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2012. 11. 19. 17:40

천적

 

오늘도 아들에게 지고 말았다

애 엄마는 늘 성화다

초콜릿 주지 말라

아이스크림 주지 말라

TV 많이 보여주지 말라

아이폰 주지 말라

이 영악한 것이

금지된 사과를 따먹고 싶을 때면

어김없이 나에게 와서 조른다

,

아내의 잔소리는 받아낼 수 있지만

아들의 여우짓은 도저히 피할 수 없다

그래,

아들은 나의 천적이다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술집  (0) 2012.11.23
느낌표  (0) 2012.11.19
어떤 크리스마스 이브  (2) 2012.11.07
서두르지 말라  (1) 2012.11.07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3  (0) 2012.11.07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11. 19. 17:33

2012 11 18일 주일 예배 설교 (추수감사주일)

본문: 히브리서 3:1-6

제목: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신앙생활과 극기훈련은 다릅니다.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새벽기도나, 수요예배나, 주일예배를 성실히 참여하는 것도 극기훈련처럼 보입니다. 신앙생활 생활과 극기훈련이 무엇이 다릅니까? 신앙생활은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극기훈련은 자기 의(의지)로 합니다. 신앙생활은 은혜로 하기 때문에 결과가 감사가 나옵니다. 극기생활은 자기 의로 하기 때문에 자기 자랑만 나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극기훈련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들어나는 것은 비슷합니다. 왜냐하면, 모두 열심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이 열심이라는 것이 단순히 나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깊이 생각해 보면 열심을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라고 나옵니다. ‘함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calling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들을 일컬어, ‘거룩한’, ‘형제들아라고 합니다. 거룩한, ‘하기오스’,라고 하는데, 이것을 성도라고 한다. 우리는 서로서로 성도 외에, 형제자매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성도인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형제자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부르는 호칭은 그래서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아서 하는 삶이 신앙생활이고,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은혜라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아서 신앙생활 하기 때문에 우리 삶 가운데는 감사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성도들아, 형제들아,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우리 나라 말로 들을 때는 조금 덜 마음 속에 오는 것 같은데, 영어로 보면, “Fix your thought on Jesus”라고 합니다. 시선이나 생각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시키라고 합니다.

 

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을까요? 이 당시에 히브리서를 받아보는 성도들, 형제들이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박해와 핍박이 몰려오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되다 보니, 예수에게 고정되어 있었던 생각이 자꾸 다른 데로 갔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거룩한 성도로서 감사함으로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이 극기훈련인지 신앙생활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무슨 신앙의 형태를 가지고 교회를 다니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이유는, 우리의 시선이라든지 우리의 생각이 예수에게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꾸 딴 데를 쳐다봅니다. 예수 외에 딴 데를 쳐다보게 하는 작전이 마귀의 작전입니다. 우리는 자꾸 거기에 말려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예수에게 시선을 집중하여라!” 왜 예수에게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까? 우리가 예수가 누구인지 잘 알아야 시선을 집중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을 사도요 대제사장이라고 합니다. 우선 예수님을 사도라고 합니다. 우리는 사도라고 생각하면 금방 떠오르는 인물들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사도는 좀 더 큰 의미에서 사도입니다. 사도란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사람을 일컫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사람에게 보냄을 받은 것도 아니고, 마귀한테 보냄을 받은 것도 아니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보냄을 받았기 때문에 사도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주일예배에 오신 여러분들도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은 사도인 줄로 믿습니다. ‘사도 000’이라고 서로 불러 봅시다.

 

