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

 

여기서 부활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부활은 죽음을 이기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은 이렇게 묻는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부활이란, 적어도, 우리가 가장 인생에서 두려워하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상황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상황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21:4).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현실에서 가장 확실한 진리는 누구든지 언젠가는 죽는다라는 것이다. 지금 여러분이 죽음이라는 실체에 대해서 얼마나 깊은 반응을 하는 지와 상관 없이, 여러분은 반드시 죽는다. 그것만큼 우리의 삶을 허무하고 슬프게 하는 것도 없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가장 아픈 일이 바로 죽음의 이별아닌가!

 

죽음이 없다면, 우리의 인생은 현재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현실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이 지금의 형태를 취하는 것은 바로 죽음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죽음의 현실과는 또다른 현실이 있음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바로 부활이다. 이 부활이라는 것은 지금 우리가 겪는 현실과 차원이 다른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것과도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부활이라는 것은 인간의 그 어떤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활은 인간의 노력으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은혜이다. 복음서는 그러한 정황을 초자연적인 현상’(병자를 고친다든지, 죽은 자를 살리신다든지, 물 위를 걸으신다든지 등)을 들어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부활 사건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 부활의 현실이 우리에게 다가오게 하는 것은 오직 믿음밖에는 없다. 믿음이란 나의 욕망을 채우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부활 사건에 집중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나의 욕망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왜냐하면, 부활은 하나님만이 주권적으로 일으키실 수 있는, 새로운 창조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인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부활 사건에 집중하는 일이다. 그것이 왜 중요한 것인지, 알아가는 과정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다. 부활을 산다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부활 사건에 집중하는 것을 뜻한다. 인생을 후회 없이 사는 가장 확실한 길이 여기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사람은 죽으면 별이 된다는 말을 믿고 싶다

이 땅 위에서 별처럼 살았던 사람도 별이 되고

이 땅 위에서 별 볼 일 없이 살았던 사람도 별이 되고

죽어서 모두 별이 되어 만난다면

그 잘난 교만도

그 못난 마음도

반짝반짝 허물어지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별처럼 살아도 상관 없고

별 볼일 없이 살아도 상관 없다

죽으면 모두 별이 되어 만날 텐데

뭐 그리 아등바등 살아갈 필요 있겠는가

교만을 탓할 것 없고

못난 마음도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그저 빛나는 대로 살면 될 뿐

 

‘사람은 죽으면 별이 된다는 말을 믿고 싶다

반짝반짝 허물어질 내 마지막 날

두 눈을 꼬옥 감으면

어느새 저 높은 곳에 별이 되어 걸리는 인생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너도 나도 다 한결같이 하늘에 걸리어 반짝반짝 빛나는 인생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3. 5. 19. 05:42

장화와 우비

 

화창한 날

나는 장화와 우비를 산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엄마 뱃속에서

터져나올 때부터 생긴

내 소망의 성취다

나는 빗물 고인듯한 엄마 뱃속이 싫었다

거기서 나는

벌거벗긴 채로 세상에 내몰린

어린아이였다

거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온몸으로 빗물을 견뎌내는 것 밖에

없었다

화창한 날

나는 장화와 우비를 산다

그것은 비를 기다리는 낭만이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비를 비켜가기 위한 제의(祭儀)이다

나는 햇살처럼 방끗 웃기 위하여

화창한 날을 꿈꾼다

 

화창한 날

장화와 우비를 곱게 차려 입고

,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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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3. 5. 11. 14:35

봄꽃

 

저건 봄이 피워낸 눈꽃이다

마지막 잎새처럼

누군가의 간절한 소망에 대한

응답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리도 찬란할 수 있으랴

겨울내 깊은 잠에 빠져 지낸

백설공주의 하얀 마음처럼

곱게 피어 오른 저 흰 꽃

저건 너와 나

그리고 하늘이 만들어 낸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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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13. 5. 9. 07:36

축제

 

축제다

독수리 대여섯 마리의 흥분

날갯짓

쪼는 부리

통통통 구르는 발

 

그들의 축제는

아마딜로의 죽음에서 비롯된다

 

