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삶 역설적인 삶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정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차라리 겨울은 우리를 따뜻하게 했었다./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球根)으로 가냘픈 생명을 키웠으니.

 

T. S. 엘리엇의 “황무지”라는 시의 처음 부분입니다. 194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매우 유명한 시인이지요. 이 사람의 이 “황무지”라는 시 때문에 4월은 잔인한 달로 낙인 찍혔습니다. 하지만 시인이 왜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표현했는지를 곰곰이 들여다 본다면, 그 잔인함은 어떠한 잔인함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계절이 뚜렷한 지방에서는 보통 3,4,5월을 봄이라고 합니다. 이 중에서 3월은 겨울과 봄이 교차되는 달이고, 5월은 봄과 여름이 교차되는 달입니다. 오직, 4월만이 순수한 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수한 봄은 잠자고 있던 모든 생명을 깨워냅니다. 시인의 말대로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잠든 뿌리는 봄비로 뒤흔들어” 깨웁니다. 요 며칠 비가 많이 왔던 상황과 같습니다. 게다가 4월은 기독교의 가장 큰 절기인 “부활절”이 들어 있는 달이기도 합니다.

 

이제 고난주간을 맞는 우리들에게 4월이 잔인한 달인 것은,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모진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멜 깁슨이 만든 “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잔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잔인함은 부정적인 잔인함만을 말하는 것일 뿐, 위에서 시인이 말하는 잔인함은 이러한 잔인함이 아니라, 매우 긍정적인 잔인함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잔인하게 죽기도 하셨지만, 영광 중에 부활하기도 하셨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 사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죽음” 또는 “악”의 세력 입장에서 보면 잔인한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 또는 “악”에 대한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은 영혼을 깨워 라일락보다 더 향기로운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게 하고, 잠자는 영혼을 깨워 그 뿌리를 소생시키고, 향기로운 삶과 힘찬 발걸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사건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건으로 뒤집힌 것을 증거하게 하십니다.

 

4월은 잔인한 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사망권세"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역설적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4. 8. 04:38

201347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20:19-31, 5:27-32

제목: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의 달력과 절기를 지키신 분이었죠. 우리가 요즘 쓰는 달력은 로마 황제 율리우스가 만들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에 의해서 다듬어진 달력을 씁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요즘 우리가 쓰는 달력으로 따지면 금요일 저녁 해 진 후부터 토요일 해지기 바로 전까지 입니다. 그래서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요즘 우리가 쓰는 달력으로 따지면,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일요일을 일요일이라고 부르지 않고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하는 겁니다. 신앙고백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부르고, 그분이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에 그분의 날이라는 신앙고백을 담아 주일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로마 황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에 박해 받던 시절, 박해 받던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기독교인들이 로마 황제를 섬기기 않았기 때문입니다. 로마가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을 때 로마의 모든 국민은 로마 황제를 일컬어, 주님(퀴리오스)라고 불러야 했습니다. 이것을 거부하면 곧 죽음이었죠. 그런데,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도저히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주님은 황제가 아니고, 사망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들의 참 주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더욱더, 박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짜 주님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리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일에 더 박차를 가했습니다. 물론 이것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정부에 의해서 처형을 당했습니다. 죽는 것이 뻔한데도 불구하고, 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증거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이들은 부활의 주님의 만났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부활을 믿는 이상, 더 이상 이들에게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주님이라고 하지 않고, 주님이 아닌 로마 황제에게 절하면서 그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두려운 일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안식 후 첫날 저녁에, 그러니까 주일 저녁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처럼 끌려가서 십자가 처형을 당할까봐, 또는 돌에 맞는 처형을 당할까봐, 욕을 볼까봐 무서워서 어느 한 곳에 숨어 모여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곳에 가셔서 제자들을 만나 주셨다는 겁니다. 두려운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평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들의 가장 필요한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복을 빌어주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제자들에게 부활한 당신의 몸을 보여주십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던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부활한 몸을 보고 마음 속에 기쁨이 생겼습니다. 기쁨이 생긴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사명을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그리고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인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잘 보셔야 합니다. 제자들의 삶이 드라마틱하게 변하게 되는 사건이 무엇입니까? 보기를 드립니다. 1. 십자가 사건, 2. 예수님의 부활 사건, 3.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사건. 정답은 3번입니다. 두려움만이 가득 찼던 이들의 마음이 기쁨으로 변하게 된 사건은, 다름 아닌,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사건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이 부활한 주님을 못 만났다고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의 부활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냥 평생을 두려움 가운데 살았을 겁니다. 그 두려움 가운데, 예수님께서 살아생전 주신 사명도 잊어버리고, 그냥 두려움 가운데 인생을 살다 두려움 가운데 죽었을 겁니다. 그런데 부활한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삶은 그런 삶이 아니었습니다. 기쁨이 가득한 삶이었고, 그 기쁨 가운데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감당하는 능력의 종들이 되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삶 가운데 왜 평강이 없고, 기쁨이 없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평강이 없고 기쁨이 없는 이유를 기껏 생각해 봐야, 세상적인 기준에서 세상적인 것들이 나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난 이것도 없고, 이것도 없고, 이것도 없고, 누구처럼 이런 것들이 나한테 있었다면 내 삶에 평강이 있고 기쁨이 넘쳤을텐데그래서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적인 것들을 간구합니다. 포인트가 완전히 잘못된 것이죠.

 

우리에게 평강이 없고, 기쁨이 없는 이유는, 부활하신 우리 구주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맘이 편하다. 나의 마음 속이 늘 평안해.. 나의 마음 속이 늘 평안해.. 악한 죄 파도가 많은 나.. 맘이 늘 평안해.” 그러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에 평안을 원하시고, 참된 기쁨을 원하시면, 세상의 헛된 것을 간구하시지 마시고, 부활의 주님 만나 뵙기를 간구하십시오. 기도하실 때, ‘이것도 주시구요, 저것도 주시구요’, 이러지 마시고, ‘주님, 부활의 주님 저를 만나 주십시오!’ 하고 간절하게 간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적인 것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안 주시는 이유는 그것을 우리의 정욕대로 쓸 것을 아시기 때문에 안 주시는 것이지만,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는 간구는 하나님께서 안 들어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평강과 기쁨을 얻고 사명을 받고 있었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평강과 기쁨이 없으니까, 의심만 생깁니다. 제자 한 명이 도마에게우리가 주를 보았다하니까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예수님의 못자국을 만져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도마의 의심을 의심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도마을 일컬어의심 많은 도마라고 하지만, 이 의심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소망에서 나온 의심이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불신앙의 의심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의심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싶은 간절한 소망에서 나오는 의심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의심조차도 없지 않습니까? 의심은 둘째치고 부활하신 주님에게 관심조차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관심이 있으니까, 의심도 하는 것입니다.

 

도마의 의심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서 온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그의 고백에서 알 수 있습니다.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노라라고 했던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나서, 가장 강력한 신앙의 고백을 주님께 합니다. 28절 말씀입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의 말씀은, 이렇게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우리의 참 주님이시라는 것을 전하고 다니다가 공회(유대인들)에 붙잡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모습과는 180도 다른 모습입니다. 위에서 살펴 보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이들은 잡힐 것을 뻔히 알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서 돌아다니며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변해도 이렇게 변할 수 있습니까! 이게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참으로 만나 사람들의 삶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는 작은 일에도 쉽게 실망하고 절망하고, 두려워합니다. 어떻게 될까봐 전전긍긍합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담대한 마음이 생깁니다. 결코 작은 일에 쉽게 실망하고 절망하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작은 일 뿐만이 아니라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마음이 생깁니다. 바로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세상의 노예가 되어 어떻게 될까봐 전전긍긍하면서 살게 되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세상도 감당하지 못하는, 즉 세상으로부터 자유한 참된 하나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공회로 잡혀간 제자들의 당당한 모습을 보십시오. 위에서 본, 두려워하는 모습이 전혀 없습니다. 공회로 잡혀 갔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죽을 수 있다는 말인데, 베드로와 제자들은 공회 앞에 서서 당당하게 말합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어떻게 될까봐 두려워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어떻게 될까봐 두려워서 꽁꽁 숨어 있던 제자들이,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단 말입니까?