그리고 예수님은 대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재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로서 하나님께 보냄을 받고, 하나님과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 중재하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그러나 구원이라고 하는 것, 기독교의 구원을 잘못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느 종교에서는 내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 구원입니다. 내가 열심을 내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일종의 극기훈련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그것이 구원이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구원은 하나님께 우리는 찾으시고 부르시는 것, 이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의 시작과 구원을 이루시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찾아오시고 부르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은혜라고 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제가 우리 아들한테, ‘건유야 이리로 와봐!’하면 건유가 어떻게 할까요? 아버지가 아들을 이리 와봐하고 찾는 겁니다. 아버지가 부를 때 아들이 하면서 달려오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부르실 때 하고 응답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찾으심과 부르심이 있어야 하고, 동시에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부르심에 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아들을 불렀는데, ‘싫어요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불순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부르시고 찾으시는데, 아버지가 부르시는데 하고 가는 것이 온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기본적으로 응답(믿음)’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이것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부르실 때 하고 대답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완악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상하게 완악한 사람 빼 놓고는 아버지가 부르실 때 하고 대답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는 백성들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부르신다, 찾으신다할 때 거기에는 믿음이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비교하고 있냐면, 2절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그 집을 잘 다스리셨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 나라 말로는 그냥 이라고 번역했지만, 이것을 오이코스라고 하는데, 이것을 다른 말로 가족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생각할 때 건물을 생각합니다만, 교회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오늘 도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의미합니다. ‘권속이라는 말을 아시죠? 이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응답해서 거기에 속해 있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까, 모세는 가족에 속해서 거기서 종으로서 이 가족이 하나님께 잘 갈 수 있도록 봉사를 한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6절에 보면, 그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 가족을 이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종으로서 섬겼지만, 예수님은 아들로서 섬겼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예수님 가운데 누가 높습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부르심, 구원을 가져다 주신 분이고, 모세와는 차원이 다른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붙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고 합니다.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부여된 소망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자랑입니다. 이것이 자꾸 흐려지니까, 신앙인들에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소망과 복음의 자랑을 끝까지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끝까지 붙잡고 있으면, 하나님의 집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집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집을 다스리신다는 겁니다. 끝까지 붙잡고 있으면, 다스리시는 예수님께서 돌봐주시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꾸 여기서 떠나서 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 되질 못합니다. 하나님의 집, 가족, 권속이 되어야지 예수님께서 우리를 돌봐주시고 다스려주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데, 우리가 자꾸 하나님의 집이 되지 못하니까 예수님의 돌보심을 받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에 나가서 세상의 돌봄을 받던지, 스스로 돌보던지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2천년 전 성경의 시대(박해의 때)보다 예수 믿기가 더 힘듭니다. 너무도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많습니다. 너무 바쁘고, 너무 세상 살기 힘듭니다. 이것은 우리의 잘못은 아니고, 공중권세 잡은 자들이 우리의 시선을 빼앗아 예수님께 집중하지 못하지 못하게 하려고 별 짓을 다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핍박을 받으면 오기가 생겨서 더 달려드는 법입니다. 누군가가 옆에서 핍박을 하면 이를 악물고 교회 나옵니다. 그런데 핍박이 없어지면 언제 예수를 믿었나 싶을 정도로 교회를 안 나옵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은 ‘calling’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는 얼마나 응답을 하고 있습니까? 특별히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인데, 그 어느 날보다 더 강렬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들리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하는 믿음으로, 그분의 부르심의 은혜로 신앙생활 한다면, 우리는 오늘 감사절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릴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여기에 나오시면, 어떠한 감사를 들고 오셨습니까? 오늘 저는 여러분과 어느 시인의 시 한 편을 나누면서 감사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정호승 시인의 손에 대한 예의라는 시입니다. 제가 주보에도 실어놓았으니, 집에 가셔서 몇 번 더 보시면서 감사절 주간에 감사에 대해서 깊은 묵상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가장 먼저 어머니의 손에 입을 맞출 것
하늘 나는 새를 향해 손을 흔들 것

일 년에 한번쯤은 흰 눈송이를 두 손에 고이 받들 것
들녘에 어리는 봄의 햇살은 손 안에 살며시 쥐어볼 것
손바닥으로 풀잎의 뺨은 절대 때리지 말 것

장미의 목을 꺾지 말고 때로는 장미가시에 손가락을 찔릴 것
남을 향하거나 나를 향해서도 더 이상 손바닥을 비비지 말 것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지폐를 헤아리지 말고
눈물은 손등으로 훔치지 말 것
손이 멀리 여행가방을 끌고 갈 때는 깊이 감사할 것
더 이상 손바닥에 못 박히지 말고 손에 피 묻히지 말고
손에 쥔 칼은 항상 바다에 버릴 것
손에 많은 것을 쥐고 있어도 한 손은 늘 비워둘 것
내 손이 먼저 빈 손이 되어 다른 사람의 손을 자주 잡을 것
-
정호승, '손에 대한 예의' 부분
-

마음이 흔들리고, 삶이 어렵고, 불평 불만이 쌓여갈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를 깊이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집, 가족, 권속이 되는 것이고, 그럴 때 그 집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을 극진하게 돌아봐 주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실 때, 바로 그 때 우리의 삶은 감사가 넘치는 삶이 됩니다. 다른 어떤 것의 돌봄은 우리에게 감사를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돌보심만이 우리에게 감사가 넘치게 합니다. 이것을 잊지 마시고, 이 감사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더 깊이 생각하시는 은혜가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른 길  (0) 2013.01.07
맡겨야 기쁘다  (0) 2012.12.18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  (0) 2012.11.12
신비를 체험하라  (0) 2012.11.07
성령에 취하라  (0) 2012.10.29
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2. 11. 18. 01:26

실사구시(實事求是): 사실로부터 옳은 결론을 얻어냄

 