세상이 늘 그렇듯이

아마딜로의 죽음은

이중적이다

 

슬픔이며 기쁨이다

상실이며 기회다

곡이며 흥이다

 

피곤과 지루가 베어 있는 오후

무심한 햇살은

껍데기만 남은 독수리 한 마리가

아마딜로와 같은 운명으로

저만치 널브러져 있는 장면을

조명처럼 비추고 있다

 

저것은 또 누구의 축제 현장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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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5. 6. 04:35

2013 5 5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욥기 34:14-15

제목: 인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 III –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시키지 말라

 

애틀란타 갔다 차 다고 내려오면서 집사람과 나눈 대화. “아이들이 너무 이뻐서천년만년 함께 있고 싶다.” 그런데 우리는 머지 않아 뿔뿔이 헤어질 것이다.” 슬프다. 그냥 오늘 하루의 행복을 누리면서 살 수 밖에.

 

오늘 참으면, 내일 더 행복한 날이 올거야!’ 우리는 이런 착각 속에 산다. 오늘이 가면, 내일은 오지 않는다. <희망찬 내일>은 오시다 심장마비 걸려서 돌아가셨다. 그러니 내일을 기다리지 말고 오늘 하고 싶은 일을 하라. 그것이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라면.

 

일생은 하는 순간 지나간다. <사진> 하고 지나가는 일생에 우리는 너무도 내일타령만 하면서 오늘을 희생시키며 산다. 우리는 참고 견디는 인내의 인생을 미덕으로 여긴다. 누구나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인생을 갈망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요즘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 급증하고 있다. 왜 그럴까? 우울증은 마음의 부조화 때문에 오는 병이다. 이는 어쩌면 지나친 인내와 희생이 마음의 부조화를 야기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희망찬 내일> 기다리다 그 <희망찬 내일>이 오시다 심장마비 걸려서 돌아가신지도 모르고, 마냥 참고 인내하고 희생하고 기다리다가, 지쳐서 생긴 병일지도 모른다.

 

자식을 위해서 매일 참으면서 살았던 부모들은 자식이 자기가 생각했던 대로 안 되면, 이런 원망을 하면서 자식을 나무란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너 키우려고 내가 얼마나 희생했는데…” 그러나, 자식은 부모가 행복한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지 모른다. 그러니, 그런 자식이 어떻게 부모님을 행복하게 할 수 있겠는가? 자식을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아내를 위해서, 또는 누군가를 위해서 무조건 희생하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이 하루하루 행복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행복은 바이러스와 같아서, 전달된다. 내가 지금 행복하지 않은데, 자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고 착각이다.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라! 그러면 자녀는 부모에게서 배운 대로 행복하게 살 것이다!

 

왜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사는 것이 중요한가? 오늘 말씀을 보라. “그가 만일 뜻을 정하시고 그의 영과 목숨을 거두실진대 모든 육체가 다 함께 죽으며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리라.” 무슨 말인가? 생명은 내 맘대로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웰빙을 외치는 요즘, 운동 열심히 하고 먹을 것 잘 가려 먹고 그러면 잘 먹고 잘 살수 있다고, 장수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다른 말로, 내 생명을 내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삶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선전문구에 불과하다. 생명은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이 생명의 여탈권을 쥐고 계시다. ‘그가 뜻을 정하시면’, 우리는 가는 것이다. 거기에 반항할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좀 빨리 가고 늦게 가는 것뿐, 인생은 언젠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뜻대로 죽으며, 우리가 매일 밟고 다니는 흙으로 돌아간다.

 

요즘은 우리가 밟고 다니는 것이 흙이 아니라, 콘크리트, 아스팔트라서, 흙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흙과 친하게 지내지 않으니, 우리의 생명이 어디로 돌아가는지에 대한 깨달음도 더딘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시키지 말아야 한다. 이 말은 오늘을 흥청망청 살라는 말이 아니다. 그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다. 행복은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숨쉬며 살고 있는 바로 이 시간, 이 공간에 있는 것이다. 행복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이다.