 

공회 앞에 서서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이들의 기세를 보십시오. 죽음인들 이들을 감당하겠습니까?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이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뭔지 감이 잡히시나요? 뭡니까? “나를 죽여라!” 이거 아닙니까? 죽음이 하나도 안 무섭다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의 마지막 말씀이 너무도 감격스럽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성령이 하시는 일과 자신들이 하는 일이 똑같다는 겁니다. 증인의 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구세주로 증거하는 일이 자신들의 일이라는 겁니다. 이 일을 하는데, 죽음도 자신들을 막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죽일 테면 죽여봐라, 나는 이 진리의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복음 전하면서 죽을란다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두려움에 떨고 있던 이들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담대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될까봐 숨어 있던 이들이, 세상이, 죽음이 감당하지 못하는 증언자들이 되었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여기서서 말의 구슬이 뭡니까?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러면 꿰는 것은 뭡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겁니다. 그러면 보배는 뭡니까? 담대한 증인으로 인생이 180도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되는 법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외치면서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면서 부활을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의 부활 내 삶에 보배가 되고 참된 진리가 되고 의미가 되려면, 그 부활하신 주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서 말의 구슬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을 꿰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 부활의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3. 25. 11:12

2013 3 24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룻기 4:18-22

제목: 내 무릎은 무엇을 위해 힘쓰는가?

 

성경에서 족보가 나오는 곳은 유심히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물론 족보를 살피는 일은 참 재미가 없죠. 하지만 족보는 하나님께서 크게 역사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룻기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룻기가 족보로 끝나고 있다는 것은, 룻기서의 주인공인 보아스와 룻에게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은총을 베푸셨는가를 알 수 있다는 것이죠.

 

오늘 족보를 보면 보아스의 아버지가 살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 5절 말씀을 보면 이 사람이 누구인지가 분명해지는데, 거기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살몬의 아내가 라합입니다.

 

그러니까, 보아스의 아버지는 여리고 성 정탐꾼으로 파견 받아서 갔던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는 것이고, 보아스의 어머니는 아버지 살몬이 여리고 성 정탐 갔다가 만났던 라합이었다는 것입니다. 참 기가 막힌 인연입니다.

 

전쟁을 하려면 반드시 먼저 정탐을 먼저 해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에 정탐꾼 두 명을 보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 때에 가데스 바네아의 가나안 정탐에 참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눈에 보이는 현상을 보지 않고 믿음의 실상을 볼 수 있는, 기도하는 두 사람이면 정탐하는 데 충분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예전에 12명의 정탐꾼 중 10명이 눈에 보이는 현상에 겁을 먹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해서 불신앙을 선동했던 기억이 생생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여리고 성으로 몰래 잠입해서 들어가 보니 사람들이 잔뜩 겁을 먹고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아모리 왕국과 바산 왕국과 모압 족속이 히브리 족속들한테 다 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입니다. 정탐꾼들은 몰래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 집에 숨어 들어갔습니다. 이를 눈치 챈 군사들이 쫓아오자 기생 라합은 두 사람을 지붕 위에 있는 삼대 밑에 숨겨 주었습니다. 정탐꾼은 정탐을 눈으로 합니다. 그런데 삼대 밑에 숨어 뭘 정탐했겠습니까? 하나님은 예전처럼 눈으로 보고 겁먹지 않게 이들의 눈을 가리고, 대신 믿음의 사람 기생 라합을 통해서 성안의 소식을 듣게 하십니다.

 

라합은 옛날 우리나라로 치면 주막 같은 곳에서 일하던 여성일 것입니다. 기생 라합은 한 번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난 적이 없지만 출애굽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셨던 하나님의 행적을 다 들었을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라합은 들어서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기생 라합이 정탐꾼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당신들에게 반드시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 백성들은 마음이 녹아버렸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할 때 자신과 가족을 구원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정탐꾼들은 그녀의 믿음을 보고붉은 줄을 문에다 내리고 있으면 여리고 성을 전부 멸할 때 너희 집만은 살려주겠다.”고 말합니다( 2:18-19 참조).

 

실제로 여리고 성이 정복당했을 때 기생 라합의 믿음으로 그 집안 식구들은 모두 구원을 얻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16:31). 정탐꾼들은 왜붉은 줄을 매달라고 했습니까? 잘 보이는 색깔이니까 그렇기도 하지만, 그것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 십자가의 보혈을 상징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리고 정탐 사건을 통해서 꼭 배워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보아스의 아버지 살몬은 정탐꾼이었습니다. 그의 무릎은 정탐을 하느라 힘들었어야 합니다. 그게 상식입니다. 그러나, 보아스의 아버지 살몬이 여리고 성을 들어가서 그의 무릎이 정탐 하느라 힘들지 않았습니다. 정탐하러 들어갔는데, 라합의 집 옥상에 갇혀 지내고 말았습니다. 거기서 살몬이 무엇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적군 속으로 정탐하러 온 사람이 숨어 지낸다는 것은 일촉즉발의 상황입니다. 잡히면 죽습니다. 가슴이 조마조마했겠죠. 기도가 저절로 나왔을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정탐꾼에게, 보아스의 아버지 살몬에게 여리고 정탐 일을 통해서 받고 싶은 것이 뭐였냐면 바로, 기도였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무릎을 통해서 받고 싶어하신 수고로움은 정탐의 수고로움이 아니라, 기도의 수고로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옛날 가데스 바네아에서 12명의 정탐꾼이 다리품 팔아서 자유롭게 가나안 땅 정탐을 하고 돌아왔지만,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절망적인 말뿐이었습니다. 그 일 때문에 모세가 얼마나 고통을 겪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게 됩니까? 위에서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만, 눈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던 여호수아. 본인이 직접 가나안 정탐꾼 임무를 수행해 보았기 때문에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를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 정탐하는 일에 두 명만 보냈던 것인데, 이들이 무엇에 능한 사람들이었겠습니까? 정탐 잘 하는, 정보 파악 능력이 뛰어나고, 눈이 좋아서 먼 곳까지 보는 사람들이었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고 계시는가를 볼 수 있는 영안을 지닌 자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기도 할 줄 아는 사람들을 보냈던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주의 일은 돈 많은 사람, 잘난 사람, 건강한 사람 등 눈에 보이는 것이 화려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일은 기도하는 사람이 합니다. 무릎을 기도하는데 쓰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일하신다는 겁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가장 중점에 두고 있는 것이 기도요, 여러분들에게 가장 강조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기도입니다. 여러분은 제 마음을 이해하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기도에 중점을 두는 이유는, 모세처럼 하나님 앞에 늘 엎드리는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고, 여호수아처럼 기도의 사람을 쓰는 것이 주의 일을 부흥케 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무릎이 기도하는 데 힘쓰게 해 보십시오. 다리가 저리도록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고 계신지 기도를 통해서 알게 되면, 경거망동하거나 요동치 않습니다. 폭풍 속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보아스의 아버지, 살몬의 삶이 그랬고, 보아스의 어머니, 라합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배우며 자랐던 보아스도 그랬습니다.