()나라의 경제(景帝)에게는 유덕(劉德)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유덕은 하간(河間:지금의 하북성 하간현)에 봉하여지고 하간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고서(古書)를 수집하여 정리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진시황이 모든 책을 태워버린 이후 고서적을 찾아보기 어려웠기 때문에, 적지 않은 책들은 비싼 값을 치르고 사오기도 했습니다. 이렇다 보니, 많은 사람들도 하간왕 유덕이 학문을 좋아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선조들이 물려준 진()나라 이전의 옛 책들을 그에게 바쳤으며, 일부 학자들은 직접 하간왕과 함께 연구하고 정리하기도 했습니다. 한무제(漢武帝)가 즉위하자, 유덕은 한무제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과 고대의 학문을 연구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는데,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그는 학문 탐구를 즐길 뿐만 아니라 옛날 책을 좋아하며, 항상 사실로부터 옳은 결론을 얻어낸다 (修學好古, 實事求是)”라고 말했습니다. - 한서(漢書) 하간헌왕전(河間獻王傳) –

 

이스라엘에도 옛날 책이 있었으며, 학문 탐구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옛날 책은 구약이고, 그들은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 당시에 대표적인 학자들이었는데, 이들은 구약을 열심히 연구하여 나름대로 사회 체계와 질서를 잡아 나갔습니다. 우리는 신약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과 대립하는 모습을 자주 접하기 때문에 그들을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서 기자의 눈을 통해서 봐서 그런 것이지, 그 당시 실제 사회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잔치 집에서 윗자리를 차지해도 좋을 만큼 사회적으로 큰 명망을 얻으며 사는 최고의 지식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은 최고의 지혜였고, 그들이 하는 행동은 최고의 경건이었습니다. 그 당시 그 누구도 감히 그들이 하는 말에 도전을 하지 못했고, 그들이 하는 행동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시장 어귀에 나가면 인사 받느라 정신 없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늘 상석에 앉아 대접을 받았습니다. 요즘 시대에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사회 지도층과 별반 다르지 않은 유대 사회 최고의 지도층이었습니다.

 

그들 앞에 예수라는 인물이 나타났을 때 그들이 예수를 적대세력으로 간주하고 그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 앞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적잖은 당혹감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우리가 성서 기자의 눈으로 해석된 그리스도를 믿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신약 성서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 당시로 돌아간다면 우리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선포하고 믿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구약성경을 지독히도 열심히 탐구해서 나름대로 사회 체계와 질서를 잡아 나갔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왜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하간왕 유덕은 옛날 책을 좋아하고, 학문 탐구를 즐겼고, 그래서 결국 사실로부터 언제나 옳은 결론을 얻어냈다고 하는데,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하간왕 유덕 보다 못한 인물들이라서 그런 것일까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겁니다. 이들도 하간왕 유덕보다 더하면 더 했지 못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것은 아마도 그리스도 사건이 신비이기 때문일 겁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그리스도는 감추어진 분이라는 뜻입니다.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단순히 사실만을 탐구한다고 해서 그 비밀이 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런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12:25).

 

우리는 이것을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에서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생떽쥐베리는 자신이 비행기를 몰고 사막을 횡단하다가 불시착하게 된 가운데, 어떤 먼 별에서 지구를 찾아오게 된 어린 왕자를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로 <어린 왕자>를 전개합니다. 생떽쥐베리가 고장난 비행기의 엔진을 고쳐 보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그를 부르면서 "아저씨, 나 양 한 마리만 그려 줘."라고 부탁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사막 한가운데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생떽쥐베리가 깜짝 놀라면서 돌아보니 거기에 '어린 왕자'가 서 있었습니다. 어린 왕자가 초면에 그런 생뚱맞은 부탁을 한 이유는 그가 떠나온 작은 별에 두고 온 양이 그리워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생떽쥐베리는 일손을 멈추고 양 한 마리 그리기 시작했는데, 몇 장을 그려도 어린 왕자는 그때마다 '이 양은 병들어 보여', '이건 양이 아니야, 뿔이 달려 있잖아', '너무 늙었어.' 등등의 이유를 대면서 다시 그려 달라고 떼를 씁니다. 생떽쥐베리는 '어린 왕자'가 너무나 까다롭게 구는 바람에 지쳐서 나중에는 그냥 '동그란 구멍이 두어 개 뚫려 있는 나무 상자' 하나를 대충 그려 주고는, "네가 찾는 양은 바로 이 상자 안에 있어."라고 말해 줍니다. 하지만 '어린 왕자'는 그 그림을 받아 들자마자 "이게 바로 내가 갖고 싶었던 것이야."라고 하면서 얼굴이 환해집니다. 그리고는 그 그림의 상자에 있는 구멍을 들여다보면서 "양이 자고 있네."라고 하며 아주 만족스러워 합니다.