 

여러분의 인생을 돌아보시라. 살면서, 내일을 위해 오늘을 얼마나 희생시키며 살아왔는지. ‘오늘 내가 이렇게 열심히 희생하면, 내일은 행복할거야. 더 이상 나의 눈에 눈물은 없을 것이고, 내 육체는 쉬게 될 것이야!’ 이런 생각하시면서 오늘을 희생하면서 살아오지 않으셨는가? 그러나, 정말 오늘 여러분의 삶 가운데 눈물이 없으신가? 여러분의 육신은 쉬고 계신가?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죽기 전에 후회하는 것들 중에, 이런 것이 있다. 1.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했더라면. 2.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려고 노력했더라면. 3.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났더라면. 4. 죽도록 일만 하지 않았더라면. 5. 가고 싶은 곳으로 여행을 떠났더라면. 6. 고향을 찾아가 보았더라면. 7. 맛있는 음식을 많이 맛보았더라면. 8. 건강을 소중히 여겼더라면.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죽기 전에 후회하는 이런 것들이 여전히 여러분 마음 속에 안 와 닿을지 모른다. ? 죽음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정한 영성이란, 남에게 일어나는 일은 나에게도 똑같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가슴 속 깊이 깨닫고 함부로 인생을 살지 않는 것이다.

 

이제 대부분 인생을 다 사신 분들이기 때문에,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했더라면이라든지,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려고 노력했더라면’, 이라는 후회의 말을 듣고, 사실 인생을 획기적으로 바꿀만한 그 무엇인가를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나머지 것들은 우리가 귀담아 듣고 바로 오늘부터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다.

 

죽도록 일만 하지 말고, 좀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만나러 다니시고, 가고 싶은 곳으로 여행도 가시고, 고향도 좀 찾아가 보시고, 맛있는 음식도 많이 맛보시고 다니시라. 이런 것이 왜 중요한지 아시는가?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제 탐험의 목적은 이것입니다. 아직도 언뜻언뜻 보이는 행복의 흔적들을 자세히 찾아나가면서 그것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측정해 보는 겁니다. 폐하의 주위가 얼마나 어두운지 알고 싶으시다면 멀리 보이는 희미한 불빛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셔야 합니다.” (76)

 

다른 사람과 사귐을 갖는다는 것, 그리고 내가 사는 곳을 떠나 여행을 한다는 것은 나를 돌아보는 일이다. 그것을 통해서 나의 행복이 얼마나 부족한지, 또는 나의 행복이 얼마나 넘치는지, 측정해 보는 일이다. 여행을 다닌다는 것은 단순히 물질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행복을 발견하는 일이다. 발견한 행복의 흔적들을 나의 삶 속에 비추어 보는 일이다. 그러면, 나의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나의 행복을 측정할 수 있다. 얼마나 부족한지, 아니면 넘치는지.

 

선교여행 같은 것을 가지고 하면, 뭐 하러 가냐고 그러시는 분들이 있다. 그냥 돈 보내주면 되지, 왜 돈 낭비하면서 거기에 가냐고 하신다. 선교여행이든, 그냥 여행이든, 그것은 여행의 목적을 전혀 모르시는 분들이 하는 말씀이다. 여행은 돈 쓰러 가는 것이 아니다. 여행은 나 자신의 행복을 발견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내가 있는 곳을 벗어나 보아야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다. 선교여행 가자! 가서, 우리의 행복을 한 번 발견해 보자!

 

그리스 신화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대단한 발명가인 다이달로스는 미궁 속의 괴물 미노타우루스를 제거한 테세우스에게 실타래를 이용해 탈출하는 방법을 알려준 죄로 아들과 함께 미궁의 꼭대기 감옥에 갇힌다. 다이달로스는 새의 깃털을 모아 큰 날개를 만들어 아들 이카루스에게도 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완성된 날개를 밀랍으로 몸에 붙이고 탈출을 감행한다.