 

라합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역사를 보는 안목을 가지고 있던 여성입니다. 하나님을 볼 줄 아는 여인이있습니다. 그는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의 소식을 듣고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가졌습니다. 직접 보진 않았지만, 듣고 믿은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재물, 창칼, 전술의 의지했던 여리고 사람들이 다 죽어갈 때, 그 여인은 하나님의 능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고 생명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던 이 사람 라합. 두 명의 정탐꾼 대신에 정탐 일을 합니다. 사실, 라합은 여호수아가 보낸 두 명의 정탐꾼 대신에 여리고 성 곳곳을 돌아다닐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여리고 성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막에서 일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을 잘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온갖 소문을 한 번에 접할 수 있는 정보력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확하게, 필요한 곳에 필요한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 있는 자를 들어서, 쓰시고자 하는 일에 쓰신다는 겁니다. 이 믿음의 사람 라합. 그런 라합이 아들 보아스를 키우면서 무엇을 가장 열심히 가르쳤겠습니까? 무엇보다 자기 일생 최대의 경험, 즉 여리고 성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틈바구니 속에서 자기가 살 수 있었던 이유를 들려주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고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17:6”. 보아스가 살던 시대는 왕이 없었으므로, 자기 자신이 왕이 되어 자기가 옳은 대로 살았던 시대입니다. 요즘 시대와 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로부터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것을 배웠던 보아스는 남들이 다 각자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던 무법 천지의 시대, 사사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외우고 실천하며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라합은 자신의 무릎이 무엇을 하는데 힘쓰게 했다는 겁니까? 아들 보아스를 무릎에 앉혀 놓고 하나님 말씀 전하는데 힘썼다는 겁니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헤어졌으나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 말 그때 일을 지금도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이 찬송이 누구의 찬송으로 들리십니까? 물론 이 찬송을 지은 사람은 M. B. 윌리암스라는 분이지만, 이 찬송이 보아스의 찬송으로 들리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자녀들 앞에서아이고 무릎이야…’ 하면 자녀들이 물어봅니다. ‘왜 무릎이 아프세요?’ 그러면 우리는 흔히 이렇게 대답합니다. ‘너희들 먹여 살리느라, 죽도록 일해서 그렇다!’ 그래요, 이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신 것 때문에 무릎이 아프다니요참 가슴 저미는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 일이 그렇습니까? 무릎 아프도록 열심히 돈 벌어서 키워놨더니, 자식이 효도하던가요? 사람 되던가요? 내가 계획하고 생각했던 대로, 가르친 대로 자녀들이 자라던가요?

 

노인들을 대상으로 상담을 하시는 분들이나, 정신과 치료를 하는 의사들은 한결 같이 이런 말을 합니다. ‘자녀들, 계획하고 가르친 대로 절대로 자라지 않습니다!’저희 어머니도 이런 저런 이유로 정신과 의사와 상담을 하시는데, 그 정신과 의사가 그러더랍니다. ‘자식 때문에 속 썩는 일은 없으시죠? 그러면 정말 행복하신 거에요. 저한테 오는 대부분의 노인분들 자식 문제 때문에 가장 속상해들 하세요! 어머님은 두 아드님이 다 목회 잘 하시고 속 안 썩이시니까 감사한거에요!’

 

자녀들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대로, 계획했던 대로 우리의 인생이 그렇게 흘러가던가요? ‘어쩌다 내가 컬럼버스까지 굴러오게 됐나…’ 조지아에는 숲 밖에 없으니까, 대도시에 살다 오신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세요. ‘여기가 사람 살 곳인가? 짐승 사는 곳이지?’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생각하고 계획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내 생각과 계획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착각이고 교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맡기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살몬처럼, 라합처럼, 그렇게 하나님께 맡기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맡겼을 때, 살몬은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었고, 하나님께 맡겼을 때, 라합은 남들 다 죽어나가고 멸망 당할 때 생명이 보존되고 구원 받는 역사가 있었다는 겁니다.

 

기도하는 데, 하나님 말씀 배우고 전하는데 무릎이 한 번 아파 보십시오. 자녀는 기도하시는 부모님, 무릎 꿇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립니다. 이상하게도, 돈 버느라고 수고하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 흘리는 자식 거의 없습니다. 와서 돈이나 달라고 떼쓰지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눈물 흘리면서 간절히 기도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 마음이 허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께 무릎 꿇고, 다리가 저리도록 무릎이 시리도록 기도했을 때 참된 안식과 복이 임합니다. 이건 이 장목사의 가르침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저도 성경에서 배웠을 뿐입니다. 성경에서 배운 것을 가르치는 사람이 목사 아닙니까? 그것을 가르쳐 드리는 것이 이 목사의 의무이기 때문에, 간절한 마음으로 증거합니다.

 

여러분의 무릎은 무엇을 위해 힘쓰십니까? 무엇 하시느라, 무릎이 시리고, 다리가 저리십니까? 생계를 위해서, 즉 돈 버는 일 때문에 무릎이 아픈 것, 그것은 참 거룩한 일이고 훌륭한 일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너무 매몰되지 마십시오. 사람은 기본적으로 돈을 버는 일에 몸을 망가뜨리고, 망가진 몸을 치료하기 위해서 힘들게 번 그 돈을 쓴답니다. 참으로 악순환이죠. 안타까운 일이죠.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맡긴다는 것은 우리가 무능력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인생은 나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즐비합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우리를 지으시고 돌보시는 창조주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맡기는 지혜가 우리에게는 꼭 필요합니다.

 

내 무릎은 무엇을 위해 힘쓰는가? 무엇을 위해 힘을 썼길래 이렇게 아픈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보아스의 아버지 살몬처럼 특별히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데 앞 뒤가 꽉 막히신 분! 하나님께서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유는, 바로 그 자리에서 꿇어 엎드려 기도하게 하시고, 그 무릎이 기도를 위해 힘쓰게 하시기 위함임을 꼭 깨달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무릎이 기도를 위해 힘쓰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 막힌 문제를 부지런히 풀고 계신다는 것을 꼭 깨달으셨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3. 5. 11:57

2013 33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15:1, 6-7, 10-12, 17

제목: 믿음이란 무엇인가? II

 

지난 주에 이어서,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아브라함이 기도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했을 때 두려워했던 상황을 통해서, 믿음이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 두려움은 뱀이나 마귀를 보았을 때나, 높은 곳에 올라갔을 때 느끼는 공포 같은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기게 하는 능력의 두려움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공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도 누군가를 공경하게 되면, 그 사람의 말을 잘 듣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사람은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처럼,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그보다 더 위대한 능력 갖게 되는 것이죠. 이 능력은 무엇인가를 행하는 능력도 포함되지만,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을 쳐서 굴복시키는 겸손의 능력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오는 능력으로 무엇인가를 행하려 했습니다. 16장에 그것이 잘 나와 있는데,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은 것이죠. 믿음이 들어가면, ‘이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뭇별들과 같이 자손을 주시겠다고 했는데, 나이는 들어가고 둘 사이에는 아이가 생기질 않으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행하는 것이죠. 성숙한 믿음으로 가기 위한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성령 받으면, 믿음이 생기면 힘이 먼저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고, 무엇이든지 다 해야 한다는 일종의 열심이 생깁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사라의 몸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들여보내서 자식을 생산하는 것이었습니다. 15 4절 말씀에 보면,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는데, 비록 사라가 낳은 것은 아니지만 그 당시 풍습으로 봐서 몸종 하갈에게서 난 아들은 아브라함에게서 난, 즉 아브라함의 몸에서 난 자가 맞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그렇게 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아브라함과 사라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혼 줄을 내시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 또한 믿음의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17장에 보면, 이스마엘이 하나님께 축복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20절입니다.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여러분, 믿음으로 행할 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그 실패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선하고 아름답게 사용하시고, 그 실패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즉 믿음에서 우러난 행동은, 믿음에서 행한 최선의 행위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서 빗나갔기 때문에 적지 않은 트러블을 만들어 낼지언정, 언제나 하나님께 축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행위인양 가장하고 만들어 내는 트러블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트러블 만들어도 좋다는 말씀이 아니라,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전진하라는 말씀입니다.)