 

신비란 이런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상자 안에 들어 있는 양과 같습니다. 상상력(성령의 능력)이 없으면 결코 알아 볼 수 없는 형태로 말입니다. 그렇게 구약이라는 상자 안에 들어 있던 그리스도를, 평생 구약성경 연구에 삶을 바쳤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받아 든 신약성경에는 그리스도라는 말이 명시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이제는 그리스도가 드러난 것 같지만, 그것은 우리의 착각입니다. 여전히 그리스도는 신약이라는 상 자 안에 들어 있는 양과 같습니다. 상상력(성령의 능력)이 없으면 결코 사실(성서의 진술)로부터 옳은 결론을 얻어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예수가 곧 그리스도다라는 뜻입니다. 역사적 예수와 고백된 그리스도가 합쳐진 호칭입니다. 이것은 여전히 성경이라는 상자에 감추어져 있는 양과 같은 진술입니다. 당신은 진정, 성경의 상자 안에 감추어져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있습니까? 성서의 진술로부터 옳은 결론을 얻어내고 있습니까? 그러고 보니 이 질문 또한 감추어져 있는 질문이 될 수 있겠군요. 행운을 빕니다.

 

'고사성어와 신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자요수 인자요산 (智者樂水 仁者樂山)  (0) 2012.12.07
개과천선(改過遷善)  (0) 2012.11.26
한단지몽(邯鄲之夢)  (1) 2012.09.29
결초보은(結草報恩)  (0) 2012.09.24
대기만성(大器晩成)  (0) 2012.09.07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2. 11. 17. 07:06

울게 하소서

- 눅 22:54-62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에는 아주 유명한 아리아가 있다. 리날도의 연인 알마레나 공주가 적군에 포로가 되었을 때 부르는 아리아로 울게 하소서(Lascia ch'io pianga)가 그것이다. 그가 부르는 울게 하소서아리아의 가사는 이러하다. “나를 울게 내버려 두소서 / 비참한 나의 운명이여 / 나의 (잃어버린) 자유에 난 한탄하네 난 한탄하네 / 이 비애가 내 고통의 사슬을 끊게 해 주소서 / 그저 자비로서 / 나의 고통의… / 그저 자비로서 / 나를 울게 내버려 두소서 비참한 나의 운명이여 / 나의 (잃어버린) 자유에 난 한탄하네 난 한탄하네

 

본문에서도 이렇게 비통하게 우는 자가 나온다. 바로 베드로다. 일찍이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일러주셨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22:34). 이미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다짐 한 때였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 종교지도자 무리들에게 잡혀 가실 때 무턱대고 그 뒤를 따라 대제사장 관저 뜰까지 따라 들어갔다.

 

그곳의 분위기는 그렇게 험악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닥불 주위에 모여서 몸을 녹이고 있었고 잡혀 온 예수님의 뒤를 따라온 베드로도 은근슬쩍 모닥불 주위의 사람들 틈에 끼어 들었다. 만약 대제사장 관저 뜰의 분위기가 험악했다면 그렇게 한가롭게 모닥불 가에 모여 몸을 녹일 틈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모닥불 주위에 이렇게 모여 있었다는 것은 그곳의 분위기가 그렇게 험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분위기가 험하지 않은데 베드로는 거기서 오버하고 만다. 어떤 여종이 베드로를 지목하며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라고 했을 때 베드로는 펄쩍 뛰며 부인한다. 험악한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이라고 해서 그들이 베드로에게 예수님에게처럼 위협을 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써 세 번이나 부인하는 베드로의 모습은 어떻게 보면 참 미스터리다.

 

마지막 세 번째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을 때, 본문은 이렇게 전한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이 진술은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것이지만, 매우 미묘한 상황을 전달해 주는 중요한 진술이다.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관저를 뛰쳐나가 심히 통곡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돌이켜 자기를 쳐다보시는 예수님의 눈빛을 보고 베드로는 마음 속에서 뭔가 울컥했다. 만감이 교차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다.

 

신앙인 가운데 주께서 돌이켜 보실 때예수님의 그 눈빛을 보고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실 요즘 시대는 통곡의 눈물이 메마른 시대다. 악만 살아 있고, 눈물이 마른 시대다. 요즘에 사람들은 눈물도 소비적으로 흘리고 만다. 돈 몇 푼 때문에 눈물 흘리고, 자신의 욕망이 채워지지 않은 것 때문에 억울한 심정을 소비적으로 표출하고 만다. 그 뿐이다. 눈물을 흘리고 나서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다. 쇼핑하고 나면 스트레스가 풀리듯이, 바로 그렇게 소비적으로 눈물을 흘리고 나면 바뀌는 것이 하나도 없는, 그런 눈물을 흘리는 시대다.