 

그러나 이카루스는 하늘을 나는 것에 몰두해서 바다와 태양의 중간을 날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충고를 잊어버리고, 태양을 향해 높이 오르다가 밀랍이 녹아 바다에 추락하여 죽고 만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자. “그가 만일 뜻을 정하시고 그의 영과 목숨을 거두실진대 모든 육체가 다 함께 죽으며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리라.” 여기에는 불변하는 진리의 말씀이 새겨 있다. “모든 육체가 다 함께 죽으며,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리라!” 이 충고를 잊어버리지 말라. 이 충고를 잊어버리고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이카루스처럼 허무하게 추락하는 수가 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간 죽는다. 그때는 하나님만 아신다. 그러니, 우리는 그때를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의 할 일을 하면 된다. 우리의 할 일이란, 오늘 하루를 후회 없이 사는 것이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시키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내일 존재가 없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제발, 죽도록 일만 하지 말고, 좀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만나러 다니시고, 가고 싶은 곳으로 여행도 가시고, 고향도 좀 찾아가 보시고, 맛있는 음식도 많이 맛보시고 다니시라.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인생에 대한 후회의 아픔은, 육신의 고통에서 오는 아픔과 비교되지 않는다고 한다. 제발,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시키지 마시라. 죽음의 순간에, 후회되는 인생을 살지 마시라.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4. 29. 04:48

2013 4 21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요한복음 14:21-24

제목: 인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 II – 감정에 휘둘리지 말라

 

죽기 전에 후회하는 일들이 많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합니다.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모두 평등하게 세상을 떠나 흙으로 돌아가겠죠. 이 진실을 좀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그동안 훨씬 마음 편하게 살았을 거에요. 사소한 일에 그렇게 아등바등하지 않고, 너무 걱정하지 않으면서요.”

 

우리는 살면서, 이 사실을 깨닫지못하고 삽니다.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모두 평등하게 세상을 떠나 흙으로 돌아간다!” 수도 없이 모두가 죽는다는 것을 듣고 보지만, 그것을 깨닫지는 못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잘난 사람, 못난 사람이 아니라, “모두 평등하게 세상을 떠난다입니다. 그래도 나는 잘난 사람으로 살고 싶어’, 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지만, 죽음을 앞두고 생각해 보았을 때, 잘나고 못나고는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모두 평등하게 세상을 떠난다입니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입니다. 날마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죽으면서 후회하는 것은, “감정의 지배를 받을 것이 아니라, 감정을 잘 다스려야 했는데”,라는 것입니다.

 

화살에 맞으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 화살을 빨리 빼내고 치료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화살을 맞으면, 우선 우리는 이 화살 어떤 놈이 쏜 거야!’라고 하면서 화 가운데서 시간을 허비합니다. 그러다 화살로 인해 난 상처를 제 때 치료하지 못하고, 그 상처로 인해 인생을 망치게 됩니다.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화살을 뽑지 못하고, 그 화살의 상처 때문에 죽어가는 것이고, 감정을 다스린다는 것은 일단 화살을 뽑아내고, 치료한다는 뜻입니다.

 

이탈로 칼비노가 쓴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제국은 병들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쁜 것은 제국이 자신의 상처에 익숙해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감정에 휘둘리는 삶을 산다는 것은, 그만큼 내 자신이 병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나쁜 것은, 그 상처에 익숙해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처로 병든 사람들은 감정의 지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감정대로 살아갑니다.

 

성유리가 주연한 <누나>라는 영화를 보면, 동생이 물에 빠져 죽은 것 때문에 가족들이 힘들어하는 상황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남동생은 '누나'를 구하러 물에 들어갔다가 누나를 구하고 대신 죽습니다. 그 일로 아버지는 술주정뱅이가 되는데, 아버지는 술에 취해 '누나'에게 폭력을 휘두릅니다. '이 쓸 데 없는 년!'하면서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누나'는 아버지의 폭력에 저항하지 않습니다. 누나는 동생의 죽음에 대한 죄책을 아버지가 휘두르는 폭력으로 '속죄'하려고 합니다. 동생(아들)의 죽음을 놓아두고, 아버지는 매우 사디스트적인 행동(가학적 행동)을 취하는 반면에, 누나()은 매우 매조키스트적인 행동(피학적 행동)을 취하는 것이죠.