 

,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믿음이 생기면 우리는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다 잘 할 수 있을 것 같고, 어떤 일이든지 해야 한다는 열심이 생깁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성숙한 믿음은 오히려 그 힘을 빼는 데 있습니다. 열심히 하지 않고 뺀질거려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성령이 흘러가는 데로 나 자신을 맡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운동을 좀 진지하게 해 보신 분들은 이 말씀이 무슨 말인지 좀 더 잘 이해 가실 겁니다. 골프를 예로 들면, 힘 주는데 3년 힘 빼는데 3년이 걸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고수가 되려면 힘을 빼야 합니다. 스윙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되어야 공이 멀리 그리고 정확하게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아마추어와 프로, 하수와 고수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얼마큼 힘을 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죠.

 

지금 대만에서 월드베이스볼클래식이 열리고 있는데, 한국팀이 네덜란드에게 졌습니다. 한국은 네덜란드보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앞섭니다. 그런데 왜 졌겠습니까? 힘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꼭 이겨야 한다는 부담감이 작용해서 힘이 들어간 것이겠죠. 힘이 들어가면 집니다. 어떠한 상황에서 힘이 필요 이상 들어가지 않도록 힘 조절을 잘 하는 사람이 진짜 프로입니다.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 사건, 즉 힘 주는 사건을 통해서 이제 힘 빼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18장에 나와 있는 대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세 명의 낯선 나그네의 모습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을 놓치지 않고 잘 대접해서 결국 이삭을 얻는 큰 축복을 받습니다. 18 14절에 보면, “ 여호와께서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하시면서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두 노인네에게 아들을 선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이들은 너무 늙어서 이제는 더 이상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힘이 완전히 빠진 것입니다. 힘 빼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냥 지켜보는 것입니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것이죠.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체험하고 영광 돌리고 감사하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결국 믿음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 이제 우리는 이것이 믿음인 것을 저 십자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으로 다시 돌아와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은 언약입니다. 그 언약을 맺는 의식(Ceremony)가 나오는데, 그 의식을 들여다 보면 믿음이 무엇인지 더 깊은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언약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약속입니다. 현재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장차 그렇게 될 거라는 약속입니다. 언약이 체결되면 쌍방 간에 철저하게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뭇별과 같은 자손을 주겠다고, 그리고 이 땅,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대신 아브라함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그 징표로,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 삼 년 된 숫양, 산비둘기,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다가 새는 그냥 놓아두고, 소와 염소와 양은 반으로 쪼개어 마주 대어 놓는 의식을 행합니다. 하나님과 맺는 신실한 언약은, 땀과 눈물 없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나의 수고와 헌신이 꼭 필요합니다. 솔개가 그 짐승들의 시체에게로 달려들 때 아브라함은 쫓아냈습니다. 언약의 징표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죠. 얼마나 힘들었는지, 해 질 때 아브라함이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이러한 수고로움과 헌신이 있고 난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만나주시고 언약을 맺으십니다.

 

17절 말씀입니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햇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하나님께서 연기 나는 화로와 같은 모습으로, 타는 횃불과 같은 모습으로 임재 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자 이제, 하나님 입장에서는 언약을 성취시켜 주어야 할 의무가 있고,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그 언약이 성취될 것을 믿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믿음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 히브리서 11장의 말씀처럼,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진 줄로 믿고 나아가는 것, 즉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십자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십자가는 무엇에 대한 언약입니까? 우리는 흔히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기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한 사건으로 이해 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만, 이는 십자가 사건을 너무 죄와 관련시켜 본, 십자가 사건을 좁은 관점에서 본 표현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더 큰 틀에서 봐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을 새 창조의 사건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죄에 대한 심판 사건이 맞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장사한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이 부활 사건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믿는 자들에게 주신 언약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었듯이, 누구든지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려 죽지는 않지만, 어느 모양이든 육신을 갖고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다 죽습니다. 거기에서 우리의 인생이 끝난다면 그것만큼 허무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심판 받고, 그냥 끝나버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언약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성실하게 수행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이들에게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언약, 새 창조의 언약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란 바로 이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일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궁극적으로 갖고 있는 믿음입니다.

 

이 언약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될 거라는 언약.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의 미래는 누구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잠 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셨고, 하나님의 맏아들이시고, 우리를 당신과 같은 운명으로 이끄는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에게 생명을 거는 일,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부활하기 위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를 맛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을 빼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그렇게 될 줄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사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19세기 미국 시카고에 스패포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변호사로서 결혼하여 네 딸을 두고 남부럽지 않은 유복한 생활을 하던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부유한 생활을 누리는 성공한 인생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의사의 권유로 부인과 함께 네 딸 아이를 잠시 유럽으로 보냈습니다. 타이타닉 같은 큰 유람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던 중 충돌 사고가 일어났고 그들이 타고 있던 배는 대서양 한복판에서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네 딸은 모두 익사했고, 아내만이 간신히 구조를 받아 살아남았습니다. 같은 시각, 설상가상으로 스패포드는 시카고의 대화재로 모든 재산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현실적인 행복 기반이 대화재로 내려앉은 셈입니다. 최악의 상황입니다. 여느 사람 같으면 극심한 절망에 빠져서 도저히 헤어나지 못할 그런 상황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창조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스패포드 역시 잿더미 속에 놓여 있으면서도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고백을 드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흐르고 있는 찬송가 입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활을 이미 경험한 믿음의 사람들은 걱정 근심에 사로 잡혀 살지 않습니다. 두려운 것도 없습니다. 그저 예수 안에서 평안을 누릴 뿐입니다. 마귀가 달려와서 우리를 삼키려 해도 예수님께서 우리의 대장되시고, 최후의 승리를 믿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내 지은 죄가 아무리 주홍 같다고 해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이미 새로운 피조물, 흰 눈 보다 더 깨끗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걱정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다시 오실 그 때에도 우리는 이미 천국 인침을 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생명을 건 인생, 부활의 새 창조의 역사를 믿는 인생은, 평안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는 마음으로 이 찬양 함께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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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2. 25. 07:41

2013 2 24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15:1, 6-7, 10-12, 17

제목: 믿음이란 무엇인가?

 

영어로는 Faith. 우리 나라 말로는 믿음 또는 신앙. 믿음생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이지만, 가장 손에 잘 안 잡히는 것이 바로, 믿음,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지금 믿음생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무엇을 믿는지, 무엇을 신앙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묵상 없이, 남들이 하니까 그냥 하는, 군중심리적 요소를 품고 믿음생활, 신앙생활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저는 이것을 파블로프의 신앙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러시아의 과학자 파블로프가 이런 실험을 했었습니다. 개에게 밥을 주기 전에, 종을 언제나 울렸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후, 종소리만 나도 개는 밥을 주는 줄 알고 침을 줄줄 흘렸습니다. 개밥을 주지 않았는데도, 그냥 종소리만 울렸는데도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실험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 시사해 주는 바가 큽니다.

 

일요일이니까 교회 가고, 아침 기도회 하니까 교회 나오고, 교회 봉사해야 할 차례이니까 봉사하고 등, 무엇을 위해서 왜 교회에 나와야 하고 봉사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 없이, 그저 조건반사적으로 교회 나오고 봉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믿음이란, 신앙이란 무엇인지,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신앙하는지 왜 믿는지, 신앙하는지를 깨달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언약(Covenant)을 맺는 사건을 기록한 부분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아브라함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전과 이 후에도 하나님과 믿음의 사람 사이에 맺어지는 계약들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으로, 노아 언약(무지개 언약), 다윗 언약 등이 그것입니다. 이들 언약 중에서, 구약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언약이 바로 오늘 등장하는 언약입니다.