 

그러나 베드로의 통곡의 눈물과 같은 눈물은 그 차원이 다르다. 통곡의 눈물은 우리의 죄악을 씻어주고, 우리의 교만을 씻어준다. 통곡의 눈물은 회개하게 하고, 용서하게 하고, 화해하게 한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회개하고 용서하고 화해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우리들은 회개, 용서, 화해의 눈물 흘리기를 꺼려한다. 아예 그러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잊은 지 오래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통회하는 자를 멸시치 않으신다”( 51:17). 왜 우리의 영혼과 삶을 새롭게 하는 통곡의 눈물을 흘리지 않는가?

 

통곡의 눈물을 흘리면 회개가 일어나고, 용서가 일어나고, 화해가 일어난다. 회개, 용서, 화해가 일어난 삶의 자리만큼 새롭고 화평한 곳이 어디 있겠는가! 통곡의 눈물을 흘릴 때 우리 입에서 리날도의 아리아 울게 하소서만큼 아름다운 선율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통회하는 마음, 통곡의 눈물을 흘리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울게 하소서! 통곡의 눈물이 메마른 이 시대에 눈물을 흘리는 자에게 복 있을지어다!

 

Posted by 장준식

사색(기도)하기 좋은 계절

 

테베를 정복한 오이디푸스 왕은 뒤늦게 자신이 죽인 라이오스 왕이 자기 아버지요 아내로 삼은 여인은 자기 어머니임을 알게 됩니다. 친부모도 알아보지 못했던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두 눈을 뽑아 버렸습니다. 의식을 잃었던 오이디푸스가 정신을 차리고 한 첫마디는 놀랍게도, “, 빛이여!”였습니다. 눈이 없는 사람이 빛이라니, 신하들이 무슨 의미인지 묻자 오이디푸스가 대답했습니다. “세상의 눈을 가진 그대들은 이 빛을 보지 못하리. 세상의 눈을 지닌 그대들은 이 빛을 알지 못하리.”

 

오이디푸스 왕이 본 빛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우리가 눈을 뽑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눈을 감기만 하면 됩니다. 눈을 감되, 내 안에 살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그 놀라운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드디어 가을이 왔습니다. 가을은 하늘이 높고 바람이 시원하고 낙엽 지는 계절이라 사색하기 좋은 계절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사색이란, 당연히 기도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겠죠. 여러분은 기도할 때 왜 눈을 감으십니까? 세상의 이꼴저꼴 다 보기 싫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기 위해서 감아버리는 것입니까? 습관처럼 눈을 감으십니까? 아니면, 눈을 감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입니까? 물론 어느 것이든 기도할 때 우리가 갖는 마음 자세일 것입니다.

 

가을을 맞아 제가 한 가지 제안하겠습니다. 이번 가을에는 기도할 때, 눈을 감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안 보이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한 번 보고 싶다는 소망을 담아서 기도해 보십시오. 오디이푸스 왕이 보았던 빛과 같은 것일까요?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보았던 빛과 같은 것일까요? 그 빛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빛으로 오신 예수님, 그 빛을 볼 수 있는 영성에 한 발짝 더 가가가는 가을, 사색의 계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긍정의 밥  (0) 2012.12.08
사회법정과 천국법정  (0) 2012.11.30
신품(信品)이 중요합니다!  (0) 2012.10.22
경이로운 하나님 나라  (1) 2012.10.02
탄식하는 기도  (0) 2012.09.17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11. 12. 11:33

2012 11 11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에베소서 6:10-24 (에베소서 9번째 시간)

제목: 영적 전쟁

 