 

여기서 아버지나, 딸이나 감정에 휘둘리는 겁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죽은 탓이 딸 때문이라는 생각, 감정에 휘둘려, 틈만 나면 술을 먹고 딸을 구타하는 겁니다. 누나는 남동생이 죽은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아버지의 구타를 통해서 속죄하려고 든다는 것이죠.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감정에 휘둘리면, 이렇게 삶이 일그러지고, 행복하지 못한 법입니다.

 

미국 버클리대학교의 심리학자 바울린드 교수는 자녀 양육에서 중요한 요소가 애정과 통제임을 밝히면서, 다음과 같은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3-4세 된 유아들을 대상으로 다섯 가지 심리적 능력(대인관계 능력, 자제력, 자립심, 호기심, 생동감)을 측정했더니, 그 점수가 상중하로 확연히 나뉘었다고 합니다.

 

상에 해당하는 그룹은 다섯 가지 심리적 능력이 모두 우수한 아이들로 부모에게 적당한 애정 표현과 적절한 통제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중에 대항하는 그룹은 아이들이 부모들로부터 애정 표현은 잘 받지 못했지만, 적절한 통제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하에 해당하는 그룹은 대인관계 능력도 떨어지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지나치게 의존적이며 자제력을 쉽게 잃었는데, 이들은 부모로부터 애정만 받으면서 모든 게 용인되는 분위기 속에서, 즉 통제 없이 자란 아이들에게서 나타났습니다.

 

이 연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삶에서 우리가 놓치고 사는 것이 바로 통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사랑의 가치에 대해서는 잘 압니다. 그런데 통제의 가치는 잘 눈치채지 못합니다.

 

자녀를 키우시는 분, 아이를 정서적으로 건강한 아이로 잘 키우고 싶다면, 무조건적으로 사랑만 베풀지 마시고, ‘통제를 적절하게 해야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어떻게 통제하는가?’의 문제가 우리에게 남습니다. 통제란 무조건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예로 들면, 자녀들은 부모가 세운 제한을 주의 깊게 따르는 것이지요. 적어도 부모가 아이를 사랑한다면, 아이에게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고,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잘 다스리면서,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살 수 있는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명확하게 밝혀 주고 계십니다. 이는 우리의 삶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삶의 기준을 나의 감정에 두고 살아갑니다. 감정이 삶의 기준이다 보니, 삶의 모든 행동이나 말이, 나의 감정을 기준으로 해서 나갑니다.

 

일례로, 학창시절에 공부 잘하는 학생과 공부 못하는 학생과의 차이가 여기서 납니다. 공부 잘하는 학생은 자신의 감정과는 상관 없이, 엉덩이를 책상에 붙이고 꾸준히 공부합니다. 그러나, 공부 못하는 학생은 자신의 기분에 따라 공부합니다. 공부가 좀 된다 싶은 날, 즉 기분이 좋은 날은 공부를 좀 하는가 싶다가도, 기분이 좀 우울하면 세상이 꺼지는듯한 한숨을 쉬면서 신세타령합니다.

 

어느 사람이든지, 감정 낭비가 심한 사람일수록 자신이 있는 분야에서 성공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의 기준을 한 번 돌아봅시다. 무엇이 우리 삶의 기준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고 하면서 그분께 인생을 건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기준이 이제는 나의 감정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이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그분의 말씀(계명)을 기준 삼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계명)조차도 우리의 감정을 중심으로 지키든지 안지키든지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으로 여러분의 삶을 통제하십시오. 감정이 여러분의 삶을 통제하도록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통제하도록 그 말씀을 붙드십시오.

 