 

1절 말씀에서 우리가 잠시 볼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은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전에 교회 건축 프로젝트인 막벨라 프로젝트을 진행하면서 첫 번째 구호가아브라함처럼 기도하자로 정한 것입니다.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임했다는 말이, 바로 아브라함이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브라함이 길 가다가 환상을 보았겠습니까? 뒷간에서 볼 일 보다가 환상을 보았겠습니까? 아브라함이 기도하다 환상을 보았다는 것이죠.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줄로 믿습니다.

 

환상 중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대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 하나님을 대면하는 사람이 갖는 마음은 두려움입니다. 교회생활 하다 보면, 저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지 아닌지를 보면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생활 하면서 어떤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 맞나, 의문이 생길 정도로, 성격을 드러내시는 분이 있습니다.

 

복음성가 작사가 중에 송명희라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양 중를 작사하신 분입니다. 이 분이 작사하신 곡 중에, “참소경이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참소경이 누구인가, 세상을 못 보는 사람인가, 참소경이 누구인가, 세상을 못 보는 사람인가, 아니라, 아니라, 주님을 못 보는 사람 아닌가!” 이렇게 부르는 찬송입니다. 누가 소경입니까? 하나님이 안 보인다고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자기 맘대로 사는 사람이 진짜 소경인 겁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압니다. 하나님 두려운 줄 아니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거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의 이웃에게 해를 끼치거나 맘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공중에 나는 새도 하나님이 아끼시고, 내가 보기에 좀 모자라고 짜증나는 사람도 하나님이 아끼시는데, 내가 어떻게 저 새를, 저 사람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할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6절 말씀처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없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이 어떻게 내 남편, 내 아내, 내 형제 자매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갈등이 왜 생깁니까? 서로가 서로를 우습게 여기고 막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 서로가 서로에 대한 존중하는 마음은 우리 인간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경외하는 마음을 가질 때, 비로서 거기에서 이웃에 대한 존중하는 마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남편이 우습게 보이시거나, 아내가 우습게 보이시거나, 형제 자매가, 또는 내 이웃이 우습게 보이는 분이 있다면, 자기 자신을 한 번 살펴 보십시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어느새 삭으라든 것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반대로, 남편이 사랑스러워 보이고, 아내가 사랑스러워 보이고, 형제 자매가, 또는 내 이웃이 사랑스럽게 보이는 분이 있다면, 자기 자신을 한 번 곰곰이 들여다 보십시오. 자신도 모르는 사이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이 만큼 자라 있는 것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무엇이 중요한 것입니까?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서 있으면 내 옆에 있는 사람(남편, 아내, 자식, 형제자매, 이웃)과의 관계가 편안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어긋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실질적인 관계 회복으로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금 좋다고 해서, 몇 년 동안 불편한 관계 속에서 살아오던 사람과 갑작스럽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하하호호웃으면서 살게 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마음 가짐이 변한다는 것이죠. 꼴보기 싫어서 돌아누워 자던 부부 사이, 아예 방을 따로는 쓰는 부부사이였는데,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졌다고 해서 한 방에서 한 이불 덮고 오손도손, 그렇게 금방 좋아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돌아누워 자더라도, 여전히 각 방을 쓰더라도 남편을 향한, 또는 아내를 향한 마음이 달라진다는 것이죠. 그 사람을 향한 긍휼한 마음과 간절한 마음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면, 실제적인 관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여도, 이미 그 안에서 착한 일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빌립보서 1 6절에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해 전하고 있는 복음입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믿음이란, 신앙이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내 안에 충만한 것. 그래서 (두려워서) 아무 일도 못하는 것이 아니라, 1절 후반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그 마음이 나의 방패가 되고 상급되어서, 나의 힘이 되어서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나의 마음을 움직여, ‘착한 일을 시작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 신앙입니다.

 

종소리 나니까, 이유도 없이 그냥 밥 주나 보다 하고 침을 줄줄 흘리는 조건반사적인 신앙이 아니라, 내 안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즉 하나님을 진짜 대면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진짜로 듣기 때문에 움직이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 신앙의 사람입니다. 그 두려움은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는, 꼼짝 못하게 하는 두려움이 아니라, 내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게 하시는, 그야말로 두려움 없이 착한 일을 감당하게 하시는 엄청난 에너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산을 걸어가다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서 추락하던 중 간신히 나뭇가지를 잡았습니다. 거기에 댕그랑 댕그랑 매달려 있으면서 소리쳤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손을 놓아라!”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소리쳤습니다. “여기 누구 다른 사람 없어요!”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간신히 잡은 나뭇가지를 놓는 것이 두렵습니까? 아니면그 손을 놓아라!’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더 두렵습니까? 나뭇가지를 놓는 것, 두렵죠. 떨어져 죽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 잡은 손을 놓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시는 두려움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6.25 한국 전쟁 때 참전군 중에 빌이라는 미국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전투중에 폭탄을 맞아서 하반신이 완전히 마비되었습니다. 목 이하는 완전히 마비되고 팔 다리를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대소변도 자기 스스로 가리지 못했습니다. 목 위만 겨우 신경이 통해서 볼 수 있고, 말하고 들을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한 상태로 평생을 그렇게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내 스텔라가 보험 외판원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병실을 지키며 3년이란 시간이 지났습니다.

 

아내 스텔라가 병상에서 남편의 손을 잡고 울며 기도하면서 남편에게 이혼을 제안했습니다. “여보, 도저히 나는 병실에서 이렇게 생활할 수 없으니 우리 헤어지도록 합시다. 당신은 국가에서 주는 연금으로 치료받으며 병원에서 생활할 수 있으니, 나는 나의 삶을 살아야겠어요. 나를 놓아주세요!” 그때 밀이 눈물을 글썽이며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복을 빌겠소. 그러나 하루만 더 참아주구려…” 그 날 밤 빌은 병상에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 주여, 내게 함을 주시옵소서. 성령의 능력으로 나를 일으켜주옵소서.” 그 순간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마비되었던 손이 움직이고 발가락이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얼굴에 생기가 돌았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로 몸을 회복한 빌은 그 후 훌륭한 전도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내가 이거 놓으면 죽을 것 같아.’라고 생각이 드는 두려운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 명예, 건강, 또는 긴장감, 복수심? 그것 때문에 지금 내가 죽어가고 있고, 그것 때문에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가 엉망진창인데도 불구하고, 두려움 때문에 놓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 착한 일을 시작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즉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서는 지금 무슨 착한 일이 시작되었습니까? 들리지 않던 말씀이 들리시나요? 일어나지지 않던 몸이 일어나져서 아침 기도회에 나오시나요? 꼴도 보기 싫었던 남편을 위해서 눈물 흘리면서 기도하시나요? 쳐다보기도 싫었던, 원수 같았던 형제자매를 생각하면 애통하는 마음이 생기나요?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얼굴 대면하기 싫어서 안 보이는 길로 돌아가게 만들었던 이웃을 위해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되었나요? 습관에 좇아 나오던 예배가 기다려지고 기다려지시나요? 이러한 변화가 있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그 믿음이 내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

 

아메리가 인디안들은 소년들의 용기를 훈련하기 위해 독특한 방법을 썼습니다. 이들은 소년들에게 숲 속에서 야생동물들과 함께 밤을 지새게 만들면서 소년들의 담력을 키웠습니다. 담력 훈련을 받는 날, 소년은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러나 날이 밝아오면서 소년은 그의 아버지가 가까운 나무 뒤에서 화살을 당긴 채 지키고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아들 몰래 아버지는 아들에게 위험이 닥치지 않게 밤새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지키십니다. 우리가 누구를 두려워해야겠습니까? 우리의 방패 되시고 상급이 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길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바라건데,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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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3. 2. 22. 03:14

군자삼락(君子三樂):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는 말

 

전국 시대, 철인(哲人)으로서 공자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맹자(孟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君子有三樂(군자 유삼락)]. 첫째 즐거움은 양친이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요[父母具存 兄弟無故(부모구존 형제무고)]. 둘째 즐거움은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구부려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요[仰不傀於天 俯不作於人(앙불괴어천 부부작어인)]. 셋째 즐거움은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다[得天下英才而敎育之(득천하영재 이교육지)]”. - 맹자(孟子) 진심편(盡心篇) -

 

군자의 즐거움은 조금 더 고차원적인 즐거움입니다. 인간에게는 이것보다 더 근본적인 즐거움이 존재합니다. 식량공급과 안보, 그리고 자녀가 그것입니다. 이것은 모두생명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즐거움입니다.