오늘 말씀에 보면 기도에 대해서 나옵니다. 두 가지 기도가 나옵니다. 18절에 보면, 모든 기도 간구, 이런 것을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하라,고 나옵니다. 첫 번째 나오는 기도는 프로슈케라고 하는데, 일반적인 기도를 말합니다. 두 번째 기도는 우리 나라 말로는 간구라고 구분해 놓았는데, ‘데에시스라고 하는데, 구체적인 긴급한 탄원, 간청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일반적으로 일상적으로 기도하기도 하지만, 긴급한 일이 있을 때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탄원하고 간청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우리가 왜 기도합니까? 깨어 있으려고 기도합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기도하고 있는데, 기도하나 마나, 기도 하는 거나 기도하지 않는 거나 똑같다, 우리가 이런 말 한다. ‘눈뜨고 코를 베인다, 귀를 베인다, 눈 뜨고 당한다.’ 기도하면서 깨어 있어야 하는데, 깨어 있으려고 기도하는 중에서도 눈 뜨고도 당한다. 이 세상이 그렇습니다. 사탄 마귀가 그렇습니다. 사탄 마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우리를 능가하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기도해서 깨어 있으려고 해도 눈 뜨고 당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깨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눈 뜨고 당하는데, 우리가 깨어 있지 않고 자고 있을 때는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늘 깨어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오늘은 영적인 전쟁에 대해서 살펴 보고 있는데, 이 당시에는 영적인 전쟁이 굉장히 심했습니다. 이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을 때 어떻게 받았냐면, 로마의 수호신이 로마 사람들을 호위해 주고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위협한다고 생각되어서, 그 당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무신론자라고 고발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대해서는 우리가 무신론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우리가 신이 없는 상태로 살아가야 한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신을 만들어서 그것을 섬기면서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이 원하고 바라고 섬기는 신에 대해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신론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신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기에는 무신론자이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의 하나님으로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보기에는 무신론자이지만 우리는 참된 진리의 하나님을 믿는 참된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성찬식 같은 것을 보면서, 성찬식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시자라고 하는 것을 오해해서, ‘이 사람들은 살과 피를 먹는 식인종인가보다라고 생각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식인종의 풍습을 가지고 있다라고 오해를 받으면서 핍박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만나면 서로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리고 가족 아닌 사람들에게 형제 자매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족보도 없다 보다, 이들은 근친상간을 하나보다’,라고 오해 받으면서 엄청난 박해를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박해를 무릎 쓰고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영적인 전쟁터에 섰는데, 오늘 말씀에 보면 자기 자신이 선봉에 서서 영적인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19절과 20절 말씀을 보면, 이제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서 로마 법정에 가서 황제 앞에서 직접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앞에 섰을 때에 복음의 비밀을 황제 앞에서 당당하게 외칠 수 있도록,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가운데서는, 우리가 영적 전쟁을 잘 수행해 나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전신갑주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전신갑주를 입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 인간의 마음으로, ‘나는 전신갑주를 입었어라고 생각해 보았자, 그것은 다 뚫리게 되어 있습니다. 사탄 마귀는 우리보다 강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을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신 것을 입어야지, 전신갑주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전쟁터에 들어 섰고, 우리는 이미 영적인 전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신갑주를 입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쟁터에 나간 사람이 무기를 갖추지 않고 전쟁에 나간다는 것은 나 스스로를 포기하는 삶의 자세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보면, ‘전신갑주를 취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뜨뜨미지근한 신앙이 참 안 좋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인지 안 하는 것인지, 모른다는 것은, 단순히 저 사람은 왜 신앙생활을 저렇게 하나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핀잔을 듣기 때문에 안 좋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영적인 전쟁에 임했는데, 거기서 살아 남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무조건 이기는 겁니다. 이기려면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나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지금 적군이 나에게 몰려오니까, 그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이 전쟁에서 승리해야 살아 남을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 전쟁에서는 강한 사람이 살아남습니까? 누가 강한 사람입니까? 전쟁에서 강한 사람이 살아남습니까? 살아남은 사람이 강한 자입니까? 어느 사람이 강한 겁니까? 살아남은 사람이 강한 거지,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이렇게 치이고, 저렇게 치입니다. 창세기에서도 보면, 가인과 아벨이 싸웠는데, 세상 사람인 가인과 하나님의 사람인 아벨이 싸웠는데, 누가 이겼습니까? 가인이 이겼습니다. 이것을 보면 세상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 강한 사람이 살아남을 것 같은데,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은, 살아남은 사람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끝까지 살아남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는 끝까지 살아남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하고 세례 받고 하나님 앞에 나왔으면, 바로 거기서 고민할 것 없이, 곧바로 적극적인 자세로 영적인 전쟁에 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보면, 몸을 들어서 머리에 투구를 쓰고, 가슴에는 호심경을 하고, 흉배를 하고, 허리띠를 띠고, 이런 말을 하는데, 여기서 신체적인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리, , 복음, 믿음, 구원, 성령’,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보면, 세상이 요구하는 전신갑주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전신갑주가 너무도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세상에 나아가서 자기들이 잘 먹고 잘 살고, 세상에서 자기들이 하는 전쟁터에서 이기려고 할 때에, 세상이 요구하는 전신갑주는, ‘진리, , 복음, 믿음, 구원, 성령’, 이런 것이 아닙니다. ‘, 건강, 명예’, 또는 교묘하게 마음을 써서 악마의 마음으로 내가 저 사람을 무조건 이겨야 해뭐 이렇게 해서 저 사람을 끌어내리고, 거짓말 하고 그래서 이기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전신갑주는 이것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진리, , 복음, 믿음, 구원,’ 이런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 가운데서, 제가 두 가지를 참 좋아하는데, 다 필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첫 번째로 평안의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고 가라고 합니다. 우리가 신을 신고 어디든지 가는데, 그 가는 발걸음, 저 사람을 만나러 가는 발걸음이 도대체 무슨 발걸음인가라는 것입니다. 평안을 위해서, 화평을 위해서 가는 것입니까? 아니면 저 사람에게 따지러 갑니까? 세상 사람들은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고 가지 않습니다. 이 신에 가시가 들어서, 저 사람을 찾아가서 저 사람을 찌르는 말, 저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 저 사람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는 말을 가지고 싸우려고 신을 신고 가지, 우리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고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평안의 복음의 신발을 신고 다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화평을 전하고, 원수 되었던 사람들과도 다시 화해를 하고 그들의 친구가 되는 것, 이런 것이 바로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화목 되게 하셨던 것처럼, 그 복음을 우리가 신고, 찾아 다니는 사람들,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화평을 전하고, 화해하고, 복음을 전하고, 원수 되었던 것을 다 풀고 서로 평안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사회에서는 미움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범람입니다. 주체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마음 속에 밀려 오는 미움! 저 사람이 하는 말도 밉고, 저 사람이 하는 행동도 밉고, 그래서 저 사람하고 상종하기도 싫고, 이러한 것들이 우리 가운데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의 인간관계가 자꾸 나누어지고, 우리의 인생이 힘들고 어렵고, 심지어 우리 교회 공동체 내에서도 한 몸을 이루어서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런 것들은 바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우리가 취할 때 모두 물리칠 수 있는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꼭 입으시고, 평안의 복음의 신발을 꼭 신으십시오. ‘진리, , 믿음, 구원, 성령,’ 이런 것을 우리가 다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평안의 복음의 신발을 신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두 번째로,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성령의 검을 들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검을 의미합니다. 여성 분들을 잘 모르시겠지만, 로마군들도 처음에 싸울 때는 창 던지는 것 같이 서로 떨어져서 싸웁니다. 요즘에도 총싸움을 하기 때문에 떨어져서 싸웁니다. 그러나 제일 마지막에 하는 싸움은 뭐냐면, ‘백병전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단검을 들고 일대일로 얼굴을 맞대고 싸우는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멀리 떨어져서 총 싸움 할 때는 총으로 죽이는 것이니까 그냥 그렇지만, 내가 직접 일대일로 맞서서 싸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앞에서 그냥 이 사람의 땀 냄새, 피냄새 등 악독한 냄새가 많이 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쟁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습니다. 삶을 살아가시면서 우리가 얼마나 악한 냄새들, 죽음의 냄새들이 얼마나 많이 납니까?