남의 것을 도둑질 하고 싶다가도, “도둑질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남을 헐뜯고 싶고, 부정적인 말을 하고 싶다가도,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1:26)”라는 말씀에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저 원수 같은 놈에게 복수를 하고 싶다가도,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씀에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감정을 부당하게 억누르고 무조건 참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합당한 하나님의 말씀, 우리의 영혼을 소생케하시고 우리를 참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을 통제하도록 허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정에 치우친 삶, 특히 부정적인 감정에 얽매여 평생을 허비하면 돌아오는 것은 후회뿐입니다. 감정을 잘 통제하는 사람, 감정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다스리는 사람의 삶은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 참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순간에서도,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으시고,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으시고, 끝까지 말씀으로 당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십자가에서 외쳤던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칠언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아버지 나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감정이 삶을 지배하게 놓아두지 않으시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삶을 통제하시도록 맡기셨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부활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감정에 휘둘리면, 그 당시 잠깐은 속 시원할 수 있지만, 어떠한 후회가 영원토록 남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화내고, 울고, 웃어도 인생의 시계는 흘러갑니다. 어차피 흘러가고 지나가는 게 인생이라면, 좀 더 웃고 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삶을 통제하시도록 내어드리는 겁니다.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주신 사명을 따라 무쏘처럼 가시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희망이 절망에게

 

절망아 잘 있었니? 나 희망이야. 오늘 내가 이렇게 펜을 든 이유는 절망이 너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서야. 옛날에 키에르케고르 아저씨가 너에게 심한 말을 했었지? 너를 보고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잖아. 나도 그 말을 듣고 너에 대해서 아주 잘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했었어. 병도 아주 심각한 병이라고 생각했었어. 사실 그렇잖아? 절망이 너를 만나는 사람마다 시름시름 앓다가 모두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을 자주 목격했으니까. 나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도 그 모습을 보았어. 특히, 가룟 유다라는 사람이 그랬지. 그는 자신이 죄 없으신 예수님을 팔아 넘겼다는 절망에 싸여서,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잖아. 그리고 다른 제자들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처형당하자 절망해서 뿔뿔이 흩어졌잖아. 그 중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는 갈릴리 호숫가로 돌아가 원래 직업인 고기잡이를 다시 시작했었지. 그 때 그는 고기 잡으러 나가서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고 밤을 지새고 말았어. 3년 예수님을 따라 떠돌아다니다가 오랜만에 그물질을 해서 그랬을까? 그래서 감각이 떨어져서 그랬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가 밤새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은 이유는 바로 너, 절망을 품었기 때문이야. 절망 속에 있었기에 아무것도, 자신이 가장 자신 있어하는 일조차도 할 수 없었던 것이지. 내 생각에는 그 상태가 조금 더 지속됐다면, 아마도 베드로는 고기 잡는 일도 그만 두고, 세상을 떠돌다 절망 속에서 삶을 짧게 마감했을지도 몰라. 그런데 절망아! 베드로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가 뭔지 아니? 너를 품고 있으면 꼭 이르게 되는 죽음, 바로 그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다시 나타나셨기 때문이야.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신 사건을 우리는 부활이라고 불러. 그 부활이 바로 절망이 너에게 기쁜 소식인 거야. 너 절망이를 품고 죽음에 이르는 아무리 깊은 병에 걸렸을지라도,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다 희망으로 바뀌기 때문이야. 그래서 부활은 희망 중의 희망이라고 불리는 거야. 내 친구 절망아!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말기를 바래. 너의 그 깊은 절망도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희망으로 바뀌기 때문이야. 부활절에 너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고 싶다. 절망아! 예수님의 부활 앞에서 너는 더 이상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라, 나와 같은 희망이라는 것을. 예수님의 부활 앞에서는 희망 밖에 없으니까. 모든 것이 다 희망이니까. 우리 함께 예수님의 부활을 찬양하자!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4. 15. 13:38

2013 4 14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전도서 1:2-11

제목: 인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 I - 지금 당장 고맙다고 말하라

 

지금 설교가 시작되었는데,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시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는가? 아니면 설교가 빨리 끝났으면 하고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예배 끝난 뒤 나올 점심식사에 대해서, ‘오늘은 메뉴가 무엇인가상상하시는가? 아니면 예배 끝나고 집에 가서 할 일에 대해서 생각하시는가?

 

설교를 들으면서, 목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나 보고, 듣고 난 후에, ‘그러면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질문해야 한다.

 

오늘부터 몇 주간에 걸쳐서, “인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할 예정이다. 지금 당장 후회하지 않더라도, 죽음의 순간에 인간은 반드시 후회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사람의 마지막 길을 잘 가도록 보살피는 직업(의사, 호스피스)을 가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다.