 

식량은 생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식량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인간은 즐거움을 모른 채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식량공급도 안보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구약의 많은 이야기들이 이와 연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께 왕을 구한 것도 결국안보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생명에 가장 기본적인 식량공급을 위해 힘쓰고 애씁니다. 그러나, 애쓰고 힘써서 얻은 식량을 누군가에 의해 약탈 당할 때의 허탈감이란 곧죽음과 같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해서 살던 이스라엘은 열심히 식량공급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런데 추수가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주변 나라의 폭군들이 쳐들어와 생명과도 같은 식량을 약탈해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그들의 여호와 하나님께 울부짖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안보를 강화시키기 위한 방책으로 그들은을 요구했던 것이죠. 이것이 좋은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좀 더 근본적인 것을 잃어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 이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왕을 의지하다, 결국 주변 나라 정세를 잘못 읽는 실수를 범해 나라가 망하고 맙니다.

 

이에 대해 예레미야 선지자는 시적인 수사법을 동원해 이스라엘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강하고 오래된 민족이 와서 그들의 삶을 피해하게 만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들이 네 자녀들이 먹을 추수 곡물과 양식을 먹으며 네 양 떼와 소 떼를 먹으며 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열매를 먹으며 네가 믿는 견고한 성들을 칼로 파멸하리라”( 5:17).

 

이것을 통해서 예레미야가 파멸해가는 이스라엘에게 지적하고 싶었던 것은 이들이 이렇게 무력하게 무너지는 이유는 엉성한 군사대책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를 무시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했던 이스라엘이 당해야 했던 대가는 엄청났습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즐거움인 식량공급, 안보, 자녀 등 모든 것을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신앙이란 인간의 기본적인 즐거움을 보이지 않게 떠받치고 있는 기둥과도 같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식량공급, 안보, 자녀 등을 통해서 즐거움을 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을 보이지 않게 보장해 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결국 이것으로 끝나는 것 같습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시편 33:1).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시편 64:10).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7-18).

 

군자는 세 가지의 즐거움을 가지고 있지만, 신앙인은 오직 한 가지의 즐거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즐거움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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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2. 19. 23:24

2013 217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4:1-15

제목: 성령과 말씀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 받으시는 이야기 입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날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라고 기도합니다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한, 시험이란 사실 피할 수 없는 과제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란 시험에 들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시험에 들더라도 그것을 이겨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마태복음 5 11, 1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그러나, 우리 삶 속에 실제적으로 시험이 다가올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일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시험 사건에서, 기쁘지 않고 즐겁지 않은 시험이 다가왔을 때 그것을 어떻게 기쁘고 즐겁게 이겨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 한 번 배워보려고 합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지만, 배우는 것과 실제 내 생활 속에서 그 배운 것을 실천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식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호세아서 4 6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시험이 다가왔을 때 우왕좌왕하지 마시고, 오늘 배운 말씀대로 한 번 해 보십시오.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고, 하늘에서의 상이 클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 전에 나오는 이야기가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그 끝이 어떻게 끝나냐면,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로 끝납니다. ,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사가 광야에서의 시험 이야기인데,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계속해서 사용하는 호칭이 바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입니다. 이게 예수님에게만 적용되는 호칭이 아닙니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한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요한복음 1 12절은 우리에게 이 사실을 확인시켜 줍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할 때도 이 수법을 이용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네가 하나님의 딸이어든.” 이렇게 마귀는 속삭입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의 아이덴티티(Identity)이고 디그니티(dignity)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 장준식은 육신으로는 아버지 장영산과 어머니 오세숙을 통해서 이 세상에 왔지만, 나 장준식의 근원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여러분 각자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우리의 아이텐티티, 신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디그니티, 품위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왕족을 한 번 만나보셨습니까? 저는 두 명의 왕족을 만나 보았는데, 한 명은 실제로 말레이지아의 국왕이었고, 다른 한 명은 남태평양 통가 왕국의 왕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자태가 다릅니다. 말레이지아 국왕은 제가 한나절 함께 모시면서 쇼핑도 시켜드리고 식사도 함께 해 보았는데, 품위가 다릅니다. 자기 자신 스스로를 왕이라고 인식하니까, 그냥 왕이니까, 왕답게 행동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살아갑니까? 나는 어떤 품위를 가지고 살아갑니까?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에 대한 확실한 신분인식과 그에 걸맞는 품위가 필요합니다. 곧 죽어도,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품위 있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예수님도 그것을 아주 잘 아셨습니다. 그것을 잘 알 수 있는 길은, 성령을 충만하게 받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4 1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증거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성령 충만하면, 내가 누구인지 나에 대한 인식이 올바로 생깁니다. 성령 충만하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성령 받지 않으면, 사람인지 멍멍이인지 분간이 안 갑니다.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는데, 그 형태가 그 옛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시험 받을 때와 똑같습니다. 시험은 이러한 유형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시험이 세 가지인데, 하나는 돌을 빵이 되게 하라. 둘째는 마귀한테 절하면 권위와 영광을 네게 주겠다. 셋째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그러면 하나님이 너를 지켜주실 것이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어떻게 시험 받았는지 출애굽기와 민수기, 그리고 신명기를 보면 잘 나와 있는데, 첫 번째 시험은 출애굽기 16 3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모세와 아론)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40일 동안 굶주렸으니, 얼마나 배가 고프겠습니까? 바로 그 약점을 치고 들어옵니다. 가장 필요한 부분을 치고 들어오는 것이 마귀의 계략입니다.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에게는 마귀가 재정적인 부분으로 시험을 걸어옵니다. “네가 그리스도인이냐?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자녀냐? 그러면 하나님이 너를 궁핍하게 하시겠느냐? 네가 지금 배고파 주겠는데, 하나님한테 십일조 바칠 돈이 어디 있어? 하나님, 다 이해하실 거야. 그거 가지고 맛있는 거 사먹어. 그리고 빨리 이 빈궁한 생활에서 벗어나야지, 남 도와줄 여유가 어디 있어 내 코가 석자인데, 그 돈 가지고 헌금할 여유가 어디 있어? 그럴 돈 있으면 도박하거나 복권 사라. 하나님께서 다 이해해 주실거야. 도박해서 돈 따고, 복권 당첨되면 그 동안 못 냈던 헌금, 100배로 쳐서 많이 내면 되잖아. 그러면 너도 좋고, 하나님도 좋은 거 아니야? 하나님이 오히려 잘 되라고 도와주실걸?”