  

그런데, 그 단검을 가지고 싸우는 치열한 백병전, 직접 맞대고 싸우는 그 전쟁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성령의 검을 갖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것을 좀 풀어서 설명하고 있는데, ‘성령의 검은 즉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다른 전신갑주들은 모두 방어용 입니다. 방어용이기 때문에 어떠한 능력이 나타난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냥 막는 것이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성령의 검은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방어용은 능력이 안 나타나는 것이 아니지만, 공격용은 능력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능력을 나타내야 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누가 병들었다,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유하는 겁니다. 그것이 능력을 나타내는 겁니다.

 

우리 삶 가운데 왜 능력이 나타나지 않느냐, 이렇게 불평불만 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성령의 검을 날마다 사모해 보십시오. 그러면 분명히 거기서 능력이 나타납니다. 정말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평안의 복음의 신발을 꼭 신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성령의 검을 사모해서 능력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서 영적인 전쟁에 임해야 승리할 수 있는 것이지, ‘나는 조용히 살래하면 안 됩니다. 내가 조용히 살고 싶다고 해서 영적인 전쟁이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전쟁 한 가운데 서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 전쟁에 적극적으로 임하셔서 살아남으십시오. 신앙생활 하실 때,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영적인 전쟁에 임하십시오. 그래서 끝까지 살아남으십시오. 그래야지 강한 자입니다. 그것이 강한 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영적인 전쟁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 힘들고 괴롭죠.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평안은 그냥 평안이 아니라, 폭풍 가운데서의 평안입니다. 영적인 전쟁을 하는 가운데서도, 우리가 전쟁 통에 있지만, 우리가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대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두려움과 떨림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평안을 내려 주실 겁니다. 예수님의 뒤를 잘 따라가면서 전신갑주를 취하면 끝까지 살아남아 승리하게 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그 구원의 은총을 누리시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설교를 음성으로 듣고 싶으시면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columbus.onmam.com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맡겨야 기쁘다  (0) 2012.12.18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0) 2012.11.19
신비를 체험하라  (0) 2012.11.07
성령에 취하라  (0) 2012.10.29
언약시대 VS 언약성취시대  (0) 2012.08.13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2. 11. 7. 05:56

어떤 크리스마스 이브

 

배고픔 때문에 일어났다.

냉장고 문을 열어 들어있는 음식을 꺼내

상함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코를 들이대는 것도 이젠 일상이다.

상하지 않은 것이 확인 된 음식들을 프라이팬에 모아 볶는다.

이름도 없는 볶음밥,

후딱 먹어치웠지만,

속이 편하지 않은 것이 어째 소화제를 먹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나름대로 낭만을 생각했는데,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건 볶음밥처럼 이름 모를

한숨 덩어리들뿐이다.