 

오늘 전도서의 말씀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헛되다인데, 우리의 인생이 왜 이렇게 헛되다는 것인가?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인생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으로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평소에 죽음에 대해서 얼마나 생각하시면서 사시는가? 우리가 일상생활 중에서 가장 많이 경험하는 것 중의 하나가, ‘죽음이다. 인간의 죽음, 동물의 죽음, 식물의 죽음, 수많은 생명의 죽음이 시간 속에 즐비하게 늘어져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나에게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남의 일처럼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어느 책에서 이런 문구를 본 적이 있다.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은 후회가 적다. 죽음을 염두에 둔 사람은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알고 열심히 살아간다.”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히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삶, 실존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살아가라는 뜻이다.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고, 우리의 삶은 유한하다고 자각하며 사는 인생은 오늘 하루를 보람차고 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만한 일을 하려고 노력하며 산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영원한 것처럼 착각하며 우리에게는 내일이 있다며 착각하는 사람은 오늘을 흥청망청 살아간다. “내일 할 수 있는 일을 절대로 오늘 하지 말라!”라며. 꼭 이솝우화에 나오는 배짱이처럼.

 

나는 개인적으로 한 2년 전쯤부터 죽음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죽음에 관련된 책도 읽고, 특별히 죽음의 신학에 대한 책을 읽으며, 그리고 종말론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죽음이 남의 일이 아니라, ‘나에게도 일어나는 매우 명백하고 현실적인 일이라는 자각이 생각 뒤 첫 번째로 한 일이 무엇인지 아는가?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은 1 8일이다. 결혼 7주년을 맞아 나는 아내 몰래, 선물을 준비했다. 그리고 결혼기념일에 그 선물을 꺼내서 주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죽더라도 아내가 우리 아이들과 여생을 힘들지 않게 보낼 수 있도록 준비한, 생명보험증이었다. 내가 나온 에모리대학교 동문회에서 단체로 들어 값싸게, 하지만 좋은 배네핏을 누릴 수 있는 보험이다. 꽃 백송이 선물하는 것보다, 기뻐하더라.

 

이탈노 칼비노가 쓴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라는 소설이 있다. 주인공 마르코 폴로가 수많은 도시들을 여행을 하면서 실패를 하는데, 쿠빌라이 칸이라는 사람을 만나는데, 그 사람은 네가 전세계를 여행했다는데, 너는 유토피아에 가봤지?” 묻는다. 폴로는 대답한다. “제가 다닌 도시들 중에는 유토피아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유토피아에 어떻게 가는지도 모릅니다.” 칸이 또 묻는다. “전세계를 다녀봤자 유토피아가 아니라면, 왜 그렇게 여행을 다니느냐?” 폴로가 대답한다.

 

어차피 세상은 지옥입니다. 그 지옥 같은 세상을 지옥이 아닌 것처럼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 방법은 쉬는 것인데, 지옥 같은 세상에서 지옥처럼 사는 것이다. 그러면, 지옥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쉽다. 두 번째 방법은 어려운 것인데,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마치 지옥처럼 살지 않는 사람을 찾아내서 그 사람의 공간을 넓혀주는 것입니다.”

 

어떤 시인이 이런 말을 한다. “어떤 이는 공원을 감옥처럼 여기며 살고 어떤 이는 감옥을 공원처럼 살고 있으니, 세상엔 안과 밖이 있는 게 아니라 마음에 놓은 욕망의 철창이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여러분은 어떠한 인생을 살고 계시는가? 내일은 행복할거야, 하면서 지옥 같은 오늘을 견디면서 살고 계신가? 유토피아를 꿈꾸며, 어딘가에 무지개 마을이 있을거야 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사시는가? 아니면, 이 지긋지긋한 인생,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 라며 죽지 못해 사시는가?

 

마지막 순간, 인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 중 첫 번째가, 지금 옆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한다,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랑을 표현해야 하는데, “사랑해의 또다른 표현이 고마워이다.