 

자신에게 약한 부분, 건강이면 건강, 자식이면 자식, 아무튼 자신에게 있어 약한부분을 치고 들어오는 것이 마귀의 계략입니다. 그 부분이 무엇인지, 각자 다 알고 계실 겁니다. 내가 약한 부분이 뭔지 아는 것도 은혜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 그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께 기도 드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약한 부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도 안 하는 것은, 아직까지 그것이 약한 부분인지 절실하게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통해서 마귀가 공격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장 약한 부분은 배고픔이었습니다. 마귀는 그 부분을 치고 들어왔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하지만, 성령 충만했던 예수님은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방어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당신의 약점을 파고 들어오는 마귀를 물리치십니다.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으니라.” 이는 신명기 8 3절 말씀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두 번째 시험은 신명기 614절 이하에 나오는 시험과 똑같습니다.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르지 말라 너희 중에 계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마귀는 영광과 권세를 약속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얻는데 있어서, 잘못된 방법으로 영광과 권세를 얻도록 부추깁니다. 영광과 권세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마귀가 아닙니다. 그런데 마귀는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자기에게 절하면 자기가 영광과 권세를 주겠다고. 이건 거짓입니다. 하지만 아주 달콤한 거짓입니다. 마귀는 그러한 것을 줄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얻게 끔 하기 위해서, 거짓된 방법을 쓰도록 합니다. ,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악한 수단을 쓰게 합니다.

 

지금도 시행되고 있는 지 모르겠지만, 몇 년 전 조지아 정부에서 슈퍼 교통법을 시행했습니다. 거기에서 걷힌 돈으로 교육 사업 등 공공사업에 쓴다고 합니다. 교통법규를 어기면 물게 되는 범칙금에 무조건 200달러를 부과하는 교통법입니다. 좋은 일 하려고, 서민들의 주머니를 털어가는 것이죠. 복권 사업도 정부에서 조장합니다. 복권에서 나온 세금 가지고 공공사업에 투자를 하지만, 복권에 애딕션되어서 인생을 망치며 사는 사람들의 삶은 돌보지 않습니다. 카지노를 건설합니다. 라스베가스에 카지노가 있습니다. 그것을 건설할 때 목적이 좋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미국 원주민들(인디안들)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통해서 인생이 망가지는 사람에 대해서 그들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마귀는 모두 이런 식입니다. 선한 목적을 위해서, 악한 수단을 쓰게 끔 우리를 부추긴다는 것이죠. 이러한 마귀의 계략을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를 섬기라 하였으니라.” 이는 신명기 6 13절의 말씀입니다.

 

마지막 시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테스트 해보던 것과 똑같습니다. 출애굽기 17 3절에 보면, “당신(모세)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면서 하나님을 테스트 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는데, 그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습니다. 그 뜻이,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다는 뜻이고, 17 7절에 보면 이 사건을 일컬어, “그들의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고 합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떨어지는 너를 붙잡아 지켜주시지 않겠느냐?” 마귀의 이 유혹은 결정적이고 치명적입니다. 마귀는 성경구절까지 인용합니다. 시편 91 11, 12절입니다.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하나님의 계심이 이런 것으로 증명이 됩니까? ‘하나님, 하나님이 계신다고 그랬죠? 자 그러면 제가 이제 운전대를 놓습니다. 하나님이 만일 계시면 이제 하나님이 운전해 보세요.’ 그러면서 운전대를 놓으면, 하나님께서 운전해 주십니까?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가장 많이 유혹을 받는 형태가 바로 이 세 번째 시험의 형태입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하나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 시험하면서 삽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으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하는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어떻게 이기시는지, 두 가지가 나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성령 충만하셨고, 다른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귀를 물리치는 검과 같이 사용했다는 겁니다. 오늘 말씀 제목과 같이, 성령과 말씀, 이 두 가지가 마귀를 물리치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말입니다. 성령 충만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날마다 부르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예수님 도와주세요.’ ‘예수님 긍휼히 여겨주세요.’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 보십시오. 매순간, 쉬지말고, 불러보십시오.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을 잘 배우십시오. ‘아차하는 긴박한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떠오를 수 있도록, 말씀으로 나의 뼈와 살, 피를 채워야 합니다. 율법이 613개인데, 왜 율법이 613개이냐하면, 사람의 뼈마디가 248개이고, 일 년이 365일이니까, 248개의 뼈마디마디 마다, 365일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 넣으라고, 248 더하기 365 하면 613개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려면 살아갈수록 마귀의 시험은 거세집니다. 특별히 사순절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이 시간. 시험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겁니다. 예수 믿으면, 내 삶에 있던 모든 문제가 해결 받고, 마음이 평안해 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예수를 사랑하면 더 사랑할수록 아무런 문제가 안 일어나고, 시험에 들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폭풍 속에서도 평안함을 느끼는 삶을 사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널 때, 폭풍이 일었습니다. 제자들은 폭풍 속에서 안절부절 못했지만, 예수님은 배 밑바닥에 머리를 대로 편안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배에 누워 계시는 한, 폭풍은 그 배를 뒤엎을 능력이 없습니다. 내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내가 지금 시험을 당하고 있더라도, 내 안에 예수님께서 살고 계시면 아무것도 나를 뒤엎을 능력이 없습니다. 이것만 안다면, 우리가 어찌 평안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순절기 동안, 이것을 한 번 연습해 보시고,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충만함을 받아, 말씀으로 시험을 물리치시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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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3. 2. 8. 05:08

일사천리(一瀉千里): 신속하게 일을 처리함 / 말이나 글이 조금도 거침이 없음

 

중국의 長江(장강:양자강)黃河(황하)는 엄청난 스케일로 유명합니다. 각기 중국을 서에서 동으로 쌍둥이처럼 흐르면서 대륙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자연히 두 강은 예부터 시인묵객의 좋은 벗이 되어 명시나 명화에 빠짐없이 등장합니다. 남송의 학자 진량(陳亮)은 여신유안전찬(與辛幼安殿撰)이라는 글에서 장강의 위용(偉容)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長江大河 一瀉千里 不足多怪也 (장강은 대하이니 일사천리로 흐른다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이처럼 一瀉千里 본디 장강이 거침없이 천리를 내닫는 모습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그것이 지금은 장강의 흐름처럼 어떤 일을 매우 신속하고 거침없이 처리하는 것을 비유하게 되었습니다. - '엄산당별집' –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국가반란죄를 뒤집어 씌운 로마당국이나, ‘신성모독죄를 뒤집어 씌운 유대종교지도자들이나 모든 것이 눈 깜짝 할 사이에 처리되기를 바랬습니다. 게다가 절대로 죽은 자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죽은 시체를 어서 빨리 처리하기 위해서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야만 했습니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빨리 돌아갑니다. 물론 옛날이 지금보다 모든 것이 훨씬 느리게 돌아갔겠지만 지구의 자전만큼이나 바뀌지 않는 것이 인간 마음의 조급함일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그것이 자신의 허물을 감추는 것이나, 자신을 높이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무엇인가 분주한 사람들이 진리를 보고 듣고 깨닫기에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누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달았을까요? 일사천리로 진행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본 사람은 누구일까요? 진리는 속도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너무 빠르게 가면 보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잠깐 멈추어서 보면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는 멈출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은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로마 당국자는 자신들이 표방하는 팍스 로마나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평화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됐던 예수님을 십자가 처형에 내어주었습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한다고 생각됐던 하나님의 아들을 오히려 신성모독죄를 씌워 죽였습니다. 십자가에 예수를 못박으라고 외쳤던 민중들도 자신들의 과도한 구원의 욕망을 멈출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가 진짜 구원자인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멈추어 서서 하늘을 우러러 볼 줄 알았습니다. 들에 핀 꽃 한 송이, 날아다니는 새 한 마리, 그리고 병들고 배고픈 민중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분의 처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지만, 그분의 사랑은 멈추지 않으면 베풀어지지 못하는 형태로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멈추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빠르게 살아갑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멈춤의 영성을 기르기 위한 가장 손 쉬운 일 한 가지는 자신의 두 발을 교통수단으로 삼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쯤은 걸어보시지요. 무엇이 보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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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3. 2. 2. 06:40

명경지수(明鏡止水): 맑은 거울과 조용한 물이라는 뜻으로, 티없이 맑고 고요한 심경을 이르는

 

춘추 시대, 노나라에 왕태라는 학덕이 높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유교의 비조(鼻祖)인 공자와 맞먹을 만큼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자의 제자인 상계(常季)는 불만스럽다는 듯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 올자(형벌에 의해 발뒤꿈치가 잘린 불구자)는 어째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흠모를 받고 있는 것입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마음이 조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거울 대신 비쳐볼 수 있는 물은 흐르는 물이 아니라 가만히 정지해 있는 물이니라.” - 장자(莊子) 덕충부편(德充符篇) –

 

톨스토이는 덕이 있는 사람이란 자기 인생의 의의(意義)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기 인생의 의의를 알고 있는 덕 있는 사람이 곧 명경지수가 아니겠는지요? 자기 인생의 의의를 아는 사람은 결코 흔들림이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자기 인생의 의의를 알게 되는 것을 일컬어 소명(Vocation)이라고 합니다. 소명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가지고 계신 계획을 의미합니다. ‘내적 부르심이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할 수도 있고, ‘인생의 목표라고 부를 수도 있겠네요.