담배처럼 한 숨만 피우다,

집안이 좀 시끄러우면 괜찮아 질까 하고

보지도 않을 TV를 켰다.

집안을 채우고 있는 한 숨 소리와 TV 소리를 헤치며

이리저리 집안을 서성이면서 할 일을 찾아보았다.

어질러져 있는 방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손을 대기 싫었다.

이런 날은 사람 냄새가 나야 하는데,

방을 깔끔하게 치우고 나면,

어쩐지 사람 냄새가 가실 것 같아서였다.

햇살만이 창문을 통해 나를 찾아왔을 뿐,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기 예수를 맞으러 온 세상이 해를 넘어가고 있을 때쯤,

하루 종일 울리지 않은 전화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전화를 들어 내가 누른 건,

전화 번호가 아니라

볶음밥처럼 이름 모를

그리움이었다.

 

사람들은 잘 있는 것 같다.

소화제나 먹어야겠다.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느낌표  (0) 2012.11.19
천적  (0) 2012.11.19
서두르지 말라  (1) 2012.11.07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3  (0) 2012.11.07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2  (0) 2012.11.07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2. 11. 7. 05:54

서두르지 말라

 

서두르지 말라. 결코.

서두르지 말라.

은총을 받은 자로 있지 말라.

은총이 필요한 자로 있으라.

찾아 나서지 말라.

잃은 자로,

발견되어야 할 자로 있으라.

그러면

신의 은총이 임하리니.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적  (0) 2012.11.19
어떤 크리스마스 이브  (2) 2012.11.07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3  (0) 2012.11.07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2  (0) 2012.11.07
한 사람을 위한 고독  (3) 2012.11.07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2. 11. 7. 05:52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3

 

받은 사랑은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 사랑 때문에 아들을 낳고 싶었는데

그것이 일종의 믿음처럼 작용해서,

아버지!

그 믿음대로 아들을 낳았습니다.

 

처음에는 매우 낯설었습니다.

믿음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이처럼 낯선 경험인 것 같습니다.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대로 이루어졌다는 그 사실 때문이겠지요.

믿음이란 원래 우리 인간에게

낯선 경험이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들의 울음소리와

아들이 뿜어내는 부드러운 냄새는

비로소 그 낯설음의 껍질을 깨고

그 안에 담겨 있던 아버지에게 받았던 사랑의 기억을

떠오르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아버지도 저처럼

아들의 울음소리가 감미로운 음악처럼 들렸었겠죠.

아버지도 저처럼

아들이 뿜어내는 그 냄새,

실은 똥냄새와 땀냄새가 함께 뒹구는 냄새가

이 세상의 어느 향수보다도 향기로웠겠죠.

 

그래서 요즘엔 매우 행복합니다.

이 행복은 기쁨으로 가득찬 행복입니다.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떠도 아들이 있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와도 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매일 그 자리에 있는 아들을 통해

매일 그 자리에 계셨던 아버지를 봅니다.

아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아들은 제가 되고

저는 아버지가 되는 듯 합니다.

 

아버지!

오늘은 아들을 품에 한 번 꼭 안아보세요.

저 멀리 구름은 추억처럼 흘러갑니다.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떤 크리스마스 이브  (2) 2012.11.07
서두르지 말라  (1) 2012.11.07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2  (0) 2012.11.07
한 사람을 위한 고독  (3) 2012.11.07
노란과자와 빨간 과자  (0) 2012.11.07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2. 11. 7. 05:50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2

 

봄은 바람을 타고 먼저 올지,

하늘을 타고 먼저 올지,

나무를 타고 먼저 올지 모르지만,

春三月이 다가오면서

바람도 하늘도 나무도 봄내음을 흘리는 듯 합니다.

귀와 코와 몸이 곤두서는 까만 밤,

차 창문을 내리고 달려도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바람 소리와

부드러운 밤의 향기와

부드러운 공기의 기운이

온 세상에 펼쳐져 있는 듯 합니다.

 

아버지!

그런데 내 마음은 왜 이렇게 허전할까요?

허전이라는 단어가 미안해 할 만큼

이 말로도 담아내기 힘든 허전

심장을 둘러 내리 누르고 있는 듯 합니다.

 

상쾌한 바람만큼만,

푸르른 하늘만큼만,

우뚝 선 나무만큼만,

세상 시름을 안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느덧 상쾌해진 바라처럼,

어느덧 푸르러진 하늘처럼,

어느덧 우뚝 선 나무처럼,

나도 어느덧 내가되어 있기를 기도해 봅니다.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두르지 말라  (1) 2012.11.07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3  (0) 2012.11.07
한 사람을 위한 고독  (3) 2012.11.07
노란과자와 빨간 과자  (0) 2012.11.07
병신처럼 살아도 괜찮어  (0) 2012.11.07
Posted by 장준식