 

세상에 당연한 건 아무 것도 없다. 모두 고마운 일이다. 내가 돈을 지불하니까, 당연히 저 사람이 해주어야 하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굉장히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은 당연하지 않다. 봄에 꽃이 피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 늘 그렇게 봐 왔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라고 느낄 뿐이다. 오늘 아침 태양이 뜨고, 비가 오고, 시간이 지나면 해가 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북극만 가봐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에는 백야라는 것이 있다. 해가 지지 않고, 밤인데도 낯처럼 밝은 날을 말한다.

 

돈을 지불했으니까, 자동차 정비업소 직원이 오일 갈아주고, 자동차 손 봐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냥 그렇게 값이 매겨지고, 경제적 활동을 서로의 사회적 약속 안에서 하고 있을 뿐, 그것은 그렇게 당연한 것이 아니다.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상의 모든 일, 인간의 활동은 모두 값을 매길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다. 지금 여기에 나와 앉아 있는 사실도, 당연한 것이 아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집사람에게 고마운 일이 있지만, 집사람이 빨래 개서 넣어주는 것 특히 속옷 개서 정리해주는 것, 너무 고맙다. 나는 그래서 그것을 늘 고맙다고 말한다.

 

말 귀를 알아듣는 큰 아들에게 말한다. ‘건유야, 아버지는 네가 아버지 아들인 것이 정말 고맙다.’

 

감사헌금도, 정말 감사해서 하는 거다. 이렇게 아무런 탈 없이 교회 온 것이 얼마나 고마운가. 누구는 교회 오다가 사고 당해서, 신앙을 잃은 사람도 있다.

 

목사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목사니까 당연히 여기 앞에 서서 말씀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가? 한 마디 들을 때 마음이 고맙다. ‘목사님, 고맙습니다. 은혜 받았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맙다고 말하는 것은 사랑한다는 말의 다른 버전이다. 사랑한다는 말은 입에서 잘 떨어지지 않을뿐더러, 낯부끄러울 수 있다. 그렇다면, 고맙다는 말로 대신해도 된다.

 

가장 고마운 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이 가장 고마운 일이다. 왜 그런지는, 죽음에 가까울수록 알게 될 것이다. 인생은 유한하고, 언젠가 우리의 인생은 끝나고 말거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지 못한다.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사는 자에게는 감사가 넘친다. 그런 인생은 후회가 없다.

 

예배란 하나님께 고맙다고 말하는 행위이다. 그러니, 이 세상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참 고마운 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예배를 고맙게드릴 것이다.

 

인생을 잘못 살고 있는 사람의 특징은, ‘감사가 없다는 것이다. ‘고맙다는 말을 좀처럼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다른 사람에게는 감사를 강요하면서, 정작 자기 스스로는 다른 사람에게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감사하지 않으면 불쾌해하고 마음이 어그러진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상대방에게 감사할 줄 모른다. 자신이 상대방에게 한 것은 특별한 것이고, 상대방이 자신에게 한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생을 돌아보라. 죽을 때,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죽음은 서서히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갑자가 찾아온다. 물론 죽음을 서서히 맞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서 주변을 정리할 시간이 주어지는 사람도 있다. 축복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죽음은 갑자기 찾아온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나는 지금 여러분에게 죽음의 공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필연적인 운명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순간, 이 세상에서 존재가 없어진다. 그 마지막 순간에,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 지금 살아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 말씀 드리는 것이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지금 당장 사랑한다’,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랑한다고맙다고 말하는데, 입이 잘 떼지지 않는 분들은 후회할 인생을 살고 계시는 거다. ‘저 인간 생각하면 갈아 마셔도 속이 시원하지 않는데, 어떻게 사랑한다, 고맙다는 말을 합니까?’라는 분, 후회할 인생을 살고 계시는 거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하게 될 후회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의사나 호스피스들은 말한다. “육체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마음의 고통입니다. 죽으면서 사람들은 육체의 고통보다, 후회스러운 인생에 대하여 마음의 고통을 너 크게 느끼면서 죽습니다.”

 

후회라는 말을 우습게 여기지 말라. ‘후회되는 인생 때문에, 눈을 제대로 못 감을 수 있다. 평안히 눈을 감고 싶으신가? 그렇다면, 지금 당장, 사랑한다, 고맙다고 말하라.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