 

사도 바울의 소명은 이방선교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무단히 노력을 합니다. 선교를 다니면서 박해를 받아 죽을 고비를 한 두 번 넘긴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생계를 위해서 천막 짓는 일도 합니다. 물론 동역자들을 만나 생계를 해결하기도 하지요.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특정한 직업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이러 저러한 것들이 동원될 뿐입니다. 소명을 받았던 사도 바울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지만, 그의 마음은 오직 한 곳만 바라보았습니다. 마음이 집중되니, 마음이 잔잔하니, 세상 풍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을 통해서 명경지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3:1). 여기에 등장하는 부르심을 받은이 바로 소명입니다. 하나님께 소명 받은 사람은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는 영어로 ‘fix your thoughts on Jesus’인데, 생각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사시나무처럼 흔들릴 때 소명에 대하여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나의 인생의 의의를 도대체 알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소명이 흐려질 때 우리의 마음은 소명이 흐려진 만큼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소명이 분명할 때 우리의 마음은 소명이 분명한 만큼 고요해질 것입니다.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답게 자기 인생의 의의를 분명히 깨닫고 사는 명경지수의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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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3. 1. 19. 01:49

1. 고난을 진지하게 대하는 영성 (욥기 1:1-12)

 

고난에 대한 명언들이 많다. 그 중 기억에 남는 명언은 세 가지 정도다: 1) 고난은 가면을 쓴 커다란 행운이다 영국속담, 2) 고난이 없으면 성공도 없다 소포클레스, 3) 고난은 의식의 시작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이 중에서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고난에 대한 명언을 좋아한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고난을 좋아할 이유도 없다. 고난에 대한 명언들은 모두 고난을 미화(美化)’시키고 있지만, 명언들에서 미화되고 있는 고난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못하다.

 

대개 사람들은 고난을 만나면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고난에 걸려 넘어지거나, 고난을 외면하거나. 고난이 아무리 주는 유익이 크다고 미화되고 있어도, 고난을 겪고 나면 인생에는 고난의 얼룩이 남게 마련이다. 그리고 고난을 통해서 얻는 것도 있지만, 잃게 되는 것 또한 만만치 않다. 그래서 인간은 되도록이면 고난을 피하는 것이 좋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은 사실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고난은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은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고난이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고난을 당하면 사람들은 대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원인을 자꾸 묻곤 한다. 특별히 기독교인들은 고난이 닥치면 신앙이 위축된다. ‘내가 뭐 잘못했나?’ 영락없이 죄책감에 휩싸인다. 그리고 모든 고난을 죄의 문제로 치부하며, 결론을 회개로 이끌어 간다.

 

사실 신앙인의 입장에서 이것만큼 고난의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고난이 닥쳤을 때 무조건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시고, 이 고난을 거두어 주시며, 제게 다시 당신의 은총을 허락하옵소서하면 오히려 겸손해 보이고 신앙심도 좋아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고난을 정당하게 이겨내는 방법이 아니다. 이것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을 이겨내는 신앙적인방법 같으나, 깊이 들여다보면, 고난의 문제를 살짝 비켜가는 처세술에 불과하다.

 

한 번 자신에게 질문해 보자. 인생을 살면서 맞닥뜨린 고난 중,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진실로 만난 적이 있는지를. 위의 회개의 기도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께 아부해서 지금 당하는 고난에서 빨리 벗어나기만을 바라는 얄팍한 수사적 표현일 뿐이다.

 

그렇다면, 고난을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욥기에서 배운다. 욥기는 우리를 고난을 진지하게 대하는 영성의 세계로 인도한다. 고난을 당했을 때 가볍게 회개기도를 통해서 고난을 넘기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온 존재를 다해 직면해서 그 고난에 임재하고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영성을 가르쳐 준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고난은 쓰레기에 불과하다.

 

욥기에 나타나고 있는 고난의 영성은 대게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고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고난을 직면한다는 것은 현재 나에게 일어난 고난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다. 대게 사람들은 자신에게 고난이 닥치면 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하면서 고난을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고난을 겪으면서도 더 이상의 진전 없이 마음만 상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기서 속으면 안 된다. 우리는 고난을 겪으며 마음만 상한 상태로 그 고난을 시간 속에 묻어 둔 채 사는 것을 산전수전다 겪은 양 생각한다. 그 자체로 어느 정도의 유익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고난의 기억은 나의 인생의 에너지가 되지 못하고, 그림자만 될 뿐이다. 그러므로, 고난을 겪을 때 우리는 온 몸을 다해서 그 고난을 우리 인생에 수용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을 억누르지 않는 것이다. 고난은 엄청난 에너지를 소진하게도 하지만, 엄청난 에너지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 에너지가 바로 분노의 에너지다. 분노를 잘 다스리지 못하면 이는 필경 범죄로 이어진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범죄의 대부분은 인생의 고난에서 생성된 분노의 에너지를 잘못 다스려서 생긴 것들이다.

 

그렇다면 고난으로 생성된 분노의 에너지를 어떻게 해야 건전하게 풀 수 있는 것일까? 이 세상에서 고난의 분노를 받아줄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분노해야 한다. 신앙인은 이것을 잘하지 못한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서 분노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분노를 엉뚱한 데가 풀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범죄자가 된다.

 

고난의 분노를 하나님을 향해 푼다는 것은 하나님께 자신의 상황을 그대로 탄원하는 것을 뜻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대한 자신의 분노를 숨기지 않으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그리고 오히려 자기를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은 용서하셨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이들은 자기들이 지금 무슨 죄를 저지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노와 좌절감의 표현을 방향 없이 허공에 또는 애꿎은 이웃에게 하지 말고, 하나님께 향하여 해야 한다.

 

세 번째 단계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고난을 삶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고난의 분노를 하나님을 향해 풀었다면, 이제 그 고난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을 만날 차례다. 왜냐하면, 고난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욥의 고백은 옳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욥기 2:10).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고난을 통해 겪는 고통이 가라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고난에 의해서 생성된 분노와 좌절의 에너지를 선한 것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뿐이시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세상의 분노와 좌절이 절정에 다른 자리이다. 분노와 좌절의 끝은 죽음이다. 죽음은 부정적인 에너지의 끝이다.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이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부활이 일어났다. 부활은 부정의 에너지를 긍정의 에너지로 바꾼 새창조의 사역이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창조의 능력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한다. “고난은 의식의 시작이다.” 고난을 통해서 무엇을 의식하기 시작할 것인가? 바로 하나님이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면 그 고난은 그냥 형벌로 남겨질 것이고, 그림자 같은 상처만 남길 뿐이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의식하는 자는 고난을 통해 거듭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욥기에서 바로 이것을 봐야 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